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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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최규하(1979년)
최규하(1979년(年))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10대(代) 대통령(大統領)
임기(任期) 1979년(年) 12월(月) 6일(日)~1980년(年) 8월(月) 16일(日)
국무총리(國務總理) 신현확 (1979년(年)~1980년(年))
전임(前任): 박정희(朴正熙) (제(第)5·6·7·8·9대(代))
후임(後任): 전두환(全斗煥) (제(第)11·12대(代))

임기(任期) 1976년(年) 3월(月) 13일(日)~1979년(年) 12월(月) 5일(日)
대통령(大統領) 박정희(朴正熙)
전임(前任): 김종필(金鍾泌) (제(第)11대(代))
후임(後任): 신현확 (제(第)13대(代))

신상정보(身上情報)
출생일(出生日) 1919년(年) 7월(月) 16일(日) ( 1919-07-16 )
출생지(出生地)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 조선(朝鮮) 강원도(江原道) 원주군(原州郡) 원주면(圓柱面) 봉산리
사망일(死亡日) 2006년(年) 10월(月) 22일(日) ( 2006-10-22 ) (87세(歲))
사망지(死亡地) 대한민국(大韓民國)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종로구(鍾路區)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病院)
매장지(埋葬地) 대한민국(大韓民國)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유성구(儒城區) 갑동 국립대전현충원(國立大前賢充員)
국적(國籍) 대한민국(大韓民國)
본관(本館) 강릉(江陵) (江陵)
학력(學歷) 도쿄고등사범학교(高等師範學校) 영어영문학과(英語英文學科)
정당(正當) 무소속(無所屬)
부모(父母) 최양오 (부(簿)), 이응선 (모(某))
배우자(配偶者) 홍기(弘基)
자녀(子女) 2남(男) 1녀(女)
종교(宗敎) 무종교(無宗敎)
별명(別名) 호(號) 현석(玄石), 자(者) 서옥(壻屋)(瑞玉)
서명(署名)

최규하 (崔圭夏,  1919년(年) 7월(月) 16일(日) ~ 2006년(年) 10월(月) 22일(日) )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의 제(第)10대(代) 대통령(大統領) 이다. 제(第)4공화국(共和國) 의 2번째(番째) 대통령(大統領)이며, 대한민국(大韓民國) 최초(最初)의 국무총리(國務總理) 출신(出身) 대통령(大統領)이었다. 본관(本貫)은 강릉(江陵) (江陵)이며, 호(號)는 현석(玄石)이다.

1945년(年)부터 경성사범대학(大學) 영문과(英文科) 교수(敎授)로 재직(在職)하다가 미(美) 군정(軍政) 중앙식량행정처(中央食糧行政處) 기획과장(企劃課長)으로 발탁(拔擢)됐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수립(政府樹立) 후(後) 농림부(農林部) 에서 근무(勤務)하다가 외무부(外務部) 로 발탁(拔擢)되면서 외교관(外交官)의 길을 걸었다. 말레이시아 대사(大使)로 임명(任命)된 후(後) 말레이시아에서 거주(居住)하기도 했으며 귀국(歸國) 이후(以後) 1967년(年)에 외무부(外務部) 장관(長官)에 발탁(拔擢)됐다. 1967년(年) 제(第)22차(次) UN 총회(總會) 수석대표(首席代表)로 참가(參加)하고 돌아왔다. 외무부(外務部) 장관(長官) 재임(在任) 시절(時節)에 '조용한 외교(外交)'를 표방(標榜)하면서 외무(外務) 행정(行政) 조직(組織)의 강화(强化)를 꾀했고 통상(通商) 외교(外交)를 강화(强化)했다. 1970년(年) 한국외국어대학교(韓國外國語大學校) 명예문학박사학위(名譽文學博士學位)를 받았다. 1971년(年) 대통령(大統領) 외교담당(外交擔當) 특별보좌관(特別補佐官)에 취임(就任)해 1972년(年) 남북조절위원회(南北調節委員會) 위원(委員)이 되어 평양(平壤) 에 다녀왔다. 대통령특사(大統領特使)로 7회(回)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等) 24개국(個國)을 친선(親善) 방문(訪問)했다.

1975년(年) 12월(月) 19일(日) 국무총리(國務總理) 서리(署理)로 임명(任命)되었고, 1976년(年) 3월(月) 13일(日) 국회(國會)의 동의(同意)를 거쳐 국무총리(國務總理)가 됐으며, 1979년(年) 3월(月)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재신임(再信任)됐다. 10.26 사건(事件) 으로 대통령(大統領) 박정희(朴正熙) 가 사망(死亡)하자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을 거쳐 제(第)10대(代) 대통령(大統領)에 취임(就任)했다. 1979년(年) 10월(月) 27일(日)부터 1979년(年) 12월(月) 6일(日)까지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으로, 1979년(年) 12월(月) 6일(日)부터 1980년(年) 8월(月) 16일(日)까지 군부(軍部) 실권하(圈下)의 대통령(大統領)으로 재임(再任)하였다.

대통령(大統領) 재직(在職) 시기(時期),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재직(在職) 초반(初盤)부터 하나회가 반란(叛亂)을 일으켜 군부(軍部)의 실권(實權)을 장악(掌握)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에는 민주화(民主化) 시위(示威)가 터지기도 했다. 서울의(醫)봄 이후(以後)에도 계속(繼續) 통치(統治)하다가 1980년(年) 8월(月) 16일(日) 대통령(大統領) 직(職)에서 퇴임(退任)했고 퇴임(退任) 후(後) 박충훈 국무총리(國務總理) 서리(署理)가 잠시(暫時)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을 지냈다. 역대(歷代)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통령(大統領) 가운데 영어(英語) 를 가장 능통(能通)하게 구사(驅使)한 인물(人物)은 이승만(李承晩) 다음으로 최규하가 꼽힌다. [1]

생애(生涯) [ 편집(編輯) ]

생애(生涯) 초기(初期) [ 편집(編輯) ]

출생(出生)과 가계(家計) [ 편집(編輯) ]

1919년(年) 7월(月) 16일(日) 강원도(江原道) 원주군(原州郡) 원주면(圓柱面) 봉산리(현(現), 강원도(江原道) 원주시(原州市) 봉산동 ) 836-2에서 최양오(崔養吾)와 전주(全州)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양오는 학교(學校) 훈도(訓導)를 역임(歷任)했고, 잠시(暫時) 원주군(原州郡) 원주면장(原州面長)을 역임(歷任)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최재민(崔在民)은 1897년(年)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 를 역임(歷任)했다. 박사(博士)는 조선(朝鮮)의 관직(官職) 명칭(名稱)이었으며 그의 집은 할아버지가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를 역임(歷任)한 이유(理由)로 최박사댁(崔博士宅)이라 불렸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한학자(漢學者)였던 할아버지로부터 한학(漢學)을 배워 〈동몽선습(童蒙先習)〉·〈효경(孝經)〉 등(等)을 시작(始作)하여 〈소학(小學)〉·〈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통감(痛感)〉 등(等)을 읽었다.

1928년(年) 3월(月) 10세(歲) 때 원주보통학교(原州普通學校)에 3학년(學年)으로 월반(越班) 입학(入學)했다. 1932년(年) 2월(月) 원주보통학교(原州普通學校)를 졸업(卒業)할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문(門)과 예절(禮節)을 배우는 가정학습(家庭學習)은 계속(繼續)되었다. 1932년(年) 3월(月) 30일(日)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公立高等普通學校) (지금(只今)의 경기중학교(景氣中學校) , 경기고등학교 의 전신(前身))에 입학(入學)했다. 경성고보 4학년(學年) 재학(在學) 중(中)인 1935년(年) 11월(月) 부모(父母)의 뜻에 따라 홍병순(洪炳純)의 세째 딸 홍기(弘基) (洪基)와 결혼(結婚)을 했다.

고등학교(高等學校) 재학(在學) 시절(時節) [ 편집(編輯) ]

그는 원주(原州) 를 떠나 서울에서 학교(學校)를 다녔다. 종로구(鍾路區) 단성사(團成社) 뒤 봉익동의 친척(親戚)집에서 학교(學校)를 다녔다 한다. [2] 사교성(社交性)이 좋은 민관식 은 최규하가 사는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2]

1937년(年) 2월(月)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公立高等普通學校) 를 33기(期)로 졸업(卒業)했다. 그의 경성제(京城第)1고보(高普) 졸업(卒業) 동기생(同期生)은 이영섭 대법원장(大法院長) 등(等)이 있다. [3] 낙제(落第)를 하여 1년(年) 유급(留級)되어 복학생(復學生)이 된 민관식 은 최규하와 함께 졸업장(卒業狀)을 받았지만 그의 고교(高校) 1년(年) 선배(先輩)였다. [3] 후일(後日) 최규하가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으로 있을 때 그의 동창(同窓)인 이영섭은 대법원장(大法院長)이었고, 졸업(卒業) 동기(動機)인 민관식 국회의장(國會議長) 직무대행(職務代行) 자격(資格)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어학(語學) 실력(實力)에 뛰어났던 그는 영어(英語) 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구사(驅使)하였다. 영어(英語) 를 제(第)1언어(言語)처럼 사용(使用)했던 이승만(李承晩) 다음으로 영어(英語)에 능통(能通)했던 대통령(大統領)으로 꼽히기도 한다. [4]

교육(敎育) 활동(活動)과 공직(公職) 진출(進出) [ 편집(編輯) ]

그 뒤 일본(日本) 으로 유학(留學), 도쿄고등사범학교(高等師範學校)(현(現), 쓰쿠바 대학(大學) (筑波大?)의 전신(前身))로 진학(進學)해 영어(英語) 영문학(英文學)을 전공(專攻)했으며, 1941년(年) 2월(月) 일본(日本) 도쿄고등사범학교(高等師範學校) 영어영문학과(英語英文學科)를 졸업(卒業)하고, 그해 3월(月) 만주(滿洲) 로 건너가 만주(滿洲) 국립대동학원(國立大桐學院)(國立大同學院) 정치행정반(政治行政班)에 입학(入學), 1943년(年) 7월(月) 5일(日) 만주(滿洲) 국립대동학원(國立大桐學院) 정치행정반(政治行政班)을 수료(修了)하였다. [5] 만주국(滿洲國)의 관료(官僚)로 재직(在職)했지만 그는 이때의 기록(記錄)을 남기지 않았다. [6] 언제, 어떤 경로(經路)로 귀국(歸國)했는지도 기록(記錄)이 없다. [6]

