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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法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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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法社 本文

宗法社

宗法社

圓佛敎에서는 敎壇의 最高職位를 宗法社라 한다. 宗法社는 圓佛敎의 敎祖(敎祖)인 圓覺성존 소태산 大宗師로부터 法統을 繼承하는 州法으로서 敎壇을 主宰하고 轎軒에 依하여 對外的으로 圓佛敎를 代表하는 最高指導者의 地位를 갖는다.

宗法社의 資格

宗法社는 圓佛敎 轎軒에 依하여 6年을 1期의 任期로 民主的 節次와 公義로 選出된다. 法위等級이 正式出가위 卽 圓正師 以上이며 年齡이 74歲 以下를 被選資格으로 하여 圓佛敎의 最高 決議機關인 水位團會에서 在籍團員 2/3 以上의 贊成을 받아 野 選出되며 選出된 宗法社는 圓佛敎 在家出家 全校度의 代表로 構成된 中央敎議會에서 敎團的으로 推戴한다.

歷代 宗法社는 敎祖이신 소태산 大宗師(원기 1年∼28年) 의 涅槃에 따라 法統을 繼承하여 精算종법사(원기28年∼47年), 대산宗法社(원기47年∼79年), 坐産宗法社(원기79年∼ 原器91年), 慶山宗法社(원기91年 ∼ 原器103年), 電算宗法社(원기103年) ~ 現在 로 이어지고 있다.

宗法社가 됨으로써

圓佛敎에서는 宗法社가 됨으로써 敎團의 走法으로서 敎壇을 主宰하고 圓佛敎를 代表하는 最高 地位를 갖게 되며 圓佛敎의 出家裁可 前 敎徒의 敎化組織인 敎化段과 最上位團인 水位團의 團長이 되며 同時에 最高 決議機關인 水位團會議 議長을 맡아 敎壇을 統治하게 된다.
宗法社는 轎軒에 依하여 敎化를 主宰하고 이에 必要한 敎書 便政權, 敎規制定權, 人士任免卷, 榮典授與 및 赦免復權 等의 賞罰 施行權을 갖게 된다.

宗法社 補佐機關(法務室) : 宗法師 補佐事務를 管掌한다

① 宗法社 侍奉事務
② 法文 隨筆(法門 隨筆) 및 整理 事務
③ 宗法社 隨行(隨行) 事務
④ 宗法社 對外(對外)關係 및 儀典(儀典)業務
⑤ 宗法社 內命(內命)에 關한 事務
⑥ 元老會議(元老會議)에 關한 事務
⑦ 宗法室 各種 資料 및 備品管理 事務
⑧ 重要示唆(重要時事) 品의 및 上意下達(上意下達) 下意上達(下意上達) 事務
⑨ 愛敬相門(哀慶喪門) 事務
⑩ 其他 宗法社의 指示業務

圓佛敎 敎祖이신 소태산 大宗師(박중빈 1891~1943, 在任 原器 1年~28年 5月)는 1891年 陽曆 5月 5日 全羅南道 靈光에서 父親 朴星三, 母親 有頂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7歲부터 自然現象과 人生에 對하여 특별한 疑心을 품고, 스스로 道(道)에 發心하여 20餘 年 間 構圖苦行을 繼續下士 마침내 1916年 4月 28日, 큰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소태산 大宗師는 對角 後 “物質이 開闢되니 精神을 開闢하자”는 標語를 主唱하고, 먼저 迷信打破, 文盲退治, 貯蓄組合運動을 통해 混亂한 時局 속에서도 稀微해져 가는 民族의 魂을 일깨우고, 땅에 떨어진 人倫의 精神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새회상 創立의 經濟的 基礎를 세운 2萬 6千餘 坪의 정관평 方言公社, 人類救援을 위한 血性의 祈禱로 法界의 認證을 받은 法人成事, 法身佛 一圓相을 最高의 종지로 삼아 敎理와 制度를 制定한 봉래제법, 敎化, 敎育, 慈善의 中心地 益山 冢婦 建設 等 소태산 大宗師의 濟世經綸은 人類의 빛이요, 거룩한 酒稅 聖子의 生涯였습니다.

