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조
(金東祚,
1918년(年)
8월(月) 14일(日)
~
2004년(年)
12월(月) 9일(日)
[1]
,
김해시(金海市)
)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의 정치인(政治人), 외교관(外交官), 공무원(公務員)이다. 본관(本貫)은
언양
이며, 주(週) 일본(日本) 공사(公使), 초대(初代) 주(駐) 일본(日本) 대사(大使)와
대한민국(大韓民國)
의 외무부(外務部) 장(長)·차관(次官)을 지냈고,
1965년(年)
체결(締結)된
한일회담(韓日會談)
의 수석대표(首席代表)였다.
브루스 커밍스
는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라는 그의 책(冊)에서, 김동조를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 때 일본(日本)에 협력(協力)한 한국인(韓國人)의 한 사람으로 지목(指目)하기도 했다. 체육인(體育人) 겸(兼) 정치인(政治人)
정몽준(鄭夢準)
과 허광수 회장(會長)의 장인(丈人)이며 영화배우(映畫俳優)
남궁원
가문(家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손정도(孫貞道)
,
손원일
가문(家門)과도 사돈간(査頓間)이다.
1918년(年) 8월(月) 14일(日)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군(金海郡)
좌부면(左部面) 부원리(不原理) (現
김해시(金海市)
부원동
)에서 출생(出生)하였다.
1943년(年)
일본(日本) 규슈제국대학(帝國大學) 법학과(法學科)를 졸업(卒業)하였다.
1951년(年)
외무부(外務部) 정무국장(政務局長)을 거쳐 외무부(外務部) 차관(次官)을 지냈다. 1960년(年) 2월(月), 한국(韓國) 정부(政府)는 동남아(東南亞) 각국(各國)과의 우호(友好) 증진(增進)을 위한 정책(政策)의 일환(一環)으로
중화민국(中華民國)
,
말레이시아
,
필리핀
,
타이
,
남베트남
등(等) 5개국(個國)에 김동조를 단장(團長)으로 하는 친선사절단(親善使節團)을 파견(派遣)하기로 결정(決定)했다. 친선사절단(親善使節團)은 단장(團長) 외(外)에
차균희
(車均禧) 부흥부 경제계획관(經濟計劃館),
최광수
외무부(外務部) 삼등서기관(三等書記官)으로 구성(構成)되었다.
[2]
1960년(年) 2월(月) 23일(日), 친선사절단(親善使節團)은
말레이시아와의 외교(外交) 관계(關係)
수립(樹立)을 발표(發表)하였다.
[3]
1965년(年) 6월(月), 재일거류민단(在日居留民團), 상공인연합회(商工人聯合會), 부인회(婦人會)는 공동명의(共同名義)로 김동원 대사(臺詞)를 경질(更迭)해달라고 국회(國會)에 진정서(陳情書)를 보냈다.
1965년(年) 10월(月) 26일(日), 외무부(外務部)에 대(對)한 국정감사(國政監査)에서 김동조는 그 후(後) 재일교포(在日僑胞)들이 그와 같은 진정서(陳情書)를 제출(提出)한 것은 교포(僑胞)와 재일교포(在日僑胞) 사이의 오해(誤解)에 기인(起因)했던 것이고, 그 후(後) 그 오해(誤解)는 풀렸다고 설명(說明)했다. 또 이동원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은 김대사(金大使)가 본부(本部) 훈령(訓令)에 충실(充實)치 아니한 점(點)은 없다고 답변(答辯)했다. 그러나, 같은 날 국회(國會) 외무분과위원회(外務分課委員會)는 위원장(委員長) 김동환(金東煥)을 비롯하여 공화당(共和黨)의
변종봉
,
민병기
,
박현숙
,
박준규(朴浚圭)
,
이만섭
의원(議員), 야당(野黨)의
나용균
,
유진산
,
강문봉
의원(議員)은 위 진정서(陳情書)를 검토(檢討)한 결과(結果), 김대사(金大使)가 (1) 교포보호(僑胞保護)에 소흘하고 (2) 본부(本部)의 훈령(訓令)에 충실(充實)치 못하며 (3)특정(特定) 재벌(財閥)을 편애(偏愛)하므로 정부(政府)가 김대사(金大使)를 될수록 조속(早速)한 시일(時日) 안에 해임(解任)할 것을 만장일치(滿場一致)로 정부(政府)에 건의(建議)하였다.