1945년(年) 8월(月) 이후(以後) 귀국(歸國), 경성사범대학(大學) 영문학과(英文學科) 조교수(助敎授) 에 취임(就任)하여 교단(敎壇)에 섰다. 경성사범 조교수(助敎授)로 재직(在職) 중(中) 1946년(年) 4월(月) 미(美) 군정청(軍政廳) 중앙식량행정처(中央食糧行政處) 기획과장(企劃課長)으로 발탁(拔擢)되면서 공직(公職)에 투신(投身), 농림행정(農林行政)에 종사(從事)하게 됐다. 1947년(年) 중앙식량행정처(中央食糧行政處) 행정실장(行政室長)이 되었다가 1948년(年) 8월(月) 15일(日)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 수립(樹立) 이후(以後)에는 농림부(農林部) 로 보직(補職)되어 양정과장(量鄭課長)이 되었으며, 1951년(年) 농림부(農林部) 농지관리국장(農地管理國葬) 서리(署理) 등(等)을 지냈다. 1948년(年)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수립(政府樹立) 후(後) 농림부(農林部) 양정과장(量鄭課長)이 됐으며, 그해 9월(月) 26일(日) 부터 10월(月) 10일(日) 싱가포르 에서 열린 국제연합(國際聯合) 식량농업기구(食糧農業機構)(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아시아 지역(地域) 미곡위원회(米穀委員會) 회의(會議)에 농림부(農林部) 차관(次官) 정흥구와 함께 한국대표(韓國代表)로 참가(參加)했다. [7] 이 회의(會議)에서 그는 외국어(外國語) 구사능력(驅使能力)과 국제회의(國際會議) 대표(代表)로서의 활동력(活動力)을 인정(認定)받아 인재(人材)의 적재적소(適材適所) 보임을 주장(主張)하던 당시(當時)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 변영태 에 의(依)해 발탁(拔擢)됐다. [8] 이후(以後)에는 농림부(農林部) 귀속농지관리국장(歸屬農地管理局長), 외무부(外務部) 통상국장(通商局長)으로 자리를 옮겨 외교관(外交官)이 되었다. 1951년(年) 9월(月) 9일(日) 부터 9월(月) 18일(日) 에는 싱가포르 에서 열리는 원동(遠東) 경제위원회(經濟委員會)에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표단원(代表團員)의 한사람으로 참석(參席)하였다.

이때 그는 서을특별시(鉏乙特別市) 마포구(麻浦區) 서교동에 집을 마련했는데 짧은 청와대생활(靑瓦臺生活) 외(外)에 계속(繼續) 이곳에서 거주(居住)하였다. 강원도(江原道) 원주시(原州市) 봉산동 에 있던 그의 생가(生家)는 그가 1994년(年) 원주시(原州市) 에 기증(寄贈)하였고, 원주시립박물관(原州市立博物館) 부지(敷地)가 되었다.

공직(公職) 생활(生活) [ 편집(編輯) ]

일본(日本) 대사관(大使館) 생활(生活) [ 편집(編輯) ]

외교관(外交官) 재직(在職) 중(中)의 최규하

외무부(外務部) 통상국장(通商局長)으로 재직(在職) 중(中) 1951년(年)부터 1952년(年)까지 ECAFE 무역진흥회(貿易振興會)의 한국측(韓國側) 수석대표(首席代表)로 참석(參席)하고 돌아왔다. 1952년(年) 7월(月) 17일(日) 도쿄 의 주일(週日)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표부(代表部) 총영사(總領事) 로 부임(赴任)하였다. 1953년(年) 10월(月) 6일(日) ~ 10월(月) 10일(日) 일본(日本) 외무성(外務省) 에서 한국(韓國)-일본(日本) 양측(兩側) 대표단(代表團) 각(各) 18명(名)이 참여(參與)한 한일회담(韓日會談)에 배석(陪席), 참여(參與)하였다. 1954년(年) 10월(月) 6일(日) ~ 10월(月) 13일(日) 일본(日本) 도쿄에서 열린 극동경제위원회(極東經濟委員會)에 한국(韓國) 대표자(代表者)의 한사람으로 현지(現地)에서 참석(參席)했다. 1955년(年) 7월(月) 8일(日) 겸(兼) 이사관 에 임명(任命)되고 외자청(外資靑) 직원(職員)을 겸직(兼職)하였다. 1957년(年) 5월(月) 16일(日) 주일한국대표부(週日韓國代表部) 참사관(參事官)(參事官) 등(等)을 지냈으며, 그해 12월(月)에는 재일교포체육회(在日僑胞體育會) 회장(會長)에 선임(選任)되었다.

1958년(年) 4월(月)부터 10월(月)까지 그는 제(第)4차(次) 한일회담(韓日會談)의 한국측(韓國側) 대표(代表)의 한 사람으로 참여(參與)하였으나 배상액수(賠償額數)에 대(對)한 한일(韓日) 양국간(兩國間) 입장차이(立場差異)로 성과(成果)를 얻지 못하였다. 1959년(年) 3월(月) 20일(日) 주일대표부(週日代表部) 공사(公社)로 승진(昇進),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極東經濟委員會)(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ECAFE) 제(第)11·12·13차(次) 총회(總會)와 제(第)4차(次) 한일회담(韓日會談)에 한국대표(韓國代表)로 참가(參加)하였다. 그 해 귀국(歸國)하여 1959년(年) 9월(月) 12일(日) 외무부(外務部) 차관(次官)이 됐다. 1960년(年)부터는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 직무대행(職務代行)을 겸하다가 4·19혁명(革命) 후(後)인 1960년(年) 5월(月) 12일(日) 외무부(外務部) 차관직(次官職)을 사임(辭任)했다. [8]

군사(軍事) 정부(政府)에 참여(參與) [ 편집(編輯) ]

1960년(年) 6월(月) 3·15 부정(不正) 선거(選擧) 에 관련(關聯)되었나 여부(與否)에 대(對)해 경찰(警察)의 수사대상(搜査對象)에 올랐으나 혐의(嫌疑) 없음으로 밝혀져 처벌(處罰)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당(自由黨) 내각(內閣)의 각료(閣僚)라고 하여 1961년(年) 1월(月) 공민권(公民權) 제한(制限) 대상자(對象者)의 한 사람에 선정(選定)되고 그해 2월(月) 재수사(再搜査)를 받았지만 혐의(嫌疑)없음으로 처리(處理)되었다.

1962년(年) 1월(月) 민주(民主)공화당 의 사전(事前) 창당조직(創黨組織) 연구(硏究)팀과 사전(事前) 조직(組織)인 동양화학 주식회사(株式會社)의 창립(創立)에 참여(參與)하였다. [9] 5.16이 일어난 지 3개월(個月) 만인 1961년(年) 8월(月)에 김종필(金鍾泌) 은 민정인수(民政引受) 구상(構想)의 하나로 공화당을 사전조직(事前組織)하기 시작(始作)했던 것이다. [9] 이러한 공화당(共和黨) 사전조직(事前組織)은 박정희(朴正熙) 의 재가(裁可)를 얻은 김종필(金鍾泌) 의 새 정당(政黨) 창당구상(創黨構想) 연구(硏究)팀으로, 책임자(責任者)는 예비역(豫備役) 육군(陸軍) 중장(中將) 최영두이고, 윤천계(尹天界)(고대(古代)), 김성희(서울대(서울大)), 강상운(중앙대) 교수(敎授)와 이종극, 김운태, 윤태림, 정범모, 박종화 , 유호선, 김정렴 , 김학열, 최규하, 이필석, 홍승면 등(等)으로 구성(構成)되었다. [9] 이들은 1962년(年) 1월(月) 이 연구실(硏究室)의 이름을 '동양화학 주식회사(株式會社)'로 위장(僞裝)하고 종로(鍾路) 2가(街) 뒷골목 제일전당포(第一典當舖) 2~3층(層)에 사무실(事務室)을 차렸다. [9]

1962년(年) 서울 아시아반공연맹(反共聯盟) 총회(總會)에 참석(參席)하여 임시의장(臨時議長)으로 사회(社會)를 보았으며, 민족반공연맹(民族反共聯盟) 임시총회의장(臨時總會議長)에 선출(選出)되었다. 반공연맹(反共聯盟) 총회(總會)에 다녀온 뒤 외무부(外務部) 장관(長官) 고문(拷問)으로 복귀(復歸)하고 1962년(年) 7월(月) 새로 개최(開催)되는 한일회담(韓日會談)의 고문(拷問)이 되었다. 1963년(年) 외무부(外務部) 본부(本部) 대사(臺詞)를 거쳐 그해 3월(月)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 의장(議長) 외교담당(外交擔當) 고문(拷問)이 됐으며, 4월(月) 한일회담(韓日會談)에서 한국측(韓國側) 교섭대표(交涉代表)의 한 사람으로 선출(選出)됐다. 1963년(年) 5월(月) 8일(日)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 의장(議長) 정책소위(政策小委) 고문(拷問), 1964년(年) 주(週) 말레이시아 한국(韓國) 대사(大使)(1964년(年) 11월(月)~1967년(年) 6월(月))를 지내고 귀국(歸國)하여 1967년(年) 6월(月) 외무부(外務部) 장관(長官)에 발탁(拔擢)됐다.

외무부(外務部) 장관(長官) 시절(時節) [ 편집(編輯) ]

그는 직접(直接) 외국(外國)을 다니며 외국(外國)을 상대(相對)로 북한측(北韓側)과 외교(外交) 논전(論戰)을 벌였다. 당시(當時)에는 북한(北韓)과의 외교전(外交前)이 한창이라 외무장관(外務長官)들은 스스로 해외(海外)에 나가 유엔에서의 지지(支持)를 얻어내기 위해 담판(談判)을 짓는 일이 흔했다. 이때 최규하 외무장관(外務長官)은 뛰어난 영어(英語) 실력(實力)을 바탕으로 북한(北韓)과의 외교(外交) 전쟁(戰爭)에서 맹활약(猛活躍)을 하였다. [4]

67년(年) 제(第)22차(次) 유엔총회(總會) 한국(韓國) 측(側) 수석대표(首席代表)로 참가(參加)하고 돌아왔다.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으로 재임시(在任時) '조용한 외교(外交)'를 표방(標榜)하면서 외무행정조직(外務行政組織)의 강화(强化)를 꾀했고 통상외교(通商外交)를 강화(强化)했다. 1968 제(第)19차(次) 콜롬보계획자문위원회(計畫諮問委員會) 각료회의(閣僚會議)에 한국정부(韓國政府) 대표자(代表者)의 한 사람으로 참석(參席)했으며, 이때 자문위원회(諮問委員會) 각료회의(閣僚會議) 의장(議長)에 선출(選出)되었다. 1969년(年) 6월(月) 2일(日) 미국(美國)의 패(牌)카드 국방차관(國防次官)을 만난 뒤 6월(月) 3일(日)과 6월(月) 4일(日)에는 연례(年例) 한미(韓美) 국방각료회의(國防閣僚會議)에 참석(參席)하였다. [10] 1970년(年) 한국외국어대학교(韓國外國語大學校) 명예문학박사학위(名譽文學博士學位)를 받았다.

