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年代) 이전(以前)까지
한국(韓國)
에서는 지금(只今)의
쇠고기
,
돼지고기
,
닭고기
만큼 자주 먹었던 대중적(大衆的)인 식재료(食材料)였다.
물론(勿論) 육류(肉類) 중(中)에서 상대적(相對的)으로 가장 소비(消費)가 많았다는 것이지 지금(只今) 우리가 고기를 먹는 수준(水準)으로 흔하게 접(接)할 수 있는 음식(飮食)은 아니었다. 애초(애初)에 고기가 귀(貴)하니 육류(肉類)를 자주 섭취(攝取)하지 못했고, 역설적(逆說的)으로 그렇기 때문에 개고기 섭식(攝食)이 육식(肉食) 한정(限定)으로는 주류(主流) 식문화(食文化)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복날(伏날)에 먹는 보양식(補養食) 및 약재(藥材)로서 많이 활용(活用)되었고 지금(只今)도 그러한 인식(認識)이 남아있다. 과거(過去)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문헌(文獻)을 살펴보면 왕실(王室) 및 양반가(兩班家)에서는 순대, 꿩고기와 함께 가장 일상적(日常的)으로 먹었던 주류(酒類) 식재료(食材料)였던 것으로 보이고, 심지어(甚至於) 종묘(宗廟) 등(等)의 제사(祭祀)에도 올렸다. 평민(平民) 계층(階層)에서는 마을 잔치나 복날(伏날) 등(等)의 특별한 날에 먹는 고기로 취급(取扱)된 것으로 보인다. 즉(卽) 계급(階級)을 가리지 않고 일반적(一般的)으로 먹었던 대중적(大衆的)인 식재료(食材料)로 활용(活用) 되었던 것이다. 조리법(調理法)도 매우 다양해서 지금(只今)은 활용(活用)되지 않는 방식(方式)으로도 요리(料理)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過去) 한국(韓國)의 역사(歷史)에서 개가 대중적(大衆的)인 재료(材料)로 쓰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理由)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농경(農耕) 사회(社會)였던 한국(韓國)에서 소, 돼지
[13]
, 말, 닭, 오리 등(等)의 다른 가축(家畜)들은 다들 개(個)에 비해 불리(不利)한 점(點)들이 존재(存在)했고, 특히(特히)
양(量)
은 무리생활(生活)에 풀을 뿌리까지 뽑아 먹을 정도(程度)로 많이 먹어서 넓은 목초지(牧草地)가 필요(必要)해서 땅이 좁고 산(山)이 많은 한반도(韓半島) 지형상(地形上) 식재료(食材料)는 커녕 애초(애初)에 기를 수가 없었던 동물(動物)이였다.(이런 땅에 많이 길렀다가는 곧 토지(土地)가 황폐화(荒廢化)된다.)
염소(鹽素)
도 비슷한 이유(理由)로 양(量)만큼은 아니지만 많이 기를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理由)로 개는 별식(別食)으로 취급(取扱) 받았다곤 해도 동네(洞네) 잔치가 있을 때마다 쉽게 접(接)하고 구(求)할 수 있는 대중적(大衆的)인 요리(料理)였다는 사실(事實)엔 이견(異見)이 없다. 구석기(舊石器) 시대(時代)에 몇십만년(十萬年) 동안 수렵(狩獵) 생활(生活)을 해온 인간(人間)들에게 육류(肉類) 섭취(攝取) 욕구(欲求)는 본능(本能)에 가까웠고, 이를 충족(充足)하기에 가장 쉬운 동물(動物)이 개(個)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6.25전쟁(戰爭), 경제(經濟) 성장(成長)을 거치면서도 개의 섭식(攝食)이 아무런 거부감(拒否感) 없이 이어져 온 원인(原因)이었다. 결국(結局) 그나마 가장 일상(日常)에서 부담(負擔)없이 먹던 게 닭이랑 개였으니 이 둘이라도 열심히(熱心히) 먹었던 것이다.
