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대(中生代)
백악기(白堊紀)
에 전남(全南) 남해안(南海岸)의 여타(餘他) 섬들과 비슷한 과정(過程)을 거쳐 형성(形成)됐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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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신생대(新生代)
제(第)4기(期)
에 형성(形成)된 제주도(濟州島)보다 훨씬 지질학적(地質學的) 역사(歷史)가 오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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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에 사람이 최초(最初)로 거주(居住)한 연대(年代)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백제(百濟)
와
신라(新羅)
시대(時代)에
탐라(耽羅)
의 조공(曺公)이 있었던 점(點)에서 미루어 그 당시(當時) 제주도(濟州島)와 육지(陸地)를 왕래(往來)하는 선박(船舶)들이 추자도를 자주 경유(經由)했을 것으로 추정(推定)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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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高麗時代)
에는 후풍도(候風度)(候風島)로 불렸으며,
제주도(濟州道)
와
전라도(全羅道)
를 잇는 뱃길의 중간(中間) 기착지(寄着地) 역할(役割)을 하였다.
1271년(年)
삼별초(三別抄)의 난(亂)
이 일어났을 때 삼별초(三別抄)를 토벌(討伐)하려 제주(濟州)로 가던 여몽연합군(旅夢聯合軍) 병력(兵力)이 폭풍우(暴風雨)를 피해(被害) 추자도로 대피(待避)했다는
고려사(高麗史)
기록(記錄)이 있다. 고려(高麗) 말(末)
목호(牧胡)의 난
을 진압(鎭壓)하기 위해 제주도(濟州島)로 향(向)했던
최영(崔瑩)
도 풍랑(風浪)을 피(避)하기 위해 추자도에 잠시(暫時) 기착(寄着)하였고, 이 때 추자도 주민(住民)들에게 선진(先進) 어업기술(漁業技術)을 전수(傳授)해주었다. 주민(住民)들은 사당(祠堂)을 세워 최영(崔瑩) 장군(將軍)의 은덕(恩德)을 기렸으며 그 사당(祠堂)은 현재(現在)까지도 남아있다 (제주도(濟州島) 기념물(記念物) 제(第)11호(號)).
고려말(高麗末)에는
왜구(倭寇)
의 침입(侵入)이 극심(極甚)하여
1350년(年)
충정왕(忠定王) 때 추자도 주민(住民)들을 이주시켰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
에도 공도정책(政策)으로 주민(住民)들이 섬을 비워야 했고, 성종(成宗) 시기(時期)인
1490년(年)
에 왜구(倭寇)들이 들어와 고기잡이와 해산물(海産物) 채취(採取)를 했다는 기록(記錄)이 있다. 다시 추자도에 주민(住民)들이 들어온 시기(時期)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직후(直後)이다.
구한말(舊韓末)
에는
전라남도(全羅南道)
영암군(靈巖郡)
,
완도군(莞島郡)
등(等)에 귀속(歸屬)되어 있다가
1914년(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가
제주도(濟州道)
(島)에 편입시켰다.
1932년(年)
에는 추자도 주민(住民)들이
일본인(日本人)
어민(漁民)들의 횡포(橫暴)에 저항(抵抗)한
사와다 그물망(그물網) 사건(事件)
이 일어났다.
1944년(年)
에서
1945년(年)
시기(時期)에는
결7호(號) 작전(作戰)
으로 인해 추자도에 갱도진지(坑道陣地)가 10개(個) 정도(程度) 구축(構築)되었다.
8.15 광복(光復)
이후(以後)
제주도(濟州道)
(道)가 신설(新設)될 때 추자도는
북제주군(北濟州郡)
소속(所屬)이 된 이래(以來) 현재(現在)까지 쭉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
소속(所屬)이다. 그러나 거리상(距離上) 제주도(濟州道) 본도(本島)보다는
전라남도(全羅南道)
에 더 가까운 편(便).
완도군(莞島郡)
보길도(甫吉島)와의 거리(距離)는 25 km 남짓. 다만 완도(莞島)나 진도(珍島) 본(本)섬과의 거리(距離)는 약(約) 50 km로 제주도(濟州道)와의 거리(距離)와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호남(湖南) 문화권(文化圈)으로 분류(分類)되며 방언(方言) 역시(亦是)
서남(西南) 방언(方言)
이(李) 널리 사용(使用)되고 있다. 지형도(地形圖) 유일(唯一)하게 제주(濟州) 지역(地域) 중(中)에서는
현무암(玄武巖)
지형(地形)이 아니기도하다.
위의 사유(事由)로 추자도 출신(出身) 사람들은 행정구역(行政區域) 상(上)으로는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
출신(出身)이지만 타지역(他地域) 사람들 앞에서
"제주(濟州) 사람"
이라고 밝히긴 애매(曖昧)한 부분(部分)이 있다. 왜냐하면 제주(濟州)사람이라고 하면 보통(普通) 섬 이름 제주도(濟州道)(島)를 떠올려서, 추자도 출신(出身)인데 제주도(濟州島)와 관련(關聯)하여 이것 저것 이야기할 게 뻔하기 때문. 그래서 '추자도'라고 하거나 '제주도(濟州道) 위쪽에 있는 추자도'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즉(卽), 어느 지방(地方)에 있는 건지 정체성(正體性)에 혼란(混亂)이 온다.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의
서해(西海) 5도(度)
(
황해도(黃海道)
문화권(文化圈))나
대만(臺灣)
진마지구(眞魔地區)
(
푸젠성
문화권(文化圈))와 비슷하다.
추자도 주민(住民)들은 자녀(子女) 교육(敎育) 등(等)의 이유(理由)로
제주시(濟州市) 본토(本土)
또는
목포(木浦)
에 집을 한 채 더 갖고 있으면서 필요(必要)에 따라서 옮겨다니면서 사는 사람들이 흔하다. 과거(過去)에는 경제적(經濟的)으로 목포(木浦)의 영향력(影響力)이 더 강(剛)했지만 요즘에는
제주도(濟州道)
인구(人口)가 늘어나고 경제력(經濟力)이 커지면서
제주시(濟州市)
로부터 물건(物件)을 들여온다든지 하는 경우(境遇)도 많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경제적(經濟的)으로
전주(全州)의 영향력(影響力)이 더 강(剛)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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