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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後三國) 시대(時代) - 위키백과(百科),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百科事典) 본문(本文)으로 이동(移動)

후삼국(後三國) 시대(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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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後三國)
後三國
국가(國家) 신라(新羅) 태봉(泰封) 후백제(後百濟)
수도 금성(金星) 1. 송악(松嶽)
2. 철원(鐵原)
1. 무진주(武珍州)
2. 완산주(完山州)
군주(君主)
 -건국군주(建國君主)
 -멸망군주(滅亡君主)
56 국왕(國王)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
경순왕
1 국왕(國王)
궁예(弓裔)
궁예(弓裔)
2 국왕(國王)
견훤(甄萱)
신검(身檢)
성립(成立) 기원전(紀元前) 57년(年)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
추대(推戴))
898년(年)
(궁예(弓裔)
거병(擧兵))
892년(年)
(견훤(甄萱)
반란(叛亂))
멸망(滅亡) 935년(年)
( 경순왕 고려(高麗)
투항(投降))
918년(年)
( 왕건(王建) 궁예(弓裔)
축출(逐出))
936년(年)
(신검(身檢)
항복(降伏))
915년(年) 의 판도(版圖).

후삼국(後三國) 시대(時代) (後三國時代, 892년(年) ~ 936년(年) )는 신라(新羅) 말(末)에 지방(地方)의 호족(豪族) 들이 반란(叛亂)을 일으켜 각지(各地)에서 군웅(群雄) [1] 이 할거(割據)하던 시대(時代)이다. 892년(年) , 신라(新羅) 의 비장(脾臟) 견훤(甄萱) 이 서남부(西南部)의 무진주(武珍州) 를 점령(占領) 후(後) 한남군 개국공(開國公)을 칭(稱)한 후(後)부터 936년(年) 고려(高麗) 왕건(王建) 백제(百濟) 를 멸망시킬 때까지의 시기(時期)를 가리킨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처음 왕(王)을 선포(宣布)한 900년(年) 을 시점(時點)으로 하기도 한다. 앞서 신라(新羅) , 고구려(高句麗) , 백제(百濟) 가 대립(對立)하던 시기(時期)를 삼국(三國) 시대(時代) 라고 칭(稱)하고 있으므로 그때와 구분(區分)하기 위해 이 시기(時期)를 후삼국(後三國)이라 부른다.

9세기(世紀)에서 10세기(世紀)에 이르는 2세기(世紀)는 골품제(骨品制)를 기반(基盤)으로 하는 신라(新羅) 가 붕괴(崩壞)되고, 그 속에서 호족(豪族) 출신(出身)인 왕건(王建) 이 나타나 고려(高麗) 를 건국(建國)하였으며, 그 고려(高麗)가 점차(漸次) 봉건적(封建的)인 귀족(貴族) 국가(國家)로 확립(確立)되는 시기(時期)였다. 동시(同時)에 중국(中國)에서도 당나라(唐나라) 가 망(亡)하고 5대(代)(五代)라는 혼란기(混亂期)가 송나라(宋나라) 에 의(依)해 수습(收拾)·통일(統一)되면서 한 문화(文化)가 복구(復舊)되어 가는 시기(時期)이며, 한편(한便)으로는 북방(北方) 민족(民族)의 재등장(再登場)이 촉진(促進)되고 있어 그 세력(勢力)이 압력(壓力)이 남방(南方)에 미치던 때였다. 다시 말하면 성당(聖堂) 문화(文化)(盛唐文化)가 밀려들어 신라(新羅) 의 문화(文化)가 극성기(極盛期)에 달(達)했던 8세기(世紀)를 끝으로, 신라(新羅)는 당(黨)의 쇠퇴(衰退)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지방(地方)의 호족(豪族) 들이 반란(叛亂)을 일으키면서 결국(結局) 붕괴(崩壞)되었으며, 후삼국(後三國)이라는 과도기(過渡期)를 거쳐 10세기(世紀)에 이르러 고려(高麗) 왕조(王朝)로 재정비(再整備)되어 갔던 것이다. 특히(特히) 이 시기(時期)는 중국(中國)의 간섭(干涉)이 없는 독자적(獨自的)인 ‘좌절(挫折)과 흥기(興氣)’의 반복(反復)으로써 고대(古代) 국가(國家)가 붕괴(崩壞)되는 역사(歷史)의 일대(一大) 전환점(轉換點)이 되는 때였으며, 외부(外部) 도전(挑戰)과 압력(壓力)에서가 아니라 내부적(內部的)인 승화(昇華) 과정(過程)이 촉진(促進)되었던 시기(時期)였다.

