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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三國) 시대(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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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三國)
三國
국가(國家)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수도 1. 졸본성
2. 국내성(國內城)
3. 평양성(平壤城)
1. 위례성(慰禮城)
2. 웅진성(熊津城)
3. 사비성(泗沘城)
금성(金星)
군주(君主)
 -건국군주(建國君主)
 -멸망군주(滅亡君主)
28 국왕(國王)
동명성왕
보장왕(保障王)
31 국왕(國王)
온조왕
의자왕
56 국왕(國王)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
경순왕
성립(成立) 기원전(紀元前) 37년(年)
(주몽(朱蒙) 졸본성 정착(定着))
기원전(紀元前) 18년(年)
(온조 위례성(慰禮城) 이주(移住))
기원전(紀元前) 57년(年)
(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 추대(推戴))
멸망(滅亡) 668년(年)
(평양성(平壤城) 함락(陷落))
660년(年)
(사비성(泗沘城) 함락(陷落))
935년(年)
(경순왕(敬順王) 고려(高麗) 투항(投降))
375년(年) , 백제(百濟) 의 전성기(全盛期).( 근초고왕(近肖古王) 30년(年), 근구수왕 원년(元年))
476년(年) , 고구려(高句麗) 의 전성기(全盛期).( 장수왕 64년(年))
576년(年) , 신라(新羅) 의 전성기(全盛期).( 진흥왕 37년(年), 진지왕 원년(元年))

삼국(三國) 시대(時代) (三國時代)는 기원전(紀元前) 1세기(世紀) 부터 7세기(世紀) 까지 고구려(高句麗) , 백제(百濟) , 신라(新羅) 삼국(三國)이 만주(滿洲)와 한반도(韓半島) 일대(一帶)에서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 국가(國家)로 발전(發展)한 시기(時期)를 일컫는다. 신라(新羅) 당나라(唐나라) 연합군(聯合軍)에 의(依)해 백제(百濟)(660년(年)), 고구려(高句麗)(668년(年)) 차례(次例)로 멸망(滅亡)하면서 한반도(韓半島) 중남부(中南部)에는 통일신라(統一新羅) 북부(北部)에는 발해(渤海) 가 들어서 남북국(南北國) 시대(時代) 로 넘어간다. 각국(各國)의 전성기(全盛期)로 평가(評價)되는 시기(時期)는 백제(百濟) 4세기(世紀), 고구려(高句麗) 5세기(世紀), 신라(新羅) 6세기(世紀) 순(巡)이다.

일부(一部) 사학자(史學者)들은 실질적(實質的)으로 삼국(三國)이 정립(定立)되어 삼국(三國) 시대(時代)가 전개(展開)된 것은 고구려(高句麗), 백제의 기원(起源)인 부여(扶餘) 가 멸망(滅亡)하고( 494년(年) ), 또, 가야(伽倻) 가 멸망(滅亡)한 562년(年) 이후(以後)부터 신라(新羅)가 백제를 정복(征服)한 660년(年)까지 약(約) 100년(年) 동안의 기간(期間) 뿐이므로 부여(扶餘) , 가야(伽倻) 를 포함(包含)하여 오국(誤國) 시대(時代) 혹은(或은) 사국(四國) 시대(時代) [1] 라는 용어(用語)를 사용(使用)하기도 한다.

역사(歷史) [ 편집(編輯) ]

십국(十國) 시대(時代)의 배경(背景)과 원삼국(元三國) 시대(時代) [ 편집(編輯) ]

고구려(高句麗) [ 편집(編輯) ]

한족 과의 투쟁(鬪爭) 과정(過程) 속에서 점차(漸次) 세력(勢力)을 확대(擴大)한 고구려(高句麗) 유리왕 때에 이르러 전(傳)한 의 뒤를 이어 일어난 신나라(新나라) 와 충돌(衝突)할 정도(程度)로 그 세력(勢力)이 성장(成長)하였다. 이어 태조왕 때부터는 강력(强力)한 대외(對外) 발전(發展)을 꾀하여 옥저(沃沮) 를 복속(服屬)시키고 요동군 현도군(玄菟郡) 을 자주 공격(攻擊)하였다. 또 고구려(高句麗) 요하(遼河) 지역(地域)을 차지하고 있던 공손(恭遜)씨를 축출(逐出)하고, 중국(中國)이 삼국(三國)의 대치(對峙) 로 혼란(混亂)에 빠진 틈을 타 위나라 를 공격(攻擊)하는 등(等) 정복(征服) 국가(國家)로서의 면모(面貌)를 과시(誇示)하며 집권(執權) 체제(體制)를 가다듬었다.

이후(以後) 고국천왕 대(臺)에 이르러 을파소 등(等)의 유능(有能)한 대신(代身)이 등장(登場)하고, 진대법(賑貸法) 등(等)을 통해 내정(內政)의 안정(安定)을 꾀하였지만, 고국천왕 사후(事後)에 고발기(告發機) 를 비롯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의 형제(兄弟)들 간(間)에 일어난 싸움 으로 혼란(混亂)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기(勃起)의 난 에서 고발기(告發氣)를 진압(鎭壓)하고 왕(王)이 된 산상왕 에 이어 동천왕 이 즉위(卽位)하면서부터는 다시 대륙(大陸)과의 관계(關係)를 다양하게 전개(展開), 위나라 에는 능동적(能動的)으로 대처(對處)하고 신라(新羅) 를 지속적(持續的)으로 침범(侵犯)하였다.

이러한 정복전쟁(征服戰爭) 결과(結果) 고구려(高句麗) 는 막대(莫大)한 토지(土地)와 인간(人間)을 점유(占有)하였고, 왕실(王室)을 고정(固定)하고 부자상속(富者相續)을 확립(確立)하였으며, 또 5부(部)를 개편(改編)하는 등(等) 국가체제(國家體制)의 정비(整備)를 꾀하여 4세기(世紀)에는 율령제(律令制) 가 갖추어진 고대(古代) 국가(國家)로서 발전(發展)하였다.

신라(新羅) 가야(伽倻) [ 편집(編輯) ]

지금(只今)의 경주(慶州) 를 중심(中心)으로 성장(成長)한 사로국(斯盧國)은 중국(中國)의 금속(金屬) 문화(文化)와 접촉(接觸)할 기회(機會)가 적어서 고구려(高句麗) · 백제(百濟) 보다 사회(社會) 발전(發展)이 늦었다. 그러나 점차적(漸次的)으로 동부(東部) 해안(海岸)에서 정착(定着)해 온 석씨(石氏)와 연합(聯合)하여 연맹체(聯盟體)를 이루어 갔다. 그리하여 탈해 이사금(尼斯今) 때는 국호(國號)를 계림(鷄林) (鷄林)으로 고치고, 6촌(寸)을 개편(改編)하여 6부(部)의 행정(行政) 구역(區域)으로 하였다. 이 시대(時代)에는 부족장(部族長)의 칭호(稱號)도 군장(軍將)이라는 의미(意味)로 해석(解釋)되는 ‘ 거서간(居西干) ’에서 무당 또는 제사장(祭司長) 을 의미하는 ‘ 차차웅(次次雄) (次次雄)’으로, 그리고 다시 부족장(部族長) 권한(權限)의 ‘계승자(繼承者)’라는 의미(意味)의 ‘ 이사금(尼斯今) (尼師今)’으로 변(變)했다. 그 후(後) 미추왕(味鄒王) 의 즉위(卽位)를 기점(起點)으로 김알지 의 후손(後孫) 김씨(金氏) 가 왕위(王位)를 차지하였다.

한편(한便) 금속문화(金屬文化)의 전파(傳播)가 늦었던 변(變)한 의 여러 부족(部族) 국가(國家)들도 3세기(世紀) 이후(以後)에는 가야(伽倻) 라는 연맹체(聯盟體)를 형성(形成)하기 시작(始作)했다.

백제(百濟) [ 편집(編輯) ]

백제(百濟) 의 경우(境遇) 마한(馬韓) 50여(餘) 부족(部族) 중(中) 십제국(十帝國)에서 시작(始作)했을 것이라고 추측(推測)된다. 고구려(高句麗)에서 도주(逃走)한 온조 집단(集團)이 처음에 정착(定着)한 곳은 미추홀(彌鄒忽) 위례성(慰禮城) 이었고, 비류(沸流)가 자살(自殺)하면서 위례(慰禮)로 합쳐졌다. 고조선(古朝鮮) 멸망(滅亡) 후(後)부터 파상적(波狀的)으로 피난(避難)해 온 집단(集團)들은 목지국(目支國) 지배권(支配權) 내(內)의 여러 세력(勢力)을 점차(漸次) 해체(解體)해 갔다. 그리하여 다루왕(多婁王) · 초고왕 의 재위(在位) 기간(期間)을 거치는 동안 토착(土着) 부족(不足) 세력(勢力)을 결합(結合)하면서 점차(漸次) 마한(馬韓) 의 여러 부족(不足)과 마찰(摩擦)을 일으켰다.

낙랑(樂浪) · 대방(大房) 의 침략(侵略)을 받은 한강(漢江) 유역(流域)의 부족(不足) 국가(國家)들은 이에 대항(對抗)하기 위하여, 보다 큰 연맹체(聯盟體)가 요구(要求)되자 백제를 맹주(盟主)로 공고(鞏固)히 단결(團結)함으로써 백제(百濟)는 부족국가(部族國家)로 성장(成長)할 수 있었다.

삼국(三國)의 발전(發展) [ 편집(編輯) ]

대륙(大陸)에서 후한(後漢) (後漢)이(李) 망(亡)하고 위(位) (魏)· 촉(燭) (蜀)· (吳)의 세 나라가 각축(角逐)을 벌이는 가운데 , 반도(半島) 에 대(對)한 영향력(影響力)이 점차(漸次) 감소(減少)되고 있던 4세기(世紀) 에서 6세기(世紀) 에 이르는 시기(時期)에 삼국(三國)은 정치적(政治的)으로 큰 발전(發展)을 이룩하였다. 그 중(中) 하나는 고대(古代) 국가(國家)로의 발돋움을 위한 체제(體制) 정비(整備)이고, 다른 하나는 정복(征服) 국가(國家)로의 변모(變貌)다.

