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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扶餘郡) - 나무위키

부여군(扶餘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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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分類)
충청남도(忠淸南道) 자치군(自治群)
부여군 CI
부여군(扶餘郡)
扶餘郡
Buyeo County
군청(郡廳) 소재지(所在地)
부여읍 사비(私費)로 33 (동남리)
광역자치단체(廣域自治團體)
하위(下位) 행정구역(行政區域)
면적(面積)
624.53㎢
인구(人口)
60,408명(名) [1]
인구밀도(人口密度)
96.72명(名)/㎢ [2]
군수(郡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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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朴政賢) (재선(再選))
군의회(郡議會)
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
7석(席) [3]
zsdkl3gasdg
4석(席) [4]
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
1석(席) [5]
zsdkl3gasdg
1석(席) [6]
국회의원(國會議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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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번호(地域番號)
041
홈페이지
부여군 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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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개요(槪要) 2 . 역사(歷史)
2.1 . 발전(發展) 초기(初期) 2.2 .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이후(以後) 2.3 . 인구(人口)
3 . 교통(交通) 4 . 관광(觀光)
4.1 . 특산물(特産物)
5 . 상권(商圈)
5.1 . 금융(金融)
6 . 생활문화(生活文化)
6.1 . 교육(敎育) 6.2 . 음식(飮食) 6.3 . 의료기관(醫療機關) 6.4 . 기타
7 . 정치(政治) 8 . 하위(下位) 행정구역(行政區域) 9 . 기타 10 . 출신(出身) 인물(人物)


1. 개요(槪要) [편집(編輯)]

충청남도(忠淸南道) 남부(南部)에 있는 군(軍) . 동쪽(東쪽)으로 논산시(論山市) , 서쪽(西쪽)으로 보령시(保寧市) 서천군(舒川郡) , 북쪽(北쪽)으로 공주시(公州市) 청양군(靑陽郡) , 남쪽(南쪽)으로 전북특별자치도(全北特別自治道) 익산시(益山市) 군산시(群山市) 와 접(接)한다. 백제(百濟) 의 수도(首都)였던 사비(私費) 여서(女壻) 백제문화단지(百濟文化團地) , 한국전통문화대학교(韓國傳統文化大學校) 가 이 지역(地域)에 있다.

' 부여(扶餘) '라는 이름은 통일신라(統一新羅) 때부터 이어온 지명(地名)이며, 백제(百濟) 시대(時代)에는 사비(私費), 소부리 등(等)으로 불렸다. [7] 부여(扶餘) 는 만주(滿洲) 지방(地方)에 있던 고대(古代) 국가(國家)라 상관(相關)없을 거 같지만, 백제(百濟) 의 시조(始祖) 온조왕 이 부여(扶餘) 왕족(王族)이었고, 백제 왕(王)들의 성씨(姓氏)도 부여씨(氏) 였으며 백제 성왕(聖王) 이 국명(國名)을 남부여(南夫餘) 로 바꿨을 정도(程度)였다. 이 지역(地域)을 부여(附與)로 명명한 통일신라도(統一新羅度) 그 역사적(歷史的) 관련성(關聯性)을 인정(認定)한 것이다.

공주시(公州市) [8] 와 함께 백제문화제(文化祭)를 개회식(開會式)과 폐막식(閉幕式)을 번갈아가면서 진행(進行)하고 있으며, 2010년(年) [9] 에는 세계대(世界大)백제전을 개최(開催)했다.

2. 역사(歷史) [편집(編輯)]

2.1. 발전(發展) 초기(初期) [편집(編輯)]

