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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懦弱했던, 그러나 다시 달렸던 英雄 - 오마이스타
1991年 大邱, 1勝 1敗로 맞서있던 準플레이오프 3次戰. 3回末, 2-1로 앞섰지만 1社에 走者를 3壘에 남겨놓은 狀況에서 들어선 자이언츠의 救援投手는 박동희였다. 打者는 라이온즈의 유중일. 날카롭게 視線이 모인 그 瞬間, 이미 1次戰 先發로 나서 1敗를 記錄한 박동희는 바짝 緊張하고 있었다. 安打 한 個面 同點을 許容하는 危機狀況이었다.

볼 카운트는 2-3 풀카운트. TV畵面 안팎을 眞空狀態로 만들어버린 그 瞬間, 박동희는 어이없게도 공을 쥔 손으로 虛空을 갈랐고, 보크 判定이 내려지며 3壘 走者는 悠悠히 홈을 밟고 말았다. 虛無한 同點. 大邱의 팬들은 豪宕한 歡呼聲을 울렸고, 釜山의 거리에는 憤怒의 喊聲이 쏟아졌다. 默默히 眉間을 구기며 입술을 씹는 박동희.

"그럴 줄 알았다. 저 놈 하는 짓이 만날 그렇지…."

아마도 그의 귓가에 善하게 울려댔을 그 揶揄, 그 아우聲.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野球熱氣를 자랑하는 釜山, 그곳에서 가장 膈한 揶揄를 들어야 했던 選手가 박동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恒常 예사롭지 않은 期待를 품게 했고, 大槪는 虛無한 뒷맛을 남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州로 마무리로 登場했던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느리게 發動이 걸리는 스타일의 選手였고, 칼날같은 薄氷의 勝負를 ‘세이브’보다는 勝利, 或은 敗戰으로 결정짓는 習慣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絶對 팬들을 便安하게 만드는 選手가 아니었으며, 緊張과 興奮, 그리고 熱狂 아니면 憤怒로 몰고 가는 選手였다.

釜山이 낳은 또 하나의 天才 投手

부산고 시절의 박동희 1985년 봉황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자책점 0'으로 부산고 우승을 이끈 박동희

▲ 부산고 時節의 박동희 1985年 봉황기 高校野球大會에서 '自責點 0'으로 부산고 優勝을 이끈 박동희 ⓒ 韓國野球委員會


70年代 後半, 양상문이라는 天才를 앞세워 全國을 휩쓸었던 부산고가 다시 한 番 釜山 野球팬들의 마음속을 술렁이게 했던 것이 1983年이었다. 鳳凰旗 1回戰에서 時速 140km大 後半의 强速球로 성남고의 2,3學年 先輩들을 1安打 完封으로 籠絡한 1學年生 投手가 登場했기 때문이다. 박동희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始作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비록 팀이 2回戰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그 해에는 더 以上의 注目을 끌지는 못했지만, 두 해 뒤인 85年, 3學年이 되어 鳳凰旗 舞臺로 돌아온 그 投手는 혼자 중앙고, 휘문고, 振興고, 전주고, 북일高를 거쳐 決勝 광주상고前까지 疾走하며 34이닝동안 自責點 ‘0’을 記錄하는 驚愕스런 活躍으로 優勝을 결정지어버린다.

이미 時速 150km를 넘어서고 있던 拘束은 그 時節의 高校舞臺에서 僥倖으로나마 건드려볼 수 있는 境地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쯤 되자 當場 그에게는 ‘第 2의 아무개’라는 別名들이 붙기 始作했다. 그리고 그 別名에 關한 論爭들이 始作되었다. 그러나 그 論爭은, 박동희가 果然 別名으로 따라붙은 ‘아무개’에 견줄만한 資格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듬해 박동희가 進學하게 된 고려대의 同門과 팬들은 ‘第2의 선동열’이라는 別名이 마땅하다고 主張했고, 그에 對한 緣故權을 가진 釜山의 野球팬들은 當然히 釜山野球의 系譜를 이은 ‘第2의 최동원’일 수밖에 없다고 力說했다.

그는 斷然 韓國 最高의 有望株였고, 同級 最强의 選手였다. 선동열과 박노준에 이어 또다시 洞世代 最高의 投手를 確保한 고려대는 ‘고려고等學校’라는 시샘어린 嘲弄을 기꺼이 甘受하며 박동희를 ‘풀稼動’ 시켜 大學舞臺를 平定했다. 이 當時 박동희의 活躍은 오히려 선동열과 박노준을 凌駕할 程度였다.

