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漢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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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漢城府)
漢城府
조선(朝鮮) 의 부(部)
남산의 정상에서 바라본 한양의 풍경
남산(南山)의 정상(頂上)에서 바라본 한양(漢陽)의 풍경(風景)
행정(行政)
국가(國家) 조선 조선(朝鮮) 대한제국 대한제국(大韓帝國)
행정(行政) 구역(區域) 한성부(漢城府)
역사(歷史)
설립(設立) 1392년(年)
경복궁(景福宮) 흥례문
근정전(勤政殿) 어좌(御座)의 모습

한성(漢城) (漢城, 중세(中世) 한국어(韓國語) : 한?쎠ㅇ ) 또는 한양(漢陽) (漢陽)은 조선(朝鮮)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도 였다.

1392년(年)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면서 조선(朝鮮) 태조(太祖) 는 풍수(風水) 도참설(圖讖說)에 따라 1394년(年) 조선(朝鮮)의 수도(首都)를 이곳으로 정(定)하였다. 3년(年) 후(後)에 경복궁(景福宮) 을 짓고 창덕궁(昌德宮) 을 경복궁(景福宮)의 이궁(离宮)으로 지었다. 이 당시(當時) 한성부(漢城府)의 영역(領域)은 성곽(城郭)의 사대문(四大門)(四大門, 동서남북(東西南北) 방향(方向))과 성곽(城郭) 외부(外部)의 일부(一部) 지역(地域)을 포함(包含)하는데, 즉(卽) 현재(現在)의 서울시(서울市)의 강북지역(江北地域) 대부분(大部分)이 포함(包含)된다.

성곽(城郭)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인 유교(儒敎)의 오상(誤想)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五常 仁義禮智信) 이념(理念)을 구체화(具體化)하여 성문(城門)을 건축(建築)하였다. 즉(卽) 중앙(中央)은 시간(時間)을 알려주기 위해 보신각(普信閣) 을 세우고, 동쪽(東쪽)에는 흥인문(興仁門) (보물(寶物)), 서쪽(西쪽)에는 돈의문(敦義門) , 남쪽(南쪽)에는 숭례문(崇禮門) (국보(國寶)), 북쪽(北쪽)에는 숙청문(肅淸門) 을 세웠다. 북쪽(北쪽)은 본래(本來) 소지문(炤智門)으로 하려 했으나 최종(最終) 낙점(落點)은 숙청문(肅淸門)(현재(現在) 숙정문(肅靖門) [1] )이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등(等)의 변란(變亂)을 거치면서 경복궁(景福宮) 등(等)이 파괴(破壞)되었다가 고종(高宗) 대(臺)에 이르러 흥선 대원군(大院君) 의 명(名)으로 다시 복구(復舊)되었다. 고종(高宗)은 1896년(年) 환구단(圜丘壇) 을 지어 대한제국(大韓帝國) 을 선포(宣布)하였으며 덕수궁(德壽宮) 을 중심(中心)으로 도시(都市)의 축(軸)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하부(下部) 행정구역(行政區域)은 오부(五部) 와 방(房)(坊)과 계(界)(契)·동(桐)(洞)으로 구성(構成)되었다. 15세기(世紀) 초(初) 인구(人口)는 10만(萬) 명(名) 정도(程度)였다. 오늘날 서울의 중심(中心) 업무(業務) 지구(地球) ( 도심(都心) )를 차지하였으며 바깥에는 성저십리(城底十里) 가 있었다.

서울의 역사(歷史)

연혁(沿革) [ 편집(編輯) ]

천도(天道)의 배경(背景) [ 편집(編輯) ]

1392년(年)에 개경(開京)( 개성(開城) )에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세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면목(面目)과 인심(人心)을 새롭게 할 목적(目的)으로 도읍지(都邑地)를 옮기기로 결심(決心)을 하였다. 수도(首都)를 옮기는 것을 결정(決定)하는 데에는 군주(君主)인 이성계(李成桂)의 의지(意志)가 결정적(決定的)이었다. 태조(太祖)는 한시(한時)라도 빨리 옛 왕조(王朝)로부터 벗어나고 새 왕조(王朝)의 권위(權威)를 높이기 위하여 새 왕조(王朝)가 하늘의 명(命)을 받고 백성(百姓)들의 지지(支持)를 받아 정당(正當)하게 세워졌음을 세상(世上)에 널리 강조(强調)하였다.