기원전(紀元前) 에는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의 송국리 문화유형(文化類型)의 발원지(發源地)였고, 그 이후(以後) 기원전(紀元前) 4~3세기(世紀) 때 고조선(古朝鮮) 연(燕)나라 에게 밀려나갈 때 발생(發生)한 이주민(移住民)들의 한반도(韓半島) 이주(移住) 러시 후(後)에는 삼한(三韓) 중(中) 마한(馬韓) 고포국(古浦國)의 영역(領域)이었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인 그 이후(以後) 대강(大江) 4세기(世紀) 즈음 백제(百濟) 분서왕(汾西王) 혹은(或은) 비류왕(比流王) 시기(時期)에 같은 마한(馬韓)의 백제국에 복속(服屬)되었다. 이후(以後) 소부리(所夫里), 사비(私費) 등(等)의 지명(地名)으로 불렸고, 공식적(公式的)으로는 사비성(泗沘城) 이 된다. 고구려(高句麗) 장수왕 의 남진정책(南進政策)으로 개로왕 이 죽고 한성백제(漢城百濟)가 몰락(沒落)한 뒤 웅진백제시대(熊進百濟時代)인 5세기(世紀) 말에서 6세기(世紀) 초(初)쯤에 본격적(本格的)으로 도시(都市)가 건설(建設)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 따르면 5세기(世紀) 말(末)인 동성왕 시기(時期)부터 왕(王)이 자주 사비(私費)로 사냥을 나갔다는 기록(記錄)이 있는 점(點)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부터 정치적(政治的) 중요성(重要性)이 수도(首都) 웅진성(熊津城) (현(現)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시(公州市) ) 다음으로 큰 도시(都市)가 아니었나 추측(推測)하거나 혹은(或은) 동성왕대(臺)부터 의도적(意圖的)으로 키우기 시작(始作)한 도시(都市)일 것이라 추측(推測)된다. [10]

백제(百濟) 성왕(聖王) 이 국호(國號)를 ' 남부여(南夫餘) '로 고치고 538년(年) 웅진성(熊津城)에서 사비성(泗沘城)으로 천도(遷都)한 이래(以來)로 백제가 멸망(滅亡)하는 660년(年) 까지 6대(代) 122년간(年間) 백제(百濟) 의 마지막 도읍지(都邑地)였다. 결국(結局) 부여(扶餘)가 도시개발(都市開發)이 안 되는 결정적(決定的) 이유(理由)가 되고 말았다. [11] 660년(年)에 백제가 멸망(滅亡)해 궁성(宮城)을 비롯한 많은 문물(文物)이 소실(消失)되었는데, 마지막 순간(瞬間)에 한 백제인(百濟人)이 금동대향로(香爐) 를 땅 속에 묻은 것이 신(神)의 한 수(數)라고 할 수 있다.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에 들어서는 중심지(中心地)는 사비군(私費群)(泗?郡)으로, 현(現) 임천면 일대(一帶)는 가림군(加林郡)으로 불린다. 사비군(私費君)의 속현(屬縣)으로는 진악산현(縣)(珍惡山縣, 석성면)과 열기현(熱氣縣)(悅己縣, 충청남도(忠淸南道) 청양군(靑陽郡) 정산면)이 있었고 가림군의 속현(屬縣)으로는 마산현(馬山縣, 충청남도(忠淸南道) 서천군(舒川郡) 한산면)과 대산현(大山縣, 홍산면)이 있었다. [12] 신라(新羅) 경덕왕 의 전국(全國) 지명(指名) 한화정책(政策) 때 사비군(私費軍)은 부여군(扶餘郡)(扶餘郡)으로, 가림군은 가림군(嘉林郡) [13] 으로 개칭(改稱)됐고 그 아래로 진악산현(玄)은 석산현(石山縣)(石山縣)으로, 열기현(熱氣玄)은 열성현(熱聖賢)(悅城縣)으로, 마산현은 그대로, 대산현은 한산현(閑散縣)(翰山縣)이(李) 된다.

2.2.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이후(以後) [편집(編輯)]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때는 후백제(後百濟) 의 영역(領域)이었고, 후백제(後百濟)가 일(日)리천 전투(戰鬪) 의 패배(敗北)로 망(亡)할 때 고려(高麗)의 영역(領域)이 되었다.

고려시대(高麗時代) 때 감무(監務)가 설치(設置)되었고 조선시대(朝鮮時代) 때는 부여현(扶輿峴)으로 재편(再編)되는 등(等) '부여(扶餘)'란 이름을 간직해왔다.