2006년(年) 7월(月) 24일(日) 엠파스가 실시(實施)한 '당신(當身)의 보신탕(補身湯)(개고기) 문화(文化)에 대(對)한 생각은?'라는 주제(主題)의 설문조사(設問調査)에서 참여자(參與者) 3061명(名) 중(中) 86%인 2667명(名)이 개고기 문화(文化)를 없앨 필요(必要)가 없으며 전통문화(傳統文化)를 인정(認定)해야 한다고 답(答)하였으며, 개고기 문화(文化)에 반대(反對)하며 없애야 된다고 답(答)한 사람은 설문(設問) 참여자(參與者)의 14%에 불과(不過)하였다.
#
한국(韓國)의 개고기 식용(食用)은 석기시대(石器時代)부터로 추정(推定)하지만 실제(實際) 근거자료(根據資料)는 부족(不足)하다.
경상도(慶尙道)
지방(地方)에 존재(存在)하는
신라(新羅)
의 벽화(壁畫)를 바탕으로 추정(推定)하는데 그것이 개고기가 아닌 다른 알 수 없는 동물(動物)이라는 주장(主張)도 있다. 개고기로 멸시(蔑視)와 차별(差別)을 당(當)한 역사(歷史) 문헌(文獻)도 존재(存在)하는데, 고구려계(高句麗系)
당나라(唐나라)
장수(長壽)
고선지
의 일화에 고선지(高仙芝)를 외국인(外國人) 출신(出身)이라고 차별(差別)했던 당나라(唐나라) 장수(長壽)가 고선지(高仙芝)에게 "개(個) 창자와 똥을 먹는 고려(考慮)놈"(啖狗腸高麗奴, 啖狗屎高麗奴)이라고 욕(辱)했다는 대목이 역사(歷史)에 남아있다.
[14]
고려시대(高麗時代)
에도 슬견설의 기록(記錄)이나 마도(馬島) 3호선(號線)에서 개경(開京)에 공물(貢物)로 올라가던 개고기포(抛) 등(等)의 자료(資料)가 있어 역사(歷史)가 오래되었음을 짐작(斟酌)케 한다.
이 처럼 개고기는 한국사(韓國史)에서 식용(食用)한 흔적(痕跡)이 매우 오래전(前)부터 남아있지만, 개고기에 대(對)한 혐오(嫌惡)를 보이던 사람이 완전히(完全히) 없던 건 아니었다. 고려(高麗) 후기(後期)의 대표적(代表的) 문신(文臣)이자 문인(文人)인
이규보
(1168~1241)가 쓴 수필(隨筆)인 슬견설(蝨犬說)은 ‘이(李)[?]와 개(個)[犬]에 대(對)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생명(生命)은 크나 작으나 다 같은 것이라는 주제(主題)를 담은 수필(隨筆)인데 내용(內容)은 이렇다.
이규보(李奎報)의 한 지인(知人)이 개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걸 보고 그 모습에 충격(衝擊)을 받아 다시는 개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이규보(李奎報)는 이에 대응(對應)해 "나는 어젯밤 부인(夫人)이 내 옷의
이
를 양(量)촛불로 그슬려 잡는 것을 보고 비탄(悲歎)에 빠졌다"며 풍자(諷刺)를 한다.
이 풍자(諷刺)를 들은 지인(知人)은 상심(傷心)하여 이는 보잘 것 없는 미물(微物)이며 개(個)는 슬퍼할만한 이유(理由)가 있는 대물(對物)인데, 왜 이 같은 미물(微物)에 빗대어서 자신(自身)을 놀리느냐는 반응(反應)을 보이고, 그에 맞서 이규보(李奎報)는, 이 같은 미물(微物)부터 사람까지 다들 살고자하는 마음은 같으며, 어찌 큰 것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것들은 그렇지 않겠느냐고 대꾸했다.
이규보(李奎報)는 이에 덧붙여, 물러가서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라는 말과 함께, 달팽이의 뿔을 소의 뿔과 같게 보고 메추리를 봉황(鳳凰)과 같게 보라는 말을 하며, 당신(當身)이 그렇게 생각해낸 후(後)에 당신(當身)과 함께 도(道)를 말하겠다며 쐐기를 박는다.