태조(太祖)가 천도(遷都)를 한 이유(理由)로는 기존(旣存) 세력(勢力)의 근거지(根據地)인 개경(開京) 에 대(對)한 정치적(政治的) 불안(不安)과 심리적(心理的) 갈등(葛藤), 그리고 풍수(風水) 지리설(地理說)의 영향(影響), 민심(民心)의 쇄신(刷新) 등(等)을 들 수 있다. [2] [3] [4] [5] 새 도읍지(都邑地)를 물색(物色)하던 중(中) 무학국사(舞鶴局社) 하륜(河崙) (河崙) 등(等) 여러 신하(臣下)들의 의견(意見)에 따라 1393년(年)에 도읍지(都邑地)를 한양(漢陽)으로 정(定)하고 1394년(年) 신도궁궐조성도감(信徒宮闕造成都監) (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設置)하여 새 수도(首都)의 도시(都市) 계획(計劃)을 구상(構想)하였다. 1394년(年) 11월(月) 21일(日)(음력(陰曆) 10월(月) 28일(日))에 한양(漢陽) 으로 천도(天道)(遷都)를 하였는데, 한양(漢陽)은 한수(手)(漢水, 한강(漢江))의 북쪽(北쪽)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천도(天道)의 기준(基準)은 풍수(風水) · 도참설(圖讖說) 에 따르면서, 남쪽(南쪽)에 한강(漢江)이 있어 교통상(交通上) 배로 물건(物件)을 실어 나르기가 편리(便利)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6] 유학자(儒學者)들은 이러한 논거(論據)에 반대(反對)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의지(意志)가 굳건했기 때문에 천도(天道)는 기정사실(旣定事實)이 되었다.

한편(한便) 풍수(風水) · 도참설(圖讖說) 에 능(能)했던 하륜(河崙) 에 따르면 오늘날의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자리인 무악 일대(一帶)가 명당(明堂)이었고, 이로 인해 수도(首都)의 위치(位置)에 대(對)해 크게 논의(論議)가 일기도 했다. 실록(實錄)에 따르면 이성계(李成桂)는 이러한 논거(論據)로 수도(首都)의 입지(立地)를 정(定)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경내(境內)에서는 송경이 제일(第一)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限)되는 바는 건방(乾方, 북쪽(北쪽))이(李) 낮아서 불과(不過) 샘불이 마른 것 뿐입니다.”
임금(賃金)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인들 어찌 부족(不足)한 점(點)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形勢)를 보니, 왕도(王道)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漕運)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四方)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百姓)들에게도 편리(便利)할 것이다.”

? 《태조실록(太祖實錄)》, 3년(年) 8월(月) 13일조(日條)

따라서 풍수(風水)·도참설(圖讖說)에 기반(基盤)한 논의(論議)가 국왕(國王)의 결정(決定)에 결정적(決定的) 영향(影響)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點)을 알 수 있다. 왕사(王사) 자초(自招)( 무학(舞鶴) )가 인왕산(仁王山)에서 출발(出發)한 축(軸)을 따라 하여 도읍(都邑)의 터를 잡자고 주장(主張)했다는 설(說)은 야사(野史)로 16세기(世紀) 말(末)~17세기(世紀) 초(初)에 간행(刊行)된 《오산설림(誤算說林)》에 수록(收錄)되어 있는 이야기다. 실록(實錄)에는 전혀(全혀) 전(傳)하지 않는 이야기로, 신뢰(信賴)할 수 없다.