1914년(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부군면(夫君面) 통폐합(統廢合) 에 따라 석성군(石城群) 일부(一部), 홍산군, 임천군(千軍)을 통합(統合)하여 현재(現在)의 부여군(扶餘郡) 영역(領域)이 되었다. 1960년(年) 부여면(扶餘面)이 부여읍으로 승격(昇格)하였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말기(末期)인 1939년(年) 에, 일본(日本)이 '내선일체(內鮮一體)' 프로파간다 를 퍼뜨리는 일환(一環)으로 부여(扶餘) 부소산(扶蘇山) 일대(一帶)(지금(只今)의 삼충사 위치(位置))에 부여신궁(扶餘神宮) 을 건축(建築)하고자 공사(工事)를 시작(始作)하였다. 진구 황후(皇后) 를 비롯하여 백제와 관계(關係) 있는 일본(日本)의 옛 천황(天皇)들의 신령(神靈) 4위(位)를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물(建物)을 완공(完工)되기 전(前)에 일본(日本)이 패전(敗戰)하고 우리나라가 광복하자(光復瑕疵), 만들다 만(萬) 부여신궁(扶餘神宮) 건물(建物)을 부여청년동맹원(扶餘靑年同盟員)들이 파괴(破壞)하였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부여신궁(扶餘神宮)을 세우는데 너무 시골이라 공사(工事)가 지지부진(遲遲不進)하자 아예 부여(扶餘)를 신(神)도(神都)라 칭(稱)하며 대대적(大大的)으로 도시화(都市化)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부여(扶餘) 내(內)의 시가지(市街地)를 대대적(大大的)으로 정비(整備)하였는데 그 영향(影響)이 지금(只今)도 남아있다. [14] 몇해 전(前) 충남도청(忠南道廳) 이전(移轉)에 든 비용(費用)이 당시(當時) 돈으로 16만(萬) 원이었는데, 부여신궁(扶餘神宮)의 총(總) 공사비(工事費)는 24만(萬) 원이었다. 더군다나 히로히토 천황(天皇)이 직접(直接) 공사(工事) 계획(計劃)을 발표(發表)했다('충청남도 인터넷 신문(新聞)' 인용(認容)).

당시(當時) 신궁(神宮)에 모시려던 이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에도 나오는 진구 황후(皇后) 등(等)이었던 점(點)과 부여(附與)가 고대(古代) 일본(日本)과 관계(關係)가 깊은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都邑)이란 점(點) 등(等)을 드는 얘기가 있다. 부여신궁(扶餘神宮)을 개발(開發)하면서 이 일대(一帶)의 도로(道路)나 도시(都市) 정비(整備) 계획(計劃)까지 잡혀있었으니 이때 개발(開發)이 진척(進陟)되었더라면 금세 '부여시(附與時)'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바 료타로 의 '한나라(한국(韓國)) 기행(奇行)'에서, '일제(日帝)가 망(亡)한 건 좋은데, 부여(扶餘) 일대(一帶) 개발(開發) 때까지는 버텼어야 했다.'고 주장(主張)하는 한국인(韓國人)의 인터뷰가 소개(紹介)된다. [15] 실제로(實際로) 현재(現在) 부여군(扶餘郡)은 발전(發展) 상태(狀態)에 비(比)해서 읍내(邑內)의 도로(道路) 정비(整備)가 잘 된 편(便)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제(日帝)로 인해 부여(附與)가 개발(開發)되었다면 지금(只今)까지도 일본(日本) 극우(極右)들이 어떤 반응(反應)을 보이며 프로파간다로 써먹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또한 서울의 풍납토성(風納土城) 처럼 사비시기(私費時期)의 백제의 유적(遺跡)을 발굴(發掘)하는 일에 있어 지금(只今) 이상(以上)의 애로사항(隘路事項)이 꽃필 것은 확정(確定)이다.

1960년대(年代) ~ 1970년대(年代) 까지 금강(錦江) 내륙수운(內陸水雲)이 원활히(圓滑히) 돌아갈 때 인근(隣近)의 강경(强勁) 과 더불어 상당(相當)한 발전(發展)을 구가(謳歌)하였다. 하지만 부여(扶餘)에는 꽤 오랫동안 철도(鐵道)는 물론(勿論)이거니와 고속도로(高速道路)도 없었던 데다, 1960년대(年代) ~ 1990년대(年代) 에 이루어진 경제(經濟) 개발(開發) 정책(政策)으로 인해 경부선(京釜線)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 가 통(通)하는 충청(忠淸) 내륙(內陸) 지역(地域)들과 달리 부여군(扶餘郡)을 비롯한 충남(忠南) 서부(西部) 지역(地域)들은 인구(人口) 유출(流出)을 겪게 되었으며, 1990년(年) 금강하굿둑(錦江河口둑) 의 완공(完工)으로 금강(錦江) 내륙수운(內陸水雲)이 완전히(完全히) 정지(停止)됨에 따라 부여(扶餘)의 발전(發展) 역시(亦是) 정체(停滯)되어 현재(現在)에 이르고 있다. 또한 군(軍)의 인구(人口)도 계속(繼續)하여 감소(減少)하는 추세(趨勢)다.

