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櫜鞬)
(?建,
1938년(年)
1월(月) 2일(日)
~ )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의
정치인(政治人)
이다. 제(第)30대(代),35대(代)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재임(再任)하였다.
출생(出生)과 가계(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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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櫜鞬)은 1938년(年) 1월(月) 2일(日),
서울
에서 아버지
고형곤
과 어머니 장정자 사이에서 3남(男) 2녀(女) 중(中) 3남(男)으로 태어났다. 본적지(本籍地)는
전라북도(全羅北道)
군산(群山)
이며, 본관(本貫)은
제주(濟州)
이다. 아버지
고형곤
은 학술원(學術院) 회원(會員)을 역임(歷任)한 철학자(哲學者)로
이승만(李承晩) 정권(政權)
과
박정희(朴正熙) 정권(政權)
당시(當時) 야당(野黨) 정치인(政治人)으로 활동(活動)한 탓에 내사(內査)와 탄압(彈壓)을 받기도 했다. 큰형(큰兄) 고석윤은 행시(行試)와 사시(司試)에 모두 합격(合格)했고 이후(以後) 상공부(商工部) 상역국장(象譯局長)을 지내다 야당(野黨) 정치인(政治人)으로 활동(活動)하던 아버지가 검찰(檢察)의 내사(內査)를 받자 공직(公職)을 사퇴(辭退)한 후(後) 변호사(辯護士)로 활동(活動)하였다. 작은 형(型) 고경윤은 일찍 사망(死亡)했다. 학창(學窓) 시절(時節) 서울에서 거주(居住)하였으며
경기고등학교
를 졸업(卒業)하고
서울대학교(서울大學校)
경제학과(經濟學科)에 진학(進學)하였다.
공무원(公務員) 활동(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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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年)
서울대학교(서울大學校)
총학생회장(總學生會長)을 지냈으며, 졸업(卒業) 후(後) 1961년(年) 제(第)13회(回)
고등고시(高等考試) 행정(行政)과
에 합격(合格)하였다. 고시(考試)에 합격(合格)한 아들에게 아버지
고형곤
은 공무원(公務院)으로 지켜야 할 3계명(誡命)을 줬다. "줄서지 마라, 돈받지 마라, 술 잘 먹는다는 소문(所聞)을 내지 마라."이다.
[2]
후일(後日) 고건(櫜鞬)은
경향신문(京鄕新聞)
과의 인터뷰에서 "아버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努力)했다. 그러나 술은 어쩔 수 없었다."고 회상(回想)했다.
[2]
지방행정사무관(地方行政事務官)에 임용(任用)된 뒤 1962년(年) 내무부(內務部) 수습사무관(收拾事務官), 이후(以後) 여러 보직(補職)을 거쳐 1965년(年) 내무부(內務部) 행정(行政)과 기획계장(企劃係長), 1968년(年) 서기관(書記官)으로 승진(昇進),
전라북도청(全羅北道靑)
식산국장(殖産局長)과 내무국장(內務局長)을 거쳐, 1971년(年)부터 1973년(年)까지
내무부(內務部)
지방국(地方局) 지역개발담당관(地域開發擔當官), 새마을담당관(擔當官) 등(等)을 지냈다. 행정관리관(行政管理官)으로 승진(昇進), 1973년(年)
강원도(江原道)
부지사(副知事), 내무부(內務部) 지방국장(地方局長), 1975년(年)
전남지사(全南支社)
를 거쳐 1979년(年) 대통령(大統領) 정무제(政務第)2수석비서관(首席祕書官), 정무수석비서관(政務首席祕書官)을 지냈다.
1980년(年) 국토개발연구원(國土開發硏究院) 고문(顧問)에 선임(選任)되었으나, 1980년(年) 5월(月) 17일(日) 신군부(新軍部)가
비상계엄(非常戒嚴) 확대조치(擴大措置)
를 내리자 5.17을 군정(軍政)으로 간주(看做)하고, 군정하(軍政下)에서 일하는 것이 부적절(不適切)하다고 생각해 사표(辭表)를 냈다.
