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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 - 나무위키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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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文化遺産)
1993년(年)

호류지 지역(地域)의 불교(佛敎) 기념물(記念物)
法隆寺地域の??建造物
1993년(年)

히메지 성(城)
?路城
1994년(年)

고대(古代) 교토의 역사(歷史) 기념물(記念物)
古都京都の文化財(京都市、宇治市、大津市)
1995년(年)

시라카와고(高) 고(高)카야마
역사(歷史) 마을
白川??五箇山の合掌造り集落
1996년(年)

이쓰쿠시마 신사(神社)
?島神社
1999년(年)

닛코의 신사(紳士)와 사찰(査察)
日光の社寺
2004년(年)

기이 산지(山地)의 영지(領地)와 참배(參拜)길
紀伊山地の?場と?詣道
2007년(年)

이와미 은광과 문화(文化) 경관(景觀)
石見銀山遺跡とその文化的景?
2015년(年)

일본(日本)의 메이지 산업혁명(産業革命) 유산(遺産)
: 철강(鐵鋼), 조선(造船) 및 탄광(炭鑛)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製鋼、造船、石炭産業
2016년(年)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建築) 작품(作品)
: 모더니즘 운동(運動)에 관(關)한 탁월(卓越)한 기여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
- 近代建築運動への?著な貢?
2017년(年)

신(神)이 사는 섬
무나카타 오키노시마와 관련(關聯) 유산군(遺産群)

「神宿る島」宗像?沖ノ島と?連遺産群
2018년(年)

나가사키 지역(地域)의
은둔(隱遁) 기독교(基督敎) 유산(遺産)

長崎と天草地方の?伏キリシタン?連遺産
2019년(年)

모즈·후(後)루이치 고분군(古墳群)
: 고대(古代) 일본(日本)의 무덤
百舌鳥?古市古墳群 - 古代日本の墳墓群
2021년(年)

홋카이도 · 북(北)도호쿠의 조몬 유적군(遺跡群)
北海道?北東北の?文遺跡群
자연유산(自然流産)
1993년(年)

야(野)쿠시마
屋久島
1993년(年)

시라카미(美) 산지(山地)
白神山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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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레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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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사와라 제도(制度)
小笠原諸島
2021년(年)

아마미 오시마, 도(度)쿠노시마,
오키나와섬 북부(北部)와 이리오모테
奄美大島、?之島、沖?島北部及び西表島
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
이름
한국어(韓國語)
나가사키 지역(地域)의 은둔(隱遁) 기독교(基督敎) 유적지(遺跡地)들
영어(英語)
Hidden Christian Sites in the Nagasaki Region
일본어(日本語)
長崎と天草地方の?伏キリシタン?連遺産
프랑스어(프랑스語)
Sites chretiens caches de la region de Nagasaki
국가(國家)·위치(位置)
등재유형(登載類型)
등재연도(登載鳶島)
등재기준(登載基準)
(iii) [1]
지정번호(指定番號)
?れキリシタン
1 . 개요(槪要) 2 . 발생(發生): 일본(日本) 기독교(基督敎) 박해(迫害) 3 . 발견(發見) 4 . 기존(旣存) 가톨릭과 다른 점(點) 5 . 세계유산(世界遺産) 6 . 창작물(創作物) 7 . 같이보기

1. 개요(槪要) [편집(編輯)]

' 숨은 크리스천 '이라는 뜻으로 일본(日本) 에도 시대(時代) 무렵, 극도(極度)의 종교(宗敎) 탄압(彈壓)에 가톨릭 신자(信者)들이 음지(陰地)로 숨어들어, 사제(司祭)가 한 명(名)도 없는 상태(狀態)에서 비밀리(祕密裏)에 종교생활(宗敎生活)을 지속(持續)한 것을 의미(意味)한다. 일본(日本) 기독교(基督敎) 탄압(彈壓)은 에도 막부(幕府) 가 무너지고, 신정부(新政府)가 들어선 1873년(年) ( 메이지 6년(年))에 가서야 사이고 다카모리 가 금교령(金敎令)을 폐지(廢止)하면서 풀렸다.

한국인(韓國人) 일본학자(日本學者)들은 잠복(潛伏) 키리시탄(柴炭) 이라고 번역(飜譯)하여 사용(使用)한다. 숨독(毒) 키리시탄(柴炭) 관련(關聯) 유적(遺跡)이 있는 나가사키 일대(一帶)에서도 잠복(潛伏) 키리시탄(柴炭)(?伏キリシタン) [2] 이라고 불렀다는데, 키리시탄(柴炭) 관련(關聯) 시설(施設)이 해당(該當)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에 등록(登錄)된 것을 계기(契機)로, 일본(日本)의 각종(各種) 미디어에서도 '잠복(潛伏) 키리시탄(柴炭)'이란 단어(單語)가 언론(言論)에 잠시(暫時) 자주 등장(登場)하기도 했다. 일본(日本) 에서는 1873년(年) 이전(以前)의 박해(迫害)를 받던, 역사(歷史) 속의 토착(土着) 가톨릭 신앙(信仰)은 한자(漢字) 를 써서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れキリシタン)으로 표기(表記)하며, 1873년(年) 이후(以後)에도 가톨릭 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전의 신비주의(神祕主義)를 유지(維持)하는 신앙(信仰)은 카타(打)카나 를 써서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カクレキリシタン)으로 다르게 표기(表記)한다. 물론(勿論) 발음(發音)은 같다.

한때 모든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의 자손(子孫))은 가톨릭 으로 복귀(復歸)했고, 가톨릭으로 복귀(復歸)하는 것을 거부(拒否)했던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은 1980년대(年代) 까지 존재(存在)하다가 신자(信者)가 모두 죽자 사라졌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91년(年) 인류학자(人類學者) 크리스탈 웰란이 나가사키현 고(高)토시 에 아직 존재(存在)함을 확인(確認)했다. 고(高)토시가 워낙 외진 섬이라 존재(存在)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 사람들 역시(亦是) 자신(自身)들의 존재(存在)를 숨긴 채 신앙(信仰)을 유지(維持)해온 만큼, 다른 오지(奧地)에서도 남아있을 가능성(可能性)이 없지는 않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에 복귀(復歸)할 뜻이 없고 자신(自身)들의 신앙(信仰)을 유지(維持)하려고 하나, 젊은층이 이탈(離脫)하면서 미래(未來)는 밝지 않다.
일본(日本) 에 처음 전파(傳播)된 기독교(基督敎) 종파(宗派)는 가톨릭 인데, 센고쿠 시대(時代) 무렵 일본(日本) 무역(貿易) 을 하던 스페인 ,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宣敎師) 들로부터 전래(傳來)되었다. 센고쿠 시대(時代) 다이묘 들은 서양(西洋) 세력(勢力)과의 무역(貿易) 으로 이득(利得)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傳來)를 허가(許可)하였고, 오토모 소린 이나 타(打)카야마 우(禹)콘 , 이치(理致)죠 카네사(社)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소 요시토시(視) , 구로다 조스이 등(等) 스스로 가톨릭 신자(信者)가 된 다이묘도(度) 있었다. 이 때 개종(改宗)한 사람들을 일본(日本)에선 '키리시탄(柴炭)', 개종(改宗)한 다이묘를 '키리시탄(柴炭) 다이묘'라 불렸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정권(政權)을 잡은 후(後), 히데요시는 각지(各地)의 다이묘 들이 서양(西洋) 무역(貿易) 으로 이득(利得)을 얻어 세력(勢力)을 키워 자신(自身)에게 대항(對抗)하게 될까 우려(憂慮)하여 [3] 그 첨병(尖兵)인 선교사(宣敎師)를 겨냥해 바테렌(선교사(宣敎師)) 추방령(追放令) [4] 을 내리고 1597년(年)에 나가사키에서 키리시탄(柴炭)을 집단(集團) 처형(處刑)했다. 그리고 일부(一部) 광신도(狂信徒) 들이 신토 불교(佛敎) 는 우상숭배(偶像崇拜)라는 이유(理由)로 신사(神社) 절(節) 을 습격(襲擊)해서 신체(身體)를 훼손(毁損)하고 불상(佛像) 을 파괴(破壞)하는 등(等) 사회문제(社會問題)를 일으키기도 했다. 도요토미 가문(家門)이 몰락(沒落)한 뒤 정권(政權)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막부(幕府) 도 사정(事情)은 다르지 않아서, 제(第)2대(代)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치세(治世)에 금교령(令)(禁敎令)을 내리고, 가톨릭 선교사(宣敎師)들을 추방(追放)하거나 처형(處刑)하는 조치(措置)를 취(取)했다. 이후(以後) 외국(外國)과 번(番) 이 독자적(獨自的)으로 무역(貿易)하는 것을 막고 쇄국정책(鎖國政策) 을 유지(維持)했다. 각(各) 번(番)들에서도 다이묘의 성향(性向)에 따라 박해(迫害)가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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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군(叛軍)의 근거지(根據地)였던 하라성(性)(原城)을 공격(攻擊)하는 막부군(幕夫君).

