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韓國史/近世社會의 發展/兩班社會와 經濟生活/兩班官僚의 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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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班官僚의 文化〔槪說〕 [ 編輯 ]

朝鮮 王朝 初期의 偉大한 文化的 業績으로서는 무엇보다 한글 創製를 들 수 있다. 訓民正音이라 이름 붙인 것이 그것이다. 世宗은 1446年에 최만리(崔萬里) 等 固陋한 學者들의 反對를 一蹴하고, 집현의 성삼문, 정인지, 申叔舟 等 學者들을 動員해서 이 民族 最大의 文化的 創造物인 한글을 創製, 頒布하였다. 한글이 創製된 以後 『龍飛御天歌』 『月印釋譜』 『諺解』 『東國正韻』 等이 著述, 出版되어 文化的으로 큰 貢獻을 하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조선 王朝 初期에는 各 方面의 學問 또한 크게 發達하여 그 業績이 많이 空間(公刊)되었는데, 이들 書籍은 儒敎 立場의 實用的 性格을 띠었다. 于先 사서(史書)의 編纂으로는 『朝鮮王朝實錄』李 次例로 編纂되어 서울의 春秋館 및 地方의 事故에 保管되었다. 또한 『國朝寶鑑(國朝寶鑑)』 『高麗史』 『高麗史節要(高麗史節要)』 『東國通鑑(東國通鑑)』 等이 編纂되었다. 地理書로는 『8道地理地(八道地理志)』와 『東國輿地勝覽(東國輿地勝覽)』 等이 있고, 政治에 關한 것으로는 『治平要覽(治平要覽)』 『國朝五禮儀(國朝五禮儀)』 『三綱行實(三綱行實)』 等이 編纂되었다.조선 王朝初에는 또 各 方面의 科學과 技術이 크게 發達하여 여러 가지 發明과 著述이 出現하였다. 農業에 關해서는 『農事直說(農事直說)』,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四時纂要(四時纂要)』 『잠서(蠶書)』 等이 編纂되었다. 한便 天文學 또한 크게 發達하여 測雨器와 天文觀測器人 臺·蘇 間의(簡儀), 天球의(天球儀)인 渾天儀(渾天儀), 해時計인 仰釜日影(仰釜日影), 물時計인 自擊漏(自擊漏) 等이 만들어졌는데 蔣英實(蔣英實) 等의 功이 컸다. 軍士에 있어서는 『東國兵鑑(東國兵鑑)』 『兵將圖說(兵將圖說)』 等의 兵書와 火砲·兵船이 製作되었으며, 醫學書로는 『鄕藥集成方(鄕藥集成方)』 『醫方類聚(醫方類聚)』 『東醫寶鑑(東醫寶鑑)』 等이 編纂되었다. 이러한 國家의 編纂事業은 印刷術의 發達을 가져와서 癸未字(癸未字)·甲寅字(甲寅字) 等의 金屬活字가 大量으로 鑄造되었고, 그 後 印刷術은 더욱 發達하여 各種 活字의 出現을 보게 되었다.조선 王朝의 兩班들은 美術을 丈人(匠人)들이 하는 일이라 하여 賤視하였다. 兩班으로서 美術을 즐긴다는 것은 여기(餘技)에 不過했으며, 이러한 傾向이 繪畫에서 文人畫(文人畵)라고 불리는 水墨畫(水墨畵)를 流行시켰던 것이다. 朝鮮 初의 畫家로는 兩班 出身의 강희안(姜希顔), 花園(畵員)이었던 安堅(安堅)·이상좌(李上佐)·崔涇(崔涇) 等이 있었는데, 前者의 境遇보다 後者의 境遇에 作品의 筆勢(筆勢)가 雄渾하였다. 西島에 있어서는 안평대군(安平大君)·양사언(楊士彦)·韓호(韓濩) 等이 名筆로 이름이 높았으나 大體로 傳來의 것을 固守하려는 傾向이 濃厚했다. 工藝에 있어서는 朝鮮瓷器의 代表的인 것으로 높이 評價되는 白瓷가 있었다. 朝鮮 初期 以後 自己는 차츰 가냘프고 曲線的인 形態에서 벗어나 素朴하고 純粹한 直線的 形態로 變했다.

性理學의 發達 [ 編輯 ]

性理學-發達

朝鮮王朝의 建國은 社會革命을 가져왔고 이에 隨伴하여 文明改革이 나타났다. 于先 佛敎를 代身하여 儒敎, 特히 性理學(性理學)李 支配的인 地位를 차지하게 되었다. 佛敎에 對한 批判運動은 高麗末期부터 일어났지만 開國 後에 이르러서야 佛敎敎理의 核心이 되는 因果說(因果說), 輪廻說(輪廻說), 禍福說(禍福說) 等을 條目條目 批判하여 佛敎가 虛學(虛學)이고 性理學이 實學(實學)이라는 것을 論述한 鄭道傳의 『불씨잡변(佛氏雜辨, 1398)』이 씌어졌다. 鄭道傳의 佛敎批判은 儒家의 立場에서 展開된 것이어서, 이로써 佛敎의 哲學體系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佛敎의 社會 經濟的 弊端이 너무 커서 佛敎徒들은 이에 對抗할 힘을 잃고, 政治 一線에 서 있던 僧侶들이 純粹한 宗敎生活로 되돌아가는 契機가 되었다. 이제 政治는 儒學者들이 떠맡게 된 文化革命이 이루어진 것이다. 鄭道傳의 뒤를 이어 倦勤(權近)李 性理學을 더욱 발전시켜 『入學圖說(入學圖說)』 『五經천견록(五經淺見錄)』 『四書五經口訣(四書五經口訣)』 等을 著述하면서 더욱 確固한 理論的 基盤을 마련하였다. 世宗朝 戰後時期에는 김말(金末)·金泮(金泮)·金九(金鉤) 等 이른바 ‘經學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는 著名한 性理學者들이 나와 成均館 中心의 國家性理學을 꽃피게 하였다. 또한 各級 敎育機關에서 性理學을 가르치고, 過去試驗 科目에서도 큰 比重을 차지하여 性理學은 더욱 急速度로 퍼져 갔다. 朝鮮初期 性理學의 基本經典은 사서(四書, 論語·孟子·中庸·大學)와 五經(五經, 時頃·書經·主役·禮記·春秋)이었으며, 이밖에 日常生活에서의 道德的 倫理規範을 敍述한 『小學(小學)』이 널리 읽혔다. 性理學은 宇宙自然과 人間社會의 問題를 形而上(理)과 形而下(氣)로 나누어 包括的으로 說明하는 思想體系이다. 그것은 兄以下 世界의 多樣性과 個個事物의 主體性을 認定하면서 同時에 共同體的 協助關係를 强調한다. 性理學은 또한 極端的인 觀念論이나 唯物論을 排擊하고 中道的이고 合理的인 客觀的 觀念論을 발전시켰다는 點에서 그 意味가 크다. 그런데 朝鮮初期 國家 學問으로 發展한 性理學은 위에 列擧한 여러 側面이 골고루 피어났다기보다는 主로 政治秩序의 變革과 關聯되는 經世的(經世的)인 側面이 特徵的으로 强調되었다. 百姓을 尊重하는 民本思想(民本思想)의 發展은 그 核心이다. 朝鮮王朝의 開創 過程에 道德的으로 容納될 수 없는 無理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어도 이것이 性理學의 價値觀에서 正當化될 수 있었던 것은 百姓을 위한 革命이 可能하다는 理論 때문이었다.한편 性理學이 支配的 位置를 차지하였다고 해서, 前부터 있던 한黨儒學의 價値觀이 全部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태종의 政治를 記述한 『貞觀政要(貞觀政要)』가 如前히 王에게 읽혀졌다는 것은 그러한 雰圍氣와 關聯이 있다. 朝鮮初期에 여러 技術學이 尊重된 것도 公理(功利)와 實用을 重視하는 政治文化와 關聯된 것이었다. 性理學 하나만으로는 이 時代의 歷史的 課題를 다 解決할 수 없었다는 데 理由가 있었다. 그러나, 性理學을 한層 純粹한 形態로 받아들이려는 人事도 없지는 않았다. 정몽주(鄭夢周)의 學風과 그의 氣絶(氣節)을 崇尙하는 이른바 士林(士林)學者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公理나 實用보다는 義理(義理)를 崇尙하고, 自律性이 尊重되는 鄕村秩序와 家族秩序의 樹立에 關心을 크게 두었다. 이들은 高麗末부터 『朱子家禮(朱子家禮)』를 導入하여 집에 家廟(家廟)를 세우고 祖上의 位牌를 모시고 祭祀를 지냈다. 이러한 學風은 特히 鄭夢周나 吉再(吉再)와 같은 絶信(節臣)의 緣故地인 嶺南地方에 顯著했는데, 先山(善山)의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 富者가 많은 文人들을 길러내면서 15世紀 末에는 뚜렷한 朋黨을 形成하기에 이르렀다. 15世紀의 官學派 性理學이 草創期의 國家建設에 肯定的 機能을 遂行하였다면, 在野의 士林派 性理學은 個人의 道德修養, 鄕村社會 安定에 寄與했다고 할 수 있다.

한글의 創製 [ 編輯 ]

-創制

朝鮮 世宗이 여러 學者들의 도움으로 1443年(世宗 25)에 創製·頒布한 우리나라 글字. 우리나라는 三國時代부터 吏讀(吏讀)와 口訣(口訣)을 써 왔는데, 口訣은 本來 漢文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一種의 補助的 便法에 지나지 않았고, 吏讀는 비록 우리말을 標示함에 틀림이 없었지만 우리말을 自由自在로 적을 수 없었으며, 그 表記法의 一元性(一元性)이 없어서 泄瀉 吏讀로써 足하다 해도 漢字敎育이 先行되어야 했다. 이러한 文字生活의 不便은 漢字를 쓰지 않고도,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새로운 글字의 出現이 切實히 要求되었다. 이러한 思潮가 世宗 때에 特히 두드러져 드디어 1443年 12月에 文字革命의 結實을 보게 되었다. 訓民正音 創製의 趣旨에 關하여는 世宗이 손수 著述한 『訓民正音』 禮儀便(例義篇)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으니 첫째 國語는 中國말과 다르므로 漢字를 가지고는 잘 表記할 수 없으며, 둘째 우리의 固有한 글字가 없어서 文字生活의 不便이 매우 甚하고, 셋째 이런 뜻에서 새로 글字를 만들었으니 日常生活에 便하게 쓰라는 것이다.

글字의 起源 [ 編輯 ]

訓民正音의 起源에 關하여서는 古代 漢字인 苦戰(古篆)·梵字(梵字)·蒙古者(蒙古字)·署長(西藏)글字·五行(五行)理論

等 從來 學說이 區區하였다. 1940年 頃 『訓民正音解例(訓民正音解例)』가 發刊되어, ‘發音器官 象形說(象形說)’을 確證하게 되었다.

글字의 構造 [ 編輯 ]

글字의 構成을 보면 子音(字音)李 17字(ㄱ ㄴ ㄷ ㄹ ㅁ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 ??? ???), 모음(母音)이 11字(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l ·)로 모두 28字이다. 各 字母에 對한 音價(音價)를 살펴보면, 初聲(初聲:子音)은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와 反舌·반치(反舌半齒)의 7音으로 區別하였고, 母音은 따로 區別하지 않았다. 이러한 7音과 各 字母의 獨特한 配列 順序는 中國 韻書(韻書)를 그대로 模倣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實際로 쓸 적에는 各 낱자(單子)를 독립시켜 소리나는 次例대로 적지 않고, 반드시 子音(子音)과 모음(母音)을 어울려 쓰기로 하였으니, 곧 <· ㅡ

ㅜ ㅛ

ㅠ >는 子音 아래에 쓰고, <ㅏ ㅓ ㅑ ㅕ>는 子音 오른쪽에 붙여쓰기로 하였다. 卽 音節文字(音節文字)로 하되, 그 模樣이 네모꼴이 되도록 하였으니, 이는 漢字의 꼴에 影響을 받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現行 한글字母에 쓰이지 않는 없어진 글字를 消失子(消失字)라 하는데 <??? ??? ???·> 4者가 그것이다. 訓民正音 創製 當時에는 그 글字 自體의 稱號法(稱號法)은 標示되어 있지 않았고, 中宗 때 최세진(崔世珍)의 『訓蒙字會(訓蒙字會)』에 이르러 各 글字의 名稱이 붙게 되었다.

訓民正音 解說書 [ 編輯 ]

世宗實錄에 ‘是月上訓民正音成…’이라 하여 『訓民正音』이란 冊이 製作 完了되었다는 記錄이 있는데, 現在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冊이 많이 傳하고 있다. 그런데 高 전형필 所藏本 以外에는 全部 ‘禮儀(例義)>’部分만을 內容으로 한 것이어서 이런 것들을 禮儀本(例義本), ‘解例(解例)’가 들어 있는 것을 解例本(解例本)이라 일컫는다. 이 禮儀本은 單行本(單行本)은 아니나, 『世宗實錄』과 喜方寺판(喜方寺版) 『月印釋譜(月印釋譜)』에 실린 것 等 여러 種類가 있다. 이 『禮儀本(例義本)』은 아주 簡單하지만, 當時 국자(國字) 創製의 趣旨, 낱자(單子)의 發音, 合資(合字)運用의 說明 等이 規定되어 있어서, 우리 글字를 論議하는 데 貴重한 文獻으로 評價되고 있다. 『解例本(解例本)』에 있는 禮儀(例義)는 特히 創製 當時의 自體(字體)를 그대로 보이고 있어서 그 中 가장 높이 評價되고 있고, 解例는 오랫동안 問題로 삼던 글字의 起源 等 여러 가지의 疑問點을 밝혀 주고 있다. 이 訓民正音의 글字로서의 價値를 따진다면, ① 어느 글字도 模倣하지 않고 獨創的이다 ② 國語의 音韻組織(音韻組織)에 가장 合致되어, 우리말은 무엇이나 表記할 수 있다. ③ 글字繡가 28個(現在 24者)에 不過하며, 또 字劃(字劃)李 簡單하다. ④ 글字 發達思想 最高 水準에 오른 소리글字(音標文字:音素文字)이다. 卽 各 音節(音節)을 子音과 母音으로 分解(分解)할 수 있는 글字이다. ⑤ 내려쓰기(縱書)와 가로쓰기(橫書)의 性能을 갖추었고, 또 풀어서 가로쓰기를 할 수 있다.