역사(歷史) [ 편집(編輯) ]

신라(新羅)는 통일(統一) 이후(以後) 안정적(安定的)인 사회(社會)를 유지(維持)하며 진골(眞骨) 귀족(貴族)의 힘을 통제(統制)하려 하였다. 하지만 8세기(世紀)부터 소수(少數)의 귀족(貴族)들에게 권력(權力)이 집중(集中)되자 왕권(王權)이 약화(弱化)되고 진골(眞骨) 귀족(貴族)들 간(間)에 분열(分裂)이 나타났다. 또 계속(繼續)된 왕위(王位) 다툼으로 인해 왕권(王權)이 흔들리게 되었고, 정부(政府)의 지방(地方) 통제력(統制力)도 약(弱)해지면서 지방(地方)의 호족(豪族)들이 성장(成長)하였다. 결국(結局) 각(各) 지방(地方)에서 강(强)한 영향력(影響力)을 가진 호족(豪族)들이 중앙정부(中央政府)에 맞서 반란(叛亂)을 일으키는 데에 이르면서 후삼국(後三國) 시대(時代)가 전개(展開)되기 시작(始作)하였다. 또한 이러한 배경(背景)은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 이후(以後)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지방(地方) 호족(豪族)을 경계(警戒)하여 왕권(王權) 강화(强化)를 위(爲)한 정책(政策)들을 펼친 이유(理由)가 된다.

민란(民亂)의 발생(發生) [ 편집(編輯) ]

지방(脂肪) 성주(星州)(城主) 및 호족(豪族)의 대두(擡頭)는 신라(新羅) 중앙(中央) 정부(政府)의 지배력(支配力)을 약화시켰으며, 수취체제도(受取體制度) 점점(漸漸) 해이(解弛)해져 갔다. 더구나 신라(新羅) 말기(末期) 귀족(貴族)의 사치(奢侈) 향락(享樂)은 늘어갔고, 따라서 비용(費用)도 증가(增加)했지만, 충족시킬 만한 재원(財源)(財源)은 반대(反對)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재정적(財政的)인 위기(危機)를 타개(打開)하기 위해 정부(政府)는 지방(地方)의 주(州)·군(郡)에 조세(租稅)를 독촉(督促)하게 되니(889년), 농민(農民)들은 결국(結局) 이중(二重) 부담(負擔)을 강요받게 되었다.

신라(新羅) 의 성시(成市)(盛時)로부터 무거운 조세(租稅)와 역역(力役)(力役)을 부담(負擔)하고 있던 농민(農民)은 유민(流民)(流民) 혹은(或은) 도적(盜賊)이 되어 질서(秩序)를 교란(攪亂)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질서(秩序)는 금성(金星) (金城, 경주(慶州))을 중심(中心)으로 한 신라(新羅)의 구질서(舊秩序)에 대(對)한 타격(打擊)을 뜻한다. 조세(租稅)의 독촉(督促)은 영세(零細)한 농민층(農民層)을 자극(刺戟)하여 농민반란(農民叛亂)(農民叛亂)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리하여 진성대왕(眞聲帶王) 3년(年)(889년(年)) 원종(元宗) (元宗)과 애노(盧) (哀奴) 등(等)이 사벌주(沙伐州)를 근거(根據)로 하여 반란(叛亂)을 일으켰으므로, 나마 영기(靈氣)(令奇)에게 명(命)하여 붙잡게 하였다. 영기가 적(敵)의 보루(堡壘)(堡壘)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촌주(村主)(村主) 우련(祐連)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진성대왕(眞性大王)은 칙명(勅命)을 내려 영기(令旗)를 목베고 나이 10여(餘) 세(歲)된 우련의 아들로 촌주(村主)의 직(職)을 잇게 하였다. 이로써 반란(叛亂)은 겨우 진정(鎭靜)되었으나 호족(豪族)들은 대혼란(大混亂)을 틈타 세(勢)를 확장(擴張)하고 백성(百姓)들은 도적(盜賊)의 무리로 변(變)해갔다.

