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a:image/svg+xml;base64,PHN2ZyB3aWR0aD0iNzIwIiBoZWlnaHQ9IjQ4MCIgeG1sbnM9Imh0dHA6Ly93d3cudzMub3JnLzIwMDAvc3ZnIj48L3N2Zz4=)
1858년(年)
개항(開港) 조약(條約) 이후(以後) 외국인(外國人)에 한(限)해 신앙(信仰) 활동(活動)이 허가(許可)되었고,
나가사키
에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天主堂)
[8]
의 베르나르타(打)데 프티장(腸)(Bernard-Thadee Petitjean.1829~1884) 주임신부(主任神父)는 일부러
성가(聖歌)
를 부르며 다니는 등(等)
선교(宣敎)
를 시도(試圖)했으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反應)이 없었다. 그러나 성당(聖堂)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성모상(聖母像)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모여 살던 마을에
"프랑스 절(節)에
성모(聖母) 마리아
님이 계시다"
는 소문(所聞)이 퍼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 사이에는 당시(當時)로부터 250여(餘) 년(年) 전(前)
순교(殉敎)
한 바스챤
[9]
이 예언(豫言)한 "7대(臺)가 지나면 흑선(黑線)을 타고 파파(
교황(敎皇)
)가 보낸 콘페소르(고해신부)가 온다. 매주(每週)라도 콘삐산(
고해성사(告解聖事)
)을 할 수 있다.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키리시탄(柴炭)의 노래를 부르며 걸을 수 있는 시대(時代)가 온다. 길에서 젠쵸(외교(外交)인)를 만나면 그가 길을 양보(讓步)한다."라는 전승(傳承)이 있었다. 이에 예언(豫言)이 실현(實現)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1865년(年)
4월(月) 12일(日)(
元治
2년(年) 음 3월(月) 17일(日))
금요일(金曜日)
,
산파(産婆)
이사벨라 유리(有利)(당시(當時)의 가족(家族)과 동네(洞네) 사람 13~15명(名)(모두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이(李) 구경을 핑계 삼아 오더니, 기도(祈禱)하고 있던 프티 장(張) 신부(神父)에게
"성모(聖母)님을 공경(恭敬)하십니까?", "결혼(結婚)은 하셨습니까?", "
전례력(典禮曆)
을 지키십니까?"
[10]
를 질문(質問)하였다. 이에 프티장(腸) 신부(神父)는 "성모(聖母)님을 공경(恭敬)하고, 사제(司祭)는 결혼(結婚)하지 않으며, 전례력(典禮曆)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답(答)하였다.
[11]
키리시탄(柴炭)들은 그제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神父)님과 같습니다."라고 속삭인 후(後) "サンタマリアの御像はどこ? (성모(聖母) 마리아님의 성상(聖上)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이에 프티장(腸) 신부(新婦)가 안내(案內)해 주자, 그냥 구경 온 척하던
마을 사람 전원(全員)이
갑자기 몰려들어 기도(祈禱)를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온 이들이 가톨릭 사제(司祭)라고 확신(確信)하여 감추어 온 신앙(信仰)을 드러낸 것이다.
1865년(年) 4월(月) 12일(日)의 이 사건(事件)은 교회사(敎會史)에서도 유례(類例)를 찾기 힘든
[12]
일로, '신자(信者) 발견(發見)'이라고 부른다. 프티장(腸) 신부(神父)는 이를 당시(當時)
요코하마
교구장(敎區長)
주교(主敎)
에게 보고(報告)하였다.