소태산 大宗師의 一代記는 大宗師 십상으로 整理해 볼 수 있으며,
이는 圓佛敎 創立의 큰 물줄기며 初期敎團社 이기도 합니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

大宗師 十常(一代記)

① 貫穿機衣裳
7歲頃부터 宇宙 萬有의 온갖 理致와 人間世上의 모든 일에 對해 스스로 큰 疑心을 일으키어 깊은 思索에 잠기게 됩니다.

② 三齡起源上
11歲 되던 해 門中의 時享祭에 參席했다가 神通 不可思議한 힘을 가졌다는 山神에 關한 이야기를 듣고, 山神을 直接 만나서 모든 疑心을 解決하리라는 希望을 갖고 삼밭再 마당바위를 오르 내리면서 氣道를 5年 間이나 知性으로 繼續합니다.

③ 驅使고행상
16歲 되던 해 봄에 古代小說 〈趙雄傳〉 읽는 소리를 듣는 中에 主人公이 道士를 만나 神通 妙術을 배워 크게 成功하고 모든 所願을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山神 만나기를 斷念하고 普通 人間과 똑같은 形象을 가졌다는 道士를 만나 모든 疑心을 解決해 보리라는 決心으로 스승을 찾아 온갖 苦行을 거듭합니다.

④ 江邊입正常
20歲가 넘자 山神과 道士는 이야기 속에서나 登場하는 架空的인 存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내 이 일을 將次 어찌할까?」하는 큰 걱정만 날로 쌓이게 되어, 偶然히 오르는 主誦을 외우기도 하고 때로는 等賞처럼 우두커니 한곳에 서서 깊은 冥想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24·5歲 卿을 전후해서는 一切의 思量分別을 잊어버리고 큰 鄭(大定)에 들게 되었고, 이 무렵 어느 여름날 선진포 나룻터에서 反日 동안이나 입정狀態에서 그대로 서 있기도 하였습니다.

⑤ 장항대各床
26歲 되던 1916年 4月 28日 이른 새벽, 東쪽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문득 마음이 밝아지고 모든 疑心이 一時에 다 풀리고 마침내 一圓의 眞理를 크게 깨치게 되었습니다.

⑥ 靈山方言上
깨달음을 얻으신 後 最初로 구인제者를 얻어 貯蓄組合을 設置하고 迷信打破·虛禮廢止·勤儉貯蓄·節約絶食·共同出役 等으로 새 生活運動을 展開하였습니다. 1918年(원기 3) 4月부터는 1年間 求人弟子들과 함께 靈山 앞의 갯벌을 막아서 干潟地 開墾事業을 展開하였습니다.

⑦ 穴人法印象
方言公社가 끝나자 이어서 구인제字로 하여금 마음을 統一시키고 공도精神을 살리기 위해 眞理 앞에 死無餘恨의 祈禱誓願을 올리게 하여, 1919年(원기 4) 8月 21日에 마침내 白紙穴인의 移籍이 나타나 새 回想創立의 法階 認證을 얻게 되었습니다.

⑧ 봉래製法上
穴人氣度를 끝낸 다음, 그 해 10月 經에 全北 扶安 봉래情事로 들어가 몇 몇 弟子들과 함께 修養과 보림에 主力하신 한 便으로는 創立 因緣들을 만나고 一圓相·謝恩 사요·삼학 팔調를 中心으로韓 敎理의 綱領을 制定하고, <朝鮮佛敎 革新論>, <修養硏究要論> 等의 初期敎書를 草案하였으며, 摠部 建設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⑨ 신룡前法上
마침내 機會가 무르익자 1924年(원기 9) 6月 1日에 益山市 보광사에서 不法硏究會 創立總會를 開催하고 敎文(敎門)을 公開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全北 益山郡 북일면 신룡리(現在 익산시 신룡동)에 摠部基地를 定하고 12月 頃에 1次 建設을 끝내고 이로부터 諸生擬勢의 敎化事業을 펴기 始作합니다.

⑩ 癸未涅槃像
日帝의 押釘 속에서 敎壇을 創立 발전시켜 오다가 1943年(원기 28) 癸未年 6月 1日 53歲로 涅槃에 드셨습니다.

