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김창혁 專門記者의 世上이야기]公開 自退宣言門 내붙인 前 연세대生 張惠英 氏|東亞日報

[김창혁 專門記者의 世上이야기]公開 自退宣言門 내붙인 前 연세대生 張惠英 氏

  • Array
  • 入力 2011年 12月 5日 03時 00分


코멘트

“純度 120% 自由 滿喫… 韓國社會 사랑하며 살아갈 것”

지난달 30일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장혜영 씨(24)는 서울 홍익대 부근 북카페 ‘그리다 꿈’에서 북콘서트 진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지난달 30日 두 番째로 만났을 때 張惠英 氏(24)는 서울 홍익대 附近 북카페 ‘그리다 꿈’에서 북콘서트 進行을 準備하고 있었다. 서영수 專門記者 kuki@donga.com
‘張惠英’이라는 연세대 新聞放送學科 4學年 女學生의 公開 自退 宣言文을 보는 瞬間, 나는 그 女學生보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다.

新聞엔 딸의 自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文字메시지로 ‘믿어야지. 네 人生인데’라고 應援했다는 句節이 있었다. 하지만, 아비의 마음이 어디 그렇기만 하겠는가.

登錄金을 마련하지 못할 形便도 아니다. 게다가 딸은 4年 全額 奬學金에 生活補助費까지 받고 있었다. 成績이 나쁜 것도 아니다. 1年 前부터 그만 다니겠다고 했다지만 그런 딸이 中央圖書館에 내붙인 ‘公開 離別便紙’가 아버지에겐 어떤 便紙로 다가왔을까? 아버지의 마음이 궁금했다.

20年 넘게 KCC에 勤務하다 只今은 驪州工場 附近에서 KCC 琉璃製品 運送仲介業體를 運營하고 있는 아버지 장우형 氏(58)는 “自退한다고 連絡이 온 날 술을 좀 많이 하긴 했지만 딸을 믿는다”라고 했다.

“걔가 가지고 있는 熱情, 그걸 믿는 겁니다. 熱情이 아니라 欲望만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말렸을 겁니다. 欲望은 自己도 해치고 南道 해치지만, 熱情은 自己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것 아닙니까? 政治的인 데 뛰어들어 大學入試에 反旗를 드는 것도 아니고…. 自己 熱情으로 熾烈하게 살아가지 않겠나 싶어서 쉽게 認定했습니다.”

딸을 만나봤다. 率直히 좀 놀랐다. 적어도 내겐, 아버지가 얘기한 그대로였다. 아버지가 딸을 잘 알고 있다는, 어쩌면 至極히 當然한 그 事實에 놀랐다. 엄마는 딸이 中學校에 入學한 直後 집을 나갔다. 宗敎 때문이었다. 딸은 以後 할머니 집에서 자라다 高校는 寄宿舍가 있는 京畿 河南의 韓國애니메이션高等學校에서, 그 다음엔 서울에서 大學生活을 했다. 아버지도 새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딸을, 딸의 熱情과 精神世界를 잘 알고 있었다.

―驪州에 가서 아버지를 만났는데 普通의 學父母들은 大部分 잊고 사는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

“그래도 딸 자랑은 멈추지 않으시죠? 그런 구석이 귀여우시니까. 어릴 때부터 ‘우리 아빠는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낚시를 하고 싶다고 조르니까 ‘너야 재미있겠지만 물고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느냐?’고 하더라고요. 뭔가를 所重하게 생각하는 感受性을 가르치려고 한 것 아닌가 싶어요. 엄마가 집을 나가고 난 다음 제가 高等學校 가면서부터 아빠랑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애니高 다닐 때 ‘靑少年 脫(脫)暴力 映畫祭’에 出品해 大賞을 받은 短篇도 아버지와 딸 얘기라던데….

“맞아요. 한父母 家庭의 외동딸과 아버지 얘기였어요. 父女의 生日이 같아 딸은 어릴 때부터 恒常 아빠랑 같이 生日을 지냈는데 커가면서는 親舊들과 보내고 싶어진 거예요. 아빠가 傷處받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지만 아빠는 서운해하죠. 딸은 딸대로 理解를 못해주는 아빠가 서운하고…. 딸이 조그만 沙果 이벤트를 열면서 끝나는 이야기예요.”

―스토리만 보면 特別히 눈에 띄는 話題作은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에겐 차고 넘치는 게 드라마고 이야기지만 그 當時 저한테는 切切한 얘기였어요. (이番에 自退 宣言文을 붙이고 난 다음) 新聞記事도 비슷해요. 사람들은 저를 보는 게 아니라 話題거리를 보는 거죠. 그게 슬퍼서 다시 앰프를 대놓고 마이크로 글을 읽었어요.”