일본(日本) 에서 가톨릭 이 결정적(決定的)인 타격(打擊)을 받은 계기(契機)는 키리시탄들을 중심(中心)으로 막부(幕府)의 지배(支配)에 저항(抵抗)하여 대봉(代捧)기를 일으켰던 시마바라의 난 이다. 시마바라의 난(亂)을 겪은 뒤 에도 막부(幕府)는 '키리시탄(柴炭)은 정권(政權)을 엎으려는 반란분자(叛亂分子)'라고 생각했으므로 후미(後尾)에 같은 일을 벌여 키리시탄(柴炭)을 색출(索出)해서 죽이려 하는 등(等) 철저(徹底)한 박해(迫害)를 가(加)했다. 이러한 금교령(金敎令)은 에도 막부(幕府)의 통치기간(統治期間) 내내 유지(維持)되었다.

이렇게 박해(迫害)를 받았음에도 불구(不拘)하고 일부(一部) 키리시탄(柴炭)들은 신앙(信仰)을 버리지 않았지만, 키리시탄임이 공공연(公公然)하게 알려지면 생명(生命)이 위험(危險)했기 때문에 지하(地下)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장장(長長) 250년(年) 동안 숨어서 신앙(信仰) 생활(生活)을 했다.

이렇게 본인(本人)들은 숨는다고 숨었지만, 실은 에도 막부(幕府) 역시(亦是)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의 존재(存在)를 다 파악(把握)하고 있었다(…). 법(法)대로 하자면 다 처형(處刑)해야 하지만, 일본(日本)의 천주교도(天主敎徒)들은 정부(政府)에 무력(武力) 저항(抵抗) 을 한 역사(歷史)가 있으므로 한두 명(名)이 아니라 수천(數千) 명(名) 단위(單位) 단체(團體)가 발각(發覺)되어 처형(處刑)하면 제(第)2의 시마바라의 난(亂)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는 염려(念慮) 때문에 가톨릭 신자(信者)가 아니라 그냥 사상범(思想犯) [5] 이라는 빠져나갈 수 있는 이름으로 부르며 눈감아줬다. [6] 1800년대(年代) 초반(初盤)이 되면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이 다시 발각(發覺)되는데, 키리시탄(柴炭)이 아닌 다른 이상(異常)한 종교(宗敎)로 간주(看做)하여 묵인(默認)하거나 배교(背敎)만 시키고 풀어줬다. 시마바라의 난(亂)이 이미 터졌었던 아마쿠사(社) 에서 2백(百) 년(年) 만에 1805년(年)에 또 대량(大量)으로 신자(信者)가 발각(發覺)되었는데 [7] 막부(幕府)에서는 이들에게 강제(强制)로 후미(後尾)에 및 배교(背敎) 서약서(誓約書)를 쓰게 하고 사건(事件)을 덮어버렸다. 사실(事實) 이 키리시탄(柴炭)들이 발각(發覺)된 이유(理由)는 육식(肉食) 금지령(禁止令)을 어기고 소고기 를 먹었다가 들킨 것 때문이다.

하이쿠 시인(詩人)인 고바야시 잇사(社)의 하이쿠 가운데 君が代や茂りの下の耶蘇?(천황(天皇) 치세여(治世餘), 우거진 수풀 아래 기독교(基督敎) 불상(佛像))이라는 시(詩)가 전(傳)하는데, 잇사가 규슈 를 여행(旅行)하던 중(中)에 가톨릭 성상(聖像) 을 보고 읊었다고 한다.

3. 발견(發見)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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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年) 개항(開港) 조약(條約) 이후(以後) 외국인(外國人)에 한(限)해 신앙(信仰) 활동(活動)이 허가(許可)되었고, 나가사키 에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天主堂) [8] 의 베르나르타(打)데 프티장(腸)(Bernard-Thadee Petitjean.1829~1884) 주임신부(主任神父)는 일부러 성가(聖歌) 를 부르며 다니는 등(等) 선교(宣敎) 를 시도(試圖)했으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反應)이 없었다. 그러나 성당(聖堂)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성모상(聖母像)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모여 살던 마을에 "프랑스 절(節)에 성모(聖母) 마리아 님이 계시다" 는 소문(所聞)이 퍼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 사이에는 당시(當時)로부터 250여(餘) 년(年) 전(前) 순교(殉敎) 한 바스챤 [9] 이 예언(豫言)한 "7대(臺)가 지나면 흑선(黑線)을 타고 파파( 교황(敎皇) )가 보낸 콘페소르(고해신부)가 온다. 매주(每週)라도 콘삐산( 고해성사(告解聖事) )을 할 수 있다.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키리시탄(柴炭)의 노래를 부르며 걸을 수 있는 시대(時代)가 온다. 길에서 젠쵸(외교(外交)인)를 만나면 그가 길을 양보(讓步)한다."라는 전승(傳承)이 있었다. 이에 예언(豫言)이 실현(實現)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1865년(年) 4월(月) 12일(日)( 元治 2년(年) 음 3월(月) 17일(日)) 금요일(金曜日) , 산파(産婆) 이사벨라 유리(有利)(당시(當時)의 가족(家族)과 동네(洞네) 사람 13~15명(名)(모두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이(李) 구경을 핑계 삼아 오더니, 기도(祈禱)하고 있던 프티 장(張) 신부(神父)에게 "성모(聖母)님을 공경(恭敬)하십니까?", "결혼(結婚)은 하셨습니까?", " 전례력(典禮曆) 을 지키십니까?" [10] 를 질문(質問)하였다. 이에 프티장(腸) 신부(神父)는 "성모(聖母)님을 공경(恭敬)하고, 사제(司祭)는 결혼(結婚)하지 않으며, 전례력(典禮曆)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답(答)하였다. [11] 키리시탄(柴炭)들은 그제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神父)님과 같습니다."라고 속삭인 후(後) "サンタマリアの御像はどこ? (성모(聖母) 마리아님의 성상(聖上)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이에 프티장(腸) 신부(新婦)가 안내(案內)해 주자, 그냥 구경 온 척하던 마을 사람 전원(全員)이 갑자기 몰려들어 기도(祈禱)를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온 이들이 가톨릭 사제(司祭)라고 확신(確信)하여 감추어 온 신앙(信仰)을 드러낸 것이다.
오우라 천주당의 '신자의 재발...
오우라 천주당(天主堂)에 새겨진 '신자(信者) 발견(發見)'을 그린 조각

