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統一新羅)의 문학(文學)
은 8세기(世紀) 이후(以後), 고구려(高句麗), 백제를 정복(征服)한
신라(新羅)
의 안정적(安定的)인 정치(政治)·사회(社會)·문화(文化) 속에서 발전(發展)하였다.
신라(新羅)
왕정(王政)(王廷)은 매년(每年) 많은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遣唐留學生)을 당(糖)으로 파견(派遣)하여 발전(發展)된 한문화(韓文化)(漢文化)를 학습시키고, 아울러 불교(佛敎)를 적극적(積極的)으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신라(新羅)
의 귀족(貴族)인
화랑(花郞)
과 승려(僧侶)들은 고도(高度)로 발달(發達)된 한문화(韓文化)와 불교사상(佛敎思想)을 바탕으로
통일신라(統一新羅)
의 문학(文學)을 창작(創作),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향가(鄕歌)
는 이 시기(時期) 문학(文學)의 왕좌(王座)를 차지한 시가문학(詩歌文學)(詩歌文學)으로서,
통일신라(統一新羅)
귀족(貴族)들의 생활(生活) 감정(感情)과 사상체계(思想體系)가 독특(獨特)한 수사기교(搜査技巧)(修辭技巧)를 빌어 유감(遺憾)없이 표현(表現)되고 있다. 특히(特히) 10구체(句體)
향가(鄕歌)
인(人)
사뇌가(詞腦歌)
(詞腦歌)는 그 형태(形態)에서 그들의 생활(生活) 감정(感情)이나 사상체계(思想體系)를 표현(表現)하는 데에 가장 적당(適當)하여 많은 유능(有能)한 작가(作家)와 우수(優秀)한 작품(作品)을 남기고 있다. 또 내용(內容)에서는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귀족(貴族)들이 현세(現世)에서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내세(來世)에까지 보장(保障)받고자 하는 비원(悲願)(悲願)을 불타(佛陀)의 은총(恩寵)(恩寵)으로 이룰 수 있으리라는 굳은 신앙심(信仰心)으로 메우고 있다. 따라서 향가(鄕歌)(10구체(句體) 사뇌가(詞腦歌))의 주요(主要)한 작가(作家)는 신라(新羅)의 귀족층(貴族層),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내용(內容)은 불교적(佛敎的)인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향가(鄕歌)는
진성여왕
(眞聖女王) 때의 고승(高僧)
대구화상(大矩和尙)
(大矩和尙)과 각간(角干)
위홍(魏弘)
(角干魏弘)에 의(依)하여 《
삼대목(三代目)
(三代目)》이라는 이름으로 가집(歌集)(歌集)이 편찬(編纂)된 바 있으나 오늘날 전(傳)하지 않고 있다. 이 시기(時期)의 현존(現存)하는 향가(鄕歌)는 광덕(廣德)(廣德)의 〈
원왕생가(願往生歌)
(願往生歌)〉, 득오(得烏)(得烏)의 〈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慕竹旨郞歌)〉, 견우노옹(牽牛老翁)의 〈
헌화가(獻花歌)
(獻花歌)〉, 신충(臣忠)(信忠)의 〈
원가(原價)
(怨歌)〉, 월명사(月明師)(月明師)의 〈
도솔가(兜率歌)
(兜率歌)〉와 〈
제망매가(祭亡妹歌)
〉, 충담사(忠談師)의 〈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讚耆婆郞歌)〉와 〈
안민가(安民歌)
(安民歌)〉, 희명(希明)(希明)의 〈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千手大悲歌)〉, 영재(英才)(永才)의 〈
우적가(遇賊歌)
(遇賊歌)〉, 처용(處容)(處容)의 〈
처용가(處容歌)
(處容歌)〉 등(等)이 있다. 그 중(中)에서도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祭亡妹歌)(祭亡妹歌)〉와 충담사(忠談師)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讚耆婆郞歌)〉는 이 시기(時期) 향가(鄕歌)를 대표(代表)하는 수작(酬酌)(秀作)으로 평가(評價)받고 있으며, 〈처용가(處容歌)〉는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윤색(潤色) 첨가(添加)되어 조선조(朝鮮朝)의 궁중음악(宮中音樂)으로 오래 연주(演奏)되어 왔다.