일본(日本)
외부(外部)에서는 이런 신자(信者)가 있다는 것을 전혀(全혀) 몰랐기에, 이들을 발견(發見)한 서양(西洋) 신부(新婦)들은 이를
기적(奇跡)
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2년(年) 뒤인 1867년(年)(
慶應
3년(年))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의 집단(集團) 거주지(居住地)인 우(于)라카미(美)(浦上) 지역(地域)의 신도(信徒)들이 불교식(佛敎式) 장례(葬禮)를 거부(拒否)함으로써 그 존재(存在)가 막부(幕府)에게 드러났다.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 대표(代表)로 봉행소(奉行所)에 불려간 다카기 센에몬(高木仙右衛門) 등(等)은 분명(分明)하게 신앙(信仰)을 표명(表明)했지만 나가사키 봉행(奉行)은 막부(幕府)에 보고는 하되 당장(當場)은 이들을 마을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막부(幕府)의 명령(命令)을 받은 밀정(密偵)이 우(于)라카미(美)의 신도(信徒) 조직(組織)을 조사(調査)한 뒤에야 박해(迫害)가 시작(始作)되어 7월(月) 14일(日)(음 6월(月) 13일(日)) 심야(深夜) 비밀(祕密) 교회당(敎會堂)을 관리(管理)가 급습(急襲)한 것을 시작(始作)으로 다카기 등(等) 신도(信徒) 68명(名)이 일제히(一齊히) 체포(逮捕)되어 심(甚)한 고문(拷問)을 당(當)하는
제(第)4차(次) 우(于)라카미(美) 키리시탄(柴炭) 적발(摘發) 사건(事件)
이 벌어진다.
[13]
이러한 처사(處事)에 당연히(當然히) 서양(西洋) 공사(工事)들은 항의(抗議)했다.
도쿠가와 막부(幕府)
를 계승(繼承)한 메이지 정부(政府) 또한 키리시탄(柴炭) 박해(迫害)를 철폐(撤廢)하지 않아서, 1868년(年) 3월(月) 나가사키에 부임(赴任)한
사와 노부요시
(澤宣嘉)와
이노우에 가오루
는 우(于)라카미(美)의 신도(信徒)들을 불러내 배교(背敎)를 설득(說得)했지만 실패(失敗)했다. 처음에는 중심(中心) 인물(人物)들의 처형(處刑)까지 고려(考慮)했지만 외국(外國) 공사(工事)들이 강(剛)하게 항의(抗議)하여 쓰와노(津和野), 하기(萩), 후쿠야마(福山)로 유배(流配)보내는 것으로 감형(減刑)되었다. 그러나 유배지(流配地)에 도착(到着)한 그들은 노골적(露骨的)인 고문(拷問)만 받지 않았을 뿐 물과 음식(飮食)도 겨우 죽지 않을 정도(程度)로만 넣어주었고, 더운 지역(地域)에서는 굴비 엮듯 엮어 좁은 방(房) 안에 밀어넣고 추운 곳에서는 추위에 그대로 노출(露出)시키는 식(式)으로 가혹(苛酷)하게 대(對)했기 때문에 유배자(流配者) 3394명(名) 중(中) 무려(無慮) 662명(名)이 순교(殉敎)했다.
이 일로 당시(當時) 일본(日本)과 통상(通商) 중(中)이던 서구(西歐) 열강(列强)들이
[14]
'그리스도교 신자(信者) 탄압(彈壓)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不平等) 조약(條約) 개정(改正)도 없다.' 하며 메이지 신정부(新政府)를 압박(壓迫)했다. 이때 일본(日本)은
외교(外交)
채널을 통(通)해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박해(迫害)하지 않는다. 그자들은 그리스도교인(敎人)이라서 박해(迫害)받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종교(宗敎)를 버린다면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해 실질적(實質的)으로 키리시탄(柴炭) 박해(迫害)였음을 에둘러 시인(是認)했다.