한국(韓國)의 고대(古代) 국가(國家) 체제(體制) 정비(整備)는 부족(不足) 국가(國家) 체제(體制)의 약화(弱化)에서 시작(始作)되었다. 원래(元來) 부족장(部族長) 의 권한(權限)이 강대(强大)한 상태(狀態)에서는 지방(地方) 분권적(分權的)인 사회(社會) 조직(組織)이 유지(維持)될 뿐 강력(强力)한 왕권(王權) 이 존재(存在)할 수 없었다. 부족(不足) 연맹(聯盟) 사회(社會)의 우두머리라 할 부족(不足) 연맹장(聯盟長)으로서의 왕(王) 도(道) 각(各) 부족장(部族長)의 통치권(統治權)을 인정(認定)한 바탕 위에서 성립(成立)된 것이기 때문에 강력(强力)한 전제(專制) 왕권(王權) 의 행사(行使)가 불가능(不可能)하였다. 따라서 왕권(王權)의 세습(世襲)이나 왕권(王權)의 부자상속(父子相續) 같은 것도 기대(期待)할 수 없었고, 다만 선거(選擧) 로써 왕좌(王座)(王座)가 변동(變動)되었다. 부여(扶餘) 에서 가뭄 장마 의 책임(責任)을 왕(王)에게 돌려 왕(王)을 폐위(廢位)하거나 죽인 사례(事例)나 고구려(高句麗) 의 오부(五部)(五部) 사이에서 왕권(王權)의 이동(移動)이 있었던 사실(事實), 신라(新羅) 의 세 성(省)(박(朴)·석(碩)·김)이(李) 왕위(王位)를 번갈아 이어받았던 것은 이러한 것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부족(部族) 연맹장(聯盟長)의 세력(勢力)은 점차(漸次) 증대(增大)되고 부족장(部族長)의 권한(權限)은 점차(漸次) 약화(弱化)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地方)의 부족장(部族長)을 중앙(中央)으로 끌어올려 적당(適當)한 지위(地位)를 주어 귀족(貴族) 으로 편제(編制)시켰다. 신라(新羅) 골품제(骨品制) 에서 나타난 진골(眞骨) 을 비롯한 각(各) 두품(頭品)이나 17개(個)의 관등(管等) , 또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에서의 관등(官等)의 성립(成立) 등(等)은 이러한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를 통해 단순(單純)한 부족(不足) 연맹(聯盟)의 군장(軍將)이었던 왕(王)은 종래(從來)의 부족장(部族長)이 선출(選出)하던 연약(軟弱)한 왕권(王權)의 소유자(所有者)에서 부자(富者) 상속(相續)이 가능(可能)한 절대적(絶對的)인 군주(君主)로 군림(君臨)할 수 있었다.

또 하나, 고대(古代) 왕권(王權)의 구축(構築)과 고대(古代) 국가(國家) 체제(體制)의 정비(整備)에는 제도적(制度的)인 면(面)에 앞서서 사상(思想) 통일(統一)이 요청(要請)되었다. 과거(過去)의 지방(地方) 분권적(分權的)이고 부족적(不足的)인 사상(思想) 체계(體系)를 고대(古代) 국가적(國家的)인 사상(思想) 체계(體系)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보다 포괄적(包括的)이고 고차원적(高次元的)인 이념(理念) 윤리(倫理) 강령(綱領)이 필요(必要)하였다. 한국(韓國) 의 고대(古代)에서 고구려(高句麗) ( 372년(年) ), 백제(百濟) ( 384년(年) ), 신라(新羅) ( 527년(年) )가 각각(各各) 불교(佛敎) 를 수입(輸入), 혹은(或은) 공인(公認)하는 것이 바로 이 시기(時期)였다는 것은 불교(佛敎)가 고대(古代) 국가(國家) 체제(體制)의 정비(整備)에서 관념(觀念) 체계적(體系的)인 역할(役割)을 감당(堪當)했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고구려(高句麗) 에서 고대(古代) 국가(國家) 체제(體制)를 정비(整備)한 소수림왕 고국양왕 의 뒤를 이어 즉위(卽位)한 광개토왕 장수왕 요동(搖動) 에서 한강(漢江) 유역(流域)에 이르는 광활(廣闊)한 영토(領土)를 정복(征服)할 수 있었던 것과 신라(新羅) 에서 불교(佛敎) 를 공인(公認)한 법흥왕 의 뒤를 이어 즉위(卽位)한 진흥왕 이 한강(漢江) 유역(流域)을 탈환(奪還)한 것 등(等), 이러한 삼국(三國)의 정복(征服) 군주(君主)의 등장(登場)은 대륙(大陸)으로의 진출(進出) 뿐만이 아니라 삼국(三國)의 판도(版圖) 또한 크게 바꾸는 계기(契機)가 되었다.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 은 북(北)으로 만주(滿洲) 일대(一帶)를 공략(攻略)하여 영토(領土)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남으로 백제(百濟) 와의 대결(對決)에서 크게 이겼으며, 백제(百濟) 와 결탁(結託)하고 있던 의 세력(勢力)을 꺾기도 하였다. 뒤이은 장수왕 도 영토(領土) 확장(擴張)에 노력(努力)하였는데, 이를 위해 장수왕(長壽王)은 수도(首都)를 평양(平壤) 으로 이전(移轉)하였다. 이러한 평양(平壤) 천도(遷都) 등(等) 일련(一連)의 남진(南進) 정책(政策)으로 고구려(高句麗)에 대항(對抗)하기 위한 신라(新羅) · 백제(百濟) 간(間)의 동맹(同盟) 관계(關係)가 성립(成立)되었고, 120여(餘) 년간(年間)의 나제(羅濟) 동맹(同盟) 유지는 삼국(三國)의 역사(歷史)에서 가장 뒤늦게 발전(發展)한 신라(新羅) 로 하여금 자체(自體)의 역량(力量)을 배양(培養)하여 후일(後日) 삼국(三國) 통일(統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충분(充分)한 시간(時間)을 주었다.

신라(新羅) 가 자체(自體) 정비(整備)를 서둘러 정복(征服) 체제(體制)를 갖춘 것은 법흥대왕(大王) 대(代)를 거쳐서 진흥대왕(振興大王) 대(臺)에 이르러서이며, 당시(當時)에는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 장수왕 의 양(量) 대(代)에 걸친 정복(正服) 전쟁(戰爭)으로 많은 힘을 소모(消耗)한 때였다. 신라(新羅) 백제(百濟) 와 동맹(同盟)하여 고구려(高句麗) 의 치하(治下)에 있던 한강(漢江) 유역(流域)을 빼앗고 동북쪽(東北쪽)으로 진격(進擊)하여 지금(只今)의 강원도(江原道) 함경남도(咸鏡南道) 일대(一帶)까지 점령(占領)하였을 뿐 아니라 나제(羅濟) 동맹(同盟)을 깨고 백제(百濟) 가 정복(征服)한 한강(漢江) 하류(下流) 지역(地域)마저 도로 빼앗아 버렸다. 나제(羅濟) 동맹(同盟)을 깨고 백제(百濟)가 가지고 있던 한강(漢江) 유역(流域)까지 탈취(奪取)한 신라(新羅)는 한강(漢江) 유역(流域)의 비옥(肥沃)한 토지(土地)와 서해(西海) 안을 통(通)한 당나라(唐나라) 등(等) 중국(中國) 왕조(王朝)들과의 접촉(接觸),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의 국경(國境)을 차단(遮斷)하는 것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았고, 내부(內部)로는 불교(佛敎) 를 공인(公認)하고 화랑(花郞) 을 양성(養成)함으로써 삼국(三國) 통일(統一) 의 기반(基盤)을 마련하였다.

신라(新羅) 법흥대왕(大王) · 진흥대왕(振興大王) 의 양(量) 대(代)에 걸친 가야(伽倻) 정복(情服)은 신라(新羅) 의 낙동강(洛東江) 서부(西部) 진출(進出) 정책(政策)이 성공(成功)하였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오랫동안 신라(新羅) · 백제(百濟) 의 세력(勢力) 각축장(角逐場)이었던 가야(伽倻) 신라(新羅) 에 정복(征服)됨으로써, 백제(百濟) 세력(勢力)이 이곳에서 축출(逐出)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과의 대결(對決)에서 신라(新羅) 는 유리(有利)한 고지(高地)를 점령(占領)하였기 때문이다. 신라(新羅) 가 한반도(韓半島)의 새로운 강국(强國)으로 성장(成長)하여 세력권(勢力圈) 형성(形成)에 큰 변화(變化)를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한반도(韓半島)는 과거(過去)의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 · 백제(百濟) 의 대립(對立)이 아니라 신라(新羅) 대(臺) 고구려(高句麗) · 백제(百濟) 의 대립(對立) 양상(樣相)으로 정세(情勢)가 크게 변(變)했고, 이러한 외교(外交) 관계(關係)에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이 가담(加擔)하여 동아시아(東아시아)의 형세(形勢)는 · 당(黨) - 신라(新羅) 의 동서(東西) 세력(勢力)과 돌궐(突厥) - 고구려(高句麗) - 백제(百濟) - 의 남북(南北) 세력(勢力)으로 양분(兩分)시키게 되었다.

이 시기(時期)에 주목(注目)해야 할 문화적(文化的) 사실(事實)은 불교(佛敎)와 유교(儒敎) 의 도입(導入)이다. 불교(佛敎) 는 고대(古代) 국가(國家)의 사상(思想) 통일(統一)에 기여(寄與)하였다는 것과 또 대규모(大規模) 정복(征服) 전쟁(戰爭)에서 높은 사기(詐欺)를 발휘(發揮)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點)에서, 또 유교(儒敎) 는 고대(古代) 국가(國家)의 집권적(集權的)인 왕권(王權)에 효율적(效率的)인 제도(制度)의 운용(運用)과 그 사상적(思想的) 바탕을 제공(提供)하였다는 점(點)에서 그러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時期)에 한반도(韓半島) 를 활용(活用)한 우경법 (牛耕法)이(李) 도입(導入)되어 한반도(韓半島) 의 세 나라는 효율적(效率的)인 양식(樣式)(糧食)의 증대(增大)가 용이(容易)해졌고, 우경법은 삼국(三國) 시대(時代) 이후(以後)에도 한반도(韓半島)의 농사(農事)에 있어서 큰 영향(影響)을 미치게 된다.

