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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時代) - 위키백과(百科),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百科事典) 본문(本文)으로 이동(移動)

에도 시대(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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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時代)
일본어식(日本語式) 한자(漢字) 표기(表記) ( 신자체(神自體) ) 江?時代
일본어식(日本語式) 한자(漢字) 표기(表記) ( 구자체(舊自體) ) 江戶時代
가나 표기(表記) えどじだい
국립국어원(國立國語院) 표준(標準) 표기(表記) 에도 시대(時代)
한국어(韓國語) 한자(漢字) 발음(發音) 강호(强豪) 시대(時代)
로마자(로마字) Edo jidai
도쿠가와 시대(時代)
일본어식(日本語式) 한자(漢字) 표기(表記) ( 신자체(神自體) ) ?川時代
일본어식(日本語式) 한자(漢字) 표기(表記) ( 구자체(舊自體) ) 德川時代
가나 표기(表記) とくがわじだい
국립국어원(國立國語院) 표준(標準) 표기(表記) 도쿠가와 시대(時代)
한국어(韓國語) 한자(漢字) 발음(發音) 덕천 시대(時代)

에도 시대(時代) ( 일본어(日本語) : 江?時代 에도 지다이 [ * ] ) 혹은(或은) 도쿠가와 시대(時代) ( 일본어(日本語) : ?川時代 도쿠가와 지다이 [ * ] )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세운 에도 막부(幕府) 가 일본(日本)을 통치(統治)한 1603년(年)부터 1868년(年)까지의 시기(時期)를 가리킨다. 에도 시대(時代) 일본(日本)에서는 급격(急激)한 경제(經濟) 발전(發展)이 이루어졌고 유례(類例)없는 번영(繁榮)을 누렸다. 에도 막부(幕府)는 사회(社會) 안정(安定)을 최고(最高) 국시(國是)로 삼고 쇄국(鎖國) 정책(政策)을 펴 외부(外部) 세력(勢力)들의 출입(出入)을 막았으며, 와(和)를 기반(基盤)으로 한 정책(政策)들을 실시(實施)하였다. 이 시기(時期) 일본(日本)은 우키요에 와 같은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화(文化)들을 꽃피웠고 인구(人口)가 꾸준히 증가(增加)하였다. 에도 막부(幕府)는 1603년(年) 3월(月) 24일(日)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依)하여 설립(設立)되었고, 1868년(年) 5월(月) 3일(日)에 메이지 유신(維新) 으로 인하여 에도가 개혁파(改革派)들의 손에 떨어질 때까지 존속(存續)했다.

에도 막부(幕府) [ 편집(編輯) ]

가마쿠라 막부(幕府) 이래(以來), 일본(日本)의 권력(權力)은 천황(天皇) 이 아닌 막부(幕府) 사무라이 들에게 있었다. 에도 막부(幕府) 또한 무가(巫歌) 계급(階級)인 사무라이들로 구성(構成)되어 있었고, 모든 권력(權力)은 막부(幕府)의 최고(最高) 권력자(權力者)인 쇼군 에게 있었다. 특히(特히) 에도 막부(幕府)는 특유(特有)의 봉건제(封建制)를 채택(採擇), 다이묘들에게 봉지(封紙)를 하사하고 그 대신(代身) 충성심(忠誠心)을 요구(要求)하는 방식(方式)을 채택(採擇)하였다.

에도 막부(幕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依)하여 설립(設立)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다져놓은 초석(礎石)을 기반(基盤)으로 삼아 혼란(混亂)의 시대(時代)였던 센고쿠 시대(時代) 를 끝내고 새로운 막부(幕府)를 세웠던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 일어나던 당시(當時)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미 일본(日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음으로 강력(强力)한 다이묘였으며, 그가 소유(所有)하고 있던 부유(富裕)한 간토 지방(地方)에서 막대(莫大)한 수입(輸入)을 올렸다. 그는 무려(無慮) 2백만(百萬) 석(席)에 달(達)하는 봉지(封紙)를 소유(所有)하고 있었으며 그의 영지(領地)에 에도 (미래(未來)의 도쿄)를 세워 요새화(要塞化), 번영(繁榮)시켰다. 그는 38명(名)에 달(達)하는 가신(家臣)들을 휘하(麾下)에 두고 있었고, 간접적(間接的)으로 2백만(百萬) 석(石)이 넘는 토지(土地)에 영향력(影響力)을 미쳤다. 히데요시가 전쟁(戰爭)에서 승리(勝利)하지 못하고 사망(死亡)하자, 이에야스는 곧바로 권력(權力)에 대(對)한 야욕(野慾)을 드러내어 도요토미 가문(家門)을 몰살(沒殺)하고 힘을 틀어쥐고자 하였다.

이에야스가 1600년(年) 10월(月) 21일(日)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戰鬪) 에서 서군(徐君)을 꺾은 후(後), 그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일본(日本)의 최고(最高) 권력자(權力者)로 떠올랐다. 그는 수많은 정적(政敵) 다이묘 들을 숙청(肅淸)했고, 이들에게서 빼앗은 토지(土地)와 농민(農民)들을 그의 동맹(同盟)과 가족(家族)들에게 전리품(戰利品)으로 하사하였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일본(日本) 전역(全域)에 확고(確固)한 힘을 미치지는 못하였고, 그에 반대(反對)하는 다이묘들은 여전히(如前히) 존재(存在)했다. 허나 이후(以後) 그가 쇼군의 지위(地位)를 획득(獲得)하자 그의 동맹(同盟) 체제(體制)는 점차(漸次) 공고화(鞏固化)되었고, 도쿠가와 가문(家門)의 통치(統治)는 안정(安定)되기 시작(始作)했다. 도쿠가와 가문(家門)의 권력(權力)이 충분히(充分히) 강(剛)해지자 그는 1605년(年)에 그의 아들인 히데타다 를 쇼군으로 대신(代身) 세우고 퇴위(退位)하였다. 다만 이때까지도 도요토미 가문(家門)이 여전히(如前히) 남아있었기에 이에야스는 이들을 완전히(完全히) 뿌리뽑기로 결심(決心)하였다. 1615년(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결국(結局) 반란(叛亂)을 구실(口實)로 삼아 오사카 에 있던 도요토미 가문(家門)의 성(性)을 함락(陷落)시키며 에도 막부(幕府)의 통치(統治)를 안정시켰다.

에도 막부(幕府)는 대략(大略) 250년(年) 동안 일본(日本)에 평화(平和)와 안정(安定)을 가져다 주었다. 이 당시(當時) 정치(政治) 체제(體制)는 중앙(中央)에 막부(幕府)가 버티고 있고, 지방(地方)은 다이묘들이 각각(各各) 다른 번들을 다스리고 있는 구조(構造)였다. 막부(幕府) 체제(體制)에서는 쇼군과 중앙(中央) 정부(政府)가 국가적(國家的)인 권력(權力)을 잡았으며, 다이묘와 지방(地方) 정부(政府)들이 지역적(地域的)인 권력(權力)을 맡아 처리(處理)했다. 이처럼 독특(獨特)한 일본적(日本的)인 봉건제(封建制)는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와 지방자치제(地方自治制)를 절묘히 섞어놓은 것으로, 이후(以後) 일본(日本) 전체(全體)에 번영(繁榮)과 안정(安定)을 불러오게 되었다. 도쿠가와 가문(家門)은 이같은 제도(制度)를 기반(基盤)으로 하여 첫 100여(餘) 년(年) 동안 토지(土地)들을 재분배(再分配)하여 거의 7백만(百萬) 석(席)에 달(達)하는 봉토(封土)를 새롭게 얻었고, 중요(重要)한 대도시(大都市)들을 완벽(完璧)하게 장악(掌握)했으며 새로운 토지(土地)들을 경작(耕作)하여 막대(莫大)한 이익(利益)을 창출(創出)해 냈다.

일본(日本)의 봉건제(封建制)는 지방(地方)의 모든 다이묘들을 계급(階級)을 나누어 구분(區分)했다. 도쿠가와 가문(家門)과 가장 혈연적(血緣的)으로 가깝고 충성심(忠誠心)이 깊은 가문(家門)은 신판(新版) 다이묘 로 불렸다. 도쿠가와 가문(家門)의 봉토(封土)는 총(總) 23개(個)의 다이묘들의 영토(領土)와 접(接)해있었고, 이들이 모두 신판(新版) 다이묘들이었다. 이들은 막부(幕府)에서도 최고(最高)위 관직(官職)들을 독점(獨占)하였으며 쇼군의 총애(寵愛)를 등에 업고 막대(莫大)한 권력(權力)을 휘둘렀다. 신판(新版) 다이묘 다음가는 계급(階級)은 후다이 다이묘 였다. 후다이 다이묘들은 신판(新版) 다이묘 다음으로 비옥(肥沃)하고 중요(重要)한 봉토(封土)들을 수여(授與)받았고, 18세기(世紀) 경(頃)에는 대략(大略) 145명(名)에 달(達)하는 후다이 다이묘들이 있었다. 이들은 신판(新版) 다이묘들보다는 격(格)이 낮았으나, 여전히(如前히) 좋은 대우(待遇)를 받았다. 또한 거의 대부분(大部分)의 막부(幕府) 관직(官職)들은 이 후다이 다이묘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마지막 계급(階級)은 도(度)자마 다이묘 들이었으며, 대략(大略) 97명(名)에 달(達)했다. 이들은 세키가하라 전투(戰鬪) 이후(以後), 도쿠가와 가문(家門)이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최고(最高) 권력자(權力者)가 된 이후(以後)에 어쩔 수 없이 에도 막부(幕府)에 복종(服從)한 자(者)들이었다. 이들은 보통(普通) 최전방(最前方)의 쓸모없는 토지(土地)들을 봉토(封土)로 삼았으며, 이들의 영토(領土)를 모두 합쳐봤자 1천만(千萬) 석(席)밖에 되지 않았다. 에도 막부(幕府)에게 이들은 가장 주의(注意)하여야 할 대상(對象)이었으며, 사고(事故)를 쳤을 경우(境遇)에도 반란(叛亂)이나 역모(逆謀)의 목적(目的)이 아닐 때는 참작(參酌)하여 조용히 봐주는 경우(境遇)가 많았다. 또한 도(度)자마 다이묘들이 에도의 중앙(中央) 관직(官職)에 진출(進出)하는 경우(境遇)는 거의 없었다.

