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豫備軍은 개긴다, 故로 存在한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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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前에 開封된 <라이타를 켜라="">라는 코메디映畫가 있다. 우리의 어리버리 허봉구는 豫備軍 訓鍊을 갔다가 全財産 300원을 投資해 라이타를 샀다. 그런데 그 所重한 라이타를 서울驛 化粧室에 두고 나오고, 豫備軍 訓鍊場에서 만난 組暴 頭目이 그 라이타를 주머니에 넣고 만다. 熱받은 허봉구는 서울부터 釜山까지 가는 새마을號에 組暴 頭目을 따라 타고는 죽도록 맞으면서 라이타를 내놓으라고 한다. 不屈의 豫備軍 精神? 이건 어딘가 語塞하다.

그러나 映畫의 앞部分에서 보여주는 豫備軍 訓鍊場 모습은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豫備軍에게 點心값과 交通費를 支給하기만 했어도 어리버리 허봉구는 아버지 紙匣에 손을 대다가 얻어터지고 凄凉하게 訓鍊받으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政府에서 點心값을 充分히 주었더라면 허봉구는 도시락을 사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라면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1500원! 어떤 豫備軍은 차라리 주지나 말라고 興奮한다.

▲ 豫備軍 캐릭터 www.army.go.kr/character1
ⓒ 최재훈
멀쩡한 사람들도 豫備軍服 입혀서 모아 놓으면 달라진다. 高聲放歌는 基本이고, 예쁜 女子 지나가면 휘파람부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路上放尿도 서슴지 않는다. 豫備軍이 되는 瞬間 우리의 行動方式, 思考方式은 달라진다. 精神敎育 時間에 講師나 敎官은 豫備軍들에게 자는 것은 좋은데 떠들지만 말아달라고 하소연한다. 한참 뛰어야 할 나이에 어디 가서 자는 것은 좋지만 떠들지만 말아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豫備軍은 當然히 軍紀가 빠져 있다.

아니, 軍紀가 바짝 들었다면 그는 豫備軍이 아니다. 豫備軍의 軍紀는 왜 빠져 있는 것일까? 여기에 對한 答으로는 우스개소리 하나가 있다. 豫備軍은 除隊할 때 豫備軍服을 받는다. 그런데 大部分의 사람들은 除隊 後에 體重이 는다. 쌓여가는 人格과 歲月을 堪當하지 못해 上衣와 下衣의 단추는 풀리게 마련이고, 服裝의 解弛는 精神의 解弛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큰 事件 때마다 豫備軍 制度 變更, 經濟 損失은 1兆 3千億원

豫備軍이 創設된 것은 1968年. 實際로 鄕土豫備軍 設置에 關한 法律이 처음 制定된 것은 5ㆍ16軍事叛亂 直後인 1962年이지만, 이 法案이 改正을 거쳐 實行된 것은 1968年이다. 이 해 1月 21日 김신조 等 以北 特殊部隊 31名이 靑瓦臺를 奇襲하려다 未遂에 그친 事件이 發生한 直後 朴正熙는 鄕土豫備軍 250萬을 武裝할 計劃을 세워 豫備軍 創設을 一瀉千里로 밀어붙였다. 그 結果 4月 1日 大田 公設運動場에서 鄕土豫備軍 創設式을 擧行하였다.

1968年에 創設된 豫備軍 制度는 그 동안 無數하게 고쳐졌지만, 比較的 큰 手術이 加해진 것은 1993年에 일어난 不幸한 事件 直後였다. 그 무렵은 하늘과 땅, 바다에서 大型事故가 頻發해서 陸海共에서 다 터진다는 말이 돌더니 及其也 豫備軍에서도 創設以來 最大의 事件이 터진 것이다.

1993年 6月 10日 京畿道 漣川의 動員 豫備軍 訓鍊場에서 砲射擊 訓鍊 中 爆彈이 터져 豫備軍 16名, 現役 4名 等 모두 20名이 숨지고 5名이 重傷을 입는 慘事가 일어났다. 1個 鉋盤은 普通 8∼9名으로 構成되나 當時 豫備軍들은 모두 23名이 編成되었으며 安全敎育도 제대로 實施되지 않았다.

