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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진
(
1972년(年)
6월(月) 24일(日)
~ )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의
배우(俳優)
이다.
1998년(年) 영화(映畫) 《
처녀(處女)들의 저녁식사(食事)
》로 데뷔한 그녀(그女)는
[1]
, 2011년(年) 이후(以後) 정치적(政治的) 활동(活動)도 활발(活潑)하게 하고 있다.
정치(政治) 활동(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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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大學生) 시절(時節)에는 PD계열(系列) 운동권(運動圈)이었지만 대학(大學) 졸업(卒業) 이후(以後) 신문(新聞)도 뉴스도 보지 않고 정치(政治)에 관심(關心)을 갖지 않았고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에서 투표(投票)를 했는지도 기억(記憶)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2]
대학교(大學校) 졸업(卒業) 이후(以後)
노무현(盧武鉉)
전(前) 대통령(大統領)의 자살(自殺) 이전(以前)에는 정치(政治) 활동(活動)을 하지 않았다. 많은 연예인(演藝人)들이 참여(參與)했던
2008년(年) 촛불시위(示威)
에도 참여(參與)하지 않았지만 2009년(年)
노무현(盧武鉉)
이 서거(逝去)하자 5월(月) 30일(日) 블로그에 '슬퍼하는 것으로 다시 뵐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題目)의 글을 올려 애도(哀悼)했다. 이후(以後) 2010년(年)에는 언론(言論) 인터뷰로 정치적(政治的) 활동(活動)을 하였고 2011년(年)에는 시위(示威)를 하며 본격적(本格的)으로 정치(政治) 활동(活動)을 했다. MBC 《100분(分) 토론(討論)》에 출연(出演)하여 이명박(李明博) 정부(政府)를 비판(批判)했고
[3]
이명박(李明博)의 등록금(登錄金) 반값(半값) 공약(公約)을 이행(履行)하라는 1인(人) 시위(示威)를 했으며,
[4]
대학교(大學校) 청소용역(淸掃用役) 직원(職員)들의 처우(處遇)를 개선(改善)하기 위해 광고(廣告)를 게재(揭載)하기도 했다.
[5]
2011년(年) 6월(月)에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整理解雇) 철회(撤回) 투쟁(鬪爭)
을 촉구(促求)하며 크레인 농성(籠城)에 들어갔던
김진숙
민노총 지도위원(指導委員)과 조합원(組合員)들을 지원(支援)하는 과정(過程)에서 경찰(警察)에 붙잡혔다가 1시간여(時間餘)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6]
2012년(年)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18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에서
문재인(文在寅)
후보(候補) 지지선언(支持宣言)을 하였고 찬조(贊助) 연설(演說)을 하였다.
관련(關聯) 사건(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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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年)
5월(月) 18일(日)
김여진은 자신(自身)의
트위터
에 "당신(當身)은, 일천구백팔십년(一千九百八十年), 오월(五月) 십팔일(十八日) 그날로부터, 단(單) 한순간(한瞬間)도 자유(自由)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당신(當身)은 학살자(虐殺者)입니다.
전두환(全斗煥)
씨(氏)"라는 글을 남겼고 화제(話題)가 되었다. 그리고 하루 뒤인
5월(月) 19일(日)
한나라당(한나라黨)
자문위원(諮問委員) 박용모는 자신(自身)의 트위터를 통하여 “김여진! 경제(經濟) 학살자(虐殺者) 김(金)아무개 전대통령(前大統領) 두사람에게는 무어라 말할래? 못 생겼으면 함부로 씨부렁거리지마라?”며 “나라 경제(經濟)를 죽이는 자는 나라 전체(全體)를 죽이는 학살자(虐殺者)가 아니겠니? 아가리 닥치거라 가시내야”라고 글을 남겼고, 이에 김여진은 “맞을지도..”라는 짧은 글을 남겼다.
[7]
같은 날 오후(午後) 박용모는 자신(自身)의 발언(發言)이 세간(世間)의 화제(話題)가 되자 자신(自身)의 트위터를 통하여 “개인적(個人的)으로 화(火)가 나서 막말을 좀 했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罪悚)하게 됐다”, “김여진 이외(以外)의 분들에 대(對)하여는 사과(謝過)드립니다”라고 남겼다.
[8]
연기(演技) 활동(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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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首相) 및 후보(候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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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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