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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光復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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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光復節)
광복절
장소(場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大韓民國)
형태(形態) 공휴일(公休日)
중요도(重要度)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종료(終了)
시작(始作) 1945년(年)
날짜 8월(月) 15일(日)
빈도(頻度) 매년(每年)
축제(祝祭) 경축(慶祝) 행사(行事)
행사(行事) 일제(一齊) 로부터의 해방(解放) 및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 수립(樹立)을 기념(記念)
관련(關聯) 대일(對日) 전승(戰勝) 기념일(記念日) , 3·1절(節) ,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樹立) 기념일(記念日)

광복절(光復節) (光復節, 영어(英語) : National Liberation Day of Korea )은 한반도(韓半島) 일본(日本) 제국(帝國) 으로부터 해방(解放)된 것을 기념(記念)하는 날로, 대한민국(大韓民國) 에서는 이를 국경일(國慶日) 공휴일(公休日) 로 법제화(法制化)함으로써 매년(每年) 양력(陽曆) 8월(月) 15일(日) 에 기념(記念)하고 있다. 해방년도(解放年度)인 1945년(年) 을 광복절(光復節) 원년(元年)으로 계산(計算)한다. 1949년(年) 10월(月) 1일(日) 〈국경일(國慶日)에 대(對)한 법률(法律)〉에 따라 국경일(國慶日) 공휴일(公休日) 로 지정(指定)되어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는 전국적(全國的)으로 각종(各種) 경축(慶祝) 행사(行事)가 거행(擧行)되며, 공공기관(公共機關), 가정(家庭)에서는 태극기(太極旗) 를 달아 기념(記念)하기도 한다. [1]

전개(展開) [ 편집(編輯) ]

8월(月) 15일(日) [ 편집(編輯) ]

해방(解放) 직후(直後) 미국(美國) 소련(蘇聯) 을 통해 전개(展開)된 군정(軍政) 에 따라 구(舊) 대한제국(大韓帝國) 지역(地域)은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체제(體制)의 대한민국(大韓民國) 과 공산주의(共産主義) 체제(體制)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으로 분단(分斷) 되었으며, 이후(以後) 양측(兩側) 모두 이 날을 기념(記念)하지만 구체적(具體的)인 의미(意味)가 크게 다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에서는 1945년(年) 8월(月) 15일(日) 에 해방(解放)되고 1948년(年) 8월(月) 15일(日)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를 수립(樹立)한 과정(過程)을 아울러 광복(光復) 으로 명명하여 기념(記念)하고 있다. 한편(한便),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는 조국(祖國) 해방(解放)의 날 (祖國 解放-)이라 한다.

전세가(傳貰價) 연합군(聯合軍) 측(側)에 유리하게 되어, 1943년(年) 11월(月) 말(末)에 미국(美國) · 영국(英國) · 중화민국(中華民國) 3국(國)은 소위(所謂) 카이로 선언(宣言) 을 발표(發表)했다. 이어 1945년(年) 5월(月) 나치 독일(獨逸) 이 항복(降伏)하였고, 8월(月) 8일(日)에는 미국(美國) 영국(英國) , 소비에트 연방(聯邦) 이 모여 포츠담 선언(宣言) 을 발표(發表)했다.

1945년(年) 8월(月) 15일(日) 일본(日本)은 연합국(聯合國)에 무조건(無條件) 항복(降伏)을 하였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청진시(淸津市) 에서는 아직까지도 소련(蘇聯) 일본(日本) 이 서로 치열(熾烈)한 전투(戰鬪)를 계속(繼續) 하고 있었다. 한민족(韓民族) 카이로 선언(宣言) 과 그것이 다시 확인(確認)된 포츠담 선언(宣言) 으로, 그리고 8월(月) 16일(日)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 에서 정치범(政治犯)과 경제범(經濟犯)을 석방(釋放)되어 여운형 이 연설(演說)한 해방집회(解放集會)를 하였으며, 한민족(韓民族)의 오랜 투쟁(鬪爭)을 통한 민족(民族)의 극복(克服)으로 일제(日帝)의 학정(虐政)으로부터 8월(月) 17일(日)까지 해방(解放)을 맞이하였으나, 경술국치(庚戌國恥) 를 재확인(再確認)하여 결국(結局) 일본(日本) 과 단절(斷絶)되었다.