1865년(年) 4월(月) 12일(日)의 이 사건(事件)은 교회사(敎會史)에서도 유례(類例)를 찾기 힘든 [12] 일로, '신자(信者) 발견(發見)'이라고 부른다. 프티장(腸) 신부(神父)는 이를 당시(當時) 요코하마 교구장(敎區長) 주교(主敎) 에게 보고(報告)하였다. 일본(日本) 외부(外部)에서는 이런 신자(信者)가 있다는 것을 전혀(全혀) 몰랐기에, 이들을 발견(發見)한 서양(西洋) 신부(新婦)들은 이를 기적(奇跡) 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2년(年) 뒤인 1867년(年)( 慶應 3년(年))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의 집단(集團) 거주지(居住地)인 우(于)라카미(美)(浦上) 지역(地域)의 신도(信徒)들이 불교식(佛敎式) 장례(葬禮)를 거부(拒否)함으로써 그 존재(存在)가 막부(幕府)에게 드러났다.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 대표(代表)로 봉행소(奉行所)에 불려간 다카기 센에몬(高木仙右衛門) 등(等)은 분명(分明)하게 신앙(信仰)을 표명(表明)했지만 나가사키 봉행(奉行)은 막부(幕府)에 보고는 하되 당장(當場)은 이들을 마을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막부(幕府)의 명령(命令)을 받은 밀정(密偵)이 우(于)라카미(美)의 신도(信徒) 조직(組織)을 조사(調査)한 뒤에야 박해(迫害)가 시작(始作)되어 7월(月) 14일(日)(음 6월(月) 13일(日)) 심야(深夜) 비밀(祕密) 교회당(敎會堂)을 관리(管理)가 급습(急襲)한 것을 시작(始作)으로 다카기 등(等) 신도(信徒) 68명(名)이 일제히(一齊히) 체포(逮捕)되어 심(甚)한 고문(拷問)을 당(當)하는 제(第)4차(次) 우(于)라카미(美) 키리시탄(柴炭) 적발(摘發) 사건(事件) 이 벌어진다. [13] 이러한 처사(處事)에 당연히(當然히) 서양(西洋) 공사(工事)들은 항의(抗議)했다.

도쿠가와 막부(幕府) 를 계승(繼承)한 메이지 정부(政府) 또한 키리시탄(柴炭) 박해(迫害)를 철폐(撤廢)하지 않아서, 1868년(年) 3월(月) 나가사키에 부임(赴任)한 사와 노부요시 (澤宣嘉)와 이노우에 가오루 는 우(于)라카미(美)의 신도(信徒)들을 불러내 배교(背敎)를 설득(說得)했지만 실패(失敗)했다. 처음에는 중심(中心) 인물(人物)들의 처형(處刑)까지 고려(考慮)했지만 외국(外國) 공사(工事)들이 강(剛)하게 항의(抗議)하여 쓰와노(津和野), 하기(萩), 후쿠야마(福山)로 유배(流配)보내는 것으로 감형(減刑)되었다. 그러나 유배지(流配地)에 도착(到着)한 그들은 노골적(露骨的)인 고문(拷問)만 받지 않았을 뿐 물과 음식(飮食)도 겨우 죽지 않을 정도(程度)로만 넣어주었고, 더운 지역(地域)에서는 굴비 엮듯 엮어 좁은 방(房) 안에 밀어넣고 추운 곳에서는 추위에 그대로 노출(露出)시키는 식(式)으로 가혹(苛酷)하게 대(對)했기 때문에 유배자(流配者) 3394명(名) 중(中) 무려(無慮) 662명(名)이 순교(殉敎)했다.

이 일로 당시(當時) 일본(日本)과 통상(通商) 중(中)이던 서구(西歐) 열강(列强)들이 [14] '그리스도교 신자(信者) 탄압(彈壓)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不平等) 조약(條約) 개정(改正)도 없다.' 하며 메이지 신정부(新政府)를 압박(壓迫)했다. 이때 일본(日本)은 외교(外交) 채널을 통(通)해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박해(迫害)하지 않는다. 그자들은 그리스도교인(敎人)이라서 박해(迫害)받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종교(宗敎)를 버린다면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해 실질적(實質的)으로 키리시탄(柴炭) 박해(迫害)였음을 에둘러 시인(是認)했다.

메이지 정부(政府) 내 존황양(黃孃)이 파 인사(人士) 가운데는 종교(宗敎)의 자유(自由) 를 허용(許容)한다고 불평등(不平等) 조약(條約) 을 개정(改正)해주지 않을 거라며 반발(反撥)하는 사람도 있었고, 워낙 박해(迫害)해 온 세월(歲月)이 길고 집요(執拗)했다보니 민중(民衆)들 사이에서도 사교(社交) (邪敎) 취급(取扱)을 받는 바람에 거부감(拒否感)이 적지 않았다. 한편(한便) 오랫동안 일본(日本) 민중(民衆)들 사이에 신앙(信仰)해오던 불교(佛敎)에 대(對)한 강제적(强制的)인 폐불훼석이나 국가신(國家神)토를 따르지 않는 각지(各地) 신사(神社)에 대(對)한 강제(强制) 통폐합(統廢合) 정책(政策)으로 인(因)한 불교계(佛敎界)나 기존(旣存) 신토계(系)의 반발(反撥)에 직면(直面)했던 메이지 정부(政府)가 마침 ' 공공(公共)의 적(敵) ' 취급(取扱)을 받던 키리시탄(柴炭)에 대(對)한 적대적(敵對的)인 감정(感情)을 이용(利用)해서 그들의 반발(反撥)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는 시도(試圖)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西洋) 과 교류(交流)하기를 희망(希望)하던 메이지 정부(政府)에게 있어 종교(宗敎)의 자유(自由)를 허(許)하라는 서구(西歐) 열강(列强)의 압력(壓力)은 무시(無視)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신자(信者) 탄압(彈壓)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不平等) 조약(條約) 개정(改正) 안 해준다고 나오니… [15] 결국(結局) 1873년(年) 2월(月) 24일(日) 키리시탄(柴炭)들이 풀려났고, 이후(以後) 사이고 다카모리 가 금교령(金敎令)을 폐지(廢止)하고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헌법(憲法) 이 ' 종교(宗敎)의 자유(自由) '를 명시(明示)하면서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은 대부분(大部分)은 통상적(通常的)인 형태(形態)의 가톨릭으로 원복(元服)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歲月)이 지난지라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의 전승(傳承)이 많이 변(變)해서 "조상(祖上)님의 종교(宗敎)는 그렇지 않다!"라며 자신(自身)이 믿는 종교(宗敎)의 원래(元來)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으로의 원복(元服)을 거부(拒否)하고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으로 남는다. 이런 자(者)들을 하나레키리시탄(리柴炭)(離れ切支丹, 떨어져 나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다만 하나레키리시탄(리柴炭)은 일본(日本) 내(內)에서도 거의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급(級)이다. 대다수(大多數)의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은 다시 원복(元服)했기 때문.