에도 막부(幕府)는 일본(日本) 전역(全域)에 영향(影響)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천황(天皇) , 조정(調整), 다이묘, 종교(宗敎) 단체(團體)들에게도 전례(前例) 없을 정도(程度)로 막대(莫大)한 영향(影響)을 끼쳤다. 원래(元來) 천황(天皇)은 쇼군보다도 상위(上位)에 존재(存在)하는 일본(日本) 최고(最高) 권력자(權力者)였으나, 이는 허울일 뿐이었고 실제로(實際로)는 쇼군의 허수아비에 불과(不過)했다. 다만 에도 막부(幕府)는 무너져 가던 황궁(皇宮)을 보수(補修)하고 황실(皇室) 소유(所有) 토지(土地)를 늘려주면서 황실(皇室)의 권위(權威)를 높여주었다. 또한 도쿠가와 가문(家門)은 황실(皇室)과 혼인(婚姻)을 통하여 권력(權力)의 정통성(正統性)을 강화(强化)하고자 하였으며, 형식적(形式的)으로나마 천황(天皇)의 재가(裁可)를 받아 국정(國政)을 운영(運營)하는 방식(方式)으로 천황(天皇)의 체면(體面)을 세워주었다.

무가제법(巫歌製法)도 와 같은 다양한 법령(法令)들이 제정(制定)되어 다이묘들을 엄격(嚴格)하게 통제(統制)하였다. 이 법률(法律)들에는 개인적(個人的)인 사생활(私生活), 결혼(結婚), 소유(所有)할 수 있는 병사(兵士) 수, 무기(武器)의 종류(種類), 옷의 종류(種類) 등(等)까지도 엄격히(嚴格히) 통제(統制)했다. 또한 다이묘들이 매(每) 2년(年)마다 에도에 들러 쇼군을 뵙게 하였고, 가족(家族)들 일부(一部)를 인질(人質)로 삼았다. 또한 해양(海洋) 무역(貿易)도 엄격(嚴格)하게 금지(禁止)하였고, 기독교(基督敎)를 박해(迫害)하였으며 한 명(名)의 다이묘가 오직 한 개(個)의 성(性)만 소유(所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앙(中央) 정부(政府)는 번(番)의 농민(農民)들에게 직접적(直接的)으로 세금(稅金)을 걷지는 않았으나, 대신(代身) 번주들에게 궁전(宮殿), 성(性), 도로(道路), 다리 공사(工事) 등(等)을 명분(名分)으로 각종(各種) 세금(稅金)을 바칠 것을 요구(要求)했다. 이러한 규제(規制)들은 쇼군의 권력(權力)을 강화(强化)시켰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相對的)으로 다이묘들의 권력(權力)을 약화시켰다. 독립적(獨立的)인 번(番)들은 점차(漸次) 지방(地方) 행정(行政) 조직(組織)으로 그 세(勢)가 약화(弱化)되었으며 다이묘들은 점차(漸次) 막부(幕府)의 관료(官僚)들로 변모(變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다이묘들은 여전히(如前히) 자신(自身)들의 번(番)에서 독립적(獨立的)인 행정적(行政的), 사법적(司法的) 권한(權限)을 지니고 있었으며 세금(稅金)을 걷고 자체적(自體的)으로 행정(行政)을 실시(實施)할 수도 있었다. 막부(幕府)는 종교(宗敎) 단체(團體), 예(例)를 들어 사찰(寺刹)들과 신토 신사(紳士)들에도 충성(忠誠)을 맹세받았으며, 이를 기반(基盤)으로 종교적(宗敎的)인 명분(名分)까지도 얻어냈다.

해외(海外) 무역(貿易) [ 편집(編輯) ]

이에야스는 전임자(前任者)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마찬가지로 해외(海外) 무역(貿易)을 장려(奬勵)하였으나 외지인(外地人)들을 믿지는 못했다. 그는 에도를 일본(日本)의 주요(主要) 항구(港口)로 부상(浮上)시키고 싶어 하였으나, 유럽인(人)들이 규슈 를 더 선호(選好)한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中國)이 일본(日本)의 공식적(公式的)인 무역(貿易) 제안(提案)을 거절(拒絶)하자 이를 포기(抛棄)하였다. 그는 대신(代身) 이미 존재(存在)하는 무역(貿易)로들을 통제(統制)하는 방향(方向)으로 정책(政策)을 수정(修正)하였고, 특정(特定) 항구(港口)들을 정(定)하여 그곳에서만 외부인(外部人)들과 무역(貿易)을 할 수 있도록 제한(制限)하였다.

에도 시대(時代)가 시작(始作)될 무렵, 일본(日本)에서는 남만 무역(貿易) 시대(時代) 가 끝나가고 있었다. 남만 무역(貿易) 시대(時代)에는 일본인(日本人)들이 남만(南滿)과 무역(貿易)을 진행(進行)하며 유럽인(人)들과도 많은 교류(交流)를 나누었고, 경제적(經濟的), 종교적(宗敎的)인 발전(發展)도 거듭한 시기(時期)였다. 에도 시대(時代) 초기(初期)에 일본(日本)은 처음으로 서양식(西洋式) 군함(軍艦)을 건조(乾燥)하였다. 가장 대표적(代表的)인 예(例)가 500톤 갤(갤)리언 이었는데, 일본(日本)은 이 군함(軍艦)을 이용(利用)하여 하세(下世)쿠라 쓰네나가 를 비롯한 일본(日本) 대사(大使)들을 미국(美國)과 유럽으로 보냈다. 또한 막부(幕府)는 이 시기(時期)에 아시아 무역(貿易)을 전개(展開)하기 위하여 대략(大略) 720여(餘) 척(尺)에 달(達)하는 주인선(主人線)들에 대(對)한 허가(許可)를 내주기 시작(始作)했다. 야마다 나가마사 와 같은 일본(日本) 탐험가(探險家)들은 이 배들을 사용(使用)하여 아시아 전역(全域)을 돌아다니며 탐험(探險)했다.

한편(한便) 에도 시대(時代) 초기(初期)에는 활발(活潑)한 무역(貿易)과 함께 서양(西洋)의 기독교(基督敎) 도 함께 전래(傳來)되었다. 기독교(基督敎)는 급격히(急激히) 세(勢)를 늘려가며 결국(結局)에는 규슈를 다스리는 다이묘들조차 이를 믿는 지경(地境)에 이르렀고, 신토와 불교(佛敎)를 국교(國敎)로 삼았던 막부(幕府)는 이를 심각(深刻)한 위협(威脅)으로 여겼다. 막부(幕府)는 1612년(年)에 막부(幕府)의 가신(家臣)들과 도쿠가와 가문(家門)의 거주자(居住者)들에게 모두 기독교(基督敎)를 배척(排斥)할 것으로 요구(要求)하였고, 1616년(年)에 이르자 서양인(西洋人)들과 무역(貿易)을 제한(制限)하면서까지 기독교도(基督敎徒)들의 유입(流入)을 막으려 애썼다. 1622년(年)에는 120명(名)에 달(達)하는 선교사(宣敎師)들을 박해(迫害)하여 처형(處刑)시켰고, 1624년(年)에는 대표적(代表的)인 가톨릭교도(敎徒)들이었던 스페인 인(人)들을 쫓아냈다. 1629년(年)에는 수천(數千) 명(名)에 달(達)하는 일본(日本) 기독교도(基督敎徒)들을 순교(殉敎)시켜 버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강력(强力)한 조치(措置)들에도 기독교(基督敎)의 세(歲)가 사그라들지 않자, 결국(結局) 에도 막부(幕府)는 1635년(年)에 쇄국(鎖國) 칙령(勅令)을 내렸다. 이 칙령(勅令)은 모든 일본인(日本人)들을 일본(日本)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禁止)하는 내용(內容)을 담고 있었고, 만일(萬一) 나간다면 다시는 일본(日本)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명시(明示)하였다. 다만 모든 외부인(外部人)들의 출입(出入)은 금지(禁止)하지 않았으며, 1636년(年)에는 나가사키 에 있는 인공(人工)섬 데지마 에 한정(限定)하여 네덜란드 상인(商人)들이 오고가는 것을 허가(許可)하였다. 또한 이 시기(時期)에 네덜란드가 일본(日本) 교역(交易)을 독점(獨占)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등(等) 로마 가톨릭 세력(勢力)에게는 일본(日本) 식민지화(植民地化)의 의도(意圖)가 있어 위험(危險)하다고 막부(幕府)에 조언(助言)했던 것도 영향(影響)을 미쳤다. 중국(中國)에서는 이와 비슷한 정책(政策)을 해금(解禁)(海禁)정책(政策)이라고 부른다. 중국(中國)의 경우(境遇)에는 주로(主로) 연안(沿岸) 지역(地域)의 왜구(倭寇) 를 포함(包含)한 해적(海賊) 방어(防禦)와 해상(海上)에서의 밀무역(密貿易)을 금지(禁止)하는 것이 목적(目的)이었으므로 일본(日本)의 쇄국(鎖國)과는 사정(事情)이 다른 면(面)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쇄국도(鎖國度) 중국(中國)의 해금(奚琴)과 같이 쇄국(鎖國)보다는 해금(解禁)이라고 하는 쪽이 적당(適當)하다는 설명(說明)도 있다. 쇄국정책(鎖國政策)이 실시(實施)되기 이전(以前)에는 일본인(日本人)의 해외(海外) 진출(進出)은 활발(活潑)했고, 동남아시아(東南아시아) 에 많은 일본인(日本人) 마을이 형성(形成)되었다. 또한 태국(泰國) 에 건너간 야마다 나가마사 처럼 그 나라에서 중용(重用)되는 경우(境遇)도 있었다.

