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正)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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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正)욜
신상정보(身上情報)
출생(出生) 1978년(年) 10월(月) 19일(日) ( 1978-10-19 ) (45세(歲))
국적(國籍) 대한민국(大韓民國)
활동(活動) 정보(情報)
관련(關聯) 활동(活動) 인권운동(人權運動)

정(正)욜 ( 1978년(年) 10월(月) 19일(日) ~)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의 인권(人權) 운동가(運動家), 시민(市民) 운동가(運動家)이자 사회기관단체인(社會機關團體認)이다. 한때 제빵(製빵) 회사(會社)의 직원(職員)으로 6년간(年間) 근무(勤務)하였으며,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의 창립(創立) 멤버이자, 대표(代表)를 역임(歷任)했다. 동성애자(同性愛者) 인권(人權) 운동(運動)과 에이즈 감염자(感染者) 인권(人權) 운동(運動)을 하고 있다. 곽이경 , 장병권 , 육우당(肉牛當) 등(等)과 함께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의 주요(主要) 멤버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대학(大學) 재학(在學) 중(中) 성적(性的) 정체성(正體性)을 깨달았고, 동성애자(同性愛者) 인권(人權) 단체(團體)에서 활동(活動)하였다. 1997년(年) 가을에 커밍아웃 을 하고, 이후(以後)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에 참여(參與)하여 활동(活動)하였다. [1] 군(軍) 복무(服務) 중(中) 성적(性的) 정체성(正體性) 문제(問題)로 불이익(不利益)을 당(當)하였으며, 제대(除隊) 후(後) 제빵(製빵), 도넛 회사(會社)에서 7년간(年間) 근무(勤務)하였다.

2002년(年) 부터 곽이경 , 육우당(肉牛當) 등(等)과 함께 동성애(同性愛) 를 청소년(靑少年) 유해단어(有害單語) 지정(指定)을 폐지(廢止)하는 운동(運動)을 추진(推進)하였다. 2004년(年) 부터는 반전(反轉) (反戰) 평화(平和) 운동(運動) 에이즈 감염자(感染者) 인권(人權) 운동(運動)에도 동참(同參)하였고, 2011년(年) 부터는 ' 인권재단(人權財團) 사람 '의 사무처(事務處) 직원(職員)으로 활동(活動)하였다. 2012년(年) 에는 통합진보당(統合進步黨) 성소수자위원회(性小數者委員會) 위원장(委員長)이 되었다. 2011년(年) 6월(月) 에는 게이 의 일생(一生)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映畫) 종로(鍾路)의 기적(奇跡) 에도 출연(出演)했다. 후(後)에 정민석으로 개명(改名)했다.

생애(生涯) [ 편집(編輯) ]

초기(初期) 활동(活動) [ 편집(編輯) ]

생애(生涯) 초반(初盤) [ 편집(編輯) ]

본명(本名)은 정(正)욜로 나중에 정민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지금(只今)도 정(正)욜이라는 원래(元來) 이름으로 활동(活動)하고 있다. 그의 이름 욜은 튀르키예어 로, ‘욜(Yol)’은 길 또는 인생(人生)의 항로(航路)를 뜻한다. 청소년기(靑少年期)에 성(性) 정체성(正體性)을 알게 되었고, 고등학교(高等學校)에 다닐 때도 또래 친구(親舊)들과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정씨(丁氏)는 그 때마다 남들과 취향(趣向)이 달라서 그러겠거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고 한다. [2] 동성애(同性愛) 자(者)로서의 ‘성(性) 정체성(正體性)(sexual identity)’을 발견(發見)한 것은 대학(大學)에 입학(入學)한 뒤의 일이다. [2]

청년기(靑年期) [ 편집(編輯) ]

1997년(年) 어느 가을날, 다방면(多方面)의 책(冊)을 읽으면서 자신(自身)이 동성애자(同性愛者)일 수도 있다는 사실(事實)을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던 그 무렵, 정씨(鄭氏)는 대학(大學) 교정(校庭)에 나붙은 동성애자(同性愛者)들의 모임을 알리는 대자보(大字報)를 발견(發見)했다. [2]

믿고 따르던 선배(先輩)들도 제가 동성애자(同性愛者)라는 얘기를 듣고는 이상(異常)한 시선(視線)으로 바라보더군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周邊) 사람들이 나를 낯설게 대(對)하는 풍경(風景)들…. 그건 당사자(當事者)가 아니면 상상(想像)하기 어려운 고통(苦痛)입니다. 이쯤에서 나의 실체(實體)를 드러내지 못하고 멈춰 버리면 또 다시 고립(孤立)된 공간(空間)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 벼랑에서 구원(救援)의 줄을 잡는 심정(心情)으로 문(門)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發見)한 거죠. [2]

