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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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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1949년(年)에 찍힌 김두한 사진(寫眞)
출생(出生) 1918년(年) 6월(月) 23일(日) ( 1918-06-23 )
일본(日本) 제국령(帝國領) 조선(朝鮮) 경성부(京城府) 종로(鍾路)
사망(死亡) 1972년(年) 11월(月) 21일(日) ( 1972-11-21 ) (54세(歲))
대한민국(大韓民國)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성북구(城北區) 정릉동
성별(性別) 남성(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국적(國籍) 대한민국 대한민국(大韓民國)
거주지(居住地) 대한민국(大韓民國)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용산구(龍山區)
학력(學歷) 경성교동공립보통학교(京城校洞公立普通學校) 2학년(學年) 1학기(學期) 중퇴(中退) [1]
대한민국(大韓民國) 중학교(中學校) 입학자격(入學資格) 검정고시(檢定考試) 합격(合格)
경력(經歷) 6.25 전쟁(戰爭) 중(中) 영천(永川) 전투(戰鬪) 참전(參戰)
무소속(無所屬) 재선(再選) 국회의원(國會議員)
자유당(自由黨) 당무위원(黨務委員) 겸(兼) 상임위원(常任委員)
노농당(勞農黨) 당무위원(黨務委員) 겸(兼) 대표최고상무위원(代表最高常務委員)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상임고문(常任顧問) 겸(兼) 당무위원(黨務委員)
신민당(新民黨) 당무위원(黨務委員) 겸(兼) 전임행정위원(前任行政委員)
부모(父母) 김좌진 (부(簿))
김계월 (생모(生母))
오숙근 (적모(嫡母))
나혜국(慧局) (계모(繼母))
형제(兄弟) 김석출(이복(異腹) 누이동생(누이同生))
김철한(이복(異腹) 남동생(男동생))
김강석(이복(異腹) 누이동생(누이同生)) [2]
배우자(配偶者) 초배(初配): 이재희 (李載熙, 1924년(年) 출생(出生)~1987년(年) 사망(死亡), 1971년(年) 재결합(再結合))
계배(計杯): 김부미 (金富美, 1917년(年) 출생(出生)~1999년(年) 사망(死亡), 1962년(年) 이혼(離婚))
삼취(三聚): 박정인 (朴貞仁, 1933년(年) 출생(出生)~, 1966년(年) 이혼(離婚))
사취(詐取): 김순옥 (金順玉, 1945년(年) 출생(出生)~, 1971년(年) 이혼(離婚))
자녀(子女) 4남(男) 2녀(女)
(장녀(長女) 김을동(金乙東) , 차녀(次女) 김영채, 장남(長男) 김경민 ,
차남(次男) 김현성, 3남(男) 김주택, 4남(男) 김범상)
군복무(軍服務) 6.25 전쟁(戰爭) 당시(當時) 경남(慶南) 부산(釜山) 민간(民間) 종군(從軍)원
종교(宗敎) 불교(佛敎)
의원(議員) 선수(選手) 2
정당(正當) 무소속(無所屬)
웹사이트 김두한 - 대한민국(大韓民國)헌정회

김두한 ( 한국(韓國) 한자(漢字) : 金斗漢, 1918년(年) 6월(月) 23일(日) [3] ~ 1972년(年) 11월(月) 21일(日) )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백야(白夜) 김좌진 장군(將軍)의 서자(庶子) [4] [5] 출신(出身)이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말기(末期)의 건달(乾達) 무리를 거느렸던 조직폭력배(組織暴力輩) 출신(出身)으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재선(再選) 국회의원(國會議員)(제(第)3·6대(代) 의원(議員))을 지낸, 해방(解放) 및 광복(光復) 이후(以後)의 전직(前職) 정치인(政治人) 이었다.

본관(本館) 안동(安東) 이며 호(號) 는 의송(議送)(義松)·가송(歌頌)(嘉松). 별칭(別稱) 은 일본(日本)(一本)이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말(末) 18세(歲) 약관(約款)(1935년(年))으로 서울에서 유력(有力)한 조직폭력배(組織暴力輩)의 우두머리로 군림(君臨)하였으며, 1945년(年) 해방(解放) 후(後), 미군정기(美軍政期) 에서는 잠시(暫時) 지인(知人)들의 유린(蹂躪)(유혹)으로 인하여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산하(傘下)의 조선청년전위대(朝鮮靑年前衛隊) 대장(大將)으로 있었으나, 이내(以內) 탈퇴(脫退)하고 우익(右翼) 으로 전향(轉向)하여 반탁운동(反託運動) 등(等)을 비롯한 광란(狂亂)의 좌우(左右) 대립(對立)에서 반공(反共) 투쟁(鬪爭)과 정치(政治) 테러를 저질렀다. 한국(韓國) 전쟁(戰爭) 당시(當時)에는 사실상(事實上) 부산(釜山)으로 피난(避難)을 내려가 건달(乾達) 활동(活動)을 계속(繼續)하였다.

3대(代) 국회(國會) · 6대(代) 국회(國會) 등(等) 국회의원(國會議員) 을 지내면서 이승만(李承晩) 정권(政權) , 박정희(朴正熙) 정권(政權) 독재(獨裁) 를 비판(批判)하였다. 6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에 당선(當選) 직후(直後)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내란음모사건(內亂陰謀事件) 으로 옥고(獄苦)를 치렀고, 한국(韓國) 비료(肥料) 주식회사(株式會社)가 사카린을 밀수(密輸) 하자(瑕疵) 국회(國會) 에서 삼성(三星) 박정희(朴正熙) 정권(政權)을 비판(批判)하며 국무위원(國務委員) 정일권 국무총리(國務總理) 등(等)에게 오물(汚物)을 투척(投擲) 하였다.

경기도(京畿道) 수원(水原) 신민당(新民黨) 후보(候補)로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7대(代) 국회(國會) 의원(議員) 선거(選擧) 유세(遊說)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전깃불(電氣불) 관련(關聯) 발언(發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을 찬양(讚揚)했다는 혐의(嫌疑)로 반공법(反共法) 으로 옥고(獄苦)를 치렀다. 이후(以後)에는 박정희(朴正熙) 정권(政權)의 독재(獨裁) 를 비판(批判)했다. 1972년(年) 11월(月) 18일(日) 에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意識不明) 이 되었고 진단(診斷)받았으며 11월(月) 21일(日) 에 오랜 지병(持病)으로 인(因)해 향년(享年) 54세(歲)로 사망(死亡)하였다.

아무리 독재(獨裁)에 저항(抵抗)하며 투쟁(鬪爭)하는 정치(政治) 활동(活動)을 하여 많은 고초(苦楚)를 겪은 것은 객관적(客觀的)인 사실(事實)이나, 인간(人間) 김두한보다는 '장군(將軍)의 아들'이라는 부친(父親)의 후광(後光)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限界)가 있다. [6] 재차(再次) 아울러 또한, 《백야(白夜) 김좌진 장군(將軍)의 초배(初配) 본부(本部)인 오숙근 여사(女史)의 소생(所生)의 아들이 아닌 이유(理由)가 주(主)된 주요(主要) 빌미로써, 김좌진(金佐鎭) 장군(將軍)의 아들이 아니라는 친자(親子) 논란(論難)》이 있으며, [7] 자서전(自敍傳) 등(等)을 통한 일방적(一方的)인 주장(主張)으로 일부(一部) 내용(內容)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과 다르며 왜곡(歪曲), 미화(美化), 과장(誇張)된 부분(部分)이 다수(多數)라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인 평가(評價)로써, 《그토록 과장(誇張)된 내용(內容)의 역사적(歷史的)인 김두한(金斗漢)의 왜곡(歪曲)된 이미지가 도드라진다》는 촌평(寸評)의 범위(範圍)가 더 광범위(廣範圍)하다.

생애(生涯) 초기(初期) [ 편집(編輯) ]

출생(出生)과 유년(幼年) [ 편집(編輯) ]

김좌진(金佐鎭)의 피살(被殺) 이후(以後) 아들 김두한 등(等) 유가족(遺家族)이 유린당하며 풍전등화(風前燈火) 참상(慘狀)에 대(對)한 1932년(年) 12월(月) 23일(日) 자(者) 중앙일보(中央日報)

회고록(回顧錄) 등(等)을 통한 당사자(當事者)의 주장(主張)에 의(依)하면 김두한(金斗漢)은 김좌진 서자(庶子) 로 서울 종로(鍾路)에서 태어났다. [8] 7살 되던해에 외조모(外祖母)와 함께 강원도(江原道) 속초(束草)를 출발(出發)하여 블라디보스토크 를 거쳐서 북간도(北間島) 목단강역(牧丹江驛)에서 부친(父親) 김좌진 과 상봉(相逢)한 적이 있다고 한다. [9] 며칠후(後) 귀국(歸國)하였고 그후(後) 청산리(靑山裏) 전투(戰鬪) 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큰 승리(勝利)를 거두었다.