集賢殿 [ 編輯 ]

集賢殿

高麗 以後 朝鮮 初期에 걸쳐 設置되었던 王室硏究機關(王室硏究機關)의 하나. 中國에서는 한(漢)·魏(魏) 以來 設置, 明나라 玄宗(玄宗) 때 完備(完備)된 機關으로서 이곳에 學事(學士)를 두어 警笛(警籍)의 刊行과 書籍의 蒐集 等을 맡아 보게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이 制度가 輸入되어 많은 影響을 끼쳤으나, ‘集賢殿’이란 名稱이 使用된 것은 1136年(高麗 仁宗 14)에 延英殿(延英殿)을 集賢殿이라 改稱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高麗 때와 朝鮮의 建國 初期까지에도 별다른 活動은 없었다.세종이 卽位한 뒤에 文身을 集賢殿에

모아 文風(文風)을 振興시키자는 臣下들의 建議가 있어서, 그 동안 高麗 以來로 有名無實하였던 修文殿(修文殿)·集賢殿·寶文閣(寶文閣) 中에서 集賢殿 하나만을 남기는 代身 그 機構(機構)를 大幅的으로 擴張시켰다. 卽 1420年(世宗 2) 3月에 宮中에 集賢殿을 두고, 領殿事(嶺殿事:情1品)·大提學(大提學:情2品)·提學(提學:種2品) 各 2名(以上은 모두 兼官)과 그 아래 專任學事(前任學士)의 官職으로서 副提學(副提學):情3品)·直提學(直提學:種3品)·直錢(直殿:情4品)·應敎(應敎:種4品)·敎理(敎理:情5品)·副校理(副敎理:種5品)·修撰(修撰:情6品)·副修撰(副修撰:種6品)·博士(博士:情7品)·著作郞(著作郞:情8品)·精子(正字:情9品) 等을 두었다. 이와 同時에 專任學事로서 10名을 任命, 그 뒤 庭園의 增減이 있다가 1436年(世宗 18)에는 20名으로 確定되었다. 世宗은 學事의 設置와 아울러 서리(書吏)·奴婢(奴婢) 等도 配屬시켜 集賢殿의 運營에 支障이 없도록 하였다. 또 學士들의 硏究에 便宜를 주기 위해 많은 圖書(圖書)를 購入 或은 印刷시켜 集賢殿에 保管토록 하는 한便, 休暇를 주어 山寺(山寺)에서 뜻대로 學問 全般에 걸쳐 硏究하게 하였으며 그 經費와 機構는 모두 나라에서 負擔하였다. 이 結果 優秀한 學者들이 集賢殿을 통하여 많이

나오게 되었다. 이들의 任務는 첫째, 學事 20名 中 10名은 競演(慶筵)을,

나머지 10名은 西燕(書筵)을 擔當하였으며, 둘째, 集賢殿이 宮中에 있고 또 學士들이 文筆에 能하다는 理由로서 그 一部가 士官(史官)의 일을 맡았고, 셋째는 司令(辭令)의 祭粲(制撰)을 擔當하였다. 全代(前代)에는 修文殿(修門殿)·集賢殿·寶文閣(寶門閣)李 같이 맡아보았으나 修文殿·寶文閣이 廢止되자 集賢殿이 全的으로 이 일을 맡게 되었다. 넷째는 中國의 高弟(古制)에 對한 硏究였다. 儒敎를 朝鮮社會의 根本理念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儒敎的인 制度나 意識에 對한 檢討가 必要하였던 것이다.

한便 集賢殿 學士들은 政治人으로도 많이 登場하여 實際 政治面을 통하여 그들의 以上(理想)을 실현시켜 보려 하였다. 特히 世宗이 죽고 文宗이 卽位하자 이런 傾向은 더욱 濃厚하였다. 集賢殿의 業績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한글 制定이었지만, 이 밖에도 『高麗史(高麗史)』 『農事直說(農事直設)』 『五禮儀(五禮儀)』 『八道地理志(八道地理志)』 『三綱行實(三綱行實)』 『治平要覽(治平要覽)』 『東國正韻(東國正韻)』 『龍飛御天歌(龍飛御天歌)』 『釋譜詳節(釋譜詳節)』 『月印千江之曲(月印千江之曲)』 『醫方類聚(醫方類聚)』 等의 書籍을 編纂 刊行하여, 우리나라 文化思想 黃金時代를 이루게 하였다. 그러나 1456年(世祖 2)에 端宗의 復位運動을 한 死六臣(死六臣)을 비롯한 反對派 人物이 集賢殿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世祖에 依해 廢止되고, 集賢殿에 訴狀(所藏)韓 私的은 藝文館(藝文館)에 移管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文臣들이 벼슬에만 欲心을 내고 工夫를 게을리하는 弊端이 생겨서 1459年(世祖 5) 以後 3品 以下의 文臣으로서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 藝文館의 官職을 兼任시켜 硏究하게 하였으나 別 效果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成宗이 卽位하자 集賢殿에 依據해서 弘文館(弘文館)을 세워 學事의 待遇를 極盡히 하였으나 世宗 때의 集賢殿에는 따르지 못하였다.

讀書堂 [ 編輯 ]

讀書堂

朝鮮時代 젊은 文臣들이 글을 읽던 곳. 1426年(世宗 8) 文身 中에서 德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뽑아 史家를 하여 葬儀社에서 工夫하게 한 것이 그 始初로, 集賢殿의 大提學 卞季良이 임금의 命令을 받고 이를 行使하였다. 世祖 때 이를 없앴으나 1491年(成宗 22) 다시 復舊하였다. 中宗 때는 두모포(豆毛浦)에도 讀書堂을 두었으나, 壬辰倭亂 때 火災로 없어진 것을 光海君이 다시 設置, 丙子胡亂 때 完全히 없어졌다.

정인지 [ 編輯 ]

鄭麟趾 (1396

1478)

朝鮮初의 文臣·學者. 號는 學易齋(學易齋). 太宗 14年(1414) 科擧에 及第하였으며 世宗 卽位 後 王의 寵愛를 받아 集賢殿 學士·集賢殿 直提學(直提學)·이조 參判 等 要職을 頭로 歷任했다. 端宗 1年(1453)의 癸酉靖難(癸酉靖難) 때 首陽大君을 도와 右議政에 昇進했고, 定難功臣 1等으로 河東府院君(河東府院君)에 封해졌다. 世祖가 卽位하자 領議政을 지내기도 했으며, 成宗 1年(1470) 原狀(院相)으로서 國政을 總括하기도 했다. 그는 朝鮮 初期의 代表的 學者 中 한 사람으로 天文·曆法·雅樂 等에 關해 많은 冊을 編纂했고, 金宗瑞 等과 『高麗史(高麗史)』를 撰修했다.한편 世宗을 도와서 成三問·申叔舟 等과 함께 訓民正音 創製에 功이 컸으며, 權踶 等과 『龍飛御天歌(龍飛御天歌)』를 지었다.

신숙주 [ 編輯 ]

申叔舟 (1417

1475)

朝鮮의 學者·政治가. 字는 범옹(泛翁), 號는 保閑齋(保閒齋)·희현당(希賢堂). 本貫은 高齡(高靈). 腸(檣)의 아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자리면서 熱心히 工夫하여 읽지 않은 冊이 없었다.1439년(세종 21) 文科에 3等으로 及第하여 集賢殿(集賢殿)의 副修撰(副修撰)李 되었다. 藏書閣(藏書閣)에 들어가서 平素에 보지 못한 冊을 熱心히 읽고 同僚들의 代身으로 宿直하면서까지 時間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工夫하기가 일쑤였다. 世宗은 그가 熱心히 工夫하는 것을 發見하고 語의(御衣)를 하사하여 稱讚했다.1442년(세종 24) 訓鍊主婦(訓練主簿)가 되었다. 이때 日本에 通信社(通信士)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선비를 書狀官(書狀官)으로 삼기로 하였는데 申叔舟가 이에 뽑혔다.일본에 이르니 그의 재주를 듣고 詩(詩)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卽席에서 붓을 들고 詩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感歎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에 들러서 貿易協定을 締結하니 이것이 곧 癸亥條約(癸亥條約)이다. 이어 世宗이 訓民正音(訓民正音)을 創製할 때 가장 공이 컸는데 마침 罪를 짓고 랴오둥(遼東)에 귀양가 있던 名(明)나라 翰林學士(翰林學士) 황찬(黃瓚)을 찾아 13番이나 랴오둥으로 往來하여 音韻(音韻)에 關한 것을 議論하였다.1447년(세종 29) 重視(重試)에 4等으로 合格하여 集賢殿 應敎(應敎)에 特進하였다. 世祖(世祖)가 卽位하기 前에 謝恩使(謝恩使)로 明나라에 간 일이 있는데 이때 申叔舟는 書狀官(書狀官)으로 따라 갔었다. 世祖가 卽位한 後로는 언제나 寢室에까지 불러 들여 議論하였으며, 功臣(功臣)의 號를 내리고 高靈郡(高靈君)에 封하였다.1457년(세조 3)에 右議政, 1459年(世祖 5)에 左議政이 되었고, 1460年(世祖 6)에는 江原道·咸吉道 都體察使(都體察使)가 되어 野人(野人)들을 掃蕩하고 돌아왔다.1462년(세조 8) 마침내 領議政이 되었다. 一旦 辭任하였다가 世祖가 돌아가고 睿宗(睿宗)李 어려서 卽位하니 原狀(院相)으로 承政院(承政院)에 들어가 抒情(庶政)을 處決하고 南怡(南怡) 將軍을 肅淸하여 保社功臣(保社功臣)의 號를 받았다.예종이 在位 1年 만에 돌아가고 成宗(成宗)이 卽位하니, 또 功臣의 號를 내리고 領議政에 임명하였다. 『經國大典(經國大典)』과 『世祖實錄(世祖實錄)』 『睿宗實錄』의 編纂에 參與, 또 日本과 餘震(女眞)의 地圖(地圖)를 만들었으며, 『東國通鑑(東國通鑑)』 『五禮儀(五禮儀)』도 王命으로 그가 編纂해 낸 것이다.

『龍飛御天歌』 [ 編輯 ]

龍飛御天歌

朝鮮 王朝 6代 操縱(祖宗)의 史跡을 訓民正音으로 讚頌·猪津(製進)韓 冊. 世宗 27年(1445) 勸第·안지(安止)·정인지(鄭麟趾) 等이 王命으로 王室의 先祖인 木造(穆祖)·益鳥(翼祖)·濁操(度祖)·桓祖(桓祖)·太祖·太宗 等의 史跡을 訓民正音으로 讚頌·齊進하였다. 이 冊은 한글로 씌어진 最初의 歌詞(歌辭) 文獻으로 中世 國語 硏究의 保全(寶典)일 뿐 아니라 高麗末에서 朝鮮初에 걸친 歷史的 資料로도 貴重한 것이다. 特히 여진국과의 關係, 倭寇 侵攻에 關한 資料로서 대단히 貴重하다.

『月印釋譜』 [ 編輯 ]

月印釋譜

『月印千江之曲(月印千江之曲)』과 『釋譜詳節(釋譜詳節)』의 合本이다. 『釋譜詳節』은 世祖가 首陽大君으로 있을 때 完成한 釋迦의 一帶 電氣이며, 『月印千江之曲』은 『釋譜詳節』을 읽고 世宗이 지은 讚佛(讚佛) 敍事詩이다. 世祖 3年(1457) 王世子가 죽자 王이 父王과 아들의 冥福을 빌기 위해 增補·修正하여 刊行한 것이 『月印釋譜』이다. 이 冊은 朝鮮 王朝의 釋迦 一代記로서는 決定版이라 할 수 있다.

朝鮮의 歷史編纂 [ 編輯 ]

朝鮮-歷史編纂

朝鮮初期에는 法鼓창신(法古創新)의 建國精神에 따라 歷史를 重要視하여 歷史編纂事業에 國家的인 努力을 기울였다.유학자나 管理의 敎養에 있어서도 經學(哲學 倫理)과 歷史는 날줄과 씨줄로서 重要視되었다. 高麗時代 以來의 慣例를 따라, 歷代 王들의 實錄(實錄)을 次例로 編纂했다. 實錄編纂事業은 朝鮮末期까지 繼續되어 오늘날 朝鮮時代 硏究의 基本資料로 利用되고 있다.실록은 王과 臣下가 政事를 論議하는 過程에 進行된 말과 事件들을 藝文館의 奉敎(奉敎)·대교(待敎)·檢閱(檢閱) 等의 士官(史官)이 國王 옆에서 記錄한 史草(史草)와 各 官廳의 文書들을 綜合하여 春秋館에서 만든 時政記(時政記)를 土臺로 하여 實錄廳(實錄廳)에서 編纂하였다.실록편찬의 公正性을 期하기 위해 王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王의 實錄을 編纂하지 않았으며, 保全에 萬全을 期하기 위해 네 군데의 事故(史庫)에 保管하였다. 그리고 歷代 國王의 훌륭한 言行을 뽑아 記錄한 것이 『國朝寶鑑(國朝寶鑑)』인데, 이것은 1458年(世祖 4年)에 처음 編纂되어 그 뒤로도 繼續되었다. 現在의 政治方向을 設定하는 데는 前王朝(前王朝)의 歷史를 整理하는 것이 重要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太祖 때부터 高麗史 編纂이 活潑히 進行되어 紀傳體로 된 『高麗史(高麗史)』(139卷)가 정인지(鄭麟趾) 等에 依해 文宗 元年(1451)에 먼저 刊行되고, 編年體로 된 『高麗史節要(高麗史節要)』(35卷)가 다음해에 出刊되었다.특히 金宗瑞 等이 編纂한 『高麗史節要』는 太祖 때 鄭道傳 等이 이미 編纂한 바 있던 『考慮國史(高麗國史)』(37卷)를 土臺로 若干의 修正을 加해 이루어진 것이다.『고려사』와 『高麗史節要』는 다같이 性理學的 道德史觀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北進政策을 讚揚하는 功利的 立場이 折衷되어 高麗의 政治와 文化를 整理한 것이다.그러나 前者는 王의 役割을 中心點에 놓고 考慮歷史를 敍述한 反面, 後者는 宰相을 비롯한 官僚의 役割을 돋보이게 썼다는 點에서 差異點이 發見된다. 實際로 後者의 立場에서 高麗史를 整理했던 程度前科 金宗瑞는 똑같이 宰相의 實權을 强化하려고 努力하다가 强力한 王權을 세우려던 太宗과 世祖에 依해서 各各 목숨을 잃는 悲運을 맞이했다.이러한 緣由로 歷代 王들은 『高麗史節要』보다는 『高麗史』를 普及하는 데 힘썼으며, 朝鮮朝 末期까지 實際로 『高麗史』가 더 많이 普及되고 읽혔다.한편, 前王朝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全體 歷史, 卽 統社(通史)를 編纂하는 作業이 太宗 때부터 活潑히 進行되었다. 太宗 때 倦勤 等은 檀君朝鮮에서 始作하여 三國時代까지의 歷史를 整理한 『東國史略(東國史略)』(6卷, 一名 三國史略)을 編纂하였으며, 世宗 때(18年)에는 勸第(權?) 等에게 命하여 檀君朝鮮에서 高麗末까지의 歷史를 노래 形式으로 編纂케 했다. 이것이 『桐國稅年가(東國世年歌)』로서, 朝鮮王朝의 創業過程을 노래로 엮은 『龍飛御天歌(龍飛御天歌)』와 姊妹關係를 갖게 했다.권근의 『東國史略』은 太宗 때의 大明有化政策과 對內的인 綱常倫理의 强化政策이 反映되어 古代文化를 評價하는 基準이 多少 融通性을 잃고 있으나, 一然(一然)의 『三國遺事』에서 散漫하게 늘어놓았던 古代의 여러 나라들을 하나의 體系 속에 系列化시켜 놓음으로써 古代史 整理의 새로운 基準을 設定했다.권제의 『桐國稅年가』는 大體로 아버지 권근이 쓴 『東國史略』의 基準을 따르면서도 李承休의 『帝王韻紀』에 나타난 民族志向的인 雰圍氣를 받아들이고 古代文化를 보다 肯定的으로 評價한 것이 다르다. 이는 世宗時代의 主體性 强化와 關聯되어 있다.세조는 專制王權의 强化와 富國强兵政策의 必要에서 古朝鮮과 高句麗를 雄壯하게 다시 쓰고, 이를 『高麗史』와 連結지어 『東國通鑑(東國通鑑)』이라는 通史를 編纂하려 했다.그러나 資料의 信憑性이 떨어지는 고기類(古記類)를 利用하여 誇張된 古代史를 쓰고자 하는 世祖의 時刻에 不滿을 품은 維新들의 非協調로 完成을 보지 못했다. 그 後 신숙주·노사신(盧思愼) 等은 作業을 繼續하여 1476年(成宗 7年)에 『三國史節要(三國史節要)』(14卷)를 完成했는데, 이는 世祖가 目標로 했던 古代史보다는 훨씬 合理的으로 씌어졌다.그 後 1484年(成宗 15年)에 서거정(徐居正) 等 勳臣系列의 官僚들이 『三國史節要』와 『高麗史節要』를 基礎로 하여 『東國通鑑』을 編纂하였다.그러나 王은 이를 頒布하지 않고 士林系列의 젊은 官僚들의 參與下에 改編하여 『新編東國通鑑』(56卷)을 다음 해에 完成했다. 이것이 오늘날 傳하는 『東國通鑑』이다. 이 冊에는 世祖 때의 屈折된 儒敎政治를 회복시키려는 道德的 理想主義가 지나치게 投影된 欠이 있으나, 三國을 同等한 國家로 取扱하고, 記者(箕子) 以來의 儒敎文化에 對한 自負心이 剛하게 깔려 있다.더욱이 朝鮮王朝 建國 以來로 서로 間에 緊張과 摩擦을 빚어 오던 王과 勳臣, 그리고 士林의 政治的 立場이 어느 程度 折衷된 統社(通史) 體系라는 點에서 朝鮮初期 歷史冊의 代表的 자리를 차지한다.

