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사건(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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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事件)이 일어난 버스

실미도 사건(事件) (實尾島事件)은 1971년(年) 8월(月) 23일(日) 실미도(實尾島) 에서 북한(北韓) 침투작전(浸透作戰) 훈련(訓鍊)을 받던 중(中) 가혹(苛酷)한 대우(待遇)를 견디지 못한 684부대원(部隊員)들이 무장(武裝) 탈영(脫營)해 인천(仁川)을 경유(經由)하여 서울로 진입(進入)한후 군(軍)·경(警)과 교전(交戰)을 벌이다가 숨진 사건(事件)으로 실미도(實尾島)에서 교관(敎官) 및 기간병(期間兵)들을 살해(殺害)하고 탈출(脫出)한 부대원(部隊員) 23명(名)은 버스를 탈취(奪取)하여 서울 로 진입(進入)한 뒤 총격전(銃擊戰)을 벌이다가 수류탄(手榴彈)으로 자폭(自爆)했고 4명(名)이 부상당한 채 생포되었으나 곧 사형(死刑)에 처(處)해졌으며 총격전(銃擊戰)으로 경찰(警察) 2명(名)과 민간인(民間人) 6명(名)이 사망(死亡)하였다. [1]

배경(背景) [ 편집(編輯) ]

1.21 사태(事態) [ 편집(編輯) ]

1968년(年) 1월(月) 21일(日) 북한(北韓) 124부대(部隊) 소속(所屬) 무장(武裝) 공비(共匪) 31명(名)이 청와대(靑瓦臺) 를 기습(奇襲)하여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을 제거(除去)하려다 미수(未遂)에 그치는 사건(事件)이 발생(發生)했다. [2]

휴전선(休戰線)을 넘은 31명(名)의 무장(武裝) 공비(共匪)들은 21일(日) 밤 9시(時) 30분경(分頃)에 서울 청운동 세검정 터 부근(附近) 청와대(靑瓦臺) 앞 500미터까지 진출(進出)한 뒤 창의문(彰義門) 근처(近處)에서 있었던 경찰(警察)의 불시검문(不時檢問)에 불응(不應)하면서 총격전(銃擊戰)이 벌어졌고 무장공비(武裝共匪)들이 도주(逃走)하기 시작(始作)했다.

그리고 이들을 잡기 위해 비상경계태세(非常警戒態勢)가 내려진 가운데 군경합동(軍警合同) 소탕작전(掃蕩作戰)을 버린 결과(結果) 31명(名) 중(中) 29명(名)은 사살(射殺)되었고 1명(名)은 북(北)으로 도주(逃走), 1명(名)은 생포(生捕)되었으며 그 와중(渦中)에 민간인(民間人)을 포함(包含)해 30명(名)이 사망(死亡)하고 52명(名)이 부상(負傷)을 입었다. [3]

국가안보(國家安保) 우선주의(優先主義) [ 편집(編輯) ]

정부(政府)는 '국가안보(國家安保) 우선주의(優先主義)'을 선언(宣言)하며 향토예비군(鄕土豫備軍) , 육군(陸軍)3사관학교(士官學校) , 전투경찰대(戰鬪警察隊)를 창설(創設)하였고 [4] 고등학교(高等學校) 대학교(大學校) 에서는 교련(敎鍊) 교육(敎育)이 실시(實施)되었으며 대통령(大統領) 경호(警護)를 강화(强化)하는 차원(次元)에서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北岳山), 청와대(靑瓦臺) 앞길까지 일반인(一般人)의 통행(通行)이 금지(禁止)되었다. [5]

북한(北韓)은 사건관련성(事件關聯性)을 전면(全面) 부인(否認)하였으나 생포(生捕)된 김신조는 대통령(大統領)을 제거(除去)하는 것이 남파(南派)의 목적(目的)이었다고 진술(陳述)함에 따라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는 김일성에게 복수(復讐)를 하기 위해서 특수부대(特殊部隊)인 684부대(部隊)를 창설(創設)하였다.

684 부대(部隊) 창설(創設) [ 편집(編輯) ]

1968년(年) 4월(月)에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현(現) 국가정보원장(國家情報院長) ) 김형욱 은 실미도(實尾島)에 북파목적(北派目的)의 특수부대(特殊部隊)인 684 부대(部隊) 를 만들었는데 [6] 총인원(總人員)은 지난 '1.21 사태(事態)' 때 남파(南派)되었던 북한(北韓) 무장공비(武裝共匪)와 동일(同一)하게 31명(名)으로 구성(構成)되었다.

