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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俗學硏究 6輯]高麗時代엔 再婚女도 王妃됐다|동아일보

[民俗學硏究 6輯]高麗時代엔 再婚女도 王妃됐다

  • 入力 2000年 5月 30日 20時 30分


高麗 朝鮮 사람들은 왜 離婚했고 離婚 뒤엔 어떻게 살았을까. 거기엔 어떤 社會文化的 意味가 담겨 있을까.

最近 들어 微視史(微視史)와 生活史(生活史)에 對한 硏究가 늘면서 高麗 朝鮮時代의 結婚에 關한 글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離婚과 再婚을 本格的으로 다룬 論文을 드물었다. ‘民俗學硏究’ 6輯(國立民俗博物館 發行)에 실린 권순형 강릉대講師의 ‘高麗의 離婚과 再婚’, 장병인 충남대敎授의 ‘朝鮮時代 離婚에 對한 規制와 實相’는 이런 點에서 값진 論文이다.

▽離婚한 高麗 王妃는 어떻게 살았을까〓왕실의 離婚은 大部分 政治的 理由에서 비롯됐다. 離婚 當한 王妃는 親庭아버지나 오라버니의 政權慾에 犧牲된 것이다. 離婚한 王妃는 主로 宮闕 밖의 別宮에 살았다. 왕이 經濟的 支援을 해 준 境遇도 있었다. 이는 政治的 理由로 廢妃되긴 했지만 愛情은 남아 있었기 때문. 恭愍王妃 혜비(惠妃) 李氏처럼 僧侶가 된 境遇도 있다.

▽再婚해 王妃가 되다〓성종비 문덕왕후(文德王后) 柳氏도 離婚女였다. 寡婦가 된 女性이 再婚을 통해 王妃가 된 것엔 美貌가 奏效했음을 보여주는 記錄이 적지 않다. 忠宣王과 再婚한 순비(順妃) 許氏처럼. 再婚女가 王妃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再婚이 惡으로 取扱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一般人도 마찬가지. 그러나 高麗末부터 禁止 雰圍氣.

▽離婚이 자유로우니 高麗 女性의 地位가 높았다?

高麗 女性은 再婚視, 格이 떨어지는 結婚을 한 것이 아니었고 子女를 데리고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권순형氏는 “離婚이 主로 政略的 經濟的인 面에서 이뤄졌다. 따라서 離婚 再婚이 禁止되지 않았다고 해서 女性의 地位가 높았다고 보는 것은 無理”라고 말한다.

▽朝鮮時代 離婚의 種類

强制 離婚, 一方的 離婚, 協議 離婚 等 세가지. 强制 離婚은 夫婦中 한사람이 儀節(義絶·配偶者의 親族을 殺害 毆打하거나 姦通하는 것)하거나 男便이 아내의 姦通을 慫慂한 境遇, 國家가 命令한다. 一方的 離婚은 女性이 七去之惡을 犯했을때 主로 이루어졌다.

▽不法 離婚에 對한 處罰〓朝鮮時代 男便이 合當한 理由 없이 夫人을 내쫓으면 國家는 男子의 볼기를 치고 婚姻關係를 回復토록 했다. 反面, 夫人이 强制的으로 離婚 文書를 받아내면 그냥 女性의 볼기를 치고 말았다. 夫人이 男便을 버리고 떠났으면 그것만으로도 貞操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보다 더 큰 罰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倭亂 胡亂이 가져온 離婚

壬辰倭亂 丙子胡亂時 敵軍에게 性的蠻行을 當한 女性이 있었다. 男子들은 이들 女性과 離婚하려 했다. 果然 女性의 잘못인가. 現實論者 崔鳴吉은 人造臺에 離婚 不許를 政策으로 끌어냈다. 現實을 認定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孝宗臺엔 宋時烈 等 性理學 名分論者들이 政界에 進出하면서 이들 女性과의 離婚을 公式的으로 許諾했다. 名分이 現實을 누른 것이었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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