청산리(靑山裏) 전투(戰鬪)를 빌미로 외조모(外祖母)와 생모(生母)가 일본(日本) 경찰(警察)에 구속(拘束)되자 7살때 [10] 개성(個性)에 있는 외삼촌(外三寸)집으로 보내졌다. [11] 10살이 되던해에 [12] [13] 부친(父親) 김좌진(金佐鎭)이 암살당한후 외삼촌(外三寸)이 냉대(冷待)하기 시작(始作)하였고, 그래서 독립(獨立)하고자 가출(家出)하여 홀로 서울로 왔다. [14] 처음에는 거지들과 함께 수표교(水標橋) 아래에서 살았다. [15] 그러다가 13살 경(頃)부터 파고다 공원(公園) 근처(近處)에서 설렁탕(설렁湯)집을 운영(運營)하는 원영기라는 노인(老人)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生活)하게 되었다. [16] 형평운동(衡平運動) 을 했었던 원영기는 "왜놈(倭놈)의 공부(工夫)는 할 필요(必要)가 없다. 곧 우리나라가 독립(獨立)하게 되니 그때 공부(工夫)하라."고 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학교(學校)는 다니지 않고 운동(運動)에만 전념(專念)했다. [17] [18] [19]

청년(靑年) 시절(時節) [ 편집(編輯) ]

1944년(年) , 반(反)도의용정신대(挺身隊)를 이끌던 시절(時節), 앞쪽 맨 왼쪽이 김두한.

원영기가 죽은후 서울에서 깡패(깡牌)들을 때려눕히며 1935년(年) 나이 18세(歲)에 우미관 을 장악(掌握)하였다. [20] 또한 개인적(個人的)으로 1930년(年) 후반(後半) 배우(俳優) 김승호 , 동양극장 극단(劇團)에 소개(紹介)하고 곤경(困境)에 처(處)한 권투선수(拳鬪選手) 정복수 를 도와주었고 종각(鐘閣)의 술집에서 일본(日本) 헌병장교(憲兵將校)들을 때려눕혀 목숨의 위협(威脅)을 받았던 레슬링 선수(選手) 황병관 을 구(求)해주기도 했다. [21]

태평양(太平洋) 전쟁(戰爭) 이후(以後) 1942년(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로부터 김두한에게 강제(强制)로 징용(徵用) 이 요구(要求)되었는데, 이 때 그는 조선(朝鮮) 총독부(總督府) 와 협상(協商)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京城特別支援靑年團)(반(反)도의용정신대(挺身隊))이라는 청년단체(靑年團體)를 조직(組織)하였고 단장(團長)으로 재직(在職), 징용(徵用) 대체(代替) 근로활동(勤勞活動)을 하였다. 한편(한便), 1944년(年) 이재희 와 혼인(婚姻)하였다. [18]

해방(解放) 정국(政局) 활동(活動) [ 편집(編輯) ]

광복(光復) 직후(直後) [ 편집(編輯) ]

1945년(年) 해방(解放) 이후(以後) 김두한(金斗漢)은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등(等)에 참여(參與)하여 용산의 일본군(日本軍) 무기고(武器庫)를 무력(武力)으로 점령(占領)하여 활약(活躍)하였다고 하나 이 시기(時期) 김두한(金斗漢)의 활동(活動)에 대(對)해서는 확실히(確實히) 검증(檢證)되는 것은 없다. 하지만 곧 미군정기(美軍政期) 로 인(因)해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등(等) 단체(團體)들이 해체(解體)되자 김두한(金斗漢)은 죽마고우(竹馬故友)인 친구(親舊) 정진룡 의 부탁(付託)으로 함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산하(傘下) 조직(組織)인 조선청년전위대(朝鮮靑年前衛隊)에 가입(加入)하였다. 김두한(金斗漢)은 노변야화(路邊野話) 라디오 방송(放送)에서, 김일성도 자신(自身)을 눈여겨 보았으며, 인민군(人民軍) 남조선(南朝鮮) 사령관(司令官) ( 소장(所長) )으로 임명하겠다는 제의(提議)도 있었다고 회고(回顧)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김두한(金斗漢)은 조선청년전위대(朝鮮靑年前衛隊)를 탈퇴(脫退)하였는데 그의 전향(轉向) 원인(原因)은 지금(只今)도 명확(明確)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김두한 본인(本人)은 부친(父親)의 동지(同志)였던 이규갑 , 윤치성 , 유진산 , 염동진 , 박용직 이 부친(父親) 김좌진 의 죽음에 대(對)해 알게 되어 탈퇴(脫退)를 하였다고 밝혔는데 사실관계(事實關係)에 틀린 점(點)이 많아 현재(現在)의 역사학계(歷史學界)에서는 인정(認定)하지 않는다. 부친(父親)의 동료(同僚)였던 이범석 , 신익희 등(等) 우익(右翼) 인사(人士)들의 지속적(持續的)인 설득(說得)과 본인(本人)에게도 우익(右翼)에서 활동(活動)하는 것이 배경적(背景的)으로나 정치적(政治的)으로나 더 좋은 환경(環境)이라는 판단(判斷) 하(下)에 자발적(自發的)으로 전향(轉向)하였다는 설(說)이 우세(優勢)하며, 전향(轉向) 후(後) 염동진 이 조직한(組織限) 백의사(百意思) 에서 비공식(非公式)으로 활동(活動)하였다. [22] [23]

1946년(年) 김구(金九) , 이승만(李承晩) , 김규식 명예회장(名譽會長), 유진산 회장(會長), 그리고 김두한(金斗漢)을 감찰부장(監察部長) 겸(兼) 별동대(別動隊) 대장(大將)으로 참모총대장(參謀總大將).문영철등(等)을.조직하여(전국2만3천여명..부하.일정때부터만들어 진조직숫자(職數字).)대한민청(大韓民靑) 이 조직(組織)되었다. 김두한(金斗漢)은 대한민청(大韓民靑) 실질적(實質的) 지도자(指導者) 로서 반탁운동(反託運動) 등(等) 좌우대립(左右對立)에서 우익(右翼)의 선봉장(先鋒將) 역할(役割)을 하면서 산정호수 김일성(金日成) 별장습격(別莊襲擊), 박헌영 납치미수(拉致未遂), 국군준비대(國軍準備對) 습격(襲擊), 학병동맹(學兵同盟) 습격(襲擊), 전평(錢評) 본부습격(本部襲擊), 심영(沁營) · 신불출 습격(襲擊), 과거(過去) 친일사업가(親日事業家)들의 거금(巨金) 압수(押收), 9월(月) 총파업(總罷業) 등(等)에 활약(活躍)하였고, [24] 김원봉(金元鳳) 습격(襲擊), 좌우합작(左右合作) 방해(妨害) ( 여운형 협박(脅迫) 벼랑에서 낙하사건(落下事件), 김규식 협박(脅迫)) 등(等)에도 관여(關與)하였다고 뒷날 회고록(回顧錄)에서 밝혔다. 좌우합작(左右合作) 방해(妨害) 이후(以後) 경교장(京橋莊) 에서 김구(金九) 의 격려(激勵)와 충고(忠告) 이후(以後)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 계열(系列) 인물(人物)들과 대립(對立)이 없었다고 한다. [25] 남로당 총책(總責)이었던 박갑동 에 의(依)하면 미군정(美軍政) 경찰(警察) 에 잡히면 안심(安心)했고 별동대(別動隊)에 잡히면 죽는다며 공포(恐怖)의 대상(對象)이었다고 한다. 당시(當時) 별동대(別動隊)의 활동반경(活動半徑)은 북(北)으로는 연천군(漣川郡) , 남(南)으로는 화성(火星) , 수원(水原) , 용인(龍仁) 에 이르렀을 정도(程度)로 전(前) 경기도(京畿道)를 통틀었다고 한다.

체포(逮捕)와 석방(釋放) [ 편집(編輯) ]

김두한(金斗漢)은 대한민청(大韓民靑)의 실질적(實質的) 지도자(指導者)이자 우익(右翼)의 선봉장(先鋒將)으로서 활약(活躍)하였으며 청년단체(靑年團體) 자금(資金)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後날) 반민특위(反民特委) 의 체포대상(逮捕對象)이었던 박흥식 등(等) 친일파(親日派) 자본가(資本家)들 집에 습격(襲擊)하기도 했다고 하며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根據)로 서울 종로구(鍾路區) 삼청동의 자신(自身)의 집을 저당(低糖) 이승만(李承晩) 의 친필(親筆) 휘호(揮毫)를 보여주며 영수증(領收證) 을 썼다고 회고록(回顧錄)에서 밝혔다.

