電算 김주원
宗法社法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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電算 宗法社는 1948年 10月 10日 全北 全州市 교동 2街 92番地에서 부친 除算 김제암 先生과 母親 上楕圓 민묘先行 女史의 3男 4女 中 次男으로 出生하였다. 父親은 平凡하고 每事에 남에게 베풀기를 즐겨하였으며 好人이라는 評判을 들었다. 알뜰하고 정갈하며 明敏한 母親은 典型的인 韓國의 어머니 喪을 갖추었으며, 平素 어떤 狀況에서도 앞길을 막는 말씀은 한 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自身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自立心이 剛하여 父母로부터 工夫하라는 말을 한 番도 듣지 않았으나 全州 中央國民學校와 北中學校, 全州高等學校를 優秀한 成績으로 卒業한 秀才였다. 어렸을 때 史家가 敎堂 隣近에 있어서 平素 圓佛敎에 對한 좋은 印象을 가지고 있었던 電算 從事는 高等學校 2學年 때 교동교當 招待 學生會長이던 親舊의 勸誘로 入敎하였다. 入校 後 交戰을 보고 交戰의 말씀들이 많이 마음에 와 닿았으며, 宗敎를 갖는다면 平生 圓佛敎에 入門하여 白玉無瑕(白玉無瑕)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電算 從事는 처음엔 出家에 對한 생각은 크게 없었으나, 김기원 敎務가 出嫁한다고 해서 自然스럽게 出嫁라는 이야기를 接하게 되었다.
專務出身 서원
高等學校 3學年 여름放學 때 신도안에 가서 대산 종사를 뵙고 沈水 수발도 들고 하면서 自然스럽게 出家에 對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內面으로는 平素에 性格이나 氣質上 不足한 點이 많아 보여 마음을 스스로 고쳐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그러한 마음이 專務出身을 서원한 根幹이 되었고, 菌楕圓 신제근 從事의 至極한 願力과 功德으로 出嫁를 하게 되었다.
電算 김주원 宗法社
오직 한 길
專務出身을 하면서 우리 法이 다 마음에 좋았고 現代社會에 맞는 것 같은데 다만, 六道尹淮만 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菌楕圓 縱射에게 말하니 菌楕圓 從事는 “그것이 眞理의 한 축인데 빠지면 되겠느냐.”는 깨우침을 주었고, 그 後 因果나 六道에 對한 참다운 믿음은 出家 後 受學하면서 더 깊어지게 되었다.
修學過程 中 大學 2學年 여름放學 때 신도안에서 대산 종사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때 대산 從事의 隨筆法文 노트를 보면서 敎壇에 綿綿히 흐르는 精神的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를 契機로 그 以前까지 늘 文字와 知識으로만 理解되어왔던 여러 情況과 敎理를 새로운 視角으로 보게 되었으며, 敎理를 硏磨하는데 있어서도 대산 從事의 停戰大義와 敎理實踐圖解의 法文을 通해 敎法에 對한 精神的인 根源을 體得하였다. 그러면서 다시 交戰을 보니 소태산 大宗師의 本意와 經綸이 그대로 溶解되어 받아들여졌다. 敎理工夫를 하면서 理解가 안 되는 部分은 끊임없는 醫두硏磨를 통해 體得해 나갔고, 解得이 안 되는 部分은 스승께 여쭙기도 하면서 해득이 될 때까지 硏磨하고 積功하였다.
또한 善에 對해서는 처음에는 呼吸이 잘 안되어 苦戰을 했었다. 20代에 力技(逆氣)가 되어 丹田晝를 제대로 못하게 되어 요가로 풀기도 했으나, 呼吸이 자연스럽게 잘되지 않아 오랫동안 苦生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中 40代 以後부터 徐徐히 斷電株價 되었고, 50代부터는 丹田晝가 잘되고 選定이 漸漸 깊어져 갔다.
敎壇에 살면서 잊지 못 할 두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中 하나는 軍服務를 마치고 나올 때의 心境이다. 그 때 氣分은 하늘을 날을 것 같고 崑崙(崑崙)도 한 품에 안을 것 같았으며, 今方 成佛을 할 것 같았었는데, 內心 成佛하는 기쁨이 이런 것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때이다. 또 하나는 如來의 涅槃相을 直接 곁에서 親見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산 從事께서 涅槃相을 나투었을 때 親見할 수 있었던 일은 가장 記憶에 남는 각별한 일 中의 하나였다.
除隊 後, 대산 從事의 祈禱生活에 對한 法文을 直接 받들고 나서 信心이 變化하는 體驗을 했다. 摠部에서 在職할 때는 날마다 夕食 後 恒常 소태산 大宗師 聖塔에 가서 영주와 祈願門 그리고 讀經을 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祈禱가 아니라 그냥 習慣的으로 祈禱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現在의 마음 狀態를 事實대로 告하고 書院과 信心과 공심과 工夫心이 나날이 살아날 수 있도록 念願하는 祈禱를 했다. 또한 校正員 在職 時 茶山 김근수 敎政院長을 10年間 侍奉하면서 眞理와 心空(心功)에 對한 배움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遂行精進의 過程을 지나오면서 40代 初盤에 鍾路敎堂에서 交易에 臨할 때는 스스로도 不退轉의 書院과 信心이 確然하게 서있음을 自身하게 되었다. 專務出身에 對한 기쁨을 느끼고 永生동안 내가 갈 길이 오직 이 한 길이라는 것을 確信하고, 어느 해 新年에 신제근 縱射에게 感謝의 人事를 올렸다.
敎化部長이였던 法楕圓 김이현 종사를 補佐하고 敎化課長으로 在職하면서, 敎化團 關係와 교도法위等級에 따른 段階別 訓鍊의 體系를 잡는 實務를 擔當하였다. 現場敎化의 첫 赴任地였던 銅錢株敎堂은 內心 걱정도 많았으나 스승들과 左右同志들의 胡鹽 속에 大過없이 잘 살았다. 校正員 總務部長을 歷任했던 6年 동안은 坐産 宗法社의 諭示를 받들어 法規를 整備하고 死藏되어 있던 法規들을 實行하는데 精誠을 들였다. 特히 스승의 經綸을 받들어 報恩을 한 일은 海外宗法社 制度를 轎軒에 담게 된 것이다. 轎軒改正에 渾身의 힘을 다하여서인지 그때는 이 敎壇에 와서 해야 할 일을 다한 것 같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었다. 또한 대산種四法語 編修委員會 篇數委員長으로서 5年동안 『대산種四法語』를 編纂하는데 精誠을 다하였다. 京畿仁川敎區長으로 奉職할 때에는 敎區의 行政 體系를 세웠으며, 敎化後援財團을 設立하여 敎區 內 開拓敎堂 支援 및 靑少年敎化와 軍宗敎火, 社會福祉 및 一般敎化 後援財團으로서의 財政的인 基盤을 다졌으며, 敎區廳 建立을 위한 基礎와 礎石을 다졌다.
原器 91年 7月 第152回 臨時水位團會에서는 法位를 正式出家위로 事情하고 그의 功德을 기리며 從事의 法훈을 徐薰하기로 決意하였다. 以後 靈山選虐待 總長으로 在任 中 原器103年 9月18日 第234回 臨時水位團會에서 宗法社로 選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