신라(新羅)의 삼국통일(三國統一) [ 편집(編輯) ]

한반도(韓半島)에서 정치적(政治的)·문화적(文化的)으로 7세기(世紀)에서 8세기(世紀)에 걸치는 기간(期間)은 커다란 변화(變化)와 발전(發展)을 본 시기(時期)였다. 이 시기(時期)에는 정치적(政治的)으로는 신라(新羅)의 삼국(三國) 통일(統一) 이 있었고, 문화적(文化的)으로는 불교(佛敎) 문화(文化)의 전성기(全盛期)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신라(新羅)의 통일(統一)에 앞서 삼국(三國)은 서로 정치적(政治的)·군사적(軍事的)으로 갈등(葛藤)이 있었고, 그 위에 중국(中國) 대륙(大陸)에서는 수세기(數世紀) 이래(以來) 다시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한 수나라(隋나라) 가 대두(擡頭)하여 한반도(韓半島)를 침략(侵略)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는 잘 싸워 이를 물리쳤고, 사비(私費)(泗批)로 천도(遷都)한 백제(百濟)도 고지(告知)(故地) 회복(回復)에 힘써 한때 큰 뜻을 펴 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新羅)는 안으로 불교(佛敎)를 통한 정신적(精神的) 통일(統一)을 꾀하는 한편(한便), 화랑(花郞) 제도(制度)를 발전시켜 군사적(軍事的) 일면(一面)을 담당(擔當)케 하였고, 대외적(對外的)으로는 수(數)에 대신(代身)하여 일어난 당(黨)과의 연합(聯合)으로 먼저 백제를 쳤으며(660년), 다음으로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668년).

당시(當時)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서로 연합(聯合)해야만 신라(新羅)에 맞설 수 있었고,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 또한 신라(新羅)에게 둘러싸여져 있었다. [ 출처(出處) 필요(必要) ] 신라(新羅)가 이들을 정복(征服)하기 직전(直前), 고구려(高句麗)는 수차(數次)에 걸친 수· 당(黨) 의 침략(侵略)을 받았고, 백제(百濟)는 군사(軍士)를 총동원(總動員)하여 신라(新羅)에게 빼앗긴 옛 영토(領土)를 공격(攻擊)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는 권력층(權力層)의 세력(勢力) 분쟁(紛爭)과 민심(民心) 이반(離叛)으로 국력(國力)이 크게 약(弱)해졌고, 백제(百濟)는 의자왕(義慈王)의 실정(實情)과 귀족간(貴族間)의 권력(權力) 쟁탈전(爭奪戰)으로 결국(結局) 민심(民心)이 이반(離叛)되었다.

신라(新羅)가 이들을 정복(征服)하여, 드디어 한민족(韓民族)의 통일(統一)을 가져왔으나 당(黨)과의 연합(聯合) 세력(勢力)에 의(依)한 군사적(軍事的) 승리(勝利) 뒤에는 적지 않은 난관(難關)이 뒤따랐다. 당(黨)은 당(黨)대로 백제(百濟)의 고지(高地)에 5도독부(都督府)(五都督部)를 두었고, 고구려(高句麗)의 고지(高地)에는 9도독부(都督府)(九都督部)를 두었으며, 이를 다시 42주(株)(州)로 나누었다. 이것은 당(黨)이 두 나라의 영토(領土)를 자기(自己)의 속령(屬領)으로 만들고자 하는 속셈이었고, 신라(新羅)는 이러한 당(黨)의 계획(計劃)을 분쇄(粉碎)해야 했다. 이 투쟁(鬪爭)은 문무대왕(大王) 16년(年)( 676년(年) )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한 지 8년(年)이 지나서야 성공(成功)하여 신라(新羅)는 대체로(大體로) 대동강(大同江)과 원산만을 연결(連結)하는 선(線) 이남(以南)의 영토(領土)를 차지했고, 당(黨)은 평양(平壤)에 설치(設置), 신라(新羅)까지도 포함(包含)하여 지배(支配)하려 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安東都護府)를 철거(撤去)하게 되었다.

나당(羅唐) 전쟁(戰爭)에서 최종적(最終的)으로 승리(勝利)함으로써 신라(新羅) 는 한반도(韓半島) 최초(最初)로 통일(統一) 왕국(王國)을 이뤄내었다.

고구려(高句麗) [ 편집(編輯) ]

고구려(高句麗)는 기(基) 에서 서기(書記) 668년(年) 까지 한반도(韓半島) 북부(北部)와 만주(滿洲) 일대(一帶)를 지배(支配)한 고대(古代) 국가(國家)이다.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紀元前) 37년(年) 주몽(朱蒙) 이 이끄는 부여족(夫餘族)의 한 태조왕은 동예(東濊)와 옥저를 복속(服屬)시키고, 낙랑군(樂浪郡)과 현도군(玄菟郡)은 압박(壓迫)하여 영토(領土)를 넓혔다. 고국천왕 은 왕위(王位)의 부자(父子)상속제 를 마련하였고, 5부(部)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을 설정(設定)하는 등(等) 체제(體制) 정비(整備)를 단행(斷行)하여 왕권(王權)이 보다 강화(强化)되었다.

미천왕 은 서안평(鉏安平)을 확보(確保)하고, 낙랑군(樂浪郡) 대방군(帶方郡) 을 정복(征服)하여 한반도(韓半島)에서 한사군(漢四郡)의 세력(勢力)을 완전히(完全히) 몰아내 고조선(古朝鮮)의 옛 땅을 회복(回復)하였다. 고구려(高句麗)는 고국원왕 백제(百濟) 전연(全然) 의 공격(攻擊)으로 일시적(一時的)인 국가적(國家的) 위기(危機)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代)에 들어서 고구려(高句麗)는 태학(太學)을 설립(設立)하고 불교(佛敎)를 국가적(國家的)으로 공인(公認)하였으며, 율령(律令)을 제정(制定)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中央集權國家)를 완성(完成)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整備)하였다.

5세기(世紀) , 고구려(高句麗)는 전성기(全盛期)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 은 백제의 수도(首都)인 한성(漢城)(漢城)을 침공(侵攻)하여 남쪽(南쪽) 영토(領土)를 임진강(臨津江)과 한강(漢江)까지 확장(擴張)시켰고, 신라(新羅) 내물왕(奈勿王) 을 원조(援助)하여 왜구(倭寇) 를 격퇴(擊退)하였다. 또한 북(北)으로 후연(後燕) 을 쳐서 요동(搖動)을 완전히(完全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地方)의 일부(一部)까지 진출(進出)하였다. 광개토왕은 숙신(肅愼) 동부여(東扶餘) 를 복속(服屬)시켜 만주(滿洲)와 한반도(韓半島)에서 우월(優越)한 위치(位置)를 확보(確保)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 은 중국(中國)의 남북조(南北朝) 와 통교(通交)하였고, 유연(柔軟) (柔然) 등(等) 새외(塞外)(塞外) 민족(民族)과도 통교(通交)하면서 외교관계(外交關係)를 확대(擴大)하여 중국(中國)을 견제(牽制)하였다. 427년(年) 남하정책(南下政策)의 일환(一環)으로 수도(首都)를 평양(平壤) 으로 천도(遷都)하여 중앙(中央) 집권적(集權的) 정치기구(政治機構)를 정비(整備)하였다. 475년(年) 고구려(高句麗)는 백제의 한성(漢城)을 침공(侵攻)하여 함락(陷落)하고 개로왕 을 죽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의 한(恨)을 풀고 남쪽(南쪽)의 아산만(牙山灣)(牙山灣)까지 지배(支配)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首都)를 웅진(熊進) 으로 옮겼고, 함께 공격당한 신라(新羅)는 죽령(竹嶺)(竹嶺) 이북(以北)의 땅을 잃었다.

6세기(世紀) 중반(中盤)에 들어서 내우 외환(外換)에 시달리던 고구려(高句麗)는 국력(國力)이 크게 쇠약(衰弱)해졌다. 신라(新羅)의 진흥왕 나제동맹(羅濟同盟) (羅濟同盟)을 깨고 고구려(高句麗)에게서 빼앗은 한강(漢江) 유역(流域)을 독차지(獨차지) 하였으며, 지금(只今)의 함경도(咸鏡道) 지역(地域) 일부(一部)에까지 진출(進出)해 고구려(高句麗)를 압박(壓迫)하였다.

589년(年) 중국(中國)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隋나라) 는 고구려(高句麗)를 4차례(次例)에 걸쳐 침공(侵攻)하였다. 고구려(高句麗)-수(水) 전쟁(戰爭) 에서 고구려(高句麗)는 612년(年) 을지문덕 이 이끈 살수(薩水) 대첩(大捷) 과 같은 중요(重要)한 전투(戰鬪)에서 승리(勝利)함으로써 수나라(隋나라)의 침공(侵攻)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 전쟁(戰爭)은 수나라(隋나라)의 멸망(滅亡)의 요인(要因) 중(中)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한 당나라(唐나라) 태종(太宗) 연개소문 의 대당강경책(臺當强勁策)을 구실(口實)로 고구려(高句麗)를 침입(侵入)하여 요동성 등(等)을 함락(陷落)시키는 성과(成果)를 거두기도 했으나 안시성(安市城) 에서 성주(星州) 양만춘(楊萬春) (楊萬春 혹은(或은) 梁萬春)에게 대패(大敗)하였다.

이처럼 고구려(高句麗)는 중국(中國) 세력(勢力)의 공격(攻擊)을 성공적(成功的)으로 막아냈으나, 공격(攻擊)을 받으며 국력(國力)이 쇠퇴(衰退)해갔다. 특히(特히) 연개소문 사후(事後) 지배층(支配層)이 분열(分裂)되어 정치(政治) 상황(狀況)이 어지러웠고 민심(民心)이 혼란(混亂)해져 있었다.

668년(年) ,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은 혼란(混亂)해진 고구려(高句麗)를 공격(攻擊)하여 수도(首都)인 평양(平壤)을 차지하고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唐나라)는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를 설치(設置)하였고, 고구려(高句麗) 영토(領土)의 일부(一部)는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의 공백(空白)은 후일(後日) 그 계승국(繼承國)인 발해(渤海) 로 이어진다.

신라(新羅) [ 편집(編輯) ]

신라(新羅)의 석굴암(石窟庵)

신라(新羅) (新羅)는 고구려(高句麗) , 백제(百濟) 와 함께 삼국(三國) 시대(時代)의 삼국(三國) 중(中) 하나로, 현재(現在)의 한반도(韓半島) 동남부(東南部) 일대(一帶)를 약(約) 1000여(餘) 년(年) 동안 지배(支配)하고 있던 국가(國家) 이다. 국호(國號) 신라(新羅)에는 왕(王)의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四方)을 망라(網羅)한다는 의미(意味)를 담고 있다. 신라(新羅)(新羅)는 경주(慶州) 지역(地域)에서 기원전(紀元前) 57년(年) 경(頃)에 건국(建國)되었다. 신라(新羅)는 삼국(三國) 중(中)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國家)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그러나 6세기(世紀) 경(警) 진흥왕 대(臺)에 이르러 전성기(全盛期)를 맞으며 7세기(世紀) 경(警) 한강(漢江) 유역(流域)을 차지하고 나·당(黨) 연합(聯合)을 결성(結成)하여 660년(年)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年) 고구려(高句麗)가 당나라(唐나라)에 의(依)해 멸망(滅亡)하면서 한강(漢江) 이북(以北)의 일부(一部)와 한강(漢江) 이남(以南) 전역(全域)을 차지하여 삼국(三國) 통일(統一) 을 달성(達成)하게 되었다. 669년(年) 발해(渤海) 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南北國) 시대(時代) 의 남쪽(南쪽) 축(軸)이 되었다. 그러나 말기(末期)에 이르러 왕(王)과 귀족(貴族)이 사치스러운 생활(生活)을 하고 정치(政治)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곳곳에서 반란(叛亂)이 일어나 892년(年) 견훤(甄萱) 후백제(後百濟) 를, 901년(年) 궁예(弓裔) 태봉(泰封) (처음 이름은 후고구려)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後三國) 시대(時代) 가 시작(始作), 양국(兩國)의 공세(攻勢)에 버티지 못한 신라(新羅) 경순왕 935년(年) 고려(高麗) 왕건(王建) 에게 항복(降伏)하니 56대(代) 992년(年) 만에 멸망(滅亡)했다.

