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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린 民間潛水士 ‘無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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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린 民間潛水士 ‘無罪’

失踪者 292具 收拾하고도 業務上 過失致死 嫌疑로 1年4個月間 裁判받은 공우영氏…海警, 責任 떠넘기려 文書 짜집기해
登錄 2015-12-15 07:54  修正 2020-05-02 19:28
4·16 연대는 지난 5월 공씨가 아니라 해경의 관리 소홀로 민간잠수사가 숨졌다며 고발장을 제출했다. 그러나 지난 9월 검찰은 각하 결정을 내렸다. 연합뉴스

4·16 聯隊는 지난 5月 孔氏가 아니라 海警의 管理 疏忽로 民間潛水士가 숨졌다며 告發狀을 提出했다. 그러나 지난 9月 檢察은 却下 決定을 내렸다. 聯合뉴스

2014年 5月6日 歲月號 搜索 現場에서 失踪者를 搜索하던 民間潛水士 이광욱(53)氏가 숨졌다. 첫 潛水에서 空氣 呼吸 호스가 가이드라인에 걸려 呼吸이 곤란해졌다. 交信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에 119救助隊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다음날 고명석 汎政府事故對策本部 代辯人(現 國民安全處 代辯人)은 “海警(海洋警察)李 作業 現場에서 全體的으로 總括 責任을 쥐고 있”다고 말했다.

無罪, 그러나 “기쁘고 그런 것 없다”

하지만 그해 8月26日 檢察은 海警이 아니라 民間潛水士 공우영(60)氏를 業務上 過失致死 嫌疑로 起訴했다. 孔氏가 “民間潛水士의 搜索 作業을 總括的으로 管理·監督”했다는 理由에서다. 法院은 裁判 1年4個月 만인 지난 12月7日 無罪를 宣告했다. 判決 直後 孔氏는 “기쁘고 그런 것 없다”고 말했다. “있는 罪를 벗은 게 아니라 없는 罪를 덮어씌우려다가 失敗한 거다. 能力이 되면 大韓民國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實際 海警이 孔氏에게 責任을 떠넘기려고 ‘덫’을 놓았던 痕跡이 裁判 過程에서 드러났다. 水難救護法을 보면, 海警廳長이 受難構造 活動을 指揮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海警은 民間潛水士가 “獨立的으로” 搜索 作業을 했고 ‘民間潛水士 監督官’인 孔氏에게 搜索 責任을 委任했다고 主張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실종자 수색 당시 민간잠수사가 숨지면서 책임을 추궁당한 끝에 법정에 세워졌던 민간잠수사 공우영씨가 12월7일 무죄를 선고받았다. 정은주 기자

지난해 세월호 慘事 失踪者 搜索 當時 民間潛水士가 숨지면서 責任을 追窮당한 끝에 法廷에 세워졌던 民間潛水士 공우영氏가 12月7日 無罪를 宣告받았다. 정은주 記者

홍익태 國民安全處 海岸經費安全本部長은 孔氏가 業務上 過失致死 嫌疑로 起訴된 理由를 “孔氏는 言딘 所屬이며 管理者로서 다른 사람보다 130%의 手當을 더 받았다”고 陳述했다.(2015년 9月15日 國會 國民安全處 國政監査)

事實關係를 따져봤다. 于先 孔氏는 言딘 所屬이 아니다. 潛水士 經歷이 40年이 넘은 孔氏는 天安艦을 引揚한 經驗이 있는 유성수중개발 理事다. 유성수중개발은 歲月號 沈沒 直後 言딘의 連絡을 받았다. “같이 일해보자.” 言딘은 歲月號 引揚 契約을 청해진해운과 맺은 狀態였다. 狀況을 把握하려고 孔氏는 事故 現場에 들어갔다.

失踪者가 300名이 넘어 引揚이 아니라 搜索이 必要한 때였다. 現場은 “銃聲 없는 戰爭터”와 다름없는데 海警은 統制할 能力도, 經驗도 없었다. ‘表面供給式 潛水’(陸上에서 潛水士에게 繼續 空氣를 供給해주는 方式) 經驗이 없다며 船體 搜索을 망설였다. 經驗이 豐富한 孔氏 周邊으로 民間潛水士들이 모였다. 프리랜서 産業 深海잠搜査 25名이었다.

孔氏는 이들의 作業 配置 業務를 맡았다. 海警도 補助했다. 民間潛水士가 船體 안으로 들어가 失踪者를 搜索하면 海警은 船體 밖에서 空氣 呼吸 호스를 잡아줬다. 潮流가 潛潛해지는 물때에 맞춰 每日 4次例씩 搜索했다. 이들은 7月10日까지 海軍과 함께 失踪者 주검 292具를 收拾했다.

大統領 訪問 後 “民間潛水士 2倍 늘려라”

5月 初 朴槿惠 大統領이 失踪者를 搜索하는 바지船을 訪問한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즈음 海警은 搜索 實績을 높이기 위해 民間潛水士를 2倍 늘리기로 했다. 當時 金錫均 海警廳長은 “60名에 맞추라”고 指示했다. 孔氏는 反對했다. 새로운 잠搜査의 實力을 檢證하기 어렵고 그들이 現場에 適應하려면 또 時間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海警은 民間潛水士 充員을 밀어붙였다. 5月4日 朴槿惠 大統領이 言딘 리베로 바지船을 다녀간 뒤 새로운 潛水師가 들어왔다.

