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때는
후백제(後百濟)
의 영역(領域)이었고, 후백제(後百濟)가
일(日)리천 전투(戰鬪)
의 패배(敗北)로 망(亡)할 때 고려(高麗)의 영역(領域)이 되었다.
고려시대(高麗時代)
때 감무(監務)가 설치(設置)되었고
조선시대(朝鮮時代)
때는 부여현(扶輿峴)으로 재편(再編)되는 등(等) '부여(扶餘)'란 이름을 간직해왔다.
1914년(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의
부군면(夫君面) 통폐합(統廢合)
에 따라 석성군(石城群) 일부(一部), 홍산군, 임천군(千軍)을 통합(統合)하여 현재(現在)의 부여군(扶餘郡) 영역(領域)이 되었다.
1960년(年)
부여면(扶餘面)이 부여읍으로 승격(昇格)하였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말기(末期)인
1939년(年)
에, 일본(日本)이 '내선일체(內鮮一體)'
프로파간다
를 퍼뜨리는 일환(一環)으로 부여(扶餘) 부소산(扶蘇山) 일대(一帶)(지금(只今)의 삼충사 위치(位置))에
부여신궁(扶餘神宮)
을 건축(建築)하고자 공사(工事)를 시작(始作)하였다.
진구 황후(皇后)
를 비롯하여 백제와 관계(關係) 있는 일본(日本)의 옛 천황(天皇)들의 신령(神靈) 4위(位)를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물(建物)을 완공(完工)되기 전(前)에 일본(日本)이 패전(敗戰)하고 우리나라가 광복하자(光復瑕疵), 만들다 만(萬) 부여신궁(扶餘神宮) 건물(建物)을 부여청년동맹원(扶餘靑年同盟員)들이 파괴(破壞)하였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부여신궁(扶餘神宮)을 세우는데 너무 시골이라 공사(工事)가 지지부진(遲遲不進)하자 아예 부여(扶餘)를 신(神)도(神都)라 칭(稱)하며 대대적(大大的)으로 도시화(都市化)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부여(扶餘) 내(內)의 시가지(市街地)를 대대적(大大的)으로 정비(整備)하였는데 그 영향(影響)이 지금(只今)도 남아있다.
[14]
몇해 전(前) 충남도청(忠南道廳) 이전(移轉)에 든 비용(費用)이 당시(當時) 돈으로 16만(萬) 원이었는데, 부여신궁(扶餘神宮)의 총(總) 공사비(工事費)는 24만(萬) 원이었다. 더군다나
히로히토
천황(天皇)이 직접(直接) 공사(工事) 계획(計劃)을 발표(發表)했다('충청남도 인터넷 신문(新聞)' 인용(認容)).
당시(當時) 신궁(神宮)에 모시려던 이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에도 나오는
진구 황후(皇后)
등(等)이었던 점(點)과 부여(附與)가 고대(古代) 일본(日本)과 관계(關係)가 깊은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都邑)이란 점(點) 등(等)을 드는 얘기가 있다. 부여신궁(扶餘神宮)을 개발(開發)하면서 이 일대(一帶)의 도로(道路)나 도시(都市) 정비(整備) 계획(計劃)까지 잡혀있었으니 이때 개발(開發)이 진척(進陟)되었더라면 금세 '부여시(附與時)'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바 료타로
의 '한나라(한국(韓國)) 기행(奇行)'에서, '일제(日帝)가 망(亡)한 건 좋은데, 부여(扶餘) 일대(一帶) 개발(開發) 때까지는 버텼어야 했다.'고 주장(主張)하는 한국인(韓國人)의 인터뷰가 소개(紹介)된다.
[15]
실제로(實際로) 현재(現在) 부여군(扶餘郡)은 발전(發展) 상태(狀態)에 비(比)해서 읍내(邑內)의 도로(道路) 정비(整備)가 잘 된 편(便)이다. 그러나 만약(萬若) 일제(日帝)로 인해 부여(附與)가 개발(開發)되었다면 지금(只今)까지도 일본(日本) 극우(極右)들이 어떤 반응(反應)을 보이며 프로파간다로 써먹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또한 서울의
풍납토성(風納土城)
처럼 사비시기(私費時期)의 백제의 유적(遺跡)을 발굴(發掘)하는 일에 있어 지금(只今) 이상(以上)의 애로사항(隘路事項)이 꽃필 것은 확정(確定)이다.
1960년대(年代)
~
1970년대(年代)
까지
금강(錦江)
내륙수운(內陸水雲)이 원활히(圓滑히) 돌아갈 때 인근(隣近)의
강경(强勁)
과 더불어 상당(相當)한 발전(發展)을 구가(謳歌)하였다. 하지만 부여(扶餘)에는 꽤 오랫동안 철도(鐵道)는 물론(勿論)이거니와 고속도로(高速道路)도 없었던 데다,
1960년대(年代)
~
1990년대(年代)
에 이루어진 경제(經濟) 개발(開發) 정책(政策)으로 인해
경부선(京釜線)
과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
가 통(通)하는 충청(忠淸) 내륙(內陸) 지역(地域)들과 달리 부여군(扶餘郡)을 비롯한 충남(忠南) 서부(西部) 지역(地域)들은 인구(人口) 유출(流出)을 겪게 되었으며, 1990년(年)
금강하굿둑(錦江河口둑)
의 완공(完工)으로 금강(錦江) 내륙수운(內陸水雲)이 완전히(完全히) 정지(停止)됨에 따라 부여(扶餘)의 발전(發展) 역시(亦是) 정체(停滯)되어 현재(現在)에 이르고 있다. 또한 군(軍)의 인구(人口)도 계속(繼續)하여 감소(減少)하는 추세(趨勢)다.
그래도 아직 부여읍이 인구(人口) 2만(萬) 선(線)은 유지(維持)했고
[16]
, 규암면도(度) 인구(人口) 1만(萬)이 넘고
코아루
나
휴엔하임
등(等)이 지어질 정도(程度)
[17]
이므로, 군(軍) 치고는 그래도 아직 심각(深刻)하게 몰락(沒落)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