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石窟庵)

석굴암(石窟庵)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
종파(宗派) 대한불교(大韓佛敎) 조계종(曹溪宗)
건립년대(建立年代)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751년(年)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 10년(年))
창건자(創建者) 김대성
문화재(文化財) 국보(國寶) : 경주(慶州)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
보물(寶物) : 경주(慶州) 석굴암(石窟庵) 삼층석탑(三層石塔)
위치(位置)
경주시 불국사 석굴암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경주시 불국사 석굴암
경주시 불국사(佛國寺) 석굴암(石窟庵)
경주시 불국사(佛國寺) 석굴암(石窟庵) (대한민국(大韓民國))
소재지(所在地)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불국(佛國)로 873-243 (진현동)
좌표(座標) 북위(北緯) 35° 47′ 42.2″ 동경(東京) 129° 20′ 58.7″  /  북위(北緯) 35.795056° 동경(東京) 129.349639°  / 35.795056; 129.349639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
유네스코 세계유산(世界遺産)
영어(英語) 명(名)*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프랑스어(프랑스語) 명(名)* Grotte de Seokguram
et temple Bulguksa
등록(登錄) 구분(區分) 문화유산(文化遺産)
기준(基準) Ⅰ, Ⅳ
지정번호(指定番號) 736
지역(地域) ** 아시아·태평양(太平洋)
지정(指定) 역사(歷史)
1995년(年)   (19차(次) 정부간위원회(政府間委員會) )
* 세계유산목록(世界遺産目錄)에 따른 정식명칭(正式名稱).
** 유네스코에 의(依)해 구분(區分)된 지역(地域).
경주(慶州)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
(慶州 石窟庵 石窟)
(Seokguram Grotto, Gyeongju)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보(國寶)
종목(種目) 국보(國寶) 제(第)24호(號)
( 1962년(年) 12월(月) 20일(日) 지정(指定))
수량(數量) 1기(期)
시대(時代)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소유(所有) 석굴암(石窟庵)
관리(管理) 석굴암(石窟庵)
참고(參考) 유적건조물(遺跡建造物) / 종교신앙(宗敎信仰)/ 불교(佛敎)/ 불전(佛殿)
주소(住所)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불국(佛國)로 873-243
(진현동 999)
정보(情報) 국가유산청(國家遺産靑) 국가유산(國家遺産)포털 정보(情報)
석굴암(石窟庵) 수광전(數光電)

석굴암(石窟庵) (石窟庵)은 대한민국(大韓民國)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토함산(吐含山) 중턱(中턱)(진현동 891)에 있는 불국사(佛國寺) 소속(所屬) 호국(護國) 암자(庵子) 이다.

국보(國寶) 24호(號)인 경주(慶州)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 이 있는 암자(庵子) 이다. [1]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은 세계(世界)에서 유일(唯一)한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어진 화강암(花崗巖) 석굴(石窟) 이다. 내부(內部)에서는 보존(保存)을 위해 사진(寫眞) 촬영(撮影)은 금지(禁止)되어 있다.

2023년(年) 5월(月) 4일(日)부터 무료입장(無料入場)이 가능(可能)해졌다. [2]

개요(槪要) [ 편집(編輯) ]

보통(普通) 석굴암(石窟庵)의 "암(癌)(庵)"자(字)를 "바위 암(癌)(岩)"자(字)로 알고,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을 동일(同一)한 용어(用語)로 쓴다. 하지만 석굴암(石窟庵)의 "암(癌)(庵)"자(字)는 "암자(庵子) 암(癌)(庵)"자(字)로, 석굴(石窟)이 있는 암자(庵子)(작은 절(節))를 뜻한다.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은 불상(佛像)과 부속(附屬) 화강암(花崗巖) 조각이 있는 굴을 뜻한다.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751년(年)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 10년(年))에 김대성 이 만들었을 때는 석불사(石佛寺) (石佛寺)라고 하였다. 큰 규모(規模)의 절을 한 글자(글字)로 "사(寺)", 작은 규모(規模)의 절은 한 글자(글字)로 "암(癌)"이라고 부르므로, 창건(創建) 당시(當時)에 석굴암(石窟庵)은 규모(規模)가 현재(現在)보다 컸던 걸로 생각된다.

창건(創建) 및 연혁(沿革) [ 편집(編輯) ]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娼妓)(佛國寺古今創記)』를 따른다. [3]

남북국(南北國) 시대(時代) [ 편집(編輯) ]

  • 751년(年)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 10년(年)) : 재상(宰相) 김대성(金大城)이 석불사(石佛寺)(石佛寺) 로 창건(創建)을 시작(始作)하였다.
  • 774년(年) (통일신라(統一新羅) 혜공왕 10년(年)) : 김대성(金大城)이 석굴암(石窟庵)(석불사(石佛寺))을 완공(完工)하였다.