서울 필동에 있는 한국(韓國)의 집. 이곳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정무총감(政務總監) 관저(官邸)로 1945년(年) 8월(月) 15일(日), 아침에 여운형(呂運亨)이 이곳에서 총독부(總督府)로부터 치안권(治安權)과 행정권(行政權)을 이양(移讓)받았다.

그날 아침 여운형 엔도 류사쿠 와 교섭(交涉)을 벌여 5개(個) 조항(條項)을 요구(要求)했고 이를 관철(貫徹)하였다.

  1. 전국적(全國的)으로 경제범(經濟犯)을 즉시(卽時) 석방(釋放)할 것.
  2. 서울의 3개월분(個月分) 식량(食糧)을 확보(確保)할 것.
  3. 치안(治安) 유지(維持)와 건국(建國) 운동(運動)을 위한 정치(政治) 운동(運動)에 대(對)하여 절대로(絶對로) 간섭(干涉)하지 말 것.
  4. 학생(學生)과 청년(靑年)을 조직(組織), 훈련(訓鍊)하는 데 대(對)하여 간섭(干涉)하지 말 것.
  5. 노동자(勞動者)와 농민(農民)을 건국(建國) 사업(事業)에 동원(動員)하는 데 대(對)하여 절대로(絶對로) 간섭(干涉)하지 말 것.

그날 정오(正午)에 히로히토 천황(天皇) 항복(降伏) 방송(放送) 이 라디오로 중계(中繼)되었다.

1945년(年) 9월(月) 9일(日) 서울의 옛 일본(日本) 정부(政府) 청사(廳舍)에서 미군(美軍)들이 일장기(日章旗)를 내리고 있었다.

물론(勿論) 그날 중대(重大) 발표(發表)가 있으니 조선인(朝鮮人)들은 경청(傾聽)하라는 벽보(壁報)가 나붙었으나 당시(當時)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朝鮮人)들은 많지 않았고, 히로히토 천황(天皇)의 항복(降伏) 발표(發表) 방송(放送)은 잡음(雜音)이 심(甚)했고 어려운 한자(漢字)가 섞여 있던 데다가, 결정적(決定的)으로 이게 그 당시(當時) 쓰던 일본어(日本語) 도 아니고 일본(日本) 황족어(皇族語)로 나왔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少數)였다. 그러나 라디오로 방송(放送)된 문장(文章)과 개요(槪要)가 당일(當日)의 신문(新聞)에 기재(記載)되고 있었으므로, 일본(日本) 국민(國民)의 거의 대부분(大部分)이 패전(敗戰)을 이해(理解)했으며 한민족(韓民族) 은 거의 조선(朝鮮)(대한(大寒))독립만세(獨立萬歲) 시위(示威)가 없었으며, 여운형 이 조국의(曺國依)해방집회를 연설(演說)했다.

그 사이에 소련(蘇聯) 일본(日本) 제국(帝國) 함경북도(咸鏡北道) 청진시(淸津市) 에서 전투(戰鬪)를 하고 있는 중(中)이었다. 하지만, 얘기상(上) 8월(月) 15일(日) 여운형 문제(問題)안 이 서로 전화(電話)하고 대화(對話)하면서 그 과정(過程)에 오후(午後) 4시(時) 30분(分)쯤에 조선 조선(朝鮮) 에서 최초(最初)의 안재홍(安在鴻)과 학생(學生)들이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불렀다는 말도 있다 [2] .

