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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基鎭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金基鎭 (金基鎭, 1903年 陰曆 6月 29日 [1] ~ 1985年 5月 8日 )은 大韓民國의 文學評論家 이며, 是認 利子 小說家 이기도 함과 同時에 日帝强占期의 親日派 이다.

金基鎭
作家 情報
出生 1903年 陰曆 6月 29日
大韓帝國 忠淸北道 淸原郡 남이면 팔봉리
死亡 1985年 5月 8日 ( 1985-05-08 ) (81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職業 文學評論家
小說家
作家
是認
言論人
出版人
經歷 한국문인협회 拷問
宗敎 儒敎 ( 性理學 )
筆名 本名(本名)은 金基鎭 (金基鎭)
號(號)는 八峯(八峰), 여덟뫼, 팔봉산인(八峰山人), 東樵(東初)
筆名(筆名)은 구준의 (具準儀)
日本式 이름은 가네무라 野美네 (金村八峯)
活動期間 1920年 ~ 1985年
장르 文學評論, 詩, 小說
子女 김복희 (딸)
兄弟 김복진 (兄)
親知 虛하백 (兄嫂)
主要 作品
<哀憐模寫>
<붉은 쥐>

呼價 八峯 (八峰)이라 김팔봉 (金八峰)으로도 불리었던 그는 彫刻家 김복진 (金復鎭)의 아우이다. 本貫은 (新) 安東 (安東)이다.

生涯 編輯

出生과 젊은 時節 編輯

1903年 忠淸北道 淸原郡 出生이며, 本貫은 安東이다. 朝鮮 프롤레타리아 藝術家 同盟(KAPF)의 實質的 指導者로 活動했다.

배재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한 뒤 日本 에 留學하여 릿쿄 大學 英文學部에서 修學했다. 大學을 中退하고 歸國하여 《 每日申報 》, 《 時代日報 》, 《 中外日報 》 等에서 記者로 勤務했다.

日本 留學 中에 박승희 , 이서구 와 함께 土月會 를 組織하여 活動한 것을 始作으로 文藝運動에 뛰어들었다.

日帝 强占期 活動 編輯

1923年 에는 배재고보 同窓인 박영희 等과 함께 파스큘라 를 組織했고, 파스큘라가 1925年 카프 로 發展하면서 朴英熙와 더불어 카프의 指導者 役割을 하였다. 《 白鳥 》 同人으로 詩 〈哀憐模寫〉(1923)를 發表하며 登壇하여 파스큘라와 카프 活動을 理論的으로 뒷받침하는 傾向派 詩와 小說, 隨筆 等을 活潑히 創作했다.

이 時期의 代表 評論으로는〈클라르테 運動의 世界化〉(1923), 〈支配階級 敎化, 被支配階級 敎化〉(1924), 〈文藝思想과 社會思想〉(1927), 〈프로문예의 大衆化 問題〉(1929)이 있고 政治에 文學이 從屬되는 典型的인 參與文學的 傾向을 보였으나, 차츰 文學의 形式性도 重要視하는 方向으로 性向이 變化되어 形式의 重要性을 낮게 보는 朴英熙와 論爭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觀點의 延長에서 大衆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맑스주의 通俗小說"의 必要性을 主唱하기도 했으며, 後에 透徹한 傾向性을 내세운 카프 少壯派 김두용 , 林和 等에 依해 批判받았다.

小說로는〈붉은 쥐〉(1924), 〈젊은 理想主義者의 社(死)〉(1925) 等이 잘 알려져 있다.

日帝强占期 末期에는 親日 行跡을 보였다. 1938年 時局對應典膳司上輔國聯盟 에 結成委員으로 參席했고, 1944年 열린 第 3回 대동아文學者大會에 參加했다. 朝鮮文人部國會와 朝鮮言論輔國會 에도 加擔하여 朴英熙와 함께 카프의 指導者에서 親日 文學界의 中樞로 變身했다. 1940年 부터 1945年 까지 《 每日申報 》, 《 趙匡 》, 《 新時代 》를 통해 親日 著作物도 發表했다.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1943) 等 總 親日 作品 數는 17篇으로 積極的으로 親日 創作 活動을 하였다. [2] 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 親日 文學인 42人 名單 2008年 發表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文學 部門에 모두 들어 있으며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大韓民國 編輯

光復 後에는 出版社인 애지사를 設立해 經營하다가 韓國 戰爭 서울 朝鮮人民軍 에 占領되자 逮捕되어 人民裁判에 回附된 뒤 卽席에서 死刑 判決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他殺型이 執行되었음에도 奇跡的으로 살아남은 金基鎭은 大韓民國 陸軍 의 從軍作家團 副團長으로 參戰하였고, 金星花郞武功勳章을 受賞하며 代表的인 反共主義 文人으로 活動했다. 5·16 軍士政變 直後 管制 組織인 再建國民運動本部 中央會長을 지내기도 했다.《 京鄕新聞 》 主筆을 거쳤고, 國際펜클럽 韓國本部와 한국문인협회 等에서 顧問을 지냈다. [ 出處 必要 ]

1936年 《靑年 김옥균》을 發表한 以來 漸次 歷史小說에 關心을 보였는데, 光復 後에는 《統一天下》(1954~1955), 《群雄》(1955~1956), 《초한지》(1984) 等 歷史小說을 많이 發表했다. 1978年 대한민국예술원 會員이 되었고, 死亡 後 1989年 文學과知性社 에서 전7권의 《김팔봉文學全集》이 發刊되었다.

家族 關係 編輯

같이 보기 編輯

各州 編輯

  1. “링크” . 2021年 6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1年 6月 18日에 確認함 .  
  2. 김재용 (2002年 8月). “親日文學 作品目錄” . 《실천문학》 (67號): 123~148쪽. 2007年 9月 2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9月 14日에 確認함 .  

參考資料 編輯

  • 권영민 (2004年 2月 25日). 《韓國現代文學大辭典》.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75~79쪽쪽. ISBN  89-521-0461-7 .  
  • 反民族問題硏究所 (1995年 7月 1日). 〈金基鎭?: 皇國 文學의 품으로 投降한 階級 文學의 戰死 (김철)〉. 《親日派 99人 (3)》. 서울: 돌베개. ISBN  89-7199-013-9 .  
  • 강옥희,이영미,이순진,李承姬 (2006年 12月 15日). 《植民地時代 大衆藝術人 事前》. 서울: 소도. 28~30쪽쪽. ISBN  978-89-90626-2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