1395년(年) (태조(太祖) 4년(年)) 6월(月) 6일(日)에 한양부(漢陽府)의 명칭(名稱)을 한성부(漢城府)(漢城府)로 고쳤으며, 그와 동시(同時)에 한양(漢陽) 천도(遷都) 당시(當時)에 궁궐(宮闕)과 관청(官廳)이 세워진 지역(地域)에 살던 백성(百姓)들을 견주(犬主)(見州)로 옮기고 양주(洋酒)(楊州)라 고친 바 있다. [7]

한성(漢城)의 건설(建設) [ 편집(編輯) ]

1840년경(年頃)의 한성(漢城) 지도(地圖)인 《 수선전도(首善全圖)

태조(太祖)(太祖)는 궁궐(宮闕)을 중심(中心)으로 ‘좌묘우사(左廟宇社), 전조후시(前兆後市)(左廟右社, 前朝後市)’라는 동양(東洋) 고래(古來)의 수도(首都) 배치(配置) 원칙(原則)에 따라서 도읍(都邑)을 건설(建設)하였다. 천도(天道) 이후(以後) 한양(漢陽)에는 각종(各種) 공사(工事)가 잇따라 시행(施行)되어 수도(首都)로서의 면모(面貌)를 갖추었다. 조정(調整)과 시장(市場) 또한 비슷한 시기(時期)에 건설(建設)되었다. 성곽(城郭)은 궁궐(宮闕)과 종묘(宗廟)가 완공(完工)된 이후(以後)에 건설(建設)되었다. 가장 먼저 서쪽(西쪽)에 사직(辭職)(社稷)을 완공(完工)하고, 궁궐(宮闕)을 세운 뒤, 그 동쪽(東쪽)에 종묘(宗廟)(宗廟)가 완성(完成)되었다. 그리고 광화문(光化門) 앞에 육조관서(六曹官署)(六曹官署)를 배치(配置)하여 관아(官衙)가(官衙街)로 하고, 북쪽(北쪽) 신무문(神武門)(神武門) 밖에는 시장(市場)을 두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조선(朝鮮)의 정치도시(政治都市)로서의 기능(機能)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始作)하였다. 그 다음으로 태조(太祖)는 한양(漢陽)의 방위(防衛)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북악산(北岳山)과 낙산(駱山)(駱山)·남산(南山)(南山)·인왕산(仁王山)(仁旺山)을 잇는 약(約) 117km의 성벽(城壁)을 쌓기 시작(始作)하였다.

1395년(年)에 한양(漢陽)을 한성(漢城)(漢城)으로 개칭(改稱)하고 1395년(年)에는 한성(漢城)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을 설정(設定)하였다. 그 행정구역(行政區域)은 도성(都城)(都城)과 성저(城底)(城底)로 구성(構成)되었는데, 조선시대(朝鮮時代)의 500년(年) 동안을 사용(使用)하여 왔던 것이다. 도성(都城)은 성(城) 안의 땅으로 모두 국유지(國有地)이며, 궁궐(宮闕)·관청(官廳)·도로(道路)·하수도(下水道)·시장(市場) 등(等)의 위치(位置)가 정(定)해져 있었다. 성저(城底)( 성저십리(城底十里) )는 성벽(城壁)으로부터 사방(四方) 10리(里) 되는 한계선(限界線)까지를 가리키는데, 북쪽(北쪽)은 북한산(北韓産), 남쪽(南쪽)은 한강(漢江) 노도(怒濤)(露渡) [8] , 동쪽(東쪽)은 양주(洋酒) 송계원·대현(大絃)(大峴) [9] ·중랑포(中浪浦)·장안평, 서쪽(西쪽)은 양화도(楊花渡)(楊花渡)·고양덕수원(水原)(高陽德水院) [10] , 모래내(沙川)를 따라 난지도(蘭芝島)(蘭芝島) 부근(附近)까지였다. 이 지역내(地域內)는 산림(山林)과 풍치(風致)의 보호(保護)를 목적(目的)으로 암장(暗葬)과 벌목(벌目)·채석(採石)이 금지(禁止)되었다. 이 도성(都城)은 동(洞)·서(西)·남(男)·북(北)·중부(中部)의 오부(五部)(五部)를 두고 그 밑에 52방(房)(坊)을 두었다. 같은 해 9월(月)에 성벽(城壁)과 문루(門樓)(門樓)가 완성(完成)되어 왕성(旺盛)은 주위(周圍)에 견고(堅固)한 성벽(城壁)이 쌓여진 성곽도시(城郭都市)가 되었다.