막부(幕府)는 기독교(基督敎)를 극히(極히) 위험(危險)한 불순(不純) 요인(要因)으로 여겼고, 기독교(基督敎)를 일본(日本) 사회(社會)에서 완전히(完全히) 근절(根絶)시키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努力)을 쏟았다. 1637년(年)에 가톨릭을 믿는 사무라이들과 농민(農民)들이 주축(主軸)이 되어 시마바라의 난 을 일으키자 막부(幕府)는 네덜란드인(人)들의 화포(火砲)를 사용(使用)하여 반란군(叛亂軍)들의 요새(要塞)를 폭격(爆擊)하였고, 이로서 일본(日本) 내부(內部)의 기독교(基督敎) 움직임은 큰 타격(打擊)을 입었다. 이후(以後) 서양(西洋)에 문호(門戶)를 개방(開放)할 때까지 일본(日本)에서는 기독교(基督敎) 세력(勢力)들이 전혀(全혀) 힘을 제대로 발휘(發揮)하지 못했다. 이후(以後)의 기독교(基督敎)는 비밀(祕密) 단체(團體)처럼 변(變)하여 막부(幕府)의 눈을 피(避)해 몰래 포교(布敎)하였고, 가쿠레 키리시탄(柴炭) 이라고 불렸다. 이같은 난(亂)까지 일어나자 서양(西洋)과 기독교(基督敎) 세력(勢力)에 대(對)한 막부(幕府)의 적대심(敵對心)은 극(極)에 달(達)했고 결국(結局) 포르투갈 인(人)들은 영구적(永久的)으로 쫓겨났다. 몇몇 포르투갈 외교관(外交官)들은 아예 처형당했으며 포르투갈 공사(公社)에서 일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신토 불교(佛敎) 로 개종(改宗)하도록 강요당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와 중국인(中國人)들은 포르투갈처럼 심(甚)한 대우(待遇)를 받지는 않았으나, 이들도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만 겨우 출입(出入)이 허가(許可)되었다. 변방(邊方)의 다이묘들이 조선(朝鮮) 류큐 왕국(王國) 과 일부(一部) 국소적(局所的)인 무역(貿易)을 진행(進行)하기는 하였으나 1641년(年) 이래(以來) 일본(日本)의 대부분(大部分)의 섬들은 국외(國外)와 거의 연락(連絡)을 하지 못하고 살아갔다. 일본(日本)의 마지막 예수회 선교사(宣敎師)는 1644년(年)에 죽거나 개종(改宗)당한 것으로 전(傳)해진다. 1660년대(年代)에 이르자, 일본(日本)에서 기독교(基督敎)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程度)로 세(勢)가 약화(弱化)되었고 국외(國外) 세력(勢力)들이 일본(日本)에 미치는 경제적(經濟的), 정치적(政治的) 영향력(影響力)도 크게 감소(減少)하였다. 오직 중국(中國)과 조선(朝鮮), 네덜란드 동인도(東印度) 회사(會社) , 영국(英國) 만이 가끔씩 일본(日本)을 방문(訪問)하였으며, 이마저도 상업적(商業的)인 목적(目的)에 한정(限定)되었다. 일본(日本) 해안(海岸)에 허가(許可) 없이 상륙(上陸)한 서양인(西洋人)들은 모두 재판(裁判) 없이 처형당했다.

에도 시대(時代)의 동전(銅錢) 천보통보(千步通報) ( 영어판(英語版) ) [텐포츠호(號)(てんぽうつうほ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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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經濟) [ 편집(編輯) ]

에도 시대(時代)에는 급격(急激)한 도시화(都市化)와 함께 전문적(專門的)인 상업(商業) 지구(地球)가 형성(形成)되어 보다 발전(發展)된 형태(形態)의 상업(商業)이 이루어졌다. 또한 고등(高等) 교육(敎育)을 받은 엘리트 계급(階級), 고도(高度)로 발달(發達)된 봉건제(封建制) 정부(政府), 생산성(生産性) 높은 농업(農業) 기술(技術), 전국적(全國的)으로 이어져 있는 금융(金融)과 시장(市場) 경제(經濟) 체제(體制), 전국(全國)에 깔려있는 질(質)좋은 도로(道路) 등(等)이 서로 합쳐지며 시너지 효과(效果)를 내며 일본(日本)의 경제(經濟)는 비약적(飛躍的)인 성장(成長)을 이룩했다. 또한 상품(商品)의 운송량(運送量)이 크게 늘었고, 외국(外國)에서 들여온 기술(技術)을 바탕으로 한 수공업(手工業)이 크게 발달(發達)하였다. 무역로(貿易路)들도 활발히(活潑히) 사용(使用)되었으며 상업(商業)이 번성(蕃盛)하자 은행업(銀行業)과 대부업(貸付業)도 성장(成長)하였다. 지방(地方)의 번들과 다이묘들은 이같은 상업(商業) 발전(發展)을 크게 장려(奬勵)했고, 자신(自身)의 번들의 농업(農業) 생산량(生産量)을 늘리고 지역(地域) 주민(住民)들의 삶을 높이기 위해 노력(努力)했다.

에도 시대(時代) 에 평화로운 분위기(雰圍氣)의 지속(持續)으로 인해 교통(交通)·상공업(商工業)의 발전(發展)과 시정인(市井人)(市井人)의 대두(擡頭), 화폐(貨幣) 경제(經濟)의 성립(成立), 다수(多數)의 도시(都市) 출현(出現) 등(等) 상품(商品) 경제(經濟)가 크게 발달(發達)하였는데 이러한 경제(經濟) 발전(發展)의 혜택(惠澤)은 기존(旣存)의 사무라이 계층(階層)보다는 상인(商人) 계층(階層), 즉(卽) 조닌 들이 차지하였다. 경제(經濟)의 실권(實權)을 쥔 도시민(都市民)의 힘은 한편(한便)으론 무사(武士)의 권위(權威)를 실추(失墜)시켰다. 이에 따라 무사(武士)에 돈을 주고 무사(武士) 집안의 양자(養子)로 들어가는 자(者)들이 많이 나타났다. 막부(幕府)에서는 교역선(交易線)에 슈인장(腸)을 부여(附與)하여 조닌들은 동남아(東南亞)에까지 진출(進出)하여 일본인(日本人)들의 마을을 만들 정도(程度)였다. 5대(大)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대(臺)(1680~1709년(年))에 에도 막부(幕府)는 겐로쿠 (1688~1703년(年)) 호황(好況)이라고 부르는 최대(最大)의 전성기(全盛期)를 맞이했다. 다만 이후(以後) 막부(幕府)의 심각(深刻)한 낭비(浪費)와 더불어 1657년(年) 발생(發生)한 메이레키 대화재(大火災) 이후(以後) 겐로쿠 호황(好況)으로 쌓인 탄탄한 재정(財政)은 점차(漸次)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始作)했고, 이를 해결(解決)하기 위해 금(金)·은화(銀貨)의 가치(價値)를 떨어뜨려 새로 화폐(貨幣)를 주조(鑄造)하여 그 차익(差益)으로 재정(財政)을 충당(充當)하였지만 이로 인한 화폐(貨幣) 가치(價値)의 저하(低下)와 함께 급등(急騰)한 물가(物價)로 서민(庶民)들의 생활(生活)은 더욱 궁핍(窮乏)해졌다.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노부(老父) (재위(在位):1709~12년(年))는 겐로쿠 화폐(貨幣) 대신(代身) 양질(良質)의 새로운 화폐(貨幣)인 쇼토쿠 화폐(貨幣) 를 주조(鑄繰)하고 금은(金銀)의 유출(流出)을 막기 위해 쇼토쿠 신령(神靈) 을 발표(發表), 나가사키 등(等)의 무역항(貿易港)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外國) 선박(船舶) 수(數)와 무역액(貿易額)을 크게 제한(制限)·삭감(削減)하는 등(等) 겐로쿠 호황(好況) 직후(直後)에 일어난 경제적(經濟的) 동요(動搖)를 막고자 노력(努力)했다. 농촌(農村)에서도 토지매매(土地賣買) 금지령(禁止令)이 유명무실(有名無實)해져 자작농(自作農)들이 소작농(小作農) 으로 전락(轉落)하는 경우(境遇)가 많았다. 이에노부(老父) 대(臺)(1709~12년(年))에 겐로쿠 화폐(貨幣)를 대신(代身)할 화폐(貨幣)가 주조(鑄造)된 이후(以後) 몇 대(代)에 걸쳐 계속(繼續) 화폐(貨幣)의 질(質)과 주조량(主潮量)을 변화시켜 가면서 재정(財政)을 보충(補充)하고자 했고 직할령(直轄領)의 농민(農民)들에게 과중(過重)한 세금(稅金)을 부과(賦課)하기도 했으나 역부족(力不足)이었다.