1947년(年) 대한민청(大韓民靑)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소속(所屬) 전위대장(前衛大將) 정진룡 을 살해(殺害)한 사건(事件)이 계기(契機)가 되어 미군정(美軍政) 의(依)해 포고령(布告令) 위반(違反) 및 살인죄(殺人罪)로 체포(逮捕)되었고 사형(死刑) 을 선고(宣告)받았다. 3심(審) 판관(判官)이 사퇴제출(辭退提出)하는 등(等) 재판(裁判) 과정(過程)에서도 좌우간(左右間)에 대립(對立)이 극심(極甚)하였고, 1948년(年) 3월(月) 21일(日) 김구(金九) 는 "근일(近日)에 김두한 군(君)의 사건(事件)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敎訓)이 많다. 김(金) 군(君)이 자기범행(自己犯行)에 대(對)해서 법적(法的) 제재(制裁)를 받는 것은 당연(當然)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犯行)이 애국적(愛國的) 동기(動機)에서 나왔다고 간주(看做)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偉大)한 애국자(愛國者) 김좌진(金佐鎭) 장군(將軍)의 영사(領事)(令嗣)라는 점(點)에서 보면, 그에 대(對)한 구명운동(救命運動)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果然)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26] 1948년(年) 3월(月) 24일(日) 지청천 , 이범석 등(等)이 존 하지 에게 진정(鎭靜)하는 등(等) 그의 구명운동(救命運動)을 벌였다. [27]

정치(政治) 활동(活動) [ 편집(編輯) ]

제(第)1공화국(共和國) [ 편집(編輯) ]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집행(執行)을 기다리는 중(中)이었던 김두한(金斗漢)은 1948년(年) 8월(月) 15일(日)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1공화국(共和國) 출범(出帆)으로 인해 사건(事件)이 미군정(美軍政)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 검찰(檢察) 로 이관(移管)되었고, 곧 석방(釋放)되었다. 그 후(後)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의 감찰국장(監察局長) 겸(兼) 건설국장(建設局長)을 역임(歷任)하였다. 이후(以後) 노동운동(勞動運動)에 투신(投身)하여 노동운동가(勞動運動家)로서도 활동(活動)했으며 우익(右翼) 활동(活動) 또한 계속(繼續)되었다. 이승만(李承晩) 정부(政府) 에 의(依)해 암살(暗殺) 대상(對象)의 표적(標的) 이 되기도 했다. 김구(金九) 의 암살(暗殺) 시기(時期) 이전(以前)인 1949년(年) 6월(月) 17일(日) 에는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 위반(違反) 혐의(嫌疑) 등(等)으로 투옥(投獄)되어 옥고(獄苦)를 치렀다. [28] [29]

한국(韓國) 전쟁(戰爭) [ 편집(編輯) ]

한국(韓國) 전쟁(戰爭) 이 발발(勃發)하자 김두한(金斗漢)은 과거(過去) 별동대(別動隊)의 대원(隊員)으로 추정(推定)되는 4명(名)에게 극적(劇的)으로 배를 구(求)해 한강(漢江)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29] [30] [31] 이후(以後) 인민군(人民軍) 과 전투(戰鬪)를 벌이며 [32] 계속(繼續) 남하(南下)하여 부산(釜山)에 도착(到着)하였는데, 그의 회고록(回顧錄)에는 그 당시(當時)에 부산(釜山)에 피난(避難)해 있던 고위층(高位層)이나 사회(社會) 유력인사(有力人士)들의 행태(行態)에 큰 실망(失望)을 느끼고 그들을 응징(膺懲)했다고 하는 부분(部分)이 보인다. 그후(後) 노동자(勞動者) 인권(人權) 증진(增進) 관련(關聯) 활동(活動)에도 관심(關心)을 보(步)였다고도 전(傳)해진다. 노변야화(路邊野話) 라디오 증언(證言)에 따르면 이승만(李承晩) 이 그에게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을 주겠다는 제의(提議)를 하였으나 본인(本人)이 거절(拒絶)했다고 한다. 또한 이승만(李承晩)이 학도병(學徒兵) 을 이끌고 낙동강(洛東江) 전투(戰鬪) 에 크게 활약(活躍)한 김두한(金斗漢)을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령관(司令官)(육군(陸軍) 준장(准將))으로 제의(提議)하고 임명(任命)해주겠다고 했으나 김두한 본인(本人)은 사관학교(士官學校) 출신(出身)도 아니고 군대(軍隊) 경험(經驗)이 없다고 해서 거절(拒絶)했다. 또한 전쟁(戰爭) 중(中)에 전선(戰線)에 젊은 군인(軍人)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신나는 노래를 틀고 남녀(男女)가 춤을 추는 카바레는 있을 수 없다며 모든 부산(釜山)의 카바레의 폭력배(暴力輩)들을 구타(毆打)하고 카바레를 폐업(廢業)을 했다.

정치활동(政治活動) [ 편집(編輯) ]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改憲) 파동(波動) 무렵의 이야기하고 있는 민관식 , 이철승 , 김두한
1956년(年) 7월(月) 27일(日) , (앞) 김두한, (뒤) 조병옥 비롯해 야당의원(野黨議員)들
이정재 사단(師團)의 국회(國會) 에 난입(亂入) 김두한(金斗漢) 의원(議員) 협박사건(脅迫事件)에 대(對)한 동아일보(東亞日報) 1956년(年) 2월(月) 16일(日) 자(者)
1954년(年) 서울 정동 배재학당(學堂)에서 열린 여야(與野) 국회의원(國會議員) 친선(親善) 야구경기(野球競技)를 마치고 선수(選手)들이 기념사진(記念寫眞), 왼쪽은 민관식 , 오른쪽 첫 번째(番째)는 김두한, 두 번째(番째)는 김영삼(金永三)

김두한(金斗漢)은 1954년(年) 5월(月) 20일(日) 제(第)3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에 종로구(鍾路區) 을구(乙區) 4선거(選擧)에서 무소속(無所屬) 으로 출마(出馬)하여 법조인(法曹人) 한근조 와의 근소(僅少)한 차이(差異)로 승리(勝利), 당선(當選)되었다. 그러나 자유당(自由黨) 에서 이승만(李承晩) 의 종신제(終身制)를 위한 무소속(無所屬) 의원(議員)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김두한(金斗漢)은 이승만(李承晩) 정부(政府) 를 비판(批判)한 혐의(嫌疑)로 선거법(選擧法) 위반(違反)과 정치권력(政治權力)으로 멋대로 행패(行悖)부리는 부하(負荷) 김관철 살해미수(殺害未遂)로 구속(拘束)되었는데, 자유당(自由黨) 입당(入黨) 조건(條件)으로 석방(釋放)되었다. 하지만 이승만(李承晩) , 이기붕 과는 정치노선(政治路線)을 달리 하였으며, 자유당(自由黨) 의원총회(議員總會)에서는 이승만(李承晩) 종신집권(終身執權) 추진(推進) 핵심인물(核心人物)에 한 명(名)이었던 장경근 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33]

그 후(後) 1954년(年) 7월(月) 16일(日) 에 판잣집철거(板子집撤去)에 관(關)한 청원(請願)에 참여(參與)하였다. [34] 이승만(李承晩) 3선(選) 개헌한(改憲韓) 때는 개헌한(改憲韓) 공고(公告) 서명(署名)을 거부(拒否)하였고 국회(國會) 에서 1954년(年) 11월(月) 27일(日) 비밀투표(祕密投票)를 한 결과(結果), 재적의원(在籍議員) 203명(名), 참석(參席) 의원(議員) 202명(名) 중(中), 찬성(贊成)이 135표(票), 반대(反對)가 60표(票), 기권(棄權)이 7표(票)로 1표(票) 차(差)로 부결(否決)을 선포(宣布)했으나, 자유당(自由黨)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改憲) 을 일으켰다. 이 사건(事件)에서 개헌(改憲) 반대(反對) 투표(投票)를 던진 의원(議員)들은 자유당(自由黨) 에서 제명조치(除名措置)되어 탈당(脫黨)당하였고, 이후(以後) 김두한(金斗漢)은 무소속(無所屬) 으로 활동(活動)하였다. [35]

1956년(年) 1월(月) 진보당추진위원회(進步黨推進委員會)에 조직부(組織部)로 참여(參與)하였다. 그러나 부흥주택대지(復興住宅垈地) 2중(重) 매매(賣買) 혐의(嫌疑)로 시경(時頃)에 내사(內査)받았고 진보당(進步黨)을 탈퇴(脫退)하였고, 곧 노농당(勞農黨)으로 옮겼다. [36] [37]

계속(繼續) 이승만(李承晩) 정부(政府) 에 대(對)해 비판(批判)하였고 그 과정(過程)에서 이정재 에게 국회(國會) 휴게실(休憩室)에서 권총(拳銃)으로 협박(脅迫)을 당(當)했으나 [38] 김두한(金斗漢)은 이정재 를 호통쳤다고 한다. [39] 이 사건(事件)으로 야당(野黨)은 테러사건(事件)을 조사(調査)하기 위해 조사위원회(調査委員會)를 결성(結成)하려고 했으나 당사자(當事者) 김두한(金斗漢)은 야당(野黨)의 결성(結成)을 반대(反對)하였고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고 주장(主張)했던 후문(後聞)이 전(傳)해진다.