1970년(年) 4월(月) 3일(日) 부터 4월(月) 10일(日) 타이완 , 태국(泰國) 등(等)을 순방(巡訪)하고 귀국(歸國)했다.

1970년(年) 5월(月) 자카르타 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국제회의(太平洋國際會議)에 참석(參席)하고 귀국(歸國)했다. [11] 1970년(年) 11월(月) 유엔 총회(總會)에 참석(參席)하고 [12] , 귀국(歸國)하였다.

국무총리(國務總理) 서리(署理)와 총리(總理) 재직(在職) [ 편집(編輯) ]

1971년(年) 대통령(大統領) 외교담당(外交擔當) 특별보좌관(特別補佐官)에 취임(就任)해 1972년(年) 남북조절위원회(南北調節委員會) 위원(委員)이 되어 평양(平壤) 에 다녀왔다. 대통령특사(大統領特使)로 7회(回)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等) 24개국(個國)을 친선방문(親善訪問)했다. [8]

1975년(年) 국무총리(國務總理) 서리 를 거쳐 1976년(年) 3월(月) 국무총리(國務總理) 에 기용(起用)되었다. 박정희(朴正熙) 는 그의 '과묵(寡默)하면서도 정치적(政治的) 수완(手腕)이 부족(不足)한 점(點)을 높이 평가(評價)해 그를 국무총리(國務總理)로 발탁(拔擢)했다'고 한다. [13] 1977년(年) 7월(月) 25일(日) 및 26일(日)에는 대한민국(大韓民國) 과 미국(美國) 간(間)의 제(第)10차(次) 안보(安保) 연례협의회의(年例協議會議)가 서울 에서 개최(開催)되었다. [14] 최규하는 서종철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 해럴드 브라운 미국(美國)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 노재현 대한민국(大韓民國) 합참의장(合參議長), 조지 에스 브라운 미(美) 합참의장(合參議長), 그리고 양국(兩國) 정부(政府)의 고위외교(高位外交) 및 국방관리(國防官吏)들과 이 회의(會議)에 참석(參席)하였다. [14]

1977년(年) 7월(月) 26일(日)에는 해럴드 브라운 미국(美國) 국방장관(國防長官)이 찾아와 면담(面談)하였다. [15] 이어 제(第)10차(次) 한미안보연례회의(韓美安保年例會議)에 국방부(國防部) 장관(長官) 서종철 , 합동참모본부(合同參謀本部) 의장(議長) 노재현 을 데리고 회의(會議)에 참석(參席)했다. 1979년(年) 3월(月)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재선출(再選出)됐다. 동창회(同窓會)에 초대(招待)돼도 거절(拒絶)했다 한다. 국무총리(國務總理) 재직(在職) 중(中) 근검절약(勤儉節約)하고 깨끗한 공직생활(公職生活)을 한 것으로 평가(評價)받았다.

1979년(年) 6월(月) 30일(日)과 7월(月) 1일(日) 한국(韓國) 대통령(大統領) 박정희(朴正熙)와 미국(美國) 대통령(大統領) 지미 카터 간(間)에 한미정상회담(韓美頂上會談)이 서울 청와대(靑瓦臺)에서 개최(開催)되었다. 최규하는 당시(當時) 한국측(韓國側) 각료(閣僚)의 한 사람으로 배석(陪席)하였다. [16] 이 회담(會談)에 한국측(韓國側)으로부터는 최규하 국무총리(國務總理), 박동진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 노재현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大統領祕書室長), 김용식 대사(臺詞)가, 그리고 미국(美國) 측(側)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國務長官),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國防長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담당(國家安保擔當) 보좌관(補佐官), 리처드 홀부르크 국무차관보(國務次官補) 및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臺詞)가 배석(陪席)하였다. [16]

1979년(年) 10.26 사건(事件) 으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이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김재규 의 피습(被襲)을 받고 살해(殺害)되면서, 당시(當時) 국무총리(國務總理) 를 맡고 있던 최규하는 비상국무회의(非常國務會議)를 소집(召集)하고, 대통령(大統領) 직무대행(職務代行)으로서 권력(權力)을 이양(移讓)받았다. 비상국무회의(非常國務會議)에서 제주도(濟州島)를 제외(除外)한 전국(全國)에 비상계엄령(非常戒嚴令) 을 선포(宣布)하기로 결정(決定)했다.

10.26과 12.12 사태(事態) [ 편집(編輯) ]

10.26 사태(事態) 전후(前後) [ 편집(編輯) ]

1979년(年) 10월(月) 26일(日)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9대(代) 대통령(大統領) 박정희(朴正熙) 서울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김재규 에 의(依)해 살해(殺害)되었다. 그날 11시(時)의 비상국무회의(非常國務會議)를 소집(召集)하고 대통령(大統領) 유고(有故)를 발표(發表)한다. 박정희(朴正熙)가 살해당(殺害當)한 다음 날인 1979년(年) 10월(月) 27일(日) 제주도(濟州道) 를 제외(除外)한 전국(全國)에 비상계엄령(非常戒嚴令)이 선포(宣布)되었다. 이 날 국무총리(國務總理) 최규하가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이 되었다. [17]

박정희(朴正熙) 의 뒤를 이어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을 맡은 최규하는 계엄령(戒嚴令) 을 선포(宣布)하였다. 그리고 유신(維新) 헌법(憲法)을 따라 대통령(大統領) 을 뽑은 뒤 개헌(改憲)하겠다는 정치(政治) 일정(日程)을 발표(發表)하였다.

10월(月) 27일(日) 새벽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이 된 그는 박정희(朴正熙) 피살사건(被殺事件)의 조속(早速)한 수사(搜査)를 명령(命令)하고, 10월(月) 28일(日) 비상회의(非常會議)에서는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김재규 를 10월(月) 27일자(日子)로 소급해임(溯及解任)했다. 육군대장(陸軍大將) 정승화(鄭昇和) 가 계엄사령부(戒嚴司令部) 사령관(司令官)이 되었고, 육군소장(陸軍少將) 전두환(全斗煥) 은 계엄사령부(戒嚴司令部) 합동수사본부장(合同搜査本部長)으로 임명(任命)됐다. 11월(月) 3일(日) 암살(暗殺)된 박정희(朴正熙) 의 빈소(殯所)에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中將)(뒤에 대한민국장 으로 명칭(名稱) 변경(變更))을 추서(追敍)하고, 국장(國葬) (國葬)을 결정(決定), 박정희대통령국장위원회(朴正熙大統領國葬委員會) 위원장(委員長)이 되어 국장(國葬) 을 주관(主管)했다.

처음에는 차지철 로 보고(報告)받았다가 김재규 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의 살해범(殺害犯)이라고 보고(報告)받은 최규하는 10월(月) 28일(日) 전날(前날) 부(部)로 김재규 의 중앙정보부장직(中央情報部長職)을 면직(免職)하고 전두환(全斗煥) 을 합동수사본부장(合同搜査本部長)에 임명하여 수사(搜査)를 지시(指示)한다.

학생(學生) 운동(運動) 세력(勢力)의 시위(示威) [ 편집(編輯) ]

1979년(年) 11월(月) 서울 학생(學生) 운동가(運動家)들의 시위(示威)를 시작(始作)으로 각지(各地)에서 유신(維新) 헌법(憲法)을 철폐(撤廢)하라는 시위(示威)가 터져나왔다. 최규하는 계엄령(戒嚴令)을 풀지 않고 지켜보았다. 1979년(年) 11월(月) 24일(日) 재야(在野) 세력(勢力)들은 국민(國民) 대회(大會)를 열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대통령(大統領)을 선출(選出)하는 것을 중단(中斷)하라고 강력(强力)하게 요구(要求)하였다. [18] 재야(在野) 세력(勢力)들은 당시(當時) 상황(狀況)을 10년(年) 넘게 각계(各界) 각층(各層) 민중(民衆)이 고난(苦難)에 찬 반독재(反獨裁) 투쟁(鬪爭)을 벌인 결과(結果)로 보면서 참된 국민(國民)의 합의(合意)에 기초(基礎)를 둔 민주(民主) 헌정(憲政)을 서둘러 출범(出帆)시키라고 요구(要求)하였다. 최규하는 유신(維新) 잔당(殘黨)으로 몰리면서도 당분간(當分間) 방침(方針)에는 변화(變化)가 없을 것임을 선언(宣言)하고 10.26 사건(事件) 에 대(對)한 수사(搜査)에 전념(專念)하였다.

1979년(年) 제(第)10대(代) 대통령(大統領) 간접선거(間接選擧) [ 편집(編輯) ]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이 개인적(個人的)으로 이용(利用)했던 푸조 604 .

현직(現職) 대통령(大統領) 박정희(朴正熙) 김재규 에 의(依)하여 피살(被殺)된 후(後), 권력공백(權力空白)에 따라, 우선(于先) 헌법(憲法) 제(第)48조(條)에 따라 당시(當時) 국무총리(國務總理)이던 최규하가 10월(月) 27일(日) 부(部)로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으로 취임(就任)하였다. 그는 현행(現行) 헌법(憲法)을 존속시키면서 제(第)8대(代) · 제(第)9대(代) 와 똑같은 방법(方法)으로 제(第)10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를 실시(實施)하기로 하였다.

11월(月) 6일(日) 최규하는 유신(維新) 헌법(憲法) 에 따라 새 대통령(大統領) 을 선출(選出)하고 새 대통령(大統領) 이 빠른 시일(時日) 내(內)에 헌법(憲法)을 개정(改正)한다는 '시국(時局)에 관(關)한 담화(談話)'를 발표(發表)하였다. [19] 윤보선 은 즉시(卽時) 그에게 정치범(政治犯) 석방(釋放)을 요구(要求)하였지만 그는 윤보선(尹潽善)의 부탁(付託)에 대(對)한 답변(答辯)은 회피(回避)하였다.