이러한 재정난(財政難) 속에서 제8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무네 (1716~45년(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時代)로의 복귀(復歸)를 표방(標榜)하면서 절검(節儉), 상무(常務)를 강조(强調)하면서 상품(商品) 경제(經濟)와 조닌을 억제(抑制)하는 개혁(改革)( 교호(交互) 개혁(改革) )을 단행(斷行)하였으나, 그 효과(效果)는 크지 않았고 집단적(集團的) 청원(請願)이나 제한적(制限的) 파괴(破壞) 행위(行爲), 즉(卽) 잇키 가 빈발(頻發)하였다.

중세(中世) 말(末)에는 일시적(一時的)인 봉공(奉公) 계약(契約) 관행(慣行)이 존재(存在)하였는데,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1560년대(年代) 무렵에 제정(制定)한 분국법(國法)(分國法)「新加制式」의 제(第)13 조인 「一季奉公輩事」이다. 여러 주인(主人) 밑을 몇 달까지를 기한(期限)으로 전전(轉轉)하는 봉공인(奉公人)이 일반적(一般的)으로 존재(存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토에서도 2월(月), 8월(月)에 교대(交代)하는 임금(賃金) 노동자(勞動者)가 많이 존재(存在)하였다.

하지만 막부(幕府)에 의(依)해 인신매매(人身賣買)가 금지(禁止)되었고 봉공(奉公) 제도(制度)가 존재(存在)했음에도 그 틈새에서 일종(一種)의 인력(人力) 파견업(派遣業)이 성행(盛行)하였다. 18세기(世紀) 초(初)에 이르면 이미 에도는 100만(萬), 오사카와 교토는 40만(萬)에 이르는 인구(人口) 규모(規模)를 지닐 정도(程度)의 대도시(大都市)가 되는데 이를 배경(背景)으로 400여(餘) 개(個) 파견업체(派遣業體)가 성행(盛行)하였다. 일자리 중개(仲介)가 성사(成事)되면 이들 업체(業體)는 사용자(使用者)와 봉공(奉公) 계약(契約)을 체결(締結)하고 수수료(手數料)를 받았다.

에도 시대(時代) 관청(官廳)인 봉행(奉行)소(奉行所)는 파견업체(派遣業體)들에게 조합(組合)을 조직(組織)하게 했고, 이 조합(組合)을 통해 관리(管理) 감독(監督)했다. 과도(過度)한 수수료(手數料)에 대(對)한 단속(團束)도 이루어졌지만, 노동권(勞動權)이 확립(確立)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時期)인 만큼 관리(管理) 감독(監督)의 기본적(基本的)인 초점(焦點)은 사용자(使用者)가 손해(損害)를 보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에도 시대(時代) 후기(後期)부터는 무사(武士) 계급(階級)의 하층(下層) 무사(武士)들이 경제(經濟) 상황(狀況)이 악화(惡化)되면서 이러한 봉공(奉公) 기간(期間)이 단축(短縮)됨은 물론(勿論) 신분제도(身分制度) 약화(弱化)되었고, 막부(幕府) 말기(末期) 시대(時代)에 이르면 근대적(近代的) 형태(形態)의 임노동(賃勞動) 관계(關係)가 형성(形成)되기 시작(始作)한다. 히토야도(吐野都)를 통한 파견(派遣) 노동(勞動)은 이러한 변화(變化)의 과도기(過渡期)에 나타난 일종(一種)의 비정규(非正規) 노동(勞動)이었던 것이다.

18세기(世紀) 후반(後半) 들어 관정개혁(管井改革)을 실시(實施)하지만 이 역시(亦是) 성공(成功)하지 못했다. 18세기(世紀) 후반(後半) 이후(以後)에 막부(幕府) 정권(政權)은 점차(漸次) 동요(動搖)하게 된다. 먼저 막부(幕府) 정권(政權)과 각(各) 지역(地域) 번(番)[藩]들은 재정난(財政難)에 시달렸고, 이에 경제난(經濟難)을 모면(謀免)하고자 조닌과 농민(農民)의 이익(利益)을 권력층(權力層)이 차지하는 전매제(專賣制)를 적극적(積極的)으로 실시(實施)하였는데, 이는 민중(民衆)들로부터 커다란 반발(反撥)을 샀다. 제(第)9대(代)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 대(代)에는 다누마 오키쓰구 등(等) 다누마 씨(氏) 를 중심(中心)으로 하여 재정(財政) 회복(回復)을 꾀하였지만 결국(結局) 당대(當代)에 일어난 기근(飢饉) 과 같은 자연(自然) 재해(災害)로 인하여 실패(失敗), 결국(結局) 실각(失脚)하게 되었다. 그러자 고산(孤山)케 계층(階層) 등(等)은 이에 대(對)한 책임(責任)을 다누마 씨(氏)에게 물어 실각(失脚)시켰다. 화폐상품(貨幣商品) 경제(經濟)가 발달(發達)하자, 예전부터 쌀을 기반(基盤)으로 연공수입(年功收入)을 가졌던 다이묘와 하타모토 의 재정(財政)은 악화(惡化)되었고, 막부(幕府)와 같이 번정개혁(番鄭改革) 을 단행(斷行)하였다. 조슈번 사쓰마번 은 이 개혁(改革)이 성공(成功)하였고, 막부(幕府) 말기(末期)의 중심(中心) 세력(勢力)으로 부상(浮上)하게 된다.

<근대(近代) 동아시아(東아시아) 경제(經濟)의 역사적(歷史的) 구조(構造)>에 따르면 1870년(年)의 일본(日本)은 일인당(一人當) 연간(年間) 1.76석(席)(이중(中) 실제(實際) 쌀은 1.14석(席))을 생산(生産)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朝鮮) 의 경우(境遇)도 기재(記載)되어 있다.

1910년(年)의 농업생산량(農業生産量)은 개항기(開港期) 동안 도입(導入)된 일본(日本)의 다수확(多收穫) 품종(品種) 벼, 일본(日本)이라는 대규모(大規模) 
 수출(輸出) 시장(市場)의 등장(登場)과 미(美)가 상승(上昇)으로 인한 동기부여(動機附與)에 의(依)해 그 이전(以前) 시기(時期)
에 비해 상당량(相當量) 늘었을 가능성(可能性)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전(以前) 수치(數値)는 잘 알 수 없으므로 일단(一旦) 이 수치(數値)를 통하여 비교(比較)해보기로 한다. 1910년(年)의 조선(朝鮮) 인구(人口)는 1640만명(萬名) 정도(程度)로
추정(推定)되며 2682만석(滿席)이므로 인구(人口) 1명당(名當) 생산량(生産量)은 1.63석(席)으로 이는 kg 단위(單位)로 환산(換算)하여 234kg이며 이 중(中) 실제(實際) 쌀은 96kg이다.

2018년(年) 1월(月) 발간(發刊)된 매디슨 프로젝트에 따르면 16세기(世紀) 이후(以後) 일본(日本)의 1인당(人當) 경제력(經濟力)은 증가(增加)하는 추세(趨勢)였으며 1800년(年)의 일본(日本)의 1인당(人當) 경제력(經濟力)은 1009 달러라고 한다. 해당(該當) 연구(硏究)에서는 1820년(年)의 조선(朝鮮)은 411달러로 나타나 있다.