신라사(新羅史)는 크게 상대(相對) , 중대(中隊) , 하대(下臺) 로 나뉘는데, 상대(相對)는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 부터 진덕여왕 까지의 28대(代) 771년(年)으로, 건국(建國) 이후(以後) 부족국가(部族國家) 에서 고대국가(古代國家) 로의 발전(發展) 및 팽창(膨脹)으로 고구려(高句麗) , 백제(百濟) 와 양립(兩立)하던 시기(時期)이다. 중대(中隊)는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부터 혜공왕 까지의 8대(代) 127년(年)으로, 백제, 고구려(高句麗) 멸망(滅亡) 및 그 직후(直後)의 신라문화(新羅文化)의 황금기(黃金期)이다. 하대(下臺)는 선덕왕 부터 경순왕 까지의 20대(代) 156년(年)으로, 계속(繼續)된 평화(平和)와 왕위(王位) 계승권(繼承權) 싸움으로 혼란(混亂)해져 기울어간 시기(時期)이다. 신라(新羅)의 왕(王)은 박씨(朴氏) , 석씨(昔氏) , 김씨(金氏) 가 번갈아 가며 왕(王)이 되었다. 신라(新羅)는 법흥왕 때 불교(佛敎)를 받아들여 왕권(王權) 강화(强化)와 국민(國民) 의 단결(團結)을 꾀하였으며 섬세하고 화려(華麗)한 불교(佛敎)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을 남겼다.

가야(伽倻) [ 편집(編輯) ]

가야(伽倻) (伽倻 혹은(或은) 加耶, 伽耶)는 가락 (駕洛, 加洛), 가라 (加羅, 伽羅, 迦羅), 가량 (加良), 구야(舊野) (狗耶)라고도 하며, 삼국시대(三國時代) 대부분(大部分) 동안 한반도(韓半島) 남부(南部)에 위치(位置)해 있던 부족국가(部族國家) 의 연맹체(聯盟體)였다. 동쪽(東쪽)으로 신라(新羅) , 서쪽(西쪽)으로 백제(百濟) 를 접(接)하고 있었다.

2 ~ 3세기(世紀) 경(經)에 김해(金海) 등지(等地)에 있던 금관가야(金官伽倻) 를 중심(中心)으로 대가야(大伽倻) , 성산가야(星山伽倻) , 아라가야(阿羅伽倻) , 고령가야(古寧伽倻) , 소가야(小伽倻) 의 5개국(個國)이 합쳐져 전기(電氣) 가야(伽倻) 연맹(聯盟)이 성립(成立)되었으나 고구려(高句麗)의 공격(攻擊)으로 인해 금관가야(金官伽倻)가 큰 피해(被害)를 입자 5 ~ 6세기(世紀) 경(警) 피해(被害)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大伽倻)를 중심(中心)으로 후기(後記) 가야(伽倻) 연맹(聯盟)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역시(亦是)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의 사이에서 위협(威脅)을 받으며 서서히(徐徐히) 무너져가 결국(結局) 562년(年) 멸망(滅亡)한다. 삼국(三國)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國家)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不足國家)의 연맹(聯盟)으로 전락(轉落)한 것이 멸망(滅亡)의 원인(原因)으로 지적(指摘)되고 있다. 가야(伽倻)는 김해(金海) 지방(地方)에서 생산(生産)되는 질(質)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國力)을 키웠으며 왜 등지(等地)와 교역(交易)을 하기도 했다. 가야(伽倻)의 철기 문화(文化)는 뛰어난 수준(水準)으로 평가(評價)된다.

백제(百濟) [ 편집(編輯) ]

백제(百濟)(百濟)는 서기전(西紀前) 18년(年) 온조 에 의(依)해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 에 건국(建國)되었다. 삼국지(三國志) [2] 에는 백제가 마한(馬韓)의 일부(一部)였다고 한다. 백제(百濟)는 3세기(世紀) 경(頃) 충청도(忠淸道) , 전라도(全羅道) 일부(一部) 지역(地域)으로 세력(勢力)을 확장(擴張)해 나갔다. 또한 북쪽(北쪽)으로의 진출(進出)은 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 군현(郡縣) 사이의 영토적(領土的) 분쟁(紛爭)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세기(世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는 마한(馬韓) 대부분(大部分)을 병합(倂合)하여 전라도(全羅道) 지역(地域) 대부분(大部分)을 영토(領土)로 하였으며 북쪽(北쪽)으로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을 공격(攻擊)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戰士)시키기도 하는 등(等) 전성기(全盛期)를 이루었다. 일부(一部) 학자(學者)들은 이 시기(時期) 백제가 중국(中國)의 요서 지방(地方), 일본(日本)의 규슈 등(等)에 진출(進出)하였다고 주장(主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以後)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에게 한강(漢江) 유역(流域)을 빼앗기는 등(等) 수난(受難)을 맞았다. 성왕(聖王)은 신라(新羅)와 동맹(同盟)을 맺고 고구려(高句麗)를 협공(挾攻)하여 한강(漢江) 유역(流域)을 되찾았으나 신라(新羅)의 배신(背信)으로 모두 허사(虛事)가 되고 결국(結局)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戰死)했다.

그 후(後) 백제는 부흥(復興)을 위해 노력(努力)했으나 660년(年) 에 신라(新羅)와 당나라(唐나라)의 연합(聯合) 공격(攻擊)을 받고 수도(首都) 사비성(泗沘城)이 함락(陷落)되며 멸망(滅亡)하였다. 백제의 문화(文化)는 대체로(大體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特徵)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文化)는 왜 등지(等地)에 많은 영향(影響)을 미쳤다.

역사적(歷史的) 기록(記錄) [ 편집(編輯) ]

기원전(紀元前) 57년(年) 신라(新羅)가 소백산맥(小白山脈) 남동쪽(南東쪽) 에, 고구려(高句麗)가 기원전(紀元前) 37년(年) 압록강(鴨綠江) 유역(流域)에 세워졌다. 기원전(紀元前) 18년(年)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麗) 추모성왕(追慕聖王) 의 아들 온조 가 한강(漢江) 유역(流域)을 중심(中心)으로 세웠으며 가야(伽倻)는 낙동강(洛東江) 중하류(中下流) 유역(流域)에서 수로(水路) 가 세웠다.

주변국(周邊國)들로는 부여(扶餘) , 옥저(沃沮) , 동예(東濊) , 우산국(于山國) , 탐라국(耽羅國) 등(等)이 있었다.

신라(新羅)는 당(黨) 과 연합(聯合)하여 660년(年) 백제를, 668년(年) 에는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三國) 시대(時代)는 끝나고, 얼마 후(後) 발해(渤海)와 신라(新羅)로 이루어진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가 왔다.

이때를 기술(記述)한 역사서(歷史書)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가 있다.

삼국(三國)의 정치(政治) 구조(構造) [ 편집(編輯) ]

부체제(部體制)의 구조(構造) [ 편집(編輯) ]

삼국(三國)은 고조선(古朝鮮) 사회(社會)의 외곽(外郭)에서 각기(各其) 독자적(獨自的)으로 성립(成立)하였고, 4세기(世紀) 중반(中盤) 이후(以後) 서로 국경(國境)을 접(接)하게 되기 전(前)까지는 상당(相當) 기간(期間) 상호(相互) 깊은 교섭(交涉)이 없이 발전(發展)해 나갔다. 그에 따라 삼국(三國)의 정치(政治) 조직(組織)에는 각각(各各) 개성적(個性的)인 면모(面貌)를 보여주는 상이(相異)함이 상당히(相當히) 존재(存在)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삼국(三國) 초기(初期)의 정치(政治) 조직(組織)에서는 당대(當代)의 역사적(歷史的) 조건(條件)으로 인(因)한 일정한 공통성(共通性)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부체제(部體制)(部體制)가 그것이다.

고구려(高句麗)의 5부(部), 신라(新羅)의 6부(部), 백제(百濟)의 부여(扶餘)·고구려계(高句麗系) 이주민(移住民) 집단(集團)으로 구성(構成)된 부(父) 등(等)은 원래(元來) 부족(不足)이나 소국(小國)의 성격(性格)을 지닌 단위(單位) 정치체(政治體)였다. 이들은 삼국(三國) 성립기(成立期)에 연맹체(聯盟體)를 형성(形成)하여 삼국(三國) 건국(建國)의 주체(主體)가 되었다. 삼국(三國)이 팽창(膨脹)해 나감에 따라 여타(餘他) 피정복(被征服) 지역(地域)의 지배층(支配層) 일부(一部)가 이

삼국(三國) 초기(初期) 각부(各部)는 중앙(中央) 정부(政府)에게 대외적(對外的)인 외교(外交)·군사(軍事)·무역권(貿易權) 등(等)은 빼앗겼으나, 부(部) 내부(內部)의 일에 대(對)해서는 상당(相當)한 자치권(自治權)을 행사(行使)하였다. 3세기(世紀) 전반(前半)까지도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소노부(消奴部)가 자체(自體)의 종묘(宗廟)와 사직(辭職), 즉(卽) 조상신(祖上神)과 토지신(土地神) 및 지역(地域) 수호신(守護神) 등(等)에 제사(祭祀)를 지내는 등(等) 상당(相當)한 독자성(獨自性)을 유지(維持)하고 있었음은 이 같은 점(點)을 말해준다. 또한 부(富) 내부(內部)에도 부(富)의 통제(統制)를 받으면서 일정하게 자치권(自治權)을 행사(行使)하는, ‘부내부(部內部)(部內部)’라고 부를 수 있는 작은 하위(下位) 집단(集團)이 존재(存在)하였다. 고구려(高句麗)의 경우(境遇) 연나부(椽那部)(椽那部) 내(內)에 그러한 집단(集團)이 네 개(個) 존재(存在)하였고, 신라(新羅)의 한지부(漢祗部)(韓岐部) 내(內)에서도 그러한 집단(集團)의 존재(存在)를 확인(確認)할 수 있다.