[3]
정치(政治) 활동(活動)과 제(第)30대(代) 국무총리(國務總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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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年) 9월(月)
전두환(全斗煥)
정권(政權)이 들어선 후(後) 고건(櫜鞬)은 교통부 장관(長官)과 이듬해 농수산부(農水産部) 장관(長官)을 지내고,
미국(美國)
으로 유학(留學), 1983년(年) 미국(美國)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客員硏究員)으로 있다가 이듬해 1984년(年) 미국(美國) M.I.T. 국제문제연구소(國際問題硏究所) 객원교수(客員敎授)로 임명(任命)되었으나 곧 귀국(歸國)한다. 1985년(年)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소속(所屬) 국회의원(國會議員)으로 당선(當選)됐으며, 민정당(民政黨) 지방자치제특별위원회(地方自治制特別委員會) 위원장(委員長), 1987년(年)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전북도(全北道) 지부장(支部長), 내무부(內務部) 장관(長官)을 지냈다.
내무부(內務部) 장관(長官)에서 하야(下野)한 뒤 서울 종로(鍾路)에 사무실(事務室)을 하나 열고 칩거(蟄居)하던 중(中) 1988년(年) 민정당(民政黨) 군산(群山)지구당 위원장(委員長), 민정당(民政黨) 전라북도(全羅北道) 지부장(支部長)에 임명(任命)되고, 1988년(年)부터 1990년(年)까지
서울시(서울市)
관선(官選)
시장(市場)
을 지내고 뒤이어 1991년(年)부터 공동체의식개혁국민협의회(共同體意識改革國民協議會) 공동대표(共同代表)와
명지대학교
총장(總長)
직(職)에 있다가 1995년(年) 한국(韓國)그린크로스 공동의장(共同議長), 1996년(年)부터 1997년(年)까지 환경운동연합(環境運動聯合) 공동대표(共同代表)를 거쳐,
문민정부(文民政府)
의 마지막
국무총리(國務總理)
를 지냈다. 1998년(年) 3월(月) 3일(日) 퇴임(退任) 다음날 대통령(大統領) 취임일(就任日) 각료제청권(閣僚提請權)을 재청(再請)하고 물러나는 진기록(眞記錄)을 세웠다. 이는 김종필 총리(總理) 서리(署理)가 인준(認准)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月)
새정치국민회의
공천(公薦)으로
서울시장(市長)
선거(選擧)에 당선(當選)되어 4년간(年間) 시정(施政)을 이끌었다. 1998년(年) 4월(月) 그는
명지대학교
석좌교수(夕座敎授)에 특별(特別) 임용(任用)되었다.
제(第)35대(代) 국무총리(國務總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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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櫜鞬)은 2001년(年) 한국상하수도협회(韓國上下水道協會) 초대회장(初代會長), 2002년(年) 국제투명성기구(國際透明性機構) 대한민국지부(大韓民國支部) 회장(會長)에 선출(選出)되었다.
2003년(年) 다시 입각제의(入閣提議)를 받고 입각(立脚), 고건(櫜鞬)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의 참여정부(參與政府) 첫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임명(任命)되어 직무(職務)를 수행(遂行)하던 중(中) 2004년(年) 3월(月) 12일(日)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회(國會)가 193대(代) 2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 탄핵소추(彈劾訴追)
를 의결(議決)하여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의 직무(職務)가 정지(停止)되면서 헌법(憲法)에 의거(依據)하여
대통령(大統領)
의 권한(權限)을 대행(代行)했다.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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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高件)이 대통령(大統領)의 권한(權限)을 대행(代行)하게 되자 외신(外信), 특히(特히) 미국계(美國系) 외신(外信)은 특별한 기대(期待)와 관심(關心)을 보여왔다.
미국(美國)
AP통신(通信)은 12일(日)(현지시간(現地時間)) 고(高) 총리(總理)가 과거(過去) 군사정권(軍事政權)과 김영삼, 김대중 정부(政府)에서도 활동(活動)했던 인물(人物)이라면서 보수(保守)와 진보(進步) 성향(性向)의 정권(政權) 모두로부터 신뢰(信賴)를 받아왔다고 보도(報道)했다.