인구(人口) [ 편집(編輯) ]

18세기(世紀) 중반(中盤), 에도는 대략(大略) 1백만(百萬) 명(名)에 달(達)하는 인구(人口)를 가진 대도시(大都市)였으며, 당시(當時) 세계(世界)에서 가장 거대(巨大)한 도시(都市)들 중(中) 하나였다. 오사카와 교토는 각각(各各) 40만(萬) 명(名)이 넘는 거주자(居住者)들을 가진 대도시(大都市)였으며 이 외(外)의 도시(都市)들도 인구(人口)가 크게 늘며 발전(發展)하였다. 오사카와 교토는 일본(日本)의 무역(貿易), 수공업(手工業)의 중심지(中心地)로 떠올랐고 에도는 전국(全國)에서 식량(食糧)과 수공업(手工業) 제품(製品)들을 소화(消化)하는 소비(消費)의 중심지(中心地)의 역할(役割)을 했다. 1700년(年) 경(頃), 일본(日本)은 도시화율(都市化率)이 10%에서 12%에 달(達)하며 세계(世界)에서 가장 도시화(都市化)된 국가(國家)였다. 도시(都市)에 몰려 살아가던 인구(人口)들 중(中) 절반(折半)은 사무라이였고, 나머지 절반(折半)은 후(後)에 조닌 이라 불리게 되는 상인(商人)들과 수공업자(手工業者)들이었다. 에도 시기(時期)의 초반부(草飯部)에, 일본(日本)은 인구(人口)가 급격(急激)히 증가(增加)하여 대략(大略) 3천만(千萬) 명(名)에 달(達)하는 인구(人口)를 보유(保有)하고 있었다. 다만 1720년대(年代)에서 1820년대(年代)까지는 기근(飢饉)의 영향(影響)으로 거의 0% 대(代)의 인구(人口) 성장률(成長率)을 기록(記錄)했다.

1721년(年)의 일본(日本) 인구(人口)는 대략(大略) 3천만(千萬) 명(名) 정도(程度)였고 150년(年)이 지난 메이지 천황(天皇) 의 통치기(痛治期)에도 일본(日本)의 인구(人口)는 3천(千) 2백만(百萬) 명(名) 정도(程度)에 그쳤다. 1721년(年)부터 에도 막부(幕府)는 정기적(定期的)인 인구(人口) 조사(調査)를 진행(進行)했고, 그 외(外)에도 기독교(基督敎)를 박멸(撲滅)하기 위한 목적(目的)의 종교(宗敎) 조사(調査)도 함께 실시(實施)했다. 이는 이후(以後) 막부(幕府)에게 중요(重要)한 통치(統治) 자료(資料)로 쓰였다.

마비(痲痹)키 [ 편집(編輯) ]

후대(後代)의 학자(學者)들은 일부러 영아(嬰兒)를 살해(殺害)하는 풍습(風習) 때문에 이 같은 0% 인구(人口) 성장률(成長率)이 나왔다고 추측(推測)하기도 한다. 이를 마비(痲痹)키(間引)라고 칭(稱)한다. 관동(關東) 지방(地方)과 동북(東北) 지방(地方)에서는 농민(農民)의 가난이 주(主) 원인(原因)이였고, 도시(都市)에서는 공, 상(上) 계급(階級)의 간통(姦通)이 주(主) 원인(原因)(당시(當時)에는 피임(避妊) 기술(技術)이 부족(不足)했기 때문에)이었다. 에도 막부(幕府)와 제번(除番)에서 이러한 행위(行爲)를 비난(非難)해 왔으나, 처벌(處罰)받는 경우(境遇)는 드물었고 어른의 살인(殺人)과 똑같이 취급(取扱)되지도 않았다.

특히(特히) 영주는 노동력(勞動力)의 감소(減少)와 농지(農地)의 황폐화(荒廢化)를 두려워해 이를 막으려고 노력(努力)했고 막부(幕府)에서도 금지령(禁止令)을 포고(布告)했지만, 영아(嬰兒) 살해(殺害) 풍습(風習)은 멈추지 않았고 메이지 시대(時代)까지 계속(繼續)되었다.

세입(歲入) [ 편집(編輯) ]

에도 시대(時代)의 세율(稅率) 은 상당히(相當히) 유동적(流動的)이였는데, 광산(鑛山)이나 일부(一部) 수입(輸入)을 제외(除外)한다면 전국적(全國的)인 수취(收取) 체제(體制)가 거의 없었다. 당시(當時)에는 요호부민(窯戶富民)이랄 수 있는 마을의 원로(元老)와 막부(幕府)의 대관(大官)이 그 해의 수확량(收穫量)과 막부(幕府)의 요구(要求) 등(等)을 바탕으로 절충(折衷)해서 세율(稅率)을 정(定)하고, 세율(稅率)이 정(定)해지면 마을의 원로(元老)가 마을 주민(住民)들( 농민(農民) 등(等))과의 협의(協議)를 통해 세액(稅額) 부담(負擔)을 분배(分配)하는 구조(構造)였다.

1871년(年)의 전국(全國) 공조액(共助額)은 1255만(萬) 석(席)이었으며, 에도시대(時代)는 이보다 약간(若干)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는 부가세(附加稅)나 마을의 경비(經費)를 포함(包含)하지 않은 액수(額數)이다. 정부(政府)가 파악(把握)한 공식적(公式的) 수확량(收穫量)이 3220만(萬) 석(席)이었으므로 공식적(公式的) 공조율(公租率)은 39%였다. 실제(實際) 수확고(收穫高)는 4681만(萬) 석(席)이었다고 이야기되지만 이것 역시(亦是) 30% 정도(程度) 과소평가(過小評價)된 것이므로 대략적(大略的)인 수확고(收穫高)는 6000만(萬) 석(席) 정도(程度)였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그러면 공조율(公租率)은 약(約) 21%가 된다. 1870년(年)의 인구(人口)는 3440만(萬) 명(名)으로 1인당(人當) 공조액(共助額)은 0.365석(席)이었다.

도시화(都市化) [ 편집(編輯) ]

일본(日本) 에도 시대(時代)의 특징(特徵) 가운데 하는 도시(都市)의 급속(急速)한 발전(發展)이다. 여기에는 병사(兵事)와 농민(農民)의 분리(分離), 조카마치(城下町) 건설(建設), 참근교대(交代)(參勤交代), 교통(交通) 운송(運送)과 상업(商業)의 발달(發達) 등(等) 여러 가지 요인(要因)이 있다. 인구(人口) 1만(萬) 명(名) 이상(以上)의 도시(都市) 인구(人口)가 전체(全體) 인구(人口)에서 차지하는 비율(比率)은 1600년(年)에 일본(日本) 4.4%, 중국(中國) 4.0%였지만, 1820년(年)에는 일본(日本) 12.3%, 중국(中國) 3.8%였다. 또한 서유럽(西유럽)은 각각(各各) 7.8%, 12.3%였다.

일본(日本)의 도시(都市) 인구(人口)는 18세기(世紀)에 에도가 100만(萬)~110만(萬) 명(名), 오사카 (大阪) 교토 (京都)가 40여만(餘萬) 명(名)이었다. 동시기(同時期) 조선(朝鮮) 의 도시(都市) 인구(人口)는 한양(漢陽)이 1428년(年) 10만여(萬餘) 명(名), 1669년(年) 19만여(萬餘) 명(名), 19세기(世紀) 말(末)에 25만(萬) 명(名)이었다. 1876년(年) 개항(開港)을 전후한 시기(時期)에 인구(人口) 1만(萬) 명(名) 이상(以上)인 도시(都市)의 인구(人口)는 약(約) 40만(萬) 명(名)으로 총인구(總人口)의 2.5%, 5,000이상(以上)의 도시(都市)까지 합(合)하면 3.4% 정도(程度)였다. 평양(平壤)과 개성(個性)이 3~4만(萬) 명(名), 대구(大邱) 전주(全州) 통영(統營) 해주(海州) 함흥이 1만(萬) 명(名) 정도(程度)였다.

에도는 중앙정부인(中央政府人) 막부(幕府)의 소재지(所在地)로 정치(政治)의 중심(中心), 오사카는 경제(經濟)의 중심(中心), 교토 는 문화(文化)와 수공업(手工業)의 중심(中心)이었다. 그 외(外)에 조카마치를 중심(中心)으로 전국적(全國的)으로 도시(都市)가 발달(發達)했다. 조카마치 가운데 가장 규모(規模)가 컸던 나고야(名古屋)와 가나자와(金澤)의 인구(人口)는 10만(萬) 명(名) 전후(前後)였다. 일본(日本)은 17세기(世紀)부터, 오사카와 교토 등(等)의 중앙(中央) 대도시(大都市)에 수수료(手數料)를 받고 지방(地方) 상인(商人)의 거래(去來)를 중개(仲介)하는 니우케돈야(荷受問屋)가 성립(成立)했다. 이들은 중국(中國)의 아인, 조선(朝鮮)의 객주(客主)에 가까운 형태(形態)였다. 이들은 자기(自己) 자금(資金)으로 상품(商品)을 매입(買入)하여 중앙도시(中央都市)와 지방산지(地方山地) 소비지(消費地)를 연결(連結)했는데 위험(危險) 부담(負擔)이 있는 반면(反面) 이익(利益)도 많아, 17세기(世紀)의 경제(經濟) 발전(發展)을 타고 자본(資本)을 축적(蓄積)했고 17세기(世紀) 후반(後半)에 중앙(中央) 대도시(大都市)로 진출(進出)해 매입(買入)돈야(자기(自己) 자금(資金)으로 자기(自己) 상품(商品)을 움직이는 도매상(都賣商))가 되었다. 이어서 도시(都市) 내부(內部)에서 중매(仲媒) 소매 등(等)의 유통(流通) 체계(體系)가 성립(成立)했다. 지방(地方)에도 중앙(中央) 도매상(都賣商)과 거래(去來)하는 생산지(生産誌) 도매상(都賣商) 중매상(仲買商) 생산자(生産者)에게서 상품(商品)을 매집(買集)하는 소중매(小仲媒)의 계열(系列)이 생겼다. 중앙(中央) 도매상(都賣商)에 집결(集結)된 상품(商品)은 소비지(消費地) 도매(都賣) 중매(仲媒) 소매의 계통(系統)을 거쳐 소비자(消費者) 손에 들어갔다. 중앙(中央) 도매상(都賣商)의 자금(資金)이 상품(商品)을 구입(購入)할 때 가불(假拂)이나 상품(商品)을 판매(販賣)할 때 후불(後拂)(외상(外商)) 등(等)의 유통신용(流通信用)을 지탱(支撐)했고, 그 중앙(中央) 도매상(都賣商)에게 오사카의 금융업자(金融業者)(거대(巨大) 환전상(換錢商))가 융자(融資)했다.

