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辱으로 始作해 辱으로 끝났다……”
趙亮鎬 韓進그룹 會長의 夫人 李明姬 일우財團 理事長의 隨行技士였던 40代 A氏에게 2011年은 惡夢이었다. 일을 그만둔 지 7年이 지났지만 記憶은 생생하다.
16日 午後 京畿道 某處에서 A氏를 만났다. 조현민 大韓航空 專務의 ‘물컵 甲질’, ‘辱說 波紋’ 消息을 接했는지 묻자 “언젠가는 甲질 問題가 터질 것으로 豫想했다”고 말했다.
A氏는 2011年 初 인터넷에서 ‘大企業 任員 遂行記事’를 뽑는다는 公告를 보고 일을 始作했다. A氏는 “任員面接을 볼 때까지만 해도 運轉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出勤한 지 하루 만에 衝擊을 받았다”고 말했다.
A氏는 隨行技士로 일하는 3個月 동안 午前 8時까지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이 理事長의 自宅으로 出勤했다. A氏가 첫날부터 깜짝 놀란 건 當時 執事로 일하고 있던 B氏에 對한 이 理事長의 言行을 보고 나서다. A氏는 執事 B氏를 ‘恒常 고개를 숙이고 뛰어다니는 사람’으로 記憶했다.
A氏는 “執事가 조금만 늦어도 바로 ‘죽을래 XXX야’, ‘XX놈아 빨리 안 뛰어 와’ 等 辱說이 날라왔기 때문에 執事는 恒常 집에서 걷지 않고 뛰어다녔다”고 말했다. 이어 “當時 家政婦로 필리핀 女子가 있었는데 아마 (우리말 表現을 正確히 다 알아듣는) 韓國사람이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理事長의 辱說과 暴言은 얼마 되지 않아 A氏에게도 始作됐다. A氏는 “運轉을 하지 않을 때는 종로구 구기동 自宅에서 待機하면서 집안일을 도왔는데 그때마다 執事와 함께 辱을 먹었다”며 “이것밖에 못 하느냐며 XXX野라는 暴言을 들었는데 괴로웠다”고 말했다.
特히 집 앞마당에 있는 花壇에서 일할 때 이 理事長은 銳敏한 反應을 보였다. A氏는 “이 理事長이 꽃을 좋아하고 花壇을 가꾸는 걸 神經 썼다”며 “當時 튤립을 길렀는데 肥料, 機構 等을 나를 때마다 恒常 辱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 理事長은 男便인 조 會長이 자리에 없었을 때 목소리가 더 커졌다. A氏는 “조 會長이 같이 있을 때는 執事와 나에게 甚하게 얘기하지 않았다”며 “조 會長이 옆에 없으면 입이 더 거칠었다”고 말했다.
이 理事長의 暴言과 辱說 때문에 A氏는 늘 不安感에 휩싸였다. 運轉하다 길을 잘못 들 때면 식은땀이 흘렀다.
A氏가 더 큰 衝擊을 받은 건 일을 始作한 지 2週日쯤 지나서다. 當時 서울 종로구 구기동 自宅에 午前부터 대한항공 任職員 5~6名이 줄줄이 呼出됐다. 職員들이 居室에 一列로 서자 이 理事長의 辱說이 始作됐다.
A氏는 “當時 불려 온 職員 中 50代로 보이는 職員에게 ‘이따위로 일을 할 거냐’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辱說과 暴言을 했다”며 “物件을 집어 던졌는지 當時 집 안에서 琉璃가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고 말했다.
1個月쯤 지났을 때부터 A氏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아이의 아빠로 家族의 生計를 책임져야 했지만 더는 人間 以下의 取扱을 보고 겪으며 일할 수는 없었다. 結局 A氏는 아내에게 그間의 일을 들려주고 3달 만에 辭職書를 提出했다.
A氏는 이 理事長의 遂行技士를 끝으로 아예 遂行記事 일 自體를 그만뒀다.
A氏는 “遂行記事 일은 鶴을 뗐다”며 “한진그룹 오너 一家의 甲질이 쉽게 고쳐질 것 같지 않지만 이番 機會에 反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取材陣은 한진그룹에 A氏의 陳述에 對한 立場을 묻자 대한항공 關係者는 “會社와 直接 관계되지 않은 일이라 確認이 어렵다”고 答했다.
최동수 記者 firefly@mt.co.kr
<著作權者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無斷轉載 및 再配布 禁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