조선(朝鮮) 시대(時代) [ 편집(編輯) ]

  • 1703년(年) (숙종(肅宗) 29년(年)) : 종열(種熱)(從悅)이(李) 중수(重修)하였다.
  • 1758년(年) (영조(英祖) 34년(年)) : 대겸(大歉)(大謙)이(李) 중수(重修)하였다.
  • 조선(朝鮮) 말기(末期) : 울산병사(蔚山兵士) 조예상(兆豫想)(趙禮相)이(李) 중수(重修)하였다. [4]

구한말(舊韓末) 및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 편집(編輯) ]

  • 1907년(年)  : 1962년(年) 지역(地域) 노인(老人)들의 증언(證言)에 따르면, 이때 석굴암(石窟庵)은 조가절(兆佳節)(趙家寺)이라고 불리며 일반인(一般人)들이 향(香)을 올리고 공양(供養)을 계속(繼續)하고 있었다. [5] 그러나 우체부(郵遞夫)가 석굴(石窟)을 새로 발견(發見)한듯이 우체국장(郵遞局長)에게 보고 하였다. 일제(日帝)도 이에 동조(同調)하여, 일본인(日本人)들이 석굴(石窟)을 훼손(毁損)하고 문화재(文化財)를 반출(搬出)해가는 계기(契機)로 만들어 버렸다. [6]

창건(創建) 이유(理由) [ 편집(編輯) ]

전통적(傳統的)으로 알려진 사실(事實) [ 편집(編輯) ]

『삼국유사(三國遺事)(三國遺事)』에 따르면, 김대성(金大城)은 재상(宰相) 김문량(金文亮)의 아들이다. 현생(現生)의 부모(父母)를 위해서 불국사(佛國寺) 를 창건(創建) 하였고 전생(前生)의 부모(父母)를 위해 석굴암(石窟庵) 을 창건(創建)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三國) 사기(詐欺)(三國史記)』에는 김대성(金大城)이라는 이름이 없다. 김문량(金文亮)의 아들로 김대정이라는 인물(人物)이 있는데, 이를 김대성(金大城)과 같은 인물(人物)로 본다. 한자음(漢字音)은 시대(時代)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7]

음모론(陰謀論) [ 편집(編輯) ]

경덕왕(景德王)은 아버지 성덕왕(聖德王)을 추모(追慕)하기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크게 중창(重唱)하고, 석굴암(石窟庵)을 만들라고 재상(宰相) 김대성(金大城)에게 지시(指示)하였다고 한다. 석굴암(石窟庵)은 아들 혜공왕(惠恭王) 때, 완공(完工)이 되었다.

하지만 혜공(惠空) 왕이 시해(弑害)를 당(當)하고, 후(後)에 원성왕(元聖王)이 왕위(王位)에 올랐다. 혜공왕(惠恭王)은 경덕왕(景德王)의 아들이자 성덕왕(聖德王)의 손자(孫子)이다. 원성왕(元聖王)은 성덕왕과 경덕왕(景德王)의 사당(祠堂)까지 허물고, 자신(自身)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당(祠堂)을 대신(代身) 세웠다. 순수(純粹) 진골(眞骨) 혈통(血統)과 단절(斷絶)을 한 것이다.

원성왕(元聖王)의 입장(立場)에서는 경주(慶州)의 대표적(代表的)인 사찰(寺刹)인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이 자신(自身)과 혈통(血統)이 다른 왕(王)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남아있으면, 왕(王)의 권위(權威)가 서지 않는다. 그래서 경덕왕(景德王)의 재상(宰相)인 김대성(金大城)이 만들었다고 소문(所聞)을 냈다고 한다. [8]

사실(事實),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의 규모(規模)를 보면 재상(宰相)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무리(無理)가 있다. 재상(宰相)이 왕(王)보다 더 화려(華麗)한 사찰(寺刹)을 지어 자신(自身)의 부모(父母)를 추모(追慕)한다면, 왕(王)의 입장(立場)에서는 새로운 왕조(王朝) 개창(開創)을 위(爲)한 사전(事前) 작업(作業)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慶州)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 [ 편집(編輯) ]

조각상(彫刻像) [ 편집(編輯) ]

본존불(本尊佛) [ 편집(編輯) ]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은 석가여래(釋迦如來) 좌상(坐像)(釋迦如來坐像)으로, 화강암(花崗巖) 에 조각(彫刻)하였다. 높이 약(約) 3.4미터이다.

  • 모습 :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모든 악마(惡魔)의 방해(妨害)와 유혹(誘惑)을 물리친 승리(勝利)의 순간(瞬間)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모습이므로 성도상이라고도 한다.
  • 수인(囚人) :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降摩觸地印)이고, 왼손은 선정인 (禪定印)이다.
  • 백호(白虎)  : 본존불(本尊佛)의 눈썹과 눈썹사이에 있는 수정(修正)을 백호(百號)(白毫)라고 한다. 조각(彫刻) 당시(當時)의 백호(白虎)는 유실(流失)되었고, 현재(現在) 백호(百號)는 1966년(年) 국내산(國內産) 수정(水晶)을 깎아 뒷면(뒷面)에 순금(純金)판을 대어 복원(復元)한 것이다. [9]
  • 광배(光背) : 석굴암(石窟庵)은 모두 대칭(對稱)이지만, 광배(光背)만 비대칭(非對稱)이다. 아래에서 바라볼 때, 정확(正確)한 원(圓)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160cm 높이에서 바라보면 정확(正確)한 원(圓)으로 보이므로, 당시(當時) 신라(新羅) 남성(男性)의 평균신장(平均身長)이 160cm 내외(內外)라고 보고 있다.
  • 방향(方向) : 동짓날(冬至날) 태양(太陽)이 뜨는 방향(方向)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십일면(十一面)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 편집(編輯) ]

본존불(本尊佛) 바로 뒤, 한가운데에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十一面觀音菩薩像)이 있다. 다른 조각상(彫刻像) 보다 입체감(立體感)이 강조(强調)되어 있다

보살상(菩薩像) [ 편집(編輯) ]

천부상(天部像) 옆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 (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 (普賢菩薩)이 있다.