그리고 얼마 후(後) 대학(大學)가 부근(附近)의 반지하(半地下) 자취방(自炊房)에 모여든 20여(餘) 명(名)의 성적(性的) 소수자(少數者)들 틈에 정씨(鄭氏)도 끼어 있었다. 정씨(鄭氏)는 이날 모임에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긴 시간(時間)을 고민(苦悶)했지만, 막상 찾아간 뒤에는 자신(自身)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막혔던 것이 툭 터지는 듯한 희열(喜悅)을 맛보았다고 한다. [2]

군대(軍隊)에 입해(入海), 군(軍) 복무(服務) 시절(時節) 성(性) 정체성(正體性)이 드러나 복무(服務) 중(中) 정신병원(精神病院) 에 반강제적(半强制的)으로 수용(收容)되기도 하였다. 군(軍) 복무(服務) 중(中) 어느 날 동성애자(同性愛者)로부터 날아온 연애편지(戀愛便紙)가 공개(公開)되면서 아주 특별한 존재(存在)가 되었다. [2] 자신(自身)은 동료(同僚)들에 대(對)해 아무런 감정(感情)도 느끼지 못했지만, 남들은 “네가 젊은 군인(軍人)들을 그냥 두겠느냐?”며 거리(距離)를 두었다. 결국(結局) 정씨(鄭氏)는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정신병원(精神病院)에 2개월(個月) 가까이 수용(收容)돼 의병제대(疑兵除隊) 대상자(對象者)에 오르기까지 했다. [2]

정신병자(精神病者)임을 인정(認定)하면 제대(除隊)를 시켜 주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요. 저는 동성애자(同性愛者) 가 어떻게 정신병자(精神病者) 일 수 있느냐고 항의(抗議)했지만 벽(壁)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마음에 드는 간호(看護) 장교(將校) 가 있느냐?’는 질문(質問)을 받고, 무슨 약(藥)인지도 모르고 받아먹어야 했고, 강제(强制)로 AIDS 검사(檢査)를 받는가 하면 독방(獨房)에서 혼자 잠을 자야 했어요. [2]

제대(除隊) 이후(以後) 한때 생계(生計)를 위해 위해 제빵(製빵) 사(四)가 되기로 하고 만드는 일을 배웠으나 중도(中途)에 포기(抛棄)하였으며, 대신(代身) 유명(有名) 도넛 회사(會社)에서 7년(年) 동안 제빵회사(製빵會社) 사무직(事務職)으로 일했다.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창립(創立) 초기(初期)부터 청소년(靑少年) 성소수자(性小數者) 와 HIV/AIDS 감염인(感染人) 인권(人權) 문제(問題)에도 참여(參與)하였다.

인권(人權) 운동(運動)과 사회(社會) 운동(運動) [ 편집(編輯) ]

동인(同人)련 활동(活動) 초기(初期) [ 편집(編輯) ]

1998년(年) 8월(月)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약칭(略稱) 동인(同人)련)의 창립(創立)에 참여(參與)하였다. 초기(初期)에 그는 홍보국장(弘報局長) 겸(兼) 선전국장(宣傳局長)에 임명(任命)되었고, 2001년(年) 부터는 동인(同人)련 2001 대학(大學)캠프기획단장(企劃團長)과 기관지(機關紙) 다이크6호(號) 편집인(編輯人), 동인(同人)련 신입교육담당(新入敎育擔當)을 맡아보았다.