또 相當한 專門性이 要求되는 砲射擊이었음에도 不拘하고, 事故를 當한 豫備軍 大部分은 砲兵이 아닌 步兵이나 다른 病과 主特技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豫備軍을 敎育하는 助敎는 現役 1名과 防衛兵 2名이었는데, 防衛兵의 境遇 包에 對한 知識이 없어 고작 人員點檢과 담배피지 말라는 安全敎育 以外에는 現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 事故는 豫備軍과 關聯된 모든 問題를 드러낸 契機가 되었다. 더구나 當時 豫備軍의 數는 動員 270萬, 一般 169萬 等 430萬에 達해 厖大한 行政管理가 要求되고 있었다.

職場 豫備軍에 屬해 있는 사람들은 豫備軍 訓鍊을 하나의 아주 재미없는 休暇 程度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地域 豫備軍의 大多數를 차지하는 自營業者나 日傭勤勞者의 境遇, 豫備軍 訓鍊을 가면 그 날은 完全히 공치는 날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日當을 주고 代理出席을 시키기도 하고 訓鍊擔當者에게 賂物을 주어 訓鍊을 빠지기도 했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몸으로 때워야 하니 참으로 難堪한 일이다. 90年代 初盤 國防硏究院은 豫備軍 制度로 인해 한창 일할 나이의 사람들이 生産現場에서 有利됨으로써 發生하는 經濟的 損失이 1兆 3千億 원에 達한다고 發表했다.

'鄕土豫備軍設置法'은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前科者를 量産해 낸 法律일 것이다. 1993年까지 豫備軍 隊員이 移徙갈 때 豫備軍 編成申告를 하지 않았을 境遇 懲役 또는 罰金刑을 賦課해 每年 約 1萬 名의 前科者가 量産돼왔다. 이 法은 豫備軍 訓鍊 對象者가 居住地를 옮길 境遇 14日 안에 轉入申告를 마치도록 規定하고 있는데, 하루만 어겨도 곧바로 警察에 告發돼 10萬원 以上의 罰金刑을 받게 돼 있었다.

法이 改正되기 以前에는 서울市內 各 警察署마다 한달 平均 2百餘 名의 鄕軍法 違反者가 洞事務所로부터 告發되고 있었으며, 이 中 70%가 刑事立件되었다. 더욱이 이들 鄕軍法 違反者 가운데 80%가 14日 안에 轉入申告를 하지 않았다는 理由로 告發된 사람들이어서 이만한 事由로 前科者가 되는 것은 너무 苛酷하다는 輿論이 거세게 일었다.

豫備軍法 違反에 對한 處罰은 1993年 漣川 慘事 以後 豫備軍 制度가 改善될 때 緩和되었다가 1997年에 다시 强化되었다. 國防部는 豫備軍 訓鍊을 3次例 參加하지 않으면 鄕土豫備軍法에 따라 告發하던 것을 1997年부터는 2次例 無斷 不參하면 告發하기로 方針을 變更한 것이다.

國家 마음대로 國民 動員 - 示威 鎭壓

1968年 豫備軍이 創設될 當時 改正된 '鄕土豫備軍設置法'에 따르면, 豫備軍의 任務는 武裝共匪의 浸透가 있거나 豫想되는 地域에서 活動하는 것으로 局限되어 있다. 그런데 1980年 12月의 改正에서는 여러 가지 任務가 追加되었는데, 그 中에서 斷然 눈길을 끄는 것은 "武裝騷擾가 있거나 그 憂慮가 있는 地域 안에서의 武裝騷擾의 鎭壓"이라는 項目이 追加된 것이다. 여기에는 "警察力만으로 그 所要를 鎭壓 또는 對處할 수 없는 境遇에 한한다"는 但書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大規模 大衆示威가 武裝示威로 發展하는 境遇 衛戍令이나 戒嚴令 等의 節次를 밟지 않고도 武裝한 豫備軍을 動員하겠다는 것이다.

特히 이런 改正案이 通過된 時點이 光州民衆抗爭 直後라는 點은 注目할 만한 일이다. 當時 光州의 豫備軍들은 積極的으로 示威에 加擔하여 市民軍에서 重要한 役割을 遂行하였다. 전두환 新軍部는 이런 現象을 防止하고, 示威의 鎭壓에 豫備軍을 動員할 計劃을 세운 것이다.

實際로 1991年 5月 9日, 강경대 致死殺人事件 以後 學生示威가 激化된 이른바 '焚身政局' 時期에 陸軍 首都防衛司令部(守防司)는 隸下 部隊에 騷擾鎭壓에 對備한 作戰態勢를 强化하라는 指示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守防司가 靑瓦臺 等 特殊地域에 對한 經費를 擔當하는 3個의 警備團을 除外하고는 大部分 豫備軍 動員師團으로 編制되어 있다는 點에서 이런 指示는 疑懼心을 불러일으키기에 充分한 것이다.