[4]
통신(通信)은 한국(韓國)에서 국무총리(國務總理)는 통상(通商) 의전적(儀典的)인 역할(役割)만을 맡아왔지만 고총리(高總理)가 정치적(政治的) 격변기(激變期)를 맞아 자신(自身)의 경력(經歷)에서 가장 큰 고비에 직면(直面)했다면서 탄핵안(彈劾案)을 주도(主導)한 야당(野黨)조차도 "고총리(高總理)가 있기 때문에 국정(國政) 운영(運營)이 안정적(安定的)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强調)하고 있다고 보도(報道)했다.
[4]
뉴욕타임스(NYT)는 고(高) 총리(總理)가 지난 97~98년(年) 외환위기(外換危機) 당시(當時) 총리(總理)를 지냈던 경험(經驗)을 살려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가 탄핵심판(彈劾審判) 결정(決定)을 내리기까지 임시(臨時) 수반(首班)으로서의 역할(役割)을 해낼 것이라면서 정치(政治) 분석가(分析家)들은 고총리(高總理)의 풍부(豐富)한 행정(行政) 경험(經驗), 격동(激動)의 시기(時期)에 안정적(安定的)인 스타일의 리더쉽을 발휘(發揮)해온 점(點)을 평가(評價)하고 있다
[4]
고 발표(發表)했다. 영국(英國) BBC는 고(高) 총리(總理)를 한국(韓國)의 안정적(安定的)인 리더(South Korea"s "steady" leader)라는 제하(題下)의 기사(記事)에서 비교적(比較的) 자세히(仔細히) 논평(論評)을 실었다.
요지(要旨)는 세 번(番)의 장관(長官), 두 번(番)의 서울 시장(市長)에 이어 국무총리(國務總理)도 두 번째(番째)로 역임(歷任)하는 등(等)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면서 정국(政局)을 안정시키고 원활히(圓滑히) 돌아가도록 하는 역할(役割)을 잘 해 온 인물(人物)이었다는 것.
BBC
역시(亦是) 고(高) 총리(總理)를 "미스터 안정(安定)(Mr.stability)" "행정(行政)의 달인(達人)(Master Administrator)"으로 지칭(指稱)했다.
[4]
BBC는 고(高) 총리(總理)가 핵심(核心) 요직(要職)에 있을 때마다 나라를 뒤흔들 만한 대형(大型) 사건(事件)이 많았다면서 그가 특히(特히) 보수파(保守派)들에게 어필하면서 노대통령(盧大統領)을 잘 보좌(補佐)해 왔다고 평가(評價)했다. BBC는 대미관계(對美關係)에 있어 비굴(卑屈)한 아부(阿附)는 하지 않겠다며 대선(大選) 당시(當時)부터 마찰(摩擦)을 빚어왔던 노대통령(盧大統領)과 달리 고(高) 총리(總理)는 미국(美國)과의 관계(關係)를 유지(維持)하는 데 있어 신중한 태도(態度)를 보여 왔다는 점(點)을 강조(强調)했다.
[4]
미국(美國) 언론(言論)의 관심(關心) 이후(以後) 외신(外信)들의 특별한 관심(關心) 속에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에 취임(就任)했다.
고건(櫜鞬)은 2개월(個月) 동안 이라크 파병문제(派兵問題)나 경제문제(經濟問題), 특히(特히)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17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의 공정한 관리(管理)라는 역할(役割)을 무리(無理) 없이 수행(遂行)했다는 평(評)을 받는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이 직무(職務)에 복귀(復歸)한 후(後) 자동(自動)으로 대통령(大統領)의 권한대행(權限代行)을 종료(終了)하고
5월(月) 24일(日)
국무총리직(國務總理職)
에서 물러났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과 대립(對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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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의 대통령(大統領) 탄핵(彈劾) 기간(期間) 중(中) 고건(櫜鞬)은 민심(民心)과 여의도(汝矣島) 국회(國會)의 분노(憤怒)를 수습(收拾)하는 등(等) 무난(無難)한 수습(收拾) 노력(努力)을 보였다는 평가(評價)가 있다. 그러나
대통령(大統領)
직(職)에 복귀(復歸)한
노무현(盧武鉉)
은 그를 총리(總理)로 기용(起用)한 것은 인사실패(人事失敗)라고 비판(批判)하여 설전(舌戰)을 벌였다.
