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州에서 코치 生活을 하고 있는 조진호 ⓒ濟州 유나이티드
歷史는 ‘萬若’이라는 家庭을 容納하지 않는다. 그러나 人生의 時計錘를 다시 돌렸으면 하는 아쉬운 場面들은 늘 存在하기 마련이다. 아직도 많은 蹴球팬들 사이에서 膾炙되고 있는 '悲運의 天才' 조진호(36) 亦是 그 中心에 서 있는 人物이다. 조진호라는 이름 석 字 앞에 悲運의 天才라는 修飾語가 놓이는 건 그가 보여준 才能이 너무나 强烈했기 때문이다.

韓國型 판타지스타의 登場

반야월 初等學校 4學年 때 처음 蹴球를 始作한 조진호의 첫 포지션은 쉐도우 스트라이커 或은 攻擊型 미드필더였다. 天賦的인 得點 感覺과 特有의 카리스마를 지닌 조진호는 每 競技마다 單身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며 勝利의 마침標를 찍었다. 사람들은 漸次 그의 魅力에 흠뻑 빠지기 始作했고, 韓國型 판타지스타의 出現이라고 입을 모았다.

"蹴球를 始作하게 된 契機요? 글쎄요...내가 어릴 적부터 自身 있게 할 줄 아는 것은 蹴球 밖에 없었어요.(웃음) 蹴球는 마치 사랑과도 같았죠. 但只 蹴球가 좋아서, 그 以上도 以下도 아니었어요. 蹴球를 始作하면서부터 줄곧 攻擊手로 뛰었어요. 攻擊은 저의 性向과 맞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짜릿한 골을 넣을 수 있어서 正말 좋았습니다."

恒常 自信感이 넘쳤던 조진호는 일찍이 自身의 才能을 인정받았다. 特히 대륜고 在學 時節 參加했던 1991年 포르투갈 U-20 월드컵은 다이아몬드 原石과도 같았던 조진호를 반짝반짝 빛나는 寶石으로 만들어준 舞臺였다. 南北單一팀의 一員으로 大會에 參加했던 조진호는 韓國은 守備, 北韓은 攻擊이라는 無言의 約束을 깨트리고, 韓國 選手로서는 서동원과 함께 攻擊手로 落點돼 8强 進出의 一等功臣이 됐다.

"當時 全國高校蹴球大會에서 優勝을 차지한 중동고의 에이스 서동원(現 昌原市廳 코치)과 함께 周圍의 豫想을 깨고 世界舞臺에 挑戰했었죠. 事實 負擔感이 많았어요. 當時 南北關係가 和解모드로 가고 있었는데 그 中心에 바로 南北單一팀이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成績이 좋았고, 地球村에 韓民族의 氣槪를 드높인 것 같아 只今도 잊을 수가 없네요."
91年 U-20 월드컵에 나갔던 코리아팀(맨 윗줄 오른쪽에서 3番째가 조진호) ⓒ月刊蹴球
世界 舞臺를 號令한 조진호

이 大會를 발板 삼아 自身의 成功時代를 開拓하기 始作한 조진호는 滿 18歲 11個月의 나이로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參加한다. 이는 아직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韓國 올림픽代表팀 最年少 拔擢記錄이다. 그의 價値가 더욱 빛났던 事實은 當時 올림픽代表팀이 1990年代 韓國 蹴球를 수놓았던 많은 스타플레이어가 함께 했던, 史上 最强의 팀이었기 때문이다.

조진호는 서정원, 노정윤, 신태용, 김도근, 곽경근 等 當代의 才能들과 함께 했고, 이들의 活躍으로 韓國은 28年 만에 自力으로 올림픽 本選 舞臺에 進出하는 快擧를 이룩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眞짜 부러울 게 없었던 時節이었습니다. 그 時節의 追憶이 아직도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아요. 當時 서정원, 노정윤 等 攻擊陣만 해도 錚錚한 選手들이 가득했어요. 特히 저와 비슷한 테크니션들이 많아서 그라운드에 서면 正말 거칠 것이 없었어요. 어린 나이에도 最高의 選手들과 함께 올림픽 舞臺를 밟아서 가슴이 벅찼어요. 그 기쁨은 正말 가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겁니다."

올림픽에서 猛活躍을 펼친 조진호는 以後 1993年 濠洲 U-20 월드컵에서도 主張으로 出戰하며 브레이크 없는 疾走를 이어갔다. 조진호의 潛在力이 滿開한 時點은 1994年 美國 월드컵. 김호 監督은 周圍의 豫想을 깨고 조진호를 獨逸과의 마지막 豫選 競技에 출전시켰다.