프랑스 성직자(聖職者)들은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에게 세례(洗禮)를 주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苦悶)에 빠졌다. 이들은 공동체(共同體)의 원로(元老)가 구전(口傳)으로 전수(傳受)받은 세례성사(洗禮聖事)의 라틴어(語) 경문(經文)을 낭송(朗誦)하며 세례(洗禮)를 베풀어 왔다. 가톨릭의 교리(敎理)에 따르면, 세례성사(洗禮聖事) 는 받는 이가 그리스도교의 교리(敎理)를 받아들일 의지(意志)가 있고 다른 이가 물을 이마에 부으며 "나는 성부(聖父)와 성자(聖者)와 성령(聖靈) 의 이름으로 이 사람에게 세례(洗禮)를 줍니다."라고 말하는 '형상(形象)'만(萬) 충족(充足)된다면 무조건(無條件) 유효(有效)한데, 정식(正式) 세례(洗禮) 를 줄 때 필요(必要)한 라틴어(語) 경문(經文)이 구전(口傳) 과정(過程)에서 변(變)해버렸으니 도대체(都大體) 어디까지를 천주교(天主敎) 기준(基準)으로 유효(有效)한 세례(洗禮)라고 인정(認定)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자체적(自體的)으로 받아은 세례(洗禮)가 교회법적(敎會法的)으로 유효(有效)하다면, 세례성사(洗禮聖事)는 평생(平生) 동안 단(單) 한 번(番)만 받아야 하기에 결코(決코) 다시 받아서는 안 된다. 기록(記錄)이 제대로 남지 않고 박해(迫害)도 심(甚)하던 곳에선 간혹(間或) 갓난아기가 세례(洗禮)를 2번(番) 받는 사고(事故)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유효(有效)한 세례(洗禮)는 평생(平生) 한 번(番)만 받는다는 원칙(原則)은 예나 지금(只今)이나 확고(確固)하다. 무턱대고 세례(洗禮)를 다시 하면 재세례파(再洗禮派) 를 긍정(肯定)하는 꼴이 될 수 있어 중요(重要)한 문제(問題)였는데, 프랑스 성직자(聖職者)들이 세례(洗禮) 기도문(祈禱文)을 확인(確認)하여 라틴어(語) 발음(發音)이 정말(正말) 심각(深刻)하게 변형(變形)된 몇몇 경우(境遇)를 제외(除外)하면, 가급적(可及的)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이 받은 세례(洗禮)를 인정(認定)하는 것으로 정리(整理)되었다.

4. 기존(旣存) 가톨릭과 다른 점(點) [편집(編輯)]

이를 문화(文化) 연구(硏究)의 관점(觀點)에서 보자면 상당히(相當히) 흥미(興味)롭다. '원형(原形) 문화(文化)'와 '오랜 세월(歲月) 동안 구전(口傳)만으로 이어지면서 뒤바뀐 변형(變形) 문화(文化)'를 눈앞에서 확실(確實)하게 비교(比較) 대조(對照)해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례(事例)로서, 원형(原形) 문화(文化)와 변형(變形) 문화(文化)가 모두 확고(確固)하게 존재(存在)한다. 가톨릭 은 단일성(單一性)을 유지(維持)한 채로 현재(現在)까지 굳건하게 살아 있으며, 원조(援助) 가톨릭의 입장(立場)에선 카쿠레키리시탄(柴炭)이 변형(變形)된 집단(集團)이지만 원조(援助)와 연락(連絡)이 끊긴 채로 이어진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특히(特히) 하나레키리시탄(리柴炭))의 입장(立場)에선 원조(元祖) 가톨릭과 다른 점(點)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막부(幕府)의 박해(迫害) 때문에 외국인(外國人) 성직자(聖職者) 들은 순교(殉敎)하거나 배교(背敎) [16] 하며 전멸(全滅) 해 버렸고, 외국(外國) 선교사(宣敎師)에게 교육(敎育)받아 일본인(日本人) 성직자(聖職者)들이 탄생(誕生)하기도 했지만 일본(日本) 기독교(基督敎)는 아직 스스로 성직자(聖職者) 를 양성(養成)해낼 정도(程度)로 성숙(成熟)한 단계(段階)는 아니었고 이들 역시(亦是) 박해(迫害) 때 마찬가지 과정(過程)을 거쳐 싹 몰살당하고 말았다. 시마바라의 난(亂)의 지도자(指導者)인 아마쿠사(社) 시(詩)로 도키사(社)다 도 ( 세례(洗禮) 를 받기는 했지만) 평신도(平信徒)였다. 게다가 포르투갈 과의 무역(貿易)이 완전히(完全히) 단절(斷絶)되고, 개신교(改新敎) 국가(國家)인 네덜란드 와는 선교불허(宣敎不許)를 조건(條件)으로 제한(制限)된 무역(貿易) 만(灣)을 유지(維持)했기 때문에,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은 자신(自身)들을 지도(指導)해줄 성직자(聖職者)를 모셔오기는커녕 가톨릭의 본산(本山)인 교황청(敎皇廳) 과도(過度) 일절(一切) 연락(連絡)을 할 수 없었다. 일본인(日本人) 사제(私製) 수도자(修道者) 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전술(前述)했듯 사제(司祭)와 수도자(修道者)를 직접(直接) 양성(養成)하는 데는 무리(無理)가 있었다.(스스로 양성(養成)해냈더라도, 어차피(於此彼) 교황청(敎皇廳)과 연락(連絡)이 닿지 않으면 그들이 정식(正式) 사제(司祭)였다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다행히(多幸히) 초기(初期) 일본(日本) 가톨릭의 지도자(指導者)들은 박해(迫害) 때문에 완전히(完全히) 성직자(聖職者)가 사라지고 평신도(平信徒)들만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狀況)에 대비(對備)하여 몇 가지 교육자료(敎育資料)를 남기고 신자(信者)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자료(敎育資料)들은 향후(向後) 카쿠레키리시탄(柴炭)이 250년간(年間) 버티는 마지막 신앙적(信仰的) 보루(堡壘)가 되었다.

결국(結局) 숨어서 살아남은 신자(信者)들은 전례(前例) 를 집전(執典)하고 교리(敎理)를 가르치고 이끌어줄 성직자(聖職者)가 없는 상태(狀態)에서 [17] [18] 자기(自己)들끼리 기억(記憶)하는 몇 안 되는 구전(口傳) 전승만으로 종교(宗敎) 를 유지(維持)해야 했다. 사소(些少)한 성물도(聖物度) 기리시탄(柴炭)이라는 증거(證據)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경(聖經) 내용(內容)도 온전히(穩全히) 유지(維持)하지 못했다. 그들 자신(自身)은 크리스천으로 남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구전(口傳)만으로는 한계(限界)가 있었고, 250년(年)이 지나는 동안 신자(信者)들의 신심(信心)과는 별개(別個)로 외형상(外形上)으로는 상당히(相當히) 다른 독특(獨特)한 종교(宗敎)가 되어버렸다.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의 성가(聖歌).

큰 특징(特徵)으로는 쵸우가타(禹哥打)(翁方)라는 원로격(元老格) 우두머리의 아래로 비밀(祕密) 조직(組織)을 유지(維持)하며 주문(注文) 등(等)을 전파(傳播)하는 밀교(密敎) 적(的)인 특성(特性)을 지녔으며, 탄압(彈壓)을 피(避)하기 위해 각종(各種) 상징물(象徵物)에 몰래 종교적(宗敎的)인 뜻을 담았다. 특히(特히) 불교(佛敎) 로 많이 위장(僞裝)하였으며, 불상(佛像) 불경(佛經) 으로 위장(僞裝)하여 기독교적(基督敎的)인 문구(文句)를 집어넣거나 마경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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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의 마리아 관음상(觀音像)들.