그래도 아직 부여읍이 인구(人口) 2만(萬) 선(線)은 유지(維持)했고 [16] , 규암면도(度) 인구(人口) 1만(萬)이 넘고 코아루 휴엔하임 등(等)이 지어질 정도(程度) [17] 이므로, 군(軍) 치고는 그래도 아직 심각(深刻)하게 몰락(沒落)하지는 않았다.

2.3. 인구(人口) [편집(編輯)]

부여군 CI 부여군(扶餘郡) 인구(人口) 추이(推移)
(1966년(年)~현재(現在))
1966년(年) 194,995명(名)
1970년(年) 180,060명(名)
1975년(年) 176,690명(名)
1980년(年) 163,769명(名)
1985년(年) 142,636명(名)
1990년(年) 126,908명(名)
1995년(年) 104,304명(名)
2000년(年) 93,687명(名)
2005년(年) 83,464명(名)
2010년(年) 75,029명(名)
2015년(年) 71,143명(名)
2020년(年) 65,354명(名)
2024년(年) 4월(月) 60,408명(名)
인구(人口)는 현재(現在) 행정구역(行政區域)이 아닌 해당(該當) 연도(年度) 행정구역(行政區域) 기준(基準), 그래프 최대(最大) 값은 20만(萬) 명(名)
1966-1990: 통계청(統計廳) 인구총조사(人口總調査), 1995-현재(現在): 행정안전부(行政安全部) 주민등록인구통계(住民登錄人口統計)
읍면별(邑面別) 인구(人口) 통계(統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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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읍 18,644명(名)
규암면 11,685명(名)
은산면 3,585명(名)
세도면 2,962명(名)
홍산면 2,709명(名)
석성면 2,703명(名)
임천면 2,701명(名)
장암면 2,556명(名)
구룡면 2,252명(名)
외산면 2,240명(名)
초촌면 2,039명(名)
남면(南面) 1,720명(名)
양화면 1,608명(名)
내산면 1,474명(名)
옥산면 1,377명(名)
충화면 1,090명(名)
2023년(年) 9월(月) 기준(基準) 행정안전부(行政安全部) 주민등록인구통계(住民登錄人口統計) , 그래프 최대(最大) 값은 2만(萬) 명(名)

3. 교통(交通)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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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광(觀光)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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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특산물(特産物) [편집(編輯)]

대부분(大部分) 농작물(農作物)이다. 이들 가운데, 부여(扶餘)8미(美)라는 것이 있다.
  • 수박 - 함안(咸安) 의 브랜드에 밀리지만, 부여(扶餘)에서 생산량(生産量)이 상당(相當)하다. 꽤나 오래전(오래前)에 수박축제(祝祭)라는 행사(行事)가 존재(存在)했다.
  • 멜론 - 부여생산량(扶餘生産量)이 전국(全國) 생산량(生産量)의 30% 정도(程度)라 카더라 . 과거(過去) 설빙(雪氷) 에서 멜론빙수(氷水)가 흥(興)했을 때는 지역(地域)에 따라 가게 구석에 부여(扶餘)멜론 박스가 쌓여 있었을 정도(程度).
  • 방울토마토 - 세도면이 유명(有名)하다
  • 양송이버섯(洋松栮버섯) - 전국(全國) 생산량(生産量)의 45% 를 차지할 정도(程度)라고 한다.
  • - 전국생산량(全國生産量)의 12%를 차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윗동네(윗洞네) 공주(公州) 에 묻혔다. 밭이 넓은 건 이쪽.
  • 딸기 - 옆동네(洞네) 논산(論山) 에 묻혀서 그렇지 재배(栽培)는 한다.
  • 표고버섯 - 전국(全國) 생산량(生産量)의 13%를 차지한다고 한다.

모두 굿뜨래 브랜드마크를 달고 팔리며, 굿뜨래는 국내(國內) 농촌(農村) 브랜드화(化)의 성공(成功) 사례(事例)로 자주 언급(言及)될 만큼 성과(成果)가 좋은 편(便)이다.

5. 상권(商圈) [편집(編輯)]

2000년대(年代) 초(初)에 들어서야 롯데리아 가 들어올 만큼 열악(劣惡)한 곳이었으나 최근(最近) 들어서 다양한 프렌차이즈들이 많이 입점(入店)해있다.

카페가 지역(地域) 규모(規模)에 비해 정말(正말) 많이 입점(入店)해있다. [18] 전통도시(傳統都市)답게 한옥(韓屋) 스타일로 지어졌거나 한옥(韓屋)을 콘셉트으로 하는 커피숍도 많이 있다.