特히 3學年이었던 박동희가 7競技에 모두 출격해 혼자 6勝을 올렸던, 特히 8强戰부터 決勝까지 세 競技를 連續으로 完投했던 1988年 大學 봄철리그에서는 打線에서 불을 뿜은 김경기와 임수혁마저도 ‘박동희와 아홉 난장이들’中 하나로만 記憶되어야 했다.

또한 國家代表로서의 活躍 또한 釜山 先輩 최동원을 凌駕할 만했다. 大學 1學年 때 出戰했던 네덜란드 世界 選手權大會에서는 이광우와 械鬪組를 이루어 臺灣戰 勝利에 이어 最終戰 日本戰 逆轉勝을 이끌어내며 準優勝의 功臣이 되었고 89年 大陸間컵 大會에서는 臺灣戰 1安打 완봉승을 包含해 3競技에서 0.56의 平均自責點으로 2勝을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아시아選手權大會에서는 臺灣戰 完投勝을 거두며 共同優勝을 일口語內祈禱 했다.

그는 같은 時期 國家代表팀 競技에서 種種 日本의 노모 히데오(뒷날 美, 日 通算 200勝 投手)와 팽팽한 맞對決을 펼쳤고, 特히 아마추어 野球舞臺의 宿敵 臺灣에 乘勝長驅하며 ‘臺灣 킬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프로 데뷔戰의 6連續 脫三振

롯데 시절의 박동희 1992년 팀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끌어낸 박동희

▲ 롯데 時節의 박동희 1992年 팀의 두 番째 優勝을 이끌어낸 박동희 ⓒ 롯데 자이언츠


1990年 4月 11日. 三星 라이온즈와의 遠征競技가 벌어졌던 大邱球場. 그날, 그곳에서 박동희의 프로 데뷔展이 치러졌다. 6回末, 電光板에 박동희의 이름이 새겨지자 觀衆들은 홈과 遠征을 떠나 숨을 죽였다. 天下의 선동열과 최동원度 每 이닝 失點하며 고개를 떨구었던 프로 데뷔展. 그들보다 한 발 앞서 달려왔다는 엄청난 所聞 속의 박동희는 果然 그 津땀 나는 試驗臺를 無事히 通過할 수 있을 것인지. 

그 날, 三星 라이온즈의 選拔은 최동원이었다. 최동원, 釜山 野球의 象徵이자 自尊心. 그러나 자이언츠를 거쳐간 숱한 ‘에이스의 비운’ 傳說 첫머리가 되고 말았던 이름. 자이언츠 유니폼을 벗자 마치 머리털이 잘린 삼손처럼 힘을 잃은 그는 1回初부터 김민호에게 홈런을 맞는 等 3點을 내주고는 물러났고, 롯데 選拔 김청수가 끌어온 3-1의 리드 狀況에서 박동희가 救援登板한 것이다.

첫 打者 朴承浩 三振. 그리고 李萬洙 내야 땅볼과 이현택 三振으로 깔끔한 三者凡退. 그러나 7回가 始作되자마자 先頭 김종갑에게 솔로홈런을 맞으며 얼굴이 굳어버리자 捕手 한문연이 마운드로 올라갔다. 짧은 對話. 默默히 끄덕거리며 이를 악무는 投手.

그로부터 傳說的인 新人投手의 三振쇼가 始作되었다. 유중일, 이종두, 강기웅. 누구를 만나도 두려울 것 없던 黃金打線이 瞬息間에 세 個의 三振을 獻納하며 打席과 더그아웃 사이를 맴돌았고, 8回에도 장태수와 김성래, 李晩秀가 마찬가지의 經路를 되밟아야 했다.

9回 들어 이현택이 땅볼을 치면서 連續三振은 끝이 났지만 다시 두 他者를 連續 三振으로 잡으며 마무리. 成跡은 4이닝 1失點, 10脫三振 세이브였다.  

그 競技에서 던졌던 最高拘束 時速 155km는 歷代 韓國프로野球 最高 記錄에 該當했고, ‘덜 다듬어진 듯한’ 느낌은 ‘그럼에도 不拘하고 壓倒的’이었던 結果와 上昇하며, 오히려 더욱 驚愕스러운 未來에 對한 想像을 限껏 부풀려놓기 始作했다.

어쩌면 최동원과 선동열이 밥 먹듯 記錄했던 ‘20勝’은 너무 싱거운 目標로 보였고, 國內派 最初로 30勝의 壁을 다시 한 番 넘을 것이라는 豫想圖 억지스럽게 들리지 않는 瞬間이었다.