1398년(年) 왕자(王子)의 난(亂) 이 일어나고, 정종(定宗) 이 즉위(卽位)하면서 2년(年)동안 수도(首都)를 개성(開城)으로 옮긴 일이 있었으나, 태종(太宗)(太宗)이 즉위(卽位)하자 곧 한성(漢城)으로 다시 환도(還都)하였다. [6] 태종대(太宗代)에는 태종(太宗)의 즉위(卽位)를 도와 강력(强力)한 권세(權勢)를 지니고 있던 하륜(河崙)이 다시금 무악천도론(舞樂薦度論)을 주장(主張)하였고, 여기에 개성(開城)까지 더해 세 개(個)의 후보지(候補地)가 다시금 조선조(朝鮮朝) 수도(首都)가 입지(立地)할만한 곳으로서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태종(太宗)은 동전(銅錢)을 던져 길흉(吉凶)을 점치는 척전(擲錢) (擲錢)으로 도읍(都邑)을 결정(決定)하기로 했다. 척전(擲錢)의 결과(結果)는 "신도(信徒)(新都)는 2길(吉) 1흉(凶)(凶)이었고, 송경(宋璟)(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흉(凶)(凶) 1길(吉)이었다"고 한다 [11] . 물론(勿論) 태종(太宗)은 태조(太祖)의 결정(決定)으로 지어진 수도(首都)를 버리는 데 대(對)한 부담감(負擔感)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고, 새로이 토목공사(土木工事)를 일으키는 데 대(對)한 부담감(負擔感) 역시(亦是) 컸을 것으로 보인다 [12] .

환도(還都)한 다음 해부터 궁궐(宮闕)을 수축(收縮)하면서 도읍지(都邑地)로서의 여러 시설(施設)을 갖추어갔다. 노폭(路幅) 56척(隻)(尺)의 ( 운종가(雲從街) (雲從街) [13] )를 비롯하여 노폭(路幅) 16척(隻), 11척(隻)의 각종(各種) 도로(道路)를 만들고, 그 양쪽(兩쪽)에는 가가(假家)라고 부르는 상점(商店)을 만들어 번화(繁華)하게 하였는데 상점(商店)이 들어서 있는 토지(土地)는 10년(年)을 한도(限度)로 대여(貸與)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간선도로변(幹線道路邊)에는 2척(隻)의 구거(溝渠)(溝渠)를 만들어 배수(排水)가 잘 되게 하였다. 또한 개천(개川)(開川) [14] 을 준공(竣工)하여 배수(排水)가 잘 되게 하였고, 도읍지(都邑地)의 미관(美觀)과 화재예방(火災豫防)을 위하여 초가(草家)(草家)의 건축(建築)은 억제(抑制)하였다.

조선(朝鮮) 중후기(中後期) [ 편집(編輯) ]

1905년(年)의 한성(漢城)

1592년(年) 선조(宣祖) 때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1624년(年) 인조(仁祖) 때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입은 피해(被害)는 흥선대원군(大院君) 때에 와서 전면(全面) 복구(復舊)되었다. 1876년(年) 개항(開港) 이래(以來) 외국인(外國人)에게 문호(門戶)를 개방(開放)하고 한성(漢城)에는 새로운 문명시설(文明施設)이 갖추어져 가는 등(等), 현대화(現代化)하기 시작(始作)하였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 [ 편집(編輯) ]

서울은 동아시아(東아시아)에서 전기(電氣) , 전차(戰車) , 수도 , 전화(電話) , 전신(前身) 체계(體系)를 모두 동시(同時)에 갖춘 최초(最初)의 도시(都市)가 되었다. 근대적(近代的)인 병원(病院)·학교(學校)·교회(敎會)·신문사(新聞社) 등(等)이 세워졌고, 1898년(年)에는 서대문(西大門)과 홍릉(洪陵) 사이에 전차(電車)가 부설(附設)되고, 1899년(年)에는 경인선(京仁線)의 개통(開通)과 전화(電話)의 가설(假說), 1900년(年)에는 한강가교(漢江架橋)가 준공(竣工)되었다. 그러나 계속(繼續)하여 근대적(近代的)인 상공업(商工業) 발달(發達)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6]