實際로 서울 地域의 一部 豫備軍 동대에는 "騷擾鎭壓 作戰 態勢를 强化하고 全 部隊는 卽刻 出動態勢를 維持하라"는 內容의 對外祕 公文이 一部 下達되었다. 騷擾鎭壓 作戰에 豫備軍이 投入되면 動員中隊가 出動하게 되며 出動 豫備軍들은 對間諜作戰 때와 마찬가지로 목眞摯* 遮斷목을 占領하는 任務를 맡게 되는데, 목眞摯 遮斷목에는 主要施設 以外에 네거리 等 主要道路까지 包含돼 있어 示威隊를 막거나 主謀者를 逮捕하는 데 얼마든지 使用 可能하다. 多幸히 豫備軍이 示威鎭壓을 위해 投入되는 不祥事는 없었지만, 法律上 示威鎭壓에의 動員이 얼마든지 可能한 채로 豫備軍을 둔다는 것은 民主國家에서 걸맞지 않는 일이다.

防犯과 宗敎 行事에도 動員

할 일 없는 豫備軍에게 어떤 일을 시킬까 窮理하던 政府는 1991年 4月부터 9月까지 豫備軍을 防犯活動에 動員하기도 했다. 當時 '犯罪와의 戰爭'이 한창이었는데, 全國的으로 無慮 87萬 名의 豫備軍이 動員되어 37名의 犯人을 檢擧하는 赫赫한(!) 戰果를 거두기도 했다. 豫備軍의 防犯隊員化를 꾀한 政府의 發想은 于先 鄕土豫備軍 설치법에 規定된 豫備軍 本然의 任務에도 違背될 뿐 아니라, 그 實績에서 보듯이 2個 師團에 肉薄하는 豫備軍 2萬 3千餘 名 黨 雜犯 1名의 檢擧라는 肥效率의 極致를 보여주었다.

豫備軍이 하는 일은 또 있다. 軍指揮官과 密接하게 連結된 宗敎行事에 動員되는 것이다. 그 代表的인 例가 1990年 4月 26日 蠶室 올림픽 主競技場에서 열린 '民族和合과 統一을 위한 大聖會'였다. 이 行事에는 서울 全域의 豫備軍 5萬 名이 動員되었는데, 當時 豫備軍 當局은 이 行事에 參席하면 12時間의 山岳行軍을 免除해주지만 不參하면 1.5倍의 罰則敎育을 받게 된다며 당근과 脅迫을 내밀어 豫備軍을 動員했다.

이런 病弊는 이 行事가 言論에 報道되는 等 크게 問題가 되었음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1991年 4月, 6月, 그리고 11月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새秩序 새生活 確立을 위한 민·관·군 聯合 大聖會'라는 긴 名稱을 가진 集會도 宗敎行事라기보다는 차라리 豫備軍과 防衛兵들의 人員點檢大會였다고 할 수 있다. 모두 1萬 2千餘 名이 參加한 이 大規模集會에는 現役軍人 8百名, 豫備軍 2千餘 名, 防衛兵 4千餘 名과 그 家族들이 參加하였다. 當時 豫備軍 中隊는 隊員들에게 '豫備軍服 代身 깨끗한 私服을 입고 個人燒紙 聖經冊을 持參해 달라'는 親切한 案內文을 配布했다.

極右 時刻 注入

豫備軍이 設置될 當時부터 豫備軍의 政治的 利用 問題는 爭點이 되었다. 그래서 法으로도 豫備軍의 政治的 利用을 禁하고 있지만, 많은 境遇 이 法은 死文化되었다. 豫備軍 訓鍊, 特히 精神敎育 時間에 講師나 敎官이 安保를 憑藉하여 極右的인 發言을 하는 것은 茶飯事였지만, 가장 問題가 되었던 事例는 1996年 연세대에서 發生한 '한총련 事態' 直後 國家安全企劃部(現 國家情報院) 傘下團體가 製作한 豫備軍 敎育用 비디오 事件이었다.

한총련의 實體波라는 題目의 이 비디오는 한총련을 非難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총련 學生 拘束令狀을 棄却한 判事를 '左翼同調者'로 몰기까지 했다. 豫備軍 敎育에서 時代錯誤的이고 一方的인 敎育을 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지만, 이 事件은 大法院이 安企部와 國防部에 强力히 抗議함으로써 政治問題가 된 것이다.