십대제자상(十大弟子上) [ 편집(編輯) ]

석굴(石窟) 벽면(壁面)에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의 10대(代) 제자(弟子)의 모습이 조작(造作)되어 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제자(弟子)는 존자(尊者) 또는 나한(羅漢) (十羅漢)이라고도 부른다.

감실상(實狀) [ 편집(編輯) ]

십대제자(十大弟子) 조각상(彫刻像) 위에 10개(個)의 조그만 방(房)이 있다. 이를 감실(龕室)이라고 하는데, 속에 작은 조각상(彫刻像)이 하나씩 안치(安置)되어 있다.

조각상(彫刻像)의 종류(種類)는 유마거사(留馬擧事) 상(床)이 1개(個)이고, 다른 보살상(菩薩像)이 8개(個)이다. 원래(元來) 10개(個)였으나, 대한제국(大韓帝國) 때 일본인(日本人)이 제(第)1감실(龕室)과 제(第)10감실(龕室)에 있던 조각상(彫刻像) 2개(個)를 반출(搬出)해서 사라졌다. 지금(只今)은 그 자리에 조명(照明)이 설치(設置)되어 있다.

천부상(天部像) [ 편집(編輯) ]

통로(通路) 입구(入口)에는 범천(梵天) (梵天)과 제석천(帝釋天) (帝釋天)이 있다.

사천왕상(四天王像) [ 편집(編輯) ]

입구(入口) 통로(通路), 즉(卽) 비도(扉道)의 좌우(左右)에는 사천왕(四天王) 상(上)(四天王像)이(李) 각(各) 2개(個)씩 반육각(半肉刻)되어있다.

금강역사상(金剛力士上) [ 편집(編輯) ]

통로(通路) 입구(入口) 양(兩) 옆에서 한 쌍(雙)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석굴(石窟) 입구(入口)를 지키고 있다. 금강(錦江)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 인왕상이라고도 한다.

팔부신장(八部腎臟) [ 편집(編輯) ]

전실(前室)을 들어서면 양쪽(兩쪽) 벽(壁)에 팔부신장(八部腎臟) (八部神將)이 있다. 내부(內部)의 조각상(彫刻像)에 비하자면 정교(精巧)함이 덜하다.

석실(石室) [ 편집(編輯) ]

구조(救助) [ 편집(編輯) ]

앞쪽에 있는 방(房)에서 통로(通路)를 지나면 원형(原形) 석굴방(石窟房)인 석실(石室)이 나온다. 천장(天障)은 돔으로 되어 있고, 바깥에 흙으로 덮었다.

너비는 좌우(左右) 약(約) 6.7미터, 전후(戰後) 약(約) 6.6미터, 입구(入口)의 넓이 3.35미터이다.

천장(天障) 덮개 돌 [ 편집(編輯)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김대성(金大城)이 천장(千張) 덮개 돌을 만들 때, 3조각이 나버렸다고 한다. 김대성(金大城)이 분(憤)을 못 이기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그날 밤 천신(天神) (天神)이 내려와 조각 난 덮개 돌로 천장(天障)을 만들어 놓고 갔다고 한다. [10]

사진(寫眞)을 보면 덮개 돌이 실제로(實際로) 3조각이 나 있다.

석굴암(石窟庵) 옆 굴 [ 편집(編輯) ]

석굴암(石窟庵) 옆에 보면 굴(窟)이 있고 문무왕릉 과 연결(連結)되는 길이 있다고 한다.

평가(評價) [ 편집(編輯) ]

인도(印度)와 중국(中國)에 산(産)을 파낸 석굴(石窟)은 있으나, 석굴암(石窟庵)처럼 화강암(花崗巖)을 조각(彫刻)하여 인위적(人爲的)으로 건축물(建築物)처럼 만든 석굴(石窟)은 없다.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은 헬레니즘 문화(文化)의 영향(影響)을 받은 인도(印度) 간다라 미술(美術) 양식(樣式)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란(論難) [ 편집(編輯) ]

문화재(文化財)로서의 원형(原形)을 파악(把握)하지 않은 상태(狀態)에서 훼손(毁損)되었기 때문에, 그 본래(本來)의 모습에 대(對)한 논란(論難)이 있다. [11]

바미얀 석굴(石窟)의 영향(影響)을 받았나? [ 편집(編輯) ]

서울대학교(서울大學校) 이주형 교수(敎授)는 석굴암(石窟庵)이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石窟) 에서 영향(影響)을 받았다고 주장(主張)했다.

바미얀 석굴(石窟) 과 석굴암(石窟庵)은 공통적(共通的)으로 원형평면(原形平面) 위에 배치(配置)가 되어있고 형(兄) 천장(天障)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네모반듯한 전실(前室) , 안쪽 벽(壁)에 부조(扶助) 로 새겨진 조각상(彫刻像), 위쪽에는 감실(龕室) 이 있고 그 안에 보살상(菩薩像) 이 있는 점(點) 등(等)이 똑같다고 주장(主張)한다.