1895년(年) 5월(月) 26일(日) 고종(高宗) 이 전국(全國)을 23부(部)로 나누면서 한성부(漢城府) 를 하나의 지방행정구역(地方行政區域)으로 개편(改編)하였으나 1년(年)만에 13도제(道制) 가 시행(施行)되면서 원래(元來)대로 환원(還元)되었다. 1910년(年) 총독부령(總督府令)에 따라 경성부(京城府) 로 개칭(改稱)되고 경기도(京畿道)에 편입(編入)되었다.

지리 [ 편집(編輯) ]

조선(朝鮮) 시대(時代)의 한성부(漢城府)의 구역(區域)은 오늘날의 서울보다 훨씬 협소(狹小)하였다. 동쪽(東쪽)은 낙타산(駱駝山) , 서쪽(西쪽)은 인왕산(仁王山) , 남쪽(南쪽)은 목멱산(木覓山) , 북쪽(北쪽)은 백악산(白岳山) 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가 그 터전으로서, 성(城) 밖의 일부(一部) 지역(地域)도 관할(管轄)하였지만, 조선(朝鮮) 건국(建國) 당시(當時)에는 원칙적(原則的)으로 성(城) 안의 구역(區域)만을 ‘한양(漢陽)’이라 하였다. [15]

그러나 도성(都城) 안에 거주(居住)하는 인구(人口)가 점차(漸次) 증가(增加)하여, 성내(城內)에 모든 인구(人口)를 수용(收容)할 수 없는 상황(狀況)에 이르렀다. 이 즈음부터 성곽(城郭)으로부터 십(十) 리(里) 바깥까지의 지역(地域)을 ‘ 성저십리(城底十里) ’라 칭(稱)하게 되었으며, 성저십리(城底十里)로의 인구(人口) 이동(移動)도 일어났다. 결국(結局) 1461년(年) 2월(月) 27일(日) 성저십리(城底十里)는 공식적(公式的)으로 한성부(漢城府)에 속(屬)하게 되어 [16] , 한성부(漢城府)의 영역(領域)이 확장(擴張)되었다.

행정(行政) [ 편집(編輯) ]

조선(朝鮮) 후기(後期) 한성부(漢城府) 내(內) 관청(官廳) 위치(位置)도
한성부(漢城府)의 직제(職制)
품계(品階) 관직(官職) 정원(庭園)
정(情)2품(品) 판윤(判尹) 1명(名)
종(種)2품(品) 좌윤(左尹)
우윤(右尹)
각(各) 1명(名)
종(種)4품(品) 서윤(庶尹) 1명(名)
종(種)5품(品) 판관(判官) 2명(名)
정(情)7품(品) 참군(參軍) 3명(名) [17]

한성부(漢城府) (漢城府, 중세(中世) 한국어(韓國語) : 한?쎠ㅇ붕? )는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한성(漢城)'을 담당(擔當)하여 관할(管轄)하는 관청(官廳)으로, 지금(只今)의 서울특별시청(서울特別市靑) 격(格)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종(高宗) 치세(治世)에 이르러, 궁궐(宮闕)을 확장(擴張)하고 상가(商街)를 짓는 등(等) 도시(都市)가 확장(擴張)되었다. 한성부(漢城府)는 정(鄭)2품(品)인 한성판윤(漢城判尹) 이 최고(最高) 책임자(責任者)였다.