2006년(年) 12월(月) 15일(日) 광주(光州) 전남방문(全南訪問)에서 그는 "정부(政府)가 할 일은 안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서 남의 탓만 하고 있다"든가 "임기(任期)를 못 채울 수도 있다는 무책임(無責任)한 충격(衝擊) 발언(發言)으로 국민(國民)을 불안(不安)하게 만들고 있다"며 대통령(大統領)과 참여정부(參與政府)를 비판(批判)했다.
[5]
노무현(盧武鉉)
은 12월(月) 21일(日) 민주(民主)평통 상임위원회(常任委員會)
[6]
에서 고(高) 전(前) 총리(總理) 기용(起用)에 대(對)해 "중간(中間)에 선 사람이 양쪽(兩쪽)을 끌어 당기질 못하고 스스로 고립(孤立)되는 그런 결과(結果)가 되기도 했다"며 " 하여튼(何如튼) 실패(失敗)한 인사(人士)다. 결과적(結果的)으로 실패(失敗)해 버린 인사(人士)다"라고 말했다.
[5]
이어 "오히려 나와 정부(政府)에 참여(參與)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結果的)으로 실패(失敗)한 인사(人事)였다
[7]
" 고 하여 노무현은 고건(高建)의 기용(起用)을 인사(人事) 실패(失敗)라고 규정(規定)했다.
고건(櫜鞬) 측(側)에서는 '평가(評價)는 국민(國民)의 몫'이라고 즉각(卽刻) 반박(反駁)했다.
[5]
고건(高建)의 한 측근(側近)은 그 날 "(그가) 사상(史上) 초유(初有)의 탄핵(彈劾) 사태(事態)를 맞아 대통령(大統領) 권한대행(權限代行) 국무총리(國務總理)로서 위기(危機)를 원만(圓滿)하게 수습(收拾)한 고(高) 전총리(前總理)에 대(對)한 평가(評價)는 국민(國民)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5]
[7]
인사실패(人事失敗) 발언(發言)이 일파만파(一波萬波)로 커지자 고건(櫜鞬)은
12월(月) 22일(日)
언론(言論)에 성명(聲明)을 발표(發表)했다 22일(日)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의 발언(發言)은 한마디로 자가당착(自家撞着)이며 자기부정(自己否定)"이라며 자신(自身)의 총리(總理) 기용(起用)을 `인사(人事) 실패(失敗)'로 규정(規定)한 노(盧) 대통령(大統領)의 전날(前날) 발언(發言)을 정면(正面) 비판(批判)했다.
[6]
이어 그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
등(等)의 고립(孤立)에 대(對)해 "따돌림 당(當)한 것은 오만(傲慢)과 독선(獨善), 무능력(無能力)탓
[6]
[8]
"이라고 정면(正面) 반박(反駁)했다.
고건(櫜鞬)은 또 "노(盧) 대통령(大統領)과 참여정부(參與政府)가 국민(國民)으로부터 따돌림을 당(當)했다면 상생(相生)과 협력(協力)의 정치(政治)를 외면(外面)하고, 오만(傲慢)과 독선(獨善)에 빠져 국정(國政)을 전단(傳單)(專斷)한(韓) 당연(當然)한 결과(結果)
[6]
[9]
[8]
[10]
"라며 반박(反駁)했다.
덧붙여 "노(盧) 대통령(大統領)이 스스로 인정(認定)하는 `고립(孤立)'은 국민(國民)을 적(敵)과 아군(我軍)으로 구분(區分)하는 편(便)가르기, 민생문제(民生問題)도 챙기지 못한 무능력(無能力), `나누기 정치(政治)'로 일관(一貫)한 정치력(政治力) 부재(不在)의 자연스런 귀결(歸結)
[6]
[7]
[10]
"이라고 지적(指摘)하기도 했다. "내가 총리직(總理職)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당(與黨)이 원내(院內) 제(第)1당(黨)이었음에도 국정운영(國政運營)은 난맥(亂脈)을 거듭했다
[6]
[8]
"면서 노(盧) 대통령(大統領)의 발언(發言)을 조목조목(條目條目) 반박(反駁)했다. 그는 "내가 총리(總理)로 재직(在職)하는 동안은 집권당(執權黨)인 열린우리당 의석(議席)이 46석(席)에 불과(不過)한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政局)이었다"며 "총리(總理) 주재(主宰)로 4당(黨) 정책(政策)위의장(議長)과 원내대표(院內代表)가 참여(參與)하는 국정협의회(國政協議會)를 정례화(定例化)해 국가적(國家的) 현안과제(懸案課題)들을 정치권(政治權)과 조율(調律)을 통해 원만히(圓滿히) 해결(解決)해 나감으로써 큰 차질(蹉跌)없이 국정(國政)을 운영(運營)한 바 있다"고 말했다.