김호 監督이 獨逸 戰術의 核心이었던 부흐발트의 마크맨으로 조진호를 選擇한 것은 當時 輿論을 無視할 수 없었던 탓이다. 조진호는 월드컵을 앞두고 카메룬 代表팀과 가진 두 次例 評價戰에서 連續골을 터트리며 言論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守備 面에서 效率性이 떨어지는 조진호 카드는 分明 危險 負擔이 컸지만 그만큼 期待도 컸다는 反證의 목소리다.

"앞서 스페인, 볼리비아와 次例로 아쉬운 無勝負를 記錄한 가운데,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相對는 다름아닌 優勝候補 獨逸이었어요. 그러나 無勝負를 거둘 境遇 와일드카드로 16强에 오를 수 있는 可能性이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한 番 죽기 살기로 해보자 스스로 다짐했죠. 그 날 競技가 열렸던 댈러스의 코튼洑올 스타디움은 38度를 오르내리는 暴炎이 내리쬐었죠. 말 그대로 찜통이었어요. 게다가 부흐발트를 막기에는 力不足이었죠. 그래도 TV畵面에서 보던 클린스만, 마테우스, 부흐발트를 直接 눈으로 봤다는 것 自體가 내게는 커다란 刺戟祭였어요. 結局 後半戰에 서정원 選手와 交替되었고, 敗北를 當했지만 個人的으로는 많은 것을 배운 한 판이었습니다."
94월드컵代表팀에서도 活躍한 조진호 ⓒ月刊蹴球
돌이킬 수 없는 江을 건너다

坦坦大路를 달리던 조진호의 蹴球人生은 單 한 番의 致命的인 失手로 나락의 길로 빠지기 始作했다. 1996年 애틀란타 올림픽을 앞두고 1988年 서울 올림픽에서 祖國 蘇聯에 金메달을 안겼던 비쇼베츠 監督이 韓國의 새로운 司令塔으로 赴任하게 되면서 鐵甕城과 같았던 조진호의 立地도 마침내 變化를 맞이한다.

1994年 히로시마아시안게임 4强戰에서 우즈베키스탄에게 敗北를 當한 뒤 體質改善을 宣言한 代表팀. 그 改革의 소용돌이 中心에 바로 조진호가 서있었다. 當時 비쇼베츠 監督은 體格이 탄탄한 長身 選手들을 選好했던 탓에 조진호는 비쇼베츠 監督 下에 가진 銃 13競技 中 단 4競技에 出戰하는데 그쳤다.

"비쇼베츠 監督이 크고 파워가 좋은 選手들만 重用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當時 自尊心 때문에 主戰을 確保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抛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蹴球를 始作한 以來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웠던 瞬間이었습니다."

恒常 最高로 推仰 받았던 조진호였기에 갑작스러운 벤치生活은 堪當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아울러 1994年 世間의 期待 속에 K-리그 드래프트 全體 1順位로 浦項 스틸러스에 入團한 뒤, 이듬해 무릎負傷을 當하면서 그의 心理的인 不安感은 더해져만 갔다. 結局 窮地에 몰린 조진호는 代表팀 合流 拒否라는 前代未聞의 事件을 일으키고야 만다. 1995年 2月 애틀란타 올림픽代表팀의 一員으로 第3回 홍콩 다이너스티컵에 參加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自身을 起用하지 않은 비쇼베츠 監督에 對한 不滿의 表示로 大會 期間 途中 代表팀을 離脫하는 突出 行動을 하고만 것이다. 한 番 쏟아진 물은 絶對 주워담을 수 없는 法. 結局 조진호는 6個月 間의 選手 資格 停止라는 懲戒를 받았고, 이미 등을 돌린 輿論은 그에게 冷淡하기만 했다. 以後 조진호는 代表팀에 單 한 番도 拔擢되지 못한 채, 蹴球팬의 記憶 속에서 徐徐히 잊혀져 가기 始作했다.

"참 어리석은 行動이었어요. 勿論 言論에 依해 訛傳된 部分도 있었죠. 當時 비쇼베츠 監督과의 不和가 생각보다 甚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選手 起用에 關聯된 問題는 全的으로 監督에게 달려있다는 當然한 眞理를 저는 看過하고 있었죠. 血氣 旺盛했던 自身을 制御하지 못한 罪가 컸어요. 時間을 되돌릴 수 있다면 後悔라는 單語는 世上에 存在하지 않을 겁니다. 結局 죽을 때까지 제가 짊어가야 할 짐인 건 틀림없는 事實이에요."
富川에서 뛸 當時의 조진호(16番) ⓒKFA
조진호의 波瀾萬丈한 蹴球 人生

周圍의 期待와 憂慮 속에 入城한 프로舞臺 亦是 試鍊의 連續이었다. 1994年 드래프트 全體 1順位의 榮光도 暫時. 조진호는 痼疾的인 무릎負傷과 잦은 슬럼프에 시달리며 順坦치 않은 行步를 이어갔다. 엎친 데 덮친 格으로 박태하, 고정운, 滋甚 等과의 主戰 競爭에서 밀려난 조진호는 2000年 富川 SK(現 濟州 유나이티드)로 移籍한다.