891년(年) 10월(月)에는 북원(北元) (北原)의 도적(盜賊) 우두머리 양(兩)길 (梁吉)이(李) 봉기(蜂起)하였다. 그때 궁예(弓裔) 는 죽주(竹柱)의 세력가(勢力家) 기훤에게 부하(部下)가 되겠다고 부탁(付託)했지만 멸시(蔑視)되어 양길(梁吉)의 수하(手下)가 되었다. 궁예(弓裔)를 얻은 양길(梁吉)은 그의 부하(部下) 궁예(弓裔)(弓裔)를 보내 100여(餘) 명(名)의 기병(騎兵)을 이끌고 북원(北元)의 동쪽(東쪽) 마을 및 명주(名酒)(溟州) 관내(管內) 주천(酒泉)(酒泉) 등(等) 10여(餘) 군현(郡縣)을 습격(襲擊)하였다.

견훤(甄萱)의 반란(叛亂) [ 편집(編輯) ]

892년(年) 완산(完山)(完山)의 세력가(勢力家) 견훤(甄萱) 이 그 주(州)에 근거(根據)하여 스스로 후백제(後百濟) (後百濟)라 칭(稱)하였는데, 무주(茂朱)(武州) 동남쪽(東南쪽)의 군(郡)과 현(縣)이 항복(降伏)하여 소속(所屬)되었다. 이어 서라벌(徐羅伐) 서남쪽(西南쪽)의 주현(州縣)을 공격(攻擊)하며, 견훤(甄萱)은 자신(自身)을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이라 칭(稱)하며 의자왕(義慈王)의 원수(怨讐)를 갚겠다하니 가는 곳마다 메아리쳐 호응(呼應)하여 그 무리가 달포 사이에 5,000여(餘) 명(名)에 달(達)하였다.

궁예(弓裔)의 세력확장(勢力擴張) [ 편집(編輯) ]

891년(年)에 죽주(竹柱)(竹州)의 기훤 의 부하(部下)가 되었다가 멸시(蔑視)를 받자 빠져나와 892년(年)에 북원(北元)(北原)의 양(兩)길 의 부하(部下)가 되었다. 궁예(弓裔)는 양길(梁吉)의 신임(信任)을 받어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주천(酒泉)(酒泉:지금(只今)의 예천(醴泉) )·내성(內省)(奈城:지금(只今)의 영월(寧越) )·어진(御眞)(지금(只今)의 울진(蔚珍) ) 등(等)을 공략(攻略)하여 항복(降伏) 받았다. 894년(年) 10월(月)에 명주(名酒)(溟州;江陵)를 점령(占領)하면서 강릉(江陵) 지역(地域)까지 수중(手中)에 넣었다. 그는 여세(餘勢)를 몰아 화천(華川) , 철원(鐵原) 등(等) 강원도(江原道) 대부분(大部分)의 지역(地域)을 점령(占領)하기에 이르렀다. 궁예(弓裔)의 세력(勢力)이 급성장(急成長)하자 패서지역(浿西地域)(예성강(禮成江) 이북(以北) 지역(地域)) 호족(豪族)들이 차례(次例)로 궁예(弓裔)에게 자진(自進) 투항(投降)하였다. 이렇게 되자 궁예(弓裔)는 더 이상(以上) 양길(梁吉)의 존재(存在)를 필요(必要)로 하지 않았다. 드디어 양길(梁吉)과 결별(訣別)하고 독립(獨立)을 선언(宣言)했다.