國家安保 노우! 國民健康 家族計劃 예스!

豫備軍은 우리의 國家安保에 어떤 寄與를 하였을까? 豫備軍 自身에게 물어 보면 自己가 받는 어영부영 訓鍊이 國家安保에 寄與하고 있다고 答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豫備軍의 社會的 機能에서 重要한 것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國家安保에의 寄與보다는 國民健康과 家族計劃에 對한 寄與를 들 수 있을 것이다.

獻血은 豫備軍이 國民健康에 寄與(!)韓 重要한 分野이다. 獻血에 對한 觀念이 不足하여 우리나라는 買血에 한동안 依存해야 했는데 1970年代 後半부터 始作된 豫備軍 訓鍊場에서의 獻血은 午後 訓鍊 免除라는 莫强한 魅力 때문에 本意 아니게 國民健康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 豫備軍 訓鍊場은 世界에서 類例를 찾기 힘들 程度로 成功的이었다는 韓國 家族計劃의 熾烈한 現場이었다. 精管手術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이 豫備軍 訓鍊場이다.

김영삼과 김대중, 30年 前에 豫備軍 廢止 主張

1971年 大統領 選擧 當時 40代의 김대중 候補는 突風을 일으키며 朴正熙를 威脅했다. 그 當時 김대중 突風에는 몇 가지 理由가 있지만, 그의 公約, 特히 豫備軍 廢止 公約이 먹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世代가 흘러 그 때 처음 豫備軍 訓鍊을 받던 사람들의 아들들이 豫備軍 召集에서 解除될 나이가 되었건만, 이 땅에서 豫備軍 廢止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豫備軍 廢止를 公約으로 내세워 突風을 일으켰던 金大中이나, 1968年 6月 豫備軍이 創設된 지 두 달도 안 되어 豫備軍 廢止에 關한 法律案을 提案했던 김영삼이 모두 大統領이 되었지만, 豫備軍 廢止는 敢히 입에 담을 수 없도록 우리 社會는 極右의 壁 뒤로 뒷걸음질친 것이다.

豫備軍 經濟(?)

果然 무엇 때문에 豫備軍 廢止가 이토록 어려워진 것일까? 1971年 選擧에서 김대중이 豫備軍 廢止를 公約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 制度가 實施된 지 3年餘밖에 안 되어 아직 우리 社會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只今까지 35年째 豫備軍 制度가 運營되면서, 우리 社會에는 이 制度의 德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相當히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豫備軍 中隊長을 비롯한 各級 指揮官들이다.

現在 地域 豫備軍 洞大將은 3千 8百餘 名이며, 職場 豫備軍 中隊長 亦是 이에 近接한 數字일 것이다. 그런데 職場 豫備軍 中隊長은 職場 所屬으로 勤勞基準法의 保護를 받기 때문에 豫備軍 制度가 廢止된다 하더라도 쉽게 解雇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洞大將級 以上의 指揮官들의 境遇는 法院의 判例 上 勤勞者가 아니기 때문에 當場 일자리를 잃게 된다. 5千餘 名의 豫備役 將校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뿐 아니라, 現在 軍의 下級 將校로 服務하다가 轉役하는 사람들도 將次의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豫備軍 指揮官 以外에도 豫備軍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많다.

豫備軍 訓鍊에 招聘되어 安保講演을 하는 講師들, 全國 數百個의 豫備軍 訓鍊場에서 盛業 中인 食堂과 賣店, 豫備軍들을 실어 나르는 이른바 '輸送協會'에 屬한 車主와 運轉技士들, 訓鍊場 隣近의 가게들, 豫備軍服 等 服裝을 販賣하는 사람들 等等 豫備軍 制度의 存廢에 生死를 걸어야 할 사람들은 意外로 많다.

陸軍, 군살을 빼라

그러나 豫備軍 制度의 廢止를 위해 넘어야 할 가장 어려운 障礙物은 軍, 特히 陸軍이다. 1973年 駐월韓國軍司令部가 베트남에서 撤收하기 直前, 美軍 7師團은 韓國에서 撤收하였다. 이 空白을 메우고 駐월韓國軍司令部의 별자리를 維持하기 위해 陸軍은 새로이 3軍司令部를 創設하여 西部戰線의 防衛를 擔當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後方의 2軍은 豫備軍 動員을 前提로 編成하는 動員事端이나 鄕土師團 爲主로 再編되었다. 이 過程에서 陸軍의 師團 數는 20個에서 40個로 倍로 늘어났다. 動員師團은 現役兵은 거의 없이 豫備軍으로만 채워지는 社團이고, 鄕土師團은 一部의 現役兵이 編制되어 있으나 亦是 豫備軍 動員을 前提로 하고 있다.