영화관(映畫館)은 전통시장(傳統市場) 쪽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버스터미널과 전통시장(傳統市場) 인근(隣近)에 위치(位置)한 금성(金星)시네마는 접근성(接近性)이 좋은 편(便)이다. 지하주차장(地下駐車場)이 있으며, 2관(館)까지 있고 1층(層)은 은행(銀行)이었이다. [19] 술집 같은 경우(境遇)는 딱히 밀집지역(密集地域) 같은 게 없다. 대부분(大部分)이 동네(洞네) 술집이다. 술자리 게임 같은 거 하기도 힘들고, 하는 사람도 별로(別로) 없다. 음식점(飮食店) 같은 경우(境遇)는 의외로(意外로) 괜찮은 편(便)이다. 처음부터 관광도시(觀光都市)여서인지 관광객(觀光客)을 타깃으로 한 몇몇 유명(有名)한 음식점(飮食店)들이 포진(布陣)해 있다. 부소산(扶蘇山)이나 구드래공원(公園) 주변(周邊)에 밀집(密集)되어 있는 관광지(觀光地) 식당(食堂)은 말 그대로 관광객(觀光客)을 대상(對象)으로 하는 식당(食堂)이다 보니 부실(不實)한 식사(食事)를 하게 될 확률(確率)이 높다.

2013년(年) 9월(月) 8일(日) 규암면에 롯데아울렛 이 새로 생겼다. [20] 롯데아울렛을 유치(誘致)하기 위해 부지(敷地) 땅값을 무료(無料)로 해줬다는 카더라가 있다. 꽤 많은 브랜드가 입점(入店)하였다. 이제 유명(有名) 브랜드를 사러 타지(他地)로 나가지 않게 된 일반(一般) 시민(市民)들은 환영(歡迎)했고, 부여읍 내(內)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반대(反對) 운동(運動)도 벌였었지만 오픈 10년(年)째인 현재(現在)도 매우 성업(盛業) 중(中)이다. [21]

5.1. 금융(金融) [편집(編輯)]

6. 생활문화(生活文化) [편집(編輯)]

부여군(扶餘郡)을 본관(本館)으로 한 성씨(姓氏)는 임천(林泉) 조씨(氏) , 부여(扶餘) 서씨(徐氏) , 홍산 순씨(荀氏) 등(等)이 있다.

6.1. 교육(敎育)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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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사고(自私高), ⊙: 자공고(自公高), ▣: 특목고(特目高), ◈: 특성화고(特性化高), 이외(以外) 일반고(一般高)
남자고등학교(男子高等學校)
,
여자고등학교(女子高等學校)
,
이외(以外) 남녀공학(男女共學)

초등학교(初等學校) 24곳, 중학교(中學校) 11곳, 고등학교(高等學校) 인문계(人文系)2곳 실업계(實業界) 2곳 마이스터 1곳, 대학교(大學校) 1곳이있다. 초등학교(初等學校)는 부여초(扶餘初) , 백제초(百濟初) , 규암초(硅巖初) 를 제외(除外)하고는 1학년(學年) 1학급(學級)이다. [25] 고등학교(高等學校)는 부여(扶餘)고 부여여고(扶餘女高) 를 제외(除外)하고 남녀공학(男女共學)이다. 마이스터고등학교(高等學校) 인(人) 한국식품(韓國食品)마이스터고등학교(高等學校) 가 있다.

대학교(大學校)는 4년제(年制) 국립특수대학인(國立特殊大學人) 한국전통문화대학교(韓國傳統文化大學校) 가 있다.

6.2. 음식(飮食) [편집(編輯)]

전북특별자치도(全北特別自治道) 와 가까운 탓에 전라도(全羅道)와 충청도(忠淸道)가 혼합(混合)해 있는 듯한 음식(飮食)들이 대부분(大部分). 대표적(代表的)으로는 구드래 돌쌈밥이라는 곳이 있는데 구드래에 위치(位置)하고 20년(年)이 넘게 성업(盛業) 중(中)이다. 돌솥밥에 여러가지 쌈들이 같이 나오는데 반찬(飯饌)이 많지만 대부분(大部分) 구색(具色) 갖추기 수준(水準).

읍내(邑內) 전통시장(傳統市場)에 시골통닭 같은 경우(境遇), 과거(過去)부터 치킨이 아닌 통닭과 삼계탕(蔘鷄湯)을 팔던 곳이었는데, 백종원(白種元)의 3대(大) 천왕(天王) 에 나온 이후(以後)로 부여(附與)를 방문(訪問)하게 되면 오게 되는 맛집으로 유명(有名)해졌다.

