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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聖書公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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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겨울 通卷 第 52卷 4號
언더우드와 城西事業2 옥성득

언더우드는 最初의 牧師 宣敎師로서 1885年 韓國에 入國하여, 1887年에 常任聖書委員會 委員으로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醫젼  福音셔言  ㅣ>를 飜譯·出刊하고, 1893年, 前任飜譯者會議 會長으로서 한글聖經 飜譯事業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城西韓國>에서는 向後 4回에 걸쳐 언더우드와 한글 城西事業에 對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筆者는 最近 《언더우드 資料集》 (연세대出版部) 前5卷을 펴내고 있으며, 《大韓聖書公會社》1,2卷에 이어 3卷 執筆을 始作했고, 《大韓聖書公會 資料集》1,2卷을 出刊한 옥성득 牧師로 現在 UCLA 아시아學과의 韓國基督敎 擔當 敎授로 있다.

언더우드 牧師가 來韓한 1885年 4月부터 첫 安息年 休暇를 떠난 1891年 4月까지 6年間의 聖經의 飜譯, 出版, 반포와 關聯된 城西事業을 살펴보자. 1884年 12月 美國을 떠날 때 언더우드는 그리피스가 쓴 『韓國 隱者의 나라』(1882) 等 몇 卷의 冊만 읽었을 뿐 韓國이나 韓國語에 無知했다. 그러나 1891年 봄 韓國을 떠날 때 언더우드는 福音書들을 飜譯했고 英韓辭典과 한영문法을 著述해 韓國語에서 最高 權威者가 되어 있었다. 熱情과 努力과 攝理的人 만남의 結果였다.


01   韓國語 工夫 : 이수정, 서광범, 송순용을 만나다 (1885)
1885年 1月 25日 日本에 到着한 언더우드는 헵번 醫師 집에 머물렀고, 그에게서 中國과 日本 宣敎 經驗談을 들었다. 以後 언더우드는 헵번 醫師 夫婦를 멘토로 삼고 어려운 問題가 생길 때 助言을 求했다. 靑年 언더우드의 熱情을 老鍊한 헵번의 智慧가 받쳐주었다.
언더우드는 요코하마에서 美國聖書公會 루미스 總務의 紹介로 이수정(李樹庭)을 만났다. 언더우드는 兩班 學者를 통해 韓國 上流層의 文化를 體驗할 수 있었고, 그의 改宗과 飜譯 이야기, 그리고 2月에 出刊된 『신약마가젼복음셔언  ㅣ』를 통해 韓國 福音化의 可能性과 必要性을 確認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또한 甲申政變 失敗 後에 日本에 亡命한 朴泳孝, 金玉均, 徐光範, 徐載弼 等을 만났다. 1884年 여름 매클레이가 韓國을 訪問했을 때 高宗에게 親書를 올려 宣敎 病院과 學校를 始作할 수 있도록 周旋해 준 金玉均을 宣敎師들은 높이 評價했다. 穩健 開化派였던 이修正은 이들 亡命客들과 멀어졌고 宣敎師들과도 疏遠해졌다. 언더우드는 2月 末 到着한 美國 북감리회의 아펜젤러 夫婦와 스크랜튼 家族과 함께 韓國 宣敎를 計劃했다.

그리고 서광범(徐光範)과 親하게 지내면서 韓國말을 배웠다. 요코하마에서 만난 두 靑年, 韓國 福音化의 所望을 가졌던 언더우드, 近代國家 設立을 위한 革命을 꿈꾸다 失敗하여 異國의 亡命客이 된 서광범, 둘 다 1859年 生 25歲의 靑年이었다. 언더우드는 뉴욕에 있는 兄에게 美國으로 간 徐光範을 도와줄 것을 付託했고, 1894年 金弘集 內閣의 法部大臣으로 歸國한 徐光範은 언더우드와 기쁘게 邂逅했다. 法務部 長官을 東甲 親舊로 둔 언더우드는 宣敎에 拍車를 加할 수 있었다.

1885年 4月 서울에 到着한 언더우드는 6月에 天主敎人 송순용(宋淳容, 者는 德祚)을 語學先生으로 採用하고 韓國語 工夫에 邁進했다. 그가 天主敎人이라 망설였으나 韓國에서 가장 卓越한 語學先生이라는 評判을 가졌고 또 雇用되기를 自請했으므로 받아들였다. 그는 프랑스 神父 7-8名에게 韓國語를 가르친 經驗이 있는 뛰어난 韓國語 敎師였을 뿐만 아니라『한불  젼 韓佛字典』(1882) 編輯에 參與한 卓越한 韓國語 學者였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그의 採用을 ‘攝理’로 確信했다. 송순용이 1世紀 동안 天主敎가 蓄積해 온 韓國語 硏究 結果를 改新敎에 傳達해 주는 다리 役割을 했기 때문이었다.