三國史記 [ 編輯 ]

三國史記

人種의 命을 받아 金富軾이 1145年(人種 23)에 完成한 三國時代社. 高麗王朝가 李資謙의 亂과 妙淸의 亂 等 貴族社會의 動搖를 收拾하고 난 뒤, 앞 時代의 歷史를 公式으로 整理한 情事(正史)로서 紀傳體로 編纂했다. 고기(古記)·遺跡(遺蹟) 或은 中國의 祭祀에서 뽑아 編纂, 刊行하였다.고려시대의 刊行本은 없어지고, 朝鮮時代 와서 1393年

1394年(太祖 2

3)에 진의귀·金巨頭가 開墾, 1512年(中宗 7)에 이계복이 다시 開墾, 以後 木炭 또는 活字로 數次 刊行되었으며, 本紀(本紀)·年表(年表)·支流(紙類)·列傳(列傳)의 順序로 編纂되어 있다. 卽 1

12卷은 新羅本紀, 13

22卷은 高句麗本紀, 23

28卷은 백제본기, 29

31卷은 年表, 32

40卷은 支流, 41

50卷은 列傳이다. 三國史記는 우리나라 古代史 硏究에 없어서는 안 될 貴重한 資料이며, 以後 高麗史와 朝鮮王朝實錄 編纂 等에 影響을 주었다.

『朝鮮王朝實錄』 [ 編輯 ]

朝鮮王朝實錄

朝鮮 太祖 때부터 哲宗에 이르기까지 25代 472年 間의 歷史的 事實을 年月日順(年月日順)에 依하여 編年體(編年體)로 記述한 記錄. 別稱 『조선실록(朝鮮實錄)』.朝鮮에서 實錄을 編纂한 것은 1413年(太宗 13)에 『太祖實錄』 15卷을 編纂한 것이 처음이며, 1426年(世宗 8)에 『定宗實錄』 6卷을 編纂하고 1431年(世宗 13) 『太宗實錄』 36卷을 編纂한 後, 太祖·正宗·太宗의 3代 實錄을 各 2部씩 謄寫하여 1部는 서울의 春秋館(春秋館), 1部는 高麗時代로부터 實錄을 保管하던 忠州史庫(忠州史庫)에 保管하였다.그러나 2部의 實錄만으로는 그 保存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年(世宗 27)에 다시 2部씩 더 謄寫하여 前週(全州)·星州(星州)에 事故(史庫)를 新設하고 各 1部씩 나누어 保管하였으며, 以後 歷代의 實錄을 編纂할 때마다 出版하여 春秋館·忠州·全州·城主의 4思考에 各 1部씩 保管하였다. 다만 太祖·正宗·太宗의 3代 實錄은 活字化하지 못하고 最初에 謄寫한 그대로 保管하였다.1592년(선조 25)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春秋館·忠州·星州 3事故의 實錄은 모두 消失되고, 오직 全州思考의 實錄만 병화(兵火)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당시 政府는 難中인데도 全州思考의 實錄을 內藏山(內藏山) 或은 海州(海州)·江華島·妙香山 等地로 紹介(疏開)하였다가, 平亂 後 國家 財政이 困難하고 物資가 모자람에도 不拘하고 實錄 再出版 事業을 일으켜, 1603年(宣祖 36) 7月부터 1606年(宣祖 39) 3月까지 2年 9個月에 『太祖實錄』부터 『明朝實錄』까지 13代의 實錄 804卷을 出版하였다.이때 出版한 부수는 3部였으나 全州史庫에 있던 實錄 原本과 校訂本(校正本)을 合하여 5部의 實錄이 되었으므로 1部는 國家의 參考를 위하여 옛날과 같이 서울 春秋館에 두고, 다른 4部는 병화를 면할 수 있는 深山幽谷(深山幽谷)과 圖書(島嶼)를 擇하여 江華島 摩尼山(摩尼山)·慶尙北道 奉化郡 太白山·平安北道 寧邊郡 妙香山·江原道 平昌郡 五臺山에 事故를 設置하고 各 1部씩 나누어 保管하였는데, 春秋館·太白山·妙香山에는 新刊本(新刊本), 摩尼山에는 錢主實錄, 五臺山에는 校訂本을 保管하였으며, 1617年(光海君 9) 『宣祖實錄』을 編纂 出版한 後 또한 다섯 事故에 各 1部씩 保管했다.그 後 春秋館에 保管했던 實錄은 1624年(仁祖 2) 李适(李适)의 亂 때 또 다시 消失되어 完全히 없어지고, 妙香山 實錄은 1633年(仁祖 11)에 滿洲에서 일어난 後金(後金:淸)과의 關係가 惡化되어

全羅北道 茂朱郡 赤裳山(赤裳山)으로 移轉하고, 摩尼山 實錄은 1636年(仁祖 14) 丙子胡亂 때 크게 破損되어 落帙(落帙) 落張(落張)된 것이 많이 생겼다.그 後 顯宗 때에 摩尼山 實錄은 保守(補修)되었으나 春秋館 實錄은 永遠히 復舊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摩尼山 實錄은 1660年에 같은 强化도 內의 鼎足山城 안에 事故를 新設하고 1678年에 정족산 事故로 移轉하였다.인조 以後 實錄은 鼎足山·赤裳山·五臺山 事故의 實錄만 남게 되었으며, 以後로 歷代의 實錄을 編纂할 때마다 出版하여 4思考에 追加 保存케 하였는데 前例에 따라서 鼎足山·太白山·赤裳山 思考에는 정인本, 五臺山 思考에는 校訂本을 保管하였다.이렇게 하여 이 4事故의 實錄은 日帝 侵略 當時까지 完全히

保全되어 있었다. 1910年 日帝가 우리나라를 强奪한 後 鼎足山 및 太白山 事故의 實錄은 奎章閣 圖書와 함께 全義 宗親府(宗親府) 자리에 設置한 所謂 朝鮮總督府 學務課 紛失(分室)로 옮기고, 赤裳山 事故의 實錄은 李王職(李王職:只今 舊王宮) 藏書閣(藏書閣)에 옮겼으며, 五臺山 事故의 實錄은 도쿄 帝國大學(東京帝國大學:只今 도쿄대학)에 가져다 두었는데 五臺山本은 1923年 關東 大地震(關東大地震) 當時에 다 타버리고, 정족산本과 太白山本은 1930年 奎章閣 圖書와 함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只今 서울大學校)으로 옮겨졌다.이리하여 光復 當時까지 정족산本과 太白山本이 서울대학교 圖書館에 남아 있고, 舊王宮 藏書閣에 있는 赤裳山本은 光復 後 盜難事件이 發生하여 落券(落卷)이 많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6·25戰爭 當時 釜山으로 紹介하였는데 釜山火災 後 行方이 杳然하다. 그러므로 現在 完全히 남아 있는 實錄은 오직 서울대학교 中央圖書館에 保管되어 있는 정족산本과 太白山本뿐이라 하겠다. 그 後 1929年부터 1932年까지 4年 동안에 경성제국대학에서 太白山本을 底本(底本)으로 하여 實錄 全體를 寫眞版으로 影印한 일이 있다.그러나 이때 겨우 30部밖에 出版하지 않았으며 그것도 大部分 日本으로 가져가고 우리나라에는 總 8部밖에 두지 아니하였다. 光復 後 國內外를 莫論하고 우리나라의 歷史와 文化를 硏究함에 있어 이 實錄의 絶對的인 普及의 必要를 느껴 정음사(正音社)에서 刊行에 着手하다가 中斷되었고, 1955年부터 1958年까지 4年 동안에 國史編纂委員會에서 太白山本을 8分의 1로 縮刷 影印하여 菊倍版(菊倍版) 洋裝本(洋裝本) 48冊으로 刊行하여 國內 各 圖書館은 勿論 龜尾(歐美) 各國의 重要한 大學圖書館에 保管되어 있다.한편 1953年 以來 日本 學習園(學習院) 東方文化硏究所(東方文化硏究所)에서 影印本으로 縮刷 刊行하고 있다. 이 實錄은 朝鮮時代社 硏究의 根本資料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政治·經濟·法律·文學·外交·軍事·産業·交通·通信·美術·工藝·宗敎 其他 무엇이든지 우리나라 文化를 硏究하려면 絶對로 必要한 史跡이나, 오로지 宮廷(宮廷)을 中心으로 한 事件의 記錄이어서 地方의 實情을 端的으로 懶怠내지 못하는 欠도 있다.또한 宣祖 때부터의 實錄은 技士가 漸次 간략되었고, 또 黨爭 때문에 內定(內政)에 關한 記事는 꾸민 데가 많다. 그 反面 外交에 關한 記事는 꾸밈이 적고, 中國·萬株·日本·遺構(琉球) 等과의 交涉 記錄도 매우 많다. 그런데 朝鮮 끝 王인 高宗과 順從의 實錄은 編纂되지 못하고 있다가 日帝 때 日本人들의 指示 아래 만들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部分이 많아 『朝鮮王朝實錄(朝鮮王朝實錄)』이라 하면 一般的으로 哲宗(哲宗) 때까지의 實錄을 의미하게 된다.

世宗實錄地理志 [ 編輯 ]

世宗實錄地理志

『世宗實錄』에 실린 地理誌. 1454年(端宗 2)에 編纂. 各 道(道)의 沿革·古跡·물山(物産)·地勢 等이 詳細하게 記錄되었으며 『世宗實錄』 163卷 中에 收錄되어 있는데 그 後에 나온 『東國輿地勝覽(東國與地勝覽)』의 淵源이 되었다.1938년 中樞院(中樞院)에서 『矯正世宗實錄地理志(校正世宗實錄地理志)』라는 題目으로 出版되었다.

三國史節要 [ 編輯 ]

三國史節要

三國史의 要點을 年代別로 編纂한 冊. 朝鮮 世祖 때 着手한 것을 成宗이 繼承하여 노사신·徐居正·異派·김계창·최숙정 等이 完成하였다. 이 冊은 總 15卷인데, 三國 以前의 上古史는 외기(外紀)로서 卷數에 包含하지 않고 14卷으로 目次를 作成하였다.『삼국사기』를 基本으로 하고 『三國遺事』 『殊異傳』 『東國李相國集』 『世宗實錄地理志』 『高麗史』

等을 통해 補完하였다. 舌禍·神話·傳說·民譚 等은 勿論이고, 天災地變·宗敎行事·風俗·사냥·敎範·方言·築成·戰亂 等 國家의 興亡과 百姓의 安寧에 관계되는 事件을 詳細히 收錄하였다.

事故 [ 編輯 ]

史庫

實錄의 産室(散失)을 防止하기 위하여 이를 首長(收藏)하던 곳. 壬辰倭亂 以前에는 서울의 春秋館, 忠州(忠州)·星州(星州)·全州(全州)의 3史庫(三史庫)에 實錄을 奉安하였는데, 宣祖 25年(1592)의 壬辰倭亂으로 全州思考本만이 妙香山으로 里長(移藏)되고 나머지는 모두 消失되어 버렸다.동왕 39年(1606) 3部의 活字本 實錄과 全州思考의 原本 및 校訂本을 合한 5部의 實錄이 成立되었다. 서울 春秋館, 江華島 摩尼山(摩尼山), 奉化(奉化) 太白山, 寧邊(寧邊) 妙香山, 平昌(平昌) 五臺山에 各各 事故를 設置하고, 春秋館·太白山·妙香山에는 新人本(新印本)을, 摩尼山에는 全州思考 原本을, 五臺山에는 校訂本을 奉安하였다. 仁祖 以後 實錄은 4部를 作成하여, 鼎足山(鼎足山)·太白山·赤裳山(赤裳山)·五臺山의 4思考에 扮裝하였으며, 이들은 朝鮮 末期까지 完全히 保存되었다.