그런데 이 지인(知人)이 개나 돼지같은 동물(動物)고기를 안 먹겠다고 한 걸 보면
불교(佛敎)
가 국교(國交) 같던 고려시대(高麗時代) 인식(認識)이라는 점(點)도 있다.
[15]
슬견설 본문(本文) 및 해석(解釋).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개고기는 아주 보편적(普遍的)인 육류(肉類) 식재료(食材料)였으며, 양반(兩班)들부터 일반(一般) 평민(平民)들에 이르기까지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심지어(甚至於) 왕실(王室) 궁중(宮中) 음식(飮食)으로도 개고기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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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시대(時代)의
권신(權臣)
김안로
는 개고기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에게 개고기를 바쳐 출세(出世)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정약전
이 유배(流配)되어 있던
흑산도(黑山島)
에는 개는 커녕 변변한 포유동물(哺乳動物)이 없어 정약전(丁若銓)은 고기 금단(禁斷) 증상(症狀)(?)으로 고통(苦痛)을 겪었다고 한다.
[16]
오죽하면 그의 명저(名著)
자산어보(玆山魚譜)
에서 바닷새들의 고기 맛까지 언급(言及)되었다. 물론(勿論) 정약용(丁若鏞)은 고기를 먹고 싶다는 형(兄)의 한탄(恨歎)에
쇠고기나 돼지고기가 없으면 개고기라도 드시라는
편지(便紙)를 본문(本文)처럼 보냈지만.
한국(韓國) 가톨릭
교회(敎會) 초기(初期) 박해(迫害) 시절(時節) 박해(迫害)를 피(避)해 산(山) 속으로 도망(逃亡)쳤던 신자(信者)들이 많이 먹었다고 전(傳)해진다.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해야 하는 처지(處地)에 덩치가 큰
소
나
돼지
같은 가축(家畜)은 끌고 갈 수가 없었던 것. 그렇게 산(山) 속에서 살다가 먹을 게 정(鄭) 없어지면 키우던 개를 잡아먹었던 것. 또한 조선(朝鮮) 후기(後期) 밀입국(密入國)하여 포교(布敎)하던 서양(西洋) 신부(新婦)들은 육류(肉類)를 즐겨 하는지라 한식(寒食)에 적응(適應)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때 신자(信者)들이 쇠고기로 속여서 준 것이 개고기라고 한다. 신학생(神學生)들의 이야기로는 식단(食單)에 개고기가 올라오는 경우(境遇)도 있으며 박해(迫害) 초기(初期)의 어려움을 기억(記憶)하는 의미(意味)라고 한다. 그래서 평소(平素) 안 먹던 사람도 신학생(神學生) 시절(時節)부터 접(接)하게 된다.
지리적(地理的) 인연(因緣)도 있다. 조선(朝鮮)에서 개장국(개醬국)을 최초(最初)로 장(章)에서 판 것이 1770년(年) 충남(忠南)
서천군(舒川郡)
판교면의 백중장(百中場)이다. 음력(陰曆)
7월(月) 15일(日)
백중(百中)에 열린다고 백중장(百中場)인데 벼농사(벼農事)가 거진 끝난 주변(周邊)의 머슴들이 많이 몰려왔다고. 공교(工巧)롭게도 30여년(餘年) 뒤부터 판교면 금덕리 산막(山幕)굴 '띠안말', '작은재' 등(等)에 가톨릭 은거(隱居) 공동체(共同體)가 형성(形成)되기 시작(始作)했다. 아직도 한국(韓國) 가톨릭 신학교(神學校)에서는 시험기간(試驗期間)이 되면 신학생(神學生)들의 기(氣)를 보(補)하기 위해 개장(開場)을 먹이는 전통(傳統)이 남아 있다.
서양(西洋)에 조선(朝鮮)의 개고기가 알려지게 된 계기(契機)도 가톨릭교회다.