6.3. 의료기관(醫療機關) [편집(編輯)]

부여(扶餘) 경찰서(警察署) 옆에 부여(扶餘) 유일(唯一)한 지역응급의료기관(地域應急醫療機關)인 건양대학교부여병원(學校扶餘病院) (74병상(病床))이 있긴 한데, 종합병원(綜合病院)은 아니고 일반(一般) 병원급(病院級)이다. 응급실(應急室)을 24시간(時間) 운영(運營)하고 있다. 그리고 요양원(療養院)도 뒤편(뒤便)에 위치(位置)해 있다. [26]

6.4. 기타 [편집(編輯)]

지역(地域) 특성상(特性上) 바로 아래 전북특별자치도(全北特別自治道) 익산(益山) 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익산(益山) 쪽에서 유입(流入)되어 오던 사람들이 있다. 먼 과거(過去) 부여(附與)와 익산(益山)이 백제(百濟) 중후기(中後期)의 핵심(核心) 지역(地域)인 데다, 가까운 과거(過去) 경제(經濟) 발전기(發電機)에는 충남(忠南)에서 가장 발전(發展)한 동네(洞네)였던 강경(强勁)과 맞붙어 있어서 전북(全北)에서 사람들이 많이 유입(流入)되어있다. 실제로(實際로)도 충청도(忠淸道) 사투리에 약간(若干)의 전북(全北) 사투리가 섞여서, 구분(區分)하기 어려운 사투리를 쓰는 경우(境遇)가 자주 보인다. 그러나 전라도(全羅道) 특유(特有)의 사투리인 '거시기'의 사용(使用)은 드물고 '시방(時方)'을 자주 쓴다. 이는 논산(論山) 서천(舒川) 등지(等地)도 똑같다. (논산시(論山市) 반절(半切) 정도(程度)는 원래(元來) 전라북도(全羅北道)에 속(屬)해있다가 충청남도(忠淸南道)로 부속(附屬)되었다.)

1967년(年) 에는 농민(農民) 올림픽 이라는 행사(行事)가 이 곳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올림픽이라는 거창(巨創)한 이름과는 달리 그냥 충남(忠南) 지역(地域)의 16개(個) 면(面)에서 온 농민(農民)들이 선수(選手)로 참가(參加)해 심플하게 하루 만에 끝낸 행사(行事)였다. 농촌(農村)의 번영(繁榮)을 위한 취지(趣旨)로 열렸으며 종목(種目)으로는 손수레 빨리 끌기, 쟁기질 빨리 하기, 감자 빨리 까기, 경운기(耕耘機) 빨리 몰기 등(等) 농촌(農村) 생활(生活)을 스포츠화(化)한 종목(種目)들이 있었다. 우승(優勝) 상품(商品)으로는 비료(肥料)가 주어졌으며 대회(大會)가 폐막(閉幕)된 후(後)에는 참가상격(參加上格)으로 술과 음식(飮食)을 나눠주며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농민(農民) 올림픽은 1회성(回性)으로 끝나고 말았다 . 대한(大韓)뉴스 중(中) 농민(農民) 올림픽

축구팀은 부여(扶餘) FC K3리그 2016 시즌부터 2018 시즌 참가(參加)했었다.

7. 정치(政治)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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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하위(下位) 행정구역(行政區域) [편집(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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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타 [편집(編輯)]

한창 행정구역(行政區域) 통합(統合) 시도(試圖) 가 잦았을 때 부여군(扶餘郡)에서 공주시(公州市) 에 '백제시(百濟視)'로 통합(統合)하자는 제안(提案)을 했지만 무산(霧散)된 적이 있다. 여러모로 공주(公州) 입장(立場)에선 손해(損害)인 데다가, 부여(扶餘)에서 공주시는 의외로(意外로) 멀다.

KBS 2TV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의 주요(主要) 촬영지(撮影地) 중(中) 한 곳이 부여(扶餘)였다. 그 중(中)에서도 백제문화단지(百濟文化團地).

