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盜掘꾼을 文化部長官에 앉힌 프랑스 - 오마이뉴스

메뉴 건너뛰기

close

인드라바르만1세가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아내를 시바신으로 형상화한 프레아코 사원
▲ 프레아코寺院 前景  인드라바르만1세가 自身의 父母와 祖父母, 아내를 시바神으로 形象化한 프레아코 寺院
ⓒ 金大鎬

關聯寫眞보기


初等學校 數學旅行 때 博物館이라는 곳을 처음 보았다. 光州博物館이었는데 琉璃管 안에 展示된 國寶級 靑瓷들을 보고는 시골아이들은 ‘머 이런 게 寶物이야?’하며 술렁거렸다. 내가 사는 마을 논과 밭, 들과 山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故鄕마을 康津郡 용운리 18萬餘 坪은 내가 世上에 태어나기 前부터 文化財保護區域이었다. 우리나라 最初로 聽者를 구워내기 始作한 곳이었기 때문인지 가마터만도 數十餘 곳에 이른다. 곳곳에 盜掘된 石棺墓들과 가마터는 훌륭한 숨바꼭질 場所였으며 農夫들에게 밭에서 나오는 靑瓷破片은 사람과 소의 발을 다치게 하는 귀찮은 存在였다.

크메르제국 야소바르만1세가 수도천도를 합법화하기 위해 옛 수도에 지은 힌두사원
▲ 롤레이寺院  크메르제국 야소바르만1世가 首都天道를 合法化하기 위해 옛 首都에 지은 힌두寺院
ⓒ 金大鎬

關聯寫眞보기


마땅한 장난감이 없는 우리에게 靑瓷 그릇은 훌륭한 소꿉장난 道具였다. 어린 나이에 그것들을 사러 다니는 骨董品商들이 참 寒心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쥐여주고 가는 몇千 원은 한 달에 한두 番 들르는 엿장수들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後날 盜掘된 石棺墓들에서 나온 遺物들의 相當數가 日本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骨董品商들이 아이들이 엿 사 먹으라고 몇 푼 쥐여주고,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歇값에 가져간 것들이 엄청난 價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無知가 부끄러웠다.

야소바르만1세가 사원건축의 배경 및 참여기술자, 구체적인 기술, 헌정한 조상의 이름 등 구체적인 건축의 내용을 기록한 내용
▲ 롤레이의 記錄  야소바르만1歲가 寺院建築의 背景 및 參與技術者, 具體的인 技術, 獻呈한 祖上의 이름 等 具體的인 建築의 內容을 記錄한 內容
ⓒ 金大鎬

關聯寫眞보기


앙코르度 마찬가지다. 우리는 프랑스를 똘레랑스의 나라, 人權과 文化藝術의 天國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政治·經濟的 收奪의 象徵인 美國과 함께 文化?歷史的 强奪의 歷史에 프랑스는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의 文化部長官부터 文化財 竊盜犯 出身이니 말이다.

앙코르遺跡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디아이쓰리의 扶助는 1923年 프랑스人 앙드레 말로가 이끄는 遺跡探査臺에 依해 도굴당한다. 反띠아이쓰리 彫刻品들을 仔細히 살펴보면 復元된 자욱이 鮮明한 것도 이때의 痕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앙드레 末路는 8年 後인 1931年 프랑스 文化部長官이 된다. 收奪이 帝國主義의 本性임을 認定하는 꼴이다.

요니위의 링가가가 십자수로 위에 서있는데 이곳에 성수를 부으면 당시 백성들이 농업용수와 식수로 사용했던 인공호수인드라타타카로 스며들었다고 한다.
▲ 요니위의 링가  요니위의 링가가가 十字繡로 위에 서있는데 이곳에 聖水를 부으면 當時 百姓들이 農業用水와 食水로 使用했던 人工湖水인드라他打카로 스며들었다고 한다.
ⓒ 金大鎬

關聯寫眞보기


앙코르遺跡에서는 곳곳에 머리 잘린 佛像과 파내간 扶助, 寶石을 파내기 위해 파헤쳐진 建物 等을 쉽게 볼 수 있다. 强大國들은 自身들의 收奪 行脚을 숨기기 위해 內戰 過程에서 크메르루주가 破損했다고 사람들을 속인다. 現地人들은 內戰 過程에서도 서로 文化財는 破壞하지 않는다는 暗默的 合意가 있었다고 말한다.