2002년(年) 10월(月) 31일(日) 동성애자(同性愛者) 웹커뮤니티 '엑스존'이(李) 청소년유해매체(靑少年有害媒體)로 규정(規定)된 것에 대(對)해 성(性) 소수자(少數者) 인권단체(人權團體)에서는 인권(人權)위의 의견(意見)을 물었다. 지난해 8월(月) 1심(審) 패소(敗訴) 이후(以後) '엑스존'사건(事件)에 대(對)한 항소심(抗訴審)이 진행(進行)되고 있는 가운데, '동성애(同性愛)'를 청소년유해매체(靑少年有害媒體)의 판단기준(判斷基準)으로 삼고 있는 청소년보호법(靑少年保護法) 시행령(施行令)이 인권(人權)의 원칙(原則)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意見)을 재판부(裁判部)에 제출(提出)해 줄 것을 요청(要請)한 것이다. [3] 10월(月) 13일(日) 위원회(委員會)는 이 요청(要請)에 대(對)해 "현재(現在) 관련(關聯) 진정사건(陳情事件)이 검토(檢討) 중(中)에 있"으니 결정(決定)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취지(趣旨)의 답변(答辯)과 함께, "엑스존에 대(對)한 유해매체(遺骸媒體) 고시처분(考試處分)은 '음란(淫亂)'을 사유(事由)로 하고 있으므로 '법률상(法律上)'의 문제(問題)가 아니라 '사실상(事實上)'의 문제(問題)"라고 답(答)했다. [3] 이에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의 정(正)욜 대표(代表)는 "위원회(委員會)가 다른 국가기관(國家機關)을 의식(意識)해서 동성애(同性愛)에 대(對)한 적극적(積極的) 판단(判斷)을 회피(回避)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위원회(委員會)의 '눈치보기'를 비판(批判)했다. [3]

동인(同人)련 대표(代表) [ 편집(編輯) ]

2002년(年) 에는 고승우 활동가(活動家)의 구속(拘束)으로 공석(空席)이 된 동인(同人)련 사무국장(事務局長)을 맡아보다가 2002년(年) 임태훈 의 사퇴(辭退)로 공석(空席)이 된 동인(東人)련 대표(代表)를 맡게 되었다. 2002년(年) 가을부터 그는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의 대표(代表)를 맡아 국가인권위(國家人權委) 에 두 건(件)의 진정(眞情)을 접수(接受)했다. 첫째는 동성애(同性愛) 사이트를 퇴폐(頹廢)·음란(淫亂) 사이트로 구분(區分)한 ‘청소년보호법시행령(靑少年保護法施行令) 청소년(靑少年) 유해(有害) 매체(媒體)물의 심의기준(審議基準)(이하(以下), 심의기준(審議基準))’에 대(對)한 문제제기(問題提起)였다. [2]

2002년(年) 11월(月) 한나라당(한나라黨) 김홍신 의원(議員)의 대표발의(代表發議)로 여야의원(與野議員) 20명(名)이 ‘성전환자(性轉換者)의 성별변경(性別變更)에 관(關)한 특례법안(特例法案)’을 국회(國會)에 제출(提出)하였다. 그는 성소수자(性小數者)에 대(對)한 특별법(特別法) 제출(提出)을 지지(支持)하였다. 이때 정(正)욜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대표(代表)는 “성전환자(性轉換者) 중(中)에는 성전환수술(性轉換手術)을 원(願)하지 않거나 수천만(數千萬)원의 수술비(手術費) 부담(負擔) 때문에 수술(手術)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며 “성적(性的) 자기결정권(自己決定權)을 존중(尊重)해 수술(手術)을 받지 않은 성전환자도(性轉換者度) 본인(本人)이 원(願)하면 호적정정(戶籍訂正)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했다. [4]

동성애(同性愛) 유해결정(遺骸決定) 폐지(廢止) 운동(運動) [ 편집(編輯) ]

2002년(年) 가을 이후(以後) 그는 청소년보호위원회(靑少年保護委員會) 에서 청소년(靑少年) 보호법(保護法) 동성애(同性愛) 금칙어(禁飭語) 로 지정(指定) 철회(撤回) 운동(運動)을 추진(推進)했다. 당시(當時) P회사(會社)가 ‘심의기준(審議基準)’에 따라 만든 음란물(淫亂物) 차단(遮斷) 프로그램은 전국(全國)의 PC방(房)에 설치(設置)돼 동성애(同性愛) 사이트에 대(對)한 접근(接近)을 차단(遮斷)했고, Y포털 사이트는 ‘동성애(同性愛)’라는 단어(單語)를 성인(成人) 전용(專用) 검색어(檢索語)로 지정(指定)해 청소년(靑少年)들의 접근(接近)을 막았다. [2] 이때 그는 이 문제(問題)를 사회적(社會的) 의제(議題)로 끌어내기 위해 다른 동성애자(同性愛者) 인권단체(人權團體)들과 함께 정보통신윤리위원회(情報通信倫理委員會) 를 방문(訪問)해 항의시위(抗議示威)를 벌이는가 하면, 인터넷 사이트 파업(罷業)을 주도(主導)하기도 했다. [2]