684부대원(部隊員)들은 북한(北韓)에 침투(浸透)하여 김일성(金日成) 을 암살(暗殺)하기 위해 실미도(實尾島)에 고립(孤立)된 채 합숙(合宿)하며 혹독(酷毒)한 훈련(訓鍊)을 받았으나 국제적(國際的)인 '데탕트'와 함께 남북(南北) 화해(和解) 분위기(雰圍氣)가 조성(造成)되면서 침투(浸透) 작전(作戰) 자체(自體)가 불확실(不確實)해지며 계획(計劃)이 기약(期約)없이 연기(延期)되었다.

더욱이 부대(部隊)를 창설(創設)했던 김형욱이 3선(選) 개헌(改憲)의 진통(陣痛) 속에 권력(權力) 다툼에서 밀려나면서 1969년(年) 10월(月) 20일(日)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에서 경질(更迭)되었고 [7] 부대원(部隊員)들의 원(元) 소속(所屬)은 공군(空軍)이었음에도 관리(官吏)는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가 담당(擔當)했지만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직(中央情報部長職)에서 경질(更迭)된 이후(以後) 무관심(無關心) 속에 방치(放置)되며 존재(存在)마저 잊혀져 갔고 부대(部隊)의 관리(管理)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혹(苛酷)한 훈련(訓鍊)은 지속(持續)되었으나 부실(不實)한 부식(腐蝕)과 처우등(處遇等) 인간이하(人間以下)의 취급(取扱)을 받았고 오랜 기다림으로 부대원(部隊員)들의 불만(不滿)이 누적(累積)되어 가기 시작(始作)했다. [8]

사건(事件) 전개(展開) [ 편집(編輯) ]

탈출(脫出)과 서울 진입(進入) [ 편집(編輯) ]

부상당(負傷當)한 부대원(部隊員)의 후송(後送)

1971년(年) 8월(月) 23일(日) 오전(午前) 6시경(時頃) 교관(敎官) 및 기간병(期間兵) 18명(名)을 살해(殺害)하고 실미도(實尾島)를 탈출(脫出)한 이후(以後) [9] 섬을 빠져나간 23명(名)의 684부대원(部隊員)들은 12시(時) 20분경(分頃) 인천(仁川) 옥련동 독(毒)부리(옹암) 해안(海岸)에 상륙(上陸)한 뒤 인천(仁川) 시내(市內)버스( 현대(現代) R-192 )를 탈취(奪取)하여 청와대(靑瓦臺) 방향(方向)으로 향(向)했고 인천(仁川)에서 육군(陸軍)과의 총격전(銃擊戰)으로 타이어가 터진 바람에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수원(水原) -인천간(仁川間) 시외버스(市外버스)(신진(新進) FB100L, 태화상운 소속(所屬))를 다시 탈취(奪取)하여 이동(移動)하였다.

오후(午後) 14시(時) 15분경(分頃) 서울 동작구(銅雀區) 대방동 (당시(當時) 영등포구(永登浦區) 대방동) 유한양행(柳韓洋行) 본사(本社) 건물(建物) 앞에 도착(到着)하였는데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銃擊戰)을 벌이다 부대원(部隊員) 거의 대부분(大部分)이 스스로 수류탄(手榴彈)을 터뜨려 목숨을 끊었고 생존자(生存者) 4명(名)은 군사재판(軍事裁判) 에 회부(回附)되어 1972년(年) 3월(月) 10일(日) 사형(死刑)이 집행(執行)되었다. [10]

이상(異常)한 정부(政府) 발표(發表) [ 편집(編輯) ]

이 사건(事件)으로 김포국제공항(金浦國際空港) 이 폐쇄(閉鎖)되고 한강교가 차단(遮斷)되면서 시민(市民)들이 불안(不安)과 공포(恐怖)에 떨었고 또한 초기(初期)에 정부(政府)가 북괴(北傀) 무장공비(武裝共匪)의 침입(侵入)이라 발표(發表)하자 공포(恐怖)는 증폭(增幅)되었다.