精算 宋규

精算 宗法社(宋규 1900~1962, 在任 原器28年 6月 6日~47年 1月 23日)는 慶北 星州郡 초전면에서 父親 송벽조와 母親 移運外의 長男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九世의 뜻을 높이 품고 1917年 17歲 때에 全羅道로 건너와 井邑 화해리에서 소태산 大宗師의 親迎을 받고 弟子가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精算 宗法社는 소태산 大宗師의 首弟子로서 다른 求人弟子들과 함께 敎壇 創立에 積極 努力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敎理 制定에 寄與한 功勞로 인하여 소태산 大宗師는 그를 「우리 回想의 法帽」라고 까지 稱讚하였습니다. 以後로 精算 宗法社는 益山冢婦와 靈山聖地에서 後進養成에 注力하였고, 1943年(원기 28) 소태산 大宗師가 涅槃瑕疵 宗統을 이어 後繼 宗法社가 되었습니다.
日帝末期의 苛酷한 彈壓과 8·15의 混亂, 6·25의 受難 等을 克服하면서 소태산 大宗師의 盛業을 繼承 발전시켰으며, 8·15 光復 以後에 敎壇의 名稱을 「不法硏究會」에서 「圓佛敎」로 바꾸었습니다.

또한, 〈圓覺가〉·〈불법연구회 창건사〉·〈建國論〉 等을 비롯하여 많은 著述을 남겼으며, 圓覺가는 當時 敎徒들의 信仰·遂行心 鼓吹에 큰 役割을 하였고, 不法硏究會창건사는 圓佛敎 敎師의 基本이 되었습니다.
建國論은 現在까지도 學者들의 注目을 받고 있으며, 그의 法門을 收錄한 〈精算從事法語〉가 1972年(원기 57)에 發刊되어 圓佛敎 敎書의 하나로 쓰여지고 있는데, 〈大宗頃〉과 더불어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精算종법사는「원각성존소태산대종사비명」을 直接 執筆하여 소태산 大宗師를 後天開闢時代의 主世佛로, 圓佛敎를 酒稅宗敎로 闡明하였으며, 動員道理·同期連繫·동척事業의 삼동倫理를 통해 世界는 하나의 眞理, 人類는 한 家族 임을 말씀하였습니다.

원불교의 수행

삼동倫理

① 動員道理 ‥이 世上 모든 宗敎의 未來의 方向을 提示한 것으로, 많은 宗敎가 敎理를 서로 다르게 表現하고 있고, 門戶를 따로 세우고 있으며, 各 宗敎의 主張과 方便에 따라 敎化를 펴고 있으나 모든 宗敎의 根本的 眞理는 다 같이 一圓의 眞理에 바탕 해 있고, 窮極的인 目的도 다 같이 平和 安樂한 以上 世界 建設에 있으므로 모든 宗敎人은 비록 이름이 다르고 敎理와 制度와 儀式을 다르게 表現하고 있으나 그 根本은 하나인 것을 알아서 서로 大同 和合하자는 것입니다.

② 同期連繫 ‥모든 人類의 未來의 進路를 밝힌 것이다. 이 世上의 많은 人類와 無數한 生靈들이 그 이름은 서로 달리 하고 있으나 그 根本은 다 같이 한 기운으로 連繫되어 있는 同胞인 것을 알아서 서로 大同和合하고 相生尙火의 鮮姸을 맺어 함께 進級하자는 것입니다.

③ 동척事業 ‥人間 社會의 各種 事業이나 主義 主張이 때로는 서로 다르고 矛盾되는 것 같으나, 窮極的인 目的은 다 같이 살기 좋은 世上을 開拓하려는 데에 있고 또한 서로 힘이 되는 것을 알아서 大同 和合하자는 것입니다.

偈頌

한 울안 한 理致에,
한 집안 한 眷屬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一元世界 建設하자

삼동倫理는 一圓의 眞理에 바탕한 一元世界 建設의 具體的 方法인 것 입니다.