그리고 이 교수(敎授)는 바미얀 석불(石佛)의 원류(源流)가 돔 형태(形態)의 로마 판테온 이라고 주장(主張)했다. [12]

빛구멍은 존재(存在)했었나? [ 편집(編輯) ]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 앞쪽 천장(天障)에 조명(照明)을 위한 빛구멍(광창)이(李) 원래(元來) 있었다는 주장(主張)이 있다.

비어있는 감실(龕室) 2개(個)에도 원래(元來) 불상(佛像)이 있었나? [ 편집(編輯) ]

감실(龕室) 2개(個)가 원래(元來) 비어져 있었는지, 아니면 감실(龕室) 2개(個)에도 불상(佛像)이 있었는데 반출(搬出)되었는지 정확히(正確히) 알 수 없는 문제(問題)가 있다.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 앞에 건물(建物)이 있었나? [ 편집(編輯) ]

현재(現在)는 석굴(石窟) 앞에 나무로 된 전각(殿閣)이 있다. 그런데 원래(元來) 석굴암(石窟庵) 건축(建築) 당시(當時)에 석굴(石窟) 앞에 나무로 된 전각(殿閣)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논란(論難)이다.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지도(地圖)에는 석굴암(石窟庵) 앞에 나무로 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없었다. [13] 하지만 이것도 창건(創建) 당시(當時)에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정확히(正確히) 알 수 없다.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은 색깔(色깔)을 입혔었나? [ 편집(編輯) ]

1954년(年) 석굴암(石窟庵)(입술이 주위(周圍)보다 색(色)이 진해(鎭海) 검게 보임)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은 원래(元來) 채색(彩色)이 되어 있었다는 주장(主張)이다. 보통(普通) 예전 석불(石佛)은 채색(彩色)을 했다고는 하는데, 현재(現在)는 정확히(正確히) 알 수 없다. [14] 다만,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본존불(本尊佛) 입술을 채색(彩色)했었다고 하고, 1954년(年) 흑백사진(黑白寫眞)에도 입술이 주변(周邊)보다 더 진해(鎭海) 검은색(검은色)으로 보인다.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은 정말(正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인가? [ 편집(編輯) ]

본존불(本尊佛) 종류(種類)에 대(對)한 논의(論議)들이 있다. [15]

여러 주장(主張)에서 언급(言及)된 부처(部處)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노사나불(盧舍那佛), 연등불(燃燈佛), 미륵불(彌勒佛)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재상(宰相) 김대성(金大城)이 전생부모(前生父母)를 위해 창건(創建)한 것이 석굴암(石窟庵)이므로, 이렇게 보면 아미타불일(阿彌陀佛日) 수도 있다. 하지만 석굴(石窟)에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의 십대제자상(十大弟子床)이 있으므로, 명백히(明白히)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다.

석굴(石窟) 보수(補修) 공사(工事) [ 편집(編輯) ]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 편집(編輯) ]

1907년(年) 석굴암(石窟庵)
  • 1907년(年) :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은 한참동안 잊혀졌다가 토함산(吐含山)을 지나던 한 일본인(日本人) 우편배달부(郵便配達夫)의 의(依)해 발견(發見)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1962년(年) 지역(地域) 노인(老人)들의 증언(證言)에 따르면, 이때 석굴암(石窟庵)은 조가절(兆佳節)(趙家寺)이라고 불리며 일반인(一般人)들이 향(香)을 올리고 공양(供養)을 계속(繼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日帝)는 우체부(郵遞夫)가 석굴(石窟)을 새로 발견(發見)한듯이 일본인(日本人)들이 석굴(石窟)을 훼손(毁損)하고 문화재(文化財)를 반출(搬出)해가는 계기(契機)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以後) 일제(日帝)가 석굴암(石窟庵) 보수(保守)에 동원(動員)된 인력(人力)들은 기차철로(汽車鐵路)를 부설(敷設)하는 토목기술(土木技術) 인력(人力)이었다. 이들은 기차(汽車) 철로(鐵路)의 터널처럼 석굴(石窟)을 수리(修理)하기 시작(始作)했다. [16]

  • 1910년(年) : 석굴(石窟) 주변(周邊)에서 샘을 발견(發見)하였다. 샘은 물을 석굴(石窟) 밑으로 10초(秒)에 1리터씩 일년(一年)내내 흘려보내며 습기(濕氣)를 조절(調節)하고 있었다. 석굴(石窟)보다 아래로 흐르는 샘물이 더 차가우면 아래에만 습기(濕氣)가 맺혀 자연(自然)스럽게 습기(濕氣)가 조절(調節)이 된다. 하지만 일제(日帝)는 이를 나중에 무시(無視)해버린다. [17]
  • 1913년(年) 10월(月) : 석굴(石窟) 천장(天障) 부분(部分)에 목제(木製) 가구(家口)(假構)를 설치(設置)하여 해체공사(解體工事)의 기초(基礎)를 마련하기 시작(始作)했다.
  • 1914년(年)에 : 본공사(本工事)에 들어가 석굴(石窟)을 완전히(完全히) 해체(解體)했다.
  • 1915년(年) 9월(月) : 본공사(本工事)를 끝마쳤다. 이때 석벽(石壁)을 보강(補强)하기 위해 석벽(石壁) 뒤에 시멘트를 석 자(字)(약(藥) 30.3cm)나 발랐다.
  • 1917년(年) : 누수(漏水) 현상(現象)과 습기(濕氣) 등(等)으로 바닥과 천장(天障) 위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始作)했다.
  • 1920년(年)~1923년(年) : 천장(天障)의 방수(防水)를 위해 대대적(大大的)으로 재보수공사(再補修工事)를 실시(實施)한다.
  • 1927년(年) : 습기(濕氣)로 생긴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蒸氣) 세척(洗滌)을 했다. [18]