이후(以後) 육우당(肉牛當) 등(等) 소수(少數)의 동성애자(同性愛者)들 외(外)에도 인권(人權) 운동가(運動家)들이 동참(同參)하기 시작(始作)했다, 국가인권위(國家人權委) 2003년(年) 3월(月) 정씨(鄭氏)의 진정(陳情)과 관련(關聯)해, “동성애(同性愛) 자체(自體)를 청소년유해매체물(靑少年有害媒體物) 심의기준(審議基準)으로 둔 것은 성적지향(性的志向)에 의(依)한 차별(差別)”이라는 결정(決定)을 내리고 청소년보호위원회(靑少年保護委員會) 청소년(靑少年) 유해(有害) 매체물(媒體物) 심의기준(審議基準)에서 ‘동성애(同性愛)’ 문구(文句)를 삭제(削除)할 것을 권고(勸告)했다. [2] 그러나 일부(一部) 종교계(宗敎界)에서는 사탄,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言及)하면서 격렬(激烈)하게 반발(反撥)했고, 그는 이들의 주장(主張)을 논파(論破)하였다.

반전(反戰) 운동(運動) 참여(參與) [ 편집(編輯) ]

2003년(年) 2월(月) 부터는 반전(反轉) 평화(平和) 운동(運動) 에도 참여(參與)하였다. 당시(當時) 그는 " 에이즈 관련(關聯) 집회(集會)에 나갔는데 우리 때문에 이미지가 안 좋아진다는 말이 있었다. 노동자(勞動者) 집회(集會)에 나갈 때에도 깃발(旗발)을 내리고 나갔다. 그래도 얼마전(前) 반전(反戰) 집회(集會)에는 처음으로 동성애(同性愛) 자(者)임을 밝히고 나갔는데 자신감(自信感)을 얻었다"고 밝혔다. [5] 2003년(年) 4월(月) 26일(日) 오후(午後) 3시(時)께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의 상근(常勤) 직원(職員)인 육우당(肉牛當) 의 시신(屍身)을 발견(發見)하였다. 이후(以後) 충격(衝擊)을 받은 동인(同人)련 회원(會員)들 등(等)을 수습(收拾)하였다. 이때 윤현석의 시신(屍身)을 처음 발견(發見)한 정(正)욜 대표(代表)는 차분하게 회원(會員)들을 다독이고 있었지만, "적지 않은 충격(衝擊)을 받았다"고 언론(言論)에 털어놨다. [6]

그해 7월(月) 기독청년단체(基督靑年團體)들과 함께 한기총 육우당(肉牛當) 자살(自殺)에 대(對)한 사과(謝過)를 요청(要請)하였으나 거절당했다. [7] 기독교(基督敎) 신자(信者)이기도 한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정(正)욜 대표(代表)는 "동성애자(同性愛者)들이 정체성(正體性) 문제(問題)로 고민(苦悶)하다 마지막으로 신앙(信仰)에 의지(依支)하는 경우(境遇)가 많은데, 한국(韓國) 교회(敎會)가 이들을 오히려 밀어내고 있는 형국(形局)"이라며 교회(敎會)의 변화(變化)를 촉구(促求)했다. [7] 9월(月) 28일(日) 반전(反戰) 집회(集會)에는 연사(演士)의 한 사람으로 참여(參與)하여 한국(韓國) 전투병(戰鬪兵)의 이라크 파병(派兵) 반대(反對) 입장(立場)과 전쟁(戰爭) 반대(反對) 입장(立場)을 밝혔다. [8] 이날 정(正)욜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대표(代表)는 연설(演說)에서 "국가(國家)에서 동성애(同性愛) 를 '변태행위(變態行爲)'라고 하는데, 부시의 이라크전쟁(戰爭)이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의 파병(派兵)이야말로 변태(變態)"라고 말해 박수(拍手)를 받았다. [9] 2004년(年) 다시 제빵사(製빵師)가 되기로 하고 동인(同人)련 대표직(代表職)을 물러났으나 적임자(適任者)가 없어 다시 동인(同人)련 대표(代表)로 유임(留任)되었다.