대산 김대거

대산 종법사(김대거 1914~1998, 在任 原器47年 1月 1日~原器79年 10月 31日)는 全北 鎭安郡 성수면 좌포리에서 父親 김인오와 母親 安敬信의 5男妹 中 長男으로 태어났습니다.어려서부터 氣象이 豁達하시고 性格이 大汎하시어 일찍부터 大人의 風貌가 엿보였으며 11歲에 만덕산 初選會에서 大宗師를 만난 後 圓佛敎에 出家하였습니다.
대산 宗法社는 精算 宗法社의 遺業을 繼承하여 敎書編纂, 삼동원 開拓에 注力하고, 海外敎化 强化, 訓鍊强化, 서울會館 建立, 교도 法위向上 運動 等에 敎團의 힘을 쏟았습니다. 33年間 宗法社로 在任하면서 開敎半百年 記念盛業推進, 敎團創立 2代 및 소태산 大宗師 誕生 百周年 記念盛業 等을 主導하였고, 世界的인 宗敎聯合運動을 提唱하였습니다.
대산 宗法社는 卓越한 智慧와 强力한 指導力으로 敎壇을 이끌면서 敎勢를 4~5倍 발전시켰고, 1994年(원기 79) 11月에 坐産 이광정에게 宗法社稷을 讓位하고 商社로 推戴되었습니다.

轎軒上에는 宗法社稷을 任期制로 施行하고 上司制度를 施行하게 되어 있었지만, 敎壇的 情緖와 强力한 指導力 때문에 涅槃 때까지 宗法社稷을 遂行해주기를 바라는 輿論도 많이 있어, 上司第 施行은 대산 종법사의 斷乎한 決斷力이 必要한 것이었습니다. 〈敎理實踐도해〉·〈정전대의〉등을 著述하여 敎徒들의 工夫길을 밝혀주었고, 그 外에도 여러 卷의 法文集이 發行되었습니다.
圓佛敎는 대산 宗法社에 이르러 國內 6大 宗敎로 발돋움하고 世界 宗敎의 基礎를 닦게 되었습니다.

대산 종법사 이미지

偈頌

眞理는 하나, 世界도 하나,
人類는 한家族,
世上은 한일터,
開拓하자 하나의 世界

오늘날 우리 人類는 모든 面에서 서로 울을 트고 넘나들며 合力하지 않으면 안 될 時期에 접어들었으며
또한 現 世界는 漸次 어두운 데서 밝은 데로 옮기는 過程에서 아직 秩序를 찾지 못하고 彷徨하고 있는 狀態입니다.
이 世界는 人類와 一切 生靈이 함께 사는 큰 집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寫生이 내 몸이요, 十方을 내 집 삼아 동척事業을 하되 不法을 活用하고 無我奉公하여 全 人類가 共生共榮하는 길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坐産 이광정

坐産 宗法社 (이광정 1936~, 在任 原器79年 11月 6日~91年 11月 3日)는 1936年 3月 15日에 全南 靈光郡 대마면 복평리에서 父親 鑛山 이삼공과 母親 狂楕圓 이공원의 5男妹 中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冊 읽기를 좋아하고, 事物에 對한 硏究心이 强하고, 한番 하기로 한 일은 반드시 이루어 내고야 마는 정성심으로 어른들의 寵愛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집안의 어른인 호산 이군일 先進의 案內로 精算 宗法史를 뵙고 精算 宗法社의 자비로운 成案과 밝으신 法文을 받들면서 그 동안 마음속으로 혼자 苦悶해 오던 人生의 많은 問題에 對한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出家의 決心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坐産 宗法社는 日課로 得力한다는 標準으로 스승님을 向한 絶對的인 神聖과 쉼 없는 精誠으로 工夫와 事業을 竝行하여 大衆의 標準이 되었고, 소태산 大宗師를 비롯, 歷代 宗法社의 經綸을 이어 人材育成, 體制整備, 經濟基盤確立, 敎書飜譯, 放送局 設立, 國際敎化 等 敎團 各 分野의 成熟과 世界的 宗敎로의 位相을 높였습니다.

特히 裁可, 出嫁가 다 함께 맑고 밝고 薰薰한 삶을 나누고 創造할 수 있는 敎化, 敎育, 慈善, 文化事業의 基盤을 견고히 하고자 總力을 기울였습니다.