프랑스인(人)
가톨릭
선교사(宣敎師)
클로드샤를 달레(Dallet, Claude Charles, 1829년(年) ~ 1878년(年))는 『조선(朝鮮) 천주교회사(天主敎會史)』에서 “돼지와 개가 엄청나게 많으나, 개는 지나치게 겁(怯)이 많으므로 푸주의 고기로밖에 거의 쓰이지 않는다. 개고기는 맛이 퍽 좋다고 한다. 그야 어쨌든 조선(朝鮮)에서는 가장 훌륭한 음식(飮食)의 하나다.”라고 남기기도 했다. 실제로(實際로) 개고기는 은거(隱居) 공동체(共同體)에서 구(求)할 수 있는 가장 귀(貴)한 식재료(食材料)였을 가능성(可能性)이 높으나, 달레 신부(新婦)가 직접(直接) 먹지는 않은 듯.(달레 신부(新婦)는 조선(朝鮮)에서 포교(布敎)하다가
조선(朝鮮)
을 떠나
하노이
에서 선종(腺腫).)
이처럼 여러 문헌자료(文獻資料) 및 증거(證據) 물품(物品)이 나온 것을 보면 오래 전(前)부터 평시(平時)에도 계층(階層)을 가리지 않고 먹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심지어(甚至於)는 왕실(王室) 의례(儀禮)에도 개고기를 쓴 것을 볼 수 있다. 일부(一部)에서 주장(主張)하는 '개고기는 전시(展示)에나 먹었던 비상식량(非常食糧)' 등(等)의 허위(虛僞) 정보(情報)는 그동안 수없이(數없이) 연구(硏究)되어 온 자료(資料)에서 이미 논파(論破)된 지 오래이다. 물론(勿論) 어려울 때 쉽게 구(求)할 수 있는 고기였기 때문에 개화기(開化期) 이전(以前)에도 '식량(食糧)이 부족(不足)해지면 마을의 똥개가 가장 먼저 사라진다'는 소문(所聞)도 있었다.
이렇게 개고기를 많이 먹던 한국(韓國)이였으나, 1970년대(年代)와 80년대(年代)를 걸쳐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의 수요(需要)가 개고기를 추월(追越)했고, 1980년대(年代)에 올림픽을 앞두고 개고기 섭취문화(攝取文化)가 서양권(西洋圈) 언론(言論)들의 이목(耳目)을 끌자, 이들 외국인(外國人)들의 이목(耳目)이 집중(集中)되는것을 피(避)하기 위해 개고기 섭취(攝取)를 전면적(全面的)으로 규제(規制)하면서 개장국(개醬국)집들도 골목 안쪽으로 강제(强制)로 이전(移轉)당하고, 명칭(名稱)도 개장국(개醬국), 구탕(舊湯)에서 보신탕(補身湯), 건강탕, 영양탕(營養湯)으로 바꿔야했으며, 이때부터 개고기 섭취(攝取)는 사양길(斜陽길)에 접어들기 시작(始作)했다.
다만 개고기 섭취(攝取)가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입맛이 하루아침에 바뀌는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당시(當時)의 중년층(中年層) 이상(以上)은 복날(伏날)에 개고기를 먹는것이 익숙하여 1990년대(年代)까지도 복날(伏날)이 되면 개장국(개醬국) 집을 가는 경우(境遇)가 많았고, 오히려 2000년대(年代) 인터넷 시대(時代)에 접어들자 개고기 섭취(攝取)에 대(對)한 옹호론(擁護論)이 대세(大勢)가 되었기도 했다. 이는 한국(韓國)의 개고기 섭취(攝取)에 대(對)해 비난(非難)하던
브리짓 바르도
의 정치적(政治的) 행적(行跡)이나 개고기를 가지고 몰지각(沒知覺)한 외국인(外國人)들이 한국인(韓國人)들을 상대(相對)로 인종차별(人種差別)을 하는 일들이 속속히(速速히) 알려지면서 이에 대(對)한 반발(反撥)이 크게 일었기 때문이었고, 막상 한국(韓國)의 개고기 섭취(攝取)를 그리 욕(辱)하는 외국인(外國人)들이 국적(國籍)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도 푸아그라를 비롯한 요리(料理)를 먹는 경우(境遇)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푸아그라 먹는 프랑스가 우리나라의 개고기를 욕(辱)할 자격(資格)은 없다', '개고기는 혐오식품(嫌惡食品)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문화(傳統文化)다' 라는 의견(意見)이 대세(大勢)였다. 그렇다고 특별히(特別히) 개고기 못 먹는 사람에게 강요(强要)하는 분위기(雰圍氣)는 아니었다. 개고기 반대론자(反對論者)들 앞에서 개고기 맛있다고 어그로를 끄는 2010년대(年代) 후반(後半)의 분위기(雰圍氣)에 비하면... 오죽하면
개고기 전문(專門) 인터넷 쇼핑몰
까지 생겼을 정도(程度).