8월(月) 16일(日) [ 편집(編輯) ]

다음날 아침이 되자 비로소 조항(條項) 내용(內容)대로 형무소(刑務所) 에 있었던 정치범(政治犯)과 경제범(經濟犯)이 석방(釋放)되기 시작(始作)했다. 그때야 경성(京城) (서울) 시민(市民)들은 어제 방송(放送)이 히로히토 천황(天皇)의 항복(降伏) 방송(放送)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解放)을 환호(歡呼)하기 시작(始作)했다. 한편(한便), 함경북도(咸鏡北道) 청진시(淸津市) 에는 여전히(如前히) 소련(蘇聯) 일본(日本) 제국(帝國) 과의 전투(戰鬪)는 계속(繼續)되었고, 사실상(事實上) 초저녁(初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청진(淸津) 전투(戰鬪) 가 끝났다. 그리고, 그대로 해방(解放)된 시민(市民)들은 계동(季冬)에 있는 여운형 의 집에 몰려가 연설(演說)을 해달라고 요청(要請)하였고, 여운형(呂運亨)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中學校) 운동장(運動場)으로 가서 해방(解放)을 맞이하는 연설(演說)을 한다. [3]

조선(朝鮮) 민족(民族)의 해방(解放)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日)에 원등(元等)( 엔도 류사쿠 )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過去) 두 민족(民族)이 합(合)하였던 것이 조선(朝鮮)에게 잘못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誤解)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不祥事)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民衆)을 지도(指導)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다섯 가지 조건(條件)을 요구(要求)하였다.

우리 민족해방(民族解放)의 제일보(第一步)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合理的)· 이상적(理想的) 낙원(樂園)을 건설(建設)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個人的) 영웅주의(英雄主義)는 단연(斷然)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集團的)으로 일사불란(一絲不亂)의 단결(團結)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聯合軍) 군대(軍隊)가 입성(入城)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民族)의 모양(模樣)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態度)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世界) 각국(各國)은 우리들을 주시(注視)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白旗)를 든 일본(日本)의 심흉(心胸)을 잘 살피자. 물론(勿論) 우리는 통쾌(痛快)한 마음을 금(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對)하여 우리들의 아량(雅量)을 보이자.
세계문화(世界文化) 건설(建設)에 백두산(白頭山) 밑에서 자라난 우리 민족(民族)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專門)·대학(大學)·중학생(中學生)의 경비대원(警備隊員)이 배치(配置)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指導者)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協力)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45년(年) 8월(月) 16일(日) , 경성(京城) 계동(季冬) 휘문고보의 군중(群衆) 속 여운형 . 여운형(呂運亨)은 이곳에서 연설(演說)하였다.

그런데 연설(演說) 도중(途中)에 ' 소련(蘇聯) 군(軍)이 서울역(서울驛) 에 온다'는 소문(所聞)이 나돌자 수많은 시민(市民)이 연설(演說) 도중(途中) 청중(聽衆)들 사이에서 고함(高喊)을 외쳤다. 청중(聽衆)의 일각(一角)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운형 은 연설(演說)을 이어나갔으나 소련군(蘇聯軍)의 경성(京城) 입성(入城) 소문(所聞)은 순식간(瞬息間)에 운동장(運動場)을 한 바퀴 돌았다. 이에 흥분(興奮)한 군중(群衆)의 일부(一部)가 아우성치면서 교문(校門)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始作)했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 의 이날 연설(演說)은 중단(中斷)되고 말았다. 그래서 기록(記錄)으로 전(傳)하는 연설문(演說文)도 반(半) 토막뿐이다. 연설(演說)이 중단(中斷)된 원인(原因)은 흔히 소련군(蘇聯軍)의 경성(京城) 입성(入城) 소문(所聞) 때문이었던 것으로만 알려졌으나 실상(實狀)은 조선(朝鮮)사람들의 습격(襲擊)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료(官僚)들이 전향자(轉向者)들을 동원(動員)해서 벌였던 공작(工作)이었다. [4] [5]

여운형 은 기존(旣存)에 자신(自身)이 1944년(年) 8월(月)에 결성(結成)하여 운영(運營)했던 비밀결사(祕密結社) 조직(組織)인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 을 기본(基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건준(建準))를 조직(組織)하였고 YMCA 건물(建物)에서 건준(建準) 강령(綱領)을 발표(發表)하였다.