『高麗史』 [ 編輯 ]

高麗史

紀傳體(紀傳體)로 된 高麗 王朝의 正史. 太祖가 卽位 初에 정도전·定總(鄭摠) 等에게 命하여 同王 4年(1396) 編年體로 된 『高麗史(高麗史)』 37卷이 完成되었는데, 通稱 『考慮國史』로 現傳(現傳)하지는 않는다.이 考慮國史는 그 뒤 太宗 때에 유신에게 命하여 矯正케 하였으나 完成을 보지 못하였고, 世宗 때 王命으로 四國(史局)을 열어 鄭麟趾·金宗瑞 等이 改撰(改撰)에 着手하였다.이 일은 文宗 1年(1451)에 完成되어, 端宗 2年(1454) 刊行에 着手하였는데 體制는 司馬遷(司馬遷)의 『詐欺(史記)』를 본떠 世가(世家)·지(志)·표(表)·열전(列傳)의 4項目으로 나누어 紀傳體로 敍述하였다.『고려사』는 그 歷史 敍述의 理論이나 方法보다 高麗時代 歷史의 根本 史料로서의 價値面에서 意義가 크다.

地理誌 編纂 [ 編輯 ]

地理志-編纂

朝鮮初期에는 歷史에 對한 關心이 높아짐과 同時에 中央集權의 實效를 높이기 위해 國土의 自然 및 人文地理的 條件을 깊이 있게 整理할 必要가 있었다. 그리하여 國土에 對한 調査가 이루어지고, 그 調査資料에 根據하여 地理誌와 指導가 活潑하게 編纂되었다.지도는 太宗 1402年(太宗 2年)에 二回(李?), 李茂(李茂), 김사형(金士衡), 倦勤 等이 王命으로 「婚日康里歷代國道指導(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라는 世界地圖를 만들었다. 이것은 아라비아 地圖學의 影響을 받아 만든 원(元)나라의 世界地圖를 한層 正確하게 改正하고, 여기에 韓半島 地圖를 덧붙여 만든 것으로서, 유럽·아프리카·中國·日本 그리고 韓半島 等이 그려져 있다. 아메리카 大陸은 그때까지 發見되지 않아 빠져 있다.이 指導는 只今 남아 있는 世界地圖 中 東洋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位 世界地圖에 들어 있는 우리나라 地圖는 里會가 製作한 것인데, 韓半島의 모습이 現代指導를 보는 것처럼 比較的 正確하다.이회는 이 地圖를 土臺로 더욱 細密하고 正確한 「八道圖(八道 圖)」를 作成했으나 只今 남아 있지 않다.세종 때에는 鄭陟(鄭陟)李 새로 領土로 編入된 北方地方을 實測하여 한層 精密한 「八道圖」를 製作했으며, 그 後 文宗

世祖 때에 걸쳐 鄭陟·梁誠之(梁誠之) 等이 度·週·部·郡縣別로 實測地圖를 製作하고, 이를 모아서 1463年(世祖 9年)에 『東國地圖(東國地圖)』라는 指導集을 完成하였다.이것은 朝鮮初期 地圖製作事業의 白眉로서 成宗때 編纂된 『東國輿地勝覽』에 反映된 듯하나, 只今은 傳하지 않는다.조선초기의 全國紙도에는 滿洲가 반드시 그려져 있고, 랴오허와 헤이룽강이 强調되어 있다.이것은 『高麗史』 『地理誌』나 『東國輿地勝覽』 序文에서 우리나라를 ‘鰻鱺(萬里)의 나라’로 자랑하면서 滿洲를 美收復地區로 看做하는 것과 關聯이 있다.또 地圖에는 山脈·河川·섬·橋梁·나루터·距離標示·行營(行營)·水泳(水營) 等이 仔細히 標示되어 있어 行政과 國防의 必要性에서 製作되었음을 보여 준다.지리지 編纂은 世宗 때부터 本格化되어 1432年(世宗 14年)에 『新撰八道地理志』가 完成되었으며, 이를 縮小하여 1454年(端宗 2年)에 世宗實錄의 한 部分으로 넣었다. 이를 『世宗實錄地理志』(8卷)라 한다. 이 冊은 郡 單位로 60餘 項目의 事項을 記錄하고 있는데, 各 軍의 沿革·人物·古跡·土地·戶口·姓氏·군정수(軍丁數)·물山 等이 詳細히 紹介되어 있어 地方行政과 財政 그리고 國防의 必要에서 編纂된 것을 보여 준다.지리지 編纂事業은 文宗

世祖 때에도 繼續되었는데, 이때는 양성지(梁誠之)의 主導下에 軍事的 事項이 더 詳細하게 調査·記錄되었다.이것은 當時 中國과의 緊迫한 緊張關係 속에서 國防力이 强化되던 趨勢와 關聯이 있다. 梁誠之가 主導한 地理誌 編纂事業은 1478年(成宗 9年) 完成되어 『八道地理志』(8卷)라 하였다.그러나 이 冊은 只今 남아 있지 않고, 그보다 앞선 1469年(睿宗 元年)에 編纂된 『慶尙道續撰地理誌(慶尙道續撰地理志)』만이 傳한다.『팔도지리지』는 그 後 『東文選』 中에서 뽑은 詩文(詩文)을 合하여 1481年(成宗 12)에 『東國輿地勝覽(東國輿地勝覽)』(50卷)으로 刊行되었다.그러나 노사신·徐居正·梁誠之·강희맹 等 勳臣들이 編纂한 이 冊은 頒布되지 않고, 1486年(成宗 17年)에 김종직·최부(崔溥) 等 士林官僚들에게 다시 改撰하게 했다. 이것이 『新撰東國輿地勝覽』(55卷)이다.그러나 이 冊도 演算組 때 임사홍(任士洪) 等이 다시 修正하고, 1530年(中宗 25年) 履行(李荇) 等이 漏落된 것을 增補하여 『新增東國輿地勝覽』(55卷)이라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傳해지고 있다.처음에 勳臣들이 編纂한 『東國輿地勝覽』은 우리나라를 ‘萬里對局’으로 보는 立場에서 經濟·國防에 關한 事項을 많이 收錄한 것이었으니, 士林(士林)李 改撰한 것은 國土를 鴨綠江 以南으로 限定한 基礎 위에서 行政的 便覽에 적합하도록 한 것이다. 말하자면 電子가 富國强兵을 目標로 한 地理誌라면, 後者는 國土의 現狀維持와 對內的인 政治安定에 焦點을 맞춘 地理誌 이다.한편, 朝鮮 初期에는 國家의 여러 行事에 對한 規範을 새로이 制定할 必要에서 1474年(成宗 5)에 申叔舟와 鄭陟 等에 命하여 『國朝五禮儀(國朝五禮儀)』(8卷)를 編纂케 했다.이 冊은 歷代의 制度를 參考하여 吉禮(吉禮, 祭祀儀式), 嘉禮(嘉禮, 外交·弔賀·婚禮 等), 賓禮(賓禮, 使臣接待), 軍禮(軍禮, 軍事儀式), 그리고 凶禮(凶禮, 葬禮儀式) 等 다섯 가지 意識을 整理한 것이다. 그리고 끝에 代父(大夫)와 司書인(士庶人)들의 葬禮儀式을 添加했다.또한 一般百姓들의 倫理規範의 核心이 되는 君臣·父子·夫婦의 倫理를 强化하기 위해 1434年(世宗 16年) 直提學 偰循(?循) 等이 王命으로 『三綱行實圖(三綱行實圖)』(3卷)를 編纂했다. 이 冊은 中國과 우리나라의 孝子·忠臣·烈女 中에서 模範이 될 만한 人物 300餘 名을 뽑아 그들의 行跡을 그림을 붙여서 說明한 것이다.조선 初期에는 農業技術이 發展함에 따라 그 成果를 綜合·整理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農書들이 刊行되었다.관찬농서로서 가장 먼저 出刊된 것은 1430年(世宗 12年)에 正初(鄭招) 等이 編纂한 『農事直說(農事直說)』이다.이 冊은 中國의 代表的 農書인 『齊民要術』과 『農桑輯要』 및 『四時纂要(四時纂要)』를 參考하여 中國의 先進的인 華北農法을 받아들이면서 村老(村老)들의 實際 經驗을 尊重하여 우리나라의 氣候風土에 가장 알맞은 獨自的인 農法을 歷史上 처음으로 整理한 것이다.이 冊은 朝鮮後期에 中國 江南農法을 많이 받아들인 申洬의 『農家集成(農歌集成)』(1655年)이 나올 때까지 營農의 基本指針서로 큰 影響力을 미쳤다.한편, 成宗 때 강희맹(姜希孟)은 錦洋(始興)地方을 中心으로 한 京妓地方의 農事經驗을 土臺로 하여 『衿陽雜錄(衿陽雜錄)』을 著述하여 81種의 穀食栽培法을 仔細히 說明했다. 이 冊은 뒤에 『農事直說』과 함께 한 冊으로 刊行되었다.조선 初期에는 養蠶, 牧畜 그리고 園藝作物 栽培法에 關한 理論書들도 編纂되었다. 世祖 때 梁誠之는 『農蠶서(農蠶書)』와 『軸목서(畜牧書)』를 刊行했고, 『잠鉏註解(蠶書註解)』와 國文飜譯판 『잠서』도 이때 編纂되었다. 16世紀初에는 김안국(金安國)李 다시 잠書를 飜譯해 『蠶書諺解』(1518年)라 하여 農家에 普及했다. 園藝에 關한 冊으로는 姜希孟의 兄 姜希顔이 世宗 때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이 有名한데, 이 冊에는 主로 花草 栽培法이 記錄되어 있다.

科學技術의 發展 [ 編輯 ]

科學技術-發展

天文學은 農業과 直接的인 關聯이 있지만, 政治秩序를 하늘의 理致와 관련시켜 보기도 하여 매우 重要하게 取扱되었다.재상이 天文學을 管掌하는 觀象監(觀象監)의 最高責任者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해와 달, 그리고 별에 對한 觀測을 위해 世宗 때 景福宮 안에 簡儀臺(簡儀臺)라는 天文臺를 設置하고 여러 가지 觀測機構를 비치·運營했으며, 三角山·金剛山·摩尼山·白頭山·智異山·漢拏山 等地에도 天文學者를 派遣하여 때때로 北極의 높이와 日蝕·月蝕 等 天體運行을 觀測했다.이 밖에 世宗 때에는 仰釜日晷 (해時計)·日星定時儀(해時計와 달時計를 겸한 것)·自擊漏(물時計) 等 여러 時計를 만들어 서울 혜정교(惠政橋)와 宗廟 앞에 設置하여 市民들에게 時間을 알렸으며, 報漏閣(報漏閣)을 宮안에 設置하고 自擊漏를 備置하여 宮中에 時間을 알렸다(세종 16年).또 1438年(世宗 20年)에는 賤民技術者들을 시켜 玉淚機輪(물時計)을 만들어 宮안의 欽敬閣(欽敬閣)에 設置했는데, 技術 水準이 매우 높았다.조선 初期 天文學의 成果 中 또 한 가지 注目할 만한 것은 『七政算(七政算)』이라는 우리나라 獨自的인 달曆을 만든 것이다.이 달曆은 1442年(世宗 24年)에 集賢殿과 書雲觀 學者들이 王命으로 우리나라 歷代의 曆法(曆法)을 綜合 整理한 基礎 위에 원·明의 曆法을 參酌하여 만든 것으로 內篇과 外篇으로 構成되었다.내편은 北京(北京)을 基準으로 한 中國과 달리 서울을 標準으로 作成한 달曆으로서 해와 달 그리고 行星(行星)들이 運行하는 原理와 位置, 視角 等이 오늘날의 달曆과 거의 비슷하게 說明되어 있고, 서울地方의 밤과 낮의 길이가 比較的 正確하게 記錄되어 있다.외편은 우리가 쓰기 위한 달曆이 아니라, 이슬람력(回回曆)을 理解하기 위해 改正·增補하여 飜譯해 놓은 것이다.이 밖에도 農事振興課 關聯하여 여러 천문서가 더 編纂되었고, 每日每日 氣象變化를 記錄하여 놓기도 했다.조선왕조 實錄에는 날짜別로 그 날의 日記·달무리·해무리·彗星·地震 等 自然變化에 關한 事項들이 빠짐없이 記錄되어 있어 當時 天文·氣象學에 關한 爲政者의 關心과 理解 水準을 엿볼 수 있다.의학은 力學(譯學)과 더불어 國家에서 奬勵한 雜學의 하나였으며, 實際로 聰明한 學徒 中에서 醫學을 하는 이가 많았다. 王室과 國民保健에 對한 關心이 그만큼 컸었다.먼저 藥材에 對한 理論書로는 1428年(世宗 10年)에 『鄕約採取月令(鄕藥採取月令)』을 編纂하여 우리나라에서 生産되는 數百 種의 藥材를 紹介했으며, 1433年(世宗 15年)에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盧重禮(盧仲禮) 等에 依해 『鄕藥集成方』(鄕藥集成方)』(85卷)李 編纂되었다.이 冊은 7百餘 種의 國産藥材를 紹介하고, 1千 種에 가까운 病症에 對한 治療·豫防法을 提示하고 있다.한편, 1445年(世宗 27年)에는 東洋醫學에 關한 書籍과 理論을 集大成한 醫學百科事典人 『醫方類聚(醫方類聚)』(365卷)가 전순의(全循義) 等에 依해서 編纂되었다.이 冊에는 153種 內外의 醫學冊들이 部門別로 網羅되어 있는데, 이렇게 厖大한 醫學百科事典이 編纂된 것은 世界에서 처음이다.17세기 初 光海君에 編纂된 『東醫寶鑑』은 이러한 蓄積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醫學의 發達은 特히 博物學 및 道敎와 깊이 關聯되어 있어 朝鮮初期 이 方面의 理解 水準이 높았음을 아울러 보여준다.교육진흥에 따른 活潑한 編纂事業은 活字印刷術과 製紙術의 發達을 促進시켰다.이미 13世紀頃에 世界 最初로 發明되어 쓰이기 始作한 金屬活字는 朝鮮初期 以後 더욱 改良되어, 癸未字(太宗 3年)·庚子字(世宗 3年)·甲寅字(世宗 16年) 等이 次例로 鑄字所에서 鑄造되었다. 그 中에서 特히 甲寅字(甲寅字)는 글字 모습이 아름답고 印刷하기에 便하게 鑄造되었을 뿐 아니라, 活字가 20餘萬개나 되어 가장 優秀한 活字로 꼽힌다.활자 만드는 데 쓰는 金屬은 처음에는 구리였으나 世宗 18年부터는 그보다 剛한 납을 쓰기 始作했다. 하루에 만드는 活字鑄造 數量은 獨逸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數量의 約 10倍에 達하는 3,500字 程度나 되었다.또 從前에는 밀(蜜)을 써서 活字를 固定시키는 方法을 썼으나, 世宗 때부터는 植字版(植字版)을 組立하는 方法을 創案하여 從前보다 두 倍 程度의 印刷能率을 올리게 되고 印刷效果도 훨씬 鮮明하게 되었다.조선 初期에 가장 큰 印刷所는 校書館이었는데, 이곳에서는 140餘 名의 印刷工이 所屬되어 當時로는 世界 最大規模를 자랑했다.지방에서도 監營이나 査察·鄕校 等에서 木版印刷에 依한 出版活動이 活潑했고, 個人도 木版으로 文集을 찍어내는 例가 許多하였다. 朝鮮初期의 敎育水準이 높고 鄕村에까지 書籍이 普及될 수 있었던 것은 出版·印刷技術의 發達이 큰 要因이 되었다.세종 때 學者 변계량(卞季良)李 쓴 『甲寅字發(甲寅字跋)』에 “印刷되지 않은 冊이 없고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은 多少 誇張된 表現이긴 하지만, 朝鮮初期 出版文化의 높은 水準을 말해 준다. 우리나라의 印刷技術은 日本·中國 等 이웃나라의 印刷技術의 發展에 적지 않은 影響을 주었다.조선 初期에는 우리나라의 地勢에 맞는 戰術을 開發하고 歷代의 戰爭史를 整理하여 各種 兵書(兵書)가 編纂되었다. 太祖 때 鄭道傳은 앞선 時期의 兵書를 參考해 獨自的인 『進法書(陣法書)』를 編纂하였다.그 뒤, 文宗 때에는 김종서(金宗瑞)의 主導下에 古朝鮮에서 高麗末에 이르는 戰爭史를 整理하여 『東國兵鑑(東國兵鑑)』(2卷)李 編纂되고, 이어 古代에서 朝鮮初期에 이르는 期間의 主要 戰鬪를 戰略的인 側面에서 整理한 『歷代兵要(歷代兵要)』도 刊行되었다. 또 같은 時期에 『陣法(陣法)』이 編纂되어 五衛制에 기초한 軍事訓鍊方法과 陳(陣)을 치는 方法이 整理되었다.이 冊은 鄭道傳의 進法書를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뒤에 『兵將圖說(兵將圖說)』이라고 이름을 고쳐 利用되었다. 한便, 火氣 製作과 使用法을 整理한 『總統登錄(銃筒謄錄)』李 世宗 때 編纂되기도 하였다. 武器는 軍器監에서 主로 製作하였으나, 地方 郡縣에서도 製作하는 일이 많았다. 高麗末 崔茂宣에 依해서 創案된 火藥武器는 朝鮮初期에 더욱 改良되어 그 性能이 두 倍 以上 높아졌고, 大砲의 射程距離도 最大 1千 褓에 이르러 從前보다 4