2023년(年)에 공개(公開)된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드라마 " 소년시대(少年時代) "는 1989년(年)의 부여군(扶餘郡)을 배경(背景)으로 하고있다. [27]

일부(一部) 몰지각(沒知覺)한 지역(地域) 주민(住民)들이 [28] 마을 통행료(通行料) 를 요구(要求)하며 장의차(葬儀車)를 막는 기행(紀行)을 보인 사건(事件)이 있었다. # 이 지역(地域) 뿐만 아니라 부여군(扶餘郡)의 다른 지역(地域)에서도 유골함도(遺骨函度) 못묻게 막고 돈을 요구(要求)하는 일이 있어 사람들의 지탄(指彈)을 받았다. # 한편(한便) 이 J리(里)의 당시(當時) 이장(里長)은 2014년(年)부터 2015년(年)까지 태양광발전소(太陽光發電所) 부지(敷地) 진입(進入) 도로(道路)를 틀어막고 최대(最大) 1억(億)의 뒷돈을 요구(要求)하여, 해당(該當) 업자(業者)가 결국(結局) 사업(事業)을 접은 일이 뒤늦게 밝혀졌다. 기사(記事) 2017년(年) 10월(月) J리(里)의 이장(里長)이 물러나고 새 이장(里長)이 선출(選出)되었는데, 새 이장(里長)은 전(前) 이장단(里長段)이 불법(不法)으로 받은 통행료(通行料) 내역(內譯)을 공개(公開)하라며 대자보(大字報)를 붙인 귀농(歸農) 부부(夫婦)를 J리(里)에서 제명(除名)한 뒤 마을회관(會館) 등(等)의 출입금지(出入禁止) 조치(措置)를 하는 이른바 작은 사회(社會) 의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기사(記事) 장의차(葬儀車) 통행료(通行料) 요구(要求) 사건(事件) 문서(文書)로.

2000년(年) 국어(國語)의 로마자(로마字) 표기법(表記法) 이 적용(適用)되기 전(前)에는 영문(英文) 표기(表記)를 PUYO로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영문(英文)으로 이름이 같은 뿌요뿌요 를 만든 컴파일 의 사장(社長) 니이타니 마사미츠 가 이를 보고 한국(韓國) 방문(訪問) 때 부여(附與)를 직접(直接) 들른 적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복성 중(中) 하나인 남궁(南宮) 씨(氏)의 최대(最大) 집성촌(集姓村)이 있다. 부여군(扶餘郡) 부여읍 석목리 위치(位置).

바람의나라: 연(年) 광고(廣告)에서 고구려(高句麗) 군대(軍隊)와 부여(扶餘) 군대(軍隊)가 서로를 놀리는 플롯의 광고(廣告)를 냈는데, 부여(夫餘)의 군대(軍隊)가 '부여군(扶餘郡)'으로 표현(表現)되면서 이 부여군(扶餘郡)을 연상(聯想)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부여군청 반응(反應)이 궁금하다' '저도 부여(扶餘) 사람인데 군수(郡守)님이 이거 봤으면 좋겠다' 이런 댓글들이 나왔다. 심지어(甚至於) 자기(自己)가 부여(扶餘)에서 태어났는데 기분(氣分) 나쁘다며 신고(申告)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95년(年) 간첩(間諜)이 침투(浸透)하여 군경(軍警)과 교전(交戰)을 벌인 적이 있다.

과거(過去) 내비게이션이 대중화(大衆化)되기 전(前) 종이 지도책(地圖冊)이 성행(盛行)했을 때 국내(國內) 시(詩)들의 시가지(市街地) 지역(地域)을 확대(擴大)한 지도(指導)를 모아둔 코너가 있었는데, 몇몇 지도(指導)의 해당(該當) 코너에 군(郡) 지역(地域)임에도 유일(唯一)하게 부여읍내(扶餘邑內)가 수록(收錄)된 경우(境遇)가 있었다. 관광(觀光) 도시(都市)로 전국적(全國的)으로 유명(有名)하다는 점(點)을 반영(反映)한 듯하다.

10. 출신(出身) 인물(人物) [편집(編輯)]