  1. 우리는 완전(完全)한 독립국(獨立國)의 건설(建設)을 기함(旗艦).
  2. 우리는 전(全) 민족(民族)의 정치적(政治的), 경제적(經濟的), 사회적(社會的) 기본(基本) 요구(要求)를 실현(實現)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 정권(政權)의 수립(樹立)을 기함(旗艦),
  3. 우리는 일시적(一時的) 과도기(過渡期)에 있어서 국내(國內) 질서(秩序)를 자주적(自主的)으로 유지(維持)하며 대중생활(大衆生活)의 확보(確保)를 기함(旗艦).

8월(月) 17일(日) [ 편집(編輯) ]

구(區) 경성역 앞에서 한민족(韓民族) 이 제작(製作)한 태극(太極) 모양(模樣)을 바로 세워 3,5,4,6로 괘(卦)를 구성(構成)한 태극기(太極旗) 를 만든 이후(以後) 태극기(太極旗) 와 함께 들고 해방(解放)을 맞이하였으며, 일제(一齊) 의 공공기관(公共機關) 건물의유리창(建物醫琉璃窓)에 돌을 던져 파손(破損)하며 독립만세(獨立萬歲) 시위(示威)를 완수(完遂)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當時) 상황(狀況) [ 편집(編輯) ]

1945년(年) 8월(月) 25일(日) 남산(南山) 태극기(太極旗) .

해방소식(解放消息)을 듣자 반일인사(反日人士)들을 옥(獄)에 가두고 고문(拷問)했던 친일경찰(親日警察)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 [6] 일본군(日本軍)들은 미군(美軍)에 의(依)해 무장해제되는 9월(月) 9일(日) 까지 시내(市內)를 돌아다니며 해방(解放)을 환호(歡呼)하는 군중(群衆)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指示)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조선인(朝鮮人)들이 폭동(暴動)을 일으킬 것을 염려(念慮)해 비행기(飛行機)로 경거망동(輕擧妄動)을 삼가라는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명의(名醫)의 전단(傳單)을 뿌렸다. [7]

한편(한便)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는 8월(月) 말(末)까지 전국(全國)에 145개(個) 지부(支部)를 두고 일본인(日本人) 자본가(資本家)와 지주(地主)로부터 재산(財産)과 토지(土地)를 접수(接受)하여 조선인(朝鮮人)들에게 배분(配分)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경찰(警察)들이 도망(逃亡)간 빈자리를 대신(代身)하여 전국(全國)의 뜻있는 청년(靑年)들을 모집(募集)해 치안대(治安隊) 를 결성(結成)해 치안(治安)을 유지(維持)하였다. 여기서 지방(地方)의 경우(境遇)는 사회주의(社會主義), 민족주의(民族主義) 등(等) 이념(理念)을 떠나서 지방(地方)의 유력(有力)한 유지(維持)들과 지주(地主)들 역시(亦是) 적극적(積極的)으로 나서서 건준(建準)에 활동(活動)하기도 했다.

광복(光復) 이후(以後) [ 편집(編輯) ]

임시정부(臨時政府) 인사(人士)들의 늦어진 귀국(歸國) [ 편집(編輯) ]

그러나 가혹(苛酷)한 압제(壓制)로부터의 돌연(突然)한 광복(光復)은 과격(過激)한 흥분상태(興奮狀態)를 가져왔고 수많은 정당(政黨)과 사회단체(社會團體)가 통일적(統一的) 핵심체(核心體) 없이 난립(亂立)하게 되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가 곧 귀국(歸國)하여 정권(政權)을 담당(擔當)할 것을 기대(期待)하는 송진우 계통(系統)과 연합군(聯合軍)이 진주(進駐)할 때까지 민족대표기관(民族代表機關)을 설치(設置)할 필요(必要)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운형 계통(系統)과의 행동(行動)이 분열(分裂)된 것이다. 이리하여 여운형 계통(系統)에서는 안재홍(安在烘) 을 비롯한 일부(一部)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와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로서 '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를 조직(組織)했으며, 이때 잔류(殘留)한 좌익세력(左翼勢力)은 소위(所謂)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이라는 정권조직(政權組織)을 급조(急造)하여 한민당 과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의 지지(支持)를 받던 충칭의 임시정부(臨時政府)와 대립(對立)할 기세(氣勢)를 취(醉)했다.