대한민국(大韓民國) [ 편집(編輯) ]

석굴암(石窟庵) (1953년(年) 5월(月))
  • 1947년(年), 1953년(年), 1957년(年) : 고온(高溫) 증기(蒸氣)를 사용(使用)하여 불상(佛像)을 세척(洗滌)했다. 석굴(石窟)에서 돌가루가 떨어지며 훼손(毁損)되었다. [19]
1964년(年) 보수공사(補修工事) 준공식(竣工式)
  • 1961년(年)~1963년(年) : 대대적(大大的)인 보수공사(補修工事)에 착수(着手)하였다. 일제(日帝)가 만든 콘크리트벽(壁)에서 1미터를 띄우고 다시 콘크리트로 돔을 만들어 씌었다. 그 위에 흙을 덮어버렸다. 석굴(石窟) 앞에 나무로 된 전각(殿閣)을 만들고, 빛구멍(광창)과 천장(天障) 감실(龕室) 쪽을 막아버렸다. 그래서 지하수(地下水) 배수시설(配水施設)을 설치(設置)했음에도 습기문제(濕氣問題)가 해결(解決)되지 않았다. [20]
  • 1966년(年)  : 서울대학교(서울大學校) 공과대학(工科大學) 기계공학과(機械工學科) 김효경 교수(敎授)는 석굴암(石窟庵) 우측(右側)에 환풍기(換風機)를 설치(設置)했다. 기계적(機械的)인 방법(方法)으로 습기(濕氣)와 온도(溫度)를 조절(調節)하기 시작(始作)한 것이다. [21]
  • 1970년(年)  : 다시 앞지붕을 짓고 입구(入口)에 유리(琉璃)로 설치(設置)했다. 제습기(除濕機)로 실내(室內)의 습도(濕度)를 항상(恒常) 일정(一定)하고 유지(維持)하기 시작(始作)했다.
  • 현재(現在) : 일반인(一般人)은 출입(出入)을 금지(禁止)하고 있다. 매년(每年)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 에만 석굴암(石窟庵) 내부(內部)까지 공개(公開)된다.

석굴암(石窟庵) 삼층석탑(三層石塔) [ 편집(編輯) ]

삼층석탑(三層石塔) 은 8세기(世紀) 말(末)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斟酌)하고 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보물(寶物)이다.

기타 [ 편집(編輯) ]

1972년(年)에 발행(發行)될 예정(豫定)이었으나 취소(取消)된 10000원 지폐(紙幣)의 앞면(앞面)(위쪽)과 뒷면(뒷面)(아래쪽) 디자인. 앞면(앞面)에 박정희(朴正熙) 당시(當時) 대통령(大統領)의 친필(親筆) 서명(署名)이 새겨져 있다.
  • 한국은행(韓國銀行) 은 1972년(年) 4월(月) 10일(日)에 앞면(앞面)에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뒷면(뒷面)에 불국사(佛國寺) 전경(戰警)을 그려넣은 10000원 지폐(紙幣) 를 1972년(年) 6월(月) 1일(日)을 기(期)해 발행(發行)하는 안건(案件)을 승인(承認)하고 발행(發行) 공고(公告) 절차(節次)를 마쳤다. [22] [23] 그러나 한국은행(韓國銀行)의 이러한 계획(計劃)에 대(對)해 기독교(基督敎) 계(界)에서는 한국은행(韓國銀行)이 특정(特定) 종교(宗敎)를 두둔(斗頓)하고 있다고 항의(抗議)했으며 불교(佛敎) 계(界)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화폐(貨幣)에 신성(神聖)한 석가모니(釋迦牟尼) 를 소재(素材)로 한 불상(佛像) 을 새겨넣는 것이 화폐(貨幣)의 품위(品位)를 떨어뜨리는 행동(行動)이라고 지적(指摘)했다. [24] [25] 이 여파(餘波)로 인하여 한국은행(韓國銀行)은 원래(元來) 1972년(年) 6월(月) 1일(日)로 예정(豫定)되어 있던 10000원 지폐(紙幣)의 발행(發行) 시기(時期)를 1973년(年) 3월(月)로 연기(延期)하고 도안(圖案) 소재(素材)를 바꾸기로 결정(決定)했는데 앞면(앞面)에는 세종대왕(世宗大王) 의 초상화(肖像畫)를, 뒷면(뒷面)에는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을 그려넣기로 결정(決定)했다. [26] 이에 따라 1972년(年) 7월(月) 1일(日)에 5000원 지폐(紙幣) 가 10000원 지폐(紙幣)보다 먼저 나오게 되었다. [27] 하지만 1973년(年) 6월(月) 12일(日)에 발행(發行)된 [28] [29] 10000원 지폐(紙幣)를 밝은 빛에 비추면 지폐(紙幣)에 숨겨져 있던 석굴암(石窟庵) 보현보살상(普賢菩薩賞) 은화(銀貨)가 나타나는데 [30] [31] 이것은 한국은행(韓國銀行)이 원래(元來) 1972년(年)에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를 도안(圖案) 소재(素材)로 한 10000원 지폐(紙幣)를 발행(發行)할 계획(計劃)이었으나 종교계(宗敎界)의 반발(反撥)로 인하여 무산(霧散)되고 1973년(年)에 도안(圖案) 소재(素材)를 세종대왕과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으로 바꿔서 발행(發行)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로 한국은행(韓國銀行)에서는 앞면(앞面)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초상화(肖像畫)를 그려넣은 10000원 지폐(紙幣)를 발행(發行)하고 있다.