각부(各部)의 주민(住民)은 귀족(貴族)에서 빈민(貧民)에 이르기까지 계급적(階級的)으로 분화(分化)되어 있었으나, 삼국(三國)의 국가(國家) 구조(構造) 내(內)에서 볼 때 여타(餘他) 피복(被服)속 지역(地域)의 주민(住民)에 비해 우월(優越)한 지위(地位)를 점(占)하였다. 신라(新羅)에서는 이러한 점(點)이 상대적(相對的)으로 늦게까지 남아 있어서, 삼국(三國) 후기(後期)까지도 관등제(官等制)의 운영(運營)에서 원칙적(原則的)으로 6부(部)의 민(民)에게는 경위(經緯)(京位)가 주어졌고, 지방민(地方民)에게는 외위(外位)(外位)만 주어졌다. 중앙(中央) 관직(官職)과 지방관(地方官)의 자리는 경위(警衛)를 지닌 자(者)만이 임명(任命)되었다.

한편(한便) 삼국(三國) 초기(初期)에 흡수(吸收)된 피정복(被征服) 지역(地域)의 주민(住民)은 병합(倂合)될 당시(當時)의 소국(小國) 또는 읍락(邑落) 단위(單位)로 각각(各各) 중앙(中央) 정부(政府)에 복속(服屬)되었다. 이들은 자치(自治)를 행(行)하며 중앙(中央) 정부(政府)에 공납(貢納)을 하고 군사적(軍事的)으로 협력(協力)하였다. 각각(各各)의 읍(邑)과 촌락(村落)이 삼국(三國)의 통치(統治) 구조(構造) 내(內)에서 차지하던 위치(位置)가 그에 예속(隸屬)된 정도(程度)는 다양한 양상(樣相)을 띠었는데, 복속(復屬)될 당시(當時)의 상황(狀況)과 세력(勢力) 정도(程度)에 따라 일부(一部)는 5부(部)나 6부(部)의 동맹(同盟) 세력(勢力)으로, 다른 일부(一部)는 집단(集團) 예민(銳敏)으로 편제(編制)되었다. 피정복민(被征服民)을 집단별(集團別)로 예속(隸屬)시킨 것은 중앙(中央) 정부(政府)의 지배력(支配力)이 촌락(村落) 내부(內部)에까지 미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當時)까지 촌락(村落)의 공동체적(共同體的)인 유제(遺制)가 잔존(殘存)하여 사회(社會)의 기층(基層)에 작용(作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삼국(三國) 초기(初期) 통치(統治) 구조(構造)의 기본적(基本的)인 틀은 자치적(自治的)인 여러 집단(集團)을 누층적(累層的)(累層的)으로 통합(統合)하여 지배(支配)·예속(禮俗) 관계화(關係化)한 것이었다. 구체적(具體的)으로 6부(部)가 중앙(中央) 집단(集團)이 되고 복속(復屬)된 지역(地域)의 읍(邑)과 촌락(村落)들이 그에 예속(隸屬)되어 있으며, 각부(各部)는 다시 중앙(中央) 왕실(王室)에 복속(復屬)된 형태(形態)였다.

당시(當時) 각부(各部)의 귀족(貴族)들은 자신(自身)의 관원(官員)을 두었으며 상당(相當)한 자치력(自治力)을 지닌 세력(勢力) 기반(基盤)을 가지고 있었다. 왕(王)은 초월적(超越的)인 권력자(權力者)라기보다는, 그러한 귀족(貴族) 가운데 대표적(代表的)으로 유력(有力)한 존재(存在)였다. 그런 만큼 왕국(王國)의 중대사(重大事)를 결정(決定)하고, 각부(各部)에 대(對)한 통합력(統合力)과 국가(國家)의 동원력(動員力)을 최대화(最大化)하는 데는, 각부(各部)의 귀족(貴族)으로 구성(構成)된 회의체(會議體)가 중요(重要)한 권능(權能)을 지녔다. 때로는 이 귀족회의(貴族會議)에서 왕(王)을 폐위(廢位)하고 새로운 왕(王)을 옹립(擁立)하는 일을 결정(決定)하는 경우(境遇)도 있었다. 귀족회의(貴族會議)는 그 뒤 왕권(王權)의 강대화에 따라 그 권능(權能)이 약화(弱化)되었으나, 삼국(三國) 말기(末期)까지 존속(存續)하였다.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 영역국가(領域國家) 체제(體制) [ 편집(編輯) ]

삼국(三國) 초기(初期)의 정치(政治) 구조(構造)는 삼국(三國)이 성장(成長)해 감에 따라 변모(變貌)하였다. 삼국(三國) 초기(初期)의 대내적(對內的)인 정치정세(政治情勢)는 부(富)의 자치력(自治力)과 왕실(王室)의 통제력(統制力), 중앙(中央) 정부(政府)의 집권력(權力)과 복속(復屬)된 각(各) 지역(地域) 집단(集團)의 자치력(自治力) 간(間)의 상호관계(相互關係) 속에서 전개(展開)되었다.

그것은 점차(漸次) 왕권(王權)과 중앙(中央) 집권력(集權力)이 강화(强化)되는 방향(方向)으로 진전(進展)되었다. 이는 철제(鐵製) 농기구(農器具)의 광범위(廣範圍)한 보급(普及)과 그 효율성(效率性)의 개선(改善), 수리(水利) 시설(施設)의 확충(擴充), 우경의 보급(補給) 등(等)에 따른 생산력(生産力)의 증대(增大)와 정복(征服) 전쟁(戰爭)으로 말미암은 사회분화(社會分化)의 진전(進展)으로, 각(各) 집단(集團)의 자치력(自治力)을 뒷받침하던 공동체적(共同體的)인 관계(關係)가 해체(解體)되고 지역(地域) 간(間) 발전(發展)의 불균등성(不均等性)이 완화(緩和)되는 등(等)의 사회적(社會的) 변화(變化)와 함께 진행(進行)되었다. 이에 따라 삼국(三國)은 기존(旣存)의 집단별(集團別) 상하관계(上下關係)를 일원적(一元的)인 지배질서(支配秩序)로 전환(轉換)해 나가기 위해 관등제(官等制)를 정비(整備)하고 관직(官職) 체계(體系)를 확충(擴充)해 갔다.

삼국(三國) 초기(初期) 각부(各部)는 자체(自體)의 관원(官員)이 있었다. 이들은 같은 위계(位階)의 왕실(王室) 관원(官員)보다 하위(下位)에 놓였다. 그래서 각부(各部)가 분립(分立)하는 가운데서도 왕실(王室)을 중심(中心)으로 통합적(統合的)인 상하(上下) 질서(秩序)가 형성(形成)되었다. 그런데 각부(各部)의 자치력(自治力)이 소멸(消滅)되어 감에 따라 각부(各部)의 관원(官員)은 왕권하(王權下)의 일원적(一元的)인 관등체계(官等體系)에 흡수(吸收)되었다. 각부(各部)의 귀족(貴族)도 이 관등제(官等制)에 따라 편제(編制)되었다. 그 완성(完成)된 체계(體系)가 고구려(高句麗)의 14등(等) 관등제(官等制), 백제(百濟)의 16등(等) 관등제(官等制), 신라(新羅)의 17등(等) 관등제(官等制)였다.

나아가 관료(官僚) 조직(組織)이 확충(擴充)되고 관직(官職) 체계(體系)가 분화(分化)되어 갔다. 그중(그中) 백제(百濟)는 6좌평제(佐平制)(六佐平制)와 22관부(官府)(二十二官部)가 있어 세련된 면모(面貌)를 보였으며, 신라(新羅)에서는 6세기(世紀) 초(初) 이후(以後) 병부(兵部)(兵部)를 위시(爲始)한 각종(各種) 관서(官署)가 만들어졌다. 이 관등제(官等制)와 관직(官職) 체계(體系)의 운영(運營)은 신분제(身分制)에 따라 일정한 규제(規制)를 받았다. 출신(出身) 신분(身分)에 따라 일정한 관등(官等)까지만 승진(昇進)할 수 있었고, 동일(同一)한 관직(官職)일지라도 신분(身分)에 따라 취임(就任)할 수 있는 관등(官等)에 차이(差異)가 있었다. 신라(新羅)의 골품제(骨品制)(骨品制)는 그 두드러진 예(例)로서, 진골(眞骨)(眞骨) 귀족(貴族)이 주요(主要) 관서(官署)의 장(腸)을 독점(獨占)하여 배타적(排他的)인 우월성(優越性)을 과시(誇示)하였다.

또한 삼국(三國)은 피정복(被征服) 지역(地域)의 주요(主要) 거점(據點)에 군대(軍隊)를 주둔(駐屯)시키고, 크고 작은 성(城)(城)을 단위(單位)로 지방관(地方官)을 파견(派遣)해 중앙(中央) 집권화(集權化)를 도모(圖謀)해나갔다. 몇 개(個)의 자연촌락(自然村落)으로 구성(構成)된 행정촌(行政村)이 기본적(基本的)인 말단(末端) 행정단위(行政單位)가 되었으며, 다시 수개(數個)의 행정촌(行政村)의 묶인 상위(上位) 행정단위(行政單位)가 설치(設置)되었다.

이러한 지방(地方) 행정(行政) 제도(制度)의 정비(整備)는 곧 그 지역(地域)의 주민(住民)과 토지(土地)에 대(對)한 지배권(支配權)을 중앙(中央) 정부(政府)가 장악(掌握)해 감을 의미한다. 중앙(中央) 정부(政府)는 지배영역(支配領域) 내(內)의 주민(住民)들에게 조세(租稅)를 부과(賦課)하고 그들의 노동력(勞動力)을 징발(徵發)하였다. 기존(旣存)의 각(各) 읍(邑)과 촌락(村落)의 장(長)들은 이제 국가권력(國家權力)을 집행(執行)하는 존재(存在)로서 지방(地方) 지배(支配) 조직(組織)의 말단(末端)에 예속(隸屬)되었다. 이는 중앙(中央)의 부(部)(部)에서 더 빨리 진행(進行)되었다. 부는 삼국(三國) 중기(中期) 이후(以後)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에선 수도(首都)의 행정(行政) 구획(區劃) 단위(單位)로 변(變)하였고, 동시(同時)에 부(部)에 적(敵)(籍)을 둔 귀족(貴族)의 편제단위(編制單位)로서의 기능(機能)도 갖게 되었다. 신라(新羅)의 경우(境遇)도 6세기(世紀)가 지나면서 이와 같이 바뀌어갔다.