최규하의 담화(談話)가 나오자 '민주주의(民主主義)와 민족통일(民族統一)을 위한 국민연합(國民聯合)'은 11월(月) 12일(日)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대통령(大統領)을 선출(選出)한다는 것은 결코(決코) 용납(容納)할 수 없다고 밝히고, 민주헌법(民主憲法)을 3개월(個月) 이내(以內)에 제정(制定)하고 빠른 시일(時日) 내(內)에 선거(選擧)를 실시(實施)할 것을 요구(要求)했다. [20] 그러나 최규하는 이에 대(對)한 응답(應答)을 회피(回避)하였다. 11월(月) 13일(日) 동아, 조선(朝鮮)투위 등(等)에서도 공동(共同) 성명(聲明)을 발표(發表)했다. 11월(月) 22일(日) 서울대생(生)들도(度) 조기(早期) 개헌(改憲), 조기(早期) 총선(總選)을 요구(要求)하며 시위(示威)를 벌였다. 11월(月) 24일(日) 서울 YMCA 강당(講堂)에서 400여(餘) 명(名)이 집회(集會)를 갖고 '통대 저지(沮止)를 위한 국민선언(國民宣言)'을 발표(發表)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代議員)(통대)에 의(依)한 체육관대통령(體育館大統領) 선출(選出)을 강력히(强力히) 비판(批判)하고 국민(國民) 기본권(基本權) 을 보장(保障)해 국민(國民)의 적극적(積極的) 참여(參與)로 헌법(憲法)을 확정(確定)할 것을 주장(主張)했다. [20] 여기에는 함석헌 , 윤보선 , 백기완 등(等)이 참여(參與)하였으나 경찰(警察)의 연행(連行)으로 저지(沮止)되었다.

당시(當時) 헌법(憲法) 때문에 야권(野圈)의 입후보(立候補)는 사실상(事實上) 금지(禁止)되어 있었다. 결국(結局) 무소속(無所屬)인 최규하가 단독(單獨)으로 출마(出馬)하였고, 12월(月) 6일(日) 치러진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에서 96.7%(2,465표(票))의 득표율(得票率)을 얻고 당선(當選)되었다. [8] 특이(特異)한 점(點)은 무효표(無效票)가 무려(無慮) 84표(票)나 나온 것이 특징(特徵)이었다.

1979년(年) 12월(月)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議長)에 피선(被選)되었으며, 12월(月) 6일(日) 통대에서 최규하가 대통령(大統領)에 선출(選出)되어 다음 날 국무회의(國務會議)에서 긴급조치(緊急措置) 9호(號) 해제(解除)를 의결(議決)하였다. [20] 12월(月) 10일(日) 최규하는 총리직(總理職)을 사직(辭職)하고 신현확을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임명하였다. 이후(以後) 12월(月) 21일(日) 취임식(就任式)을 거행(擧行)하였다.

12·12 군사(軍事) 반란(叛亂) [ 편집(編輯) ]

최규하가 10대(代) 대통령(大統領)으로 취임(就任)한 후(後) 10.26사건(事件) 을 수사중(搜査中)이던 합동수사본부(合同搜査本部)(본부장(本部長) 전두환(全斗煥) )는 당시(當時) 정승화(鄭昇和) 계엄사령관(戒嚴司令官)이 10·26 사건(事件) 당일(當日) 사건현장(事件現場)에 있었으며 사건발생(事件發生) 전후(前後) 대통령(大統領) 시해범(弑害犯) 김재규 와 상황(狀況)에 대(對)한 협의(協議)가 있었음을 파악(把握)하고 12월(月) 12일(日) 오후(午後)에 정승화(鄭昇華) 체포작전(逮捕作戰)을 벌이게 되는데 이와 관련(關聯)된 일련(一連)의 상황(狀況)을 12.12사태(事態) 라고 한다.

12·12 군사(軍事) 반란(叛亂) 시기(時期)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은 노재현 국방부(國防部) 장관(長官)의 의견(意見)을 듣기 위해 전두환 합수부장(部長)이 오후(午後) 6시(時)에 올린 정승화(鄭昇華) 계엄사령관(戒嚴司令官) 체포건의(逮捕建議) 재가(裁可)를 미루었는데 결국(結局)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의 결재(決裁)는 정승화가 체포(逮捕)되고 노재현 장관(長官)이 나타난 이후(以後)인 12월(月) 13일(日) 오전(午前) 5시(時) 10분(分)에 사후(事後) 승인(承認) 형식(形式)으로 이루어졌다.

한편(한便), 노재현 국방장관(國防長官)은 한남동(漢南洞) 국방장관(國防長官) 공관(公館) 옆에 있던 정승화(鄭昇華) 계엄사령관(戒嚴司令官)의 공관(公館)에서 12월(月) 12일(日) 오후(午後) 07시(時) 20분경(分頃) 총소리(銃소리)가 나자 바로 가족(家族)들을 데리고 피신(避身)하였고, 가족(家族)들을 피신(避身)시킨 후(後) 자신(自身)은 육군본부(陸軍本部) , 한미연합사(韓美聯合司) 사령부(司令部) 등(等)으로 피신(避身)다니다가 12월(月) 12일(日) 오후(午後) 10시(時) 10분(分) 한미연합사(韓美聯合司) 상황실(狀況室)에서 최규하 대통령(大統領)과 통화(通話)가 이루어지자 대통령(大統領)이 들어오라고 지시(指示)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 후(後) 김영휴 국방차관(國防次官) 등(等)의 거듭된 대통령(大統領) 면담(面談) 권유(勸誘)에도 움직이지 않다가 12월(月) 13일(日) 오전(午前) 03시(時) 50분경(分頃) 국방부(國防部)로 노재현 장관(長官)을 찾으러 간 신현확 국무총리(國務總理)와 이희성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서리(署理)의 설득(說得)에 의(依)해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이 있는 곳으로 출발(出發)했다고 한다. [21]

대통령(大統領) 재임시(在任時) [ 편집(編輯) ]

집권(執權) 초기(初期) [ 편집(編輯) ]

제(第)4공화국(共和國)의 두 번째(番째) 대통령(大統領)이 된 최규하는 비상조치(非常措置)를 해제(解除)하면서 민주적(民主的) 선거절차(選擧節次)에 의(依)한 새 정부(政府) 출범(出帆)을 국민(國民)들에게 약속(約束)하고 6년(年) 임기(任期)의 대통령(大統領)으로 선출(選出)되었으나 8개월(個月)만에 사임(辭任)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 역사상(歷史上) 최단기(最短期) 집권(執權) 대통령(大統領)이라는 불명예(不名譽)를 안게 되었다.

12월(月) 7일(日) 부총리(副總理) 신현확을 총리(總理)로 지명(指名)하는 등(等) 정식(正式)으로 업무(業務)를 수행(遂行)하기 시작(始作)했으며, 1979년(年) 12월(月) 21일(日) 취임식(就任式)을 거행(擧行)하였다. 취임사(就任辭)에서 그는 국론분열(國論分裂) 방지(防止)와 정치안정(政治安定)을 강조(强調)했다. [22] 12월(月) 21일(日)에는 긴급조치(緊急措置) 관련자(關聯者) 561명(名)이 특별사면(特別赦免)되고, 1,330명(名)이 석방(釋放)되었다. 또한 제적학생(除籍學生) 759명(名)이 복학(復學)되고, 해직교수(解職敎授) 19명(名)이 복직(復職)되었다. [23] 그러나 그는 유신(維新) 정권(政權)의 국무총리(國務總理) 였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代議員) 들에 의(依)해 대통령(大統領) 에 선출(選出)된 만큼, 그의 정권(政權)은 정당(正當)한 정권(政權)으로서의 권위(權威)를 누릴 수 없었다. [24] 또한 최규하는 공직(公職) 생활(生活) 중(中)에 독자적(獨自的)으로 자기(自己) 세력(勢力), 자기(自己) 파벌(派閥)을 형성(形成)하지 못했다. 정치적(政治的) 기반(基盤)이 취약(脆弱)했던 최규하는 신군부(新軍部) 의 권력(權力) 장악(掌握)을 사실상(事實上) 인정(認定)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 의(依)해 퇴임(退任)할 때까지 허수아비 대통령(大統領)으로서의 역할(役割)을 수행(遂行)했다. [13]

1980년(年) 2월(月)에는 윤보선 , 김대중(金大中) 등(等) 687명(名)의 복권(福券)을 선언(宣言)하였다. [23] 그는 이한빈 등(等)을 발탁(拔擢)하여 경제부처(經濟部處)를 운용(運用)케 했다. 1980년(年) 상반기(上半期)에는 국제(國際) 원유(原油)가 인상(引上) 등(等)으로 소비자(消費者)의 물가(物價)의 상승률(上昇率)이 30%에 달(達)했다. 1980년(年) 5월(月)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스 경식대훈장(硬式大勳章), 쿠웨이트 무바락알하비르 경식대훈장(硬式大勳章)을 특별히(特別히) 선물(膳物)로 수여(授與)받았다.

그는 한국(韓國) 헌정사상(憲政史上) 정당(政黨)에 관여(關與)하지 않은 직업공무원(職業公務員)으로서 과장(課長)·국장(局長)·차관(次官)·장관(長官)·국무총리(國務總理)를 차례(次例)로 거쳐 대통령(大統領)이 된 첫 번째(番째) 사람이었다. 장기집권(長期執權)을 하던 박정희(朴正熙) 의 암살(暗殺)로 국민(國民)들은 유신헌법(維新憲法)의 폐지(廢止)를 통한 민주화(民主化)를 원(願)했다. 국가원로(國家元老)들과 전(前) 대통령(大統領) 윤보선 은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에게 유신(維新) 체제(體制)를 폐지(廢止)하고 새로운 민주적(民主的) 절차(節次)에 의(依)한 선거(選擧)로 새 정부(政府)를 구성(構成)할 것을 요청(要請)했다.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은 비상조치(非常措置)를 해제(解除)해 금지(禁止)됐던 헌법(憲法) 개정(改正) 논의(論議)를 허락(許諾)했다.

한편(한便) 그는 경호수행(警護隨行) 절차(節次)를 무시(無視)하거나 행사(行事) 시(時) 곧잘 엉뚱한 행동(行動)을 하여 화제(話題)가 되기도 했다. [25]

그는 전임(前任)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과 달리 철벽(鐵壁) 경호(警護)를 귀찮게 생각했다. 대통령(大統領)이 청와대(靑瓦臺) 경내(境內)를 산책(散策)한다고 하자 대통령(大統領) 경호실장(警護室長)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런데 그는 '그만 가서 일 보라. 나 같은 사람에게 누가 총(銃)을 겨누겠는가'라며 경호실장(警護室長)을 돌려보냈다. [26]

실권(實權) 없는 대통령(大統領) [ 편집(編輯) ]

그러나 하나회 의 정치군인(政治軍人)들이 12.12 군사(軍事) 반란(叛亂) 을 일으키면서 국방부(國防部) 고관(高官)과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陸軍參謀總長), 정병주 특전사령관(特戰司令官), 장태완 수경사령관(首警司令官) 등(等)을 붙잡아 감금(監禁)시키고 군부(軍部)를 장악(掌握)한 뒤, 정부(政府)의 실권(實權)을 장악(掌握)했다.