같이 보기 [ 편집(編輯) ]

각주(各州) [ 편집(編輯) ]

  1. 문교부장관(長官) (1962년(年) 12월(月) 20일(日)). “문교부고시제(考試第)一六九호(號)、” . (1962년(年) 12월(月) 20일(日) 관보호외(官保護外) 1쪽(一三二九) , 2쪽(一三三○) . 2016년(年) 11월(月) 2일(日)에 확인(確認)함 . 문화재보호법(文化財保護法) 부칙(附則) 제(第)三조(調)의 규정(規定)에 의(依)하여 국보(國寶)로 재(再) 지정(指定)된것을 다음과 같이 고시(告示)한다  
  2. 문화재청(文化財廳), 문화재청(文化財廳) (2023년(年) 5월(月) 1일(日)). “4일(日)부터 조계종(曹溪宗) 산하(傘下) 사찰(査察) 문화재(文化財) 관람료(觀覽料) 면제(免除)”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책(政策)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文化體育觀光部) . 2023년(年) 5월(月) 2일(日)에 확인(確認)함 . 오는 4일(日)부터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산하(傘下) 사찰(査察)에 입장(入場)할 때 징수(徵收)하던 문화재(文化財) 관람료(觀覽料)가 면제(免除)된다.  
  3. 이, 종호 (2004년(年) 10월(月) 16일(日)). “석굴암(石窟庵) 제대로 보기(2)”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책(政策)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文化體育觀光部)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娼妓)(佛國寺古今創記)』에 의(依)하면  
  4. 이, 종호 (2004년(年) 10월(月) 16일(日)). “석굴암(石窟庵) 제대로 보기(2)”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책(政策)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文化體育觀光部)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숙종(肅宗) 29년(年)(1703)에 종열(種熱)(從悅)이(李), 영조(英祖) 34년(年)(1758)에는 대겸(大歉)(大謙)이(李) 석굴암(石窟庵)을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朝鮮) 말기(末期)에 울산병사(蔚山兵士) 조예상(兆豫想)(趙禮相)에 의(依)해 크게 중수(重修)되었으나  
  5. 조(兆), 현욱 (1996년(年) 5월(月) 19일(日)). “석굴암(石窟庵) 목조전실(木造前室) 없어-규장각서 조선(朝鮮) 영조(英祖)때 지도(地圖) 발견(發見)” . 《중앙일보(中央日報)》. 중앙일보(中央日報)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1962년(年)에 시작(始作)된 대수리(代修理) 때에 석굴암(石窟庵) 부근(附近)의 노인(老人)들은 이 석굴(石窟)을 가리켜 ‘조가절(兆佳節)(趙家寺)’이라 지칭(指稱)하였고, 그들의 어린 시절(時節)에는 향화(香火)(香火)와 공양(供養)(供養)이(李) 그치지 않았다고 한 바도 있다.  
  6. 이, 기영(耆英). “경주(慶州) 석굴암(石窟庵) 석굴(石窟) (慶州石窟庵石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韓國學中央硏究院)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1907년경(年頃) 우연한 기회(機會)에 우편배달부(郵便配達夫)가 일본인(日本人)에게 석실(石室)이 있음을 알렸고, 그 말에 따라 발견(發見)했다고 전(傳)하여, 마치 석굴(石窟)을 지하동굴(地下洞窟)에서 처음 발굴(發掘)한 듯 과장(誇張)하여 선전(宣傳)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全혀) 사실(事實)과 다른 주장(主張)이다. 오히려 토함산(吐含山)에서 석불(石佛)이 발견(發見)되었다는 극적(劇的)인 소문(所聞)을 퍼뜨림으로써 그 뒤 일본인(日本人) 무뢰한(無賴漢)들이 수많은 탑상(榻牀)(塔像)들을 반출(搬出)해 가게 하는 계기(契機)를 만들었으며, 적지 않은 파손행위(破損行爲)까지 따르게 하였다.  
  7. 김(金), 지연(遲延); 지, 호진 (2015년(年) 11월(月) 16일(日)). “[뉴스 속의 한국사(韓國史)] 높은 벼슬 버리고 절 지은 김대성… 찬란(燦爛)한 유산(遺産) 남겼지요” . 《조선(朝鮮)멤버스》. 조선일보사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은 김(金)대정을 김대성(金大城)의 다른 이름으로 짐작(斟酌)하지요.  
  8. 최(崔), 완수(完遂) (2005년(年) 5월(月) 13일(日)). “불국사(佛國寺)가 김대성(金大城)의 개인사찰(個人査察)로 둔갑(遁甲)한 까닭” . 《신동아(新東亞)》. 동아닷컴(東亞닷컴)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원성왕(元聖王)은, 경덕왕(景德王)의 아들이며 성덕왕(聖德王)의 손자(孫子)인 혜공왕(惠恭王)을 시해(弑害)하고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한 장본인(張本人) 중(中) 한 사람으로, 자립(自立)한 후(後)에는 경덕왕(景德王)은 물론(勿論) 성덕왕(聖德王)의 사당(祠堂)까지 허물고 자신(自身)의 조부(祖父)와 부친(父親)의 사당(祠堂)을 대신(代身) 세워 새 왕조(王朝)의 개창(開創)을 표방(標榜)한 것을 알 수 있다. 성덕왕과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왕조(前王朝), 즉(卽) 진흥왕(眞興王)의 혈통(血統)을 이은 순수(純粹) 진골(眞骨) 왕통(王統)과의 단절(斷絶)을 표방(標榜)했으니 경덕왕(景德王)이 성덕왕(聖德王)의 추복사찰(追復寺刹)로 국력(國力)을 기울여 건립(建立)해온 불국사(佛國寺)의 건립(建立) 시말(始末)을 자세히(仔細히) 밝힌다는 것은 원성왕 자신(自身)의 정통성(正統性)을 부인(否認)하는 사실(事實)을 공표(公表)하는 결과(結果)가 된다.  