한편(한便) 중앙(中央) 집권적(集權的)인 영역(領域) 국가(國家) 체제(體制)가 됨에 따라, 강화(强化)된 국가권력(國家權力)을 매개(媒介)로 지역(地域) 간(間)의 연계성(連繫性)이 깊어졌고, 인적(人的)·물적(物的) 교류(交流)가 활발히(活潑히)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각국(各國)의 영역(領域) 내(內)에 포함(包含)된 여러 종족(種族) 집단(集團) 간(間)의 상호융합(相互融合)이 진전(進展)되었다. 예컨대 토기의 경우(境遇)를 보면, 삼국(三國) 초기(初期)에는 영토(領土) 내(內)의 여러 지역(地域)에서 각기(各其) 개성적(個性的)인 면(面)을 지닌 토기(土器)가 생산(生産)되었는데, 삼국(三國) 후기(後期)에 접어들면서 각국(各國) 영역(領域) 내(內)의 토기(土器)는 질(質)과 양식(樣式)에서 일정하게 균질화(均質化)되어 가는 면(面)을 보였다. 특히(特히) 신라(新羅) 토기(土器)의 경우(境遇) 이러한 면(面)이 현저(顯著)하였다. 이는 수공업(手工業)에 종사(從事)하던 장인(匠人)(匠人) 및 그 생산품(生産品)의 수급(需給)(需給)에 대(對)한 국가(國家)의 통제(統制)와 관련(關聯)이 있다고 여겨진다. 무덤 양식(樣式)에서도 굴식(窟式) 돌방무덤(돌房무덤)이 일반화(一般化)되어 갔다. 또한 불교(佛敎)의 수용(受容)에 따라, 각(各) 집단(集團)이 지니고 있던 고유(固有)한 신앙(信仰)과 의식(意識)(儀式)이 보편성(普遍性)을 지닌 종교(宗敎)의 호수(湖水)(湖水)로 귀합(合)되어 갔다. 나아가 삼국간(三國間)의 교류(交流)와 주민(住民) 이주(移住), 전쟁(戰爭)과 영역(領域) 변동(變動) 등(等)에 따라 삼국(三國) 주민(住民)의 존재(存在) 양태(樣態)도 동질화(同質化)되어 갔다. 삼국(三國) 후기(後期)에는 삼국(三國) 주민(住民)의 풍속(風俗)·의복(衣服)·문물(文物)이 같았음을 당시(當時) 중국인(中國人)의 기록(記錄)에서 확인(確認)할 수 있다.

정치(政治)와 사회(社會) [ 편집(編輯) ]

삼국(三國)의 정치(政治)는 기본적(基本的)으로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를 토대(土臺)로 한 전제왕권(前提王權) 또는 귀족정치(貴族政治)였다. 고구려(高句麗)는 5부족(部族) 연맹체(聯盟體)로 시작(始作)하여 태조왕 이후(以後)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를 갖추었다. 백제는 마한(馬韓)의 작은 소국(小國)에서 발전(發展)하여 3세기(世紀) 고이왕(古爾王) 중앙집권국가(中央集權國家) 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신라(新羅)는 이보다 늦은 시기(時期)에 중앙집권화(中央集權化)되었으며, 귀족회의(貴族會議)는 각각(各各) 고구려(高句麗) 제가회의(齊家會議) , 백제(百濟) 정사암(政事巖) 회의(會議) , 신라(新羅) 화백(和白) 회의(會議) 이다.

초기(初期) [ 편집(編輯) ]

고구려(高句麗)·백제·신라(新羅)의 사회(社會) 발전(發展)은 각각(各各) 그 시기(時期)와 양상(樣相)을 달리 한다. 삼국(三國)은 아직 국가(國家)로서의 체제(體制)를 완비(完備)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점차(漸次) 부족(不足) 연맹체적(聯盟體的)인 사회(社會)를 넘어서 고대국가(古代國家)의 체제(體制)로 변모(變貌)해 갔다. 부족(不足) 연맹체(聯盟體)의 사회(社會)에서 각(各) 부족(部族)은 어느 정도(程度) 독립성(獨立性)을 유지(維持)하였으나, 지배층(支配層)이 형성(形成)되고 왕권(王權)이 점차(漸次) 세습화(世襲化)되자 부족(不足) 세력(勢力)은 왕권(王權)에 흡수(吸收)되었다.

또한 대륙(大陸)과의 빈번(頻繁)한 접촉(接觸)과 충돌(衝突)을 통해서 한(漢)의 정치(政治) 조직(組織) 형태(形態)를 받아들여 족적(足跡)(族的) 기반(基盤) 위에서 새로운 지배(支配) 체제(體制)를 구축(構築)해 갔다.

특히(特히) 대륙(大陸)과 직접(直接) 접촉(接觸)할 수 있었던 고구려(高句麗) 는 일찍이 그 사회(社會) 체제(體制)를 갖추어 갔다. 즉(卽), 1세기(世紀) 초(初) 고구려(高句麗)는 왕호(王號)(王號)를 칭(稱)할 정도(程度)로 발전(發展)하고, 부족(不足)을 일종(一種)의 전사단적(戰士端的)(戰士團的) 조직(組織)으로 개편(改編)하였다. 고구려(高句麗)는 5부족(部族) 연맹체(聯盟體) 로 시작(始作)하여 태조왕 때쯤에는 연맹(聯盟) 세력(勢力)의 확대(擴大)에 따라 계루부(桂婁部) 의 족장(族長)이 지배권(支配權)을 장악(掌握)하였다. 그러나 아직 부족(不足) 세력(勢力)은 잔존(殘存)하면서 왕권(王權)을 견제(牽制), 제한(制限)하였다.

고구려(高句麗)의 사회(社會) 구조(構造)는 수차(水車)의 대외적(對外的)인 정복(征服) 전쟁(戰爭) 과정(過程)에서 점차(漸次) 중앙집권(中央集權) 체제(體制)로 개편(改編)되었고, 그 후(後) 4세기(世紀) 에 이르러서는 고대(古代) 국가(國家)로서의 관료(官僚) 체제(體制)와 신분(身分) 체제(體制)를 갖추었다. 이러한 추이(推移)(趨移)는 사회(社會)·경제적(經濟的)인 면(面)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4년(年) 에는 진대법(賑貸法) (賑貸法)이 실시(實施)되어, 일종(一種)의 구휼(救恤) 기관(機關) 성격(性格)을 띠기도 한다.

한편(한便) 백제(百濟) 의 사회(社會)는 원래(元來) 마한(馬韓) 의 여러 부족(部族)의 족제(族弟) 조직(組織)(族制組織)이(李) 통합(統合)된 기반(基盤)을 갖추지 못한 채 남하(南下)한 부여족(夫餘族)에 의(依)하여 지배권(支配權)이 확립(確立)되고 왕권(王權)이 세습(世襲) 강화(强化)되어 가서, 그 전통적(傳統的)인 사회(社會)의 유대(紐帶)가 견고(堅固)하지 못하였다. 백제(百濟)는 도리어 북부(北部)의 한(恨)의 군현(郡縣)이나 고구려(高句麗)의 압력(壓力)과 영향(影響)을 받는 가운데 지배(支配) 기구(機構)도 갖추어졌으며, 그 영역(領域)의 편제(編制)에 있어서 토착(土着) 사회적(社會的)인 흔적(痕跡)을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백제의 왕실(王室)은 원래(元來) 이 지역(地域)의 부족(不足) 세력(勢力)과는 관계(關係)없는 유이민(流離民)(流移民)의 세력(勢力)에서 유래(由來)되었으며, 왕권(王權)을 유지(維持)하는 세력(勢力)은 흔히 8대(代) 성씨(姓氏) [4] 로 대표되는 귀족(貴族)이었다. 그러나 고이왕(古爾王) 때부터는 6좌평(佐平) (六佐平)을 두어 직무(職務)를 분장(分掌)케 하여 중앙집권국가(中央集權國家)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관등(官等)은 16등급(等級)으로 분화(分化)·발전(發展)되었다.

신라(新羅) 는 경주(慶州)를 중심(中心)으로 한 여섯 씨족(氏族)의 기반(基盤)에서 점차(漸次) 부족(不足) 연맹(聯盟)을 형성(形成)하였다.

그 시조(時調) 설화(說話)가 복잡(複雜)하고 박(朴)·석(碩)·김 3성(星)(姓) 시조(時調)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신라(新羅) 사회(社會)는 다원적(多元的)(多元的)인 사회(社會)였으며 후진성(後進性)을 탈피(脫皮)하지 못하였다. 씨족(氏族) 기반(基盤)인 6촌(寸)이 부족(不足) 연맹체(聯盟體)를 형성(形成)해 가는 과정(過程)에서 6부(部)로 개편(改編)되고, 세력(勢力)의 확대(擴大)에 따라 족장(族長)의 칭호(稱號)도 점차(漸次) 변(變)하였으며 그 세력(勢力)도 강화(强化)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변화(變化)는 원시사회(原始社會)의 유풍(遺風)을 존속시키면서 이에 새로운 형태(形態)를 가미(加味)해 간 듯하다.

한편(한便) 가야(伽倻) 사회(社會)에 대(對)해서는 사료(飼料)가 거의 없어서 가야(伽倻)가 어떠한 사회(社會) 형태(形態)를 유지(維持)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부족(不足) 연맹체(聯盟體) 사회(社會)와 거의 흡사(恰似)한 것이었으리라 짐작(斟酌)된다.

다른 한편(한便) 한국(韓國) 고대(古代) 사회(社會)의 여명(餘名)이라 할 수 있는 이 시대(時代)의 사회(社會)에는 원시(原始) 공동체적(共同體的)인 요소(要素)가 점차(漸次) 해체(解體)되고 족장(族長) 세력(勢力)을 중심(中心)으로 토지(土地)의 사유화(私有化)가 나타났으며, 신분(身分) 체제(體制)도 점차(漸次) 정비(整備)되기 시작(始作)하였고, 또한 수취(收取) 체제(體制)는 고대(古代) 사회(社會)로의 전이(轉移)(轉移) 과정(過程) 속에서 강조(强調)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중기(中企) [ 편집(編輯) ]

삼국(三國)은 모두 여러 차례(次例)의 진통(陣痛)을 겪으면서 부족(不足) 연맹체적(聯盟體的)인 사회(社會) 조직(組織)을 청산(淸算)하고 고대(古代) 국가(國家)로서의 체제(體制)를 갖추어 갔다. 부족(不足) 연맹체(聯盟體)의 맹주(盟主)는 전제적(專制的)인 왕권(王權)으로 전환(轉換)·강화(强化)되어 왕권(王權)의 확립(確立), 왕위(王位)의 부자(父子) 상속제(相續制)가 이루어지고, 율령격식(律令格式)(律令格式)이(李) 반포(頒布)되어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인 지배(支配) 체제(體制)가 확립(確立)되었다. 원래(元來)의 대소(對蘇) 부족장은 그들의 독립성(獨立性)을 상실(喪失)하고 중앙(中央)과 지방(地方)의 관료(官僚) 조직(組織) 속에 흡수(吸收)되어 귀족화(貴族化)의 길을 밟게 되었다.