[6]
고건(櫜鞬)은 또 "참여정부(參與政府) 초대(初代) 총리직(總理職)을 제의(提議)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고, 또 고뇌(苦惱)했다"며 "그러나 안정(安定)속의 개혁(改革)을 추진(推進)해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권유(勸誘)와 종용(慫慂)에 따라 이를 수락(受諾)했다"며 억울(抑鬱)함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헌정사상(憲政史上) 초유(初有)의 대통령(大統領) 탄핵(彈劾) 사태(事態)를 맞아 권한대행(權限代行)으로서 국민(國民)의 협조(協助)를 얻어 국가적(國家的) 위기(危機)를 원만(圓滿)하게 수습(收拾)한 데 대(對)한 평가(評價)는 국민(國民)의 몫"이라며 "국가(國家) 최고지도자(最高指導者)의 언행(言行)은 신중(愼重)하고, 절제(節制)돼야 한다.
[6]
[10]
"고 반박(反駁)했다. 비판(批判) 성명(聲明) 발표(發表) 이후(以後) '성명(聲明) 내용(內容)이 강경(强勁)하다.'는 한 언론(言論)의 질문(質問)에 대(對)해 고건(櫜鞬)은“그런 것 아니다. 내가 늘 해오던 얘기 중(中)에서 지금(只今) 상황(狀況)에 맞는 말을 모은 것 뿐이다.
[7]
”라고 응답(應答)했다. 일각(一角)에선 "고 전(前) 총리(總理)가 노(盧) 대통령(大統領)을 비롯한 참여정부(參與政府)와의 인연(因緣)을 완전(完全)하게끊는 계기(契機)로 삼을 것 같다"는 분석(分析)도 제기(提起)되었었다.
[10]
이후(以後) 그의 한 측근(側近)은 "참여정부(參與政府) 초대(初代) 총리(總理)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부담(負擔)이 되는 상황(狀況)이었다"며 "노(盧) 대통령(大統領)의 발언(發言) 때문에 이제 부담(負擔)없이 `이혼도장(離婚圖章)`을 찍을 수 있게 됐다
[10]
."고 밝혔다. 이후(以後) 그는 17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의 유력(有力)한 대선주자(大選走者)와 대선(大選) 후보(候補)로 거론(擧論)됐으며
대통합민주신당(大統合民主新黨)
영입설(迎入說), 민주당(民主黨) 영입설(迎入說),
한나라당(한나라黨)
영입설(迎入說) 등(等)이 나타났으나 2007년(年) 1월(月) 16일(日) 언론(言論)에 대통령(大統領) 불출마(不出馬) 선언(宣言)을 발표(發表)했다.
국무총리(國務總理) 퇴임(退任) 이후(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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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年) 대통령(大統領) 소속(所屬)의
사회통합위원회(社會統合委員會)
가 공식(公式) 출범(出帆)했는데, 고건(高件)이 초대(初代) 위원장(委員長)으로 위촉(委囑)됐다.