법제(法制)도 정비(整備), 도량형(度量衡) 통일(統一), 유통(流通) 기구(器具)와 운송(運送) 제도(制度)의 발달(發達)과 안정(安定)에 힘입어 거래비용(去來費用)이 낮아지고 경쟁(競爭)이 촉진(促進)되어 자본(資本) 수익률(收益率)이 상당히(相當히) 낮아졌다. 오사카와 에도의 거대(巨大) 상업(商業) 자본(資本)의 매출액(賣出額) 대비(對比) 수익률(收益率)은 18세기(世紀) 초(初) 15% 정도(程度), 18세기(世紀) 말(末) 7~8%, 19세기(世紀) 전기(電氣) 5% 정도(程度)였으며, 미쓰이 고노이케 같은 거대(巨大) 환전상(換錢商)의 대부이자율(代父利子率)(실제로(實際로) 받은 이자(利子))은 1721~1740년(年) 미쓰이 4.9%, 고노이케 6.3%, 그 후(後) 점차(漸次) 낮아져 1781~1800년(年) 미쓰이 1.7%, 고노이케 3.8% 1821~1840년(年) 미쓰이 1.9% 고노이케 3.4%였다.

농촌(農村)의 이자율(利子率)은 지방(地方)에 따라 차이(差異)가 있었지만, 오사카 근교(近郊)의 한 선진(先進) 농촌(農村)의 지주(地主) 쓰쓰이(筒井)가(街)의 대부이자(貸付利子)는 토지(土地)를 담보(擔保)했을 때 1728~1758년(年)에 18.6%, 1771~1778년(年)에 14.2% 1789~1800년(年)에 14.2% 1801~1824년(年)에 12.4%, 1845~1859년(年)에 10.7%였으며, 1세기(世紀) 동안 8% 정도(程度) 낮아졌다.

신분제(身分制) [ 편집(編輯) ]

에도 시대(時代)의 신분제(身分制)

일본(日本)은 다이카 개신(改新) 이후(以後) 중국(中國) 문물(文物)을 받아들이면서 사회(社會) 신분제도인(身分制度人) 양천제(良賤制)(良賤制)를 도입(導入)한 바 있으나, 이는 10세기경(世紀頃)에 자연(自然) 소멸(消滅)되고 대신(代身) 일본화(日本化)된 신분(身分) 제도(制度)가 자리 잡아 에도 시대(時代)에 이르게 되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士農工商)의 신분제(身分制)는 법적(法的) 신분제(身分制)가 아니었다.

에도 시대(時代) 일본(日本)의 신분(身分) 구조(構造)는 다음과 같다.

  • 지배층(支配層)
    • 공가(空家) /신관(神官)/승려(僧侶) : 공가(公哥)는 천황(天皇)을 보필(輔弼)해 온 오랜 역사(歷史)를 가진 조정귀족(朝廷貴族)이며, 신관(神官)과 승려(僧侶)는 각각(各各) 일본(日本)의 사상적(思想的) 기반(基盤)인 신토와 불교계(佛敎界)를 유지(維持)하는 집단(集團)이다.(다만 권력(權力)의 바깥고리에 있는 하급(下級) 신관(神官) 및 승려(僧侶), 이를테면 이누지닌(犬神人)은 되려 천민(賤民) 취급(取扱)을 받았다.)
    • 무사(無事) : 혈연(血緣)으로 이어지는 세습(世襲) 신분층(身分層)으로 에도 시대(時代) 일본(日本)의 실질적(實質的)인 지배(支配) 계층(階層)이다. 하지만 이들 중(中)에서도 하급(下級) 사무라이들은 가장 대우(待遇)가 좋았던 시절(時節)에도 상급(上級) 병졸(兵卒) 정도(程度)의 지위(地位)였고 18세기(世紀)에 들어서는 아예 몰락(沒落)의 길을 걷게 된다. 심지어(甚至於) 이들은 죠닌 계층(階層)에게조차도 결혼(結婚) 기피(忌避) 대상(對象)이 될 정도(程度)로 에도 시대(時代) 중기(中期)에는 그 처지(處地)가 안 좋아졌다.
  • 피지배층(被支配層)
    • 죠닌: 일본(日本)의 막부(幕府)와 각(各) 지방층(脂肪層)들의 정치(政治)/경제(經濟) 거점(據點)인 죠카마치(城下村)에 집단(集團) 거주(居住)하는 상공인(商工人) 계층(階層)이다. 에도 시대(時代) 중기(中期)부터 이들의 영향력(影響力)이 막강(莫强)해져서 후기(後期)에는 이들이 메이지 유신(維新)의 숨은 주역(主役)이 된다.
    • 농민(農民) : 일본(日本)의 주력(主力) 산업(産業)인 농업(農業)을 책임지는 서민층(庶民層)이었다. 하지만 법제적(法制的)으로 혹은(或은)-사회규범적(社會規範的)으로 서양(西洋)의 농노(農奴)와 같은 상태(狀態)이다.
    • 부라쿠민  : 사실상(事實上)의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집단(集團)으로, 에타(穢多)와 히닌(非人)으로 구성(構成)되어 있다. 에타와 히닌의 경계(境界)는 모호(模糊)하지만, 대체로(大體로) 에타는 불교(佛敎)의 도(道)에 거스르는 등(等)의 사회적(社會的)으로 천시(賤視)받는 직종(職種)( 도축업자(屠畜業者) 등(等))에 종사(從事)하는 자(者)들을 일컫는 용어(用語)이며, 히닌은 인륜(人倫)에 거스르는 행위(行爲)를 행(行)한 자(者)를 일컫는 말이다.

히닌은 대체로(大體로) 걸식자(乞食者), 노숙자(露宿者)였으나 중질(中質)의 범법자(犯法者)도 이의 범주(範疇)에 포함(包含)되었다. 이들은 사회적(社會的) 압력(壓力)에 의(依)해 '부락(部落)'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마을에 집단거류(集團居留)하였기 때문에 부라쿠민 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히닌의 경우(境遇) 치안(治安), 미풍양속(美風良俗) 유지(維持)를 위한 공적(公的)인 차원(次元)에서 수용(受容) 구역(區域)을 설정(設定)하여 히닌 무리의 대장(大將)인 히닌가시라의 통제(統制)를 받게끔 하여 공권력(公權力)의 지배하(支配下)에 놓았다. 피차별(被差別) 신분(身分)은 1871년(年) 공식적(公式的)으로 폐지(廢止)되었으나 폐지(廢止)된 이후(以後)에도 관습적(慣習的)으로 여전히(如前히) 잔존(殘存)하여 현대(現代)에도 약간(若干)의 영향(影響)을 미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사회(社會) 신분(身分)은 경직(硬直)된 구조(構造)가 아니었고, 다음과 같은 방법(方法)들을 통해 사회(社會) 이동(移動)이 가능(可能)했다.

  • 귀농(歸農)/죠닌화 (무사 계층(階層)에서 피지배층(被支配層)으로 이동(移動)) : 말 그대로 무사(武士)가 무사(武士) 계급(階級)을 포기(抛棄)하고 생산(生産) 활동(活動)에 종사(從事)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회(社會) 신분(身分) 이동(移動)이다.
  • 요(要)닌에 의(依)한 등용(登用) (피지배층(被支配層)에서 무사(無事) 계층(階層)으로 이동(移動)) : 요(要)닌(用人)은 에도 시대(時代) 사무(事務)를 관장(管掌)하던 일종(一種)의 공무원(公務員)을 의미(意味)한다. 이 요(要)닌에게 능력(能力)을 인정받아 등용(登用)되는 방법(方法)으로 신분(身分) 이동(移動)이 가능(可能)했다.
  • 고케닌 카부 매입(買入) (피지배층(被支配層)에서 무사(無事) 계층(階層)으로 이동(移動)) : 상술(詳述)했듯 에도 시대(時代)에는 사무라이의 몰락(沒落) 현상(現象)이 큰 사회(社會) 문제(問題)로 대두(擡頭)할 정도(程度)로 심각(深刻)했다. 이러한 몰락(沒落) 사무라이의 카부(족보(族譜))를 매입(買入)하는 방법(方法)으로 신분(身分) 이동(移動)이 가능(可能)했다. 동시기(同時期) 몰락(沒落)한 양반(兩班) 가문(家門)의 족보(族譜)를 매입(買入)해서 양반(兩班)으로 상승(上昇)한 조선(朝鮮) 의 상민(常民) 부자(富者)들을 떠올리면 된다.
  • 입양(入養)과 결혼(結婚) (피지배층(被支配層)에서 무사(無事) 계층(階層)으로 이동(移動)) : 무사(武士) 계급(階級)과 결혼(結婚)하거나 혹은(或은) 서민(庶民)의 자제(自制)를 무사가(無事街)에서 입양(入養)하는 방법(方法)으로 신분(身分) 이동(移動)이 가능(可能)했다. 에도 시대(時代)에는 중하급(中下級) 사무라이와 서민(庶民) 간(間)의 결혼(結婚)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고, 이러한 방법(方法)으로 신분(身分) 이동(移動)이 이루어졌다.