고구려(高句麗)의 귀족(貴族) 제도(制度)에 대(對)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수상(首相)인 대대로(代代로) 에 임명(任命)될 수 있고, 또 이를 선거(選擧)할 수 있는 일정한 신분층(身分層)이 있었던 것 같다. 또 그 밑으로 여러 신분층(身分層)이 갈려지고, 다른 신분(身分) 사이에서는 관직(官職)의 임명(任命)·결혼(結婚) 등(等)에 한계(限界)가 있었던 것 같다.

백제에는 사씨(史氏)(沙氏)·연씨(延氏)(燕氏)·협(協)씨(?氏)·해씨(該氏)(解氏)·진씨(晉氏)(眞氏) [5] ·국씨(國氏)(國氏)·목씨(睦氏)(木氏)·백씨(白氏)(?氏) [6] 등(等) 여덟 성(姓)이 있어 백제 지배층(支配層)의 중심적(中心的) 위치(位置)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시대(時代)의 귀족(貴族) 사회(社會)의 실태(實態)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신라(新羅)의 골품(骨品) 제도(制度) (骨品制度)이다. 골품(骨品)에는 성골(聖骨) (聖骨)· 진골(眞骨) (眞骨), 6두품(頭品)(六頭品)·5두품(頭品)(五頭品)·4두품(頭品)(四頭品) 등(等)이 있었으며, 진골(眞骨) 중(中)에서는 고구려(高句麗)의 고추가(古鄒加)와 비슷한 갈문왕(葛文王) 이란 것이 있었다.

삼국(三國)은 과거(過去)의 다원적(多元的)인 조직(組織)을 청산(淸算)하고 왕(王)을 중심(中心)으로 한 일원화(一元化)된 관등(官等) 체계(體系)(官等體系)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高句麗)의 12관등(官等)(官等), 백제(百濟)의 16관등(官等), 신라(新羅)의 17관등(觀燈)이 대개(大槪) 이때 형성(形成)되었다. 관직(官職)은 신분(身分)에 따라 한계(限界)가 있었다. 고구려(高句麗)의 경우(境遇)에는 관부(官府)(官府)에 대(對)한 기록(記錄)이 없으나 백제는 처음의 6좌평(佐平) (六佐平)에서 사비(私費) 시대(時代)의 22부(部)(部)에 이르러 비교적(比較的) 정비(整備)된 관부(官府)들이 이 기록(記錄)에 나타난다. 신라(新羅)에 있어서는 필요(必要)에 따라 병부(兵部)(兵部)·창부(娼婦)(倉部) 등(等)의 관부(官府)가 생겨나서 국무(國務)(國務)를 관장(管掌)했다.

삼국(三國)의 정치(政治)는 대개(大槪) 합좌(合坐) 제도(制度)(合坐制度)로써 행(行)해졌다.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수상(首相)인 대대로(代代로)(大對盧)의 임명(任命)을 귀족(貴族)들의 선출(選出)한 결과(結果)에 따랐으며, 백제에서는 정사암(政事巖)(政事巖)의 고사(枯死)(故事) 같은 것을 미루어 보아 역시(亦是) 투표(投票)로써 재상(宰相)(宰相)을 선출(選出)한 듯하다. 신라(新羅)의 화백(畫伯) (和白)은 그 뚜렷한 형태(形態)로서 사영지(私營紙)(四靈地)에서 행(行)해졌다.

중앙(中央)의 권력(權力)은 지방(地方)에까지 미쳐서 행정적(行政的)인 구획(區劃)이 설정(設定)되기에 이르렀다. 과거(過去)에 부족(部族)들이 웅거(雄據)하던 지역(地域)에는 성(城)(城)을 쌓고 이것을 군(軍)(郡)이라 불렀다. 그 장관(長官)을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처려근지(處閭近支)(處閭近支) [7] , 백제에서는 군장(軍將)(郡將), 신라(新羅)에서는 군태수(郡太守)(郡太守)라고 하였으나 일반적(一般的)으로 성주(星州)(城主)라 했다. 뒤에는 여러 성(性)을 통괄(統括)하는 행정(行政) 구획(區劃)이 생겼는데, 이것이 고구려(高句麗)의 5부(部)(部)였고, 백제(百濟)의 5방(房)이었으며, 신라(新羅)의 여러 주(州)(州)였다. 그리고 중앙(中央) 귀족(貴族)의 근거지(根據地)인 서울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에서는 모두 5부(部)로, 신라(新羅)에서는 6부(部)로 나누는 특별한 행정(行政) 구획(區劃)을 갖고 있었다.

부족(不足) 연맹(聯盟) 시대(時代)의 군대(軍隊)는 부족(不足) 단위(單位)로 조직(組織)된 부족군(不足軍)의 연맹체(聯盟體)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古代) 국가(國家)의 발전(發展)은 이러한 연맹군(聯盟君)을 해체(解體)시키고 국왕(國王)의 지휘하(指揮下)에 놓인 전국적(全國的)인 군대(軍隊)를 편성(編成)시켰다. 이런 의미(意味)에서 왕(王)은 곧 전국(全國)의 최고(最高) 군사령관(軍司令官)이었고, 중앙(中央) 귀족(貴族)들이 모두 장군(將軍)이 되었다. 신라(新羅)의 당(黨)(幢)은 이러한 부대(部隊) 조직(組織)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귀족군(貴族君)의 보충(補充)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청년(靑年) 단체(團體)가 고구려(高句麗)의 경당 (?堂)이며, 신라(新羅)의 화랑(畫廊)도 (花郞道)였다. 이 두 조직(組織)은 모두 미성년(未成年) 집단(集團)이라는 공동체적(共同體的)인 유제(遺制)를 이용(利用)하였다는 데에 공통적(共通的) 특색(特色)이 있다. 그들은 모두 국가(國家)가 필요(必要)로 하는 도의(道義)를 연마(硏磨)했다. 경당에 모인 청년(靑年)들은 경전(經典)(經典)을 읽었으며, 화랑도(花郞道)는 원광(圓光)(圓光)이(李) 가르쳤다는 세속(世俗)오계(世俗五戒)를 믿었다. 그리고 평상시(平常時)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니며 수양(修養)했으나 유사시(有事時)에는 국가(國家)를 위한 전열(戰列)에 참가(參加)했다.

한편(한便) 삼국(三國)은 모두 지방(地方) 군대(軍隊)를 조직(組織)하고 있었다. 지방(地方)의 행정(行政) 조직(組織)은 곧 군사(軍事) 조직(組織)이기도 했다. 성(性)에는 일정한 수(數)의 군대(軍隊)가 주둔(駐屯)하고, 성주(星州)는 곧 지휘관(指揮官)이었다.

고대(古代) 국가(國家)의 성장(成長)에 따라 전국(全國)의 모든 토지(土地)는 왕토(王土)(王土)요, 모든 주민(住民)은 신민(臣民)(臣民)이라는 사상(思想)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戰爭)에 공(功)이 있는 장군(將軍)들에게는 식읍(食邑)(食邑)이나 녹읍(祿邑)(祿邑)과 같은 명목(名目)으로 많은 토지(土地)와 포로(捕虜)들이 분배(分配)되었으며, 그 결과(結果) 토지(土地)와 노예(奴隸)가 사유화(私有化)되었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지방(地方)에 강제(强制)로 이동(移動)되어서 집단적(集團的)인 거주(居住)를 하는 부곡(部曲)과 같은 천민집단(賤民集團)이 있었다.

또 신분적(身分的)으로 양인(良人)인 농민(農民)은 자기(自己)들의 자영지(自營地)(自營地)를 경작(耕作)하고 있었다. 국가(國家)는 이들을 직접(直接) 파악(把握)하고 있었으며, 조세(租稅)와 역역(力役)(力役)을 부과(賦課)하였다. 당시(當時)는 토지(土地)보다도 오히려 인간(人間)의 노동력(勞動力)에 대(對)한 관심(關心)이 컸다. 자영농민(自營農民)은 때로는 용민(庸民)으로 전락(轉落)하고 또 노예(奴隸)가 되기도 했다.

후기(後記) [ 편집(編輯) ]

6세기(世紀) 후반(後半)에 접어들면서 삼국(三國) 간(間)의 관계(關係)에 새로운 변화(變化)가 일어났으며, 이는 대륙(大陸)의 정세(情勢) 변동(變動)과 연관(聯關)되어 전개(展開)되었다. 551년(年)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연합군(聯合軍)은 왕위(王位) 계승(繼承) 분쟁(紛爭)의 여파(餘波)로 귀족(貴族) 간(間)의 내분(內紛)에 시달리고 있던 고구려(高句麗)를 공격(攻擊)하여 한강(漢江) 유역(流域)을 점령(占領)하였다. 한강(漢江) 하류(下流) 지역(地域)은 백제(百濟)가, 상류지역(上流地域)은 신라(新羅)가 차지하였다.

고구려(高句麗)는 이어 북중국(北中國)의 북제(北齊)(北齊)의 군사적(軍事的)인 압력(壓力)과, 유연(柔軟)(柔然)을 격파(擊破)하고 등장(登場)한 몽골 고원(高原)의 신흥(新興) 유목민(遊牧民) 국가(國家)인 돌궐(突厥) (突厥) [8] 의 적극적(積極的)인 공세(攻勢)에 직면(直面)하게 되었다. 이러한 안팎의 위기(危機)를 맞아, 고구려(高句麗)의 귀족(貴族)들은 대내적(對內的)으로는 그들간(間)의 분쟁(紛爭)을 수습(收拾)하고 귀족(貴族) 연립(聯立) 정권(政權) 체제(體制)를 성립시켰다. 이는 인(人) 세력(勢力)이 되었다. 이 금관가야(金官伽倻)는 5세기(世紀) 초(初)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 (廣開土王)의 낙동강(洛東江) 유역(流域) 원정(遠征) 이후(以後) 크게 쇠약(衰弱)해져, 6세기(世紀) 초(初) 신라(新羅)에 병합(倂合)되었다. 이후(以後) 신라(新羅)가 낙동강(洛東江) 서쪽(西쪽) 지역(地域)으로 세력(勢力)을 확대(擴大)해나가자, 가야(伽倻)의 소국(小國)들은 백제나 왜와 연합(聯合)하여 대응(對應)하였고, 고령(高齡)(高靈)의 대가야(大伽倻)가 이 지역(地域)의 중심국(中心國)이 되었다. 그런데 대가야(大伽倻)가 554년(年) 의 전투(戰鬪)에 패배(敗北)한 후(後) 얼마 안 있어 신라(新羅)에 병탄(竝呑)되고, 소백산맥(小白山脈) 동쪽(東쪽)의 가야지역(伽倻地域)은 신라(新羅)의 영역(領域)이 되어, 가야(伽倻)는 완전(完全) 소멸(消滅)하였다.