이때부터 사실상(事實上)의 태봉(泰封) 의 건국(建國)이다. 896년(年)에는 7월(月) 임진강(臨津江)을 따라 북상(北上)하여 당시(當時) 송악(松嶽)(松嶽; 지금(只今)의 개성(開城) )의 호족(豪族)이었던 왕륭 (왕건(王建)의 아버지)의 투항(投降)을 받았다. 예(例)는 왕륭의 아들 왕건(王建) 을 철원군(鐵原郡) 태수(太守)로 임명하였다. 그는 왕륭과 왕건(王建) 부자(富者)의 도움을 얻어 손쉽게 경기북부지역(京畿北部地域)과 서해안(西海岸) 일대(一帶)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경기지역(京畿地域) 호족(豪族)들의 경제적(經濟的) 지원(支援)에 힘입어 충주지역(忠州地域) 일대(一帶)까지 무력(武力)으로 병합(倂合)하였다. 898년(年) 송악(松嶽)을 태봉(泰封)의 사실상(事實上) 수도(首都)로 삼고, 왕건(王建)으로 하여금 양주(楊州)와 청주(淸州)(淸州;溫陽) 등(等) 30여(餘) 성(城)을 정벌(征伐)하도록 하였다. 899년(年) 청주(淸州) 지방(地方)을 점령(占領)하여, 소백산맥(小白山脈) 이북(以北)의 한강(漢江) 유역(流域) 전역(全域)을 수중(手中)에 넣었다. 궁예(弓裔)는 이 과정(過程)에서 공이 많은 왕건(王建)에게 신라(新羅)의 최고관직(最高官職)인 아찬(阿飡) 벼슬을 주었다. 또 이때 7월(月)에 양길(梁吉)이, 궁예(弓裔)가 세력(勢力)이 급성장(急成長) 하는 것이 꺼리어 국원(局員)(國原) 등(等) 10여(餘) 곳의 성주(城主)들과 함께 그를 칠 것을 모의(謀議)하고 비뇌성(非雷聲) (非惱城)에서 두 세력(勢力)이 격돌(激突)했고, 양길(梁吉)의 군사(軍士)가 패(敗)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궁예(弓裔)는 양길(梁吉)의 모든 세력(勢力)들을 흡수(吸收)하여 더욱 강성(强盛)해졌다.

900년(年) 10월(月)에 국원(局員)(國原), 청주(淸州)(靑州), 괴양(怪羊)(槐壤)의 도적(盜賊) 우두머리 청(請)길(淸吉)과 신(新)훤(莘萱) 등(等)이 성(性)을 바쳐 궁예(弓裔)에게 항복(降伏)하였다.

신라(新羅) 의 개혁(改革) [ 편집(編輯) ]

이러하게 개혁(改革)이 요구(要求) 되는 신라(新羅) 최치원 이 나타났다. 그는 당나라(唐나라)에서 884년(年) 음력(陰曆) 10월(月) 귀국(歸國)했고, 885년(年) 시독(侍讀) 겸(兼) 한림학사(翰林學士)(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支署暑感)(知瑞書監)이(李) 되었으나 문란(紊亂)한 국정(國政)을 통탄(痛歎)하고 외직(外職)(外職)을 자청(自請), 태산(泰山)(太山 : 지금(只今)의 전북(全北) 태인) 등지(等地)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나라의 멸망(滅亡)을 앞당긴 진성여왕 은 반란군(叛亂軍)과 호족세력(豪族勢力)이 난무(亂舞)하는 가운데서 인재(人材)들에게 개혁안(改革案)을 올리라고 독촉(督促)하였다. 최치원 894년(年) 진성대왕(眞聲帶王)에게 시무(時務)(時務) 10여(餘) 조(條)(條)를 상소(上疏)해서 아찬(阿飡) 이 되었다. 그러나 귀족(貴族)들의 거센 반발(反撥)로 인하여 그 후(後) 관직(官職)을 내놓고 난세(亂世)(亂世)를 비관(悲觀), 각지(各地)를 유랑(流浪)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餘生)을 마쳤다. 곧 이와 함께 신라(新羅) 의 국운(國運)도 종말(終末)에 가까워져 갔다.

천년(千年) 왕국(王國)의 도읍(都邑) 금성(金星) 의 서남쪽(西南쪽)에서 도적(盜賊)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바지를 붉은 색(色)으로 하여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적고적(敵孤寂)(赤袴賊)이라 불렀다. 이들은 주현(州縣)을 무찔러 해(害)치고 수도(首都)의 서부(西部) 모량리(牟梁里)에까지 이르러 민가(民家)를 약탈(掠奪)하여 갔다. 이 사건(事件)은 신라(新羅)의 개혁(改革)이 완전히(完全히) 실패(失敗)하고 지배력(支配力)도 미약(微弱)해져 소생(蘇生) 가능성(可能性)이 희박(稀薄)해진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후삼국(後三國)의 쟁탈(爭奪) [ 편집(編輯) ]

후삼국(後三國) 의 정립(定立) [ 편집(編輯) ]

이들 중(中) 궁예(弓裔) 견훤(甄萱) 은 각각(各各) 새로운 정권(政權)을 수립(樹立), 건국(建國)하여 신라(新羅)와 정립(定立)(鼎立)하게 되었다. 이를 후삼국(後三國)(後三國)이라 한다.