1956년(年) 7월(月) 27일(日) 지방선거(地方選擧) 입후보(立候補) 방해(妨害)에 대(對)한 야당(野黨) 국회의원(國會議員)들이 거리시위(示威)를 한 7.27 데모사건(事件)에서 김종원 치안국장(治安局長)의 지휘하(指揮下)에 거리시위(示威)를 진압(鎭壓)하는 경찰(警察) 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40] [41]

시가행진(市街行進) 이후(以後) 김두한 등(等) 야당(野黨) 의원(議員) 15명(名)은 이기붕 의장(議長) 사직권고결의안(辭職勸告決議案)을 제출(提出)하였다. [42] 계속(繼續)해서 이승만(李承晩) 정부(政府) 를 비판(批判)하였고 [43] 그 일로 1956년(年) 10월(月) 5일(日) 이승만(李承晩) 을 민족반역자(民族反逆者)라고 비판(批判)한 국가원수모독죄(國家元首冒瀆罪)로 의원징계처분(議員懲戒處分)을 받았다. [44] 1956년(年) 10월(月) 13일(日) 배재학원(學院) 운동장(運動場)에서 열린 제(第)1차(次) 여야 민의원(民議員) 친선(親善) 야구대회(野球大會)에 참가(參加)하였다. [45]

1957년(年) 5월(月) 25일(日) 장충단(奬忠壇) 공원(公園) 에서 열린 야당(野黨) 시국강연회(時局講演會)에서 경호총책임자(警護總責任者)를 맡았다. 제(第)4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에서 제(第)3대(代) 국회(國會) 당시(當時) 한국불교(韓國佛敎)태고종 ,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대립(對立)에서 비구승(比丘僧)을 옹호(擁護)하여 종로구(鍾路區) 대처승(帶妻僧) 의 본부(本部)를 두고 있던 종교(宗敎) 인사(人士)들에게 탄압(彈壓)을 받았으며 게다가 자유당(自由黨)을 한 경력(經歷), 자잘한 폭행(暴行) 사건(事件)과 말실수(말失手) 등(等)으로 구민(區民)들의 신뢰(信賴)를 잃어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4대(代) 국회(國會) 종로구에서 노농당(勞農黨) 후보(候補),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5대(代) 국회(國會) 충남(忠南) 홍성(洪城)에서 무소속(無所屬), 6대(代) 국회(國會) 종로구에서 무소속(無所屬) 등(等) 연이어 낙선(落選)하였다.

이후(以後) 제(第)4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에서 조병옥 선거운동(選擧運動)에 참여(參與)하였고 전국고학생연맹(全國高學生聯盟) 등(等) 고학생(苦學生)들을 지원(支援)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하며 신기범 [46] , 이찬오 [47] [48] 등(等) 학생(學生)들과 교류(交流)하였다. 4.19혁명(革命) 이후(以後) 남산(南山) 이승만(李承晩) 동상(銅像)을 철거(撤去)하였다. [49]

제(第)2공화국(共和國) 시절(時節) [ 편집(編輯) ]

1960년(年) 8월(月) 장면(場面)이 차기(次期) 총리(總理)로 유력시(有力視)되자 그가 친일파(親日派) 였다는 소문(所聞)이 다시 확산(擴散)되었다. 8월(月) 19일(日) 국회(國會)에서 장면(場面)의 총리(總理) 지명동의안(指名同意案) 표결(票決)이 있기 전(前) 김두한(金斗漢)은 여의도(汝矣島) 국회의사당(國會議事堂) 에 나타나 장면(場面) 의 친일경력(親日經歷)을 문제(問題)삼았다. 김두한(金斗漢)은 장면(張勉)에게 역사적(歷史的)인 귀(貴)한 표(票)를 던져서는 안된다는 내용(內容)과 장면(場面)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적은 문건(文件)을 뿌리고 [50] [51] , 장면(場面)을 국무총리(國務總理)로 뽑는다면 의사당(議事堂)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으나 [50] :80 [51] 사전(事前) 제지(制止)당했고, 장면(場面)의 총리(總理) 인준안(認准案)은 무난히(無難히) 통과(通過)되었다. 총유효득표수(總有效得票數) 225표(票) 중(中), 찬성(贊成) 117, 반대(反對) 107, 기권(棄權) 1로 정족수(定足數)를 채우고 총리(總理)에 피선(被選)되었다. [52]

제(第)3공화국(共和國) [ 편집(編輯) ]

5·16 군사정변(軍士政變) 이후(以後) 1962년(年) 3월(月) 1일(日)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들에게 건국훈장(建國訓長) 을 수여식(授與式)이 있었는데 김두한(金斗漢)은 부친(父親) 김좌진 을 대신(代身)해 건국훈장(建國訓長) 대한민국장 을 수여(授與)받았다. [53] 일각(一角)에서는 그 역시(亦是)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라는 주장(主張)이 제기(提起)되기도 하였지만, 이후(以後)에 김두한(金斗漢)은 5·16 군사(軍士) 정변(政變)에 대(對)해 관망(觀望)하는 입장(立場)이었으나 군(軍)의 원대(原隊) 복귀(復歸)한다는 공약(公約)을 믿고 애국단을 조직(組織)하였으나 곧 해체(解體)되었다.

한독당(韓獨黨) 내란음모사건(內亂陰謀事件) [ 편집(編輯) ]

1965년(年) 6월(月) 22일(日) 한일협정(韓日協定) 이 체결(締結)되자 이에 반대(反對)한 민중당(民衆黨) 의원(議員) 8명(名)이 8월(月)에 의원직(議員職)을 자진사퇴(自進辭退)하였다. 민중당 서민호 의원(議員)이 사퇴(辭退)로 [54] 궐석(闕席)이 된 용산구(龍山區) 보궐선거(補闕選擧) 가 같은해 11월(月) 9일(日) 치루어졌는데 김두한(金斗漢)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후보(候補)로 출마(出馬)하여 당선(當選)되었다. [55] [56] 그러나 1966년(年) 1월(月) 8일(日) 에 김두한(金斗漢)은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 위반(違反) 및 내란음모(內亂陰謀) 혐의(嫌疑)로 구속(拘束)되었다. [57] [58]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는 김두한(金斗漢)을 비롯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黨員)들이 주도(主導)하여 5단계(段階) 혁명(革命) 계획(計劃)을 수립(樹立)하고 사제폭탄(司祭爆彈)을 만들어 교외(郊外)에서 실험(實驗)하는등 정부(政府) 전복(顚覆)을 기도(企圖)하였다고 발표(發表)하였다. [59] [60]

1월(月) 29일(日) 국회(國會) 에서 김두한(金斗漢) 의원(議員) 석방(釋放) 결의안(決議案)이 통과(通過)되어 [61] 19일(日)만인 1월(月) 31일(日) 석방(釋放)되었다. [62] 불구속(不拘束) 상태(狀態)에서 수사(搜査)와 재판(裁判)이 진행(進行)되어 4월(月) 28일(日) 에 5년(年)을 구형(求刑)받았으나 5월(月) 10일(日) 에 관련(關聯) 혐의자(嫌疑者) 전원(全員) 무죄(無罪)가 선고(宣告)되었다. 구속(拘束)되어 있던 19일간(日間) 김두한(金斗漢)은 건강(健康)이 악화(惡化)될 정도(程度)로 많은 고문(拷問)을 당(當)하였다. [63] 이후(以後) 김두한(金斗漢)은 용산(龍山) 에서 이재민(罹災民)이 발생(發生)했을 때 서울시장(市長)과 만나 봉천동에 터를 마련해서 이주(移住)시켰으며 판잣집(板子집) 철거(撤去) 문제(問題)와 갈등(葛藤)이 발생(發生)할 때마다 앞장서기도 했다고 한다.

국회(國會) 오물(汚物) 투척(投擲) 사건(事件) [ 편집(編輯) ]

1966년(年) 9월(月) 22일(日) 한국(韓國) 비료(肥料) 주식회사(株式會社)가 사카린 밀수(密輸) 한 사건(事件)으로 국회(國會)에서 대정부(對政府) 질문(質問) 중(中) 무소속(無所屬) 김두한(金斗漢)은 국회발언대(國會發言臺)에서 발언(發言)했는데 발언(發言) 내용(內容)은 아래와 같다.

이병철(李秉喆) 밀수(密輸) 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政府)가 범죄(犯罪)를 저지를 만한 환경(環境)을 조성(造成)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民族主義) 를 파괴(破壞)하고 재벌(財閥)과 유착(癒着)하는 부정(不正)한 역사(歷史)를 되풀이하는 현(現) 정권(政權)을 응징(膺懲)하고자 한다. 국민(國民)의 재산(財産)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合理化)시키는 당신(當身)들은 총리(總理)나 내각(內閣)이 아니고 범죄(犯罪) 피고인(被告人)에 불과(不過)하다. 그러니 우선(于先) 너희들이 밀수(密輸)한 사카린 맛을 봐라.
 
— 국회회의록(國會會議錄) 中 [64]

라고 비판(批判)하며 국무위원(國務委員) 등(等)에게 미리 준비(準備)한 똥물을 투척(投擲)하였다.