성(性) 소수자(少數者) 차별(差別) 철폐(撤廢) 운동(運動) [ 편집(編輯) ]

2003년(年) 그는 꾸준히 청소년(靑少年) 보호법(保護法) 에서 성(性) 소수자(少數者) 차별(差別) 조항(條項)의 철폐(撤廢)를 촉구(促求)하였다. 2004년(年) 2월(月) 2일(日) 청소년보호위원회(靑少年保護委員會)(아래 청보위)는 청소년보호법시행령(靑少年保護法施行令) 제(第)7조(條)의 '청소년유해매체(靑少年有害媒體)물의 심의기준(審議基準)'에서 "수간(樹幹)을 묘사(描寫)하거나 혼음(混淫), 근친상간(近親相姦), 동성애(同性愛), 가학(加虐), 피학성음란증(被虐性淫亂症) 등(等) 변태성행위(變態性行爲), 매춘행위(賣春行爲) 기타(其他) 사회통념상(社會通念上) 허용(許容)되지 아니한 성관계(性關係)를 조장(助長)하는 것" 중(中) '동성애(同性愛)' 삭제(削除)를 입법예고(立法豫告) 했다. [10]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의 정(正)욜 대표(代表)는 “청보위의 결정(決定)을 환영(歡迎)한다“면서 “그러나 정부(政府)가 사이트내(內)의 게시물(揭示物)을 문제(問題)삼을 가능성(可能性)은 있으므로, 동성애(同性愛) 관련(關聯) 사이트가 전반적(全般的)으로 허용(許容)될 지 여부(與否)는 좀 더 지켜봐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11] 그러나 정(情)욜 대표(代表)는 "법(法) 개정(改正)을 통해 동성애(同性愛) 조항(條項)이 삭제(削除)되더라도 상징적(象徵的)인 것일 뿐이지 청소년(靑少年)을 보호(保護)한다는 미명(美名) 하(下)에 국가(國家)가 동성애(同性愛) 관련(關聯) 표현물(表現物)에 미치는 영향력(影響力)은 여전(如前)할 것"이라고 내다 봤다. [10]

2006년(年) 부터는 군(軍) 복무(服務) 중(中) 동성애자(同性愛者)(게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理由)로 차별당하는 남성(男性)들의 상담(相談), 조언(助言)을 맡기도 했다. 2006년(年) 2월(月) 8일(日) 에는 최초(最初)로 A씨(氏)를 상담(相談)한 정(正)욜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동인연(桐因緣)) 활동가(活動家)는 “피해자(被害者)는 처음에는 전혀(全혀) 전역(全域)을 고려(考慮)하지 않았고, 군대(軍隊)에서 잘 적응(適應)하기 위해 노력(努力)했다”며 “단지(團地) 군대(軍隊) 생활(生活)에서 몇가지 어려운 점(點)이 있었고, 이를 솔직히(率直히) 말하고 해결(解決)하고 싶어했다”고 전(傳)했다. [12] 정(正)욜 활동가(活動家)는 이어 “그러나 원(願)치 않게 자신(自身)이 동성애자(同性愛者)라는 사실(事實)이 알려진 이후(以後) 피해자(被害者)는 온갖 인권침해(人權侵害)와 성폭력(性暴力)에 시달려야만 했다”며 “더 이상(以上) 견딜 수 없었던 피해자(被害者)는 부대(部隊) 측(側)의 요구(要求)에 응(應)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說明)했다. 또 그는 “피해자(被害者)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자살(自殺)을 결심(決心)하고 있었다”며 당시(當時) 피해자(被害者)의 심각(深刻)한 상황(狀況)을 전(傳)했다. [12]

현혈문진표(現穴問診表) 동성애자(同性愛者) 차별조항(差別條項) 철폐(撤廢) [ 편집(編輯) ]

2004년(年) 2월(月) 4일(日) < 한겨레신문(新聞) >의 '여성동성애(女性同性愛) 에이즈 감염(感染) 첫 확인(確認)', '남성동성애자(男性同性愛者) 28% 헌혈경험(獻血經驗)'(1월(月) 8일자(日子)) 보도(報道)를 규탄(糾彈)하는 8개(個) 단체(團體) 공동기자회견(共同記者會見)에 참여(參與)하였다. [13] 이날 <한겨레>는 정(正)욜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대표(代表)와의 전화통화(電話通話)에서 "공문(公文)을 보내면 일주일(一週日) 이내(以內)에 답(答)을 하겠다"고 약속(約束)했다. [13] 2004년(年) 2월(月) 부터 그는 에이즈 감염자(感染者) 인권단체(人權團體)인 HIV.AIDS 인권연대(人權連帶) 나누리 에도 참여(參與)하여 활동(活動)했다. 또한 동인(同人)련 역시(亦是) 이때부터 HIV.AIDS 인권연대(人權連帶) 나누리 의 에이즈 감염자(感染者) 인권활동(人權活動)을 지원(支援)하게 되었다.