900년(年) 견훤(甄萱)은 영토(領土)에 대(對)한 지배권(支配權)을 확실히(確實히) 하고, 자신(自身)의 존재(存在)를 명확히(明確히) 드러내고자 순행(順行)을 떠나 완산주(完山州)에 이르자 주민(住民)들이 크게 환영(歡迎)하였다. 완산주(完山州)에서 견훤(甄萱)은 옛 백제 의자왕 의 울분(鬱憤)을 씻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이때 비로소 견훤(甄萱)은 백제왕(王)을 칭(稱)하였고, 연호(年號)를 정개(政開)라고 정(定)하였으며, 자신(自身)이 세운 나라의 제도(制度)와 관직(官職)을 정비(整備)하였으며, 중국(中國) 강남(江南)의 오월(五月) 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외교(外交) 관계(關係)를 맺었다. 견훤(甄萱)의 발언(發言)에서 옛 백제인(百濟人)들은 신라(新羅)에 완전히(完全히) 동화(同化)되지 않고 백제인(百濟人)으로서 정체성(正體性)을 지녔음을 추측(推測)할 수 있다. 나라의 이름을 백제(百濟) 라 칭(稱)하였으나 삼국시대(三國時代)와 구분(區分)지어 후백제(後百濟)라 불린다.

견훤(甄萱)이 나라를 세우자 901년(年) 궁예(弓裔)는 효공왕 태봉(泰封) 을 건국(建國)하였다. 다만 초기(初期)에는 고구려계(高句麗系) 호족(豪族)들의 영향(影響)을 받아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의 5세기경(世紀頃) 국호(國號)인 '고려(高麗)'라고 정(定)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영향(影響)으로 고려(高麗) 왕조(王朝)의 정통성(正統性) 강조(强調)를 위해 궁예(弓裔)의 나라를 후고구려라고 불러왔고, 그 영향(影響)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나, 이제는 그와 같은 역사적(歷史的) 사고관(思考觀)을 받아들일 필요(必要)가 없으며, 태봉(泰封)이란 국호(國號)를 가장 오래 쓴만큼 궁예(弓裔)의 왕조(王朝)는 태봉(泰封)이라고 하는게 맞다.

후백제(後百濟)와 태봉(泰封)을 외(外)에도 여타(餘他) 호족(豪族)들도 신라(新羅) 조정(朝廷)의 영향력(影響力)에서 벗어나 독자적(獨自的)인 세력(勢力)을 구축(構築)하였다.

후백제(後百濟)와 태봉(泰封)의 세력확장(勢力擴張) [ 편집(編輯) ]

901년(年) 8월(月)에 후백제(後百濟) 왕(王) 견훤(甄萱) 대야성 이 워낙 견고(堅固)하여 공격(攻擊)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軍士)를 금성(金星)(錦城)의 남쪽(南쪽)으로 옮겨 연변(延邊)(沿邊)의 마을을 약탈(掠奪)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903년(年)에 금성(金星)(현재(現在) 나주(羅州) ) 일대(一帶)의 10여(餘) 군현(郡縣)을 왕건(王建)의 수군(水軍) 기습(奇襲)에 의(依)해 빼앗겼다. 또, 906년(年)에는 상주(尙州)의 사화진 일대(一帶)에서 왕건(王建)과 싸워 패전(敗戰)하였다. 패전(敗戰)을 설욕(雪辱)하기 위해 군사(軍士)를 재정비(再整備)한 후백제(後百濟)는 907년(年) 일선군(一線郡)(一善郡) 이남(以南)의 10여(餘) 성(性)을 모두 공취(攻取)하였다. 견훤(甄萱)은 몸소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3천(千) 명(名)을 이끌고 서해(西海)의 해상권(海上權) 회복(回復)을 위해 나주성(羅州城)을 에워싸고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결국(結局), 궁예(弓裔)가 수군(水軍)을 내어 그들을 습격(襲擊)하자 견훤(甄萱)이 군사(軍士)를 이끌고 물러갔다.