이후(以後) 이병철(李秉喆) 한국비료(韓國肥料) 사장(社長)(삼성(三星)그룹 회장(會長))은 사카린 밀수사건(密輸事件)과 관련(關聯) 한국비료(韓國肥料)를 국가(國家)에 헌납(獻納)하고 언론(言論) 및 학원(學院) 사업(事業)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宣言)하였다. 그 후(後) 이병철(李秉喆) 사장(社長)은 헌납(獻納) 교섭(交涉)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副總理)가 해임(解任)되자 개각(改閣) 1주일(週日) 만인 1967년(年) 10월(月) 11일(日) 한국비료(韓國肥料) 주식(株式)의 51%를 국가(國家)에 헌납(獻納)했다.

김두한(金斗漢)은 국회의원직(國會議員職)을 잃고 구속기소(拘束起訴)당하였고 정부(政府)는 김두한(金斗漢)을 강(强)하게 비판(批判)하였다. 하지만 김두한(金斗漢)의 편(便)을 드는 여론(輿論)이 절대다수(絶對多數)였으며 이 기세(氣勢)로 그는 제(第)2당(黨)인 신민당(新民黨)에도 영입(迎入)되었다.

말년(末年)과 사망(死亡) [ 편집(編輯) ]

총선(總選) 출마(出馬)와 구속(拘束) [ 편집(編輯) ]

국회(國會) 오물(汚物) 투척(投擲) 사건(事件) 으로 옥고(獄苦)를 치르다 병보석(病保釋)으로 석방(釋放)된 김두한(金斗漢)은 1967년(年) 6월(月) 8일(日)에 실시(實施)된 제(第)7대(代) 총선(總選) 경기도(京畿道) 수원(水原) 에서 신민당 후보(候補)로 출마(出馬)하였다. [65] 유세중 대한민국(大韓民國) 북한(北韓) 의 전깃불(電氣불) 비교(比較) 발언(發言)이 북한(北韓) 을 찬양(讚揚)했다는 혐의(嫌疑)로 반공법(反共法) 위반(違反)으로 구속(拘束)되었고 선거(選擧)에도 낙선(落選)하였다. 서대문(西大門) 형무소(刑務所) 교도관(矯導官) 서윤환은 " 반공법(反共法) 위반(違反)으로 구속(拘束)된 그날 저녁 김두한 씨(氏)가 비에 젖은 채 감방(監房)에 왔는데 손과 발에 수갑(手匣)이 채워져 있었다. 온몸이 피멍 투성이였다."고 하며 그 다음 날 남산(南山)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에 끌려가 심(甚)한 고문(拷問)을 당(當)했지만 돌아와서는 "서(徐) 동지(同志), 나 죽을 뻔했어"라며 웃을 뿐 불만(不滿)은 토로(吐露)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66] 이후(以後) 석방(釋放)된 김두한(金斗漢)은 박정희(朴正熙) 정권(政權)의 독재(獨裁) 를 지속적(持續的)으로 비판(批判)하였다. [64]

재야(在野) 활동(活動)과 사망(死亡) [ 편집(編輯) ]

말년(末年)에는 광산사업(鑛山事業)과 정릉관광사업등(觀光事業等)에 손을 댔으나 실패(失敗)하였다. [67] 아울러 노동운동(勞動運動)을 했으며 대학생(大學生)들과 교류(交流) 등(等) 재야인사(在野人士)로 활동(活動)하였다. 김두한(金斗漢)은 1972년(年) 11월(月) 18 일(日), 전화(電話)를 받고 외출(外出)했다가 청계천(淸溪川)3가(街) 센추럴호텔 객실(客室) 302호(號)에서 쓰러진채 발견(發見)되었다. [68] 급히(急히) 서대문(西大門) 고려병원(高麗病院) 응급실(應急室)로 옮겨졌다. 당시(當時) 진찰(診察)을 했던 의사(醫師)는 1년차(年次) 레지던트 손관수씨(氏)로, 환자(患者)의 상태(狀態)는 의식불명(意識不明)의 혼수상태(昏睡狀態)였으며 특별한 외상(外傷)은 없었고 오랜 지병(持病)이라는 진단(診斷)을 내렸다. [69] 중환자실(重患者室)에 입원(入院)은 했으나 상태(狀態)가 매우 안좋아 가망성(可望性)이 없다는 의료진(醫療陣)의 판단하(判斷下)에 보호자(保護者)와 상의후(相議後) 20일(日) 오전(午前)에 퇴원(退院)하였다. 김두한(金斗漢)은 11월(月) 21일(日) 오전(午前) 9시(時) 5분(分)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성북구(城北區) 정릉동 무허가(無許可) 자택(自宅)에서 향년(享年) 55세(歲)에 오랜 지병(持病)으로 세상(世上)을 떠났다. [70]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1972년(年) 11월(月) 21일(日)은 박정희(朴正熙) 정부(政府)가 유신헌법(維新憲法) 찬반(贊反) 여부(與否)를 묻는 국민투표(國民投票)를 실시(實施)하여 압도적(壓倒的)인 지지(支持)로 유신헌법(維新憲法)을 확정(確定)한 날이다.

장례(葬禮)와 언론보도(言論報道) [ 편집(編輯) ]

당시(當時) 대부분(大部分)의 언론(言論)에는 김두한(金斗漢)의 일대기(一代記)에 대(對)하여 '협객(俠客)' 등(等)의 표현(表現)을 써가며 긍정적(肯定的)인 논조(論調)로 쓰여진 기사(記事)들이 게재(揭載)되었다. 그리고 윤치영 , 민관식 등(等) 여야(與野)를 가리지 않고 많은 정치계(政治界) 인사(人士)들이 조문하였다. 슬하(膝下)에는 탤런트 김을동(金乙東) 등(等) 2남(男) 1녀(女)를 두었다. [71] 장례(葬禮)는 조시원 이 장례위원장(葬禮委員長)으로 광복장(光復張)으로 진행(進行)되었으며 [72] [73] [74] 경기도(京畿道) 양주시(楊州市) 장흥면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安葬)되었다. [75] 훗날(後날) 장녀(長女) 김을동(金乙東)을 비롯한 유족(遺族)들과 지인(知人)들 그리고 언론(言論)에 의(依)해 김두한(金斗漢)의 타살의혹(他殺疑惑)이 제기(提起) 되곤 하였다. [76]

친자(親子) 논란(論難) [ 편집(編輯) ]

김두한(金斗漢)이 김좌진(金佐鎭) 장군(將軍)의 아들인가에 대(對)한 논란(論難)이 있다. [77] [78] [79] [7] 이런 의혹(疑惑)을 공개(公開) 지면(紙面)을 통해 제기(提起)했던 사람은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이다. 김용옥은 1990년(年) 신동아에 기고(寄稿)한 글에서 [80] '김두한(金斗漢)은 김좌진(金佐鎭)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주장(主張)했다. 또한 김용옥은 그의 저서(著書) 《도올세설(檮杌世說)》을 통해 같은 주장(主張)을 하고 있다. 김용옥의 주장(主張)을 요약(要約)하면 '김두한(金斗漢)은 개성출신(開城出身)의 부모(父母)를 모르는 고아(孤兒)이고, [81] 당사자(當事者)의 일방적(一方的)인 주장(主張)만 존재(存在)한다' [82] 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主張)의 근거(根據)로는 《명인옥중기(中企)》 [83] 와 김두한(金斗漢)의 자서전(自敍傳) 내용등(內容等)을 제시(提示)하고 있다.

자서전(自敍傳)을 통해 김두한(金斗漢)이 밝힌 자신(自身)의 출생(出生)에 관(關)한 에피소드는 대략(大略) 이러하다. [84] 김좌진 장군(將軍)이 서울 근교(近郊) 야산(野山)에서 모임을 가진후 일본경찰(日本警察)에게 쫓기던중 사직동(社稷洞) 어느 주택(住宅)의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는데, [85] 그 집은 궁정(宮廷) 박상궁(朴尙宮)의 집이었고 그곳에 숨어지내는 동안 상궁(尙宮)의 딸(박계옥) [85] 과 정(情)을 나누었다고 한다. 김좌진(金佐鎭)이 그곳을 떠나면서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두한(頭汗), 딸이면 두옥(斗屋)으로 지으라" 했다고 한다. [86] [8] 논란(論難)이 생기자 일제시대(日帝時代)의 신문(新聞) 기사(記事)들이 발굴(發掘)되기는 했으나 [87] [88] 이 또한 증거(證據)가 부족(不足)한 일방적(一方的)인 기자(記者)의 주장(主張)뿐이다.

김두한(金斗漢)의 일생(一生)을 바탕으로 한 영화(映畫)와 드라마가 제작(製作), 방영(放映)되는등 [89] 대중적(大衆的)인 인지도(認知度)가 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그의 출생(出生)과 일제시대(日帝時代)의 행적(行跡)은 거의 대부분(大部分)이 검증(檢證)되지 않은데다 심층적(深層的)인 연구(硏究)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5년(年) 광복전(光復前) 그의 행적(行跡)의 상당(相當)한 부분(部分)은 1963년(年) 에 출간(出刊)한 자서전(自敍傳) <피로 물들인 건국(建國) 전야(前夜)>와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路邊野話) - 김두한 편(便)" [90] [91] 등(等) 당사자(當事者)의 증언(證言)이 대부분(大部分)이다. 김두한(金斗漢)의 자서전(自敍傳) <피로 물들인 건국(建國) 전야(前夜)>는 절판(絶版)되었다가 2002년(年)에 <김두한 자서전(自敍傳)>이라는 제목(題目)으로 재출판(再出版)되었다. 자서전(自敍傳) 상(床)에 일부(一部)가 역사적(歷史的)인 사건(事件)과 일치(一致)하지 않는 부분(部分)이 있어 내용(內容)에 대(對)한 신뢰성(信賴性)은 떨어지는 편(便)이다.