[11]
[12]
- 1972년(年) 홍조근정훈장(紅條勤政勳章)
- 1982년(年) 청조근정훈장(淸朝勤政勳章)
- 1998년(年) 국제투명성기구(國際透明性機構)(TI) 세계청렴인(世界淸廉人) 상(上)
- 2001년(年) 3월(月) 국제투명성기구(國際透明性機構)(TI) 올해의 세계청렴인상(世界淸廉引上)
- 2002년(年) 9월(月)
몽골
국(國) 북극성훈장(北極星勳章)
- 2005년(年) 암창(暗唱) 상(上)(賞)
- 1994년(年) 지방자치(地方自治)에 대응(對應)하는 지방정부(地方政府)의 쇄신과제(刷新課題)
- 1995년(年) 지방화시대(地方化時代)의 행정개혁(行政改革) 전략(戰略)
명예(名譽) 박사(博士) 학위(學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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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評價)와 비판(批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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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건(櫜鞬)은 행정(行政)의 달인(達人), 유능(有能)한 관료(官僚),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아는 현명(賢明)한 관료(官僚)라는 평가(評價)가 있다. '사실상(事實上) 새마을운동(運動)을 기획(企劃)한 주무책임자(主務責任者)로서 농촌부흥운동(農村復興運動)을 진두지휘(陣頭指揮)했다. 새마을운동(運動) 성공(成功)이 그를 최연소(最年少) 도지사(道知事)(전남(全南)·37)로 만든 것이다. 세계(世界) 5대(代) 지하철(地下鐵) 교통망(交通網) 구축(構築), 난지도 생태공원(生態公園) 조성(造成), 서울 도시고속도로건설(都市高速道路建設), 한옥(韓屋)마을 복원(復元)
[2]
' 등(等)이 업적(業績)으로 거론(擧論)된다.
“청렴(淸廉)은 사명감(使命感) 이전(以前)에 나의 생존법칙(生存法則)이다”고 고백(告白)했다. 그의 고백(告白)이 아니더라도 그의 청렴성(淸廉性)은 브랜드화(化)됐다.
[2]
그는 오랜 공직생활(公職生活) 속에서도 스캔들이나 부정부패(不淨腐敗)에 단(單) 한 번(番)도 연루(連累)된 일이 없다. 그가 행정(行政)의 달인(達人)이 된 배경(背景)에도 청렴성(淸廉性)이 자리잡고 있다.
[2]
그는 1990년(年) 2월(月) 초(初) 한보(閑步) 수서택지분양(水西宅地分讓) 때 도덕성(道德性)과 자리를 바꿨다. 청와대(靑瓦臺) 등(等)으로부터 여러 차례(次例) 수서택지분양(水西宅地分讓) 수의계약(隨意契約) 압력(壓力)을 받았으나 끝내 이를 거부(拒否)했다.
[2]
이 사건(事件)이 서울시장(市長)(관선(官選)) 자리에서 물러나는 직접적(直接的)인 계기(契機)가 됐다는 게 고(高) 전(前) 총리(總理)의 설명(說明)이다. 당시(當時) 수서특혜분양수사(水西特惠分讓搜査) 결과(結果) 많은 사람이 구속(拘束)됐으나 서울시(서울市) 공무원(公務員)은 단(單) 한 명(名)도 연루(連累)되지 않았다. 이로써 ‘클린 서울’의 명성(名聲)을 얻었다.
[2]
그의 청렴성(淸廉性)은 국제적(國際的)으로 공인(公認)받기도 했다. 국제투명성기구(國際透明性機構)는 1998년(年) 그에게 세계청렴인상(世界淸廉引上)을 주었다.
[2]
일부(一部)에선 고(高) 총리(總理)가 "예스맨"이란 닉네임으로 불릴 만큼 근성(根性)이나 열정(熱情)이 없다
[4]
는 비판(批判)도 있다. 처세술(處世術)의 달인(達人)이라는 부정적(否定的)인 시각(視角)도 존재(存在)한다.
인맥(人脈) 관리(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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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櫜鞬)은 인맥(人脈) 관리(管理)로도 유명(有名)하였다. 그의 인맥(人脈)은 오랜 관료생활(官僚生活)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부임(赴任)하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有名)하다. 관료(官僚)모임, 자문(諮問) 교수(敎授)모임은 물론(勿論) 심지어(甚至於) 부임(赴任)하는 부처(部處)의 출입기자(出入記者)와도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有名)하다.