언더우드가 빠른 時間 안에 韓國語를 익히고 聖經 飜譯에 着手할 수 있었던 것은, 海外에서 이루어진 로스 譯本과 이수정 譯本의 도움도 있었지만, 天主敎에서 改新敎로 넘어온 한글 學者 송순용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그의 도움으로 英韓辭典과 韓英文法書를 만들고 1889年 出版하기 위해 함께 日本에 갔는데, 이듬해에 出版한 『鮮英文法』 序文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冊은 “내 語學敎師人 송순용 氏가 準備한” 것으로 “어느 누구보다 송순용에게 感謝를 돌려야 할 것이다. 그의 土着 한글 諺文 使用에 對한 徹底한 知識과 더불어 現在 使用되는 韓國語 口語에 對한 健全한 槪念과 漢文에 對한 精通한 實力은 貴重한 도움이 되었다.” 송순용은 “韓國語에 關한 限 언더우드의 權威”였다.

언더우드는 송순용에게서 글말인 漢文을 工夫하고 上流層의 高級 用語를 배우는 同時에 시골에 나가서 생생한 살아 있는 民衆의 입말을 익혔다. 그는 平壤과 義州를 目標로 여러 次例 北韓 地方을 旅行했다. 1887年 가을에 義州까지, 1888年 봄에 아펜젤러와 함께 平壤까지, 11月에 다시 平壤까지 旅行했고, 1889年 3月에는 호튼 醫師와 婚姻하고 新婚旅行 兼 傳道旅行으로 義州까지 가서 33名에게 ‘鴨綠江 洗禮’를 베풀었다. 3年間 걸어 다닌 길만 3千 리, 農夫의 말을 배우고 쪽 福音을 頒布하며 未來의 宣敎支部를 開拓한 傳道의 길, 그 길은 바로 예수의 길, 宣敎師 바울의 길이었다.


02   이수정本 마가복음을 修正하고 常任城西委員會를 組織하다 (1886-87)
1885年 4月 서울에 到着한 언더우드의 짐에는 이수정本 마가복음이 들어 있었다. 宣敎 歷史에서 첫 宣敎師가 現地 言語로 飜譯된 福音書를 들고 入國한 드문 事例였다. 그러나 韓國에 온 지 1年이 지나면서 어느 程度 韓國語를 익힌 언더우드는 로스本이 平安道 사투리로 飜譯되어 서울에서는 쓸 수 없다고 보았다. 서울말로 飜譯된 이修訂本은 마가복음 1張 1節, “新(神)의    (子) 예슈쓰 크리슈도스(耶蘇基督)”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鬼神의 아들이라는 印象”을 준 用語 問題가 있었다. ‘新’이 韓國에서는 ‘鬼神’으로 理解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韓國에서도 用語 論爭이 始作되었고 國內 飜譯이 始作되었다.

언더우드는 1887年 2月 7日 “한글 聖經 譯本의 飜譯과 監督을 目的으로 하는” 常任城西委員會를 組織했다. 會長에 언더우드, 書記에 아펜젤러가 選出되었고 委員은 스크랜튼과 헤론이었다. 委員會는 日本에 가는 언더우드에게 飜譯 事業의 情報를 얻어 오도록 했고, 瀋陽의 로스를 여름에 招請하기로 決定했다. 卽 앞으로의 한글 飜譯은 서울 宣敎師들이 主導하고, 飜譯 方式은 日本 委員會 方式으로 하며, 로스의 協力을 求한다는 決定이었다.
 
03   日本에서 마가복음을 出版하다 (1887)
1887年 2月 日本에 간 언더우드는 헵번 醫師를 만나 日本 聖書委員會의 組織, 飜譯 原則과 方法을 배웠다. 헵번은 公會들 間의 競爭을 막기 위해 마가복음을 3公會 聯合으로 出版하도록 勸했다. 그러나 루미스는 美國聖書公會 譯本의 修訂本이므로 單獨 版權을 主張했다. 英國聖書公會도 로스本이 있었기 때문에 ‘언더우드의 競爭本’을 支援할 뜻이 없었다. 結局 『마가醫젼   福音셔言 ㅣ』는 스코틀랜드聖書公會議 톰슨 總務에 依해 1887年 여름에 2,000部가 出版되었다. 1章 1節 “神의    예슈쓰 크리슈도스 福音”은 “샹뎨의 아   예수 그리스도 福音”으로 바뀌었다. 이 마가복음은 서울 地域 前途에 요긴히 使用되었다.