평가(評價) [ 편집(編輯) ]

긍정적(肯定的) 평가(評價) [ 편집(編輯) ]

  • 굿피플 선정(選定) 정치계(政治界) 101인(人) 중(中) 한 사람으로 선정(選定)되었다. [92] [93] [94]
  • 전(前) 통일부총리(統一副總理) 권오기 는 "조악(粗惡)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결코(決코) 야비(野卑)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인간(人間) 김두한(金斗漢)은 시원시원한 말투(말套)와 예의(禮儀)를 지닌 호감(好感)이 가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95]
  • 바른 사회(社會) 밝은 정치(政治) 시민연합(市民聯合)(상임대표(常任代表) 전득주 숭실대교수(敎授))에서 조사(調査)한 역대(歷代) 가장 훌륭한 국회의원(國會議員)으로서 신익희 , 조병옥 , 제정구 등(等)과 함께 선정(選定)되었다. [96]

부정적(否定的) 평가(評價) [ 편집(編輯) ]

  • 역사학자(歷史學者)인 한홍구 는 김두한(金斗漢)에 대(對)해 "우리 역사(歷史)에서 참으로 악역(惡役)을 많이 맡았지만, 분명히(分明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 자기(自己) 입장(立場)을 갖기 위해 열심히(熱心히) 살았지만, 그는 주변(周邊)의 모사(模寫)들에 의(依)해 이용(利用)되는 경우(境遇)가 많았고, 끝내 자신(自身)의 이름보다 장군(將軍)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후광(後光)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발(發)하는 존재(存在)가 되고 말았다."라고 평가(評價)했다. [97]

기타 [ 편집(編輯) ]

  • 와싱톤이라는 예명(藝名)을 쓰는 협객(俠客)이 독립운동(獨立運動) 혐의(嫌疑)로 일제(日帝) 경찰(警察)에게 모진 고문(拷問)을 당(當)해서 형무소(刑務所)에 쓰러져 빈사상태(瀕死狀態)가 되었다. 이 때 김두한(金斗漢)은 이 와싱톤을 살리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돈을 구(求)해와서 결국(結局) 와싱톤을 병원(病院)에 입원시켜 살려냈다. 실존인물(實存人物) 와싱톤은 성(性)이 '정씨(鄭氏)'인 것만 밝혀진 상태(狀態)이다. [ 출처(出處) 필요(必要) ]
  • 차지철 박정희(朴正熙) 정부(政府) 에서 4선(選) 의원(議員)을 지낸 국회의원(國會議員)이다. 차지철은 국회(國會)에서 자신(自身)의 발의(發議)에 대(對)해 부정적(否定的)인 반응(反應)을 보이는 국회의원(國會議員)을 구타(毆打)하는 매우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김두한(金斗漢)이 상의(上衣)를 탈의(脫衣)한 뒤 차지철 앞에 서서 네가 그렇게 힘이 쎄다며? 그럼 힘 없는 다른 의원(議員)들 말고 나와 맞붙는 건 어떠한가? 라고 말하자 차지철은 김두한에게 지레 겁(怯)을 먹고 바로 퇴근(退勤)했다. [98]

학력(學歷) [ 편집(編輯) ]

  • 서울 교동보통공립학교(普通公立學校) 1년(年) 중퇴(中退)
  • 중학교(中學校) 입학자격(入學資格) 검정고시(檢定考試) 합격(合格)
  • 고등학교(高等學校) 입학자격(入學資格) 검정고시(檢定考試) 합격(合格)
  • 경성제국대학 2년(年) 중퇴(中退)

약력(略歷) [ 편집(編輯) ]

  • 전국학생연맹고문(全國學生聯盟拷問)
  • 대한학도의용군참모장(大寒學徒義勇軍參謀長)
  • 대한노동조합연합회최고위원(大韓勞動組合聯合會最高委員)
  • 대한부흥건설단장(大寒復興建設團長)
  • 국민연합전선의장(國民聯合前線議長)
  • 불교양로원부원장(佛敎養老院副院長)
  • 대한권투총연맹이사(大寒拳鬪總聯盟理事)
  • 전국고학생총연맹위원장(全國高學生總聯盟委員長)

가족(家族) 관계(關係) [ 편집(編輯) ]

4명(名)의 부인(副因)에서 4남(男) 2녀(女)의 자녀(子女)를 뒀으며 호적상(戶籍上)으로는 본처(本妻) 이재희 의 자녀(子女)로 입적(入籍)되었다.

조카 송대한 송민국 송만세

김두한(金斗漢)이 등장(登場)한 작품(作品) [ 편집(編輯) ]

드라마 [ 편집(編輯) ]

영화(映畫) [ 편집(編輯) ]

소설(小說) [ 편집(編輯) ]

만화(漫畫) [ 편집(編輯) ]

  • 김창호 - 《풍운아(風雲兒) 김두한》 (1970년대(年代))
  • 김창호 - 《소년 김두한》 (1970년대(年代))
  • 하주형 - 《잇뽕전(展)》 (2009년(年)) [103]

음반(音盤) [ 편집(編輯) ]

같이 보기 [ 편집(編輯) ]

참고(參考) 자료(資料) [ 편집(編輯) ]

외부(外部) 링크 [ 편집(編輯) ]

역대(歷代) 선거(選擧) 결과(結果) [ 편집(編輯) ]

실시년도(實施年度) 선거(選擧) 대수(臺數) 직책(職責) 선거구(選擧區) 정당(正當) 득표수(得票數) 득표율(得票率) 순위(順位) 당락(當落) 비고(備考)
1954년(年) 총선(總選) 3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서울 종로구(鍾路區) 을 무소속(無所屬) 8,762표(票)
28.63%
1위(位) 초선(初選)
1958년(年) 총선(總選) 4대(大) 국회의원(國會議員) 서울 종로구(鍾路區) 을 노농당(勞農黨) 8,987표(票)
23.93%
2위(位) 낙선(落選)
1960년(年) 총선(總選) 5대(大) 국회의원(國會議員) 충남(忠南) 홍성군(洪城郡) 무소속(無所屬) 9,593표(票)
18.37%
2위(位) 낙선(落選)
1965년(年) 11.9 재보선(再補選) 6대(大) 국회의원(國會議員) 서울 용산구(龍山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12,048표(票)
28.4%
1위(位) 재선(再選)
1967년(年) 총선(總選) 7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경기(京畿) 수원시(水原市) 신민당(新民黨) 21,770표(票)
44.97%
2위(位) 낙선(落選)

각주(各州) [ 편집(編輯) ]