오늘날, 비록 그 양(量)은 얼마 되지 못하나 이 시기(時期) 시가문학(詩歌文學)의 모습을 접(接)할 수 있게 된 것은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귀족(貴族)들이 비록 한문화(韓文化)에 심취(心醉)하고 있었으나, 고유(固有)의 한국어(韓國語)를 외국문자인(外國文字人) 한자(漢字)를 빌어 표기(表記)할 수 있는 표기체계(表記體系)(表記體系)를 완성(完成)하고 그것을 실용(實用)하였다는 노력(努力)에 힘입었다 하겠다. 이 표기체계(表記體系)가 곧 향찰(鄕札)(鄕札) 또는 이두(吏讀)(吏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차자문자(車字文字)(借字文字)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문학사(國文學史)에서 향가문학(鄕歌文學)을 흔히 차자문학(次子文學)이라고도 일컫는다. 차자(次子)문학인 향가문학(鄕歌文學)을 창조(創造) 발전시킨 신라(新羅)의 귀족(貴族)들은 한편(한便)으로 한문문학도(漢文文學度) 발전시키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외국(外國)의 언어(言語)요 외국(外國)의 문자(文字)인 한자(漢字)(漢字) 한문(漢文)을 빌어 그들은 전래(傳來)해 온 신화(神話)·전설(傳說)·설화(說話)를 수집(蒐集) 채록(採錄)하기도 하고, 한편(한便)으로는 본격적(本格的)인 중국문학(中國文學)인 한시(限時)(漢詩)를 비롯하여 46변려문(騈儷文)(騈儷文)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불편(不便)도 없이 한문문학(漢文文學)을 제대로 발전시켰다. 신라(新羅) 통일(統一)을 이룩하고 대당외교(臺當外交)를 성공시키는 데 크게 활약(活躍)했던
강수(降水)
(强首)를 비롯하여, 이두문자(吏讀文字)를 통일(統一)한
설총(薛聰)
(薛聰)은 한문학(漢文學)의 대가(大家)였고,
김인문
,
김대문(金大問)
(金大問),
최치원
등(等) 앞서 든 향가(鄕歌) 작가(作家)에 못지않은 유능(有能)한 문장가(文章家)를 들 수 있다. 특히(特히) 최치원(崔致遠)은 그 문명(文明)(文名)을 중국(中國)에까지 떨치게 되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事實)이다. 그의 시문(詩文)은 오늘날 《
계원필경(桂苑筆耕)
(桂苑筆耕)》에 남았고 《
동문선(東文選)
(東文選)》과 금석문(金石文)에 그의 시문(詩文)이 남아 있다.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통일신라(統一新羅)의 문학(文學)은 크게 차자문학(次子文學)(借字文學)인 한국어(韓國語)로 된 문학(文學)과 외국어문인(外國語文人) 한문문학(漢文文學)의 두 갈래로 나뉘어 균형(均衡)있는 발전(發展)을 이룩하였다고 평가(評價)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의 문학(文學)은 후세(後世)의 한국(韓國) 문학(文學)의 연원(淵源)(淵源)으로 큰 영향(影響)을 주었다. 시가(市價) 방면(方面)에서 10구체(句體), 향가(鄕歌)의 구조적(構造的)인 특징(特徵)은 조선조(朝鮮朝)에 발달(發達)한 시조(時調)시형(時調詩形)의 근간(根幹)이 되었고, 통일신라(統一新羅)의 설화(說話)는 조선(朝鮮) 후기(後期)에 발달(發達)한
고대소설(古代小說)
의 근원설화(根源說話)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또, 한문문학(漢文文學) 방면(方面)에서도 설총(薛聰)은 동국(東國)의 홍유(鴻儒)(弘儒)로 후세 유학자(儒學者)들의 스승으로 여겨져 왔으며 최치원(崔致遠)은 동국문종(文宗)(東國文宗)으로 역시(亦是) 후세 문장가(文章家)들의 귀감(龜鑑)이 되어 왔었다.
이렇게 보면 통일신라(統一新羅)의 문학(文學)은 결국(結局) 한국(韓國) 문학(文學)의 모태(母胎)이고 근원(根源)이라 할 수 있으며, 비록 양(量)에서는 뒤지지만 문화(文化)와 예술(藝術)의 수준(水準)이 높아, 뒤따르는 한국(韓國)의 어느 시대(時代)의 문학(文學)보다 우위한(優位韓) 문학(文學)으로 평가(評價)되기도 한다.
참고(參考) 자료(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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