[17]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반발감(反撥感)에 의(依)한것이었고, 개고기를 취급(取扱)하는 업자(業者)들이 이 기회(機會)를 살라기(氣)는 커녕 허송세월(虛送歲月)이나 보내면서 개고기 섭취량(攝取量)은 지속적(持續的)으로 줄어들었다. 후술(後述)하겠지만 2024년(年)에는 아예 법(法)으로 금지(禁止)됨으로서 개고기 문화(文化)가 끝났다.
현재(現在) 한국(韓國)에서는 개고기에 대(對)하여 직접적(直接的)으로 규정(規定)한 법률(法律)은 없다. '축산법(畜産法)' 제(第)2조(條)의
가축(家畜)
에 개(個)가 포함(包含)되지만 위생(衛生)과 관련(關聯)된 규율(規律)을 하고 있는 '축산물위생관리법(畜産物衛生管理法)'의 적용(適用) 대상(對象)에는 빠져 있어 해당(該當) 법(法)에 의(依)한 위생(衛生) 관리(管理)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축산물위생관리법(畜産物衛生管理法)의 적용(適用)을 받는 동물(動物)인 소 · 말 · 양(兩)(염소 및 산양포함(山羊包含)) · 돼지(사육(飼育)하는 멧돼지 포함(包含)) · 사슴 · 당나귀(唐나귀) · 토끼 · 닭 · 오리 · 칠면조(七面鳥) · 거위 · 메추리 · 꿩을 제외(除外)한 육류(肉類)는 식품위생법(食品衛生法)의 적용(適用)을 받는다. 그리고 개고기는 축산물위생관리법(畜産物衛生管理法)의 적용(適用)을 받지 않으므로, 개고기 판매식당(販賣食堂)은 모두 식품위생법(食品衛生法)에 의(依)한 일반음식점(一般飮食店)으로 허가(許可) 및 위생(衛生) 점검(點檢)을 받아야 한다. 이건 판매점(販賣店)이 위생(衛生) 검사(檢査)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개의 사육(飼育) 및 도축(屠畜) 과정(過程)에서의 위생(衛生) 검사(檢査)하고는 상관(相關)없다. 그 외(外) 1984년(年) 서울시(서울市) 고시(告示)로 개고기 판매(販賣) 금지(禁止)가 있으나(서울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대비(對備) 시책(施策)이었다. 당시(當時) 가게까지 뒷골목으로 쫓아내고 간판(看板)을 바꿔 달게 했다.), 동물보호단체(動物保護團體)의 관련(關聯) 문의(問議)에 대(對)해 서울시(서울市)는 '해당(該當) 고시(考試)는 사문화(死文化)되었다'고 공개적(公開的)으로 발표(發表)한 바 있으며, 애초(애初) 법률(法律)이 아닌 서울시(市) 내부(內部) 고시(考試)였다.