예(例)를 들면 이런 것들인데 위의 것들은 모두 성모(聖母) 마리아 상(上) 이다. 맨 앞의 불상(佛像) 을 자세(仔細)히 보면 가슴에 십자가(十字架) 무늬가 있는데 이런 성상(聖上)은 성모상(聖母像)을 불상(佛像)으로 위장(僞裝)했다고 하여 마리아 관음(觀音)(マリア?音, 마리아 칸논)이라고 한다. 심지어(甚至於) '삼존불(三尊佛)' 형식(形式) 성상(星霜)이 발견(發見)된 적도 있다. 당시(當時) 일본(日本)에서 원래(元來) 모양(模樣)대로 성모상(聖母像)을 모셨다가는 "나는 키리시탄이오." 하고 자백(自白)하는 짓이라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있는 것들은 일본(日本) 26위(位) 성인(成人) 기념관(記念館)에는 있는 마리아 관음(觀音)인데, 본디 불교(佛敎) 에는 송자관음(字觀音)(送子觀音)이라 해서 아이를 안은 관음상(觀音像)이 있기에 자기(自己)네 신앙(信仰)을 숨기기에 더욱 안성맞춤(安城맞춤)이었다.

사실(事實) 이것은 가톨릭 의 시각(視角)으로 보아도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모상(聖母像)이 현지화(現地化) 되는 것은 전(全) 세계(世界)에서 동일(同一)하게 나타나는 양상(樣相)이다. 2014년(年) 프란치스코 교황(敎皇) 방한(訪韓) 당시(當時) 광화문(光化門) 에 설치(設置)된 제대(除隊) 옆에도 한복(韓服) 을 입은 성모상(聖母像)이 모셔졌다.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이 탄생(誕生)하기 거의 천(千) 년(年) 전(前)에 아시아에 와서 기독교(基督敎)를 전래(傳來)한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基督敎))에서는 '마리아 관음상(觀音像)'뿐만 아니라 '마리아 관음도'나 '예수 미륵도' 등(等) 불화(不和)를 기반(基盤)으로 한 ' 성화(聖火) '를 제작(製作)하기도 했다.

이들이 외우던 기도문(祈禱文)을 오라쇼( 라틴어(語) : oratio)라고 하는데, 당시(當時)까지 전래(傳來)되었던 라틴어(語) 기도문(祈禱文)을 음차(音借)하여 염불(念佛)처럼 음률(音律)을 붙인 형태(形態)를 띠고 있다. 당연히(當然히) 뜻은 제대로 모르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외웠는데, 예(例)를 들어 성찬례(聖餐禮) (미사)를 의미(意味)하는 'Eucharistia(에우(右)카리스티아)'는 구전(口傳)되면서 '요우카시치'로 바뀌고, 다시 '요우가노시치'가 되었다가 '요우가시치(僚友可視値)야'로 바뀌더니 한자(漢字) 훈차(訓借) 표기(表記)로 八日の七夜 [19] 가 되어 본래(本來)의 의미(意味)를 짐작(斟酌)할 수 없게 되었다. 오라쇼는 지방(地方)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현재(現在)는 일본(日本)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로 지정(指定)되었다.

성호경(聖號經) 을 예(例)로 들면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Amen.
인(人) 노미네 빠뜨리스, 엣 필리이, 엣 스삐리뚜스 상띠(上띠), 아멘 .
성부(聖父) 성자(聖者) 성령(聖靈) 의 이름으로, 아멘 .
いん なうみね ぱあちりす ゑつ ひいりい ゑつ すぴりつす さんち あめん
인(人) 노-미네 파-치리스 엣 히-리(里)- 엣 스피리츠스 산치 아멘. [20]
으로 외우는 식(式)이다. [21]

이들이 가톨릭으로 복귀(復歸)한 직후(直後)인 1873년(年)의 교리지도(敎理指導)서 '세례성사(洗禮聖事)'에서는 성호경(聖號經)을 다음과 같이 표기(表記)했다.
いん のみね ぱちりす えつ ひりい えつ すぴりとす さんち あめん
인(人) 노미네 파치(破치)리스 엣 히리(리)- 엣 스피리토스 산치 아멘.
일본어(日本語) 음가(音價) 표기(表記)의 한계(限界)를 제외(除外)하면 다시 라틴어(語)에 가까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라틴어(語) 로망스어(語) 변(變)해가는 모습 과도(過度) 유사(類似)하다는 점(點)이 흥미롭다.

성경(聖經)의 내용(內容)은 두루뭉술하게 옛날 이야기처럼 구전(口傳)되었다. 전승(傳承)도 달라졌는데, 선악(善惡)의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서양(西洋) 의 세계관(世界觀)과 달리 융합(融合)과 용서(容恕)를 중심(中心)으로 하는 동아시아(東아시아) 적 세계관(世界觀)에 영향(影響)을 받아 아담 하와 가 낙원(樂園)에서 내쫓긴 사건(事件)이 사라졌고, 이에 따라 가톨릭 의 중심(中心) 교리(敎理)인 원죄(原罪) 가 사라져버렸다. 하느님 에게 용서(容恕)를 받은 것으로 되었다고 변개(變改)되었다.( 참조(參照) ) 또한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은 자신(自身)들의 신앙대상(信仰對象)을 데우스 사마(님)라고 불렀다. 다만 기독교(基督敎)라고 해서 꼭 원죄(原罪) 가 중심(中心) 교리(敎理)인 것은 아니며, 실제(實際) 정교회권(正敎會卷) 기독교(基督敎) 중(中)에는 원죄(原罪)라는 용어(用語)를 사용(使用)하지 않는 경우(境遇)도 있으므로 원죄(原罪) 교리(敎理)가 없다는 것 자체(自體)가 아주 특이(特異)한 일은 아니다.

소(小)토메, 고토 등(等) 나가사키계(界) 키리시탄(柴炭)의 전승(戰勝) 서적(書籍) 인(人) 천지시지사(千指示知事)(天地始之事) [22] 에는 기본적(基本的)인 성서(聖書)의 내용(內容)도 있지만, 아담의 자녀(子女)인 치코로우(ちころう)와 탄호우(彈豪雨)(たんほう)는 남매(男妹)인데 결혼(結婚)하여 자녀(子女)를 보았다 고 하는 등(等) [23] , 일본(日本) 전통(傳統)의 이자(利子)나기 , 이자(利子)나미 설화(說話)가 혼합(混合)된 모습도 보인다.

카쿠레키리시탄(柴炭)이 문화적(文化的) 가치(價値)가 있는 이유(理由)가 여기에 있다. 가장 보수적(保守的)이며 굳건해보이는 문화(文化)인 종교(宗敎) 문화(文化)조차도 철저(徹底)한 탄압(彈壓) 아래에서는 원형(原形)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程度)로 뒤틀리기 마련이고 탄압(彈壓) 하(下)의 일본(日本) 가톨릭 역시(亦是) 원형(原形)에서 상당히(相當히) 벗어나 변형(變形)됐지만,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신앙심(信仰心)을 유지(維持)하려는 [24] 인간(人間) 의지(意志)의 경탄스러움을 확인(確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外國)에서 전수(傳授)된 문화(文化)가 원류(源流)와 접촉(接觸)이 끊긴 후(後) 어떻게 토착화(土着化)되는지 확인(確認)할 수 있는 좋은 사료(飼料)이기도 하다.