俊秀한 成績, 그러나 너무 높았던 期待

그러나 이미 最高라는 讚辭 속에서만 十數 年의 投手人生을 걸어온 이에게 새삼 ‘다듬어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新人이라고는 해도 大學舞臺와 國家代表팀에서 이미 닳고 닳아버린 팔꿈치와 어깨는 꽤 단단한 限界線을 그려두고 있었다.

一年에 한 두 番 만나는 大學舞臺나 國際舞臺 他者들과 달리, 프로舞臺에서는 한 해에 열댓 番씩이라도 거듭 만나며 再對決을 거듭했고, 그러자니 短期戰의 必殺技人 强速球와 커브度 노리고 緊張하면 때려낼 수 있는 平凡한 武器로 轉落하기 始作했다.

거기에다 몸쪽 공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決定的인 瞬間 한 템포씩 굳어버리는 ‘새가슴’. 더구나 하늘 끝까지 치솟은 期待로 노려보는 사직구장의 녹아버릴 듯한 熱氣. 그러고 보면, 최동원만큼 膽大하지도, 선동열만큼 靈惡하지도 못했던 그의 무른 心性과 頭腦가 悲劇의 始作이었다.

첫 해 그가 거둔 成績은 딱 期待値의 折半쯤에 該當할 10勝이었다. 145이닝을 던지면서 平均自責點 3.04. 只今이었다면 新人王 競爭에 나설 만한 好成績이었지만, 釜山 팬들은 不便한 헛기침을 뱉기 始作했다. 그리고 이듬해, 프로舞臺에 適應한 그는 189.2이닝을 던지며 14勝과 2.47의 平均自責點으로 大活躍했지만 釜山팬들의 마음은 如前히 어딘가 不足한 듯 했다.

“아직은 2年車니까… 곧 나아지겠지…”

그러나 드디어 20勝臺로 올라서는 元年이 되리라 믿어 疑心치 않았던 1992年, 그는 100이닝도 채우지 못하며 4.13, 7勝의 平凡한 投手로 墜落하고 말았다. 박동희에게 本格的인 揶揄가 쏟아지기 始作했던 時節이었다.

시즌 初盤, ‘意思 장티푸스’로 診斷 내려졌던 病이 問題였다. 結局 細菌 感染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理由 없이 熱이 오르고 泄瀉를 繼續하며 前半期 내내 2競技 밖에 뛰지 못하는 그에게 따가운 視線이 쏟아졌고, 高卒新人 염종석이 17勝을 거두며 또 다른 ‘第 2의 선동열, 或은 최동원’으로 떠오르기 始作하자 그나마 關心의 밖으로 밀려나는 서러움마저 맛보아야 했다.

揶揄 속에서, 한 番 더 앙다물었던 어금니

確實히 박동희는, ‘偉大한 選手’라기보다는 ‘아쉬움을 남긴 選手’로 分類된다. 그러나, 그에 對한 아쉬움이 唯獨 길게 餘韻을 남기는 것은, 그가 그저 ‘잘 할 수 있었는데 못한 選手’였던 것이 아니라, 내리막길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한 番씩 차고 올라 存在感을 심어놓았던 選手였기 때문이다.

1992年. 롯데 자이언츠는 믿었던 박동희가 시즌 初盤부터 離脫한 代身 터主大監 윤학길과 新銳 염종석이 나란히 17勝씩을 올려준 데 힘입어 正規시즌 3位까지 치고 올라가는 底力을 發揮했다. 後半期에 자리를 털고 나선 박동희가 부랴부랴 7勝을 채웠지만 練習生 出身 윤형배의 8勝과 無名新人 김상현의 7勝에도 앞서지 못하는 팀內 4, 5人者에 不過했다.

史上 最初로 120萬 觀衆을 突破하는 熱狂을 모아준 釜山 팬들에게 박동희는 이미 ‘버린 카드’였다. 그들의 期待는 온통 염종석과 윤학길, 그리고 打線의 ‘南斗오성’, 卽 김응국, 김민호, 전준호, 이종운, 박정태에 集中되어 있었다.

三星 라이온즈와 맞선 準플레이오프. 亦是 1次戰은 成俊과 選拔 完投 맞對決을 벌인 염종석의 5安打 완封套와 박정태의 決勝打點으로 맺음되었다. 그러나 2次戰 先發로 나선 것은 意外로 박동희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윤학길을 代身해 唯獨 大邱 球場에서 成績이 좋았던 박동희를 投入한 冒險이었고, 박동희는 그 期待에 副應해 5安打 7三振 無失點으로 4-0 完勝을 이끌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歡呼聲. 오랜만에 느껴본 復活의 느낌.

