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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응구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임응구 (林應九, 日本式 이름: 伊藤應九 이토 吳큐 , 1907年 9月 13日 ~ 1994年 )는 韓國 日本 의 西洋畫家이다. 本貫은 羅州 (羅州)이다.

임응구
林應九
伊藤應九
身上情報
別稱 日本式 이름은 이토 吳큐 (伊藤應九)
出生 1907年
대한제국의 기 大韓帝國 慶尙南道 釜山
死亡 1994年 (享年 88歲)
일본의 기 日本 도쿄
職業 西洋畫家
學歷 日本 도쿄 美術學校 專門學士
經歷 單曠懷 會員
活動期間 1928年 ~ 1986年
分野 西洋畫
兄弟 임응식(아우)
主要 作品
影響

生涯 編輯

慶尙南道 부산부 (現 大韓民國 釜山廣域市 ) 出身이다.어릴 때부터 자주 日本을 往來하며 美術을 工夫했다. 도쿄 美術學校 를 卒業 [1] 한 뒤, 日本 女性과 結婚하면서 1936年 日本에 歸化했다.

第13回 朝鮮美術展覽會 에 入選하여 正式으로 花壇에 等당하였고, 宣傳에 總 6回 入選하였으며 朝鮮總督府賞을 받기도 하였다. 첫 個人展은 1934年 부산일보사 展示場에서 가졌다. 임응구는 도쿄美術學校風의 傳統的이고 古典主義的인 西洋畫 具象畫를 그렸는데, 西洋式 머리를 한 新式 女性이 아들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그린 〈어머니와 아들〉(1939)은 植民地 體制가 要求하는 賢母良妻型 어머니像을 그대로 具現하고 있다는 評價도 있다. [2]

1943年 韓國과 日本의 親日 美術人들이 結成한 單曠懷 에 加入하여 徵兵制 實施에 즈음한 管制 美術 作品을 單曠懷 會員들과 함께 共同 創作하여 發表했다. 1943年 完成된 單光會議 〈朝鮮徵兵制實施記念化〉는 製作에만 여러 달이 걸린 大作으로, 徵兵制 雰圍氣를 鼓吹하고자 巡廻 公演으로 展示되었으며 朝鮮軍司令部 에 寄贈되었다.

以後 日本에서 活動하며 日本帝國美術展 에 9次例 出品하고 特選을 한次例 했고, 百受賞(白壽賞)을 받았다. 問題全(文帝展)에서 總 12回 入選하였으며, 살롱 도톰(가을의 展覽會) 會員, 日戰會友(日展會友)를 지냈고 살롱商道 받았다.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美術 部門에 包含되었다.

동생은 寫眞作家 임응식 이다. [3]

家族 關係 編輯

人間 關係 編輯

임응구 (林應九)의 아우인 寫眞作家 임응식 (林應植, 1912年 11月 11日 出生 ~ 2001年 1月 18日 死亡)은 西洋 畫家 이봉상 (李鳳商, 1916年 7月 27日 出生 ~ 1970年 8月 4日 死亡)과 오랜 親舊 關係를 맺기도 하였다.

같이 보기 編輯

參考資料 編輯

各州 編輯

  1. 李相洙 (1998年 11月). “美術團體를 찾아서”. 《월간미술》.  
  2. 移任하 (2004年 4月 28日). 〈1. 敎育을 통한 申師任堂 되기〉. 《계집은 어떻게 女性이 되었나》. 서울: 서해문집. 23쪽쪽. ISBN  8974832135 .  
  3. 利用길 (2004年 1月 5日). “[版畫家 利用길 내가 본 釜山美術] <17> 故 나혜석·임응구 畫家” . 釜山日報. 2005年 3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10月 26日에 確認함 .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