문화(文化) [ 편집(編輯) ]

에도 시대(時代) 학교(學校)의 모습

교육(敎育) [ 편집(編輯) ]

초대(初代)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판(新版) 다이묘들의 영지(領地)에 유교(儒敎) 학당(學堂)들을 세웠고, 다른 다이묘들도(度) 이 같은 모범(模範)을 따라 자신(自身)들의 영지(領地)에 유교(儒敎)를 가르치는 학교(學校)를 세우도록 장려(奬勵)했다. 다이묘들이 세운 이 학교(學校)들을 번교(番校) (藩校)라고 부른다. 시간(時間)이 흐르자 본디 무사(武士) 계급(階級)이었던 사무라이들조차 모두 문관(文官)처럼 변모(變貌)했고, 무술(武術)을 연마(硏磨)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학적(文學的)인 교양(敎養)도 갖출 것을 필수적(必須的)으로 요구(要求)받았다. 이 때문에 번교(番校)의 학생(學生)들은 거의 모두가 사무라이들이었고, 그 외(外)에 몇몇 불교(佛敎) 수도승(修道僧)들과 신토 사제(司祭)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主로) 성리학(性理學) 주희(朱熹) 의 학문(學問)들도 배웠다. 이들은 학교(學校)에서 한자(漢字), 유교(儒敎) 경전(經典), 서예(書藝), 기본적(基本的)인 산수(算數), 예절(禮節) 등(等)을 배웠으며 무사(無事)라는 본분(本分)에 맞게 무술(武術)과 전술(戰術)도 함께 익혔다.

도시(都市)의 부유(富裕)한 상인(商人)들이었던 조닌은 데라코야 라고 불리는 학교(學校)들을 재정적(財政的)으로 후원(後援)했다. 데라코야는 도시(都市)의 사찰(寺刹)에 위치(位置)한 학교(學校)로, 철학(哲學)과 문학(文學)을 가르치는 대신(代身) 기본적(基本的)인 문해력(文解力)과 산수(算數)를 가르쳤다. 이 때문에 에도 일본(日本)의 시민(市民)들은 높은 문해력(文解力)을 가지고 있었고, 이같이 높은 시민(市民) 수준(水準) 때문에 일본(日本)에서는 연극(演劇)과 소설(小說) 같은 다양한 고급(高級) 문화(文化)들이 발전(發展)할 수 있었다. 도심(都心) 지대(地帶)에서는 보통(普通) 주인(主人)이 없는 사무라이들이 아이들을 가르쳤고, 시골에서는 불교(佛敎) 승려(僧侶)들이나 신토의 사제(司祭)들이 선생님(先生님)의 역할(役割)을 맡았다. 도시(都市)와는 다르게 시골의 경우(境遇), 오직 부유(富裕)한 농부(農夫)의 자식(子息)들만 교육(敎育)의 특권(特權)을 누릴 수 있었다.

대략(大略) 성인(成人) 남성(男性)의 3분(分)의 1 정도(程度)가 글을 읽을 수 있었다고 전(傳)해진다. 또한 여성(女性)의 경우(境遇)에는 6분(分)의 1 정도(程度)가 문해력(文解力)이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조사(調査)에 의(依)하면 에도 말기(末期)에는 성인(成人) 남성(男性)의 40%, 여성(女性)의 10%가 글을 깨쳤다고 전(傳)해진다. 몇몇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은 이처럼 높은 문해력(文解力)을 가진 인구(人口) 덕분(德分)에 메이지 유신(維新) 이후(以後) 일본(日本)의 빠른 고도(高度) 성장(成長)이 가능(可能)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문화(文化) [ 편집(編輯) ]

일본(日本) 역사상(歷史上) 처음으로, 에도 시대(時代)의 도시(都市) 거주민(居住民)들은 여가(餘暇)를 즐기고 오락(娛樂)을 향유(享有)할 만한 부(富)를 쌓는 데에 성공(成功)했다. 이는 대중문화(大衆文化)의 폭발(爆發)을 불러왔고, 이들이 예술(藝術)과 즐거움을 찾고자 했던 당시(當時)의 사회적(社會的)인 풍토(風土)를 우키요 라고 한다. 우키요라는 단어(單語)는 그보다 앞선 시대(時代)까지는 일반적(一般的)으로 '근심스러운 세상(世上)(憂世)'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일본(日本) 중세(中世) 이전(以前)의 염세적(厭世的)인 인생관(人生觀)에 따르면, 서방(西方) 정토(淨土)에서 성불(成佛)할 수 있는 내세(來世)와는 달리 현세(現世)는 꺼리고 멀리해야 할 근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세상(世上)으로 여겨졌다. 이것이 근세(近世)에 이르러 '잠시(暫時) 동안만 머물 현세(現世)라면 조금 들뜬 기분(氣分)으로 마음 편히(便히) 살자'라는 사고방식(思考方式)으로 바뀌면서 '우키요(憂世)'는 보다 긍정적(肯定的)인 뉘앙스의 '우키요(浮世)'라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現在)의 세태(世態)와 풍속(風速)을 긍정적(肯定的)으로 평가(評價)하여 '현재(現在) 양식(良識)' 또는 '당세풍(當世風)(當世風)'이라는 의미(意味)도 겸하게 되었다. 이러한 풍토(風土)는 사람들에게 부(部)와 향락(享樂)을 추구(追求)하는 분위기(雰圍氣)를 불어넣었고, 이에 에도 시대(時代)의 자본주의적(資本主義的)인 성향(性向)이 합쳐지자 경제(經濟)는 비약적(飛躍的)으로 발전(發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時期)에는 다양한 오락(娛樂) 산업(産業)들이 성장(成長)하였고, 에도는 사치(奢侈)와 향락(享樂)의 수도(首都)로 떠오르기 시작(始作)했다. 이 시기(時期)에 일하던 대부분(大部分)의 사람들은 부(富)와 사치(奢侈)에 대(對)한 환상(幻想)을 삶의 유일(唯一)한 희망(希望)으로 가지고 살았을 정도(程度)였다.

가부키 배우(俳優)를 묘사(描寫)한 우키요에

에도 시대(時代)에는 거대(巨大)한 유곽(遊廓)이 발달(發達)했는데, 이를 요(要)시와라 라고 한다. 이곳에 거주(居住)하는 여성(女性)들은 대부분(大部分) 불운(不運)한 자(者)들로, 어쩔 수 없이 이곳까지 흘러든 경우(境遇)가 대다수(大多數)였다. 유곽(遊廓)의 주인(主人)들은 이들의 숙식비(宿食費), 의상비(衣裳費), 화장(化粧)에 드는 비용(費用), 선물(膳物), 그 외(外) 다수(多數)의 비용(費用)들을 모두 빚으로 하여 이를 갚도록 강요(强要)하았고, 결국(結局) 대부분(大部分)의 여성(女性)들은 일생(一生) 내내 이 빚을 갚아야만 했다. 이들은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악기(樂器)를 연주하고 말동무가 되어주는 등(等) 손님의 비위(脾胃)를 맞추어주는 역할(役割)을 하였다. 결과적(結果的)으로 이 지역(地域)에서는 거대(巨大)한 유흥(遊興) 문화(文化)가 형성(形成)되었고, 전국적(全國的)인 명소(名所)가 되었다. 특히(特히) 의상(義湘)의 경우(境遇) 이곳에서 엄청난 변화(變化)가 일어났다. 유곽(遊廓) 여성(女性)들의 신분(身分)은 그녀(그女)가 입고 있는 의상(衣裳)으로 구분(區分)하였는데, 더 화려(華麗)하고 번쩍거릴수록 신분(身分)이 높고 더 경륜(經綸)이 있는 여성(女性)이라는 뜻이었다. 이 때문에 여성(女性)들은 갈수록 화려(華麗)하고 사치스러운 옷들을 만들어냈고, 이전(以前)에는 보지 못했던 의상(衣裳)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만 요(要)시와라는 부정적(否定的)인 면모(面貌)도 만만치 않았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大部分)의 사업(事業)들은 여성(女性)들을 강제(强制)로 갈취하여 이루어지는 일들이었으며, 여성(女性) 인권(人權)을 심각(深刻)하게 침해(侵害)했다. 결국(結局) 이곳은 1589년(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설립(設立)을 허락(許諾)한 지 대략(大略) 400여(餘) 년(年) 만인 1956년(年) 5월(月) 31일(日)에 정부(政府)에 의(依)하여 강제(强制)로 폐업당(廢業當)했다.

