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도와주십시오. 日本이 朝鮮을 蹂躪하고 있습니다.”(1907년 7月20日 ‘平和會議步’) 高宗 皇帝의 密命을 받고 萬國平和會議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로 急派된 李儁 烈士.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自決을 擇한 1週日 뒤 報道된 特使團 文書 內容의 一部다.

早失父母하고 할아버지 손에 자란 先生은 어려서부터 明敏했다. 17歲 때 故鄕 咸鏡南道 北靑을 떠나 上京, 政客들과 接觸하던 그를 人材로 알아본 이는 興宣大院君이었다. 大院君의 도움을 받아 學問에 邁進한 先生은 26歲 때 咸鏡道 내 過去에서 壯元及第한 뒤 落鄕, 私財를 털어 經學院(北靑農高) 等 學校 設立에 나섰다. 啓蒙運動을 벌이던 그는 36歲에 法官養成所를 卒業, 漢城裁判所 檢事補가 됐다. 檢事 5年次에 貪官汚吏였던 이하영 법무대신(長官)을 彈劾, 世人의 注目을 받았다.

1902年 閔泳煥 等과 함께 祕密結社를 組織하는 等 抗日運動에 本格 뛰어들었다. 大韓協同會, 保安會 等의 組織을 結成, 日帝의 荒蕪地 開墾을 沮止하고 國債補償運動을 全國으로 擴散시켰다.

1907年 萬國平和會議 開催 消息을 接한 先生은 러시아 橫斷鐵道를 利用, 두 달餘 만에 헤이그에 到着했다. 到着 20日째, 日本의 妨害로 會議場 進入에 失敗한 先生은 割腹 自決로 朝鮮의 現實을 全 世界에 알렸다. 105年 前 오늘(7月14日)이다.

백승현 記者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