  9. 문화재청(文化財廳), 문화재청(文化財廳) (2021년(年) 2월(月) 26일(日)). “문화재청(文化財廳) @chlove_u” . 《트위터》. 트위터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본존불(本尊佛)의 백호(白虎)(白毫)는 1966년(年) 국내산(國內産) 수정(水晶)을 깎아 뒷면(뒷面)에 순금(純金)판을 대어 복원(復元)한 것입니다.  
  10. 이, 종호 (2004년(年) 10월(月) 11일(日)). “석굴암(石窟庵) 제대로 보기(1)”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책(政策)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文化體育觀光部)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존불(本尊佛)을 조각(彫刻)하기 직전(直前)에 석굴(石窟) 천장(天障)의 돌 덮개를 만들던 중(中)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김대성(金大城)이 분(憤)을 이기지 못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천신(薦新)이 내려와서 덮개를 다 완성(完成)시켜 주고 돌아갔다.  
  11. 배경수, 《吐含山 石窟庵에 對한 小考》, 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 1977
  12. 이주형, 중앙아시아연구(中央아시아硏究) 11호(號) "인도(印度)·중앙아시아(中央아시아)의 원형당(原形黨)과 석굴암(石窟庵)"
  13. 조(兆), 현욱 (1996년(年) 5월(月) 19일(日)). “석굴암(石窟庵) 목조전실(木造前室) 없어-규장각서 조선(朝鮮) 영조(英祖)때 지도(地圖) 발견(發見)” . 《중앙일보(中央日報)》. 중앙일보(中央日報)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14. “KBS, 〈석굴암(石窟庵) 불상(佛像)에도 색(色)을 칠(漆)했다〉방영” . 《중앙일보(中央日報)》. 중앙일보(中央日報). 2002년(年) 2월(月) 25일(日)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15. 김리나, <석굴암(石窟庵) 불상군(佛像群)의 명칭(名稱)과 양식(樣式)에 관(關)하여>, 《한국고대불교조각사연구(韓國古代佛敎彫刻師硏究)》,
  16. 이, 종호 (2004년(年) 10월(月) 16일(日)). “석굴암(石窟庵) 제대로 보기(2)”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책(政策)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文化體育觀光部)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우선(于先) 석굴암(石窟庵) 보수(保守)에 동원(動員)된 인력(人力)들이 모두 기차철로(汽車鐵路)를 부설(敷設)하는 토목기술(土木技術) 인력(人力)이었다. 당연(當然)하게 그들은 기차(汽車) 철로(鐵路)의 터널처럼 석굴(石窟)을 수리(修理)하겠다  
  17. 이, 종호 (2004년(年) 10월(月) 16일(日)). “석굴암(石窟庵) 제대로 보기(2)”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책(政策)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文化體育觀光部)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1910년대(年代) 처음으로 석굴(石窟)을 보수(補修)하기 이전(以前)에 했던 기초(基礎) 조사(調査)의 평면도(平面圖)를 보면, 원형(原形) 주실의 뒤쪽과 2시(時) 방향(方向)의 바로 옆면(옆面)에 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샘물의 양(量)은 10초(秒)에 1리터나 되는 많은 양(量)으로 일년(一年) 내내 쏟아져 나왔다.  
  18. 이, 종호 (2004년(年) 10월(月) 16일(日)). “석굴암(石窟庵) 제대로 보기(2)”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책(政策)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文化體育觀光部)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1913년(年) 10월(月)부터 석굴(石窟) 천장(天障) 부분(部分)에 목제(木製) 가구(家口)(假構)를 설치(設置)하여 해체공사(解體工事)의 기초(基礎)를 마련했으며, 1914년(年)에는 본 공사(工事)에 들어가 석굴(石窟)을 완전히(完全히) 해체(解體)하고 1915년(年) 9월(月)에 공사(工事)를 끝냈다. 이때 석벽(石壁)을 보강(補强)하기 위해 석벽(石壁) 뒤에 시멘트를 석 자(字)나 발랐다. 그러나 1917년(年) 누수(漏水) 현상(現象)과 습기(濕氣) 등(等)으로 바닥과 천장(天障) 위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始作)하자 일본인(日本人)들은 1920년(年)부터 1923년(年)까지 천장(天障)의 방수(防水)를 위해 대대적(大大的)으로 재보수공사(再補修工事)를 실시(實施)한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습기(濕氣) 문제(問題)가 해결(解決)되지 않자 1927년(年)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蒸氣) 세척(洗滌)을 했다.  