원불교의 수행

慶山 장응철 宗法社法文 바로가기

慶山 宗法社는 1940年 全南 新安郡 장산면 다수리에서 父親 장상봉 先生과 母親 김출眞玉 女史의 2男 1女 中 長男으로 出生했다. 어려서부터 溫和하고 너그러운 性品을 지녀 周圍 因緣의 사랑과 期待를 받으며 成長하였다.

7歲 때에 父親의 涅槃으로 홀어머니를 받들면서 學業과 生業을 함께 꾸려갈 方道를 생각할 程度로 成熟하고 度量이 넓은 철든 少年時節을 보냈다. 기울어진 加勢를 다시 세워 어머님을 便安히 모시고자 誠實히 살던 慶山 宗法社의 人生을 바꾼 것은 圓佛敎와의 만남이었다.

21歲에 圓佛敎 入門

原器45年 21歲 되던 해, 全州에 居住하는 姨從兄인 최덕근 先生께서 圓佛敎에 歸依하라는 懇曲한 請을 받고 精算從事를 뵙게 되면서 ‘政治家가 되려는 꿈’을 접고 圓佛敎에 入門과 同時에 專務出身을 誓願했다.

원불교의 수행
慶山 장응철 宗法社

오직 한 길

4年 동안 校正員 總務部 서기를 마치고 原器49年 圓光大學校 圓佛敎學科에 入學, 原器53年 卒業했다. 첫 發令地는 敎壇의 後進들을 養成하는 靈山船員. 敎團 창교의 얼이 배어있는 靈山聖地의 敎育環境 속에서 自己發展을 위해 배우는 마음을 놓지 않았으며, 信仰과 遂行에 對한 積功에 쉼이 없었다. 이런 그의 努力은 敎政院長 在任 中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外出하고 돌아오면 꼭 새 冊을 사와 正讀하고, 고산 이운권 縱射에게 배운 붓글씨는 書法 冊을 놓고 硏磨를 하는 等 끊임없이 硏究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5年間의 靈山生活을 마치고 原器58年 校正員 總務部 課長으로 赴任했다. 이 時期는 矯正 全般의 狀況을 把握하는 契機가 되었다.

慶山 宗法社는 原器60年 錦江같이 굳은 志操로, 白玉같이 맑은 貞節로 남김없이 오직 이 길에 穴深血性을 바치기로 決心하고 正南 誓願을 했다.

原器62年부터 5年間 서울事務所 事務長으로 勤務했다. 이 時節은 慶山 種法師에게 政治·經濟·文化의 中心地인 서울에서 見聞을 넓히고 對人關係를 넓혀 敎團 發展에 寄與할 수 있는 眼目을 키울 수 있는 契機가 되었다.
原器67年 校正員 總務部長에 赴任, 循環制 人事制度를 정착시킨 後, 原器73年 첫 敎化丈人 淸州敎區長에 赴任했다. 淸州敎區長으로 赴任, 敎化發展에 努力하는 한便 敎區의 宿願事業이었던 敎區廳 新築佛事를 推進하였다.

原器76年 靈山大學 學長 兼 靈山事務所長에 就任했다. 敎育發展計劃에 따라 靈山大學을 政府가 認定하는 4年制 正規大學으로 昇格夏期 爲해 血性을 다한 結果 原器77年 上級學校 入學學歷 認定學校로 指定받아 優秀한 人材를 養成할 수 있는 法的인 裝置를 完備하는 等 人材養成과 敎育發展에 心血을 다하였다.
原器78年 4年制 正規大學을 準備하기 위한 建築佛事를 始作했다. 2年 동안 40億원의 佛事를 圓滿히 마쳐 敎團의 敎育政策에 重要한 功績을 나투었다.

原器 79年 서울敎區長에 赴任하여 敎團 敎化의 中心地인 서울에서 서울 大法會와 洞네 敎化, 火曜 工夫房을 열어 서울敎化 發展에 誠心을 다하였고, 原器85年 校庭을 責任지는 矯正院長에 赴任, 校正員 電算化를 이루어냈고 靈光 核廢棄場 設置를 막아냈다.

原器73年 정수위單元에 被選되었고, 79年, 85年에 정수위單元에 再選되었으며, 原器 85年 從事 敍勳을 받았다. 敎政院長 在任時 每週 月曜照會 때 慶山 宗法社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일부러 照會에 參席하는 사람이 있을 程度로 대산從事의 法文을 오랫동안 硏磨하면서 說하는 法文은 大衆들에게 깊은 感銘과 울림을 주었다.