1980년(年) 2월(月) 18일(日)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은 각계(各界) 원로(元老)˙중진(重鎭) 23명(名)으로 국정자문회의(國政諮問會議) 를 구성(構成)하고, 생존한(生存限) 전직(前職) 대통령(大統領)인 윤보선 이(李) 의장(議長)으로 피선(被選)됐다. 1980년(年)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中將)(重章)을 수여(授與)받았다. 2월(月) 29일(日) 최규하는 윤보선 , 김대중(金大中) 등(等) 재야인사(在野人士)를 687명(名)을 복권(復權)했다.

1980년(年) 4월(月) 전두환(全斗煥) 의 강요(强要)에 의(依)해 최규하는 전두환을 박정희(朴正熙) 정권(政權) 시절(時節)부터 막강(莫强)한 권력(權力)을 행사(行使)해 왔던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으로 임명했다. 그는 직함(職銜)은 대통령(大統領)이었지만 실속(實속)은 전혀(全혀) 없었다. 그는 자신(自身)의 이름으로 발표(發表)한 내각(內閣)에서 조차 자신(自身)의 뜻을 제시(提示)하지 못했다. 내각(內閣)이 구성(構成)된 지 두 달 가량(假量)이 지날 즈음부터 청와대(靑瓦臺) 에서 장관(長官)들 얼굴을 보기 조차 힘들어졌다. [27]

전두환(全斗煥)이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서리(署理)를 겸임(兼任)할 무렵에는 청와대(靑瓦臺) 에는 인적(人跡)이 그쳐 적막(寂寞)만이 흐르고 있었다. [27] 그나마 최규하가 장관(長官)들을 불러 회의(會議)를 한 것은 몇 안되었으며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選拔大會)를 위한 대책회의(對策會議) 등(等) 몇 개(個)가 채 되지 않았다.

1980년(年) 4월(月) 12일(日) 청와대(靑瓦臺) 경내(境內)에서 당시(當時) 그가 부속실(附屬室) 권영민 비서관(祕書官)에게 '국민(國民)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나.'라고 묻자, 머뭇거리던 비서관(祕書官) 권영민의 입에서 '모두들 각하(閣下)를 최(崔) 주사(主事)라고 부릅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28] 평소(平素) 온화(溫和)하기 그지없던 최(崔) 전(前) 대통령(大統領)은 '뭐야, 최(崔) 주사(注射)?'라며 불같이 화(火)를 냈다. [29] 평소(平素) 온화(溫和)한 최(崔) 전(前) 대통령(大統領)은 그날 불같이 화(火)를 냈다고 한다. [30] 그는 국민(國民)들이 자신(自身)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권영민 비서관(祕書官)에게 '솔직(率直)한 국민(國民)들의 생각'을 주문(注文)했고, 어렵게 말문(말門)을 연 권비서관(卷祕書官)이 용기(勇氣)를 내 '최(崔) 주사(注射)'라는 말을 건넸다. [30]

전두환과의 갈등(葛藤) [ 편집(編輯) ]

1980년(年) 4월(月) 전두환(全斗煥) 이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에 취임(就任)하고 국보위(國保委)의 부위원장(副委員長)을 하면서 사실상(事實上)의 집권자(執權者) 역할(役割)을 하자 전국(全國) 각지(各地)에는 학생(學生)들의 민주화(民主化) 요구(要求) 시위(示威)가 발생(發生)했다. 5월(月) 1일(日)부터 15일간(日間) 전국(全國)의 대학생(大學生)들은 서울역(서울驛) 광장(廣場)을 점거(占據)하고 시위(示威)를 했고, 16일(日) 민주화(民主化) 요구(要求)에 대(對)한 정부(政府)의 대응(對應)을 기다린다는 명분(名分)으로 대학생(大學生)들은 해산(解散)했다.

1980년(年) 5월(月) 신군부(新軍部)는 집권(執權)시나리오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에게 '비상계엄(非常戒嚴) 전국확대(全國擴大)', '국회(國會) 해산(解散)', '국가보위(國家保衛) 비상기구(非常機構) 설치(設置)'를 골자(骨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時局收拾方案)을 실시(實施)하도록 강요(强要)했다. [31] 5월(月) 16일(日) 최규하 전(前) 대통령(大統領)은 '시국수습방안(時局收拾方案)'에 반대(反對) 의사(意思)를 밝혔다. 최규하는 당시(當時) 이희성 계엄사령관(戒嚴司令官) 등(等)에게 "헌정질서(憲政秩序)가 뒤바뀌는 것은 5.16 정변(政變) 한번(番)으로 족(足)하다. 모든 일은 법(法)테두리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여 신군부측(新軍父側)의 `시국수습방안(時局收拾方案)'에 반대(反對)하는 입장(立場)을 명백히(明白히) 했지만, 군부(軍部)의 잇따른 강요(强要)에 5월(月) 17일(日) 오후(午後) 일단(一旦) 비상계엄(非常戒嚴)을 확대(擴大)하는 방안(方案)만 받아들였다. [32]

5월(月) 18일(日) 정오(正午) 신군부(新軍部)는 국회의사당(國會議事堂), 중앙청(中央廳)을 군병력(軍兵力)으로 점거(占據)해 폐쇄(閉鎖)했다. 김종필(金鍾泌) , 김대중(金大中) , 김진만 등(等) 주요(主要) 정치인(政治人)을 체포(逮捕)하여 보안사(保安司)로 연행(連行)했고, 이어 김영삼(金永三) , 이철승 , 이민우(李珉雨) , 유치송 등(等)을 가택연금(家宅年金)에 처분(處分)했다. 이는 5월(月) 18일(日) 발생(發生)한 5·18 광주(光州) 민주화(民主化) 운동(運動) 의 도화선(導火線)이 된다.

서울의 봄 시기(時期)에 학생운동권(學生運動圈)에서 최규하 책임론(責任論)이 제기(提起)됐다는 주장(主張)도 있으나 당시(當時)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회장(會長)이었던 신계륜 은 "최규하 쪽이 문제(問題)가 아니다. 군부(軍部)가 문제(問題)라고 봤다. [33] "라고 반박(反駁)했다.

신군부(新軍部)의 권력(權力) 장악(掌握) [ 편집(編輯) ]

1980년(年) 5월(月) 25일(日) 광주(光州)를 방문(訪問)하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상무대(尙武臺) 에 와서 〈광주(光州) 사태(事態) 수습(收拾) 위한 특별(特別) 담화문(談話文)〉만 발표(發表)하고 사태(事態) 수습(收拾)을 외면(外面)하고는 서울로 되돌아갔다. [34] 26일(日) 오후(午後) 6시(時)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은 국방장관(國防長官) 주영복 등(等)을 대동(帶同)하고 광주(光州) 에 왔으나 전남(全南), 북(北) 계엄분소장(戒嚴分所長)으로부터 보고(報告)를 들은 뒤 상대방(相對方) 쪽은 면담(面談)도 하지 않고 형식적(形式的)인 담화문(談話文)을 밤 9시(時) KBS 방송(放送)으로 내보냈을 뿐이었다. [35] 그날 밤 10시(時)에 속히(速히) 서울로 되돌아왔다.

5월(月) 27일(日) 신군부(新軍部) 의 요청(要請)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를 설치(設置)하고 5월(月) 31일(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의장(議長)이 됐다. 신군부(新軍部)는 권력(權力) 접수(接受) 시나리오대로 국가비상기구(國家非常機構)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국보위(國保委)) 설치안(設置案)을 5월(月) 26일(日) 최규하에게 재가(再嫁)해줄 것을 요구(要求)했다. [36] 최규하는 이들의 비상기구(非常機構) 설립(設立) 요구(要求)를 회피(回避)하며 하루 동안 시간(時間)을 질질 끌었다. 그것이 27일(日) 국무회의(國務會議)를 통과(通過)하자 5월(月) 31일(日) 전두환을 상임위원회(常任委員會) 위원장(委員長)으로 하는 국보위(國保委)가 발족(發足)됐다. 국보위(國保委) 는 일종(一種)의 군사혁명위원회(軍事革命委員會) [37] 였다. [36] 광주민주항쟁(光州民主抗爭) 이후(以後) 전두환(全斗煥) 등(等)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를 통해 전권(全權)을 장악(掌握)하고,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을 위협(威脅)하여 하야(下野)토록 했다. [38] 최규하는 이를 두고 오래도록 고민(苦悶)하였다. 한편(한便) 전군주요지휘관회의(全軍主要指揮官會議)에서 국가원수(國家元首)로 추대(推戴)된 전두환(全斗煥) 은, 박정희(朴正熙) 의 전례(前例)에 따라 육군(陸軍) 소장(所長) 에서 육군(陸軍) 대장(大將) 으로 진급(進級)하여 전역(轉役)한 다음 유신(維新) 체제(體制)의 유산(遺産)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代議員)들에 의(依)해 대통령(大統領) 으로 선출(選出)되었다. [38] 최규하는 1년(年) 사이에 전두환(全斗煥) 의 어깨에 두 별을 달아주었다.