일정한 지역(地域)을 담당(擔當)하는 점(點)에서는 일반적(一般的)인 지방(地方) 기관(機關)과 같지만, 수도 라는 점(點)에서 중앙관청(中央官廳)으로 인정(認定)하였으며 육조(六曹) 와 같은 격(格)의 관청(官廳)으로 대우(待遇)하였다. 형조(刑曹) · 사헌부(司憲府) 와 함께 삼법사(三法司)(三法司)라고도 불렸다. 서울의 호구(虎口), 시장(市場) 및 점포(店鋪)와 가옥(家屋) 및 토지(土地), 산, 도로(道路), 교량(橋梁), 하천(河川) 등(等)의 관리(管理)와 재정(財政) 및 사법(司法), 검시(檢屍), 고실(鼓室) 등(等)의 일을 담당(擔當)했다. 한성부(漢城府)의 관할(管轄) 영역(領域)은 한양(漢陽)과 성저십리(城底十里)였다.

한성부(漢城府) 관청(官廳)의 본청(本廳) 건물(建物)은 여러 차례(次例) 변동(變動)이 있었으나 가장 오래 존속(存續)한 곳은 세종대로(世宗大路)( 육조(六曹)거리 ) 동편(東便)의 이조(李朝) 호조(好調) 사이 지역(地域)이었다. 현재(現在) 주소(住所) 체계(體系)로는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종로구 세종로 82-14번지(番地)의 주한미국대사관(駐韓美國大使館) 북쪽(北쪽) 부지(敷地)(미국대사관(美國大使館) 공보원(公報院) 자리)이며, 당상대청(堂上大淸), 낭청대청(郎廳大淸), 호적(戶籍) 창고(倉庫) 등(等)의 건물(建物)이 있었다.

행정(行政) 구역(區域) [ 편집(編輯) ]

오부(五部) [ 편집(編輯) ]

경조오부도
한성부(漢城府) 행정구역(行政區域) 영역(領域)도

동(桐)·서(西)·남(男)·북(北)·중(中)(中)의 오부(五部)로 구성(構成)되었으며, 이 아래에는 방(房)(坊)과 계(界)(契)·동(東)(洞)을 두었다.

한성부(漢城府) 설치(設置) 당시(當時)에는 52방(房)을 두었는데, 각(各) 부(部)의 방명은 다음과 같다.

① 동부(東部) 12방(放)
연희방(燕喜坊)·숭교방(崇敎坊)·천(千)달방(泉達坊)·창선방(彰善坊)·건덕방(乾德房)(建德坊)·덕성방(德性房)(德成坊)·서운방(房)(瑞雲坊)·연화방(蓮花坊)·숭신방(房)(崇信坊)·인창방(仁昌坊)·관덕방(關德房)(觀德坊)·흥성방(興盛坊)
② 남부(南部) 11방(放)
광통방(廣通坊)·호현방(好懸房)(好賢坊)·명례방(明禮坊)(明禮坊)·대평방(臺平方)(大平坊)·훈도방(訓導房)(勳陶坊)·성명방(聲明房)(誠明坊)·낙선방(落選房)(樂善坊)·정심방(正心房)(貞心坊)·명철방(明哲坊)·성신방(誠身坊)·예성방(禮成坊)
③ 서부(西部) 11방(放)
영견방(迎見房)(永堅坊)·인달방(房)(仁達坊)·적선방(積善坊)·여경방(餘慶坊)·인지방(人地方)(仁智坊)·황화방(荒貨房)(皇華坊)·취현방(取懸房)(聚賢坊)·양생방(養生方)(養生坊)·반석방(盤石坊)·신화방(神話房)(神化坊)·반송방(搬送房)(盤松坊)
④ 북부(北部) 10방(放)
광화방(廣化坊)·양덕방(陽德房)(陽德坊)·가회방(街回榜)(嘉會坊)·안국방(安國坊)·관광방(觀光坊)·진정방(鎭定坊)·순화방(醇化房)(順化坊)·명통방(名通房)(明通坊)·준수방(遵守房)(俊秀坊)·의통방(醫通房)(義通坊)
⑤ 중부(中部) 8방(放)
정선방(貞善坊)·광행방(狂行方)(廣幸坊)·관인방(官印方)(寬仁坊)·수진방(壽進坊)·징청방(澄淸房)(澄淸坊)·장통방(長通房)(長通坊)·서린방(瑞麟坊)·견평방(堅平坊)

