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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飛擊震天雷)는 조선(朝鮮) 중기(中期)에 군사목적(軍事目的)으로 사용(使用)된 폭탄(爆彈)으로,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李) 처음 발명(發明)하였다.
대완포구(浦口)(大碗砲口)로 발사(發射)하여 5백(百)~6백보(百步)(1보(報)(步)의 사정거리(射程距離)를 가지는 일종(一種)의 시한(時限) 폭탄(爆彈)이다.
둥근 박(朴) 모양(模樣)의 형태(形態)에 표면(表面)은 무쇠로 처리(處理)를 하였으며, 내부(內部)는
화약(火藥)
과 철조각(鐵彫刻)(빙철(鐵)) 등(等)을 장전(裝塡)하게 되어 있어 폭발(爆發) 시(時) 파편(破片)이 튀어나가도록 한 것으로, 지금(只今)의
세열수류탄(細裂手榴彈)
(폭발(爆發)할 때에 금속(金屬) 파편(破片)이 사방(四方)으로 날아가서 살상(殺傷) 범위(範圍)를 확대(擴大)하는 수류탄(手榴彈))하고 비슷한 형태(形態)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지름이 21 cm, 둘레가 68cm로 도화선(導火線)을 감는 둥근 나무 그릇과 얇은 철조각(鐵彫刻), 뚜껑 등(等)으로 구성(構成)되어 있다. 주둥이가 넓고 포신(砲身)이 좁은 모양(模樣)으로 생긴 완구(玩具)를
화포(火砲)
로 이용(利用)해 발사(發射)하였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에 대(對)해 이서(李曙)(李曙)가 지은 《
화포식(火砲式)
》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解說)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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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체형(體型)은 박(朴)과 같이 둥글고 부리는 네모가 졌으며, 그 부리에는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다. 내부(內部)에는 도화선(導火線)인 약선(約線)을 감는 목곡(曲)(木谷)이 있고, 또한 목곡(曲)이 들어가는 죽통(竹筒)(竹筒)이 있으며 내부(內部)에는 빙철(鐵)(憑鐵)이(李) 채워진다. 특히(特히) 목곡(曲)은 폭파시간(爆破時間)을 조절(調節)하는 장치(裝置)로서 그 재료(材料)는 단목(單목)(檀木)을 사용(使用)하며, 그 골을 나사모양(螺絲模樣)으로 파서 폭파(爆破)를 빠르게 하려면 열(熱) 고비로, 더디게 하려면 열다섯 고비로 하되, 중약선(中藥線)을 감아 죽통(粥筩)에 넣어 한 끝은 죽통(竹筒) 아래 중심(中心)에 꿰고, 또 한 끝은 죽통(竹筒) 위(位) 개철(個鐵) 밖으로 내되 두 치를 넘지 못하게 하며, 이 때에 죽통(竹筒)과 개철(個鐵) 주위(周圍)에는 홈이 생기지 않도록 종이로 밀봉(密封)한 뒤 화약(火藥)은 허리구멍으로 채워넣고 격목(格目)으로 구멍을 막은 뒤 안구(眼球)에 실어 발사(發射)하되 불꽃을 막으려면 진천뢰(震天雷) 심지(心지)에 불을 붙이고 나서 완구(玩具) 심지(心지)에 불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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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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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서(李曙),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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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火藥)이 안에서 폭발(暴發)하는 방식(方式)으로 진(陣)을 함락(陷落)시키는 데 가장 좋은 무기(武器)였지만 실전(實戰)에 활용(活用)하는 사람이 없었다가,
1592년(年)
선조(宣祖) 25년(年) 9월(月) 1일(日)
박진(朴振)
이 경주(競走)를 수복(收復)할 때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城) 밖에서 발사(發射)하여 큰 효과(效果)를 보았다. 《
선조실록(宣祖實錄)
》에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城) 안으로 쏘자, 이것이 뭔지 몰랐던 적(敵)들이 구경하느라고 서로 밀고 당기며 만지다가 포가 터져서 적장(敵將)을 포함(包含)한 20명(名)이 즉사(卽死)를 하여 이튿날 성(城)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逃亡)하였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1]
현재(現在)까지 남아 있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로는 육군박물관(陸軍博物館)에서 보물(寶物)로 지정(指定)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외(外)에 경남(慶南)
하동군(河東郡)
고전면 고하리 고현성지(地)에서 발굴(發掘)된 유물(遺物)과 진주성지(晋州聖地)에서 발굴(發掘)된 파편(破片), 그리고 전라남도(全羅南道)
장성군(長城郡)
삼서면 석마리에서 발굴(發掘)되어 연세대학교 박물관(博物館)에 소장(所藏)되어 있는 것이 있다.
2018년(年) 11월(月) 15일(日),
호남문화재연구원(湖南文化財硏究院)
은 전북(全北)
고창군(高敞郡)
의
무장읍성(武裝邑城)
에서 11점(點)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견(發見)했다고 밝혔다.
[2]
[3]
이전(以前)까지 모두 6점(點)의 유물(遺物)이 보고(報告)된 바 있다.
[4]
외부(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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