이처럼 개고기는 축산물위생관리법(畜産物衛生管理法)의 체계적(體系的)인 관리(管理)를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개고기는 사육(飼育), 도축(屠畜), 유통(流通)과 관련(關聯)하여 당국(當局)의 정식(正式) 통계(統計)도 거의 이뤄지지 않나, 연간(年間) 도축(屠畜) 숫자(數字)도 추정치(推定値)가 오락가락하는데, 대략(大略) 50만(萬)~250만(萬) 마리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그나마 찾을 수 있는 정식(正式) 자료(資料)는 1998년(年)
식품의약품안전청(食品醫藥品安全廳) 국감자료(國監資料)
다. 1998년(年) 당시(當時) 국내(國內)에서 식용견(食用犬)을 취급(取扱)하는 업소(業所)는 모두 6,484개소(個所)로 하루평균(平均) 25t, 연간(年間)으로는 개고기 8,428t이 판매(販賣)되며,개소주로는 연간(年間) 93,600t이 소비(消費)되고 있어 전체(全體) 개고기 소비량(消費量)은 총합(總合) 100,000t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推定)한다. 사실상(事實上) 유일(唯一)하다시피한 공식(公式) 자료(資料)로 알 수 있듯이 고기로는 8,428톤이 소비(消費)되며,
개소주(개燒酒)
로 소비(消費)되는 양(量)이 9만(萬) 3,600여(餘)톤으로 압도적(壓倒的)으로 많다.
[18]
한편(한便) 개 사육(飼育) 두수(頭數)는 축산업자용(畜産業者用)으로 팔리는 개 사료(飼料) 소비량(消費量)으로 추정(推定)할수 있을 뿐이었다.
2022년(年)
농림축산식품부(農林畜産食品部)
는 '식용(食用) 개 사육(飼育)·유통(流通) 실태조사(實態調査)'를
시행(施行)
하였다. 2022년(年) 2월(月) 기준(基準) 식용(食用) 목적(目的)으로 개를 사육(飼育)하는 농장(農場)은 1,156개(個)로 길러지고 있는 개는 총(總) 52만(萬) 1,121마리였고, 농가당(農家當) 평균(平均) 사육(飼育) 마릿수(마릿數)는 450마리 정도(程度)였다. 또한 식용(食用)으로 연간(年間) 개(個) 38만(萬) 8천여(千餘)마리
[19]
가 소비(消費)되는 것으로 조사(調査)됐으며 보신탕(補身湯)·영양탕(營養湯) 등(等) 개고기를 파는 음식점(飮食店)은 전국(全國)에 모두 1,666곳으로 집계(集計)됐다. 24년(年)만의 공식(公式) 조사(調査)에서
개소주(개燒酒)
는 통계(統計)에 잡히지 않을 정도(程度)로 감소(減少)했는데
온라인 판매시도(販賣試圖)
에 비난(非難) 여론(輿論)으로 판매중단(販賣中斷)하고 해당(該當) 업종(業種)의 온라인 판매(販賣)는 흑(黑)염소진액(津液), 당(黨)팽이진액(津液), 닭발진액등(津液等)의 대체상품(代替商品) 판매(販賣)로 전향(轉向)했으며 오프라인 상(上)에서도 지자체(地自體)에서
폐업(廢業)
을 유도(誘導)하는 상황(狀況)이다. 고기 소비(消費)쪽도 소비(消費)와 판매업소(販賣業所)가 감소(減少)한다는 기사(記事)가 나오는 상황(狀況)이다.
한국(韓國)의 경우(境遇) 90년대(年代) 이후(以後) 애완견(愛玩犬) 문화(文化)가 대중적(大衆的)으로 확산(擴散)되면서 개고기에 대(對)한 사회적(社會的) 논란(論難)이 계속(繼續)되고 있다. 즉(卽) 한국(韓國)에서 개고기 논쟁(論爭)이 격렬(激烈)한 이유(理由)는 먹는 문화(文化)와 애완견(愛玩犬)으로서의 문화(文化)가 동시대(同時代)에 충돌(衝突)하기 때문이다.
[20]
사실(事實) 애견가(愛犬家)들 중(中)에서도 개고기 문화(文化)를 반대(反對)하지 않는 사람은 많으며
[21]
오히려 즐기는 사람들도 꽤 있다.