메이지 정부(政府) 내
존황양(黃孃)이
파 인사(人士) 가운데는
종교(宗敎)의 자유(自由)
를 허용(許容)한다고
불평등(不平等) 조약(條約)
을 개정(改正)해주지 않을 거라며 반발(反撥)하는 사람도 있었고, 워낙 박해(迫害)해 온 세월(歲月)이 길고 집요(執拗)했다보니 민중(民衆)들 사이에서도
사교(社交)
(邪敎) 취급(取扱)을 받는 바람에 거부감(拒否感)이 적지 않았다. 한편(한便) 오랫동안 일본(日本) 민중(民衆)들 사이에 신앙(信仰)해오던 불교(佛敎)에 대(對)한 강제적(强制的)인 폐불훼석이나 국가신(國家神)토를 따르지 않는 각지(各地) 신사(神社)에 대(對)한 강제(强制) 통폐합(統廢合) 정책(政策)으로 인(因)한 불교계(佛敎界)나 기존(旣存) 신토계(系)의 반발(反撥)에 직면(直面)했던 메이지 정부(政府)가 마침 '
공공(公共)의 적(敵)
' 취급(取扱)을 받던 키리시탄(柴炭)에 대(對)한 적대적(敵對的)인 감정(感情)을 이용(利用)해서 그들의 반발(反撥)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는 시도(試圖)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西洋)
과 교류(交流)하기를 희망(希望)하던 메이지 정부(政府)에게 있어 종교(宗敎)의 자유(自由)를 허(許)하라는 서구(西歐) 열강(列强)의 압력(壓力)은 무시(無視)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신자(信者) 탄압(彈壓)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不平等) 조약(條約) 개정(改正) 안 해준다고 나오니…
[15]
결국(結局)
1873년(年)
2월(月) 24일(日)
키리시탄(柴炭)들이 풀려났고, 이후(以後)
사이고 다카모리
가 금교령(金敎令)을 폐지(廢止)하고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헌법(憲法)
이 '
종교(宗敎)의 자유(自由)
'를 명시(明示)하면서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은 대부분(大部分)은 통상적(通常的)인 형태(形態)의 가톨릭으로 원복(元服)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歲月)이 지난지라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의 전승(傳承)이 많이 변(變)해서 "조상(祖上)님의 종교(宗敎)는 그렇지 않다!"라며 자신(自身)이 믿는 종교(宗敎)의 원래(元來)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으로의 원복(元服)을 거부(拒否)하고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으로 남는다. 이런 자(者)들을 하나레키리시탄(리柴炭)(離れ切支丹, 떨어져 나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다만 하나레키리시탄(리柴炭)은 일본(日本) 내(內)에서도 거의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급(級)이다. 대다수(大多數)의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은 다시 원복(元服)했기 때문.
프랑스 성직자(聖職者)들은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에게 세례(洗禮)를 주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苦悶)에 빠졌다. 이들은 공동체(共同體)의 원로(元老)가 구전(口傳)으로 전수(傳受)받은 세례성사(洗禮聖事)의 라틴어(語) 경문(經文)을 낭송(朗誦)하며 세례(洗禮)를 베풀어 왔다. 가톨릭의 교리(敎理)에 따르면,
세례성사(洗禮聖事)
는 받는 이가 그리스도교의 교리(敎理)를 받아들일 의지(意志)가 있고 다른 이가 물을 이마에 부으며 "나는
성부(聖父)와 성자(聖者)와 성령(聖靈)
의 이름으로 이 사람에게 세례(洗禮)를 줍니다."라고 말하는 '형상(形象)'만(萬) 충족(充足)된다면
무조건(無條件)
유효(有效)한데, 정식(正式)
세례(洗禮)
를 줄 때 필요(必要)한
라틴어(語)
경문(經文)이 구전(口傳) 과정(過程)에서 변(變)해버렸으니 도대체(都大體) 어디까지를 천주교(天主敎) 기준(基準)으로 유효(有效)한 세례(洗禮)라고 인정(認定)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자체적(自體的)으로 받아은 세례(洗禮)가 교회법적(敎會法的)으로 유효(有效)하다면, 세례성사(洗禮聖事)는 평생(平生) 동안 단(單) 한 번(番)만 받아야 하기에 결코(決코) 다시 받아서는 안 된다. 기록(記錄)이 제대로 남지 않고 박해(迫害)도 심(甚)하던 곳에선 간혹(間或) 갓난아기가 세례(洗禮)를 2번(番) 받는 사고(事故)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유효(有效)한 세례(洗禮)는 평생(平生) 한 번(番)만 받는다는 원칙(原則)은 예나 지금(只今)이나 확고(確固)하다. 무턱대고 세례(洗禮)를 다시 하면
재세례파(再洗禮派)
를 긍정(肯定)하는 꼴이 될 수 있어 중요(重要)한 문제(問題)였는데, 프랑스 성직자(聖職者)들이 세례(洗禮) 기도문(祈禱文)을 확인(確認)하여 라틴어(語) 발음(發音)이 정말(正말) 심각(深刻)하게 변형(變形)된 몇몇 경우(境遇)를 제외(除外)하면, 가급적(可及的)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이 받은 세례(洗禮)를 인정(認定)하는 것으로 정리(整理)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