이후(以後) 그는 헌혈(獻血) 문진표(問診表)에 동성애자(同性愛者)를 차별(差別)하는 내용(內容)이 들어 있다는 내용(內容)에 대(對)해 국가인권위원회(國家人權委員會) 에 진정(鎭靜)하였다. 실제로(實際로) 현재(現在) 헌혈문진표(獻血問診表)에는 ‘동성(同性)이나 불특정(不特定) 이성(異性)과 성(性) 접촉(接觸)이 있었다’는 부분(部分)이 포함(包含)돼 있다. [2] 정씨(鄭氏)는 “동성애(同性愛)와 AIDS가 무관(無關)하다는 것이 다양한 연구(硏究)를 통해 입증(立證)되고 있음에도, 동성간(同姓間) 성(性) 접촉(接觸)이 있었다는 사실(事實)만으로 AIDS 바이러스에 감염(感染)될 수 있는 것처럼 해석(解釋)할 수 있는 질문(質問)을 문진표(問診表)에 포함(包含)시키는 것은 동성애자(同性愛者)에 대(對)한 인격적(人格的) 모욕(侮辱)”이라며 헌혈(獻血) 당국(當局)의 조속(早速)한 문구(文句) 개정(改正)을 촉구(促求)했다. [2] 국가인권(國家人權)위는 이 진정사건(陳情事件)과 관련(關聯)해, 2004년(年) 8월(月) “합리적(合理的)인 이유(理由) 없이 성적(性的) 지향(志向)을 이유(理由)로 평등권(平等權)을 침해(侵害)하는 차별행위(差別行爲)”라고 인정(認定)했다. [2]

2005년(年) 1월(月) 18일(日) 오후(午後) 2시(時) 국회(國會) 도서관(圖書館) 강당(講堂)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주최(主催) '성(性) 인지적(認知的) 정책(政策) 생산(生産) 및 예산(豫算) 교육(敎育)에 참여(參與)하였다. 교육(敎育)을 지켜본 정(正)욜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대표(代表)는 "진보진영(進步陣營) 안에서 성소수자(性小數者) 에 대(對)한 소통(疏通)이 막 시작(始作)된 것 같아 기쁘다"며 "지금(只今)까지 동성애인권운동(同性愛人權運動)이 외부(外部)에 대(對)해 소극적(消極的) 방어(防禦)를 했지만 이제 적극적(積極的)으로 정책(政策) 생산(生産)을 고민(苦悶)해야 한다"고 주장(主張)했다. [14] 이날 정(鄭) 대표(代表)는 "대선(大選)과 총선(總選) 과정(過程)에서 다른 당(黨)에도 질의서(質疑書)를 보냈지만 가족제도(家族制度)와의 충돌(衝突)이나 사회적(社會的) 합의(合意) 미비(未備) 등(等)을 이유(理由)로 별다른 답변(答辯)을 하지 않았다"며 "민주노동당은 성소수자(性小數者) 정책(政策)을 고민(苦悶)하는 유일(唯一)한 정당(政黨)"이라고 강조(强調)했다. [14]

2005년(年) 부터 2006년(年) 까지 잠시(暫時) 동인(同人)련 대표(代表)로 사무국장직(事務局長職)을 겸임(兼任)하였다. 2005년(年) 5월(月) 1일(日) 에는 진보계열(進步系列) 인사(人士) 82명(名)과 함께 새 민중(民衆) 언론(言論) 창간(創刊) 추진작업(推進作業)에 참여(參與)하였다. [15]

사회(社會) 단체(團體) 활동(活動) [ 편집(編輯) ]

2007년(年) 6월(月) 1일(日) 흥국생명 연수원(硏修院)에서 인터넷언론(言論)네트워크(blog.jinbo.net/newsnet) 주최(主催) 인터넷언론(言論)네트워크 정책(政策)워크샵:사회적(社會的) 소수자(少數者)와 대안(代案)미디어의 역할(役割)에 참석(參席), "동성애(同性愛) 미디어"라는 주제(主題)로 발표(發表)하였다. [16]

2007년(年) 대선(大選) 기간(期間) 중(中) 성소수사공동행동(性小數社共同行動)에 참여(參與)하였다. 12월(月) 4일(日)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성전환자인권연대(性轉換者人權連帶) 지렁이, 한국(韓國)게이인권운동단체(人權運動團體) 친구(親舊)사이, 한국(韓國)레즈비언상담소(相談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韓國成績少數者文化人權)센터 등(等) 23개(個) 성소수단체(性小數團體)로 구성(構成)된 '차별금지법대응및성소수자혐오차별저지를위한긴급공동행동'(성소수자공동행동(性小數者共同行動))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候補), 정동영(鄭東泳) 대통합민주신당(大統合民主新黨) 후보(候補), 이회창(李會昌) 무소속(無所屬) 후보(候補) 등(等) 11명(名)의 대선(大選) 후보(候補)들에게 성소수자(性小數者) 인권(人權) 당면과제(當面課題)에 관(關)한 공개(公開) 질의서(質疑書)를 발송(發送)했다. [17]