양길(梁吉)의 세력(勢力)을 흡수(吸收)하고, 나주(羅州)를 획득(獲得)하여 삼한의 절반(折半)을 차지한 궁예(弓裔) 903년(年) 도읍(都邑)을 옮기고자 하여 철원(鐵原) 과 부양(浮揚)(斧壤)에 이르러 산수(算數)를 두루 살펴보았다. 904년(年) 에는 여러 관직(官職)을 설치(設置)하였는데, 일부(一部) 관직(官職)을 제외(除外)하고는 대체로(大體로) 신라(新羅)의 제도(制度)를 따랐다. 이 때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에서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무태(武泰) 원년(元年)(元年)이라 하였다. 패강도(牌强盜)(浿江道)의 10여(餘) 주현이 궁예(弓裔)에게 항복(降伏)하였다. 905년(年) 7월(月)에 궁예(弓裔)가 드디어 철원(鐵圓)으로 도읍(都邑)을 옮겼다. 8월(月)에는 궁예(弓裔)가 군사(軍士)를 움직여 신라(新羅)의 변방(邊方) 고을을 침략(侵略)하고 약탈(掠奪)하며 죽령(竹嶺)(竹嶺) 동북쪽(東北쪽)에까지 이르렀다. 신라(新羅) 조정(調整)은 땅이 날로 줄어드는 것을 듣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힘으로 막을 수가 없어, 여러 성주(星州)(城主)들에게 명(命)하여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벽(城壁)을 굳건히 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고려(高麗) - 후백제(後百濟) 전쟁(戰爭) [ 편집(編輯) ]

공산(公算) 전투(戰鬪) 에서
(공산성(公山城) 전투(戰鬪)에서 ( 신숭겸 장군(將軍)(우측(右側)에 선 이)과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 (오른쪽에서 두 번째(番째) 앉은 이)))

911년(年) 궁예(弓裔)는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으며, 연호(年號)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궁예(弓裔)는 미륵신앙(彌勒信仰)을 바탕으로 강력(强力)한 왕권(王權)을 꿈꾸었으나, 호족(豪族)들의 반발(反撥)로 내분(內紛)이 깊어졌다. 궁예(弓裔)는 패서 호족(豪族)들을 견제(牽制)하기 위해 수도(首都)를 송악에서 철원(鐵圓)으로 옮기고, 고구려(高句麗) 색채(色彩)를 빼고자 마진/태봉(泰封)과 같은 고구려(高句麗)와 무관(無關)한 국호(國號) 변경(變更)을 자주 시행(施行)했으며, 청주(淸州) 호족(豪族)들을 중용(重用)하는 등(等) 왕권강화책(王權强化策)을 시행(施行)했다. 또한 미륵관심법(彌勒關心法)으로 왕권(王權)에 위협(威脅)이 될 만한 호족(豪族)들을 죽였다. 심지어(甚至於) 패서 호족(豪族)의 딸이었던 강비(糠粃)와 자식(子息)마저도 죽이고 만다. 이 때문에 신하(臣下)들의 반발(反撥)이 심(甚)했고, 시중(市中) 왕건(王建)마저 관심법(關心法)으로 의심(疑心)을 하자, 결국(結局) 왕건(王建)과 따르던 장군(將軍)들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나라를 잃고 말았다.

궁예(弓裔)의 최후(最後)는 일반적(一般的)으로 도망치다가 성난 백성(百姓)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外)의 설로는 철원(鐵圓) 근처(近處)의 명성산에서 저항(抵抗)하다 죽었다는 설 또한 전(傳)해지고 있으나, 일반적(一般的)으로는 성난 백성(百姓)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918년(年) 궁예(弓裔)가 축출(逐出)되어 태봉(泰封) 은 멸망(滅亡)하고, 왕건(王建) 은 즉위(卽位)하면서 고려(高麗) (高麗)를 건국(建國)하였다. 연호(年號)를 천수(天壽)(天授)라 하고 송악으로 천도(遷都)하였으며 궁예(弓裔)를 지지(支持)하던 장수(將帥), 호족(豪族)들의 반발(反撥)과 반란시도(叛亂試圖)가 있었으나 왕건(王建)은 이를 잘 무마(撫摩)하고, 후백제(後百濟)와 삼한일통(一統)의 자웅(雌雄)을 겨루게 된다.