그女는 ‘公開 離別宣言門’을 붙인 지 一週日 만인 지난달 22日 學校를 다시 찾아가 ‘새로운 戀愛를 始作하며’란 글을 朗讀했다.

“모니터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온 갖가지 느낌들이 가만히 傳해져 왔습니다. 共感, 疑訝함, 應援, 아쉬움, 歎息, 憤怒…. 그 하나하나의 마음들을 고스란히 느끼고자 했습니다. 무섭고 싫은 글들도. 어쩜 속事情도 모르고 그런 甚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을 수 있나 싶은 것들까지도 글字 하나 놓치지 않고 꼭꼭 씹어 삼켰습니다.… 제가 삶에 道가 튼 사람은 아니지만 이것 하나는 압니다. 只今 눈앞에 난生처음 보는 時間이 있습니다. 가슴이 뜁니다. 純度 120%의 爽快한 自由가 空氣 中을 떠돕니다. 者, 이제 뭘 할까요? 當分間 숨을 고르며 생각을 좀 하려 합니다. 하지만 年歲와 離別한 제가 새로이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相對는 바로 只今 여기의 韓國 社會입니다.”

―그렇게 아팠나. 하지만 自退를 個人的 選擇을 넘어 ‘社會的 質問’으로 던진 마당에 그 程度 反應들은 覺悟했어야 하지 않나.

“알고 있죠. 하지만 아는 것과 實際로 아픈 건 다르잖아요? 모진 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팍팍하게 살고 있는지, 그게 슬픈 거죠.”

―서울市立靑少年職業體驗센터(하자센터)에서 當分間 泰國 마사지를 가르칠 생각이라던데, 거기도 새로 사랑하기로 한 韓國 社會 中 한 곳인가.

“하자센터는 前부터 關與하던 곳이에요. 올 初 泰國 傳統舞踊을 배우러 갔다가 마사지를 알게 됐는데 正말 장난 아니게 좋았어요. 잘하는 사람이 만지면 제 몸을 알아요. 言語를 뛰어넘는 一對一 커뮤니케이션이죠. 感動이고 藝術이었죠. 그래서 여름에 배우러 갔어요. 英語로 進行하는 國立마사지學校 코스인데 아침 먹고 마사지하고, 點心 먹고 하고, 저녁에 復習하고… 스파르타式이었어요. 筋肉 이름을 英語로 외워야 하는데 미치겠더라고요. 如何튼 한 달 만에 試驗에 붙었어요.”

―아버지 말로는 英語를 잘한다던데….

“(웃으며) 그래도 二頭筋, 三頭筋, 가자미筋을 어떻게 알겠어요.”

―아무리 實業界 典型이라고 해도 新生 特性化高에서 연세대 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工夫는 어떻게 했나.

“元來는 韓國藝術綜合學校 映像院에 들어가려고 했어요. 애니고에서 映像을 專攻했거든요. 學院을 다녀본 적은 없지만 나름대로는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自尊心이 있었어요. 그런데 똑 떨어지더라고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몇 가지 길을 생각했죠. 첫째 大學을 안 간다, 둘째 睿宗을 다시 본다, 셋째 大學修學能力試驗을 친다. 문득 아버지의 落膽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어요. 그게 싫었어요. 9, 10, 11月 석 달 동안 미친 듯이 工夫했죠. 제가 延世大 募集公告를 보고 있는데 親舊가 지나가면서 ‘惠永아, 延世大 가니?’ 하면서 코웃음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새끼, 두고 보자’고 했죠. 그래도 學校가 修能을 준비시켜 주는 곳이 아니니까 周邊에선 不安해했어요. 하지만 전 不安하지 않았어요. 實業界 典型이라고 해도 修能 4個 領域 中 3個 領域은 2等級 以上이 돼야 해요. 緊張할 수밖에 없는 入試條件이지만 저는 反對로 1個 領域은 버려도 된다는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고마운 일이죠. 그런 面에서는 修能이 나름 平等하다고 생각해요.”

그女의 ‘公開 離別宣言門’李 大學의 存在 理由에 對해 根源的인 質問을 던진다는 點에서는 김예슬의 大字報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世上을 對하는 態度는 사뭇 달라 보인다.

올 3月 高麗大 經營學科를 自退한 김예슬은 ‘오늘 나는 大學을 그만둔다, 아니 拒否한다’는 大字報에서 大學을 ‘이름만 남은 資格證 장사 브로커’라고 規定한 뒤 “나의 敵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 憤怒와 슬픔, 抵抗意識으로 一貫된 宣言文이었다.

―서울대 유윤종, 高麗大 김예슬의 自退 宣言 뉴스를 봤나.