1980년(年) 7월(月) 30일(日) 경기도(京畿道) 수원(水原) 의 새마을 연수원(硏修院)을 시찰(視察)했다. 1980년(年) 7월(月) 30일(日) 신군부(新軍部)의 부탁(付託)을 받은 김정렬 이 청와대(靑瓦臺)로 찾아가 최(崔) 대통령(大統領)과 5시간(時間) 담판(談判)을 하여 최(崔) 대통령(大統領)에게 하야(下野)를 요구(要求)했다. 8월(月) 16일(日) 최규하는 대통령직(大統領職)을 사임(辭任)하였다. [39]

퇴임(退任) 이후(以後) [ 편집(編輯) ]

퇴임(退任) [ 편집(編輯) ]

8월(月) 16일(日) 대통령직(大統領職)과 일체(一切)의 공직(公職)을 모두 사임(辭任)했으며,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은 총리서리인(總理署理人) 박충훈 이 임시(臨時)로 맡게 되었다. 전두환(全斗煥)이 1980년(年) 9월(月) 1일(日) 새로운 대통령(大統領)으로 취임(就任)했다. 이때 새 대통령(大統領) 취임식장(就任式場)에 최규하 내외(內外)가 초청(招請)되었는데 그의 부인(夫人) 홍기(弘基) 여사(女史)는 노골적(露骨的)으로 불쾌감(不快感)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1981년(年) 4월(月) 20일(日) 국정자문회의(國政諮問會議) 가 발족(發足)되자 4월(月) 20일(日)부터 1988년(年) 2월(月)까지 국정자문회의(國政諮問會議) 의장(議長)을 지냈다. 1985년(年) 강원대학교 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名譽法學博士學位)를 받았다. 1982년(年) 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 건립기금(建立基金)을 기부(寄附)했다. 1985년(年) 1월(月) 17일(日)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강당(講堂)에서 열린 백낙준 의 추모(追慕) 예배(禮拜)에 참석(參席)했다. 87년(年) 6·29선언(宣言) 이후(以後) 12.12와 신군부(新軍部)의 집권(執權) 과정(過程)에 대(對)한 진상규명(眞相糾明)을 위한 국회청문회(國會聽聞會)에 출석(出席), 증언(證言)하라는 야당(野黨)과 국민여론(國民輿論)의 압력(壓力)을 받았으나 끝내 진술(陳述)을 거부(拒否)했다.

1988년(年) 11월(月) 전두환(全斗煥) 국정자문회의(國政諮問會議) 의장직(議長職)을 사퇴(辭退)하자 1993년(年) 2월(月)까지 최규하의 국정자문회의(國政諮問會議) 의장직(議長職)으로 다시 맡았다. 국회(國會)에서는 5공(共) 청산(淸算)을 이유(理由)로 최규하한테 국정(國政) 증인(證人)으로 채택(採擇)하라고 요구(要求)하였으나 최규하는 출석(出席)을 거부(拒否)했다. 1988년(年) 11월(月) 19일(日) 노태우 대통령(大統領)은 전두환과 최규하의 국정(國政) 증언(證言)은 회피(回避)했지만, 전두환(全斗煥) 형제(兄弟) 등(等)을 비리(非理) 혐의(嫌疑)로 구속(拘束)했다. [40] 전경환 처벌(處罰)과 전두환(全斗煥) 백담사행(百潭寺行)을 빌미로 그에 대(對)한 증언(證言) 출석(出席) 요구(要求)는 철회(撤回)되었다.

1991년(年) 이후(以後)부터 민족사(民族史)바로찾기국민회의 제(第)3대(代) 의장(議長)을 지냈다.

민간(民間) 정부(政府) 시절(時節) [ 편집(編輯) ]

한편(한便) 1989년(年) 12월(月)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 피해자(被害者)인 이택승 등(等)으로부터 고소(告訴)를 당(當)한다. 삼청교육대 피해자(被害者) 이택승 등(等)은 1989년(年) 12월(月) 최규하, 전두환(全斗煥) , 이희성 , 김만기 (당시(當時) 국보위(國保委) 정화분과위원장(淨化分課委員長)) 등(等)을 감금(監禁), 폭행(暴行) 및 가혹행위(苛酷行爲), 살인(殺人) 및 살인교사죄(殺人敎唆罪)로 서울지검(地檢) 에 고소(告訴)했다. [41] 그러나 3년(年)이 지난 뒤인 1992년(年) 서울지검(地檢) 으로부터 공소권(公訴權) 없음 결정(決定)을 받았다. [41]

1992년(年)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 여순순국유적(旅順殉國遺跡)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聖域化事業推進委員會) 고문(拷問)에 추대(推戴)됐다. 1993년(年) 민족사(民族史)바로찾기국민회의로부터 의장(議長) 연임(連任) 건의(建議)가 들어왔으나 사양(辭讓)하고 윤택중 전(前) 문교부장관(長官)을 후임(後任)으로 내정(內定)했다. 민족사(民族史)바로찾기국민회의 명예의장(名譽議長)에 추대(推戴)되어 2006년(年)까지 재임(在任)했다. 1995년(年) 김영삼(金永三) 대통령(大統領)의 문민정부(文民政府) 로부터 신군부(新軍部)가 사법처리(司法處理)의 대상(對象)에 올라 법원(法院)에서 수차례(數次例) 증언(證言) 요청(要請)을 받지만, 이때에도 그는 법정(法廷) 증언(證言)을 끝까지 거부(拒否)했다.

1999년(年) 6월(月) 최규하는 백범기념관(白凡記念館) 건립위원회(建立委員會) 고문(拷問)에 추대(推戴)되었다. [42] 1998년(年) 국민(國民)의 정부(政府) 출범(出帆) 이후(以後) 전직(前職) 대통령(大統領) 초청(招請) 만찬(晩餐)에 모습을 들어내거나, 국무총리(國務總理) 등(等) 정치인(政治人)들의 내방을 받으며 말년(末年)을 보냈다. 2003년(年) 2월(月) 25일(日) 열린 노무현(盧武鉉) 전(前) 대통령(大統領)의 취임식(就任式)에 참석(參席)하였으며, 이듬 해인 2004년(年)부터 건강(健康) 악화(惡化)로 인해 병원(病院)에 입원(入院)하는 횟수(回數)가 잦아지며 대외(對外) 활동(活動)을 일절(一切) 중단(中斷)하였다. 2004년(年) 8월(月) 박근혜(朴槿惠) 당시(當時) 한나라당 신임대표(新任代表)를 입원중(入院中)이던 서울대병원(서울大病院)에서 예방(豫防)한 것이 언론(言論)에 비친 최규하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2004년(年) 7월(月) 20일(日), 부인(否認) 홍기(弘基) 가 먼저 세상(世上)을 떠났다.

서거(逝去) [ 편집(編輯) ]

국립대전현충원(國立大前賢充員)에 위치(位置)한 묘소(墓所).

2006년(年) 10월(月) 22일(日) 오전(午前) 6시경(時頃) 서울 마포구(麻浦區) 서교동(西橋洞) 467-5(동교(東郊)로 15길 10) 자택(自宅)에서 의식(意識)을 잃은 상태(狀態)로 발견(發見)돼 서울대병원(서울大病院) 으로 후송(後送)됐으나, 오전(午前) 7시(時) 37분(分)에 서거(逝去)했다. [43] 서울대 병원측(病院側)은 "최(崔) 전(前) 대통령(大統領)이 오전(午前) 병원(病院)으로 옮겨지는 과정(過程)에서 심경기(心境機)가 있었다"며 "급성심부전(急性心不全)이 직접적(直接的)인 사인(死因)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44] 향년(享年) 87세(歲)였다.

생전(生前) 그의 엄격(嚴格)할 정도(程度)의 청렴함은 서거(逝去) 이후(以後)에 월간조선 등(等)을 통해 알려졌다. 1973년(年) 마포구(麻浦區) 서교동(西橋洞) 사저(私邸)로 이사(移徙)한 이후(以後) 서거(逝去)할 때까지 연탄(煉炭) 보일러를 사용(使用)했다. 국무총리(國務總理) 재임(在任) 당시(當時) 강원도(江原道) 장성광업소(鑛業所)( 태백시(太白市) 소재(所在))에서 광부(鑛夫)들과 한 약속(約束)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意志)의 표현(表現)으로 풀이된다. 즐겨 신던 태화고무신은 밑창이 달면 고무타이어 조각을 붙여 신었고, 청와대(靑瓦臺) 시절(時節) 사용(使用)했던 가구(家口)를 폐기(廢棄)하지 않고 사저(私邸)로 가져와 사용(使用)했다. 지독히(至毒히)도 무더웠던 1953년(年) 갓 태어난 셋째딸(종혜(種慧))을 위(爲)해 장만한 나쇼날 선풍기(扇風機) 또한 2006년(年) 서거(逝去)할 때까지 그의 곁을 묵묵히(默默히) 지켰다. 주황색(朱黃色) 플라스틱 재질(材質)의 이쑤시개 또한 닦아서 계속(繼續) 재활용(再活用)하였고, 달력(달曆) 뒷면(뒷面)을 오려 이면지(裏面紙)로 이용(利用)하였다. 안경(眼鏡) 또한 그의 청렴함을 증명(證明)해주는 소재(素材)다. 연지색(臙脂色)의 로이드 뿔테 근시(近視) 안경(眼鏡)은 화동 경기고 재학(在學) 시절(時節)부터 외무부차관(外務部借款)을 재임(在任)한 1960년(年)까지 사용(使用)하였고, 이후(以後) 말레이시아 대사(大使) 시절(時節)부터 대통령(大統領) 사임(辭任)에 이르기까지 반(反)뿔테 근시(近視) 안경(眼鏡)과 뿔테 원시(遠視) 안경(眼鏡)을 겸용(兼用)하였다. 사임(辭任) 이후(以後) 서교동(西橋洞) 시절(時節)에 백내장(白內障) 수술(手術)을 받은 후(後)부터 사용(使用)한 반(反)뿔테 근시(近視) 안경(眼鏡)(현재(現在) 초당대학교(學校) 안경박물관(眼鏡博物館) 소장(所藏), 안경다리(眼鏡다리)가 부러짐), 서거(逝去) 전(前)까지 사용(使用)한 반(反)뿔테 근시(近視) 안경(眼鏡) 등(等)이 그것이다.

사후(事後) [ 편집(編輯) ]

장례(葬禮)는 국민장(國民葬) (國民葬)으로 치러졌으며, 국민장(國民葬) 당일(當日)에는 2,000여(餘) 명(名)이 참여(參與)했다. 국립대전현충원(國立大前賢充員) 국가원수묘역(國家元首墓域)에 안장(安葬)됐다. 생가(生家)는 강원도(江原道) 원주시(原州市) 봉산동에 소재(所在)하며 현재(現在)는 원주역사박물관(原州歷史博物館) 내(內)에 위치(位置)해 있다. 2010년(年) 12월(月) 3일(日) 그가 다녔던 원주초등학교 에 최규하 기념관(記念館)(현석관)이 세워졌다. [45]

2012년(年) 10월(月) 2일(日) 최규하 기념사업회(記念事業會)가 강원도(江原道) 원주시(原州市) 에서 조직(組織)되었다. [46]

논란(論難) [ 편집(編輯) ]

진술(陳述) 거부(拒否) 문제(問題) [ 편집(編輯) ]

그는 오랫동안 12.12나 5.18에 대(對)한 증언(證言) 진술(陳述)을 거부(拒否)하였다. 그는 진술(陳述) 거부(拒否)에 대(對)해 '그 사유(事由)를 밝히지 않는 것은 전직(前職) 대통령(大統領)이 증언(證言)에 응(應)하는 악례(惡例)를 남기지 않는 것 [47] '이라며 진술(陳述) 거부(拒否)의 이유(理由)를 피력(披瀝)하였다. 그가 침묵(沈默)과 인터뷰 거절(拒絶), 면담(面談) 거절(拒絶)로 일관(一貫)하자 당시(當時) 만화(漫畫)에서는 그가 손으로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 것을 풍자(諷刺)하여 '최규하 요가연구소(硏究所) 개설(開設)'이라는 풍자(諷刺) 만화(漫畫)들이 나돌기도 했다.

