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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金春洙)
(金春洙,
1922년(年)
11월(月) 25일(日)
~
2004년(年)
11월(月) 29일(日)
)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의
시인(是認)
이다. 본관(本貫)은
광산(鑛山)
이다.
21세기(世紀)
의 한국(韓國) 시단(詩壇)을 이끈 시인중(詩人中) 한 명(名)으로 평가(評價)받으며,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제(第)11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을 역임(歷任)했다.
1922년(年)
경상남도(慶尙南道)
통영(統營)
에서 태어났다.
1941년(年)
부터
1943년(年)
까지
니혼 대학교(大學校)
에서 공부(工夫)를 했다. 이 때에 그는 일본(日本) 제국(帝國)에게 대항(對抗)해야 한다는 주장(主張) 때문에 퇴학(退學)당하고 교도소(矯導所)에 7달동안 수감(收監)되었다. 석방(釋放)된 후(後) 귀국(歸國)한 김춘수는 고등학교(高等學校)와 중학교(中學校) 교사(敎師)로 일했다.
1946년(年)
에 시(時) <애가>를 발표(發表)하면서 공식적(公式的)으로 시(詩)를 발표(發表)하기 시작(始作)했고,
1965년(年)
에
경북대학교
학부(學府)에 가입(加入)했다.
1978년(年)
에는
영남대학교
문학부(文學部) 학장(學長)으로 지냈다.
광복(光復) 후(後) 종래(從來)의 서정적(抒情的)인 바탕 위에 주지적(主知的)인 시풍(詩風)을 이루는 데 힘썼다. 1948년(年) 대구(大邱)에서 발행(發行)되던 동인지(同人誌) <죽순(竹筍)(竹筍)>에 <온실(溫室)(溫室)> 외(外) 1편(篇)을 발표(發表)하여 문단(文壇)에 데뷔했다. 이어 첫 번째(番째) 시집(詩集) <구름과 장미(薔薇)>를 발간(發刊)하고 <산악(山岳)(山嶽)> <사(社)(蛇)> <기(基)(旗)> <모나리자에게> <꽃> 등(等)을 발표(發表)하여 시인(詩人)으로서의 기반(基盤)을 굳혔다. 그의 작품세계(作品世界)는 한마디로 사물(事物)(事物)의 사물성(事物性)(事物性)을 집요(執拗)하게 탐구(探究)하였다. 시(詩)에서의 언어(言語)의 특성(特性)을 다른 어떤 시인(詩人)보다 날카롭게 응시(凝視)하며 존재론적(存在論的) 세계(世界)를 이미지로 노래하였다. 시집(詩集)으로 <구름과 장미(薔薇)> <늪> <기(基)(旗)>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少女)의 죽음> <타령조(타령調) 기타> <처용(處容)(處容)> <남천> <비에 젖은 달> 등(等)이 있으며 시론집도(詩論集度) 다수(多數) 있다.
1958년(年)
한국시인협회상(賞)
,
1959년(年)
아시아자유문학상(自由文學賞)
을 수상(受賞)했다.
[1]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소속(所屬)으로
제(第)11대(代)
비례대표(比例代表)
국회의원(國會議員)
을 역임(歷任)했다. 이 시기(時期)를 두고 훗날(後날) 김춘수는 “한마디로 100% 타의(他意)에 의(依)한 것이었다”면서 “처량(凄凉)한 몰골로 외톨이가 되어,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姿勢)로 어쩔 줄 모르고 보낸 세월(歲月)”이었다고 회고(回顧)했다.
[2]
2004년(年)
11월(月) 29일(日)
, 향년(享年) 83세(歲)로 별세(別世)했다.
[2]
명예(名譽) 박사(博士) 학위(學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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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人間) 관계(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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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參考) 자료(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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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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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임기(任期) 중(中) 사망(死亡) ²사퇴(辭退) ³승계(承繼) 전(前) 사퇴(辭退) †승계(承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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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國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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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國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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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學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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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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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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