이 시기(時期)에는 전문적(專門的)인 여성(女性) 공연(公演)가인 게이샤 , 음악(音樂), 대중(大衆) 소설(小說), 가부키 분라쿠 , 시(詩), 문학(文學), 우키요에와 같은 미술품(美術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특히(特히) 지카마쓰 몬자에몬 , 마쓰오 바쇼 와 같은 위대(偉大)한 예술가(藝術家)들이 이때 등장(登場)하여 세상(世上)에 이름을 알렸다. 마츠무라 케이분은 이 시기(時期)에 가장 명망(名望) 높았던 화가(畫家)들 중(中) 하나이다. 그는 종종(種種) 새, 꽃, 동물(動物) 등(等)을 사실적(事實的)으로 그리곤 하였다.

우키요에 는 17세기(世紀) 후반(後半)에 발전(發展)했던 일본(日本)의 판화(版畫)이다. 본디 에도의 유흥가(遊興街)를 그리는 데에서 시작(始作)되었다. 우키요에는 17세기(世紀) 의 후반(後半)에 들어와, 히시카와 모로노부(老父) 의 단색(單色) 그림 작품(作品)들을 필두(筆頭)로 많은 인기(人氣)를 끌었다. 초창기(草創期)에는 인도(印度) 묵만(萬)이 사용(使用)되었으며, 나중에 붓으로 색상(色相)을 덧입힌 형태(形態)였으나 18세기(世紀) 스즈키 하루노부(老父) 가 비단(緋緞)에 여러 색상(色相)을 사용(使用)한 니시키에 를 발명(發明)하면서부터 본격적(本格的)으로 발전(發展)하게 된다.

우키요에는 대량(大量) 생산(生産)이 가능(可能)했던 이유(理由)로 유복(裕福)하지 않아 원화(원貨)를 고가(高價)에 구입(購入)할 수 없었던 도회지(都會地)의 서민(庶民)들에게 많이 받아들여졌다. 우키요에는 처음에는 마을의 일상생활(日常生活), 특히(特히) 유곽(遊廓)의 어여쁜 창부(娼婦)들, 스모 역사(歷史)들과 유명(有名)한 가부키 배우(俳優)들의 초상화(肖像畫)나 특별한 예술(藝術) 공연(公演) 등(等)의 모습이나 특정한 장면(場面)을 주제(主題)로 많이 담았으며, 이후(以後)에 풍경화(風景畫) 도 또한 널리 제작(製作)되게 되었다. 정치적(政治的)인 주제(主題) 혹은(或은) 권력층(權力層)의 모습은 그다지 많이 등장(登場)하지 않는다. 섹스 또한 공공연히(公公然히) 다루는 주제(主題)는 아니었으나, 적지 않은 우키요에 작가(作家)들은 따로 춘화(春化) (春? 슌가 [ * ] )를 내기도 하여, 때로는 이 때문에 벌(罰)을 받는 경우(境遇)도 있었다. 우키요에 자체(自體)는 메이지 시대(時代) 에 들어와 사진(寫眞) · 기계(機械) 인쇄(印刷) 등(等)의 기술(技術)의 발전(發展)으로 인해 쇠퇴(衰退)하였으나, 당시(當時) 유럽인(人)들에게 주목(注目)을 받아, 특히(特히) 프랑스의 인상파(印象派) 작가(作家)들에게 영향(影響)을 주기도 하였다. 우키요에의 기법(技法)은, 여러 분야(分野)에 전(傳)해 내려졌으며, 일본(日本)의 만화(漫畫) 애니메이션 에 영감(靈感)을 주었다

막부(幕府)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기모노

복식(複式) [ 편집(編輯) ]

에도 시대(時代)의 복식(服飾)은 주(州)로 다양한 디자인과 화려(華麗)한 장식(裝飾)으로 특색(特色)지어진다. 특히(特히) 여성(女性)들이 입었던 기모노 에서 이 같은 특징(特徵)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모노를 주로(主로) 입었던 고객층(顧客層)은 옷과 외형적(外形的) 장식(裝飾)들을 이용(利用)하여 자신(自身)들의 계급(階級)을 알릴 필요(必要)가 있었던 사무라이들이었는데, 사무라이들은 되도록 더 화려(華麗)하고 멋진 옷들을 통해 자신(自身)들을 과시(誇示)하고 싶어했다. 이같은 수요(需要)는 직물(織物) 산업(産業)의 폭발적(暴發的)인 성장(成長)과 함께 바느질, 염색(染色), 보석(寶石) 세공(細工) 기술(技術)도 함께 발전(發展)시켰다. 이 시기(時期) 여성(女性)들은 주로(主로) 더 밝고 대담(大膽)한 느낌의 옷들을 입었으며, 남성(男性)과 여성(女性)의 기모노가 별반(別般) 다르지 않았다. 상인(商人) 계급(階級)의 출몰(出沒)은 더 정교(精巧)한 의복(衣服)의 수요(需要)를 늘렸으며, 기모노 산업(産業)을 크게 발전(發展)시켰다. 원래(元來) 에도 시대(時代) 이전(以前)의 기모노들은 일반(一般) 가정집(家庭집)에서 여성(女性)들이 제작(製作)했던 것에 반(反)해, 에도 시대(時代)의 기모노들은 주로(主로) 전문적(專門的)인 남성(男性) 디자이너들이 특별히(特別히) 만들어진 것들이다.

군(軍) 계급(階級)을 위해 만들어진 기모노는 고쇼도키(御所解)라고 한다. 이는 주로(主로) 쇼군이나 다이묘들과 같은 고위(高位) 계급(階級)들이 입은 기모노로, 주로(主로) 풍경(風景)을 묘사(描寫)하거나 고전(古典) 문학(文學)에서 따온 모티브들을 주로(主로) 하여 무늬를 넣었다. 사무라이들은 기하학적(幾何學的)인 문양(文樣)이 허리 부분(部分)에 띠처럼 그려져 있는 보다 단순(單純)한 기모노를 입었다. 잠을 잘 때 입는 기모노는 더 부드러운 소재(素材)로 두껍게 만들었으며, 훨씬 문양(文樣)도 단순(單純)했다.

당시(當時)에는 '쓰마 모요'라고 불리는 의복(衣服) 양식(樣式)도 있었다. 이 기모노들은 오직 허리 아래에만 풍부(豐富)한 장식(裝飾)이 있었으며, 목과 어깨 부분(部分)에는 가문(家門)의 상징(象徵)이 새겨져 있었다. 주로(主로) 상인(商人) 계급(階級)의 여성(女性)들이 입었다. 상인(商人) 계급(階級)이 입었던 기모노는 사무라이의 것들보다는 엄숙(嚴肅)함이 덜했으나 여전히(如前히) 밝은 색깔(色깔)로 만들어져 있었고 자연(自然)을 상징(象徵)하는 문양(文樣)들로 장식(裝飾)이 되어 화려(華麗)한 느낌을 주었다. 부유(富裕)한 여성(女性)들은 주로(主로) 붉은색(붉은色)을 즐겨 입었는데, 이는 붉은색(붉은色)이 젊음과 열정(熱情)을 상징(象徵)하는 색(色)이었으며 붉은색(붉은色) 염료(染料)도 구(求)하기 힘들었기에 붉은색(붉은色)이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특히(特히) 밝은 붉은색(붉은色)은 가장 부유(富裕)한 이들만 입을 수 있는 색(色)이었다. 네덜란드 상인(商人)들이 갖고온 인도(人道)에서 제작(製作)된 직물(織物)들은 그 질(質) 때문에 일본(日本)에서 큰 인기(人氣)를 끌었으며, 용도(用途)도 다양하게 쓰였다. 일본(日本) 장인(匠人)들은 인도(印度)의 전통(傳統) 문양(文樣)에서 영향(影響)을 받아 자신(自身)들의 제작(製作)품에 적용(適用)하였으며, 인도(印度) 양식(良識)을 답습(踏襲)하기도 했다. 어떤 의복(衣服)들은 영국(英國)이나 프랑스로 수출(輸出)되기도 했다.

에도 말기(末期) [ 편집(編輯) ]

에도 말기(末期) 구미(龜尾)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日本)에 문호(門戶) 개방(開放)을 요구(要求)하였고, 막부(幕府)는 미국(美國)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 을 시작(始作)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 불평등(不平等) 조약(條約) 을 채결(採決)하게 된다. 이에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思想)이 고취(鼓吹)되어 갔고 막부(幕府)의 고위(高位) 관료(官僚) 이이(李珥) 나오스케 가 암살(暗殺)된 후(後) 정국(政局)은 혼란(混亂)에 빠지게 되었다. 1867년(年) 11월(月) 9일(日) 15대(代)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대(臺)정봉환 을 선언(宣言)하고 다음 해인 1868년(年) 5월(月) 3일(日) 에도 성(城) 메이지 정부(政府) 군(軍)의 손에 넘어가면서 도쿠가와 막부(幕府)는 붕괴(崩壞)되었다.

같이 보기 [ 편집(編輯) ]

외부(外部) 링크 [ 편집(編輯) ]

일본(日本) 의 역사(歷史)
이전(以前) 시대(時代) 에도 시대(時代)
에도 막부(幕府)
1603년(年) ~ 1868년(年)
다음 시대(時代)
아즈치·모모야마 시대(時代)
(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일본 일본(日本) 제국(帝國)
(1868년(年) ~ 1945년(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