왕건(王建)은 처음에는 인질(人質)을 교환(交換)하며 후백제(後百濟)와 휴전(休戰) 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考慮)에 있던 백제 인질(人質) 진호가 갑자기 사망(死亡)하여 교전상태(交戰狀態)에 돌입(突入)한다. 이로 인해 상주(尙州) 일대(一帶)는 후백제(後百濟)와 고려(高麗)의 전쟁터(戰爭터)가 되었다. 이미 지방(地方)에 대(對)한 통제력(統制力)을 완전히(完全히) 상실(喪失)한 신라(新羅)에서는 지방(地方) 호족(豪族)들이 독자적(獨自的)으로 고려(考慮)나 후백제(後百濟)와 통교(通交)하고 있었다. 호족(豪族)들과의 이합집산(離合集散)과 신라(新羅)와의 외교관계(外交關係)를 빌미로 삼아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는 삼한의 주인(主人) 자리를 놓고 경쟁(競爭)하게 된다. 그 결과(結果)로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는 공산(公算)(현재(現在) 대구(大邱) )과 고창(高敞)(현(現) 안동(安東) )의 큰 두번(番)의 전투(戰鬪)를 치르게 된다. 공산(空山)에서 왕건(王建)이 대패(大敗)하고, 고창(高敞)에서는 견훤(甄萱)의 대패로 끝났다. 이후(以後) 운주성(韻主星) 전투(戰鬪)에서 견훤(甄萱)이 대패(大敗)하여 어느덧 고려(高麗)가 우위(優位)를 점(占)하게 된다. 다만 운주성(韻主星) 전투(戰鬪) 이후(以後)로도 둘은 세력(勢力) 균형(均衡)을 유지(維持)하고 있으나, 후백제(後百濟)는 내부(內部) 균열(龜裂)로 서서히(徐徐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始作)한다. [2]

후삼국(後三國) 의 통일(統一) [ 편집(編輯) ]

한편(한便) 후백제(後百濟)의 국내(國內) 정세(情勢)는 왕위(王位) 계승(繼承) 문제(問題)로 혼란(混亂), 견훤(甄萱)이 그의 아들 신검(身檢) 을 따르는 무리에게 폐위(廢位)되고 금산사 에 유폐(幽閉)되어 백제의 정치권(政治權)은 혼란(混亂)을 겪는다. 분노(憤怒)한 견훤(甄萱)은 왕건(王建)에게 항복(降伏) 의사(意思)를 밝히고, 고려(高麗)의 월경지 나주(羅州)를 거쳐서 고려(高麗)로 귀순(歸順)한다. 견훤(甄萱)마저 항복(降伏)한 상황(狀況)에서, 명목(名目)만 유지(維持)하던 신라(新羅)의 경순왕 935년(年) 고려(考慮)에 나라를 바친다. 왕건(王建)은 백제국의 창업자(創業者)인 견훤(甄萱)을 상보(詳報)(上父)로써 받아들이고, 경순왕에게서 신라(新羅)의 전통(傳統)과 권위(權威)를 이어받는데에 성공(成功)한다. 이후(以後), 936년(年) 왕건(王建)은 명(名)주대광(大匡) 왕순식과 백제국왕(國王) 견훤(甄萱)을 앞세워 말갈기병과(兵科) 호족(豪族)들을 모두 대동(帶同)하여 총(總) 10만(萬)의 병력(兵力)을 이끌고 일리천(一理千)에서 후백제군(後百濟軍)을 물리치고 황산(黃酸)에 이르러 항복(降伏)을 받아낸다.

후삼국(後三國)의 혼란(混亂)을 수습(收拾)하고 새로운 통일(統一) 왕조(王朝)를 세우는 데 성공(成功)한 왕건(王建)은 고구려(高句麗)의 계승자(繼承者)를 내세우며 발해(渤海) 유민(流民)을 받아들이고, 북진정책(北進政策)을 시행(施行)하여 영토(領土)를 넓히고, 거란을 경계(警戒)했으며, 서경(書經)(西京, 평양(平壤) ) 개척(開拓)에 노력(努力)하였다. 장군(將軍) 유금필 로 하여금 동북(東北) 지방(地方)을 되찾도록 하여 영토(領土)를 늘렸다.

