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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내 人生을 바꾼 사람]大入 抛棄하려는데 登錄金 들고온 벗이여!|동아일보

[O2/내 人生을 바꾼 사람]大入 抛棄하려는데 登錄金 들고온 벗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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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入力 2012年 1月 28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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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優 배한성에게 날개 달아준 親舊 李錫兌

배한성의 친구 이석태는 그를 두고 “악운에 강한 놈”이라고 했다. 도저히 방도가 없는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희한하게도 길이 열렸다고 한다. 그런 때는 꼭 언제나 성실했던 그를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배한성의 親舊 李錫兌는 그를 두고 “惡運에 强한 놈”이라고 했다. 到底히 方道가 없는 難關에 부딪칠 때마다 稀罕하게도 길이 열렸다고 한다. 그런 때는 꼭 언제나 성실했던 그를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원대연 記者 yeon72@donga.com
親舊가 찾아왔다. 덕수상고에서 除籍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1966年 初. “너 大學 어떻게 할 거야?” 누구한테도 듣고 싶지 않았던 가장 가슴 아픈 質問. “高卒 배한성? 너 아니다. 꼭 大學 가야 돼.” 버럭 火를 냈다. “너나 大學 가라고! 네가 내 事情 뻔히 알잖아. 나 登錄金 없어서 못 가. 抛棄한 지 오래됐어.” 아, 하고 짧게 歎息하더니 親舊는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親舊는 新聞紙에 싼 돈뭉치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登錄金 갖고 왔어. 너, 學校 가.” 聲優 배한성(67)이 只今도 눈시울을 붉히는 그때 그 親舊, 李錫兌(66·前 코리아스파이서 代表理事)다.

○ 貴人

‘오늘도 不確實한 未來에 시달렸다.’ 1965年 배한성의 日記는 하루하루 그렇게 끝을 맺었다. 高等學校 3學年, 大學入試를 準備해야 할 그에게 敎室은 너무 멀었다. 學校를 못 나간 지 1年이 훌쩍 넘었다. 6·25戰爭 때 越北한 아버지 代身 어머니와 동생의 生計를 實質的으로 책임져 온 지도 6年째. 앞날은 늘 그랬듯 不透明했다.

그동안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東亞日報를 200餘 部 돌리는 일을 3年 程度 했다. 新聞 뭉치를 왼팔에 끼고 집집을 돌고 나면 왼쪽 가슴 밑이 新聞에 쓸려 傷處가 나고 津물이 흘렀다. 軍用 夜商(야전잠바)을 求해 입으면 괜찮을까 했지만 그 튼튼하다는 옷감도 얼마 안 돼 해져서 천을 덧대 박음질해 입기를 反復했다.

或是 남들이 알아볼까 帽子를 푹 눌러 쓴 채 거리의 郵遞筒을 빨간色 페인트로 漆하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조그만 會社의 使喚(使喚) 노릇도 해봤다. 그러나 意欲 넘치게 出發한 會社들은 얼마 못 가 고꾸라지기 일쑤여서 月給을 받은 적은 손으로 꼽을 程度였다. 洞네 아저씨를 따라 南大門에 있는 工場에 가서 받은 冊床 椅子 같은 備品을 손수레에 싣고 食堂이나 事務室에 날라다 주는 일도 했다. 그러나 눈이나 비가 오면 공치고 名節 때는 注文이 끊겼다. 그나마 固定的으로 輸入이 되는 것은 初等學生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夜間이라고 해도 學校를 다니는 게 쉽지 않았다. 銀行員이 되면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들어간 上告였지만 어릴 적 도끼로 나무를 패다 잘못해서 날에 찍힌 오른손 검指가 발목을 잡았다. 뭉툭하게 잘려 나가 대롱대롱 매달린 검指 끝 살點이 어영부영 다시 붙긴 했는데 그 模樣이 마치 조롱이떡 같았다. 왼손 검指보다 두 倍는 두꺼워진 손가락으로 籌板알을 튀기면 옆자리 籌板알이 덩달아 오르락내리락했다. 銀行員 될 사람의 珠算 點數가 밑바닥이니 볼 場 다 봤다는 생각뿐이었다.

“낮에 일하고 學校에 가려니 遲刻이나 缺席을 자주 하고, 籌板 點數가 형편없으니 成跡은 더 떨어지고…. 싸움도 안 하는데 問題兒 비슷한 놈이 됐죠. 그러다 登錄金을 몇 番 못 내고 그만두다시피 했지요.”