정(正)욜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활동가(活動家)는 후보(候補)들이 답변서(答辯書)조차 보내지 않고 있는 것에 대(對)해 "성소수자(性小數者) 정책(政策)과 관련(關聯)한 후보(候補)들의 입장(立場)을 떠나서 대선(大選) 후보(候補)라면 최소한(最小限) 유권자(有權者)인 성소수자단체(性小數者團體)들의 질의(質疑)에 답변(答辯)을 하는 것이 최소한(最小限)의 예의(禮儀)가 아니냐"며 "표(票)에만 눈이 팔린 대선(大選) 후보(候補)들은 성소수자(性小數者)들을 유권자(有權者)로도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事實)을 확인(確認)했다"고 비판(批判)했다. [17] 그는 이어 "대선(大選) 후보(候補)들은 우리를 유권자(有權者)로 보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번(이番) 질의(質疑)에 대(對)한 태도(態度)를 성소수자(性小數者) 커뮤니티 안에 적극적(積極的)으로 알려내 투표(投票)로서 후보(候補)들을 평가(評價)하겠다"고 덧붙였다. [17]

2008년(年) 1월(月) 건강권(健康權) 실현(實現)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保健醫療團體聯合)(보건연합(保健聯合)) 주최(主催)로 1월(月) 25일(日)부터 27일(日)까지 3일간(日間) 서울대학교(大學校) 보건대학원(保健大學院)(혜화동)에서 개최(開催)된 ‘2008 보건의료(保健醫療) 진보(進步)포럼’에 참석(參席)하였다. [18] 1월(月) 26일(日) 에는 정동만 건강사회(健康社會)를 위한 약사회(藥師會) 정책팀장(政策팀長)이 ‘치료제(治療劑) 생산자(生産者), 제약회사(製藥會社)가 생명(生命)을 위협(威脅)하다’라는 주제(主題)로, 강신익 인제의대(醫大) 교수(敎授)가 그의 저서(著書) ‘몸의 역사(歷史), 몸의 문화(文化)’를, 우석훈(禹晳熏) 성공회대 교수(敎授)가 그의 저서(著書)인 ‘88만(萬)원 세대(世代), 미래세대(未來世代)의 전망(展望)’을 주제(主題)로 강연(講演)한다. 이어 ‘사회(社會), 보건의료운동(保健醫療運動)에게 묻는다’라는 주제(主題)로 토르나(이주노조(移住勞組)), 문현아(여성문화연구소(女性文化硏究所)), 윤상훈(녹색연합(綠色聯合)), 정(正)욜(동성애지인권연대(同性愛地人權連帶)) 등(等)의 토론자(討論者)가 참여(參與) 해 보건의료운동(保健醫療運動)과 사화운동(社化運動)과 연대(連帶)를 주제(主題)로 토론(討論)하였다. [18]

2009년(年) 1월(月) 지구지역행동(地區地域行動)네트워크 (NGA/SF) 추진위원(推進委員)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 2010년(年) 1월(月) 에는 용산참사(龍山慘事) 철거민(撤去民) 범국민장(汎國民醬)의 장례위원(葬禮委員)의 한 사람으로 참여(參與)하였다. 그해 1월(月) 9일(日) 용산참사(龍山慘事) 철거민(撤去民) 장례식(葬禮式)에 참석(參席)하고 돌아왔다.

인권재단(人權財團) 활동(活動) [ 편집(編輯) ]

2012년(年) 까지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의 대표(代表)였다. 2011년(年) 5월(月) 에는 게이 의 일생(一生)을 다룬 영화(映畫) 종로(鍾路)의 기적(奇跡) 에도 출연(出演)하였다. 그러나 영화(映畫) 출연(出演) 이후(以後) 문자(文字) 폭탄(爆彈)에 시달렸다. 2011년(年) 2월(月) 부터는 ' 인권재단(人權財團) 사람 '의 인권위원(人權委員)과 사무처(事務處) 직원(職員)이 되었으며, 인권(人權)센터 설립(設立)을 준비(準備)하였다.