5倍나 커졌다.문종 때에는 火車(火車)라고 불리는 一種의 바퀴 달린 로켓砲가 製造되어 射程距離가 約 1킬로미터에 達하였다. 이것은 수레 위에 神機箭(神機箭)이라는 화살 100個를 設置하고, 甚至於 불을 질러 쏘게 한 것이다.군선(軍船)으로서 太宗 때 突擊用 배로서 거북船(龜船)이 만들어진 일이 있으며, 鼻居刀船(鼻居刀船)이라고 불리는 작고 날쌘 戰鬪善이 製造되어 海戰에서 威力을 보였다. 그러나 武器製造 技術은 對外關係가 安定된 成宗 때부터 衰退하기 始作하여 壬辰倭亂 때 古典을 하는 原因이 되었다.

『農事直說』 [ 編輯 ]

農事直說

農事의 開設을 解說하여 놓은 農書(農書) 中 現存하는 催告書(最古書). 世宗이 正初(鄭招) 等에게 命하여 同王 11年(1429)에 編纂했다. 從來에는 中國의 農書에만 依存해 왔으나 世宗은 風土에 따른 農法의 差異를 考慮하여 各 道 農夫들의 經驗을 土臺로 朝鮮의 實情에 알맞은 農法을 著述하게 되었다. 內容을 보면, 먼저 一般論으로서 種子와 土壤을 다루는 法을 說明하고, 各論(各論)으로 各種 作物의 栽培法을 簡潔하게 敍述하고 있다. 이 冊은 內容이 重要 穀食類에 局限되고 또 仔細하지 못한 欠은 있으나 農書의 嚆矢로서, 또 우리 式의 農法을 편 自主的 著書로서 農業 技術의 變遷을 살피는 데 좋은 資料이다.

掌樂署 [ 編輯 ]

掌樂署

朝鮮 時代 音樂에 關한 일을 맡아 보던 官廳. 高麗의 管制를 繼承하여 雅樂署와 典樂署를 合해 1422年(世宗 4) 掌樂署로 改編하고 1458年(世祖 4) 掌樂署에 樂學圖鑑을 倂合하여 掌樂院(掌樂院)이라고도 한다. 官吏로는 情3品 벼슬인 情(正)을 비롯하여 添丁·主婦 等 23名과 樂士·樂生 等이 있었다. 燕山君 때에는 妓生과 握手(樂手)를 두어 王의 享樂을 위한 官廳으로 變하였다. 中宗이 王位에 오른 뒤부터 다시 音樂의 編纂·敎育·行政 等의 일을 맡게 되었다.

測雨器 [ 編輯 ]

測雨器

世宗 때 優良 分布를 測定하던 器具. 世宗 24年(1442) 측우에 關한 制度를 設定하여 書雲觀(書雲觀)에서 이 機構로 優良의 深圳(深淺)을 測量·記錄하게 했으며, 地方에서는 各 官家의 뜰에 設置하여 守令 自身이 測量·記錄하게 했다. 처음에는 쇠로 만들었으나 뒤에 구리로 만들기도 하였고, 以外에 自己·陶器로 代用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탈리아의 가스텔里보다 約 2百 年 앞선 것이다.

蔣英實 [ 編輯 ]

蔣英實

世宗 때의 科學者. 本貫은 牙山(牙山). 벼슬은 上護軍(上護軍)에 이르렀으며, 世宗이 易象(曆象)에 關한 器具를 製作하려고 할 때 利川(李?)과 함께 共譯(工役)을 監督하여 7年 만에 完成했다.특히 同王 20年(1438) 景福宮 뜰에 渾天儀(渾天儀)를 간수하는 欽敬閣(欽敬閣)을 세울 때 이 모든 工役을 監督했다. 그는 西洋보다 近 2世紀나 앞서서 測雨器를 만들었으며, 그 밖에 間의(簡儀)·자격루(自擊漏) 等을 製作 監督하는 等 機械·建築·科學 發展에 功이 컸다.

『鄕藥集成方』 [ 編輯 ]

鄕藥集成方

世宗 15年(1413)에 編纂된 醫學書. 世宗 13年(1431) 權採(權採)·유호통(兪好通)·盧重禮(盧重禮) 等이 在來의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土臺로 하고 기타 醫書를 參考, 同王 15年(1433) 이 冊을 完成했다. 여기에는 各種 藥方文과 鍼灸法(鍼灸法) 및 鄕藥本草(鄕藥本草)·포제법(?製法) 等이 들어 있다.

『醫方類聚』 [ 編輯 ]

醫方類聚

世宗 27年(1445)에 完成된 醫學書. 『醫方類聚』는 冊이름 그대로 臨床的 處方을 病症에 따라서 分類 集成한 것으로 世宗이 集賢殿 副校理 김예몽(金禮蒙), 유성원(柳誠源) 等 여러 文官과 衣冠들에게 命하여 모든 醫方(醫方)을 蒐集·分類하여 1서(一書)로 合編하였다. 뒤에 다시 集賢殿 直提學 金汶(金汶)·신석조(辛碩祖), 副校理 이예(李芮), 乘務員 校理 김수온(金守溫)에게 命하여 衣冠을 모아 編纂케 하고 安平大君 等으로 하여금 甘受케 하였다. 3年 만인 同王 27年(1445)에 3百 65卷을 編成하게 되었으나 그것이 너무 厖大하여 容易하게 刊行하지 못하고 있다가 成宗 8年(1477) 겨우 30部를 刊行하였다. 이 冊은 그 後 大部分 亡失되었다가 高宗 13年(1876) 復刊本이 日本에서 우리나라에 獻納되었다.

許浚 [ 編輯 ]

許逡 (1546

1615)

朝鮮 中期의 醫學者. 本館 陽川(陽川). 字는 請願(淸源), 號는 구암(龜岩). 宣祖 때 內의(內醫)가 되어 王室의 診療에 功을 세웠다. 1592年(宣祖 25) 壬辰倭亂 때 語義로 王을 끝까지 怙終(扈從)하고 돌아와 1604年 扈聖功臣 3等에 책록되고, 1606年 楊平郡에 封해졌다. 後期 大簡의 反對로 職位가 取消되고, 1608年 宣祖가 죽자 治療를 疏忽히 했다는 罪로 한때 파직당했다.1610년(광해군 2) 16年의 硏究 끝에 完成한 『東醫寶鑑』은 朝鮮 韓方 醫學의 發展에 큰 影響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世紀에는 日本과 淸나라에서도 刊行될 만큼 높이 評價되었으며 只今도 여러 나라에서 飜譯 出版되고 있다. 著書에는 『辟易新房』, 『新纂辟瘟方』, 『諺解救急方』, 『諺解痘瘡集要』, 『諺解胎産集要』, 『맥結集性』, 『찬도방론맥결집성』 等이 있다.

惠民署 [ 編輯 ]

惠民署

朝鮮時代 醫藥과 一般 庶民의 治療를 맡아본 官廳. 1392年(太祖 1) 高麗의 制度를 繼承하여 慧敏故國(惠民庫局)을 設置, 1414年(太宗 14) 惠民局이라 고쳤다. 1466年(世祖 12) 惠民署로 바꾸었다가, 1882年(高宗 19) 廢止하였다. 官員은 他官이 兼任하는 製造(提調) 1名, 主婦(主簿)·醫學敎授·職場(直長)·奉仕(奉事)·醫學訓導 各 1名과 參奉 4名이 있었다. 그 中 採用試驗의 最高 得點者와 職場 以上의 官員 中 1名은 久任員(久任員)이고, 그 外는 遞兒職(遞兒職)이었다.

『東醫寶鑑』 [ 編輯 ]

東醫寶鑑 光海君 2年(1610)에 完成된 東洋醫學의 寶鑑(寶鑑). 許浚(許浚)李 宣祖의 命을 받아 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 等과 編輯에 着手했는데, 精油(丁酉)의 亂으로 中斷되었다가 許浚 單獨으로 그 일을 繼續하였다. 前後 10餘 年에 걸친 作業 끝에 光海君 3年(1611) 드디어 完成하였고, 同王 5年(1613) 刊行되었다. 內容은 內科學人 내經편(內景篇), 外科學人 外形便(外形篇), 雜病便, 藥房 關係의 湯液篇(湯液篇), 寢具便 等으로 되어 있으며, 各 病마다 處方을 풀이한 體制 井然한 冊이다. 中國과 日本에도 널리 紹介되었다.

諺解救急方 [ 編輯 ]

諺解救急方

危急한 患者를 求하는 藥方文(藥方文)을 한글로 飜譯한 冊. 活字本(活字本). 2卷 2冊으로 宣祖 때의 醫書이며 許埈珥 지은 것을 1466年(世祖 12) 刊行하였다. 現在 原本은 傳하지 않고 後代 復刊本의 完帙은 日本에 상권은 서울大學 伽藍文庫에 所藏되어 있다. 日本에 있는 完帙本은 한글學會에서 1975年 英人·刊行하였다.

癸未字 [ 編輯 ]

癸未字

朝鮮時代 最初의 銅活字. 太宗 3年(1403) 王命으로 鑄字所를 設置하고 藝文館 大提學 移職(李稷), 總裁 민무질(閔無疾) 等이 구리로 이 癸未字를 만들었다. 이때 鑄造된 活字 數는 約 10萬 字나 된다.자본(字本)은 송판본(宋板本)의 『高柱(古註)』 『詩經』 等을 利用하였으며, 인쇄본으로 『宋朝表牋總類』 1冊, 『17私撰古今桶요(十七史纂古今通要)』 1冊이 現存한다.

甲寅字 [ 編輯 ]

甲寅字

1434年(世宗 16)에 만든 구리活字. 衛夫人字(衛夫人字)라고도 한다. 王命을 받들어 知中樞院事(知中樞院事) 利川·直提學(直提學) 金墩(金墩)·直錢(直殿) 김호(金鎬)·護軍(護軍) 蔣英實(蔣英實)·僉知司譯院社(僉知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사인(舍人) 鄭陟(鄭陟)·主婦(主簿) 李純之(李純之) 等의 競演(經筵) 所長(所藏)의 『효순사실(孝順事實)』 『爲先陰騭(爲善陰?)』 『論語(論語)』 等의 明나라 初期 版本(板本)을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것으로 庚子字(庚自字)보다 模樣이 좀 크고 自體(子體)가 바르고 깨끗한 것이 20餘 萬字나 되었다. 現存하지 않으며 그의 印刷本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2冊·『증간왕장원집주분류소동파선생시(增刊王狀元集注分類蘇東坡先生詩)』 1冊·『신간대자부음석문삼주(新刊大字附音釋文三注) 1冊이 있다.

강희안 [ 編輯 ]

姜希顔 (1419

1464)

世宗 때의 文臣. 號는 人材(仁齋). 世宗 23年(1441) 文科에 及第하여 死六臣 皮靴(被禍)에 連坐되었으나 成三問의 辯護로 慘禍를 謀免했다. 時(詩)·西(書)·火(畵)의 3節(三絶)로 稱頌되었다.만년에는 市·西·火爐 消日하였으나 天機(賤技)라 하여 他人의 請에는 應하지 않았다 한다. 신숙주·鄭麟趾·성삼문 等과 訓民正音 解釋을 修撰(修纂)하였다.

安堅 [ 編輯 ]

安堅

朝鮮初의 畫家. 號는 玄洞子(玄洞子), 本貫은 止哭(池谷). 花園(畵員)으로서 護軍(護軍)을 지냈다. 世宗 29年(1447) 安平大君을 위하여 「夢遊桃源圖(夢遊桃園圖)」를 그리고, 이듬해 「意匠圖(儀丈圖)」를 그렸다. 聰明·碇泊(精博)하여 古畫(古畵)를 보고 깊은 境地를 體得했으며, 여러 畫家의 長點을 折衷하여 雄渾한 筆致로 많은 名作을 남겼다. 特히 山水畫에 뛰어났다.

崔涇 [ 編輯 ]

崔涇

朝鮮初의 畫家. 號는 謹齋(謹齋), 本貫은 耽津(耽津). 安山(安山) 出身. 世宗 때 圖畫署(圖畵署) 畫員을 거쳐 別提(別提)에 이르렀다. 安堅의 山水畫와 맞설 만큼 人物畫를 잘 그렸다. 成宗 3年(1472) 소헌왕후(昭憲王后)·世祖·睿宗·德宗의 御眞(御眞)을 그린 공으로 成宗이 堂上官(堂上官)에 임명하려 했으나, 言官(言官)의 反對로 取消되고 同王 15年(1484) 堂上官에 올랐다.