캠퍼스의 浪漫을 꿈꿨지만 現實은 焉敢生心이었던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사람이 李錫兌였다. 中學校 때 처음 만난 親舊. 어릴 적 다친 한쪽 무릎을 제때 治療하지 못해 다리를 펴지 못하는 벋정다리였던 親舊. ‘나 같은 놈이 工夫마저 못하면 正말 아무것도 못 된다’며 工夫에 熱中하던 親舊. 그날 들고 온 돈은 日數를 놓던 그의 外三寸이 준 것이라고, 親舊는 나중에 배한성에게 이야기해줬다. “갚지도 못할 놈에게 어떻게 돈을 빌려 주냐”고 冷淡하던 外三寸에게 “三寸, 惡質的으로 번 돈 좋은 일에 좀 쓰세요”라고 했다던가.

“어머니가 ‘占을 쳐 보면 너는 周圍에 貴人(貴人)이 많아서 일이 풀린다더라’고 하셨어요. 事實 제가 살아온 게 그런 일의 連續이었어요. 그中 가장 貴한 사람이 그 親舊예요.”

○ 生涯 最高의 해


“너는 안 돼.” 배한성은 自身의 귀를 疑心했다. ‘잠깐, 저 말이 무슨 뜻이지? 좋다는 말인가? 아니란 말이던가? 그렇게 말씀하셨을 理가 없어.’ 1966年 봄, 서라벌예대 放送科에 入學한 그가 처음 들은 演技授業에서 瞬息間에 얼어붙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商人’ 中 한 대목을 暗記해서는 映畫俳優처럼 멋지게 읊었다고 생각했다. 周圍 同級生들이 놀라움에 입을 쩍 벌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許接한 너희하고는 次元이 다르다고.’ 그런데 안 된다니….

이원경 敎授(1916∼2010)는 그렇게 禪僧(禪僧)李 話頭를 던지듯 하고는 敎室을 나갔다. 멍하니 서 있다가 先生의 뒤를 따라갔다. “敎授님, 저는 나름 외우기도 하고 熱心히 했습니다. 왜 안 되는지 궁금해서 왔습니다.” 이 敎授는 아래위로 그를 훑어보더니 “건방진 子息, 뭐가 안 되는지 네가 생각해 봐, 인마”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너무나 야멸차게 말씀을 하시니 더 쫓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敎授님 授業을 듣고 보니 ‘이분이야말로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걸 집어내는구나’ 했어요. 다음부터 그분 授業은 絶對 빠지지 않았지요.”

授業에 꼬박 出席하는 건 勿論이고 始終(侍從)처럼 이 敎授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를 嚴하게 對하는 先生의 모든 말씀을 노트에 적었다. 李 敎授가 食堂에서 짜장면이라도 드室라치면 얼른 計算대로 달려가 돈을 냈고, 술 좋아하는 스승에게 비싼 麥酒를 待接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劇場 담을 넘어 들어가 훔쳐봤던 映畫들, 訊問을 空짜로 넣어줄 테니 映畫 票를 달라고 해서 보던 映畫들, 그걸 보며 마음속으로 聲優를 꿈꿨던 그에게 이 敎授는 燈臺와 같았다.

李 敎授는 나중에 그에게 ‘안 된다’고 한 理由를 말해줬다. “너는 왜 나쁘냐 하면, 사람이 白紙 같아야지 뭔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데 너는 이미 때가 잔뜩 묻어 있어서 힘들어.” 흉내만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스승에게서 基本을 배웠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基本의 重要性을 뼛속까지 채웠다. 그해 가을 當時 東洋放送(TBC) 聲優 2期 公採에 支援했다. 試驗 前날 이 敎授가 그를 불렀다. “너는 배운 대로만 하면 合格할 거다.” 그가 스승에게서 처음 들은 激勵의 말이었다. 그리고 붙었다.

1966年은 그의 生涯 最高의 해였다. 以後 45年은 以前과 많이 달랐다. “내 生涯 最高의 해를 만들어준 親舊 李錫兌가 생각할수록 고맙고, 그 親舊 德에 만나게 된 이 先生님이 고맙지요.”

○ Think Different

배한성은 自身이 맡은 映畫나 드라마는 最小 서너 番을 본다. 映畫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 役을 할 때는 여섯 番 넘게 봤다. 그러면서 臺詞를 말하지 않을 때 俳優의 입모습까지 놓치지 않고 臺本에 적어 놓았다. ‘입에 묻은 담뱃재를 後 불어 떨어낸다.’ ‘입맛을 쩝쩝 다신다.’ 이 때문에 그의 臺本은 지저분하기로 有名했고, 그 德分에 視聽者들은 “外國人이 우리말을 참 잘도 한다”고 錯覺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지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그런 努力이 없었으면 第 聲優 壽命도 짧아졌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가. 인터뷰 내내 그는 ‘野望의 季節’의 루디 兆다시로, 맥가이버로, 가제트 刑事로 時時刻刻 달라 보였다.

민동용 記者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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