列强의 植民地時節 필리핀은 文化財 70%를 강탈당했다고 하고 캄보디아는 30%假量이 外國에 있다고 한다. 海外에 있는 우리 文化財도 10萬 點에 이를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 프랑스는 아직도 외규장각圖書를 返還하지 않고 賃貸해주겠다는 妄發을 일삼는다. 그런데도 國立博物館은 最近 10年間 外國文化財를 購入하는 데 136億원을 쓰고 우리 文化財를 還收하는 데 36億원을 썼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메워진 인공호수 인드라타타카 위에 세워진 롤레이사원으로 배를 대던 선착장(지금은 차로 갈 수 있다)
▲ 롤레이寺院의 船着場  只今은 메워진 人工湖水 인드라打打카 위에 세워진 롤레이社員으로 배를 대던 船着場(只今은 車로 갈 수 있다)
ⓒ 金大鎬

關聯寫眞보기


우리가 아는 앙코르와트나 앙코르톰은 크메르제국의 後代에 지어진 建築物이다. 初期建築物은 씨엔립에서 初期首都人 하레下랄레이 方向으로 13Km 地點에 位置한 롤레이, 프레아코, 바꽁사원에서 잘 觀察할 수 있는데 이를 통틀어 롤로우스 遺跡群이라고 부른다.

롤레이社員은 893年 야소바르만1歲가 父王에게 獻呈한 寺院으로 半徑 800m×380m의 人工湖水인 인드라打打카 위에 人工 섬에 있다. 롤레이社員은 하레하라와 알라이라는 두 單語의 合成語인데 9世紀 앙코르 最初의 首都인 하레하랄레이가 語源인 것으로 보인다.

초기 크메르건축은 벽돌을 사용하였고 후기에 들어 석재를 사용하였다.
▲ 붉은 甓돌로 지은 롤레이寺院  初期 크메르建築은 甓돌을 使用하였고 後期에 들어 石材를 使用하였다.
ⓒ 金大鎬

關聯寫眞보기


이곳에 새겨진 記錄에 依하면 湖水의 물은 首都였던 하리下랄라야 百姓들의 食水이자 周邊 農耕地에 農業用水로 供給되었다고 한다. 現在 湖水는 메워져 寺院 앞의 石材 船着場을 除外하고는 痕跡조차 남아 있지 않아 앞까지 車輛으로 訪問할 수 있다.

社員은 애初 6期로 計劃되었는데 東西南北 各 方位에 앙코르 初期塔 樣式의 4個 塔이 正四角形으로 配置되어 있다. 各 門에는 扶助를 새긴 린텔을 設置했으며 門 壁面은 神殿을 지키는 남身上과 女神像이 새겨져 있다. 4個의 塔 中央에는 十字形의 관수通過 요니(女性의 性器를 象徵)위에 링가(시바神의 男根 象徵)가 서 있는데 聖水를 부어 인트라타타카로 흘러들게 했다고 한다.

프레아코는 힌두어로 '성스러운 소'라는 말이다. 사원앞을 지키는 하얀 소의 상
▲ 프레아코의 '성스러운 소'  프레아코는 힌두어로 '성스러운 소'라는 말이다. 寺院앞을 지키는 하얀 소의 賞
ⓒ 金大鎬

關聯寫眞보기


이 寺院의 基壇은 라테라이트席으로 쌓았으며 塔은 甓돌로 쌓았는데 後期에 이르러서는 塔의 建築樣式은 漸次 돌로 바뀌어 가게 된다. 階段 밑으로는 社員을 지키는 2個의 使者床이 있는데 戰鬪的이고 勇猛한 모습의 後記 使者床과 달리 의젓하고 다소곳한 樣式이 特徵이다.