52방(房)은 세종(世宗) 때 서부(西部)의 3방(房)을 폐지(廢止)하여 49방(房)이 되고, 영조(英祖)(英祖) 때는 동부(東部) 6방(放), 남부(南部) 11방(放), 서부(西部) 9방(放), 북부(北部) 12방(放), 중부(中部) 8방(房)으로 5부(部) 46방(房)이었으며, 그 밑에 328계(係)(契)를 두었다. 그 후(後) 1865년(年) (고종(高宗) 2) 동부(東部)에 경모궁방(景慕宮房)(景慕宮坊)이(李) 신설(新設)되어 47방(房)이 되고, 계도(啓導) 11개(個)가 증가(增加)되어 339계(系)가 되었다.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한성부(漢城府) 관할구역(管轄區域)은 도성(都城)으로부터 사방(四方) 10리(리)까지로 하였으나, 대부분(大部分)의 인구(人口)가 도성(都城) 내(內)에 집중(集中)되어 1428년(年) (세종(世宗) 10) 한성부(漢城府) 인구(人口) 10만(萬) 3328명(名) 가운데 도성(都城) 밖 10리(리)까지의 인구(人口)는 불과(不過) 6,044명(名) 뿐으로, 도성(都城) 밖에는 서대문(西大門)·서소문(西小門) 밖에 2방(放), 동대문(東大門) 밖에 2방(放), 남부(南部)의 2방(房) 등(等) 6방(房)이 있을 정도(程度)였다.

대한제국(大韓帝國) 부제(副題)에 따른 행정구역(行政區域) [ 편집(編輯) ]

같이 보기 [ 편집(編輯) ]

각주(各州) [ 편집(編輯) ]

  1. 지금(只今)의 숙정문(肅靖門) 목조(木造) 누각(樓閣)은 소실(消失)되었던 것을 1976년(年)에 복원(復元)한 것이며, 현판(懸板)의 글씨는 박정희(朴正熙) 전(前) 대통령(大統領) 이 쓴 것이다.
  2. 김용국(金龍國) (1957). “서울 천도(天道)의 동기(動機)와 전말(顚末)”. 《향토(鄕土)서울》 1 .  
  3. 이원명 (1984). “한양(漢陽) 천도(天道)의 배경(背景)에 관(關)한 연구(硏究)”. 《향토(鄕土)서울》 42 .  
  4. 임덕순 (1984). “한양(漢陽)이 수도(首都)로 선정(選定)된 이유(理由)”. 《충북대학교 논문집(論文集)》 27 .  
  5. 원영환 (1988). “한양(漢陽) 천도(天道)와 수도건설고(首都建設高)”. 《향토(鄕土)서울》.  
  6. 글로벌 세계(世界)대백과사전 》, 〈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서울
  7.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太祖) 7권(卷) 4년(年) 6월(月) 6일(日),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치다.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Archived 2017년(年) 3월(月) 20일(日) - 웨이백 머신
  8. 노들나루
  9. 지금(只今)의 우이천
  10. 지금(只今)의 응암동
  11. 《태종실록(太宗實錄)》4년(年) 10월(月) 6일(日)
  12. 《태종실록(太宗實錄)》4년(年) 10월(月) 4일(日)
  13. 지금(只今)의 종로(鍾路) 1가(街)에서 종로(鍾路) 4가(街)까지
  14. 지금(只今)의 청계천(淸溪川)
  15. 손정목 (1977). 《조선시대(朝鮮時代) 도시사회연구(都市社會硏究)》. 일지사. 35쪽.  
  16.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世祖) 23권(卷) 7년(年) 2월(月) 27일(日), 한성부(漢城府)에서 서울의 오부(五部) 밖의 성저(城底) 십리(十里)를 각(各) 부(部)에 분속(分屬)시킬 것을 건의(建議)하다.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Archived 2017년(年) 3월(月) 20일(日) - 웨이백 머신
  17. 1명(名)은 통례원(通禮院) 의 인의(仁義)가 겸한다.

외부(外部) 링크 [ 편집(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