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기원(檀君紀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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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기원(檀君紀元) (檀君紀元) 또는 단기(短期) (檀紀)는 한민족(韓民族) 의 역사(歷史)가 시작(始作)되는 시점(時點)인 단군(檀君) 고조선(古朝鮮) 건국(建國) 연대(連帶)를 기준(基準)으로 하는 상징적(象徵的)인 기년(朞年)이다. 그레고리력 을 기준(基準)으로 기원전(紀元前) 2333년(年) 이 단기(短期) 1년(年)으로, 서기(書記) 2024년(年) 은 단기(短期) 4357년(年)이 된다. (단군(檀君) 기원(起源) = 서력기원(西曆紀元) + 2333년(年))

전근대(前近代) 한민족(韓民族)의 조상(祖上)들이 오랜 역사(歷史)와 전통(傳統)을 5000년간(年間) 지켜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긍심(自矜心)의 표현(表現)인 것으로 평가(評價)되며, 현대(現代)에도 한민족(韓民族)의 상징적(象徵的)·신화적(神話的)인 기년(朞年)으로 인정(認定)되고 있다. [1]

역사(歷史) [ 편집(編輯) ]

단군(檀君)과 단군기원(檀君紀元)의 연대(連帶)에 대(對)한 최초(最初)의 기록(記錄)은 《 삼국유사(三國遺事) 》이다. 일연(一然) 은 이 책(冊)에서 “ 단군왕검(檀君王儉) 요임금(堯임금) 이 즉위(卽位)한 지 50년(年)인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都邑)을 정(定)하고 비로소 조선(朝鮮) 이라 불렀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곳에 “ 요임금(堯임금) 즉위(卽位) 원년(元年)은 무진년(戊辰年)이니 즉위(卽位) 50년(年)은 정사년(丁巳年)이지 경인년(庚寅年)이 아니다.”라고 할주(株)를 달았다. [2] 이에 따르면 단군기원인(檀君紀元人) 정사년(丁巳年)은 기원전(紀元前) 2284년(年)이다. [3]

이승휴 (李承休)가 지은 《 제왕운기(帝王韻紀) 》 동국군왕개국연대(君王個國連帶)(東國君王開國年代)에는 제석천(帝釋天) (帝釋天, 옥황상제(玉皇上帝) )의 손자(孫子) 단군(檀君) 이 제고(提高)(帝高)와 같은 무진년(戊辰年)에 즉위(卽位)하여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年)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神)이(李) 되었는데, 그 동안 나라를 다스린 기간(期間)이 1028년(年)이라 했다. 이러한 이승휴(李承休)의 연대(連帶) 기록(記錄)은 당시(當時)의 전근대(前近代) 역사학(歷史學)의 기준(基準)으로도 오류(誤謬)가 있는데, 전근대(前近代) 역사학(歷史學)에서 공인(公認)되었던 기묘년(己卯年)( 기원전(紀元前) 1122년(年) )을 중심(中心)으로 계산(計算)하면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단군(檀君)이 즉위(卽位)한 해는 기원전(紀元前) 2313년(年)이 되며 이 해는 무진년(戊辰年)이 아니다. 대체로(大體로) 학계(學界)에서는 1028년(年)을 1048년(年)의 오기로 여기는데, 이렇게 보정(補正)하면 무진년(戊辰年)( 기원전(紀元前) 2400년(年) )이 된다.

한편(한便) 단군기원(檀君紀元)에 대(對)하여 직접적(直接的)으로 언급(言及)한 가장 오래된 기록(記錄)은 《 고려사(高麗史) 》 열전(列傳) ' 백문보 (白文寶, 1303~1374)'조(朝)(條)로, 공민왕(恭愍王)에게 올린 상소(上疏)에서 단군(檀君)을 언급(言及)했다.

하늘 의 기수(期數)(氣數)는 순환(循環)하여 700년(年)이 한 소원(所願)(小元)이(李) 되고, 3600년(年)이 쌓이면 한 대주원(大周元)이 되니, 이것이 황제(皇帝)(皇帝)와 왕패(王覇)의 치난흥(難興)쇠(治難興衰)의 기회(機會)가 됩니다. 우리 동방(東邦)은 단군(檀君) 부터 지금(只今)( 1363년(年) )까지 이미 3600년(年)이므로 주년(周年)(周年)의 기회(機會)가 됩니다.

