1936年 8月 9日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金메달
그가 남긴 첫 마디 “슬프다”
그는 正말 슬펐다.
42.195km를 쉼 없이 달려 第一 먼저 決勝線을 通過한 그가
第一 먼저 한 일은 고개를 숙이는 것.
施賞臺 위에서도 그는
고개를 숙였다.
獨立 後, 그는 말했다.
“獨逸 軍樂隊가 연주하는 기미가요보다 運動場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愛國歌 소리가 더 크게 들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기미가요(君が代): 日本 國歌(國歌)
‘손긔졍.’
2時間 29分 19秒.
當時 올림픽 最高記錄으로 마라톤 頂上을 차지한
金메달리스트가 사인북에 쓴 세 글字
日本 記者는 ‘왜 漢字로 이름을 쓰지 않냐’고 물었다
손기정이 答했다.
“한글이 劃數가 더 적다.”
거짓말이었다.
손기정의 거짓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日章旗가 나를 應援하였습니다.
큰 氣를 휘두르며 ‘6㎞ 남았다’고 외쳐….”
“施賞臺에 우리가라 國家(기미가요)가 嚴肅하게….”
日本은 그를 데려다 宣傳 音盤을 만들었다.
以後 손기정은 漸漸 알아들 수 없는 목소리를 낸다.
그때 들려오는 한마디 “크게 읽어.”
손기정은 끝내 “내 個人의 勝利가 아니라 우리나라 國民 全體의 勝利”라고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는 日本이었다.
京城에 있던 한 新聞社는 생각이 달랐다.
동아일보는 그달 13日子 新聞에서
손기정 가슴에 있던 日章旗를 지웠다.
그로부터 12日 後에도 또 한番….
이길용(當時 37歲) 體育 主任記者.
‘運數 좋은 날’을 쓴 小說家로 有名한 현진건 當時 社會部長 等.
이 일로 동아일보 記者들이 次例로 서울 鍾路警察署에 붙들려 갔다
동아일보는 武器 停刊(停刊) 處分을 받았다
“여름이었으니까 誘致窓 안으로 속옷과 와이셔츠를 여러 次例 들여보냈지요.”
“나오는 와이셔츠는 언제나….”
“피투성이였습니다.”
이 記者의 아내 정희선 女史
그래도 이 記者는 屈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나라의 아들은 손 選手를 倭놈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에
그 유니폼 日葬 마크에서 嚴肅하게도 衝擊을 받았다.”
“面소니 郡廳이니 또는 조재소니 等等의 寫眞에는 반드시 日章旗를 正面에 交替해 다는데
이것을 지우고 싣기는 不知其數였다.”
“이러한 우리로서 어찌 손기정 選手 유니폼에 鮮明했던 日葬 마크를 그래도 실을 수 있을 것인가.”
※新聞記者 手帖(1948年)
結局 동아일보는 279日 동안 停刊 當했다가
이듬해 6月 1日 다시 世上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記者는 解放이 될 때까지 다시 동아일보에서 일할 수 없었다.
1945年 事業部 次長으로 復職한 이 記者는 1948年 野球大會를 만든다.
單一 言論社 主催로 가장 긴 歷史를 자랑하는 黃金獅子期 全國高校野球大會다.
그가 없었다면 손기정뿐 아니라 메이저리그에서 韓國을 빛낸 스타도 없었을지 모른다.
但, 이 記者는 6·25戰爭 中 拉北 돼 그 後 消息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가 完全히 잊혀진 건 아니다.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 그해 最高 體育記者에게 주는 賞 이름은
‘이길용 體育記者賞’이다.
그는 1948年 ‘新聞記者 手帖’에 7쪽 分量으로 이렇게 後期를 남겼다.
“世上이 알기로는 伯林(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日章旗 抹殺事件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斜視(社是)라고 할까. 傳統이라고 할까.
方針이 日章旗를 되도록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동아일보에서 日章旗를 지우는 건 茶 마시고 밥 먹는 것처럼 흔한 恒茶飯事(恒茶飯事)였다.”
황규인 記者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