나중에 군(軍) 특수범(特需犯)이라 정정(訂正) 발표(發表)하는 등(等) 혼란(混亂)을 야기(惹起)했는데 군(軍) 장성(將星) 출신(出身) 야당(野黨) 국회의원(國會議員) 이세규가 특수부대원(特殊部隊員)의 난동(亂動)이라고 진상(眞相)을 폭로(暴露)하자 김종필 총리(總理)도 군(軍) 특수범(特需犯)이 아니라 특수(特殊) 부대(部隊) 요원(要員)이라고 실토(實吐)하는등 여러차례(次例) 말을 바꾸었다. [10]

정치(政治) 인물(人物) 영웅담(英雄譚) <000 죽이기> [11] 시리즈의 집필자(執筆者)이자 정치평론가(政治評論家)인 강준만(康俊晩) 교수(敎授)는 박정희(朴正熙) 정부(政府)가 이 사건(事件)을 '실미도 난동사건(亂動事件)'으로 규정(規定)하고 부대(部隊)의 진상(眞相)을 은폐(隱蔽)하기 위해 노력(努力)했고, 진상(眞相)을 폭로(暴露)했던 신민당(新民黨) 이세규 의원(議員)에게는 심(甚)한 고문(拷問)을 가(加)하는등 보복(報復)을 하였다고 주장(主張)한다. [10]

또한 신민당(新民黨) 김한수 의원(議員)은 시국(時局) 강연회(講演會)에서 군(軍) 특수범(特需犯)들의 소속부대(所屬部隊)를 언급(言及)했을 뿐인데 군수사(軍搜査) 기관(機關)에 끌려가 자살(自殺)을 시도(試圖)할 정도(程度)로 모진 고문(拷問)을 당(當)했고 [12] '실미도 사건(事件) 부대(部隊) 이름을 공표(公表)해 반공법(反共法) 등(等)을 어겼다'는 이유(理由)로 징역(懲役) 3년(年)을 살아야 했다고 주장(主張)한다. [10]

그러나 '실미도 난동사건(亂動事件)' 때문에 의원(議員)들이 체포(逮捕)되었다는 직접적(直接的)인 근거(根據)는 존재(存在)하지 않으며 이세규와 김한수 [13] [14] 등(等) 다수(多數)의 신민당(新民黨) 의원(議員)들은 1972년(年) 유신(維新) 특별선언(特別宣言) 발표(發表) 이후(以後) 반독재(反獨裁)·반유신(反維新) 투쟁(鬪爭)을 벌이면서 옥고(獄苦)를 치렀었고 수사과정(搜査過程) 중(中) 자신(自身)이 당(當)했던 고문(拷問) 실상(實相)을 회고록(回顧錄)에 자세히(仔細히) 밝혀 놓았던 김옥두 또한 수사관(搜査官)들이 신민당(新民黨) 의원(議員)들의 정치자금(政治資金)을 댄 기업인(企業人)의 이름이나 김대중(金大中) 에 대(對)한 진술(陳述)을 요구(要求)했다고 언급(言及)한다. [15]

공교롭게도 이때 유신(維新) 선언(宣言)에 반대(反對)하다 체포(逮捕)된 의원(議員)들 대다수(大多數)가 김대중(金大中) 의원(議員)과 같은 지역(地域) 출신(出身), 같은 정당(政黨) 소속(所屬)의 측근(側近)들이었는데 그 명단(名單)으로는 나석호 , 김경인 , 김상현(金相賢) , 김녹영 , 김옥두 , 박종률 , 강근호 , 류갑종 , 조연하(助演下) , 이종남 [15] 이 있다.

사건(事件) 이후(以後) [ 편집(編輯) ]

실미도(實尾島) 기간병(期間兵) 유족(遺族) 11명(名)은 2005년(年) 참여정부(參與政府) 시대(時代)때 “특수임무(特殊任務)를 수행(遂行)하다 순직(殉職)한 기간요원(基幹要員)에 대(對)한 정부(政府) 보상(補償)이 필요(必要)하다”며 2000만(萬)~1억(億)원 상당(相當)의 국가(國家) 보상(補償)을 신청(申請)했지만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원회(特殊任務遂行者補償審議元會)는 “기간병(期間兵)들은 북파공작(北派工作)을 위한 임무(任務)를 부여(附與)받지 않은 요원(要員)들로 보상(補償) 대상(對象)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趣旨)로 신청(申請)을 반려(返戾)했고 유족회(遺族會)는 관련(關聯) 행정소송(行政訴訟)을 제기(提起)했으나 2007년(年) 패소(敗訴)했다. [16]

영화(映畫) 실미도(實尾島) [ 편집(編輯) ]

잊혀가던 사건(事件)은 1999년(年) 684부대(部隊) 의 실상(實相)을 소재(素材)로 하는 백동호의 소설(小說) 《실미도》가 발표(發表)된 뒤 이 소설(小說)을 바탕으로 2003년(年) 동명영화(同名映畫) 가 개봉(開封)하면서 사건(事件)의 실체(實體)가 세상(世上)에 알려지기 시작(始作)하였다.