2012년(年) 동인(同人)련 대표직(代表職)에서 물러나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청소년자긍심팀장(靑少年自矜心팀長)으로 전임(轉任)되었다. 2012년(年) 4월(月) 통합진보당(統合進步黨) 성소수자위원회(性小數者委員會)가 조직(組織)되자, 그는 통진당(統進黨) 성소수자위(性小數者位) 위원장(委員長)으로 추대(推戴)되었다.

저서(著書) [ 편집(編輯) ]

  • 《브라보 게이 라이프》(2011)

관련(關聯) 자료(資料) [ 편집(編輯) ]

같이 보기 [ 편집(編輯) ]

참고(參考) 문헌(文獻) [ 편집(編輯) ]

  • 정(正)욜, 《브라보 게이 라이프》 (나름북스, 2011)
  • 이수현, 《우리 옆의 약자(弱者):이 땅에서 소수자(少數者)로 살아가기》 (산지니(山지니), 2006)
  • 한채윤, 《하느님과 만난 동성애(同性愛)》 (차별(差別)없는 세상(世上)을 위한 기독인연대(基督人連帶), 2010)
  • 지승호, 《후천성(後天性) 인권(人權) 결핍(缺乏) 사회(社會)를 아웃팅하다:두려움에서 걸어 나온 동성애자(同性愛者) 이야기》 (시대(時代)의창, 2011)
  •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작은무지개들의 비밀일기(祕密日記)》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2011)

참조(參照) [ 편집(編輯) ]

  1. 四口一言 - '종로(鍾路)의 기적(奇跡)' 이혁상 감독(監督),소준문(燒準門),장병권,정(正)욜의 미녀(美女)들의 수다 아시아경제(아시아經濟) 2011.04.27
  2. 사(社) 자(者) 차(次) 하(下) 동성애자(同性愛者) 인권운동가(人權運動家) 정(正)욜씨(氏)의 삶 오마이뉴스 2005.02.18
  3. 인권위(人權委), 누구 눈치 보나 오마이뉴스 2003.02.07
  4. 하리수의 벗들 “내게도 2를 ” 한겨레 2002.12.24
  5. 어리석은 자(者)들의 진보적(進步的) 인권운동(人權運動) 10년(年)
  6. 한 동성애자(同性愛者)의 죽음을 통한 절규(絶叫) 오마이뉴스 2003.04.29
  7. 한기총, 동성애자(同性愛者) 죽음에 공식사과(公式謝過) 거절(拒絶) 오마이뉴스 2003.07.23
  8. [사진(寫眞)] 대학로(大學路) 반전집회(反戰集會) 2천여명(千餘名) 성황(盛況) 오마이뉴스 2003.09.28
  9. 서울시내(市內) 다시 울려퍼진 반전구호(反轉口號) 오마이뉴스 2003.09.27
  10. '동성애(同性愛)' 심의(審議) 없어지나 프레시안 2004.02.24
  11. 동성애(同性愛) ‘청소년(靑少年) 유해매체(有害媒體)’서 뺀다 한겨레 2003.02.04
  12. “성관계(性關係) 사진(寫眞) 찍어 동성애자(同性愛者) 사실(事實) 입증(立證)해라” 참세상(世上) 2006.02.15
  13. <한겨레> '에이즈 기사(記事)' 규탄(糾彈) 기자회견(記者會見) 열려 오마이뉴스 2004.02.04
  14. 헌정사상(憲政史上) 첫 국회(國會) 성소수자(性小數者) 교육(敎育) 열려 오마이뉴스 2005.01.18
  15. “새 ‘민중언론(民衆言論)’을 만들자!” 경향신문(京鄕新聞) 2005.03.24
  16. [알림] 인터넷언론(言論)네트워크 정책(政策)워크샵
  17. "대선후보(大選候補)들, 성소수자(性小數者)는 유권자(有權者)도 아닌가?" 참세상(世上) 2007.12.13
  18. [알림] 한국사회(韓國社會)와 보건의료(保健醫療)의 전망(展望)을 말하자
  19. '지구적(地球的) 가부장체제(家父長體制)' 맞설 새 대안운동(代案運動) 참세상(世上) 2009.04.18

외부(外部) 링크 [ 편집(編輯) ]

전임(前任)
임태훈
제(第)3대(代)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대표(代表)
2002년(年) ~ 2012년(年)
후임(後任)
곽이경
전임(前任)
고승우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사무국장(事務局長)
2002년(年) ~ 2004년(年)
후임(後任)
곽이경
전임(前任)
곽이경
동성애자인권연대(同性愛者人權連帶) 사무국장(事務局長)
2005년(年) ~ 2006년(年)
후임(後任)
장병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