原器88年 中央中道訓鍊院長에 赴任, 專務出身 訓鍊을 體系化 하고, 홈페이지 開設, 리모델링을 하는 等 訓鍊與件 改善에도 寄與하였으며, 原器 91年 宗法社에 推戴되었다.

敎法에 바탕한 古經 解釋 卓越

慶山 宗法社는 一圓相書院門 《마음달 虛空에 뜨다》, 懺悔文 《罪業으로부터의 自由》을 親低下였고, 불조요경 中에서 金剛經 《生活 속의 金剛經》, 般若心經 《自由의 언덕》, 수심결, 牧牛十道송《마음소 길들이기》, 古經《老子의 世界》《육조단경》等을 解釋하였으며, 慶山宗法社의 信仰과 遂行이 그대로 배어 있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電算 김주원 宗法社法文 바로가기

電算 宗法社는 1948年 10月 10日 全北 全州市 교동 2街 92番地에서 부친 除算 김제암 先生과 母親 上楕圓 민묘先行 女史의 3男 4女 中 次男으로 出生하였다. 父親은 平凡하고 每事에 남에게 베풀기를 즐겨하였으며 好人이라는 評判을 들었다. 알뜰하고 정갈하며 明敏한 母親은 典型的인 韓國의 어머니 喪을 갖추었으며, 平素 어떤 狀況에서도 앞길을 막는 말씀은 한 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自身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自立心이 剛하여 父母로부터 工夫하라는 말을 한 番도 듣지 않았으나 全州 中央國民學校와 北中學校, 全州高等學校를 優秀한 成績으로 卒業한 秀才였다. 어렸을 때 史家가 敎堂 隣近에 있어서 平素 圓佛敎에 對한 좋은 印象을 가지고 있었던 電算 從事는 高等學校 2學年 때 교동교當 招待 學生會長이던 親舊의 勸誘로 入敎하였다. 入校 後 交戰을 보고 交戰의 말씀들이 많이 마음에 와 닿았으며, 宗敎를 갖는다면 平生 圓佛敎에 入門하여 白玉無瑕(白玉無瑕)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電算 從事는 처음엔 出家에 對한 생각은 크게 없었으나, 김기원 敎務가 出嫁한다고 해서 自然스럽게 出嫁라는 이야기를 接하게 되었다.

專務出身 서원

高等學校 3學年 여름放學 때 신도안에 가서 대산 종사를 뵙고 沈水 수발도 들고 하면서 自然스럽게 出家에 對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內面으로는 平素에 性格이나 氣質上 不足한 點이 많아 보여 마음을 스스로 고쳐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그러한 마음이 專務出身을 서원한 根幹이 되었고, 菌楕圓 신제근 從事의 至極한 願力과 功德으로 出嫁를 하게 되었다.

전산 김주원 종법사 사진
電算 김주원 宗法社

오직 한 길

專務出身을 하면서 우리 法이 다 마음에 좋았고 現代社會에 맞는 것 같은데 다만, 六道尹淮만 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菌楕圓 縱射에게 말하니 菌楕圓 從事는 “그것이 眞理의 한 축인데 빠지면 되겠느냐.”는 깨우침을 주었고, 그 後 因果나 六道에 對한 참다운 믿음은 出家 後 受學하면서 더 깊어지게 되었다.

修學過程 中 大學 2學年 여름放學 때 신도안에서 대산 종사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때 대산 從事의 隨筆法文 노트를 보면서 敎壇에 綿綿히 흐르는 精神的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를 契機로 그 以前까지 늘 文字와 知識으로만 理解되어왔던 여러 情況과 敎理를 새로운 視角으로 보게 되었으며, 敎理를 硏磨하는데 있어서도 대산 從事의 停戰大義와 敎理實踐圖解의 法文을 通해 敎法에 對한 精神的인 根源을 體得하였다. 그러면서 다시 交戰을 보니 소태산 大宗師의 本意와 經綸이 그대로 溶解되어 받아들여졌다. 敎理工夫를 하면서 理解가 안 되는 部分은 끊임없는 醫두硏磨를 통해 體得해 나갔고, 解得이 안 되는 部分은 스승께 여쭙기도 하면서 해득이 될 때까지 硏磨하고 積功하였다.