“(프로에 와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어요. 代表팀을 返納할 程度로 그렇게 잘하냐라는 팬들의 嘲弄과 期待値는 날이 갈수록 커졌어요. 負傷도 있었지만 가장 큰 問題는 心理的인 負擔感이었어요.”

이대로 끝날 것 같았던 蹴球 人生. 그러나 잔잔하던 물결이 한 番 크게 일렁이듯이 機會는 다시 한 番 그렇게 찾아왔다. 特히 2000年 대한화재컵은 조진호에게 第2의 全盛期를 열어줄 것이라는 期待感을 갖게 할 程度로 最高의 플레이를 보여준 舞臺였다. 조진호는 대한화재컵 A組 2次戰 浦項과의 競技에서 선제골과 延長戰 골든골까지 터트리며 親庭팀의 가슴에 匕首를 꽂았다.

그로부터 한 달 後 5月 5日 어린이날 蠶室에서 열린 全南 드래곤즈와의 大會 決勝戰에서 조진호의 眞價가 또다시 유감없이 發揮됐다. 前後半 90分 동안 1-1로 勝負를 가리지 못한 양 팀은 곧바로 延長戰에 突入했다. 延長 前半 4分 만에 조진호가 전경준의 프리킥을 헤딩슛으로 마무리하며 富川에 대한화재 優勝컵을 안겨다 주었다.

“1996年 浦項에서 FA컵 優勝을 차지한 적이 있었지만, 主軸 選手가 아니었기에 이때의 感動은 남달랐어요. 몸 狀態도 좋았고, 한 番 해볼 만 하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隱退, 그리고 또 다른 始作

하지만 조진호의 復活 讚歌는 마치 한 여름 밤의 꿈과도 같았다. 優勝의 기쁨도 暫時 交替 選手로 轉落한 조진호는 이듬해 城南 逸話로 移籍한다. 조진호는 성남에서 두 시즌을 보냈지만, 單 27競技, 大部分 交替로 出場해 2골 1도움에 그치면서 더 以上의 機會는 찾아 오지 않았다. 프로의 世界는 冷酷했고, 조진호는 그저 잊혀져 가는 悲運의 天才일 뿐이었다. 프로 通算 總 119競技 出戰에 15골 8도움. 華麗했기에 더욱 슬펐던 조진호의 現役 生活은 2002年 右側무릎 前方 十字靭帶負傷을 끝으로 마침標를 찍었다.

“예전부터 痼疾的인 무릎負傷이 있었지만, 갑자기 惡化가 되면서 유니폼을 벗을 수 밖에 없었어요. 正말 안타까웠죠.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였는데..좀 더 管理를 잘했다면 한 2年 程度는 더 뛸 수 있었을 거에요. 그래도 後悔는 없어요. 恒常 그라운드에서는 온 힘을 다해 뛰었기 때문이죠.”

華麗한 經歷에도 변변한 隱退式조차 없이 그라운드를 떠난 조진호. 그에게도 삶의 轉換點이 다가왔다. 蹴球選手에게 있어 隱退는 또 다른 始作이라고 했던가. 그 동안 정들었던 蹴球靴를 벗고 指導者로 變身해 第2의 蹴球人生을 始作한 조진호. 2003年 濟州의 2軍 코치를 歷任한 조진호는 차츰 한 階段씩 올라서면서 準備된 指導者로서의 立地를 탄탄히 構築하고 있다.

“추위에 떨어 본 사랑일수록 太陽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指導者 生活을 始作하면서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所重한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어요.”

“저는 비록 選手로서 不足함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이제 指導者로서 맡은 바 所任을 잘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저를 그리워하고 계시는 분이 얼마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웃음) 비록 이제는 그라운드에서 人事를 드리지 못하지만, 앞으로 히딩크 監督처럼 熱情이 가득 찬 훌륭한 指導者가 되어 蹴球팬의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인터뷰=이경헌

* 대한축구협회 技術政策 報告書인 'KFA 리포트' 2009年 2月號 '나의 選手 時節' 코너에 실린 인터뷰 記事입니다.
出處 : 大韓蹴球協會 웹사이트
Posted by 韓國蹴球歷史統計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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