5. 세계유산(世界遺産) [편집(編輯)]

2018년(年), 마을 10곳, 성(性) 터 1곳, 성당(聖堂) 1곳까지 총(總) 12곳의 유적(遺跡)이 나가사키 지역(地域)의 은둔(隱遁) 기독교(基督敎) 유적지(遺跡地)들 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 에 지정(指定)되었다. 나가사키시(詩) 중심(中心)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天主堂)을 제외(除外)하면 대부분(大部分) 낙도(落島)나 산(山) 속 등(等) 오지(奧地)에 위치(位置)해있다.
      • 오우라 천주당(天主堂)(大浦天主堂)
      • 소(小)토메(外海)의 시츠(出津) 취락(聚落) : 시츠 교회(敎會)
      • 소(小)토메(外海)의 오노(大野) 취락(聚落) : 오노 교회(敎會)
      • 하라성(性) 터(原城跡)
      • 쿠로시마(?島) 취락(聚落) : 쿠로시마 천주당(天主堂)
      • 히라도시마(平?島)의 성지(城址)와 취락(聚落) : 야스만(萬)다케(安?岳), 가스가(春日) 취락(聚落)
      • 히라도시마(平?島)의 성지(城址)와 취락(聚落) : 나카에노시마(中江ノ島)
      • 히사카지마(久賀島)의 취락(聚落) : 옛 고린(?五輪) 교회(敎會)
      • 나루시마(奈留島)의 에가미(江上) 취락(聚落) : 에가미 천주당(天主堂)
      • 노자(老子)키지마(野崎島)의 취락(聚落) 터 : 옛 노(老)쿠비(?野首) 교회(敎會)
      • 카시라가시마(頭ヶ島)의 취락(聚落) : 카시라가시마 천주당(天主堂)

6. 창작물(創作物) [편집(編輯)]

음지(陰地)에 숨어 신앙(信仰)을 수백년(數百年) 간(間) 유지(維持)했다는 것 에 감명(感銘)받은 사람이 많은지 일본산(日本産) 창작물(創作物)에서는 많이 언급(言及)되고 소재(素材)로 쓰이기도 한다. 애초(애初)에 이런 설정(設定)은 창작물(創作物)에서도 써먹기 좋다. 하지만 일본인(日本人)들은 전반적(全般的)으로 기독교(基督敎)에 대(對)한 이해도(理解度)가 낮고 [25] ,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 자체(自體)가 은폐(隱蔽)된 밀교(密敎) 라서 세세(細細)한 부분(部分)을 파악(把握)하기 어려운 탓인지 디테일하게 묘사(描寫)되는 경우(境遇)는 생각보다 드물다.
  • 엔도 슈사쿠 의 소설(小說) 침묵(沈默) 도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과 이 과정(過程)에서 막부(幕府)에 의(依)해 배교(背敎)하거나, 순교(殉敎)한 자(者)들의 이야기를 주제(主題)로 하고 있으며, 영화(映畫)로도 만들어졌다. 영화(映畫)는 항목(項目) 참조(參照) . 아마도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을 다룬 모든 창작물(創作物) 중(中)에 가장 유명(有名)한 작품(作品)일 것이다. 또한 가톨릭문학(文學)으로서도 걸작(傑作)으로 평가(評價)받는다.
  • SF 단편(短篇) 만화(漫畫) 모음집인 멸망(滅亡)한 짐승들의 바다 에 기재(記載)된 단편(短篇)들 중(中) 2번째(番째) 편(便)인 <경귀전(展)(鯨鬼傳)>이 있다.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이 아직도 신앙(信仰)을 숨기고 살던 에도 시대(時代) 말기(末期), 그야말로 박해(迫害)의 마지막을 달릴 시기(時期) 신자(信者)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作品)이며, 또한 모비 딕(소설(小說)) 을 오마쥬한듯한 스토리가 특징(特徵).
  • 야마다 후타(後打)로 의 소설(小說) 마계전생(馬契前生) 의 배경(背景)이 시마바라의 난(亂)과 연관(聯關)되어 있다. 작중(作中) 메인 악역(惡役)이 시마바라의 난(亂)에 가담(加擔)했던 모리 소이(所以)켄 으로, 소이켄은 마계전생(馬契前生) 술법(術法)으로 과거(過去) 이름을 날린 검호(劍豪)들을 마계중(馬契中)이란 초인(超人)으로 부활시켜 막부(幕府)를 빼앗으려 한다. 마계중(馬契中) 중(中)에는 시마바라의 난(亂)을 지휘(指揮)한 아마쿠사(社) 시(詩)로 도키사(社)다 도 포함(包含)되어 있는데, 영화판(映畫판)에서는 아마쿠사가 생전(生前)에 남긴 유언(遺言)을 반영(反映)해 소이(所以)켄이 삭제(削除)되고, 부활(復活)한 아마쿠사가 마계전생(馬契前生)으로 마계(馬契)중을 거느린다고 각색(脚色)되었으며, 이시카와 켄 이 그린 만화(漫畫)판에서는 아마쿠사(社)는 사실(事實) 사탄 의 화신(化身)으로서(?) 마계(馬契)와 현계(現計)를 잇기 위해 시마바라의 난(亂)을 일으켰다가 실패(失敗)하자, 마계전생(馬契前生)으로 다시 한번(番) 재기(再起)를 노린다는 등(等), 미디어믹스가 나올수록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의 신앙(信仰)과는 억만광년(億萬光年) 떨어지다 못해 고인(故人)드립 에 가까운(…) 전개(展開)가 나온다.
  • 어떤 마술(魔術)의 금서목록(禁書目錄) 에서는 아마쿠사식(私食) 십자처교(十字處絞)라는 이름으로 변형(變形)되어 등장(登場). 칸자키 카오리 는 원래(元來) 여기의 프리스티스였다. 특징(特徵)으로, 본디 박해(迫害)를 받아 숨어들어 밀교(密敎)가 되였던 것에서 기인(起因)한 일상생활(日常生活)의 행동(行動)이나 소품(小品) 등(等)에 숨겨진 형태(形態)를 띠는 종교(宗敎), 마법적(魔法的) 기술(技術)과 도구(道具)들을 쓰며, 변형(變形)되어 불완전(不完全)해진 교리적(敎理的) 부분(部分)을 채우기 위해 여러 종교(宗敎)들의 기술(技術)들을 가져다가 꼬리를 물듯이 보완(補完)해서 본래(本來)의 십자교(十字校)에는 없는 신(神)을 죽이는 술법(術法)이나 다른 종교(宗敎)의 교리(敎理)의 허(虛)를 찌르는 기술(技術) 등(等) 독특(獨特)한 기술(技術)들을 보유(保有)하는 점(點) 등(等)이 있다.
  • 바람의 검심(劍鐔) -메이지 검객(劍客) 낭만기(浪漫機)- TVA 오리지널 에피소드인 『사마(私馬)바라 편(便)』의 메인소재(素材)로 쓰였다.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 신자(信者)들을 이끌고 있는 비천어검류(卑賤語檢流) 검객(劍客) 아마쿠사(社) 쇼고 가 메이지 정부(政府)를 뒤엎어 종교(宗敎)의 자유(自由)가 허락(許諾)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 반란(叛亂)을 계획중(計劃中)인 가운데, 이를 주인공(主人公) 히무라 켄신(新) 일행(一行)이 막는다는 내용(內容).
  • 소니의 호러 게임 사이렌 시리즈 역시(亦是) 밀교(密敎)와 신적(神的) 존재(存在)라는 점(點)에서 이들의 존재(存在)에 영감(靈感)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사무라이 참프루 에피소드 19화(禍)에서 에도시대(時代) 나가사키를 배경(背景)으로 한 키리시탄(柴炭)들이 등장(登場)한다. 천주교(天主敎)에 대(對)한 막부(幕府)의 종교탄압(宗敎彈壓), 신앙심(信仰心)을 이용(利用)해 신자(信者)들을 모아서 불법(不法) 화약무기(火藥武器)를 만들며 사기(詐欺)를 치는 사이비(似而非) 키리시탄(柴炭) 교주(敎主) 등(等)의 내용(內容)이 개그스럽게 묘사(描寫)된다.
  • 요시무라 카나의 만화(漫畫) 무르시엘라고 에도 작중(作中) 에피소드의 주요(主要) 꼭지로 등장(登場)한다.
  • 공허(空虛)의 소녀(少女) 에 등장(登場)하는 주요(主要) 장소(場所)인 히토가타(吐伽陀) 마을도 카쿠레키리시탄(柴炭)이 만든 마을이다. 물론(勿論), 게임의 장르적(的) 특성(特性) 답게 기독교(基督敎)의 원형(原形)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程度).
  • 현대(現代)에 들어와서는, 과거(過去) 한신(韓信) 타이거스 의 인기(人氣)가 압도적(壓倒的)인 상황(狀況)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를 응원(應援)하는 칸사이 지방(地方) 사람을 표현(表現)하는 데도 쓰였다.