실미도(實尾島) 에 앞서 실미도 사건(事件)을 다룬 <쿠데타>가 개봉(開封)될 예정(豫定)이었으나 제작비(製作費) 등(等) 여러 문제(問題)가 겹쳐 좌절(挫折)됐으며 이 과정(過程)에서 드라마 PD 출신(出身) 김종학 감독(監督)의 영화(映畫) 감독(監督) 데뷔가 무산(霧散)되기도 하였다.

2004년(年) 2월(月)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방부(國防部) 충청북도(忠淸北道) 옥천군(沃川郡) 옥천읍 에서 1968년(年) 3월(月) 한꺼번에 행방불명(行方不明) 된 7명(名)의 청년(靑年)이 684부대(部隊)의 대원(隊員)이었다는 사실(事實)을 확인(確認)하였다.

부대(部隊) 예산(豫算) 횡령(橫領) [ 편집(編輯) ]

공군(空軍) 수사당국(搜査當局)은 축소(縮小) 수사(搜査)로 일관(一貫)했고 [17] 부대(部隊)를 창설(創設)한 공군(空軍)을 지휘(指揮)하였던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에서 실미도(實尾島) 부대(部隊)로 내려간 예산(豫算)이 대거(大擧) 횡령(橫領)된 정황(情況)도 포착(捕捉)되었지만 유야무야(有耶無耶) 되었다. [17]

미디어 [ 편집(編輯) ]

각주(各州) [ 편집(編輯) ]

  1. '실미도 공작원(工作員)' 유해(遺骸) 안치(安置)됐지만…풀리지 않는 유족(遺族)의 한 연합뉴스(聯合뉴스), 2017.8.23.
  2. [네이버 지식백과(知識百科)] 1·21사태(事態) [一二一事態] (두산백과(百科))
  3. 강준만(康俊晩) 《한국(韓國) 현대사(現代史) 산책(散策) 1960년대편(年代篇) 3》 인물(人物)과 사상사(思想史) 2009.6.12 p203
  4. “[네이버 지식백과(知識百科)] 경비경찰(警備警察)의 특성(特性) [警備警察- 特性] (경찰학사전(警察學事前), 2012. 11. 20., 신현기, 박억종, 안성률, 남재성, 이상열, 임준태, 조성택, 최미옥, 한형서)” .  
  5. [네이버 지식백과(知識百科)] 1·21 사태(事態) (시사상식사전(時事常識事前), pmg 지식(知識)엔진연구소(硏究所))
  6. 강준만(康俊晩) 《한국(韓國) 현대사(現代史) 산책(散策) 1970년대편(年代篇) 1》 인물(人物)과 사상사(思想史) 2009.6.12 p176
  7. 이상우(이상우) <비록 박정희(朴正熙) 시대(時代) 1> 중원문화사(中原文化社) 1984.11.25 p176
  8. 강준만(康俊晩) 《한국(韓國) 현대사(現代史) 산책(散策) 1970년대편(年代篇) 1》 인물(人物)과 사상사(思想史) 2009.6.12 p177
  9. 강준만(康俊晩) 《한국(韓國) 현대사(現代史) 산책(散策) 1970년대편(年代篇) 1》 인물(人物)과 사상사(思想史) 2009.6.12 p174
  10. 강준만(康俊晩) 《한국(韓國) 현대사(現代史) 산책(散策) 1970년대편(年代篇) 1》 인물(人物)과 사상사(思想史) 2009.6.12 p175
  11. 시사저널 - <김대중 죽이기> 쓴 강준만 교수(敎授)
  12. 백동호 <실미도(實尾島) 2> 밝은세상 1999년(年) p294
  13. 중앙일보(中央日報) - ‘반독재(反獨裁) 투쟁(鬪爭)’ 3년(年) 옥고(獄苦) … 국회의원(國會議員) 김한수
  14. 중앙일보(中央日報) - 청렴(淸廉)·기개(氣槪) 실천(實踐)한 참군인(軍人)/24일(日) 타계(他界)한 이세규장군(將軍) 생애(生涯)
  15. 한겨레 - 권노갑은 물고문(물拷問), 김옥두는 통닭구이…“정말(正말) 미칠 것 같았어요”
  16. 중앙일보(中央日報) - “실미도(實尾島)서 온 형(兄), 손바닥 굳은살도 없더라” 유족(遺族)이 본 684부대(部隊)
  17. “[실미도(實尾島) 50년(年)]"공작원(工作員) 4명(名) 사형(死刑)뒤 대방동 묻어"···진실 다시 캔다” . 중앙일보(中央日報). 2020년(年) 11월(月) 7일(日).  

같이 보기 [ 편집(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