  19. 이, 종호 (2004년(年) 10월(月) 16일(日)). “석굴암(石窟庵) 제대로 보기(2)”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책(政策)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文化體育觀光部)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해방(解放) 후(後)에도 1947년(年), 1953년(年), 1957년(年)에 고온(高溫) 증기(蒸氣)를 사용(使用)하여 불상(佛像)을 세척(洗滌)했다. 당시(當時)는 불상(佛像)을 몇 년(年)마다 닦아주는 것을 최상(最上)의 보존방법(保存方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의 가는 입자(粒子)가 떨어지는 등(等) 훼손(毁損)이 계속(繼續)되자 중단(中斷)되었다.  
  20. 이, 종호 (2004년(年) 10월(月) 16일(日)). “석굴암(石窟庵) 제대로 보기(2)”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책(政策)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文化體育觀光部)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1961년(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의 지시(指示)로 대대적(大大的)인 보수공사(補修工事)에 착수(着手)하였지만 근본적(根本的)인 처방(處方) 없이 일본인(日本人)들이 만든 콘크리트벽(壁) 배후(背後)로 약(約) 1미터 가량(假量)의 공간(空間)을 두고 또다시 콘크리트로 된 돔을 씌우고 그 위에 미봉책(彌縫策)으로 두터운 봉토(封土)(封土)를 덮었다. 더구나 개방(開放)되어야 할 석굴(石窟) 전면(前面)에 목조(木造) 암자(庵子)를 설치(設置)하면서 광창과 소감실(所感室) 창구(窓口)를 모두 없애버리고, 지하수(地下水) 배수시설(配水施設)을 설치(設置)했다.  
  21. 이, 종호 (2004년(年) 10월(月) 16일(日)). “석굴암(石窟庵) 제대로 보기(2)”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책(政策)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文化體育觀光部) . 2023년(年) 5월(月) 3일(日)에 확인(確認)함 . 1966년(年) 당국(當局)에서는 공기냉각장치(空氣冷却裝置)를 설치(設置)하여 기계적(機械的)인 방법(方法)으로 습기(濕氣)와 온도(溫度)를 조절(調節)하기 시작(始作)했다.  
  22. “6월(月)1일(日)부터 ?濟(경제(經濟))규모(規模) ?大(확대(擴大))따라 1萬(만)원券(권(卷)) 紙幣(지폐(紙幣)) 발행(發行)” . 《경향신문(京鄕新聞)》. 1972년(年) 4월(月) 10일(日) . 2023년(年) 4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23. “萬(만)원券(권(卷))발행(發行) 6月(월(月))부터” . 《조선일보(朝鮮日報)》. 1972년(年) 4월(月) 11일(日) . 2023년(年) 4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24. “壹萬(일만)원券(권) 석가여래(釋迦如來)像(상(上)) 圖案(도안(圖案))에 基督?(기독교(基督敎))서 반발(反撥)” . 《동아일보(東亞日報)》. 1972년(年) 4월(月) 18일(日) . 2023년(年) 4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25. “뜻밖의 暗礁(암초(暗礁))에 부딪쳐 難産(난산(難産))하는 1萬(만)원券(권(卷))” . 《경향신문(京鄕新聞)》. 1972년(年) 4월(月) 20일(日) . 2023년(年) 4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26. “5,000원 券(권(卷)) 7月(월(月))에 發行(발행(發行))” . 《동아일보(東亞日報)》. 1972년(年) 6월(月) 2일(日) . 2023년(年) 4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27. “5천(千)원券(권(卷)) 만(萬)원券圖案(권도안) 是非(시비(是非))로 早?(조산(祖山))” . 《매일경제(每日經濟)》. 1972년(年) 6월(月) 2일(日) . 2023년(年) 4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28. “1萬(만)원짜리紙幣(지폐(紙幣)) 첫선 오늘 1百(백(百))5億(억(億))원 全國(전국(全國))배정(配定)” . 《동아일보(東亞日報)》. 1973년(年) 6월(月) 12일(日) . 2023년(年) 4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29. “햇빛 못본 화폐(貨幣) 모두4種(종)” . 《동아일보(東亞日報)》. 1993년(年) 7월(月) 12일(日) . 2023년(年) 4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30. “來(내)12日(일)선보일 萬(만)원짜리紙幣(지폐(紙幣)) 五千(오천(五千))원券(권(卷))보다커” . 《동아일보(東亞日報)》. 1973년(年) 5월(月) 17일(日) . 2023년(年) 4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31. “1만(萬)원券(권(卷)) 첫선 韓銀(한은(韓銀)),55억(億) 발행(發行)” . 《경향신문(京鄕新聞)》. 1973년(年) 6월(月) 12일(日) . 2023년(年) 4월(月) 19일(日)에 확인(確認)함 .  

참고(參考) 문헌(文獻) [ 편집(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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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보물고(朝鮮寶物高)적도록》,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1938년(年)
  • 배경수, 《吐含山 石窟庵에 對한 小考》, 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 1977년(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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