또한 善에 對해서는 처음에는 呼吸이 잘 안되어 苦戰을 했었다. 20代에 力技(逆氣)가 되어 丹田晝를 제대로 못하게 되어 요가로 풀기도 했으나, 呼吸이 자연스럽게 잘되지 않아 오랫동안 苦生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中 40代 以後부터 徐徐히 斷電株價 되었고, 50代부터는 丹田晝가 잘되고 選定이 漸漸 깊어져 갔다.

敎壇에 살면서 잊지 못 할 두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中 하나는 軍服務를 마치고 나올 때의 心境이다. 그 때 氣分은 하늘을 날을 것 같고 崑崙(崑崙)도 한 품에 안을 것 같았으며, 今方 成佛을 할 것 같았었는데, 內心 成佛하는 기쁨이 이런 것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때이다. 또 하나는 如來의 涅槃相을 直接 곁에서 親見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산 從事께서 涅槃相을 나투었을 때 親見할 수 있었던 일은 가장 記憶에 남는 각별한 일 中의 하나였다.

除隊 後, 대산 從事의 祈禱生活에 對한 法文을 直接 받들고 나서 信心이 變化하는 體驗을 했다. 摠部에서 在職할 때는 날마다 夕食 後 恒常 소태산 大宗師 聖塔에 가서 영주와 祈願門 그리고 讀經을 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祈禱가 아니라 그냥 習慣的으로 祈禱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現在의 마음 狀態를 事實대로 告하고 書院과 信心과 공심과 工夫心이 나날이 살아날 수 있도록 念願하는 祈禱를 했다. 또한 校正員 在職 時 茶山 김근수 敎政院長을 10年間 侍奉하면서 眞理와 心空(心功)에 對한 배움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遂行精進의 過程을 지나오면서 40代 初盤에 鍾路敎堂에서 交易에 臨할 때는 스스로도 不退轉의 書院과 信心이 確然하게 서있음을 自身하게 되었다. 專務出身에 對한 기쁨을 느끼고 永生동안 내가 갈 길이 오직 이 한 길이라는 것을 確信하고, 어느 해 新年에 신제근 縱射에게 感謝의 人事를 올렸다.

敎化部長이였던 法楕圓 김이현 종사를 補佐하고 敎化課長으로 在職하면서, 敎化團 關係와 교도法위等級에 따른 段階別 訓鍊의 體系를 잡는 實務를 擔當하였다. 現場敎化의 첫 赴任地였던 銅錢株敎堂은 內心 걱정도 많았으나 스승들과 左右同志들의 胡鹽 속에 大過없이 잘 살았다. 校正員 總務部長을 歷任했던 6年 동안은 坐産 宗法社의 諭示를 받들어 法規를 整備하고 死藏되어 있던 法規들을 實行하는데 精誠을 들였다. 特히 스승의 經綸을 받들어 報恩을 한 일은 海外宗法社 制度를 轎軒에 담게 된 것이다. 轎軒改正에 渾身의 힘을 다하여서인지 그때는 이 敎壇에 와서 해야 할 일을 다한 것 같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었다. 또한 대산種四法語 編修委員會 篇數委員長으로서 5年동안 『대산種四法語』를 編纂하는데 精誠을 다하였다. 京畿仁川敎區長으로 奉職할 때에는 敎區의 行政 體系를 세웠으며, 敎化後援財團을 設立하여 敎區 內 開拓敎堂 支援 및 靑少年敎化와 軍宗敎火, 社會福祉 및 一般敎化 後援財團으로서의 財政的인 基盤을 다졌으며, 敎區廳 建立을 위한 基礎와 礎石을 다졌다.

原器 91年 7月 第152回 臨時水位團會에서는 法位를 正式出家위로 事情하고 그의 功德을 기리며 從事의 法훈을 徐薰하기로 決意하였다. 以後 靈山選虐待 總長으로 在任 中 原器103年 9月18日 第234回 臨時水位團會에서 宗法社로 選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