건국훈장(建國訓長) 대한민국장 논란(論難) [ 편집(編輯) ]

제(第)10대(代) 대통령(大統領) 재임(在任) 당시(當時) 스스로에게 건국훈장(建國訓長) 대한민국장 을 수여(授與)해 논란(論難)이 있다. 특히(特히) 친일(親日) 행적(行跡)이 의심(疑心)되어 논란(論難)이 가중(加重)되었다. [48]

대통령(大統領) 하야과정(下野過程) 논란(論難) [ 편집(編輯) ]

1980년(年) 최규하가 대통령직(大統領職)에서 하야(下野)하는 과정(過程)에서 미심쩍은 부분(部分)이 있지만, 최규하가 대통령(大統領) 재임시(在任時) 일어난 일들에 대(對)한 진술(陳述)을 거부(拒否)했기 때문에 논란(論難)이 일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新軍部) 세력(勢力)이 김정렬 에게 부탁(付託)하여 김정렬이 최규하 대통령(大統領)에게 찾아가 하야(下野)를 종용(慫慂)했다는 의혹(疑惑)도 있다. 최규하 정부(政府)에서 국무총리(國務總理)를 맡았던 신현확 전(前) 총리(總理)는 1995년(年) 12월(月) 16일(日) 검찰(檢察) 진술(陳述)에서 "81년(年) 김정렬씨(氏)에게 최대통령(崔大統領)에게 하야(下野)를 적극(積極) 권유(勸誘)한 사실(事實)이 있다고 분명히(分明히) 들었다"고 진술(陳述)했다. [49] 실제(實際) 김정렬씨(氏)는 최대통령(崔大統領)이 설악산(雪嶽山)으로 하계(夏季) 휴가(休暇)를 떠나기 직전(直前) 청와대(靑瓦臺)를 방문(訪問)하여 그와 독대(獨對)하였다. [50]

약력(略歷) [ 편집(編輯) ]

저서(著書) [ 편집(編輯) ]

  • 《팔순기념문헌집(八旬記念文獻集)》

서훈(徐薰) [ 편집(編輯) ]

  • 1969년(年) 말레이시아 SSM 경식대훈장(硬式大勳章)
  • 1970년(年) 일등(一等) 수교훈장(修交勳章)
  • 1971년(年) 청조근정훈장(淸朝勤政勳章)
  • 1976년(年) 수교훈장(修交勳章) 광화대장(鑛化大將)
  • 1977년(年) 태국(泰國) 백상훈장(勳章)
  • 1979년(年) 무궁화대훈장(無窮花大勳章)
  • 1980년(年)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대한민국장
  • 중화민국(中華民國) 정부(政府) 백상최고훈장(最高勳章) 기사대장(記事大將)
  • 벨기에 왕관십자대훈장(王冠十字大勳章)
  • 1980년(年) 5월(月)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스 경식대훈장(硬式大勳章)
  • 1980년(年) 5월(月) 쿠웨이트 무바락알하비르 경식대훈장(硬式大勳章)

학력(學歷) [ 편집(編輯) ]

명예(名譽) 박사(博士) 학위(學位) [ 편집(編輯) ]

가계(家計) [ 편집(編輯) ]

  • 할아버지 :최재민(박사(博士))
  • 아버지 : 최양오 (崔養吾, 1897년(年) 4월(月) 21일(日)~1973년(年) 8월(月) 26일(日))
  • 어머니 : 이응선 (李應善, 1899년(年) 10월(月) 11일(日)~1983년(年) 5월(月) 2일(日))
    • 배우자(配偶者) : 홍기(弘基) (洪基, 1916년(年) 3월(月) 3일(日)~2004년(年) 7월(月) 20일(日))
      • 장남(長男) : 최윤홍 (崔胤弘, 1943년(年) 6월(月) 11일(日)~)
      • 차남(次男) : 최종석 (崔鍾晳, 1951년(年) 2월(月) 28일(日)~)
      • 장녀(長女) : 최종혜 (崔鍾惠, 1953년(年) 9월(月) 20일(日)~)
    • 남동생(男동생) : 최명하 (崔命夏, 1922년(年)~1998년(年))
    • 남동생(男동생) : 최중(最重)하 (崔重夏, 1926년(年)~2008년(年))

역대(歷代) 선거(選擧) 결과(結果) [ 편집(編輯) ]

실시년도(實施年度) 선거(選擧) 대수(臺數) 직책(職責) 선거구(選擧區) 정당(正當) 득표수(得票數) 득표율(得票率) 순위(順位) 당락(當落) 비고(備考)
1979년(年) 대선(大選) 10대(代) 대통령(大統領) 대한민국(大韓民國) 무소속(無所屬) 2,456표(票)
96.29%
1위(位)

평가(評價)와 비판(批判) [ 편집(編輯) ]

사학자(史學者) 오항녕은 '최규하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이 죽은 뒤, 국무총리(國務總理)로 대통령직(大統領職)을 승계(承繼)받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대통령직(大統領職)을 내놓고 전두환(全斗煥) 정권(政權)의 탄생(誕生)을 도왔다'며, 그가 신군부(新軍部)를 돕고 전두환 집권(執權)을 도왔다며 비판(批判)하였다.

성균관대(成均館大) 교수(敎授) 서중석은 '최규하는 뻔뻔스럽게도 박정희(朴正熙)를 대통령(大統領)으로 선출(選出)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대통령(大統領)에 당선(當選)되어 12월(月) 21일(日) 취임(就任)했다.'며 그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를 폐지(廢止)하지 않은 점(點)을 비판(批判)하였다.

극작가(劇作家) 신봉승은 '국가(國家)를 보위(保衛)해야 하는 대통령(大統領) 의 고유(固有)한 권한(權限)과 임무(任務)를 내동댕이쳤으면서도, 여전히(如前히) 그 사유(事由)를 밝히지 않는 것은 전직(前職) 대통령(大統領)이 증언(證言)에 응(應)하는 악례(惡例)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는 어린아이만도 못한 역사(歷史) 인식(認識)으로 일관(一貫)하고 있다.'고 비판(批判)했다.

전북대(全北大) 교수(敎授) 강준만(康俊晩) 은 '책임(責任)을 통감(痛感)한다던 최규하가 81년(年) 4월(月) 20일(日)에 발족(發足)한 국정자문(國政諮問) 회의(會議)의 의장(議長)을 맡은 건 무슨 이유(理由)였을까? '최주사(崔主事)' 라는 그의 별명(別名)이 실감나 는 대목이 아닐 수 없겠다. [52] '고 했다.

미국(美國) 국무부(國務部) 의 보고서(報告書)에는 "언행(言行)이 느리고 따분하다는 평(評)을 얻고있으며, 현직(現職) 임무(任務) 수행(遂行)은 별로(別로) 인상적(印象的)이지 않고 활기(活氣)에 차 있지도 않음." 그리고 "외형적(外形的)으로는 협조적(協調的)이고 이해심(理解心)이 많은 것처럼 행동(行動)하지만, 자기(自己) 자신(自身)의 생각은 거의 남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13] "고 평(評)하였다. 그는 베테랑 외교가(外交街)였지만 정치가(政治家)로서는 높은 점수(點數)를 받지 못했다. [13]

기타 [ 편집(編輯) ]

최규하의 경성고보 졸업동기(卒業動機)이자 1년(年) 선배(先輩)였던 민관식 의 수집품(收集品) 목록(目錄)에는 최규하 대통령(大統領) 취임식(就任式) 만찬(晩餐) 음식(飮食) 메뉴가 있다. 민관식 국회의장(國會議長) 직무대행(職務代行) 자격(資格)으로 1979년(年) 12월(月) 21일(日) 최규하 대통령(大統領) 취임(就任) 경축(慶祝) 만찬(晩餐)에 초대(招待)되었다. [53] 최규하 대통령(大統領) 취임(就任) 경축(慶祝) 만찬(晩餐)에는 주한(駐韓) 외교사절(外交使節)과 함께 민관식 국회의장(國會議長) 직무대행(職務代行), 이영섭 대법원장(大法院長) 등(等)이 포함(包含)되어 있었다. [53] 이날 청와대(靑瓦臺) 는 최상(最上)의 만찬(晩餐)을 내놓았다. 메뉴는 훈제(燻製) 알래스카 연어(鰱魚) , 쇠고기 수프, 광어(廣魚) 찜, 셔벗, 쇠고기 등심(등心)구이, 데운 야채(野菜), 샐러드 , 커피 순(順)이었다. [53] 적포도주(赤葡萄酒) 백포도주(白葡萄酒) 였다. [53]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建國) 초기(初期) 정치인(政治人)으로는 드물게 178cm의 장신(長身)이었다. 그리고 혈액형(血液型)은 A형(型).

