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를 버리고 西歐에서 배우자?
[실전 고전읽기] 26. 후쿠자와 유키치「문명론 개략」
정작 그 속내가 어떠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言行으로만 判斷한다면,세대가 젊어질수록 요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對한 熱望이 稀微해져 가는 듯하다.

글로벌 時代를 맞이하는 世界市民으로서 自國에 不必要하게 執着하지 않고 所謂 '쿨'해지는 것인지,아니면 眞摯한 熱情이 없어 그냥 '심드렁'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他國 移民으로 인하여 招來되는 國力 減少 憂慮가 眞摯하게 擧論된 時點이 이미 몇 年이나 지난 狀態에서 새삼스럽게 '우리'나라에 關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어쩌면 最尖端을 걸어야 하는 現代人으로서의 基本 素養이 缺如된 舊式 行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나은 '우리'나라에 對한 熱望은 只今껏 無數한 사람들이 自身의 人生을 내걸게 한 動機였다.

비록 自主獨立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鬪士가 아니라고 하여도,몸 담은 分野가 經濟든 學問이든 軍事든간에 많은 이들은 더 나은 '우리'나라의 未來를 向해 달리고 또 달렸다.

自身이 바라는 國家에 對한 怨望(願望)은 個人的 野望과 함께 맞물려,많은 이들로 하여금 戰戰兢兢 밤을 지새우게 하였고 주린 배에도 열에 달뜬 눈을 한 그들을 울게 하기도 웃게 하기도 하였다.

母國의 偉大한 未來를 위해 大國崛起(大國屈起)를 꿈꾸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았고 그들이 世界史의 主人公으로 밀어 올린 國家 또한 여럿이었다.

그中 이웃나라 日本에 關한 이야기를 해보자.

日本은 大國崛起의 꿈을 무척이나 效率的으로 達成한 國家이다.

近 · 현대에 걸친 日本의 足跡과 現在를 理解하자면 메이지 維新을 반드시 理解하여야 한다.

日本은 本是 '蘭學(欄學)'이라는 네덜란드 學問이 形成될 만큼 外部 世界를 어느 程度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東北아시아의 餘他 政權들과 마찬가지로 日本 幕府 亦是 鎖國政策을 펼친다.

그러한 渦中에 美國의 페리 提督이 艦隊를 이끌고 우라가에 對抗하여 强制 條約을 締結하자 日本의 封建 社會는 衝擊에 빠졌다.

傳統的 世界觀을 붕괴시킨 開港 事件이 發生하자,일본은 自國의 生存과 繁榮을 위한 大大的 探索에 들어갔다.

그리고 곧 果敢한 選擇을 하였다.

아시아 國家이기를 拒否하고 西洋이 되고자 하면서 西歐 文物을 積極的으로 받아들이고 吸收하였던 것이다.

西歐的 近代化를 志向하는 '메이지 維新'의 基調를 定立한 以來 日本은 國家 發展을 爲한 努力을 쉬지 않았다.

社會 內部의 反撥을 撫摩하면서 改革 政策을 거듭 實施하고 軍事와 經濟의 發展을 追求한 結果,美國이 日本의 門戶를 開放한 지 22年 뒤에 日本은 韓國의 門戶를 開放한다.

하지만 앞에서 日本이 '效率的'으로 國家를 성장시켰다고 말했지만 '成功的'이라는 表現은 굳이 쓰지 않은 理由는 그 以後의 行步에 對한 評價 때문이다.

日本은 戰爭을 통해 國家의 繁榮을 追求하는 軍國主義 戰略을 取한다.

繼續된 對外侵略으로 國家 生産에 必要한 資源을 確保하고 他國으로부터 獲得한 戰爭賠償金으로 自國의 運營을 活潑하게 꾸렸다.

그리고 日本의 軍國主義는 한 段階 더 發展하여 '大동아 公營圈(大東亞共榮圈)'이라는 國家戰略이 마련된다.

環太平洋 地域에 걸친 帝國을 建設하고자 한 日本은 武力 制霸를 꿈꾸던 다른 主軸國들과 結託하여 世界大戰에 參與한다.

그러나 이들의 死活을 건 國家 戰略은 失敗하고 만다.

1945年 9月2日 美國의 맥아더 將軍이 지켜보는 아래 降伏 文書에 署名하던 日本은 맥아더 將軍에게서 페리 提督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日本은 亦是나 '效率的'인 나라였다.

敗戰 以後 모든 것이 사라진 廢墟에서 20年 만에 經濟를 부흥시키고 한동안 年 10%를 넘는 經濟成長을 達成하였다.

그 裏面에는 6 · 25 戰爭이라는 우리나라의 아픔이 日本에는 軍需品 生産工場을 稼動하게 된 逆說的 狀況과 함께,冷戰 構圖 下에서 積極的 支援을 아끼지 않았던 美國이라는 友邦의 惠澤이 있었다.

하지만 條件의 流離함을 따지더라도 日本은 分明 刮目할 만큼 놀라운 成長을 이룩해냈다.

이러한 短期間의 國家 再建이 可能했던 理由는 메이지 維新 以來 100餘年 넘게 發展해온 日本의 國家戰略이 變함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2次 大戰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日本 社會의 하드웨어는 사라졌지만 精神的 소프트웨어는 如前히 남아 있었다.