  1. 2학년(學年) 도중(途中) 다니지 못했다.
  2. MBC 뉴스 데스크 보도(報道) 자료(資料) 리스트
  3. [동양방송 DBS] 노변야화(路邊野話) -- 김두한 편(便).....음력(陰曆)으로 1918년(年) 5월(月) 15일(日)이라 하였으니 양력(陽曆)으로는 6월(月) 23일(日)이 된다.
  4.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김좌진 장군(將軍)의 서자(庶子)(측실(側室) 소생(蘇生) 아들)로 여겨지나 친자논란(親子論難)이 지속적(持續的)으로 제기(提起)되고 있다.
  5. 1990년(年)에 김용옥은 그의 저서(著書) 《도올세설(檮杌世說)》을 통하여 김좌진(金佐鎭) 장군(將軍)의 후손(後孫)이라는 증거(證據)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2020년(年)에는 유투브 방송인(放送人) 《서울의 소리》가 친자논란(親子論難)을 제기(提起)하였다.
  6. [한겨레 21] 황당(荒唐)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장군(將軍)의 아들, 그것은 김두한(金斗漢)을 상징(象徵)하는 말이다. 한 개인(個人)을 논(論)할 때 그 사람 개인(個人)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 사람을 상징(象徵)하는 수식어(修飾語)가 된다는 것은 그 인물(人物)이 끝내 아버지의 후광(後光)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그만큼 김두한 관련(關聯) 신화(神話)에서 김좌진 의 위치(位置)는 차라리 더더욱 절대적(絶對的)이다. 아버지의 후광(後光)이 없었다면 김두한(金斗漢)은 그저 차라리 구석진 뒷골목 깡패(깡牌)의 보스나 해방(解放) 뒤 백색(白色)테러의 행동대장(行動大將)의 하나로밖에는 기억(記憶)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7. [머니투데이] "내가 장군(將軍)의 손녀(孫女)가 아니라고?" 김을동(金乙東) 발끈
  8.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1>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42
  9.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1>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47
  10.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1>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19
  11.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1>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44
  12.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1>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19
  13. 청산리(靑山裏) 전투(戰鬪)는 1920년(年)에 있었고 김좌진(金佐鎭)은 양력(陽曆) 1930년(年) 1월(月) 24일(日)에 암살당했다. 따라서 7살(1920년(年))에 청산리(靑山裏) 전투(戰鬪)가 있었고 10살 되던해에 부친(父親)이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앞뒤가 않맞는 이야기 전개(展開)다.
  14.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1>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48
  15.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1>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49
  16.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1>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50
  17. 노변야화(路邊野話) (1969년(年) 10월(月) 19일(日) 방송(放送)). “제(第)6화(話) 소년시절(少年時節)과 우미관 뒷골목 이야기” . 동아방송 . 2016년(年) 3월(月) 4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18. “김을동(金乙東) 의원(議員) 홈페이지 나의가족 김두한” . 2012년(年) 2월(月) 5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19. 노변야화(路邊野話) (1969년(年) 10월(月) 17일(日)). “제(第)4화(話) 부친(父親) 김좌진장군(金佐鎭將軍)을 만주(滿洲)에서 만나고 온 얘기” . 동아방송 . 2018년(年) 3월(月) 12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 2018년(年) 3월(月) 11일(日)에 확인(確認)함 .  
  20.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映畵館 優美館 없어진다” . 동아일보(東亞日報) . 1982년(年) 11월(月).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21. “흔들리는 職業倫理 (3)「代價제일(第一)」에 무너지는 프로精神” . 경향신문(京鄕新聞) . 1989년(年) 10월(月) 18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22. 노변야화(路邊野話) (1969년(年) 11월(月) 11일(日) 방송(放送)). “제(第)25화(話) 해방후(解放後) 대한민청(大韓民靑) 모체(母體)에 대(對)해” . 동아방송 . 2016년(年) 4월(月) 10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23. 조한필 기자(記者) (2009년(年) 11월(月) 16일(日)). “(명문(名文)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李氏)家” . 조인스 .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24. “한강하구(漢江河口) 군사사(軍事史)3-한국전쟁기(韓國戰爭期)(종합(綜合))” . 통일(統一)뉴스 . 2006년(年) 11월(月) 3일(日). 2016년(年) 3월(月) 5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25. 노변야화(路邊野話) (1969년(年) 12월(月) 6일(日)). “제(第)43화(話) 김구선생(金九先生)과의 관계(關係)” . 동아방송 . 2016년(年) 4월(月) 10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26. 김구(金九) (1948년(年) 3월(月) 21일(日)). “조국(祖國) 흥망(興亡)의 관두(官斗)(關頭)에 임(臨)하여 남하(南下)한 이북(以北) 동포(同胞)에게 기(基)(奇)함(艦)”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白凡金九先生記念事業回). 2012년(年) 1월(月) 28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27. “金斗漢 감형(減刑)을 양(量) 李장군(將軍)이 陳情”. 자유신문(自由新聞) . 1948년(年) 3월(月) 24일(日).  
  28. “金斗漢 大韓靑年團 건설국장(建設局長),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 위반(違反) 등(等)으로 서울지검(地檢)에 송청(送廳)”. 한성일보(漢城日報). 1949년(年) 9월(月) 10일(日).  
  29. “제(第)67화(話) 백범(白凡) 김구선생(金九先生) 암살(暗殺)에 관계됨” . 동아방송 . 1949년(年) 9월(月) 10일(日). 2013년(年) 12월(月) 13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30. “6.25를 回想(회상(回想))한다 (5) 三統士(삼통사(三統社))는 지금(只今) 어디에…” . 경향신문(京鄕新聞) . 1980년(年) 6월(月) 27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31. “4) 맥아더 장군(將軍)의 일선(一線) 시찰(視察)과 중공군(中共軍) 소속(所屬) 북한(北韓) 의용군(義勇軍)-김웅수장군회고록(將軍回顧錄)” . 2016년(年) 4월(月) 10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32. “제(第)68화(話) 6.25도강(渡江) 피난(避難)”. 1970년(年) 1월(月) 12일(日) 방송(放送).  
  33. 정계야화(政界野花) (1970년(年) 12월(月) 11일(日) 방송(放送)). “김두한(金斗漢)의 장경근 구타(毆打) 사건(事件)·개헌열풍(改憲烈風)” . 동아방송 .  
  34. [제(第)3대국회(代國會) 제(第)19회(回) 제(第)25차(次) 국회본회의(國會本會議) 11. 판자집철거(板子집撤去)에관한청원]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회(國會) 회의록(會議錄)
  35. “그때 그일들 <255> 閔寬植(민관식) (3) 四捨五入改憲(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 運命(운명)의 날” . 동아일보(東亞日報) . 1976년(年) 11월(月) 3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36. 한국일보(韓國日報) 1956년(年) 4월(月) 21일(日)
  37. 서중석 (1999년(年) 12월(月) 15일(日)). “조봉암(曺奉巖)과 1950년대(年代)(상(上))(역비한국학연구총서(逆比韓國學硏究叢書) 15)”. 역사비평사. 199면(面).  
  38. 박재균 기자(記者) (2000년(年) 1월(月) 2일(日)). “(김영삼前대통령(大統領) 회고록(回顧錄) 탈고(脫稿))"58년(年) 부정총선(否定總選)때 유일(唯一)한 낙선(落選) " . 동아일보(東亞日報) .  
  39. “YS "야인(野人) 너무 보고 싶다" 김두한 장남(長男) 경민씨(警敏氏) 초대(招待) 비화(祕話) 공개(公開)”. 굿데이. 2003년(年) 4월(月) 22일(日).  
  40. 노변야화(路邊野話) (1970년(年) 1월(月) 20일(日)). “제(第)76화(話) 7.27 의원(議員) 데모” . 동아방송 . 2016년(年) 4월(月) 10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41. “그때 그일들 <161> 朴炳培(박병배) (5) 7.27民議員(민의원(民議員))데모事件(사건(事件)) 失敗(실패(失敗))한(韓) 강압책(强壓策)” . 동아일보(東亞日報) . 1976년(年) 7월(月) 3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42. 차윤경 기자(記者) (2005년(年) 12월(月) 14일(日)). “역대(歷代) 국회의장(國會議長) 불신임(不信任) 결의안(決議案) 사례(事例)…” . 세계일보(世界日報) .  
  43. 조성관 (2005년(年) 9월(月) 10일(日)). “실물(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歷史)”. 웅진(熊進)씽크하우스. 120면(面).  
  44. “歷代國會(역대국회(歷代國會)) 議員(의원(議員))징계(懲戒) 事例(사례(事例))” . 경향신문(京鄕新聞) . 1974년(年) 12월(月) 17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45. 조성관, 실물(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歷史) (웅진(熊進)씽크빅, 2006) 122페이지
  46. “김두한씨(氏) 사진(寫眞) 공개(公開)” . 연합뉴스(聯合뉴스) . 2003년(年) 4월(月) 30일(日).  