[1] 현존(現存)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文化的) 전통(傳統)이나 문명(文明)의 독보적(獨步的) 또는 적어도 특출(特出)한 증거(證據)일 것 [2] 일본식(日本式) 발음(發音)은 '센푸쿠 키리시탄(柴炭)' [3] 오토모 소린은 서양(西洋) 선교사(宣敎師)의 연줄(緣줄)을 통해 서양(西洋)으로부터 불랑기포 를 들여왔고, 1586년(年) 우스키 성(性)(臼杵城) 농성(籠城) 당시(當時) 시마즈 이에히사(社) 의 군(軍)을 상대(相對)로 큰 위력(威力)을 발휘(發揮)했다. 심지어(甚至於) 소린은 불랑기포의 자체제작기술(自體製作技術)도 보유(保有) 했던 듯하다. 다만 불랑기포는 일본(日本) 내(內)에서 별로(別로) 반응(反應)이 좋지 않았는데, 오토모 소린 항목(項目) 참조(參照). [4] 바테렌(伴天連)은 포르투갈어(語) 파드레(padre)의 고어(古語)로, 가톨릭이 일본(日本)에 전래(傳來)된 당시(當時)의 선교사(宣敎師)나 신부(神父)에 대(對)한 호칭(呼稱)이었다(출처: <동아시아(東아시아) 역사(歷史)와 일본(日本)>) [5] 종교적(宗敎的)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 생각이 다른 자(者). [6] 엔도 슈사쿠 의 소설(小說) 침묵(沈默) 에도 이노우에 지쿠고노카미가 후미(後尾)에 를 마친 로드리고에게 "아직 고토(故土) 열도(列島) 쪽에 숨어서 자기(自己)들끼리 믿는 키리시탄(柴炭)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잡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於此彼) 그들은 뿌리가 잘린 거나 다름없으니 서서히(徐徐히) 말라 죽을 테고 , 애초(애初)부터 일본(日本) 과는 맞지 않았던 기독교(基督敎)라는 서양(西洋)의 묘목(苗木)은 이 늪지와 같은 땅에서 본래(本來)의 모습을 잃고 변질(變質)되어 버릴 테니까." 하고 이죽거리는 장면(場面)이 나온다. [7] 1805년(年) 아마쿠사(社) 키리시탄(柴炭) 적발사건(摘發事件)(天草崩れ 아마쿠사(社) 쿠즈레) [8] 당시(當時)에는 '후란스데라(?蘭西寺)', 즉(卽) 프랑스 절(節) 이라고 불렸다. 과거(過去) 전국시대(戰國時代)~에도시대(時代)와 달리 19세기(世紀) 일본(日本)에서의 가톨릭 포교(布敎)는 동시기(同時期) 조선(朝鮮)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리 외방전교회(外方傳敎會) 프랑스인(人) 신부(新婦) 들이 주도(主導)했기 때문이다. 현재(現在) 이 곳은 일본(日本) 26위(位) 성인(成人) 성당(聖堂)으로 불린다. [9] 세바스티아노라는 세례명(洗禮名) 을 받은 사람으로, 평신도(平信徒) 지도자(指導者)였다고 전(傳)한다. [10] 이는 처음 가톨릭 이 일본(日本)에 전(傳)해질 때가, 유럽 에서 한창 가톨릭과 개신교(改新敎) 가 치고 박고 할 시기(時期)였기 때문. 그래서 이 3가지는 둘을 구별(區別)하는 단서(端緖)로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 사이에 구전(口傳)되었다. 그렇기에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들은 메이지 시대(時代) 에 가톨릭과 함께 들어온 개신교(改新敎)에는 가지 않았다. [11] 정확(正確)하게 이사벨라 유리는 "지금(只今) 저희는 슬픈 시간(時間)( 사순(絲蓴) 시기(時期) )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當身)도 지킵니까?"라고 질문(質問)했다. [12] 유럽 밖 지역(地域)에서 유럽인(人)들이 기독교(基督敎) 공동체(共同體)나 그 흔적(痕跡)을 찾은 경우(境遇)는 이게 처음이 아니긴 하다. 십자군(十字軍)이 중동(中東)에서 마론파 교회(敎會)를 찾은 일이나, 명나라(明나라)에 간 예수회 선교사(宣敎師)들이 네스토리우스교 가 당나라(唐나라) 시기(時期)에 전래(傳來)되었음을 확인(確認)하는 등(等)의 일이 있었다. 다만 전자(前者)의 경우(境遇) 중동(中東)도 한 때 기독교(基督敎) 국가(國家)인 로마 제국(帝國)의 땅이었고, 후자(後者)는 네스토리우스교가 축출(逐出)된 이단(二段)인데다가 이미 명나라(明나라) 시기(時期)에는 신앙(信仰)이 사실상(事實上) 소멸(消滅)했음을 생각하면 일본(日本)의 신자(信者) 발견(發見)이 전례(前例)없는 일인 것은 맞다. [13] 浦上 崩れ (우(于)라카미(美) 쿠즈레)란 말하자면 우(于)라카미(美) 지역(地域)의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 적발(摘發) 사건(事件)으로, 1차(次) 는 1790년(年), 2차(次) 는 1842년(年), 3차(次) 는 1856년(年)에 있었다. [14] 미국(美國) 대통령(大統領) 율리시스 S. 그랜트 , 영국(英國) 국왕(國王) 빅토리아 , 덴마크 국왕(國王) 크리스티안 9세(歲) 등(等). [15] 이는 서구(西歐) 열강(列强)이 죄다 그리스도교 신자(信者)가 인구(人口)의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이루는 것과 무관(無關)하지 않다. 당장(當場)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 발견(發見) 이후(以後)에 청나라(淸나라) 에서 발생(發生)한 의화단(義和團)의 난(亂) 도 단순히(單純히) 외세(外勢)에 저항(抵抗)하는 운동(運動)이 아니라 중국(中國) 내 그리스도교 신자(信者) 대량학살(大量虐殺)로 이어지자, 열강(列强) 국가(國家)들 내부(內部)의 여론(輿論)이 대폭발하면서 열강(列强)들이 대규모(大規模) 군대(軍隊)를 파병(派兵)해 개입(介入)하는 것으로 일이 커졌다. 