기둥에 새겨진 산스크리트語에 依하면 앞의 男性的인 塔은 야소바르만1歲의 아버지와 外할아버지에게, 그리고 뒤쪽의 女性的인 塔은 그의 어머니와 할아버지에게 奉獻 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門설柱에는 古代 크메르語로 神殿의 製作背景, 奉獻 된 先祖의 이름, 寺院 建築에 參與한 技術者 數百 名의 이름, 具體的인 作業內容이 記錄돼 있어 當時 歷史를 硏究하는 데 重要한 史料로 評價 받고 있다.

왕이 지은 건물임을 상징하는 사자상. 다소곳한 초기 사자상과 달리 전쟁시기엔 전투적이고 용맹한 형상으로 바뀌게 된다.
▲ 프레아코의 獅子賞  왕이 지은 建物임을 象徵하는 獅子賞. 다소곳한 初期 使者床과 달리 戰爭時期엔 戰鬪的이고 勇猛한 形象으로 바뀌게 된다.
ⓒ 金大鎬

關聯寫眞보기


야소바르만 1世는 寺院 建築 後 北西쪽 프놈바켕산으로 首都를 移轉하고 예아싸오테라아 都城을 쌓게 된다. 우리도 朝鮮의 漢陽遷都 過程에서의 旣得權의 反撥과 正祖의 水原 遷都 霧散의 經驗, 가까이는 行政首都 移轉 論難이 있었듯이 아마도 首都移轉에 따른 勢力들의 不滿을 잠재우기 위한 方法으로 社員을 建築하지 않았나 하는 推測도 可能하게 한다.

프레아 코(Preah Ko) 寺院은 힌두敎의 ‘성스러운 소’라는 말에서 根源을 찾을 수 있으며 500×400m로 大規模였다고 한다. 社員은 879年 인드라바르만 1世에 依해 築造되었는데 王妃와 祖上들을 위한 社員으로 獻呈되었다고 한다. 직사각형 基壇에 6個의 塔이 2줄로 建築 되었는데 예전에는 祖上들의 彫刻像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반디아이쓰리와 함께 크메르 초기건축조각의 백미로 일컫는다.
▲ 華麗한 프레아코 彫刻像  반디아이쓰리와 함께 크메르 初期建築彫刻의 白眉로 일컫는다.
ⓒ 金大鎬

關聯寫眞보기


王은 自身과 王妃, 父母와 外祖父母를 시바神의 形象으로 神格化시켰다고 한다. 現在 大部分의 建物은 사라지고 石造建築物의 痕跡과 6個의 塔만 남아 있는데 새하얀 甓돌을 一一이 쌓아 治粧했으며 군데군데 남아 있는 섬세한 조각이 볼거리다.

앙코르는 大部分 痕跡으로 남아 있다. 繼承보다는 斷絶의 歷史다. 木造建物들은 痕跡조차 남아 있지 않으며 大部分의 建築物은 茂盛한 熱帶密林이 잡아먹어 버렸다. 아직도 60%의 遺跡이 密林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한다. 죽은 앙코르가 산 캄보디아를 먹여 살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제 빈말이 아니다.

앙코르旅行에서 歷史란 만드는 것보다 지키고 繼承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疆土에서 자라는 풀 한 抛棄 돌 한 무더기에도 愛情을 가져야 앙코르의 悲劇, 植民地 時代의 收奪의 歷史가 反復되지 않을 것이다.

겨우 가느다란 목재에 의지해 지탱하고 있는 프레아코 유적이 안타깝다.
▲ 무너져 내리는 프레아코  겨우 가느다란 木材에 依支해 支撐하고 있는 프레아코 遺跡이 안타깝다.
ⓒ 金大鎬

關聯寫眞보기



태그 : #프레아코寺院 , #롤로우스 遺跡群 , #롤레이寺院 , #앙코르 , #캄보디아
댓글
이 記事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記事 原稿料로 應援 하세요
原稿料로 應援하기

마음 놓을 자리 보지 않고, 마음 길 따라가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이 記者의 最新記事 "마음도 收納이 可能할까요?"



讀者意見

移轉댓글보기
年度別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