5月5日 午前 11時 民間潛水士 이광욱氏가 凉아무개氏와 함께 바지船에 乘船했다. 이날 午後 孔氏는 李氏를 처음 봤다. 孔氏가 물었다. “潛水 經歷이 어떻게 됩니까?” “28年입니다.” 李氏가 答했다. 孔氏는 海警이 데려온 潛水士이니 基本 事項은 檢證됐으리라 믿고 더 묻지 않았다.

가이드라인을 連結하는 作業이 李氏의 첫 任務로 떨어졌다. 失踪者 搜索보다 簡單한 일이었다. 孔氏와 選任 潛水士 全아무개氏가 歲月號 圖面을 보여주며 具體的인 方法을 說明했다. 李氏는 “올가미 매듭法도 많이 해봤다”고 했다. 그러나 물때가 맞지 않아 李氏의 潛水 時間이 자꾸 늦춰졌다. 高血壓이 있는 李氏는 잠을 제대로 못 잔 채 5月6日 아침 6時7分 歲月號 沈沒 現場으로 潛水했다.

“海底에 到着했다.” 1分 뒤 李氏가 交信했다. 그러나 6時10分 交信에서 들리는 李氏의 말이 語訥하고 不確實해졌다. 異常徵候였다. 待機하던 119救助隊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水深 21m 地點에 있는 水平 가이드라인에 李氏의 空氣 供給 호스가 U字 形態로 걸려 있었다. 李氏는 마스크를 벗은 狀態로 엎드려 있었다. 입 周圍에는 거품이 보였다. 救助隊가 李氏를 데리고 올라와 心肺蘇生術을 했지만 李氏는 끝내 숨졌다.

海警은 부랴부랴 民間潛水士가 “獨立的으로” 搜索 作業을 했다는 ‘文書’를 만들었다.

첫째, 5月11日 民間潛水士들에게 ‘受難口號業務 從事 命令書’를 發給했다. 孔氏는 5月26日 命令書를 받았다. 날짜는 “2014年 4月19日”로 溯及해 적혀 있었다. 海警이 民間潛水士에게 附與한 任務는 “旅客船 歲月號 沈沒 事故 關聯 水中 失踪者 搜索”이었다. 一種의 搜索 委任狀이었다.

둘째, 孔氏에게 支給할 受難口號費用(手當)을 다른 잠搜査의 130%로 策定했다. 6月17日 第9次 中央災難安全對策本部 會議에서 決定했다. 孔氏는 “死亡 事故 發生 때 나는 民間潛水士 監督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後 死亡 事故의 責任者를 指目해야 하는 過程에서 (海警이) 나를 監督官, 責任者로 둔갑시켰다”고 말했다.

當時 孔氏는 李氏 死亡 事件으로 海警의 調査를 받고 있었다. 6月26日 孔氏는 參考人에서 被告人으로 身分이 바뀌었다. 受難口號業務 從事 命令書와 手當 130%를 들이밀며 孔氏를 責任者라고 밀어붙였다. 7月9日 海警은 孔氏 等 民間潛水士에게 搜索 現場에서 빠지라고 通報했다. 이들은 손을 떼고 나왔다. 8月26日 檢察은 孔氏를 業務上 過失致死 嫌疑로 起訴했다.

海警이 屬한 國民安全處는 裁判 過程에서도 같은 主張을 펼쳤다. 1月14日 裁判部에 낸 事實照會書에서 國民安全處는 “孔氏가 ‘民間潛水士 監督官’이라는 이름을 附與받고 그에 相應하는 任務를 했다”고 主張했다. 그 事實照會書를 읽고 孔氏는 쓰러져 一週日間 入院했다.

孔氏는 “(海警이) 事實대로 말하지 않아 不快하다”고 말했다. 裁判部가 孔氏를 監督官으로 任命한 根據 書類를 提出하라고 要求하자 2次 事實照會서(2015년 4月20日)에서 말을 바꿨다. “監督官이라는 權限을 附與한 根據는 없다. 다른 民間潛水士와 마찬가지로 孔氏에게도 受難口號業務 從事 命令書만 發給했을 뿐이다. 監督官 待遇로 手當을 支給하기로 決定한 것도 事故 以後의 일이다.”

11月26日 檢察은 結審公判에서 孔氏에게 懲役 1年을 求刑했다. 하지만 異例的으로 善處를 呼訴했다. “國家, 海警이 (歲月號 慘事 때) 體系的으로 對處하지 못했다. 潛水 部分도 物的·人的 能力이 不足했다. 被告人(공우영)의 法律的·實質的 責任을 判斷하기도 어렵다. (宣告할 때) 이런 部分을 參酌해달라.”

法律上 海警廳長이 責任者다

光州地法 木浦支援 刑事1單獨 한종환 判事는 12月7日 孔氏에게 業務上 過失致死罪를 適用할 수 없는 理由를 條目條目 밝혔다. 첫째, 孔氏는 民間潛水士에 對한 法律上 義務가 없다. 水難救護法을 보면 海警廳長이 責任者다. 둘째, 契約上 義務가 없다. 歲月號 搜索 作業에 對한 政府나 言딘, 유성수중개발의 契約이 없었다. 死亡한 李氏는 유성수중개발 所屬도 아니었다. 셋째, 事實上 義務도 없다. 孔氏는 海警이 데려온 民間潛水士를 搜索 作業에서 排除할 權限이 없었다.

孔氏는 1年4個月 만에 덫에서 풀려났다. 海警의 責任 回避와 檢察의 無理한 起訴도 드러났다. 그러나 오늘도 책임지는 者는 없다.

木浦=정은주 記者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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