메이지 維新의 精神은 戰後 日本經濟가 빠르게 發展하게 된 原動力으로 다시금 作用하면서 메이지 維新 100周年이 되는 1968年,日本은 美國과 蘇聯에 이은 世界 3代 經濟强國으로 자리를 잡는다.

降伏 文書에 署名한 날짜와의 짧은 間隔을 생각한다면 大國을 向해 나아간 日本의 行步는 正말이지 效率的이고 놀라운 데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日本의 近 · 現代 國家戰略을 樹立하고 메이지 維新의 精神的 支柱라고 評價되는 이가 있다.

日本의 代表的 知性이자 近代化의 先驅者,啓蒙思想家이며 게이오 大學을 創立한 敎育家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元來 蘭學을 工夫하였으나 世上의 中心이 네덜란드가 아니라는 事實을 깨닫고 20代에 英語를 새로 배운다.

그리고 1860年 美國을 最初로 訪問했던 日本 使節團에 合流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1861년에는 幕府의 유럽 使節團 一員으로 約 1年에 걸쳐 美國과 유럽을 巡訪했다.

이런 經驗으로 유럽과 美國의 學問 및 西歐思想에 本格的으로 눈을 뜬 그는 活潑한 著述活動으로 作家로 成功하였고,저작물 輸入을 바탕으로 게이오 大學을 創設하였다.

政府 閣僚로 參席하지는 않았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核心 政治家들과 交流하면서 當代 輿論의 向方을 決定한 그는 日本 近代 知識人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存在였다.

또한 김옥균,박영효 等 韓國의 改革派들조차도 그를 스승으로 모실 程度로 當時 西歐 文物을 받아들이려는 東洋의 革命家들에게 絶對的인 存在였다.

스스로 韓國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되기를 꿈꿨던 春園 李光洙는 그의 墓地를 다녀와서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泰西의 新文化로써 沈滯한 舊思想,舊制度를 臺(代)해야 할 줄을 確信하고 단연히 지(志)를 결(決)했으니 千(天)李 日本을 福(福)하려 하시매 女史(如斯)韓 位인"이라는 것이다.

語塞하지 않은 한글로 풀어보면,하늘이 日本을 祝福하여 내린 偉大한 人物이라는 評價이다.

하지만 李光洙는 親日派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하니 그렇다 치고,개화파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思想이 품고 있는 毒素에 拒否感을 剛하게 느꼈어야 正常이다.

메이지 維新의 骨子인 西歐的 近代化는 유키치의 '脫亞論(脫亞論)'에 立脚하는데,이 脫亞論은 '아시아 蔑視館'이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年 3月16日 '破壞는 建築의 始作이다'라는 題目으로 時事新報에 실린 脫亞論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主張을 펼친다.

"日本은 오늘의 發展을 圖謀하는 데 있어서 이웃 나라의 改名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興하게 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우리는 아시아 國家들에서 벗어나 우리의 運命을 西歐의 文明 國家와 함께 하는 것이 낫다. 中國 및 朝鮮 亦是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特別히 待遇할 必要 없이 西洋 사람들이 하는 方式대로 待遇하면 된다. 나쁜 親舊를 所重히 하는 사람은 그 親舊의 나쁜 評判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나쁜 親舊(惡友)와 親해져서 함께 惡名을 뒤집어 쓸 理由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東方의 나쁜 親舊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韓國과 中國에서 無數한 批判을 받는다.

'우리 民族의 近代化 過程을 짓밟고 破綻으로 몰아넣은 우리 民族 全體의 敵'(백기완,<抗日民族론>)이라는 評判은 臺灣에 비하면 오히려 낫다.

臺灣에서는 '가장 憎惡할 民族의 적'으로 불린다.

그리고 西洋만이 文明의 總和라고 여기고 東洋에게 訣別을 告했던 후쿠자와 '탈아입구(脫亞入歐)' 史上 德分에 日本은 前近代 아시아에서 脫皮하는 데 成功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의 한쪽이 되지도 못하였고 아시아 國家들과도 親密한 關係를 맺지 못하고 있다.

또한 自國民의 幸福만을 追求하고 世界 다른 國家와 餘他 組織에 屬한 이들의 幸福에는 無關心한 日本의 發展을 두려워하는 나라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다.

그렇다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代表作으로 評價되는 '文明論 槪略(1875)'을 읽으면서 二律背反的인 그의 思想을 片鱗이나마 맛보도록 하자.

☞ 己出 提示文 (서울대학교 2008學年度 人文系 模擬論述)

只今 나라의 文明化를 꾀함에 있어서 모조리 유럽을 目標로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또 모름지기 그쪽의 文明을 採擇함에 우리의 人心과 風俗을 살펴 그 國體(國體)에 따라 政治를 遵守하고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골라 取捨選擇해야 適切한 調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文明에는 밖으로 드러나는 事物과 그 안에 담겨 있는 精神의 區別이 있는데,밖으로 드러나는 文明은 取하기가 쉽고,그 안에 담겨 있는 文明은 찾아내기 어렵다.

나라의 文明化를 꾀함에 있어서는 어려운 쪽을 먼저 하고 쉬운 쪽을 나중에 해야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文明論 槪略」,1875

弘報람 S · 論述 先任硏究員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