해태 타이거즈와 맞선 플레이오프에서는 윤학길과 염종석을 모두 털어넣어 잡은 1次戰과  윤형배와 김상현으로 버티다가 抛棄한 2次戰을 거쳐 勝負의 分水嶺이 될 3次戰에 投入한 것이 박동희였다. 그러나 準플레이오프 2次戰 以後 充分한 休息時間을 주기 위해 2次戰을 抛棄하면서까지 던졌던 그 勝負手에서, 박동희는 다시 한 番 失望을 안기고 말았다. 5回 急激히 制球力이 흔들리며 4失點. 結局 1-8의 대패였다.

絶體絶命의 危機狀況에서 다시 염종석의 完封 力投로 4次戰을 잡아낸 뒤 5次戰에서 潤學길이 6回까지 5-4의 살 떨리는 리드를 維持하자 강병철 監督은 準備를 마치고 있던 박동희를 건너뛰고 염종석을 다시 한 番 投入하는 勝負手로 韓國시리즈 進出을 確定짓고 만다. 자이언츠 選手團과 사직구장은 8年만의 韓國시리즈 進出로 熱狂했다. 그러나 다시 한 番 멋쩍은 微笑를 흘리며 돌아서서 어금니를 깨물어야 했던 것은 박동희였다.

다시 한 番, 頂上에 서다

準플레이오프부터 始作해 5次戰까지 치러진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滿身瘡痍가 된 자이언츠로서는 버릴 景氣를 버리고 따낼 景氣를 따내는 戰略이 必須的이었다. 그런 意味에서 박동희가 選拔 登板한 韓國시리즈 1次戰은, ‘버리는 景氣’였다. 1, 2先發인 염종석과 윤학길은 지쳐있었고, 맞相對는 그 해 多勝王과 救援王을 席卷한 빙그레 이글스의 송진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結果는 생각지 않은 자이언츠의 勝利였다. 1回 初 번트守備를 하며 中心을 잃고 朱子와 부딪히는 바람에 ‘走壘妨害’로 無死 1, 2壘를 만들어주며 흔들리기 始作한 宋鎭禹가 3回까지 6失點하며 무너진 反面에 박동희는 8被安打, 그리고 無慮 3個의 暴投를 하면서도 時速 150km 가까운 直球로 8이닝동안 10個의 三振을 잡아낸 것이다.

그리고 1勝의 餘裕를 안고 2次戰을 다시 한 番 ‘버리는 勝負’로 가져갔던 ‘만만디’ 강병철 監督은 8勝 投手 윤형배가 14勝 投手 정민철과의 맞相對를 생각지 않은 勝利로 이끌면서 優勝을 豫感하기 始作했다. 그러나 고비가 찾아온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첫 두 판을 ‘버리는 카드’로 버티며 아껴왔던 윤학길과 염종석, 그들이 탈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3次戰 先發 윤학길은 언제나처럼 묵직하고 誠實하게 공을 던졌다. 그러나 痼疾的인 初盤 亂調와 決定的인 瞬間의 幼弱함이 問題였다. ‘1回만 無失點이면 完封’이라는 안타까운 別名마저 달고 있던 그는 아니나 다를까, 3回까지 먼저 3點을 獻納했고, ‘南斗오성’의 꾸준한 追擊戰 끝에 8回 2死 2壘에서 전준호의 逆轉打로 4-3 리드를 잡고도 9回初 마지막 守備에서 지화동과 임주택의 連續 適時打로 再逆轉을 許容하며 1敗를 當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시리즈 MVP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2승 1세이브의 성적으로 MVP에 오른 박동희

▲ 韓國시리즈 MVP 1992年 韓國시리즈에서 2勝 1세이브의 成績으로 MVP에 오른 박동희 ⓒ 韓國 野球委員會


4次戰 先發은 염종석이었다. 어쩌면 그 해 그가 걸어간 榮光의 길에 畫龍點睛할 수 있었던 그 날을 위해 어머니는 그에게 長魚湯을 끓여 먹였다. 그러나 그것이 頉이 나 밤새 泄瀉를 했던 염종석은 6回初 集中安打를 맞고 3點을 許容하며 무너져내렸다. 6回初 5-3, 薄氷의 리드. 2死에 走者는 1, 3壘.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믿을 것은 박동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瞬間, 비록 팀은 2勝을 備蓄해두고 있었지만 모래알처럼 무너질 危機에 놓여있었다. 그 자리까지 팀을 이끌어온 윤학길과 염종석이 주저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瞬間부터, 박동희의 奮發이 始作되었다.