04   서상륜을 전도인으로 雇用하고 새門안敎會를 組織하다 (1887)
日本에서 돌아온 언더우드는 로스의 卷서 서상륜을 전도인으로 雇用하고 北韓 地域 使役을 맡겼다. 이보다 앞서 1886年 12月 徐相崙은 로스의 紹介狀을 들고 언더우드를 訪問하여 소래에 數十 名의 改宗者가 있음을 알렸다. 그 가운데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은 1887年 1月 언더우드를 찾아와 信仰을 告白하면서 洗禮를 要請했고, 이들은 죽음을 覺悟하고 1月 23日 週日에 祕密裏에 洗禮를 받았다. 以後 徐相崙의 改宗者들이 서울, 소래, 義州에서 찾아와 洗禮를 받았고, 로스가 서울을 訪問한 9月 27日 밤 14名의 數世子(13名은 徐相崙의 改宗者, 한 名은 언더우드가 1886年 7月 18日 洗禮를 준 노춘경)로 첫 組織敎會人 새門안長老敎會가 組織되었다. 宣敎 開始 2年 5個月 만에 敎會를 組織한 것은 徐相崙의 傳道와 로스 譯本과 마가복음 頒布의 結果였다.
 
05   로스本 福音書 修正에서 새 飜譯으로 넘어가다 (1887-91)
날로 增加하는 韓國人의 聖經 要求에 副應하기 위해 常任城西委員會는 一旦 로스本을 修正해서 使用하기로 決定했다. 언더우드는 1887年 마태복음 改正을 맡았다. 그러나 여름休暇를 온통 小冊子와 福音書 飜譯과 辭典과 文法서 準備에 바치던 언더우드는 로스本意 “綴字法 受精에 두 손을 들고” 새로 飜譯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綴字와 誤譯만 바꾸면 當分間 使用할 수 있다고 본 아펜젤러와 委員會는 로스本意 누가복음과 로마書를 改正하여 1890年 3月에 各各 3,000部를 出版했다. 印刷는 올링거의 三門活版소가 맡았다.

그러나 飜譯 實力이 向上된 委員會는 언더우드의 意見대로 새 飜譯의 必要性에 共感했다. “로스本의 問題는 綴字法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使用된 言語와 딱딱한 文體, 不分明한 表現, 오래된 冊 模樣 等도 問題였다.” 委員會는 1890年 6月 11日 언더우드와 스크랜튼에게 2年 안에 新藥을 飜譯하도록 맡겼다. 이로써 純粹 國內 飜譯이 始作되었고, 10年 後 1900年에 新約全書 臨時本이 完成된다.


06    네비어스-로스 方法을 韓國에 定着시키다 (1887-91)
언더우드는 1887年 9月 서울에 온 로스를 통해 滿洲에서 施行 中인 네비어스 方法에 對해 들었고, 그의 글을 읽으며 그 方法을 硏究하기 始作했다. 1888年 12月에는 韓國人 卷서와 指導者들을 모아 첫 神學班(査經會)을 열었다. 1889年 徹底한 自給 政策을 貞洞 敎會堂 建築 때부터 施行했으며, 로스에게 배운 ㄱ字 形態로 男女 座席을 區別했다. 또 전도인을 雇用하는 옛 方式 代身 信者들의 自願 傳道 方式을 採擇하여 돈 때문에 敎人이 되거나 學生이 되는 ‘쌀 信者’를 防止했다.

한便 美國公使館의 外交官이 된 알렌 醫師와 濟衆院을 책임지게 된 헤론 醫師는 언더우드의 攻擊的인 宣敎 政策에 反對하고 愼重하고 合法的인 方法을 支持했다. 宣敎會 內部의 葛藤을 調停하기 위해 宣敎部는 1889年 미첼 總務를 派送했다. 1890年 5月 中國에서 40年間 奉仕한 네비어스 夫婦의 서울 訪問도 宣敎 政策 調整이 目的이었다.

隱退를 앞둔 네비어스 夫婦는 2週日間 20代의 靑年 宣敎師들에게 宣敎 經驗을 傳授하고 宣敎 方法을 가르쳐 주었다. 언더우드의 主導로 導入된 自給, 自轉, 自治하는 土着 敎會를 設立하기 위한 네비어스 方法은 1891年 北長老會 韓國 宣敎會議 公式 政策이 되었고, 以後 다른 長老會 宣敎會들과 남監理會가 採擇하여 韓國 敎會 急成長의 基盤이 되었다. 네비어스 方法과 關聯해 1890年 가을 마페트와 게일은 瀋陽의 로스를 訪問하고 그에게서 土着的인 禮拜堂 樣式과 禮拜 意識을 導入하고 現地 文化에 包容的인 ‘로스 方法’을 배웠다. 이들은 平壤과 元山에 로스 方法을 導入했다. 韓國에 定着된 ‘네비어스 方法’은 事實 ‘네비어스-로스 方法’이었고 그 核心에는 聖經이 있었다.

언더우드에게는 뛰어난 韓國人 同役者들이 있었기에 宣敎 1基를 成功的으로 進行할 수 있었다. 聖經 飜譯의 송순용 調査, 聖經 頒布의 서상륜 卷書를 만난 것은 攝理였다. 또한 聖經 飜譯의 助言者 헵번과 로스, 宣敎 方法을 傳授한 네비어스와 로스, 三門出版所를 運營한 올링거와 같은 先輩 宣敎師들이 있었기에 施行錯誤를 줄일 수 있었다. 宣敎는 同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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