554년(年) 이후(以後) 백제(百濟)와 신라(新羅) 간(間)에는 해를 이은 상쟁이(相쟁이) 지속(持續)되었다. 그리고 6세기(世紀) 종반(終盤) 고구려(高句麗)가 돌궐(突厥)의 공세(攻勢)를 저지(沮止)한 후(後) 재차(再次) 남(南)으로 예봉(銳鋒)을 돌림에 따라,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의 전쟁(戰爭)이 재개(再開)되었다. 이에 삼국(三國)은 각각(各各) 상쟁(相爭)을 벌이는 상황(狀況)이 되었다. 영역(領域) 국가(國家) 체제(體制)를 구축(構築)한 삼국(三國) 사이에 더 많은 토지(土地)와 인민(人民)을 확보(確保)하려는 전쟁(戰爭)이 계속(繼續) 전개(展開)된 것이다.

삼국(三國) 간(間)에 벌어진 장기간(長期間)의 전쟁(戰爭)은 사회(社會) 분화(分化)를 더욱 촉진(促進)하였다. 귀족(貴族)은 전쟁(戰爭)을 통해 빈번히(頻繁히) 전쟁(戰爭)에 동원(動員)된 소농민층(小農民層)의 경우(境遇), 급박(急迫)한 군사(軍事) 정세(情勢)에 따라 때로는 노약자(老弱者)도 징발(徵發)되었으며, 복무(服務) 기간(期間)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도 하였다. 그들은 평상시(平常時)에도 노역(勞役)에 동원(動員)되었다. 그러한 상황(狀況)에서 고리대(高利貸)가 성행(盛行)하였고, 일부(一部) 소농민층(小農民層)은 몰락(沒落)해 갔다.

삼국(三國)에서 영역(領域) 국가(國家) 체제(體制)가 자리 잡아가고 사회(社會) 분화(分化)가 진전(進展)됨에 따라, 촌락(村落)의 공동체적(共同體的) 관계(關係)가 급속히(急速히) 해체(解體)되고 지역(地域) 간(間)의 주민교류(住民交流)가 활발(活潑)해졌다.

지방(地方)의 유력(有力)가나 몰락(沒落)한 농민(農民)의 일부(一部)는 수도(首都)로 올라와 생존(生存)과 출세(出世)를 도모(圖謀)하였다. 그들은 당시(當時) 잦은 전쟁(戰爭)에 따라 늘어난 병력(兵力) 수요(需要)와 신속(迅速)한 동원력(動員力)의 필요(必要)에 따라 행(行)해진 모병(募兵)(募兵)에 응(應)하기도 하였으며, 귀족(貴族)의 휘하(麾下)에 몸을 의탁(依託)하여 입신(立身)(立身)을 모색(摸索)하기도 하였다. 유력(遊歷)한 귀족(貴族)은 정치적(政治的)·군사적(軍事的) 필요(必要)에 따라 이들을 적극적(積極的)으로 흡수(吸收)하여 세력(勢力) 확대(擴大)를 도모(圖謀)하였다.

한편(한便) 동아시아(東아시아)의 국제(國際) 정세(情勢)는 6세기(世紀) 후반(後半) 중국(中國)에서 수(數)(隋)나라가 등장(登場)함에 따라 근본적(根本的)으로 새로운 국면(局面)을 맞게 되었다. 수나라(隋나라)는 3백여(百餘) 년간(年間) 분열(分裂)되어 있던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하고 몽골 고원(高原)의 돌궐(突厥)을 격파(擊破)·복속(服屬)하였다.

경제(經濟) [ 편집(編輯) ]

기록상(記錄上)으로는 삼국(三國) 초기(初期)부터 화폐(貨幣)가 사용(使用)된 것으로 보이나 유물(遺物)이 발굴(發掘)된 것은 없으나, 물품화폐(物品貨幣)가 주(主)를 이루었다고 여겨진다. [9] 신라(新羅)에서는 5세기(世紀) 말과 6세기(世紀) 초(初), 도읍(都邑)인 경주(慶州)에 시장(市場)을 열고 감독(監督)하는 기관(機關) [10] 을 두었다.

삼국(三國)의 문화(文化) 발달(發達) [ 편집(編輯) ]

불교(佛敎) 도교(道敎) 의 수용(受容) [ 편집(編輯) ]

삼국(三國)은 율령(律令)을 제정(制定)하고 지방제도(地方制度)와 중앙조직(中央組織)을 개편(改編)하여 왕권(王權) 강화(强化)에 힘쓰던 4세기(世紀)에 불교(佛敎)를 수용(受容)하였다. 고구려(高句麗)는 중국(中國)의 전진(前進)을 통하여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에 불교(佛敎)를 수용(受容)하였고(372), 백제(百濟)는 동진(東進)에서 침류왕(枕流王) 때 불교(佛敎)를 받아들였다(384). 고구려(高句麗)를 통하여 불교(佛敎)가 전래(傳來)된 신라(新羅)는 1세기(世紀) 가까운 민간전승(民間傳承)을 거쳐 법흥왕(法興王) 때 비로소 불교(佛敎)를 국가적(國家的)으로 공인(公認)하였다(527).

삼국(三國)은 불교(佛敎)를 신앙(信仰)으로 널리 수용(受容)하였다.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 확립(確立)과 지방세력(地方勢力)의 통합(統合)에 힘쓰던 이 시기(時期)에 불교(佛敎)는 새로운 국가(國家) 정신(精神)의 확립(確立)에 기여(寄與)하고 강화(强化)된 왕권(王權)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역할(役割)을 하였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에서는 사상적(思想的)으로 불교(佛敎)를 이해(理解)하는 데에도 상당히(相當히) 높은 수준(水準)이었다. 특히(特히) 신라(新羅)에서는 불교(佛敎)가 왕권(王權)과 밀착(密着)되어 성행(盛行)하였다. 승려(僧侶)가 의술(醫術)을 담당(擔當)하고 전통(傳統) 신앙(信仰)에서 신성(神聖)하게 여기전(展) 장소(場所)에 사찰(査察)을 건립(建立)하면서 불교(佛敎)는 점차(漸次) 전통신앙(傳統信仰)의 기능(機能)을 대신(代身)하였다. 신라(新羅)에서 널리 받아들인 불교(佛敎)의 중심(中心) 교리(敎理)는 업설(業說)과 미륵불(彌勒佛) 신앙(信仰)이었다. 이는 왕(王)이 곧 부처라는 사상(思想)을 통하여 왕(王)의 권위(權威)를 높여 주는 한편(한便), 귀족(貴族)들의 특권(特權)을 인정(認定)해 주는 일면(一面)이 있었다. 신라(新羅)의 여러 왕(王)들이 불교식(佛敎式) 이름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다. 아울러 미륵불(彌勒佛)이 나타나 이상적(理想的)인 불국토(佛國土)를 건설(建設)한다는 미륵불(彌勒佛) 신앙(信仰)은 진흥왕(眞興王) 때 조직화(組織化)된 화랑(花郞) 제도(制度)와 밀접(密接)한 관련(關聯)을 가지면서 신라(新羅) 사회(社會)에 정착(定着)되었다.

삼국(三國)에는 도교(道敎)도 전래(傳來)되어 산천(山川) 숭배(崇拜)나 신성(神聖) 사상(思想)과 결합(結合)하여 귀족(貴族) 사회(社會)를 중심(中心)으로 환영(歡迎)받았다. 백제(百濟)의 산수(算數)무늬 벽돌(甓돌)과 산수(山水)무늬 기와는 자연(自然)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생각을 담고 있으며, 백제 금동(琴童) 대향로(臺香爐)는 신선(神仙)들이 사는 이상향(理想鄕)을 형상(形象)으로 표현(表現)하였다. 고구려(高句麗) 고분(古墳)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는 도교(道敎)의 방위신(方位神)을 그린 것으로 죽은 자(者)의 사후(死後) 세계(世界)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표현(表現)하고 있다. [11]

같이 보기 [ 편집(編輯) ]

각주(各州) [ 편집(編輯) ]

  1. 김태식, 〈4~5세기(世紀) 국제정세(國際情勢)와 가야연맹(伽倻聯盟)의 변동(變動)〉, 《4~5세기(世紀) 동아세아(東亞細亞) 사회(社會)와 가야》, 김해시(金海市), 2001년(年).; 홍익대(弘益大) 김태식 교수(敎授)의 주장(主張) Archived 2007년(年) 9월(月) 27일(日) - 웨이백 머신 ; 김태식, 〈사국시대론(時代論)〉,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46, 한국고대사학회, 2007년(年) 6월(月), 101~150쪽.
  2. 나관중(羅貫中) 이 쓴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가 아닌 진(陳) (晉)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이다.
  3. <양직공(量職工)도>는 양(凉)나라의 원제(元帝)인 소역(小疫)(蕭繹, 505∼554)이(李) 제위(帝位)(帝位)에 오르기 전(前)인 형주자사(自社)(荊州刺史) 재임시(在任時)(526∼539)에 편찬(編纂)한 도서(圖書)(圖書) 이다
  4. 사씨(史氏)(沙氏)·해씨(該氏)(解氏)·연씨(延氏)(燕氏)·협(協)씨(協氏)·진씨(晉氏)(眞氏)·국씨(國氏)(國氏)·목씨(睦氏)(木氏)·묘씨(墓氏)(苗氏)
  5. 또는 신씨(신氏)(?氏, 愼氏)
  6. 또는 묘씨(墓氏)(苗氏)
  7. 혹은(或은) 도리(道理)(都吏)
  8. 투르크(Turk)
  9. 「화폐(貨幣)」《한국민족문화대백과(韓國民族文化大百科)》, 한국학중앙연구원(韓國學中央硏究院)
  10. 「신라본기」《삼국사기(三國史記)》
  11. 국사(國史) 편찬(編纂) 위원회(委員會), 《고등학교(高等學校) 국사(國史)》, 교육(敎育) 인적(人的) 자원부(資源部), 서울 2004.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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