같이 보기 [ 편집(編輯) ]

대중(大衆) 매체(媒體) [ 편집(編輯) ]

드라마 [ 편집(編輯) ]

영화(映畫) [ 편집(編輯) ]

관련(關聯) 서적(書籍) [ 편집(編輯) ]

  • 서중석, 《사진(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웅진지식(熊進知識)하우스, 2005)
  • 김진국, 《WWW.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COM》 (민연, 2000)
  • 서중석,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60년(年)》 (역사비평사, 2002)
  • 박원순(朴元淳), 《고문(顧問)의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야만시대(野蠻時代)의 기록(記錄)》 (역사비평사, 2006) 652페이지

각주(各州) [ 편집(編輯) ]

  1. 송국건, 《도대체(都大體) 청와대(靑瓦臺)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127페이지
  2. 조성관, 《실물(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歷史)》 (웅진(熊進)씽크빅, 2005) 28페이지
  3. 조성관, 《실물(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歷史)》 (웅진(熊進)씽크빅, 2005) 40페이지
  4. 송국건, 《도대체(都大體) 청와대(靑瓦臺)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355페이지
  5.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7922&section=sc1
  6. 최규하, 단(單) 한마디도 털어놓지 않은 대통령(大統領)의 업보(業報) 한겨레 2015.02.13.
  7. “食糧農業會議에 韓國代表도 參加” .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1949년(年) 9월(月) 2일(日). 오는 九월(月) ?六日부터 동(洞) ?日까지 五日간(間)에 걸쳐 “씽가(街)폴”에서 열리는 極東亞細亞食糧農業會議에 초청(招請)을 받고 우리나라에서도 대표(代表) 二명(名)을 파견(派遣)하기로 되었는데 현(現) 농림부차관(農林部次官) 鄭求興씨(氏)와 양정과장(糧政課長) 崔圭夏 양씨(梁氏)를 추천(推薦)하였다 한다.  
  8. 최규하 - Daum 백과사전(百科事典)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9. 이재오(李在五), 《한국(韓國) 학생운동사(學生運動史)》 (파라(爬羅)북스, 2011) 282페이지
  10. 김용직, 《사료(史料)로 본 한국(韓國)의 정치(政治)와 외교(外交) 1945~1979》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誠信女子大學校出版部), 2005) 408페이지
  11. [1]
  12. [2]
  13. 서중석, 《사진(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웅진지식(熊進知識)하우스, 2005) 306페이지
  14. 김용직, 《사료(史料)로 본 한국(韓國)의 정치(政治)와 외교(外交) 1945~1979》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誠信女子大學校出版部), 2005) 522페이지
  15. 하영선, 《한미동맹(韓美同盟)의 비전과 과제(課題)》 (동아시아연구원(東아시아硏究院), 2006) 133페이지
  16. 김용직, 《사료(史料)로 본 한국(韓國)의 정치(政治)와 외교(外交) 1945~1979》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誠信女子大學校出版部), 2005) 538페이지
  17. 서중석, 《사진(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웅진지식(熊進知識)하우스, 2005) 305페이지
  18. 역사학연구소(歷史學硏究所) 《바로 보는 우리 역사(歷史)》 (서해문집, 2004) 463페이지
  19. 서중석,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60년(年)》 (역사비평사, 2007) 159페이지
  20. 서중석,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60년(年)》 (역사비평사, 2007) 160페이지
  21. 지만원(池萬元), 노재현의 피신(避身)과 재가지연(裁可遲延) Archived 2016년(年) 3월(月) 11일(日) - 웨이백 머신
  22. 머니투데이 (2013년(年) 2월(月) 25일(日)).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최규하…역대(歷代) 대통령(大統領) 취임사(就任辭) 살펴보니” . 2013년(年) 4월(月) 28일(日)에 확인(確認)함 .  
  23. 서중석,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60년(年)》 (역사비평사, 2007) 161페이지
  24. 김당택, 《우리 한국사(韓國史)》 (푸른역사, 2006) 493페이지
  25. 송국건, 《도대체(都大體) 청와대(靑瓦臺)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28페이지
  26. "모두들 각하(閣下)를 최(崔)(崔)주사(主事)라 부릅니다" 보고(報告)에 역정(歷程) 조선일보(朝鮮日報) 2008.11.28.
  27. 김진국, 《WWW.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COM》 (민연, 2000) 234페이지
  28. "모두들 각하(閣下)를 최(崔)(崔)주사(主事)라 부릅니다" 보고(報告)에 역정(歷程)
  29. "모두들 각하(閣下)를 최(崔)(崔)주사(主事)라 부릅니다" 보고(報告)에 역정(歷程)
  30. "나 같은 이에 누가 총(銃)을 겨누겠나" 영남일보 2008.11.28.
  31. 5.18사건(事件) 재수사(再搜査) 종결(終結),내일(來日) 기소(起訴) 조선일보(朝鮮日報) 1996년(年) 1월(月) 22일자(日子) 기사(記事)
  32. 신군부(新軍部),시국수습(時局收拾)안 대통령(大統領) 반대불구(反對不拘) 강행(强行)
  33. 김진국, 《WWW.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COM》 (민연, 2000) 239페이지
  34. 서중석, 《사진(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웅진지식(熊進知識)하우스, 2005) 311페이지
  35. 서중석,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60년(年)》 (역사비평사, 2007) 171페이지
  36. 서중석,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60년(年)》 (역사비평사, 2007) 174페이지
  37. 군인(軍人)들이 쿠데타 후(後) 결성(結成)하는 조직(組織)들에 대(對)한 대명사(代名詞)
  38. 김당택, 《우리 한국사(韓國史)》 (푸른역사, 2006) 495페이지
  39. 서중석,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60년(年)》 (역사비평사, 2007) 175페이지
  40. 서중석 , 《사진(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웅진지식(熊進知識)하우스, 2005) ISBN   978-89-01-04959-5 337페이지 “1988년(年) 11월(月) 19일(日) 1만여(萬餘) 명(名)의 학생(學生)과 시민(市民)들이 전두환(全斗煥) 부부(夫婦) 구속(拘束)을 위한 제(第)2차(次) 궐기대회(蹶起大會)를 열었다. 노태우 대통령(大統領)은 전두환과 최규하의 국정(國政) 증언(證言)은 회피(回避)했지만, 전두환(全斗煥) 형제(兄弟) 등(等)을 비리(非理) 혐의(嫌疑)로 구속(拘束)했다.”
  41. 박원순(朴元淳), 《고문(顧問)의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야만시대(野蠻時代)의 기록(記錄)》 (역사비평사, 2006) 652페이지
  42. (풍향계(風向計)) 박정희기념관(朴正熙記念館) 건립(建立)과 도덕적(道德的) 해이(解弛) 교수신문 2001년(年) 8월(月) 13일(日)
  43. 《연합뉴스(聯合뉴스)》(2006.10.22.)
  44. 최규하 전(前) 대통령(大統領) 사망원인(死亡原因)은 급성심부전증(急性心不全症) 노컷뉴스 2006.10.22.
  45. 원주(原州)초교에 ‘최규하 기념관(記念館)’ 문화일보(文化日報) 2010.12.03
  46. 최규하 前 대통령(大統領) 기념사업회(記念事業會) 8일(日) 원주(原州)서 창립(創立)
  47. 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造船社) 나들이》 (도서출판(圖書出版) 답게, 1996) 5페이지
  48. 친일사전(親日事前) 등재(登載) 박정희(朴正熙) 건국훈장(建國訓長) 논란(論難) 2009년(年) 11월(月) 8일(日) 경향신문(京鄕新聞)
  49. “신현확 검찰(檢察) 진술서(陳述書)” . 2015년(年) 5월(月) 22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 2015년(年) 4월(月) 21일(日)에 확인(確認)함 .  
  50. 김정렬 최대통령(崔大統領) 하야(下野) 설득(說得)
  51. “대한민국(大韓民國) 직원록(職員錄) 1952년(年)” . 《한국사(韓國史)데이터베이스》 . 2008년(年) 11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52. 강준만(康俊晩), 《한국(韓國) 현대사(現代史) 산책(散策) 1980년대편(年代篇) 1 : 광주학살(光州虐殺)과 서울올림픽》 (인물(人物)과 사상사(思想史), 2003)
  53. 조성관, 《실물(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歷史)》 (웅진(熊進)씽크빅, 2005) 256페이지
  54. 극(劇) 중(中)에서는 최한규라는 이름으로 등장(登場).

참고(參考) 문헌(文獻) [ 편집(編輯) ]

외부(外部) 링크 [ 편집(編輯) ]

제(第)10대(代)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통령(大統領)
전임(前任)
박정희(朴正熙)
최규하
(권한대행(權限代行))
1979년(年) 12월(月) 6일(日)~1980년(年) 8월(月) 16일(日) 후임(後任)
박충훈
(권한대행(權限代行))
이승만(李承晩)   · 윤보선   · 박정희(朴正熙)   · 최규하   · 전두환(全斗煥)   · 노태우(盧泰愚)   · 김영삼(金永三)   · 김대중(金大中)   · 노무현(盧武鉉)   · 이명박(李明博)   · 박근혜(朴槿惠)   · 문재인(文在寅)   · 윤석열(尹錫悅)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통령(大統領)
전임(前任)
박정희(朴正熙)
1979년(年) 10월(月) 26일(日)~1979년(年) 12월(月) 6일(日)(권한대행(權限代行)) 후임(後任)
최규하
이승만(李承晩)   · 윤보선   · 박정희(朴正熙)   · 최규하   · 전두환(全斗煥)   · 노태우(盧泰愚)   · 김영삼(金永三)   · 김대중(金大中)   · 노무현(盧武鉉)   · 이명박(李明博)   · 박근혜(朴槿惠)   · 문재인(文在寅)   · 윤석열(尹錫悅)
전임(前任)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國務總理) 서리(署理)
1975년(年) 12월(月) 19일(日)~1976년(年) 3월(月) 12일(日)
후임(後任)
최규하
전임(前任)
최규하
(서리(署理))
제(第)12대(代) 국무총리(國務總理)
1976년(年) 3월(月) 12일(日)~1979년(年) 12월(月) 5일(日)
후임(後任)
신현확
전임(前任)
김동조
제(第)7대(代) 외무부(外務部) 차관(次官)
1959년(年) 9월(月) 12일(日)~1960년(年) 5월(月) 11일(日)
후임(後任)
이수영
전임(前任)
조정환
외무부(外務部) 장관(長官) 직무대행(職務代行)
1959년(年) 12월(月) 22일(日)~1960년(年) 4월(月) 24일(日)
후임(後任)
허정(許政)
전임(前任)
최홍희
제(第)2대(代) 주(週) 말레이시아 대사(大使)
1964년(年) 11월(月)~1967년(年) 6월(月)
후임(後任)
갈홍기
전임(前任)
정일권
제(第)14대(代) 외무부(外務部) 장관(長官)
1967년(年) 6월(月) 30일(日)~1971년(年) 6월(月) 3일(日)
후임(後任)
김용식
전임(前任)
윤보선
제(第)2대(代) 국정자문회의(國政諮問會議) 의장(議長)
1980년(年) 9월(月)~1981년(年) 4월(月) 23일(日)
후임(後任)
최규하
전임(前任)
최규하
제(第)3대(代) 국정자문회의(國政諮問會議) 의장(議長)
1981년(年) 4월(月) 23일(日)~1988년(年) 2월(月) 25일(日)
후임(後任)
전두환(全斗煥)
전임(前任)
전두환(全斗煥)
제(第)5대(代) 국가원로자문회의(國家元老諮問會議) 의장(議長)
1988년(年) 11월(月) 23일(日)~1993년(年) 2월(月) 25일(日)
후임(後任)
노태우(盧泰愚)
전임(前任)
윤보선
제(第)3대(代) 민족사(民族史)바로찾기 국민회의 의장(議長)
1990년(年)~1993년(年)
후임(後任)
윤택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