한편(한便), 해외(海外)에서 독립운동(獨立運動) 활동한(活動限)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은 미군첩보부대(美軍諜報部隊) OSS와 함께 국내(國內) 진입작전(進入作戰)을 추진(推進)하던 이범석 , 장준하 , 김준엽 , 노능서(老能書) 등(等) 4명(名)의 광복군(光復軍) 요원(要員)이 1945년(年) 8월(月) 18일(日) 낮 여의도비행장(汝矣島飛行場)에 착륙(着陸)하면서 해방(解放)된 조국(祖國) 땅을 밟았다. 그러나 무장(武裝)한 채 여의도(汝矣島)에 착륙(着陸)한 이들은 미군(美軍)이 "휴전조약(休戰條約)이 체결(締結)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일본군(日本軍)의 협박(脅迫)에 굴복(屈服)하는 바람에 다음날 오후(午後) 다시 중국(中國)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비롯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는 1945년(年) 11월(月)이 되어서야 귀국(歸國)할 수 있었다. [8]

민족주의(民族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에 대립(對立) [ 편집(編輯) ]

국내(國內)에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와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의 대립(對立)이 첨예(尖銳)해갈 때에 미(美)·소(蘇) 양군(兩軍)이 각기(各其) 북위(北緯) 38도(度) 선(線)을 경계(境界)로 삼아 남북(南北)으로 갈라서 1945년(年) 9월(月) 한반도(韓半島)에 진출(進出)했다. 남북한(南北韓)을 분할(分割)한 미(美)·소(蘇) 양군(兩軍)은 점령(占領) 지역(地域)에 군정(軍政)을 실시(實施)하였다. 소련(蘇聯)은 처음 조만식 을 내세워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를 조직(組織)게 하고 군정(軍政) 하의(下衣) 행정(行政)을 담당(擔當)케 하였으나, 이어 김일성(金日成) (金日成)을 위원장(委員長)으로 하는 소위(所謂) '북조선(北朝鮮) 임시인민위원회(臨時人民委員會)'를 조직(組織), 공산주의(共産主義) 정치(政治) 체제(體制)를 갖추어 나갔다. 한편(한便) 남한(南韓)에 진주(進駐)한 미군(美軍)도 군정청(軍政廳)을 설치(設置)하고 남한(南韓)의 모든 행정(行政)을 담당(擔當)하였다. 미(美) 군정(軍政)은 정치활동(政治活動)의 자유(自由)를 허용(許容)하여 모든 한국인(韓國人) 정당(政黨)에 대(對)한 절대(絶對) 중립(中立) 태도(態度)를 언명(言明)했다. 그리하여 송진우(宋鎭禹) 등(等)은 ' 한국민주당 ', 안재홍(安在烘) 등(等)의 ' 국민당(國民黨) ', 여운형(呂運亨) 등(等)의 ' 조선인민당 ', 박헌영 (朴憲永) 등(等)의 '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을 위시(爲始)한 50여(餘) 개(個)의 정당(政黨)이 난립(亂立)하였다. 미국(美國) 본토(本土)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던 초대(招待)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통령(大統領)인 이승만(李承晩) (李承晩)이(李) 귀국(歸國)하고, 중국(中國)과 만주(滿洲) 등지(等地)에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던 김구(金九) 를 비롯한 임정(臨政) 요인(要因)들도 귀국(歸國)하였으나 혼란(混亂)은 여전(如前)하였다. 광복후(光復後) 일본인(日本人) 교수(敎授)와 의사(醫師)가 빠져 나간 공백(空白)은 엄청나게 커서 쉽지 않은 새로운 의학(醫學) 체계(體系) 형성(形成) 작업(作業)을 미군정(美軍政)은 시작(始作)한다. [9] 그래서 미군정(美軍政)은 경성(京城) 제국(帝國) 대학교(大學校) 의학부(醫學部)와 경성(京城) 의학(醫學) 전문학교(專門學校)를 통합(統合)하는 계획(計劃)을 수립(樹立)하고, 통합(統合)과 함께 각각(各各) 서울 대학교(大學校) 의과(醫科) 대학(大學) 제(第)1·2 부속(附屬) 병원(病院)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9]