  47. 김유경 기자(記者) (2010년(年) 5월(月) 3일(日)). “고려대(高麗大), 5일(日) 개교(開校) 105주년(周年) 기념식(記念式)” . 아주경제(經濟).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48. “김두환씨(氏) 비서관출신(祕書官出身) 이찬오씨(氏) 기아차고문(起亞車顧問)으로 컴백” . 교통신문(交通新聞). 2003년(年) 10월(月) 14일(日). 2016년(年) 3월(月) 5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49. 정운현(鄭雲鉉) 기자(記者) (2000년(年) 11월(月) 7일(日)). “동상(銅像) 철거(撤去)와 역사적(歷史的) 평가(評價)” . 오마이뉴스 , 대한매일 .  
  50. 강준만(康俊晩), 《한국현대사산책(韓國現代史散策): 1960년편(年便) 1권(卷)》(인물(人物)과사상사, 2004) 80
  51. 『장면(場面) 총리(總理)의 비극(悲劇)』,『신동아』, 1984년(年) 2월호(月號)
  52. 『장면(場面) 총리(總理)의 비극(悲劇)』,『신동아』, 1984년(年) 2월호(月號) 54
  53. “43年前(연전(連戰))의感激(감격)되살아” . 경향신문(京鄕新聞) 저자(著者) =. 1962년(年) 3월(月) 1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54. 이만섭 <5.16과 10.26 박정희(朴正熙), 김재규 그리고 나> 나남(羅南) 2009.8.15 p107
  55. 서병구 <박정권(朴政權) 19년(年)> 한성출판사(漢城出版社) 1986.9.10 p40
  56. 경향신문(京鄕新聞) 1965년(年) 11월(月) 10일자(日子) 보도(報道)
  57. “金斗漢議員(김두한의원(金斗漢議員)) 구속(拘束)” . 경향신문(京鄕新聞) . 1966년(年) 1월(月) 10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58. “국가(國家) 보안법(保安法) 위반(違反), 내란음모(內亂陰謀) 혐의(嫌疑)의 김두한(金斗漢) 의원(議員) 구속(拘束)에 대(對)해 "김두한(金斗漢) 의원(議員) 석방(釋放)하라"는 현수막(懸垂幕)을 들고 가두행진(街頭行進)하는 시민(市民)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 . 2014년(年) 4월(月) 7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 2014년(年) 4월(月) 5일(日)에 확인(確認)함 .  
  59.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2>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206
  60. 경향신문(京鄕新聞) 1965년(年) 11월(月) 20일(日) 보도(報道)
  61. “金斗漢議員(김두한의원(金斗漢議員)) 釋放(석방(釋放))결의(決意)” . 경향신문(京鄕新聞) . 1966년(年) 1월(月) 29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62. “金斗漢議員(김두한의원(金斗漢議員))출감(出監)” . 동아일보(東亞日報) . 1966년(年) 1월(月) 31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63.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2>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207
  64. “백만불(百萬弗) 미스터리” . SBS . 2003년(年) 9월(月) 1일(日). 2013년(年) 12월(月) 14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65. 이만섭 <5.16과 10.26 박정희(朴正熙), 김재규 그리고 나> 나남(羅南) 2009.8.15 p111
  66. “김두한 '별' 성조기(星條旗) 보다 많은 51개(個)”. 굿데이. 2002년(年) 10월(月) 29일(日).  
  67.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2>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220
  68.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2>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223
  69.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2>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224
  70.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2>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225
  71. “연작(聯作) 에세이 어머니 탤런트 김을동(金乙東) 조강지처(糟糠之妻) 편(便)” . KBS . 2003년(年) 8월(月) 25일(日). 2008년(年) 12월(月) 28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72. “故(고(高)) 金斗漢(김두한(金斗漢))씨(氏) 葬禮式(장례식(葬禮式)) 내일(來日) 光復同志葬(광복동지장(光復同志長))으로” . 동아일보(東亞日報) . 1972년(年) 11월(月) 24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73. “金斗漢(김두한(金斗漢))씨(氏) 光復會葬(광복회장(光復會長)) 嚴修(엄수(嚴修))” . 경향신문(京鄕新聞) . 1972년(年) 11월(月) 25일(日).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74. “노제(路祭)때 어린이들이 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 . 2016년(年) 3월(月) 4일(日)에 원본(原本) 문서(文書) 에서 보존(保存)된 문서(文書) . 2010년(年) 10월(月) 10일(日)에 확인(確認)함 .  
  75. [네이버 지식백과(知識百科)] 김두한 [金斗漢] (한국민족문화대백과(韓國民族文化大百科), 한국학중앙연구원(韓國學中央硏究院))
  76.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2>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222
  77. [미디어스] 김을동(金乙東), 김좌진-김두한 친자(親子) 의혹(疑惑)글 삭제(削除) 요청(要請)
  78. [한겨레 신문(新聞)] 후보(候補)들 잇따라 인터넷서 ‘의혹(疑惑) 글’ 지우기
  79. [경향신문] 김을동(金乙東) “난 정말(正말) 장군(將軍)의 손녀(孫女)”…도올에 분통(憤痛)
  80. [신동아] 1990년(年) 8월호(月號), p370 ~ 390
  81. 김용옥(金容沃) <도올세설(檮杌世說)> 통나무 1990.6.20 p282
  82. 김용옥(金容沃) <도올세설(檮杌世說)> 통나무 1990.6.20 p280 ~ 283
  83. [주간한국] 장군(將軍) 아들 아니면, 족보(族譜)엔 왜 실렸나..... 김용옥 교수(敎授)가 김두한(金斗漢)이 김좌진(金佐鎭)의 아들이 아닐 수 있다고 의심(疑心)한 이유(理由)는 뭘까? 공교(工巧)롭게도 김두한(金斗漢)의 회고록(回顧錄)이 실린 책(冊) 명인옥중기(中企)(名人獄中記ㆍ1968년(年))가 실마리를 제공(提供)했다. "나는 사실상(事實上) 고아(孤兒)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일곱 살 때까지, 그러니까 교동 보통학교(普通學校) 2학년(學年)에 다니던 때까지는 그래도 외조모(外祖母)님과 어머님의 알뜰한 사랑 속에서 클 수 있었다. 그러나, 저 세계(世界) 전사상(戰史上) 희귀(稀貴)한 청산리(靑山裏) 대첩(大捷)이 있자 일경(一警)은 즉각(卽刻) 외조모(外祖母)님과 모친(母親)을 투옥(投獄)했다. 그래서 나는 말 그대로 천애(天涯) 고아(孤兒)가 됐던 것이다. 그리고 열살 되던 해에 불망의(不忘義) 독립군(獨立軍) 대장(大將)인 부친(父親)의 별세(別世)를 전(傳)해 듣고 울었다.(김두한)" 청산리(靑山裏) 전투(戰鬪)가 벌어진 1920년(年)에 김두한(金斗漢)의 나이는 만(滿) 2세(歲)였다. 우리 나이로는 세 살. 김좌진(金佐鎭) 장군(將軍)이 세상(世上)을 떠난 1930년(年)에는 만(滿) 12세(歲)였다. 김두한(金斗漢)이 기억(記憶)한 어린 시절(時節)은 역사(歷史)와 맞질 않는다. 회고록(回顧錄)에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主役) 김옥균(金玉均)을 할아버지라고 소개(紹介)하고, 김일성(金日成)이 해방(解放) 직후(直後) 남반부(南半部) 인민사령관(人民司令官)을 맡아달라고 부탁(付託)했다는 등(等) 이해(理解)할 수 없는 대목도 꽤 많다.
  84.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1>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38 ~ p42
  85.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自敍傳) 1>메트로신문사(新聞社) 2003.1.15 p40
  86. 김용옥(金容沃) <도올세설(檮杌世說)> 통나무 1990.6.20 p281
  87. “기미년(己未年)에 군정사 창립(創立), 군사운동(軍事運動)의 기초(基礎), 기미년(己未年)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한 동지(同志)와 악수(握手), 놀라운 소식(消息)을 전(傳)하던 운동(運動)의 기초(基礎), 長逝한 김좌진 일생(一生)(4)”. 중외일보(中外日報) . 1930년(年) 2월(月) 18일(日).  
  88. “난중생활(亂中生活) 1년여(年餘) 고국(故國)와서 또 유리(琉璃),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고부생명(古阜生命), 백치(白癡) 김좌진유족(遺族) 참경(慘景)”. 중외일보(中外日報) . 1932년(年) 12월(月) 23일(日).  
  89. 임권택 감독(監督)의 < 장군(將軍)의 아들 >, SBS 대하드라마(大河드라마) < 야인시대(野人時代) >
  90. [동아방송 DBS 1963 ~ 1980] 노변야화(路邊野話) -- 김두한 편(便)
  91. [FilmKo] 故 의송(議送) 김두한(金斗漢) 의원(議員) 육성(育成) 노변야화(路邊野話) 1
  92. (굿피플 101인(人)) 정치(政治)·경제(經濟)·연예(演藝)·체육(體育)·문화계(文化界) 굿데이 2003년(年) 9월(月) 17일(日)
  93. 굿피플 101인(人) 선정과정(選定過程) 2003년(年) 9월(月) 17일(日) 굿데이
  94. 굿피플 101인(人) 뽑고보니… 굿데이 2003년(年) 9월(月) 17일(日)
  95. “조선(朝鮮) 제일(第一)의 협객(俠客) 김두한이오” .   [ 깨진 링크 ( 과거(過去) 내용(內容) 찾기 )]
  96. 천영식 기자(記者) (2003년(年) 9월(月) 25일(日)). “16대(代) 의정활동(議政活動) 조순형,김근태 1위(位)” . 문화일보(文化日報) .  
  97. “황당(荒唐)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 한겨레21 . 2002년(年) 11월(月) 14일(日) 제(第)433호(號).  
  98. "김두한(金斗漢)은 정의파(正義派) 정치인(政治人)"
  99. 의견(意見)이 이상희와 이중규로 나누어져 있음
  100. 박정인이 야인시대(野人時代) 의 박인애라는 일부(一部) 언론(言論)에서 기사화(記事化)되기도 했으나 박씨(朴氏) 여성(女性)과 박정인은 별개(別個)의 인물(人物)이다.
  101. 주성철 기자(記者) (2008년(年) 8월(月) 27일(日)). “故허장강, 자기(自己)만의 색깔(色깔)로 기억(記憶)된 최초(最初)의 배우(俳優)” . 스타뉴스.  
  102. 조선일보(朝鮮日報) 에 연재(連載)됐다가 뒤에 "장군(將軍)의 아들"(8권(卷))로 제목(題目)이 바뀌어 발간(發刊)되었다.
  103. 지은식 기자(記者) (2009년(年) 11월(月) 6일(日)). “제(第)5회(回) 웹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최종선정작 발표(發表)” . 재경일보(財經一步).  
  104. 김지영 기자(記者) (2002년(年) 9월(月) 9일(日)). “타(他)카피의 '김두한(金斗漢)', 경쾌(輕快)한 리듬 인기(人氣)” . 한국일보(韓國日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