[2]
심지어(甚至於)
김영삼(金永三)
정권(政權)과
김대중(金大中)
간(間)의 갈등(葛藤)을 중재(仲裁)했다 한다. YS정권(政權) 말기(末期) DJ와 갈등(葛藤)을 빚을 때도 두 세력(勢力)에 동시(同時)에 인맥(人脈)을 구축(構築)할 정도(程度)로 고(高) 전(前) 총리(總理)는 인맥관리(人脈管理)의 달인(達人)이다. 그리고 공직(公職)에서 퇴임(退任) 후(後)에도 대학총장(大學總長)은 물론(勿論) 각종(各種) 시민단체(市民團體) 등(等)으로 넘나들며 인맥(人脈)을 구축(構築)했다. 여기에는 본인(本人) 특유(特有)의 부지런함도 작용(作用)했다.
[2]
잠적(潛跡) 의혹(疑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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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한便) 격동(激動)의 순간(瞬間)마다 잠적(潛跡)하여 위기(危機)를 모면(謀免)했다는 의혹(疑惑)이 있다. 고건(櫜鞬)은 1979년(年) 10월(月)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 피습(被襲) 서거(逝去) 당시(當時) 3일(日) 간(間)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2]
, 1980년(年) 5월(月) 5·17 비상계엄확대(非常戒嚴擴大) 조치(措置) 당시(當時) 청와대(靑瓦臺) 정무수석(政務首席)으로 1주일(週日) 간(間) 잠적(潛跡)했다는 의혹(疑惑)을 받아왔다. 특히(特히) 이 부분(部分)은 2003년(年) 2월(月) 국무총리(國務總理) 인사청문회(人事聽聞會)에서 집중적(集中的)으로 의혹(疑惑)이 부각(浮刻)됐다. 그 의혹(疑惑)의 제기(提起)의 속내는 “당시(當時) 국가위기(國家危機) 때 처신(處身)은 국가지도자(國家指導者)에 어울리지 않는다.
[2]
”는 것이다.
역대(歷代) 선거(選擧) 결과(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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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家族) 관계(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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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고병소
- 할머니:
조씨(氏)
- 아버지:
고형곤
(1906년(年) 4월(月) 16일(日) ~ 2004년(年) 6월(月) 25일(日))
- 어머니:
장정자
(1914년(年) ~ 2001년(年) 5월(月) 14일(日))
- 형(兄): 고석윤,고경(古經)
- 남매(男妹):고혜경, 고혜련
- 배우자(配偶者):
조현숙
(1938년(年) ~ 2021년(年) 9월(月) 29일(日))
- 장남(長男):
고진(高進)
(1961년(年) 10월(月) 11일(日) ~ )
- 차남(次男):
고휘
(1962년(年) ~ )
- 삼남(三南):
고위(高位)
(1968년(年) ~ )
외부(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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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前任)
박종성
(직무대리(職務代理) 전영춘 기획관리실장(企劃管理室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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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第)4대(代)
강원도(江原道) 부지사(副知事)
1973년(年) 11월(月) 1일(日) ~ 1973년(年) 12월(月) 16일(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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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後任)
임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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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前任)
김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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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第)27대(代)
교통부 장관(長官)
1980년(年) 9월(月) 2일(日) ~ 1981년(年) 3월(月) 10일(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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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後任)
윤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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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前任)
이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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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第)4대(代)
명지대학교
총장(總長)
1994년(年) 3월(月) 17일(日) ~ 1997년(年) 3월(月) 5일(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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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後任)
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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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年) 4월(月) 11일(日) ~ 1988년(年) 5월(月) 29일(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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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직(現職) 도지사(道知事):
김영록
(39대(代), 민선(民選) 8기(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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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第)1대(代):
이남규(李南珪)
제(第)6대(代):
이기세
제(第)11대(代):
민영남
제(第)16대(代):
김재식
제(第)21대(代): 김창식(金昌植)
제(第)26대(代):
백형조
제(第)31대(代):
허경만
제(第)36대(代):
박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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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第)3대(代):
이을식
제(第)8대(代):
이하영
제(第)13대(代): 김용관
제(第)18대(代):
고건(櫜鞬)
제(第)23대(代):
문창수
제(第)28대(代):
이균범
제(第)33대(代):
박태영
제(第)38대(代):
김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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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직(現職) 시장(市長):
오세훈(吳世勳)
(39대(代), 민선(民選) 8기(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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