“서울대는 몰랐고, 김예슬은 봤어요. 離別便紙를 쓴 理由 中에는 김예슬 氏의 大字報도 들어있어요. 問題를 세게 날리는 데는 그 以上 잘할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너무 모진 것 같아요. 제가 戀愛便紙를 가지고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에요. 사귀다 보니까 이게 아닌데 싶어서 헤어지는 마당에 ‘넌, 아니야’ ‘넌 몹쓸 애야’ 하는 式으로 어떻게 그렇게 깡그리 집어던질 수가 있는 거죠?”

事實 그女의 離別便紙가 김예슬의 宣言文처럼 그렇게 모질었다면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只今 年歲에게 千(千)의 고마움과 千 하나의 아쉬움을 담아 作別을 高합니다. 고마워, 學校야. 근데 우리 이제 더는 아냐.”

“나는 나의 變心을 辯護하기 위해 한때의 戀人을 깡그리 몹쓸 存在로 전락시키는 離別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떠나는 까닭은 그저 여름이 가을로 變하듯 내 마음이 어느새 學校를 떠났기 때문입니다.”(이별편지 中)

―便紙에서 ‘내 마음이 學校를 떠난 理由는 또 다른 긴 事緣’이라고 했다. 한 살 아래 동생이 1級 精神遲滯障礙라고 들었는데, 동생의 狀況도 그 ‘긴 事緣’ 中 하나인가.

“제 모든 成長期 記憶은 동생과 함께 始作돼요. 동생은 제 世界의 全部였어요. 比喩가 아니라 物理的으로 그랬어요. 엄마가 집에 없으니까 저에게 산다는 것은 동생과 얼마나 하루를 잘 보내느냐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狀況을 首肯했어요. 힘든 건 동생한테 뭘 해줘도 애는 카오스라서…. 맛있는 걸 해줘도 걔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길이 없잖아요. 어쨌든 동생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工夫도 熱心히 했어요. 醫師가 되려고요. 그리고 洞네 어른들처럼 (或是 동생에게 危害를 加할지 모르는) ‘힘 있는 사람들’에게 特히 잘했어요.”

―동생은 只今 再活院에서 生活한다고 들었다.

“떨어지고 나서 한 달 뒤 가보니까 동생이 너무 잘 지내는 거예요. 그걸 보고 죽고 싶었어요. 그때까지 내 삶을 끌어온 前提가 동생이었는데 基本 前提가 깔끔하게 사라져버린 거잖아요? 내가 없어진 거죠. 그때부터 價値, 眞理에 對한 渴求 같은 게 始作됐는데, 事實 그런 게 없잖아요? 에잇 제기랄, 結局 趣向이구나라고 생각했죠.”

‘結局 趣向이구나’라는 말이 오래 남는다.

大學의 存在 理由에 對해서는 여러 가지 言明(言明)이 있다. 惠永이 다녔던 연세대만 해도 ‘眞理가 너희를 自由케 하리라’는 것이다. 眞理를 깨닫게 되면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孔子가 말한 不惑(不惑), 知天命(知天命), 耳順(耳順)과 비슷한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大學은 眞理를 찾기 위한 質問의 過程은 없고, 代身 싸구려 答을 외우라고 한다.

惠永은 ‘離別便紙’에서 그걸 이렇게 말한다. “大學이 問題입니까? 大學生에겐 그렇습니다. 高等學校가 問題입니까? 高等學生에겐 그렇습니다. 中學校는 中學生에게, 初等學校는 初等學生에게 問題입니다. 다 같고, 늘 같았습니다. 問題는 언제나 삶이었지요. 事實 삶은 問題가 아니라 質問입니다.”

연세대를 자퇴한 지 일주일 뒤 다시 학교를 찾아‘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며’라는 글을 공개했다. 장혜영 씨 제공
연세대를 自退한 지 一週日 뒤 다시 學校를 찾아‘새로운 戀愛를 始作하며’라는 글을 公開했다. 張惠英 氏 提供
質問이 사라진 大學에 對한 絶望. 그건 김예슬度 마찬가지였다.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大學(大學) 없는 大學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眞理인지 물을 수 없었다.”

―그래서 結局 ‘趣向’만 남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조용히 自退해도 되는 것 아닌가.

“昨年 中間考査 때부터 學校에 안 가고 日本 地震 現場으로, 泰國으로, 프랑스로 다녔어요. 처음엔 그냥 아무 소리 없이 사라지려고 했어요. 自退書 내는 것도 귀찮았으니까요. 그런데 한 1年 前부터 생각이 바뀌었어요. 다니면서 스스로 묻고 答하는 時間을 가졌는데 그렇게 그만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離別에도 禮儀가 있어야겠구나, 스스로 納得할 수 있는 理由가 없으면 나중에 이 커뮤니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겠구나, 왜 떠나는지에 對한 便(辯)을 남겨야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唐突한 邊夷다. 나중에 내가 옳았음을 반드시 보여주겠다는 얘기 아닌가.

김창혁 專門記者 c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