여기서 백문보 가 단군(檀君)이 치세(治世)를 시작(始作)했다고 여긴 연도(鳶島)는 현재(現在)의 단기(短期) 원년(元年)(기원전(紀元前) 2333년(年), 무진년(戊辰年))과 다르다. 백문보의 글을 모은 문집(文集) 《 담암일집 》의 부록(附錄)에 실린 편년(編年)(編年)에 따르면, 백문보는 이 상소(上疏)를 공민왕(恭愍王) 12년(年)(1363, 계묘(癸卯))에 올렸다. 따라서 백문보의 말을 문자(文字) 그대로 받아들여 1363년(年)으로부터 3600년(年)을 거슬러 헤아리면, 백문보가 생각한 단군(檀君) 치세(治世) 원년(元年)은 기원전(紀元前) 2238년(年)(계묘(癸卯)), 또는 기원전(紀元前) 2237년(年)(갑진(甲辰))이다.

기원전(紀元前) 2400년(年)에 단군(檀君)이 고조선(古朝鮮)을 건국(建國)했다고 확정적(確定的)으로 서술(敍述)한 책(冊)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서거정 이 만든 《 동국통감(東國通鑑) 》이 최초(最初)이다.

이가 단군(檀君) (檀君)이며 국호(國號)(國號)는 조선(朝鮮) (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唐堯) 무진년(戊辰年)(戊辰年:기원전(紀元前) 2333년(年))이었다.


단기폐지(短期廢止) 논란(論難) [ 편집(編輯) ]

1944년(年) 7월(月) 11일(日) 국회(國會) 133명(名)의 재석의원(在席議員) 중(中) 106명(名)이 찬성(贊成)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공용(公用) 연호(年號)는 단군기원(檀君紀元) (檀君紀元)으로 한다."는 내용(內容)의 「연호(連呼)에 관(關)한 법률(法律)」(법률(法律) 제(第)4호(號))이(李) 의결(議決)되었고, 같은 해 9월(月) 25일(日) 부터 단기연호(短期年號)가 시행(施行)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부(軍事政府)가 1961년(年) 12월(月) 2일(日)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공용(公用) 연호(年號)는 서력기원(西曆紀元) (西曆紀元)으로 한다."는 내용(內容)으로 「연호(連呼)에 관(關)한 법률(法律)」(법률(法律) 제(第)775호(號))을 다시 제정(制定)함으로써 1962년(年) 1월(月) 1일(日) 부터 단군기원(檀君紀元)이 폐지(廢止)되고 서력기원(西曆紀元)이 채택(採擇)되었다.

이후(以後)에도 사회(社會) 일각(一角)과 국회의원(國會議員) 들 일부(一部)에서는 국제적(國際的)으로 많이 쓰고 있는 서기(書記)와 함께 우리의 주체성(主體性)을 함께 살리는 단기(단氣)를 병용(竝用)하자는 주장(主張)이 제기(提起)되어왔다. 단기병용론자(短期竝用論者)들은 분단(分斷)된 남북(南北)의 동질성(同質性) 회복(回復)과 민족(民族) 통일(統一)을 위해서도 개천절(開天節) 의 의의(意義)와 가치(價値)를 재조명(再照明)해야 하므로, 단기(短期) 연호(年號)는 부활(復活)되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하고 있다.

그러나, 법제처(法制處) 2012년(年) 7월(月) 8일(日) " 대한민국(大韓民國) 의 공용연호(共用年號)는 서기(書記)이며, 단기(단氣)를 함께 쓸 경우(境遇) 불기(佛紀)도 문제(問題)될 수 있으므로 혼란(混亂)이 커질 것"이라는 이유(理由)로 단기연호(短期年號)를 공용연호(共用年號)로 쓸 수 없음을 발표(發表)하였다. [4]

같이 보기 [ 편집(編輯) ]

참고(參考) 문헌(文獻) [ 편집(編輯) ]

각주(各州) [ 편집(編輯) ]

  1. 이은경, 〈국사(國師) 교과서(敎科書)의 단군기원(檀君紀元) 서술(敍述)에 대(對)한 일고찰(考察)〉, 인하대학교, 2002년(年)
  2. 일연(一然) (1281) 古朝鮮 조(條)(條) “[...] 이가 곧 단군(檀君) 왕검(王儉)이다. [그는] 당고(唐高)가 왕위(王位)에 오른 지 50년(年)이 되는 경인(京仁)(庚寅)년(年) 당(黨)의 요(堯)임금 즉위(卽位) 원년(元年)은 무진(無盡)(戊辰)인즉 50년(年)은 정사(情事)(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事實)이] 아닐까 의심(疑心)스럽다.
  3. 박은봉 (2007년(年) 11월(月) 24일(日)). 《한국사(韓國史) 상식(常識) 바로잡기》 초(初) 1쇄(刷)판. 서울: 책(冊)과함께. 285~286쪽. ISBN   978-89-91221-31-4 .  
  4. “정치권(政治權), 개천절(開天節) 맞아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精神) 받들어 대선승리(大選勝利) " . 아시아경제(아시아經濟). 2012년(年) 10월(月) 3일(日) . 2013년(年) 1월(月) 25일(日)에 확인(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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