4次戰 6回初, 박동희는 염종석이 남겨놓은 1,3壘의 走者를 더그 아웃으로 돌려보낸 것을 始作으로 그 競技를 마무리했고, 이틀 뒤 5次戰에서도 4回부터 윤형배를 救援해 4-2 勝利를 지켜내며 韓國시리즈 優勝의 瞬間을 滿喫했다.

韓國시리즈 2勝 1세이브의 成跡. 그리고 韓國시리즈 MVP의 榮光이 補償으로 주어졌다. 그가 프로舞臺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瞬間이었다.

이대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다시 91年 準플레이오프 3次戰으로 돌아가보자. 그 날, 相對팀 라이온즈 亦是 選拔 성준이 1回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자 마운드에 오른 ‘부시맨’ 김성길은 조성옥에게 홈런을 許容하며 不安한 出發을 했고, 자이언츠 先發 김태형을 救援해 3回부터 登場한 박동희度 어이없는 보크로 同點을 許容하며 팬들의 脈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競技는, 그 때부터 모두의 豫想을 깬 歷史的인 投手戰으로 이어졌다. 無慮 4時間 37分. 延長 13回까지의 完州. 그동안 김성길은 12.1이닝동안 無慮 198個의 공을 뿌리며 9安打 1失點으로 버텼고, 박동희는 10.2이닝동안 5安打 1失點. 그리고 無慮 15個의 三振을 뽑아내는 妙技를 선보였다. 競技 初盤의 揶揄와 한숨은 歎聲과 歡呼로 바뀌었고, 眉間으로 모여들어 잔뜩 잔주름을 만들어내던 神經은 곧 起立拍手로 길을 바꾸었다.

그것이 바로 박동희였다. 때론 懦弱했고, 種種 무너져내렸던 未熟兒. 그러나 팬들의 揶揄를 激勵삼아, 끝없이 밀려드는 自愧感을 燃料삼아, 눈 질끈 감고 내달리기 始作하면 막아서는 者 누구든 秋風落葉처럼 連續三振으로 휩쓸어버리곤 했던 孤獨한 英雄. 

그 뒤로도 박동희에게 榮光의 날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끝내 선동열과 최동원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끝내 ‘亦是 박동희’라는 認定을 얻어내지 못했다. 94年에 31세이브를 올리기도 했지만, 같은 해 40세이브를 突破한 정명원이나 ‘老松’ 김용수와 比較하면 두 數 쯤 아래로 評價받았을 뿐이었고, 그 뒤로는 길고 긴 沒落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1997年 三星 라이온즈로 보내진 뒤로는 5年間 單 7승만을 거두며 잊혀져가야 했다.  

뒤늦게, 拍手를 보내다

지난 3月 22日. 交通事故로 그가 떠났다는 消息은 그를 記憶하는 모든 이들에게 묵직한 아픔을 심어놓았다. 그렇게 끝내 떠나리라고 생각했다면, 그리고 진작에 ‘歷史上 最高의 投手’라는 자리가 그에게 豫備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公平치 않은 揶揄 代身에 그의 努力과 業績에 마땅한 拍手를 쳐줄 수도 있었으련만, 하는 後悔와 未安함 말이다.

그래서, 無理한 期待와 인색한 評價에도 屈하지 않고 끝내 일어서고 다시 일어서준 그에게, 그래서 ‘박동희’라는 이름 석字를 떠올려 새기는 것만으로 運命과 才能과 피와 땀에 關해 한 걸음 멀어진 곳까지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그에게, 마음속으로나마 뒤늦은 拍手를 보낸다.
추모식 2007년 4월 10일, 사직 홈개막전을 앞두고 박동희 선수를 추모하고 있는 자이언츠 선수단과 부산 팬들

▲ 追慕式 2007年 4月 10日, 辭職 홈開幕展을 앞두고 박동희 選手를 追慕하고 있는 자이언츠 選手團과 釜山 팬들 ⓒ 롯데 자이언츠


덧붙이는 글 사람에 關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飮食을 媒介로 周圍 사람들에 對한 追憶을 떠올려 오마이뉴스에 連載했던 '맛있는 追憶'을 冊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自認)을 비롯해서 靑少年用 傳記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우장춘, 씨앗의="" 힘="" 씨앗의="" 희망="">(봄나무)을 펴냈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連載中인 80,90年代 프로野球 스타들의 이야기 '野球의 追憶'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라는 題目의 冊으로 出刊했다.
박동희 野球의 追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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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關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連載했던 '맛있는 追憶'을 冊으로 엮은 <맛있는 追憶>(自認)을 비롯해서 靑少年用 傳記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聖者>, 80,90年代 프로野球 스타들의 이야기 <野球의 追憶>等의 冊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