또한 신라(新羅)가 지니는 전통적(傳統的)인 권위(權威)를 원용(援用)(援用)하려 하였다. 경순왕(敬順王)을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하여 신라(新羅)의 지배층(支配層)을 흡수(吸收)·회유(懷柔)하였고, 통일(統一) 후(後) 호족(豪族)들과 결혼(結婚) 정책(政策)을 통해 사돈(査頓) 관계(關係)를 맺으면서 이들과 연합(聯合)하였다. 삼한을 재통일(再統一)한 왕건(王建)의 시대(時代)에는 큰 문제(問題)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런 호족(豪族) 회유책(懷柔策)에도 불구(不拘)하고 호족(豪族)들의 존재(存在)는 왕건(王建)의 사후(事後) 광종(光宗) 대(臺)에 이르기까지 혼란(混亂)을 일으킬 원인(原因)이 되었다. 왕건(王建)이 《정계(政界)(政誡)》, 《 계백료서(誡百僚書) (誡百寮書)》를 저술(著述)하고 특히(特히) 〈 훈요십조(訓要十條) 〉(訓要十條)를 남겨 후세(後世)에 정치(政治)의 귀감(龜鑑)으로 삼게 한 것도 호족(豪族)들의 발흥(發興)에 대(對)한 우려(憂慮)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3]

연표(年表) [ 편집(編輯) ]

  • 892년(年) : 견훤(甄萱)의 반란(叛亂), 광주(光州) 점령(占領). 궁예(弓裔), 양길(梁吉)의 반군(叛軍)에 가담(加擔)하다.
  • 900년(年) : 후백제(後百濟)가 공식적(公式的)으로 건국(建國)
  • 901년(年) : 궁예(弓裔)가 태봉(泰封)를 세운다. 초기(初期)에는 국호(國號)를 '후고구려'라고 했다.
  • 904년(年) : 궁예(弓裔)가 고려(高麗)에서 마진으로 국호(國號)를 바꾸고 궁예도성(弓裔都城) (강원도(江原道) 철원군(鐵原郡))으로 수도(首都)를 옮겼다.
  • 911년(年) : 마진에서 마지막 이름인 태봉(泰封)으로 국호(國號)를 바꾼다.
  • 917년(年) :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의 5남(男) 박언창 후사(後嗣)벌 을 건국(建國)하다.
  • 918년(年) : 왕건(王建)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서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高麗) 를 건국(建國)한다.
  • 926년(年) : 거란이 발해(渤海)를 침략(侵略). 발해(渤海) 태자(太子) 대광현(大光顯) 이 부하(部下) 30여(餘) 명(名)을 데리고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귀순(歸順).
  • 928년(年) : 견훤(甄萱)이 신라(新羅)를 침공(侵攻)해 경주(競走)를 함락(陷落)시킨다.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을 견훤(甄萱)이 사살(射殺)한다.
  • 929년(年) : 견훤(甄萱)이 후사벌(後嗣罰)을 공격(攻擊)해 멸망시킨다.
  • 930년(年) : 고창(高敞) 전투(戰鬪) -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에게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을 죽인 것을 비판(批判)하고 전쟁(戰爭)을 일으킨다.
  • 934년(年) : 홍성(洪城) 전투(戰鬪) - 후백제(後百濟)의 국력(國力)을 손상(損傷)시킨다. 이 전투(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는 8000명(名)의 군사(軍士)를 잃는다.
  • 935년(年) : 견훤(甄萱)이 금강(錦江) (막내)을 후계자(後繼者)로 선정(選定)한다. 신라(新羅)가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항복(降伏)한다.
  • 936년(年) 3월(月) : 견훤(甄萱)이 아내 고(高)비녀 박영규(朴榮圭) 를 데리고 고려(高麗)로 망명(亡命)한다.
  • 936년(年) 8월(月) :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이 공동(共同)으로 지휘(指揮)했던 황산(黃酸) 전투(戰鬪) 에서 후백제(後百濟)를 멸망시킨다. 쿠데타의 주범(主犯)인 능환(綾紈)과 양검(良劍)을 처벌(處罰)하고, 드디어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을 이룬다.

같이 보기 [ 편집(編輯) ]

각주(各州) [ 편집(編輯) ]

한국(韓國) 의 역사(歷史)
이전(以前) 시대(時代) 후삼국(後三國) 시대(時代)
892년(年) ~ 936년(年)
다음 시대(時代)
남북국(南北國) 시대(時代) 고려(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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