[4]
1965년(年) 12월(月) 18일(日) 상오(上午) 10시반(時半) 중앙청(中央廳) 제(第)1회의실(會議室)에서 열린, 대한민국(大韓民國)과 일본(日本) 양국(兩國)의 국교정상화(國交正常化)를 최종적(最終的)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基本條約) 및 협정(協定)에 의(依)한 비준서(批准書) 교환(交換)에 김동조는 한일회담수석대표(韓日會談首席代表)로서 참석(參席)했다.
[5]
1965년(年) 12월(月) 말(末), 한국(韓國) 정부(政府)가 주일(駐日) 대사(大使)에 김동조를 내정(內定)하자, 12월(月) 23일(日), 민중당의
김대중(金大中)
의원(議員)은 국회(國會) 본회의(本會議)에서 "국회(國會) 외무(外務)위가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그 해임(解任)을 건의(建議)했으며 재일교포단체(在日僑胞團體)에서도 소환(召喚)을 건의(建議)한 바 있는 김동조 대사(大使)를 재임명(再任命)할 수 있는가"를 추궁(追窮)했다.
[6]
[7]
그러나, 12월(月) 24일(日) 한국정부(韓國政府)는 일본정부(日本政府)에 대(對)해 정식(正式)으로 김대사(金大使)에 대(對)한 아그레망을 요청(要請)했다.
[8]
1966년(年) 1월(月) 14일(日), 주한(駐韓) 초대(初代) 대사(大使) 김동조는 일본(日本) 일왕(日王)에 신임장(信任狀)을 제정(制定)하였다.
[9]
1965년(年)~1967년(年) 주(週) 일본(日本) 대사(大使)를 지냈다.
1967년(年) 9월(月) 16일(日),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는 김동조를 주미(駐美) 대사(大使)에 임명하여,
[10]
김동조는 1967년(年) 11월(月) 9일(日), 백악관(白堊館)에서 존슨 대통령(大統領)에게 신임장(信任狀)을 제정(制定)하였다.
[11]
1967년(年)
부터
1973년(年)
까지 주(週) 미국(美國) 대사(大使),
1973년(年)
부터
1975년(年)
까지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 석유개발공사장(石油開發公社腸)을 역임(歷任)하고
1981년(年)
변호사(辯護士)를 개업(開業)하였다.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으로서 김동조는 1975년(年) 3월(月) 초(初),
말레이시아
를 방문(訪問)하여
압둘 라자크 후세인
총리(總理)와 아마드 리(리)라우덴 외무장관(外務長官)을 만났다.
[12]
2004년(年)
12월(月) 9일(日)
,
숙환(宿患)
으로 향년(享年) 87세(歲)로 별세(別世)했다.
브루스 커밍스
는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라는 그의 책(冊)에서, 김동조를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 때 일본(日本)에 협력(協力)한 한국인(韓國人)의 사례(事例)로 기술(記述)하였다.
[13]
일본(日本) 후생성(厚生省)
보험국(保險局)과
일본(日本) 내무성(內務省)
산하(傘下)
교토부
부청(府廳) 내무국(內務局) 지방(脂肪)과 및 경찰국(警察局)에 근무(勤務)한 경력(經歷)으로 인해,
2008년(年)
민족문제연구소(民族問題硏究所)
가
친일인명사전
에 수록(收錄)하기 위해 정리(整理)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收錄豫定者) 명단(名單)
에 포함(包含)되었다.
가족(家族) 관계(關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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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參考) 자료(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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