[22]
2014년(年)에는 국제동물보호협회(國際動物保護協會) 관계자(關係者)가 방한(訪韓)하였는데, 개고기 문화(文化)를 '개선(改善)'한다는 표현(表現)을 사용(使用)하였다. 또 데이브 닐 아시아동물보호협회(動物保護協會) 동물복지담당(動物福祉擔當) 이사(理事)는 "개를 먹는 문화(文化)는 국제적(國際的)인 이슈가 될 것이며, 한국(韓國)이 상당(相當)한 압력(壓力)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발언(發言)하며, 그들의 문화적(文化的) 가치(價値) 기준(基準)을 우리에게 강요(强要)하는, 사실상(事實上) 협박(脅迫)이나 다름없는 말을 내뱉어서 비판(批判)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발언(發言)은 같은 시기(時期)
세월호(歲月號) 참사(慘事)
의 여파(餘波)로 묻혀서 딱히 큰 이슈는 되지 못했다.
#
그 외(外)에 한민족(韓民族)의 갈래인 중국(中國)의
조선족(朝鮮族)
이나
중앙아시아(中央아시아)
의
고려인(高麗人)
들도 개고기를 간간히 먹는다. 조선족(朝鮮族)이야 주류민족인(主流民族人)
한족
도 개고기를 먹으니 특별할 건 없지만, 고려인(高麗人)들이 사는 중앙아시아(中央아시아)와 러시아는 현지(現地) 민족(民族)들은 기본적(基本的)으로 개고기를 안 먹는데
[23]
고려인(高麗人)들만이 그게 조상(祖上)들이 한반도(韓半島)에 살 때부터 이어온 전통(傳統)이라 개고기 요리(料理)가 남아있다.
#
고기용(龍) 육견(陸犬)으로는 전통적(傳統的)으로
잡종견(雜種犬)
, 특히(特히)
똥개
의 수요(需要)가 가장 높다.
발바리
같은 소형(小型)
애완견(愛玩犬)
은(銀) 잘 취급(取扱)하지 않았다. 효율성(效率性)과 맛의 문제(問題)로, 커다란 똥개를 놔두고 살이 별로(別로) 없는 애완견(愛玩犬)을 택(擇)할 이유(理由)가 없다. 발바리나 애완견(愛玩犬)이 개고기용(用)으로 거래(去來)된 건 최근(最近)의 일이다. 그러나 개고기의 수요(需要)가 높아지자 대형(大型)인
도사견(犬)
을 섞은 잡종(雜種) 소위(所謂) '식육견(食肉犬)' 품종(品種)이 만들어져 보급(普及)되었고 이들이 농장(農場) 육견(陸犬)의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하게 된다. 대형견인(大型牽引) 도사(道士)와 교배(交配)시키면 껍질이 두꺼워 근수(斤數)가 많이 나가 고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개(個)의 털 색(色)에 따라서도 선호도(選好度)가 다르다. 일반적(一般的)으로
황구(黃狗)
를 으뜸으로 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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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이 흑구(黑口), 가장 질(質)이 낮은 것은 백구(白狗)다. 사료(飼料)를 먹여 키운 것보다 음식물(飮食物) 찌꺼기(짬밥)나 똥을 먹여 키운 것의 고기맛이 좋다고 알려졌으며, 이런 믿음은 식육견(食肉犬) 농장(農場)의 비위생적(非衛生的)인 사육환경(飼育環境)을 만들게 된다.
2024년(年) 1월(月) 9일(日), 국회(國會)에서 식용(食用) 목적(目的)으로 개를 사육(飼育)하고 도살(屠殺)하는 것을 금지(禁止)하는 법안(法案)이 국회(國會) 본회의(本會議)를 통과(通過)하면서 위헌(違憲) 판결(判決) 등(等) 다른 변수(變數)가 생기지 않는 한(限) 한국(韓國)에서 개고기의 역사(歷史)는 공식적(公式的)으론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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