이런 簡便部隊의 境遇에도 師團長, 聯隊長, 連帶參謀, 大隊長, 中隊長은 모두 現役으로 配置되고, 大隊參謀나 小隊長만 豫備軍으로 構成된다. 따라서 豫備軍 制度는 動員-鄕土師團 20餘 個를 保有하고 있는 陸軍에 엄청난 일자리를 提供하고 있는 셈이다. 一般 豫備軍만 廢止한다면 豫備軍 中隊長들의 職業이 날라가는 問題이지만, 動員 豫備軍까지 包含한다면 近 20個 師團의 將星級, 領官級, 尉官級, 副士官의 자리가 줄어드는 問題인 것이다.

現在 豫備軍 廢止 問題는 但只 豫備軍 中隊長들의 職業 問題만이 아니라 韓國軍, 特히 陸軍의 運營體系 全般과 密接한 關聯이 있는 複雜한 問題이다. 이 때문에 政治人들은 軍部의 눈치를 보느라 豫備軍 問題와 關聯해서는 잘해야 一般 豫備軍 廢止만을 言及할 뿐, 君의 별자리, 領官級 자리 問題가 걸린 動員豫備軍에 對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豫備軍 廢止 問題에 아무리 큰 障礙가 놓여 있다 할지라도, 이 問題를 언제까지 外面할 것인가?

우리가 이 땅에 平和를 이루고, 統一로 가기 위해서 軍縮은 必須的인 일이다. 우리 軍도 少數精銳化의 길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다. 於此彼 한 番은 치러야 할 일이 軍의 군살 빼기이다. 現在의 豫備軍이 實質的인 豫備電力으로서의 機能을 할 수 있는가? 果然 3百萬의 豫備軍, 5百萬의 民防衛가 國家安保를 위해 正말로 必要한가? 우리 軍이 人海戰術을 戰術에 包含시키고 있지 않다면, 豫備軍과 民防衛는 當然히 廢止되어야 한다.

그 白紙의 土臺 위에서 우리는 軍縮과 募兵制를 내다보면서 有事時에 實質的인 豫備電力으로서의 機能을 할 수 있는 豫備電力을 育成해야 한다. 豫備軍이 動員되어야 完篇部隊가 되는 部隊는 平時에 正常的인 訓鍊을 할 수도 없어 軍의 몸집만 불릴 뿐 그 效率性을 떨어뜨릴 뿐이다. 旣存의 豫備軍 體制를 그대로 두고 精銳 軍隊의 育成을 꾀할 수는 없다.

개기기에서 한 발짝 더

現在의 豫備軍은 豫備電力으로서 기능하기에는 너무나 厖大하고 放漫하다. 할 일 없는 豫備軍을 運營하다 보니 防犯隊員으로 活用한다던지, 宗敎行事에 動員한다던지 하는 等 本來의 目的과는 아무런 相關도 없는 엉뚱한 일에 動員하기 日數다.

政府나 軍이 現 狀況에서 豫備軍을 그대로 두려는 理由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豫備軍 制度가 이미 現在의 軍 體系, 特히 動員師團의 維持를 위해 必須的인 部分이 되었다는 點이다. 또 다른 理由는 豫備軍 制度만큼 國家가 國民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는 制度는 없기 때문이다.

豫備軍, 이런 訓鍊을 왜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들은 勿論 豫備軍들이다. 그러나 그때뿐, 돌아서면 또 豫備軍 訓鍊을 잊고 여러 달을 보낸다. 訓鍊場에서 豫備軍은 反抗하지 않는다. 다만 개길 뿐이다. 그러나 우리 社會의 民主化와 韓半島의 平和를 위해서는 豫備軍들이 自身의 問題를 直視해야 할 必要가 있다. 더구나 現在의 豫備軍 制度는 豫備電力으로서의 機能을 全혀 하지 못하고 있다.

現在의 豫備兵力을 精銳化해서 實質的인 豫備兵力이 되도록 豫算과 人員을 再檢討하는 作業이 切實히 要請된다. 이제는 서른 다섯 살이 된 豫備軍 制度, 사람이라면 벌써 豫備軍에서 召集解除 되었을 나이다. 豫備軍 制度 自體가 召集解除 될 날은 언제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에서 발행하는 '사람이 사람에게' 16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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