이상좌 [ 編輯 ]

李上佐

朝鮮初의 畫家. 號는 학포(學圃), 本貫은 全州(全州). 本來 어느 선비의 奴僕이었으나 그림에 뛰어나 中宗의 特命으로 圖畫署에 補職되었다. 特히 山水畫·人物畫에 뛰어났고 北宗畫風(北宗畵風)의 그림을 그렸다. 中宗이 죽었을 때 肖像을 그렸고, 明宗 때 功臣들의 肖像을 그려 原從功臣(原從功臣)李 되었다.

안평대군 [ 編輯 ]

安平大君 (1418

1453)

世宗의 셋째 아들. 이름은 龍(瑢), 號는 비해당(匪懈堂)·梅竹軒(梅竹軒). 世宗 10年(1428) 安平大君에 封해지고 그 後 成均館에서 學問을 닦았다. 同王 20年(1438) 咸鏡道에 陳(鎭)을 新設하자 여러 次例 野人을 討伐했고, 황보인·金宗瑞 및 文臣들과 提携하여 首陽大君側과 對立하는 氣勢를 醉했다.단종 1年(1453)의 癸酉靖難 때 江華에 流配되었다가 교동에 옮겨져 四史(賜死)되었다. 詩文에 뛰어났고, 當代의 名筆로서 信望이 높았다.

양사언 [ 編輯 ]

楊士彦 (1517

1584)

朝鮮의 文身·書藝家. 字는 응빙(應聘), 號는 봉래(蓬萊)·玩具(完邱)·창해(滄海)·解傭(海容). 本貫은 淸州(淸州). 敦寧主婦(敦寧主簿) 희수(希洙)의 아들. 兄 사준(士俊), 동생 詐欺(士奇)와 더불어 兄弟가 모두 재주가 뛰어났다.1446년(명종 1) 文科에 及第, 帶同勝(大同升)을 거쳐 三等(三登)·咸興(咸興)·平昌(平昌)·江陵(江陵)의 地方官을 歷任한

後 淮陽(淮陽) 郡守, 이어서 鐵原(鐵原) 郡守를 지냈다. 淮陽 郡守로 있을 때 金剛山에 자주 들어가 大自然을 즐겼고 金剛山 萬瀑洞(萬瀑洞)의 바위에는 只今도 그의 글 8字(蓬萊楓嶽元化洞天)를 새긴 것이 남아 있다. 이어서 安邊(安邊) 郡守로 나가 일을 잘하여 그 功으로 通政大夫(通政大夫)의 關係(關係)를 받았다.안변 郡守로 있으면서 큰 못을 파고 마초(馬草)를 貯藏하였다. 이듬해에 北쪽에서 變亂이 일어나서 많은 軍隊들이 北送될 때 다른 고을에서는 마초와 물이 없어서 官吏나 百姓들이 責任을 追窮당하여 死刑을 받는 者까지 있었으나 安邊만은 아무 걱정 없었다. 그의 앞을 내다보는 智慧에 누구나 歎服하였다. 얼마 안 되어 지릉(智陵)에 火災가 일어나니 그 責任 때문에 해서(海西)에 귀양갔다. 2年 後 풀려 돌아오는 길에 病死했다.양사언은 飛上한 天才인 데다가 努力을 거듭하여 읽지 않은 冊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科擧에 及第하여 40年, 다스린 고을은 8군데나 되었으며 單 한 가지의 不正이 없었고, 妻子를 위해서 財産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남사고(南師古)한테 배워 點도 잘 쳐 壬辰倭亂을 豫見하였고, 詩(詩)는 爵位(作爲)없이 天衣無縫(天衣無縫)하고 奇拔하였다.시조 ‘泰山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는 有名하다. 글씨는 해서(楷書)와 草書(草書) 다 같이 名筆이어서 안평대군(安平大君)·金九(金絿)·韓호(韓濩)와 함께 朝鮮 電氣의 4大 書藝家로 불렸다.

文學 作品 [ 編輯 ]

文學作品

朝鮮初期 時調作品 中에는 맹사성(孟思誠)의 「江湖四時歌(江湖四時歌)」처럼 安定期의 情緖를 담은 것도 있고, 成三問의 時調처럼 忠節을 노래한 것도 있으나, 어느 것이든 退嬰的인 作品은 보기 어렵다.조선 初期 文學에서 또 하나 特記할 것은 잡기 或은 悖說(稗說) 作品이 많이 創作된 것이다. 일정한 格式이 없이 보고 들은 것을 記錄한 代表的 悖說作品으로는 徐居正의 『筆苑雜記(筆苑雜記)』와 『東人詩話(東人詩話)』, 成俔(成俔)의 『慵齋叢話(溶劑叢話)』, 남효온(南孝溫)의 『秋江冷話(秋江冷話)』, 姜希孟의 『村談解頥(村談解?)』, 離陸(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조신(曺伸)의 『소문쇄록(?聞鎖錄)』 等이 있다.이 冊들에 실린 內容은 위로 調整管理들의 奇行(奇行)으로부터 一般 平民이나 奴婢에 이르기까지 各界各層 사람들의 生活風俗과 生活感情 그리고 歷史意識을 보여주는 것이 많으며, 不義를 暴露하고 諷刺하는 內容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이것들은 모두 벼슬아치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지만 當時의 庶民社會와 庶民文化를 理解하려는 努力의 反映이라 할 수 있다. 稗說文學은 口傳(口傳)資料를 많이 參考하여 쓰여진 것으로 小說的인 要素를 包含한다. 朝鮮初期에는 稗說文學이 發展함에 따라, 口傳資料에다 虛構的 要素를 더욱 加味한 小說도 創作되었다. 世祖 때 金時習(金時習)李 지은 『金鰲新話(金鰲神話)』에 실린 作品은 그 代表的인 것이다. 여기에는 平壤·開城·慶州 等 由緖깊은 古都(古都)를 背景으로 하여 男女間의 愛情을 主題로 다루면서, 한便으로는 不義를 批判하고 다른 한便으로는 民衆 속에 傳承되어 내려온 固有의 生活感情과 浪漫的인 歷史意識이 描寫되고 있다.

변계량 [ 編輯 ]

卞季良 (1369

1430)

高麗 末·朝鮮 初의 政治가. 字는 거경(巨卿), 號는 春亭(春亭), 諡號는 문숙(文肅). 本貫은 密陽(密陽). 玉蘭(玉蘭)의 아들. 異色(李穡)·鄭夢周(鄭夢周)의 文人. 1385年 文科(文科)에 及第, 全校(典校)·主婦(主簿)·進德博士(進德博士) 等을 歷任했다. 朝鮮 建國 初 千牛衛우령 中郞將(天牛位右領中郞將) 兼 典醫監勝(典醫監丞)·醫學敎授館(醫學敎授

官)李 되고, 司憲府 示唆(司憲府侍史)·成均館 虐政(成均館學正)

·職藝文館(直藝文館)·私財所感(司宰少監)·藝文館(藝文館) 應敎(應敎)·直提學(直提學) 等을 지냈다. 1407年(太宗 7) 文科重試(文科重試)에 及第, 禮曹 禹參議(禮曹右參議), 1409年에 藝文館 提學(藝文館提學), 1417年 藝文館 大提學·禮曹 判書, 이듬해 參贊(參贊), 1426年(世宗 8) 판友軍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었다. 大提學을 20餘 年 間 지내는 동안 大部分의 外交 文書를 도맡아 지어 名文章家로 有名했으며, 『太祖實錄(太祖實錄)』의 編纂과 『高麗史(高麗史)』 改修(改修)에 參與했고, 詩(詩)에도 뛰어나 文廟(文廟)·箕子墓(箕子墓)의 鼻紋(碑文)과 落薦定期(樂天亭記)·獻陵指紋(獻陵誌文) 等을 찬(撰)했다. 『靑丘永言(靑丘永言)』에 時調 2首가 傳한다.

建築과 工藝 [ 編輯 ]

建築-工藝

朝鮮 初期의 建築은 國家의 建築政策에 影響을 받아 高麗時代의 建築과 比較하여 몇 가지 새로운 特徵이 나타났다. 첫째, 地位의 높고 낮음에 따라 집의 크기에 일정한 差等을 두게 하였다. 國王의 權威를 높이기 위해 宮殿은 前보다 더 크게 짓는 代身 官吏의 집은 最高 40칸을 넘지 못하게 하고, 品階가 내려갈수록 그 크기를 줄여 平民은 10칸으로 制限했다. 建物에 位階秩序를 附與한 것이다. 둘째, 建物의 裝飾을 儉素하게 꾸며 奢侈를 排擊했다. 그리하여 朝鮮初期 建築은 前보다 훨씬 아름답고 輕快하면서도 實用性을 띠고 있다. 서울의 境遇, 朝鮮初期 建物로서 只今 남아 있는 것 中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崇禮門(崇禮門, 南大門)과 昌慶宮의 弘化門(弘化門)이며, 地方 建築으로는 開城 南大門(1393年)과 平壤 普通門(1473年)李 優秀하다. 그 밖에 나중에 再建된 것이긴 하지만 景福宮·昌德宮·昌慶宮은 本來 莊重하면서도 素朴했다고 한다. 宮闕이나 個人住宅에는 休息處로서 定員이 敷設되는데, 定員은 大體로 蓮못·다락, 그리고 수풀이 造成된다. 朝鮮初期 定員은 自然美를 그대로 살려 便安한 느낌을 주는 것이 特色으로서, 人工美를 追求하는 西洋이나 日本의 庭園과는 매우 다르다. 昌德宮의 後援(悲願)은 朝鮮定員의 特色을 잘 보여 준다.

德壽宮 [ 編輯 ]

德壽宮

서울 中區 정동(貞洞)에 있는 朝鮮時代의 宮闕. 史跡 第124號. 面積 6萬 1500m2. 德壽宮이란 窮命(宮名)은 朝鮮時代 初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讓位(讓位)韓 太祖의 소어궁(所御宮)을 正宗(定宗)李 開城에 建立하여 德壽宮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後 太宗(太宗)李 서울로 재환도하여 只今의 昌慶宮(昌慶宮) 附近에 太祖의 宮을 세웠을 때도 亦是 德壽宮이라 하였다. 現在의 德壽宮은 本來 世祖(世祖)의 큰 아들인 도원군(桃源君:暲)의 큰 아들, 卽 世祖의 큰손自認 월산대군(月山大君:?)의 個人 邸宅이었다. 도원군은 世子(世子)로 冊封되었으나 18歲에 죽었기 때문에 世子嬪(世子嬪) 한(韓)氏가 出宮(出宮)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 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둘째 아들인 者乙山君(者乙山君)李 王(成宗)으로 登極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韓氏도 入闕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居處하게 되었다. 月産大君이 死亡한 後 104年이 지난 1592年(宣祖 25) 壬辰倭亂이 發生하여 義州(義州)로 亂을 皮下였던 宣祖가 93年 10月 漢城으로 돌아와 보니 漢城 內에는 居處할 만한 곳이 없을 程度로 荒廢되어 이곳에 行宮을 定하고 정릉동行宮(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月産大君의 집은 境內가 狹小하므로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行宮에 包含시키고 宮闕 內에 있어야 할 各 官廳을 처음에는 闕文 밖에 隣接하여 두었다가 漸次 木柵(木柵)을 넓혀 세우고 門을 달아 臨時 宮城을 形成하여 여러 官廳과 僞史(衛士) 等을 모두 宮闕 內에 들게 하였다.또 그 옆에 있는 靑陽郡(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東宮(東宮)으로, 映像(領相) 심연원(心連源)의 집을 宗廟(宗廟)로 하였다. 97年에는 담을 둘러 쌓았고, 1607年 4月에는 北쪽에 別錢(別殿)을 세웠다.선조는 1593年 10月 이곳을 行宮으로 삼은 後 1608年 2月 正寢(正寢)에서 昇遐할 때까지 이곳에서 內外政務(內外政務)를 보았으며, 뒤를 이어 광해군(光海君) 亦是 이곳 行宮의 西淸(西廳)에서 卽位하였다. 그는 卽位 初 이 行宮을 넓혀 只今의 貞洞 1番地 一帶를 大部分 宮闕의 境內로 만들고 宗廟를 重建하였다. 또한 昌德宮(昌德宮)을 大大的으로 復舊하여 그의 在位(在位) 2, 3年에는 壬辰倭亂으로 被害를 입기 前의 建築보다 더 훌륭한 法宮(法宮)을 이룩하였다.광해군은 11年(光海君 3) 10月 11日 昌德宮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行宮을 慶運宮(慶運宮)이라 이름하였고, 昌德宮에 約 2個月 間 居處하다가 그해 12月 慶運宮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昌德宮에 居處하였던 魯山君(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李 그곳에서 廢位되어 不吉한 宮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光海君이 다시 昌德宮으로 里居하게 된 것은 15年 4月이었으며, 昌德宮·昌慶宮 等의 重建은 크게 進陟시키면서도 慶運宮은 營建公社에서 除外되어 그저 現狀維持를 하는 程度에 그쳤다. 18年에는 그의 繼母(繼母)인 仁穆大妃(仁穆大妃)를 慶運宮에 幽閉(幽閉)하고 對比의 稱號를 廢止하였으며, 慶運宮은 서궁(西宮)이라 稱하게 되었다. 이는 慶運宮이 西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年에는 建築되었던 闕內衙門(闕內衙門) 等을 허물고 그 材木과 기와를 內査(內司)로 옮기니 이 宮은 더욱 頹落하게 되었다. 23年 3月 西人(西人) 李貴(李貴)·崔鳴吉(崔鳴吉) 等이 宣祖의 孫子인 능양군(陵陽君)을 推戴하고 反政(反正)을 일으켜 仁穆大妃의 名으로 光海君을 廢하고 능양군(仁祖)李 登極하게 되자 仁祖는 慶運宮 別堂에 行次하여 仁穆大妃를 拜謁하고 卽祚堂(卽祚堂)에서 卽位式을 擧行하였다. 그러나 仁祖는 이 宮에서 居處하지 않고 그로부터 8日 後 仁穆大妃와 더불어 昌德宮으로 옮겨가면서 그해 7月에는 30年 間이나 宮域에 屬해 있던 여러 家屋·垈地를 본 主人에게 돌려줌으로써 慶運宮은 閑寂한 別宮程度로 縮小되었다.그 後 英祖(英祖)는 1773年(英祖 49), 卽 先祖의 環刀馭車(還都御居) 3株甲(三週甲:60年이 3番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2月 1日 世孫(後의 正祖)과 함께 慶運宮의 卽祚堂에서 先祖의 苦生을 回想하면서 社拜禮(四拜禮)를 行하였다. 高宗(高宗)도 1876年(高宗 13) 卽祚堂에서 展拜(展拜)하였다.또한 공역(工役)을 일으켜 宮闕로서의 面貌를 갖추기 始作하여 96年(建陽 1)에는 工役의 竣工이 있었고, 그 해부터 約 1年 間 러시아 公使館에 머물 때 太後(太后)·太子妃(太子妃)는 慶運宮에 이어(移御)하였으며 熱誠御眞(列聖御眞)과 閔妃의 殯殿(殯殿)도 경북궁에서 옮겼다.