1949년(年) 5월(月) 24일(日)에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 가 3·1절(節)(3월(月) 1일(日)), 헌법공포기념일(憲法恐怖記念日)(7월(月) 17일(日)), 독립기념일(獨立記念日)(8월(月) 15일(日)), 개천절(開天節)(10월(月) 3일(日))을 4대(代) 국경일(國慶日)로 하는 안건(案件)을 국무회의(國務會議) 에서 의결(議決)하였고, [10] 국회(國會) 법제사법위원회(法制司法委員會) 에서 제정(制定) 과정(過程)을 거치면서 헌법공포일(憲法公布日)을 제헌절(制憲節)로 독립기념일(獨立記念日)을 광복절(光復節)로 수정(修正)하였다. 같은 해 9월(月) 21일(日), 해당(該當) 수정안(修正案)이 제(第)5회(回) 국회(國會) 본회의(本會議)에서 통과(通過)되었으며, 1949년(年) 10월(月) 1일(日)에 〈국경일(國慶日)에 관(關)한 법률(法律)〉이(李) 제정(制定) 및 공포(公布)되었다. [11] 이에 광복절(光復節)은 법률(法律)에 의(依)하여 국경일(國慶日)로 지정(指定)되었다.

같이 보기 [ 편집(編輯) ]

각주(各州) [ 편집(編輯) ]

  1. 일본식(日本式) 용어(用語), 이것만은 고치자 2010/03/29 장애인(障礙人)뉴스
  2. 생생한 증언(證言)과 영상(映像)을 통해 입체적(立體的)으로 재구성(再構成)한 1945년(年) 8월(月) 15일(日) 그날의 기억(記憶) | 광복(光復) 60년(年) 특별기획(特別企劃) (KBS 050809 방송(放送)) 2021.8.9
  3. 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③
  4. 이정식 교수(敎授) (1991년(年) 8월(月)). “8.5 미스터리”. 《신동아(新東亞)》: 430-437.  
  5. 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6. 서중석. 《지배자(支配者)의 나라/민중(民衆)의 나라》. 이들 친일경찰(親日警察) 세력(勢力)들은 1945년(年) 9월(月) 초순(初旬), 미(美) 24군단(軍團)이 한반도(韓半島) 입성(入城)해서 군정(軍政)을 선포(宣布)했을 때, 군정청(軍政廳) 경찰(警察)로 대거(大擧) 채용(採用)된다.  
  7. 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 ④
  8. “환희(歡喜)와 좌절(挫折)이 교차(交叉)한 해방(解放)의 공간(空間)들” . 2010년(年) 8월(月) 25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 2010년(年) 8월(月) 23일(日)에 확인(確認)함 .  
  9. “04권(卷) 근현대(近現代) 과학(科學) 기술(技術)과 삶의 변화(變化) > 제(第)4장(張) 과학(科學) 기술(技術)과 일상(日常) 생활(生活)의 변화(變化) > 4. 우리나라의 의학(醫學) 발전(發展)과 보건(保健) 의료(醫療) 체계(體系) > 광복(光復) 이후(以後) 의학(醫學) 발전(發展)과 현대적(現代的) 의료(醫療) 제도(制度)의 성립(成立) > 의학(醫學) 교육(敎育) 및 연구(硏究) 체계(體系)의 형성(形成)” . 《우리역사(歷史)넷》. 한국문화사(韓國文化史).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 2024년(年) 4월(月) 1일(日)에 확인(確認)함 .  
  10. 〈동아일보〉 1949년(年) 5월(月) 27일(日)
  11. 대한민국(大韓民國) 법률(法律) 제(第)53호(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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