[1] 2024년(年) 4월(月) 기준(基準) 행정안전부(行政安全部) 주민등록인구통계(住民登錄人口統計) [2] 2024년(年) 4월(月) 기준(基準). [3] 부여군(扶餘郡) 가선거구(選擧區) (부여읍, 규암면): 서정호, 박순화
부여군(扶餘郡) 나선거구(選擧區)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南面), 충화면): 김영춘(金榮春), 장성용
부여군(扶餘郡) 다선거구(選擧區) (양화면, 임천면, 장암면, 세도면, 석성면, 초촌면): 조재범, 조덕연
비례대표(比例代表): 장소미
[4] 부여군(扶餘郡) 가선거구(選擧區) (부여읍, 규암면): 민병희, 노승호
부여군(扶餘郡) 나선거구(選擧區)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南面), 충화면): 김기일
비례대표(比例代表): 윤선예
[5] 부여군(扶餘郡) 제(第)2선거구(選擧區)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南面), 충화면, 양화면, 임천면, 장암면, 세도면, 석성면, 초촌면): 조길연 (3선(線)) [6] 부여군(扶餘郡) 제(第)1선거구(選擧區) (부여읍, 규암면): 김기서 (재선(再選)) [7] 수도(首都)를 의미하는 순(純)우리말인 서울의 어원(語源)으로 보는 의견(意見)도 있다. 서울의 보다 직접적(直接的)인 어원(語源)은 신라(新羅)의 수도(首都) 서라벌(徐羅伐) 이긴 하지만, 소부리도(度) 동계어(同系語)였을 것이라는 주장(主張)이다. [8] 백제(百濟) 때의 웅진(熊進) [9] 이용우 군수(軍需) 재임시절(在任時節)이었다. [10] 이러한 점(點)은 고구려(高句麗) 마지막 수도(首都)인 평양성(平壤城) 과 매우 흡사(恰似)하다. 평양(平壤) 역시(亦是) 313년(年) 미천왕 한사군(漢四郡) 정복(征服) 이후(以後) 고구려령(高句麗令)으로 편입(編入)되었고 장수왕 시기(時期) 이전(以前)부터 제(第)2의 수도(首都)로서의 기능(機能)을 충실히(忠實히) 수행(遂行)했다. 고국원왕 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戰死)한 장소(場所)도 평양(平壤)이고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대(臺)에 이미 평양(平壤) 지역(地域)에 9개(個)의 사찰(査察) 을 지었다는 기사(記事)나 신라(新羅) 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평양(平壤)에서 출발(出發)했다는 기사(記事)로 미루어 볼 때 평양(平壤) 역시(亦是) 427년(年) 장수왕(長壽王)의 천도(遷都) 이전(以前)부터 완성(完成)되어있던 도시(都市)라고 볼 수 있겠다. [11] 이건 신라(新羅) 의 수도(首都)였던 경주시(慶州市) 도 마찬가지이다. [12]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은 보통(普通)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부여(扶餘) 지역(地域)의 경우(境遇)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보인다. [13] 한자(漢字)만 다르다. [14] 부여읍 초입(初入) 로터리부터 군청(郡廳) 앞까지의 도로(道路)가 당시(當時) 일제(日帝)가 닦은 신작로(新作路)다. [15] 물론(勿論) 친일파(親日派)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當時) 부여(附與)가 개발(開發)되지 못한 것을 한탄(恨歎)하면서 나온 대화(對話)다. [16] 2021년(年) 3월(月)에 딱 3명(名) 차이(差異)로 2만(萬) 선(線)이 붕괴(崩壞)했다. [17] 사실(事實) 부여읍이 옛 백제의 수도(首都)이기 때문에 대규모(大規模) 아파트를 짓기 엄청 부담스럽다. 곳곳이 국가지정문화재(國家指定文化財)+유네스코 세계유산(世界遺産)이라 허가(許可)받는데도 시일(時日)이 걸리고, 공사(工事)하다가 문화재(文化財)가 발굴(發掘)될 수 있으므로... [18] 특히(特히) 궁남지 일대(一帶)에 정말(正말) 많이 있다. [19] 은행(銀行)이 2022년(年)에 철수(撤收)한 이후(以後) 실내(室內)풋살장(腸) 간판(看板)을 달고는 있지만 운영(運營)은 안 하고 있다 [20] 그와 동시(同時)에 롯데리조트 와 롯데스카이힐CC도 같이 생겼다. [21] 아울렛에 대부분(大部分) 옷을 사러 가기에 그나마 지역상권(地域商圈)에 문제(問題)가 많이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괄호(括弧)] 22.1 22.2 22.3 안의 숫자(數字)는 지점수(支店數)를 뜻함. [25] 이 세 학교(學校)를 제외(除外)하곤 학생수(學生數)가 많이 적다. [26] 이 요양원(療養院)은 건양대(建陽大)에서 운영(運營)하고 있다. [27] 단(單) 촬영(撮影)은 부여군(扶餘郡)에서 하지않았고 경기(競技)도 양평군(楊平郡) 이나 강원도(江原道) 춘천시(春川市) 에서 진행(進行)되었다. [28] 옥산면 J리(里)라고 알려졌는데 옥산면에 J로 시작(始作)하는 장소(場所)는 중양리 말고는 없다. [29] 지역구(地域區):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대덕구(大德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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