殿閣의 乾燥 [ 編輯 ]

1897年(建陽 2) 2月 20日 高宗이 俄館(俄館)에서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자 이 宮은 다시 宮闕로서 注目을 받기 始作하였다. 그 해에도 工事는 繼續되어 璿源殿(璿源殿)·함녕전(咸寧殿)·寶文閣(普文閣)·社聖堂(思成堂) 等이 築造되었다. 高宗이 이곳을 宮闕로 定한 裏面에는 周圍에 러시아·英國·美國 等 强大國의 公使館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卽時 保護를 要請하기 쉬운 곳이라는 考慮도 있었을 것이다.9월 17日에는 高宗의 皇帝 卽位式이 있어 于先 소共同(小公洞)의 圜丘壇(圓丘壇)에서 하늘에 告하는 祭祀를 지내고 이 날부터 이 宮은 大韓帝國의 正宮(正宮)李 되었으며 年號를 光武(光武)라 하였다.1900년(광무 4)에는 담牆 工事가 完成되었고 璿源殿이 火災를 當하였으며, 봄에는 發電所의 設備가 끝나 宮內에 電氣의 供給이 始作되었다. 또 이즈음에는 中和殿(中和殿)과 冠名展(觀明殿)·함녕전·璿源殿·景孝殿(景孝殿)·興德展(興德殿)·社聖堂·준명당(浚明堂)·耕耘當(景雲堂)·덕경當(德慶堂)·함유재(咸有齋)·靑木材 (淸穆齋)·寶文閣(普文閣)·文化角(文華閣)·수옥헌(漱玉軒)·정관헌(靜觀軒)·九成軒(九成軒)·印花紋 (仁化門:正門)·돈例文(敦禮門)·回劇問(會極門)·영성문 (永成門) 等의 專門(殿門)李 完成되었다.1901년에는 慶熙宮(慶熙宮)으로 통하는 구름다리가 假說·開通되었고 이듬해 2月에는 法典(法殿)의 公役을 始作하였다. 이 法典을 中和殿이라 이름하였다가 卽祚堂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公使는 10月에 完工되고 中華門度 完工되었으며 冠名顚倒 營建되었다. 이 當時의 中和殿은 2層 建物로 規模가 壯大하였으며 周圍에 行閣(行閣)이 있었다.그러나 1904年 2月에 領選使(營繕司)에서 함녕전의 溫突을 修理하던 中 失手로 불이 나자 거센 바람을 타고 中和殿·卽祚堂·昔御堂(昔御堂)의 中心곽 建物뿐만 아니라 神主(神主)를 모셨던 景孝殿과 御眞(御眞)·豫診(睿眞)을 奉安한 欠門角(欽文閣)도 火災를 當하였으며, 火災를 면한 殿閣으로는 준명당·수옥헌·家庭當(嘉靖堂)·惇德殿(惇德殿)·九成軒 等이 있었다. 高宗은 그 날로 避하고 殿閣에 對한 重建을 命하여 于先 卽祚堂·昔御堂·景孝殿·欽敬閣(欽敬閣)을 應急 復舊하였으나 이 무렵 러·日戰爭이 일어나 日本이 勝利함으로써 1905年 10月 21日 밤에는 日本의 壓力으로 乙巳保護條約(乙巳保護條約)李 이곳에서 締結되는 等 混亂이 繼續되어 工事가 活潑하지 못하였다. 이런 渦中에 中和殿의 再建이 進行되었으므로 元來대로 2層으로 復舊하지 못하고 單層으로 짓게 되었다.중화전은 그해 1月부터 始作하여 慶運宮의 正門인 대안문(大安門)을 受理하기로 하고 問議 名稱도 大漢門(大漢門)으로 고쳤는데 이는 祕書丞(秘書丞)이며 風水(風水)의 代價인 유시만(柳時滿)李 “國조연창(國祚延昌)하려면 ‘代案’을 ‘大寒’으로 고쳐야 좋겠다”라고 建議한 데서 비롯되었다. 大漢門은 元來 높은 長臺石의 氣團이 있고 莊嚴한 돌階段이 있었으나 只今은 아스팔트 바닥에 묻혀 있다. 1907年 7月 日帝의 橫暴로 高宗이 退位하고 太子(太子)인 純宗(純宗)李 卽祚堂에서 卽位하였으며 年號를 隆熙(隆熙)라 開院(改元)하고 開院과 더불어 太皇帝宮(太皇帝宮)을 德壽宮이라 함으로써 慶運宮은 德壽宮이라 부르게 되었다.순종은 9月 17日 卽祚堂에 이어(移御)하였다가 11月 13日 昌德宮으로 이어하였다. 太皇帝는 讓位 後 一時 수옥헌으로 옮겼으나 順從이 昌德宮으로 옮기자 다시 함녕전에 還御하여 19年 1月 逝去할 때까지 이곳에서 主로 居處하였다. 1910年(隆熙 4)에는 石造殿(石造殿) 等 西洋式 建物이 竣工되었으나 太皇帝(太皇帝)인 高宗이 昇遐하게 되자 德壽宮도 宮闕로서의 壽命이 끝나고 日帝 强占期에는 빈 宮闕로 남아 있다가 李王家美術館(李王家美術館)으로 되었다.6·25전쟁 前에는 美·蘇共同委員會(美蘇共同委員會)가 石造殿에서 開催된 바 있으며, 當時 石造殿이 불타서 그 後 復舊하여 國立博物館으로 使用하다가 只今은 王宮遺物展示館으로 쓰고 있다. 德壽宮은 그 동안 담牆들이 뒤로 밀려지고 또한 목冊에서 四塊石(四塊石)담으로 바뀌는 等 많은 變化가 있었고, 正門인 大漢門度 여러 次例 뒤쪽으로 밀려 들어가게 되어 性器(盛期)에 櫛比하던 殿閣들은 相當數 撤去된 反面, 世宗大王의 銅像 等 새로운 施設物이 들어서게 되었다.현재는 正門인 大漢門, 停電인 中火田과 中華門, 寢殿인 함녕전과 그 一郭(便殿인 덕흥전과 東·西·男 行脚 및 當時의 함녕전 正門이었던 光明門). 준명당·卽祚堂, 德壽宮 內에서는 唯一한 2層 建物인 昔御堂, 그리고 정관헌·石造殿 等의 建物이 남아 있는데, 이 宮은 特히 서울에서 第一 먼저 近代유럽의 古典主義派 建築 樣式을 받아들인 進取的 宮闕로서 異彩롭다.

朝鮮 初期의 美術 [ 編輯 ]

朝鮮初期-美術

朝鮮 初期에는 王室이나 선비들의 初喪과 여러 가지 意識(儀式)을 그려서 是正을 돕는 記錄畵와 日常生活에서의 鑑賞化의 두 側面에서 그림이 發達했다. 國家에서는 專門畫家를 官員(畫員)으로 採用으로 圖畫署(圖畵署)에 소속시켜 種6品까지의 벼슬을 주고 그림에 從事하게 했다.감상을 위한 그림의 素材는 대나무·算數·人物·새짐승·花草가 中心을 이루었다. 花草(花草) 中에서는 모란·亂初·梅花·소나무·菊花와 같은 氣絶(氣節)과 香氣를 發하는 草木이 主要 素材가 되었다.조선 初期 花園(畵員)畫家 中에서 가장 뛰어난 技倆을 보인 이는 世宗 때 安堅(安堅)이었다. 그는 特히 안평대군(安平大君, 世宗의 셋째 아들)의 後援을 받아 數百點의 그림을 創作했는데, 安平大君의 꿈을 그렸다는 「夢遊桃源圖(夢遊桃源圖)」(1447年)는 最高의 傑作으로 꼽힌다. 申叔舟가 쓴 火氣(畵記)에 依하면, 그의 畫風은 中國과 우리나라의 歷代 話法(畵法)을 깊이 硏究하고 長點을 折衷하여 自己 讀者의 境地를 開拓했는데 算數(山水)를 特히 잘했다고 한다. 「夢遊桃源圖」는 복숭아꽃이 滿發한 平和로운 꽃동산을 雄壯하고 幻想的인 雰圍氣로 描寫한 것으로, 理想社會를 憧憬하는 作家와 後援者의 꿈이 서린 作品이다. 山을 그린 技法에 있어서 北宋(北宋)의 畫家 郭熙(郭熙)와 類似한 點이 있으나, 그 안에 펼쳐진 農村風景은 우리의 現實과 동떨어진 幻想의 世界가 아니다. 眼見은 學識도 높아 벼슬이 護軍(正4品)에까지 올라, 같은 時期에 人物畫를 잘 그려 벼슬이 堂上官(正3品)에까지 오른 崔涇(崔涇)과 더불어 花園으로는 가장 우대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15세기에서 16世紀에 걸쳐 活動한 奴婢 出身의 이상좌(李上佐)도 名聲을 떨친 花園이었다. 中宗과 明宗의 사랑을 받아 功臣의 地位에까지 오른 그는 달밤에 소나무 밑을 거니는 「松下步月도(松下步月圖)」를 비롯해 「御駕한面도」 「노엽달마도」 等을 남겼는데, 힘있는 筆體가 印象的이다.전문화가가 아닌 一般 선비 中에서도 뛰어난 그림 솜씨를 가진 文人畫家가 적지 않았다. 世宗 때의 강희안(姜希顔)·강희맹 兄弟는 그 中에서도 가장 有名하다. 特히 姜希顔은 맑은 물을 凝視하면서 思索에 잠긴 선비의 모습을 그린 「산수인물도」(或은 「高士觀水圖」)와 같은 傑作을 남겼다. 한便, 申叔舟는 火氣(畵記)를 써서 安平大君이 所藏한 송·願時代 그림을 紹介하면서 繪畫史를 整理하여 그림에 對한 理解가 높았음을 보여준다. 朝鮮初期 그림은 文人畫든 花園의 그림이든, 선비들의 高尙한 生活哲學을 그림에 反映시키고 있으며, 筆致가 힘차고 構成이 簡潔한 特徵을 보인다. 이 같은 特性은 中國 그림과 일정한 差異를 보여 이미 韓國畫의 土臺가 마련되고 있었다.

音樂과 舞踊 [ 編輯 ]

音樂-舞踊

예(禮)와 惡(樂)은 儒敎政治에서 百姓을 敎化시키는 手段으로서 重要하게 여겨졌으며, 各種 國家意識에는 반드시 音樂이 뒤따랐다.조선초기에는 音樂을 管掌하는 掌樂院(掌樂院)이 있어, 良人 出身의 樂生(樂生, 297名)李 아악(雅樂)을 擔當하고, 公奴婢 出身의 樂工(樂工, 518名)李 俗樂(俗樂)을 맡았다. 音樂이 크게 整備된 것은 世宗 때로서, 朴堧(朴堧) 等의 努力으로 60餘 種의 樂器가 改良되거나 製作되었고, 賤民 出身의 樂工 中에서 이름난 演奏者들이 많이 輩出되었다. 琵琶의 송태평, 거문고의 金자려, 伽倻琴의 이승련, 牙箏의 金小材 等이 代表的 名匠(名匠)이다.장악원에서 연주하는 樂曲들은 國家와 百姓의 平安을 기리는 것이 大部分인데, 「與民樂」 「定大業」 「保太平」 「步虛子」「洛陽春」 「五冠山」 等 數十 曲이 演奏되었다.악보정리에 있어서도 큰 發展이 나타났다. 世宗은 스스로 「與民樂」 等 여러 樂曲을 짓고, 또 井間譜(井間譜)라고 불리는 새로운 樂譜를 創案하여 처음으로 소리의 場·段을 表示하는 樂譜가 생겼다. 한便, 成俔(成俔)은 演奏法과 樂曲을 합친 合字譜(合字譜)를 만들어 器樂 演奏 水準을 높였다.음악이론에 關한 冊으로는 1493年(成宗 24年)에 유자광·성현 等이 編纂한 『樂學軌範』(9卷)李 代表的이다. 이 冊에는 音樂을 雅樂(雅樂)·唐樂(唐樂, 中國音樂)·鄕樂(鄕樂) 等 세 部門으로 나누어, 音樂의 原理와 歷史, 樂器編成法, 音樂 쓰는 節次, 樂器 만드는 法과 그 調絃法(調絃法), 춤의 進行方法, 衣裳, 小道具까지 紹介하고 있다.당시 宮殿과 官廳의 音樂演奏에는 반드시 춤이 따랐다. 그래서 音樂이 發展함에 따라 춤도 發展했다. 춤은 舞童(舞童)이라 불리는 少年이 추기도 하고, 때로는 妓生들이 추기도 했는데, 춤의 種類가 매우 다양하여 「保太平」 「定大業」 「折花三臺」 「鶴춤」 「處容춤」 等이 있었다. 宮中舞踊과 官廳舞踊은 古代부터 내려오던 民俗춤을 變容시킨 것으로서, 점잖고 優雅한 것이 特徵이다.

寒戶 [ 編輯 ]

韓濩 (1543

1605)

朝鮮 中期의 名筆. 字는 경홍(景洪), 號는 石峯(石峯), 廳舍(淸沙). 本貫은 三火(三和). 正郞(正郞) 管(寬)의 孫子. 松島(松都:開城)에서 出生, 어려서부터 스스로 붓글씨를 익혔으며, 타고난 天才에다 피나는 修鍊을 쌓았으므로 해·행·진·초(楷行眞草)의 各體가 모두 妙境에 이르렀다. 1567年(明宗 22) 進士에 合格, 1583年(宣祖 16) 瓦書別第(瓦署別提), 1592年 壬辰倭亂 때는 四輔로 王의 行在所(行在所)에 가서 文書關係의 일을 맡았으며, 加平郡守(加平郡守)를 지냈다. 當時 이미 世上에 널리 떨친 名筆 韓石峯의 이름은 明나라에서까지 有名해져서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에 왔던 明나라 提督 李如松(李如松)·魔鬼(麻貴) 等도 그의 筆跡을 求해 가지고 돌아갔다. 嚴誅(?州) 王世貞(王世貞)은 「筆談(筆談)」에서 石蜂의 글씨를 가리켜 "성난 獅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千里馬가 內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 했으며, 明나라 한림(翰林)·住持番(朱之番)은 “石蜂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顔眞卿(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고 하였다. 先祖도 그의 대자(大字)를 보고 “氣(奇)하고 腸(壯))하기 閑良 없는 글씨”라고 讚歎하면서 中士(中使)를 보내어 그 집에 宴會를 베풀었다. 이어 宣祖는 한壁(閑僻)韓 고을 郡守에 임명하면서 “筆法을 後世에 傳하게 하고자 하니 권태로울 때는 구태여 쓰지 마라. 게을리度 말고 서둘지도 마라”고 타일렀으며, 宣祖親筆로 <醉裡乾坤 筆奪造化>의 8字를 써 주었다. 石峯 書體의 特徵은 그가 조송설(趙松雪)體를 쓰면서도 自己 獨特한 체풍(體風)을 세운 데 있으며 그는 안평대군(安平大君)·金九(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朝鮮 初期의 4大暑가(四大書家)로 꼽힌다.