현대(現代)에도 이런 양상(樣相)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ISIL 가 자신(自身)들의 점령지(占領地)에서 납치(拉致)된 현지(現地)의 토착(土着)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을 학살(虐殺)하고 개종(改宗)을 강요(强要)하자, 이에 미국(美國) 유럽 각지(各地)에서 IS를 응징(膺懲)하자는 여론(輿論)이 나오면서 직접(直接) 중동(中東) 지역(地域)으로 들어가서 의용군(義勇軍)을 결성(結成)해 맞서싸우기도 했다. 아무리 정교분리(政敎分離) 가 잘 된 국가(國家)라도 종교단체(宗敎團體)가 종교(宗敎)에 관(關)해서는 하나로 뭉쳐있는 거대(巨大)한 세력(勢力)이라 정치인(政治人)들이 이들의 말을 마냥 무시(無視)하기 힘든 것이 현실(現實)이다. [16] 배교(背敎)한 성직자(聖職者) 중(中)에선 크리스트발(發) 페레이라(포르투갈)과 주세페 키아라(이탈리아, 당시(當時)는 통일(統一) 국가(國家)는 아니었다)가 있다. 두 사람은 배교(背敎) 후(後) 일본식(日本式) 이름을 받고 기독교(基督敎) 물품(物品)을 검열(檢閱)하는 자리를 받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나온 소설(小說)이 바로 < 침묵(沈默) >. [17] 외국인(外國人) 선교사(宣敎師)들의 상황(狀況)은 본문(本文)에 있으며 개항(開港) 이전(以前)에 배출(輩出)된 마지막 일본인(日本人) 사제(司祭)인 고니시 만(萬)쇼 1644년(年) 순교(殉敎)하면서 개항(開港) 때까지 성직자(聖職者)가 없었다. 1709년(年) 이탈리아 선교사(宣敎師)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試圖)티 가 밀입국(密入國)했지만 카쿠레키리시탄(리柴炭) 공동체(共同體)와 접촉(接觸)하지 못하고 막부(幕府)에 잡혀 1714년(年)에 옥사(獄死)했기에 개항(開港) 때까지 성직자(聖職者)가 없는 상황(狀況)이 계속(繼續) 이어졌다. [18] 시도(試圖)티 신부(神父)의 심문(審問)을 맡았던 막부(幕府)의 관리(管理) 및 학자(學者)인 아라이 하쿠세키 가 시도(試圖)티 신부(新婦)를 심문(審問)하는 과정(過程)에서 들은 서양(西洋) 소식(消息)을 기록(記錄)해 모은 서양기문(西洋氣門)(西洋奇聞)이라는 책(冊)에 있다. 아라이는 시도(試圖)테 신부(神父)의 심문(審問)을 마치고 막부(幕府)에 보고(報告)하기를 '그냥 본국(本國)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상책(上策)이고, 평생(平生) 가둬 두는 것이 중책(重責)이고, 처형(處刑)시키는 것이 하책(下策)'이라고 했다. 시도(試圖)티 신부(神父)는 자신(自身)이 연금(軟禁)되어 있던 기리시탄(柴炭) 저택(邸宅)의 하인(下人) 부부(夫婦)에게 기독교(基督敎)를 전도(傳道)하다가 투옥(投獄)되어 끝내 옥사(獄死)했다. 소설가(小說家) 다자이 오사무 는 당시(當時) 시도(試圖)티 신부(神父)의 도일과 체포(逮捕), 아라이 하쿠세키의 심문(審問) 과정(過程)부터 끝내 시도(試圖)티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내용(內容)을 다룬 단편소설(短篇小說) ' 지구(地球)의 (地球儀)'를 썼다. 이 소설(小說)은 그의 단편집(短篇集) <만년(萬年)>에 수록(收錄)되어 있다. [19] 요우(僚友)카노시치(値)야, 요우(僚友)카=八日, 시치야=七夜 [20] 역사적(歷史的) 표기법(表記法)이기 때문에 なう는 '나우'가(價) 아닌 '노:'로 읽으며, 어중(於中), 어미에 오는 つ는 일반적(一般的)으로는 '츠'로 읽지만 촉음(促音) 이 될 수도 있다. [21] 이 외(外)에도 많은 버전이 있다. 이 논문(論文) 의 16쪽 참고(參考). 논문(論文)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어(日本語) 특유(特有)의 발음(發音)으로 라틴어(라틴語) 기도문(祈禱文)을 표기(表記)하고 외웠던 것 뿐만 아니라 완전(完全) 다른 기도문(祈禱文)인데 성호경인(聖號經人) 경우(境遇)가 꽤 있다. [22] 키리시탄(柴炭)의 교리(敎理)와 그 존재(存在) 의의(意義), 신앙(信仰)을 지켜야 할 이유(理由)를 적은 책(冊) [23] 원래(元來) 성경(聖經) 에 언급(言及)된 아담의 자녀(子女)는 그 유명(有名)한 아벨 · 카인 · 뿐이다. [24] 제대로 된 성직자(聖職者) 없이 오랜시간(時間)을 보내오면서 형태(形態)는 달라졌어도, 사상(思想)이 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 [25] 일본(日本)의 기독교(基督敎) 신자(信者) 비율(比率)은 인구(人口)의 1%에도 못 미친다. 일본(日本)의 경우(境遇) 교회(敎會) 결혼식(結婚式)이 유행(流行)하여 신자(信者)도 아니면서 교회(敎會)에서 결혼(結婚)을 하는데 이때 주례(主禮)도 분위기(雰圍氣)를 맞춘다고 외국인(外國人) 알바를 쓰는 게 유행(流行)하는 정도(程度)다. [26] 와타나베 켄 이 연기(延期)했다. [27] 그냥 카쿠레 키리시탄(柴炭)의 후손(後孫)이 아니라, 생명(生命)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최초(最初)의 인간(人間)인 '쥬스헤루'의 후손(後孫)들이다. 그 때문인지 병(病)이나 사고(事故)가 아니면 죽지 않지만, 그들의 수(數)가 불어날 것을 우려(憂慮)한 신(神)에 의(依)해 일정한 때가 되면 지옥(地獄)으로 떨어지게 된다. [28] 네덜란드 상인(商人)들이 나가사키에서 일본(日本)의 설명절(說明節) 맞춰서 지낸 크리스마스 파티다. [29] 네덜란드 등(等) 개신교(改新敎) 국가(國家)들은 가톨릭 박해(迫害)를 비웃는다는 인식(認識)이 있는데, 전혀(全혀) 그렇지 않다. 개신교도(改新敎徒)들은 박해(迫害)받은 가톨릭에 동정심(同情心)을 느끼며, 가톨릭의 식민정책(植民政策)을 보고 배웠고, 훗날(後날) 미국(美國)과 영국(英國) 등(等) 개신교(改新敎) 국가(國家)들이 일본(日本) 등(等) 아시아 국가(國家)들을 무력(武力)으로 개항(開港)시키게 된다. 예(例)를 들면, 제너럴 셔먼호(號) 사건(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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