白瓷 [ 編輯 ]

白磁

우리나라 白瓷는 高麗 末期에 宋나라 定窯(定窯)의 影響을 받아 始作되었고, 朝鮮時代에 이르러 全盛期를 이루었다. 高麗 때에는 白瓷는 聽者(靑磁)에 壓倒되어 頭角을 나타내지 못하였는데, 大槪 所聞(素文:무늬가 없는 것)·陰刻(陰刻)·陽刻(陽刻)·上監(象嵌)의 4種類로 區分해 볼 수 있다.현재 高麗白瓷 몇 個가 博物館이나 個人의 所長으로 傳하고 있는데 빛깔은 白色·乳白色(乳白色)·大黃乳白色(帶黃乳白色)·淡靑色(淡靑色)·淡橄欖色(淡橄欖色) 等이 있다. 朝鮮에 이르러서는 名(明)나라 白瓷의 影響과 흰 것을 사랑하고 崇尙하던 一般的 風潮에 따라 初期부터 後期 前半까지 꾸준히 發展되었다. 勿論 初期에는 高麗에서 始作된 花文瓷器(花文磁器:三島手)에 눌려서 主流를 이룩하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慵齋叢話(?齋叢話)』에도 나오듯이 當時 白瓷는 珍貴品으로 宮中에서만 使用되고 있었다. 『世宗實錄 地理誌』에는 全國에 瓷器所(磁器所)가 136군데 있다는 記錄이 보이는데 白瓷가 技術的으로 完成되기는 이때가 아닌가 推測된다. 같은 記錄에 陶器所(陶器所)는 185군데라고 하였다. 世祖 때에는 靑蓼(靑料:資料의 一種)의 輸入(輸入)이 어려우므로 白瓷는 週期(酒器) 以外에는 使用을 禁止하였다는 記錄이 있고 睿宗(睿宗) 때에는 우리나라에서도 靑蓼를 採取하도록 하였다 한다.이후 全國的으로 그 製造가 盛行하였는데, 壬辰倭亂으로 萎縮되어 버리고, 白瓷는 花文瓷器風으로 變하여 近代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朝鮮의 白瓷는 完璧을 자랑하는 中國 白瓷와는 달리 帶靑色(帶靑色)·大會白色(帶灰白色)·乳白色(乳白色)의 것으로 그 色滯에 있어서도 特色을 지님은 勿論, 技巧面에서도 煩雜에서 超脫(超脫)韓 素朴美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政敵(靜寂)으로 이끄는 魅力이 있다. 高麗 白瓷에 비해 精鍊(精鍊)된 奇妙한 멋은 없다고 하나 조대호房(粗大豪放)韓 特色을 지니고 있다. 壬辰倭亂 以後 日本에 傳播되어 日本 白瓷의 母胎가 되었다.기물(器物)의 種類에는 病·濠(壺)·발(鉢:盆)·周鉢·酒煎子·베개(枕)·香爐(香爐)·花盆臺(花盆臺)·筆筒(筆筒)·硯滴(硯滴)·其他 文房具 等이 있으며, 現在 寶物로 指定되어 傳하는 것으로 白瓷博山香爐(白磁博山香爐:240號)·靑華白瓷鐵沙辰沙量各國問病(靑花白磁鐵砂辰砂陽刻菊文甁:241號)·白瓷象嵌牡丹文梅甁(白磁象嵌牡丹文梅甁:345號 高麗) 等이 있다.

『樂學軌範』 [ 編輯 ]

樂學軌範

朝鮮時代 掌樂院(掌樂院)에 있던 儀軌(儀軌)·樂譜를 整理 編纂한 惡書. 成宗 24年(1493) 成俔(成俔)·柳子光(柳子光) 等이 王命을 받들어 完成했고, 光海君 때 中敎(重敎)를 刊行하였다. 音樂을 雅樂·唐樂(唐樂)·鄕樂(鄕樂)의 3部로 나누어서 樂律(樂律)로부터 實際 應用에 이르기까지를 그림과 함께 說明하였다.

朴堧 [ 編輯 ]

朴堧 (1378

1458)

朝鮮初의 音樂家. 初名은 年(然), 字는 炭夫(坦夫), 號는 蘭溪(蘭溪), 諡號는 文獻(文獻), 本貫은 密陽. 1405年(太宗 5) 文科(文科)에 及第, 集賢殿 校理(集賢殿敎理)를 거쳐 地平(持平)·文學(文學)을 歷任. 世宗이 卽位한 뒤 樂學別坐(樂學別坐)에 任命되어 音樂에 關한 일을 맡아 보았다. 當時 不完全한 樂器의 調律(調律)의 整理와 樂譜撰集(樂譜撰集)의 必要性을 上疏하여 許諾을 얻고 1427年(世宗 9) 偏傾(編磬) 12枚를 製作, 自作(自作)韓 12律官(律管)에 依據한 正確한 音律(音律)로 連奏케 했고 3年 後 다시 未備한 律官을 修正했다. 또한 朝廷의 朝會(朝會) 때 使用하던 鄕樂(鄕樂)을 廢하고 아악(雅樂)의 使用을 建議하여 實行케 했고, 1431年 南汲(南汲)·鄭孃(鄭穰)과 回禮(會禮)에도 雅樂을 採擇케 하고, 照會와 廻禮에서 從前까지 妓生이 추던 춤을 舞童(舞童)으로 對峙하여 文武移貿(文武二舞)의 作變지절(作變之節)과 속部南岳知己(俗部男樂之伎)를 추게 하여 宮廷音樂을 全般的으로 改革했다.1433년 流言蜚語를 流布했다는 罪로 罷職되었다가 容恕되어 雅樂에 從事, 工曹 參議(工曹參議)·僉知中樞院使(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1455年 聖節使(聖節使)로 明나라에 다녀와서 인수 府尹(仁壽府尹)·中樞院 府使(中樞院副使)를 歷任. 藝文館 大提學(藝文館大提學)에 올랐고 1453年(端宗 1) 癸酉靖難(癸酉靖難) 때 아들 鷄羽(季愚)가 處刑되었으나 그는 3條에(朝)에 걸친 元老로서 죽음을 면하고 罷免되어 故鄕에 내려갔다. 特히 敵(笛)의 名演奏家였으며 朝鮮 初 未備한 宮廷 音樂을 整備하여 高句麗의 王山岳(王山岳), 新羅의 于勒(于勒)과 함께 3代 惡性(樂聖)으로 불린다.

서거정 [ 編輯 ]

徐居正 (1420

1488)

朝鮮의 學者. 字는 강중(剛中). 初子(初字)는 自願(子元), 號는 四佳亭(四佳亭)·정정정(亭亭亭), 諡號는 문충(文忠). 本貫은 達成(達城). 1444年(世宗 26) 文科에 及第, 司宰監 職場(司宰監直長)을 지내고 1451年(文宗 1) 賜暇讀書(賜暇讀書)를 하고 集賢殿 博士(集賢殿博士)·副修撰(副修撰)·應敎(應敎)를 歷任. 1456年(世祖 2) 文科重試(文科重試)에 及第, 이듬해 文臣庭試(文臣庭試)에 長遠했다. 後에 工曹參議(工曹參議)가 되어 1460年 謝恩使(謝恩使)로 明나라에 가서 그 곳 學者들과 文章과 詩(詩)를 論하여 解凍(海東)의 記載(奇才)라는 讚歎을 받았다. 歸國 後 大司憲이 되고 1464年 朝鮮 最初로 洋館 大提學(兩館大提學)李 되었으며 1466年 拔英試(拔英試)에 또 壯元, 以後 6兆(曹)의 判書를 두루 지내고 1470年(成宗 1) 左贊成(左贊成)에 올라 이듬해 佐理功臣(佐理功臣) 3等으로 達城郡(達城郡)에 封해졌다. 여섯 王을 섬겨 45年 間 朝廷에 奉仕, 文章과 글씨에도 能했으며 始華(詩話)의 白眉인 『東人詩話(東人詩話)』와 『東文選(同文選)』 等을 남겨 新羅 以來 朝鮮 初에 이르는 詩文을 選集, 漢文學을 大成했다. 世祖 때 『經國大典(經國大典)』 『東國通鑑(東國通鑑)』의 編纂에 參與, 成宗 때 『東國輿地勝覽(東國與地勝覽)』의 編纂에 參與했으며, 또한 王命으로 『鄕藥集成方(鄕藥集成方)』을 國譯(國譯)했고, 性理學을 비롯하여 天文·地理·醫藥 等에 이르기까지 精通했다.

『國朝寶鑑』 [ 編輯 ]

國朝寶鑑

朝鮮의 歷代 임금들의 政治 活動 가운데서 模範이 될 만한 事實을 뽑아 적은 編年體의 歷史冊. 世宗 때 編纂計劃을 세우고 世祖 3年(1457)에 수찬청(修撰廳)을 두어, 權擥·申叔舟 等이 太祖·太宗·世宗·文宗에 걸친 4代 寶鑑 7卷 3冊을 처음으로 完成하였다. 그 뒤 肅宗·英祖·正祖·玄宗 때 編纂을 繼續했고, 高宗 때에는 前의 것과 合하여 모두 90卷 28冊으로 完成되었다. 奎章閣 및 成均館 大學校 圖書館에 所藏되어 있다.

원각사 [ 編輯 ]

圓覺寺

서울特別市 鍾路區 탑동公園(塔洞公園) 안에 있던 절. 1464年(朝鮮 世祖 10) 建立. 元來 興福寺(興福寺)로서 高麗 때부터 내려오던 古刹(古刹)이다. 朝鮮 初期에는 曹溪宗 本社(曹溪宗本寺)로 指定되었던 것인데, 斃死(廢寺)되고 公廨田(公?田)으로 된 일도 있다. 이 興福寺의 옛 터를 넓혀서 本堂인 대광名田(大光明殿)을 中央에 두고 왼쪽에는 많은 先當(禪堂)이 있었다. 門으로는 寂光指紋(寂光之門)·반야門(般若門)·解脫門(解脫門) 等이 있었다. 大宗(大鐘)을 걸어둔 法雷角(法雷閣) 東쪽에는 못, 西쪽에는 꽃밭이 있었고, 本堂 뒷뜰에는 해章典(海藏殿)을 지어 大藏經(大藏經)을 두었다. 1504年(燕山君 10)에 원각사를 廢하고 1505年(燕山君 11)에는 掌樂院(掌樂院)을 이곳으로 옮겼다. 世祖의 특별한 關心으로 創設된 원각사가 얼마 가지 못하고 斃死된 것은 當時 類似(儒士)들의 繼續的인 佛敎 排斥運動과 燕山君의 積極的인 철훼(撤毁)運動의 結果였다. 그 後 1507年(中宗 2)에 對備(大妃)의 傳敎로 福立(復立) 될 機會가 있었으나 調信(朝臣)들의 猛烈한 反對運動으로 挫折되었다. 그러나 祠宇(寺宇)의 建物은 1514年(中宗 9)까지도 相當히 殘存했었는데 1519年(中宗 14)에는 建物의 胎盤이 없어졌다. 大體로 원각사의 創建에 對하여는 異說(異說)이 없으나, 그 廢止에 關한 說은 一致하지 않는다. 結局 여러 說을 綜合하면 원각사는 一時에 철훼된 것이 아니고 1504年(燕山君 10)부터 1519年(中宗 14) 或은 1554年(明宗 9) 大火災(大火災) 때까지의 約 50年 동안에 걸쳐 空家(空家)로 廢棄되어 自然的으로 消滅되었다고 推測한다. 이 원각사를 創建할 때 만든 鐘도 그대로 廢棄되어 있다가 1536年(中宗 31)에 崇禮門(崇禮門)으로 옮겨 달아서 그것을 堡壘(報漏)의 種으로 使用했다고 한다. 또 『동국餘地備考(東國與地備攷)』에는 1594年(宣祖 27)에 崇禮門의 種을 鐘閣(鐘閣)으로 옮겨 달았다고 했다. 現在 원각사의 터에는 塔과 肥滿 남아 있는데 塔은 國寶로 指定되었다.

刊經都監 [ 編輯 ]

刊經都監

朝鮮初에 佛經을 한글로 飜譯·出刊하기 위해 세워진 機關. 刊經都監은 世祖 7年(1461)에 세워졌으며, 辛未(信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 等이 이 일에 從事하였다. 그 結果 佛敎는 다시 活氣를 띠어 寺刹의 再興과 僧侶도 相當히 增加했다. 刊行된 冊으로는 『楞嚴經諺解(楞嚴經諺解)』 10卷, 『妙法蓮華經諺解(妙法蓮華經諺解)』 2卷 等이 있다.

朝鮮의 보우 [ 編輯 ]

朝鮮-普雨 (?

1565)

朝鮮 明宗 때의 中. 號는 허응당(虛應堂)·懦闇(懶庵). 明宗의 母后(母后)인 文定王后(文定王后)가 攝政할 때에 봉은사(奉恩寺)를 腺腫(禪宗), 奉先寺(奉先寺)를 敎宗(敎宗)의 本山(本山)으로 삼았으며, 중에게 度牒(度牒)을 주고 僧科(僧科)를 復活하는 等 佛敎 復興에 힘썼다. 그러나 이 幕間劇은 文定王后의 죽음으로 終幕을 告하고 그는 維新들의 謀陷으로 귀양갔다가 被殺되었다.

『東國輿地勝覽』 [ 編輯 ]

東國輿地勝覽

朝鮮 第9代 成宗의 名으로 1481年에 盧思愼 等이 編纂한 우리 나라의 地理書. 『大明一統志』를 본떠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角度의 지리·風俗·私的·傳說과 歷代 이름난 作家들의 詩와 氣門(記文), 그리고 檀君神話가 실려 있다. 第11代 中宗代에 履行(李荇)李 補充한 『新東國輿地勝覽』이 있다.

『東國正韻』 [ 編輯 ]

東國正韻

世宗 때 엮은 음운서(音韻書) 6卷 6冊. 世宗 29年(1447)에 신숙주·성삼문·崔沆 等이 編纂한 漢字 發音에 關한 冊. 訓民正音을 만든 뒤, 우리나라의 漢字音을 바로잡기 위해서 中國 明나라의 『洪武正韻』을 參考로 하여 엮은 冊이다. 國土 第71號로 指定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한글 硏究에 貴重한 資料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