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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東宮 起源) 近代와 現代 그리고 바둑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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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東宮 起源) 近代와 現代 그리고 바둑 - 2
2013-02-20     프린트 스크랩
▲ 1920年代 平壤妓生들이 當時 有名 文人을 編輯長으로 招請하여 만든 잡 지 '壯한'에도 바둑 잘두던 妓生 油畫가 나온다.



<次例>

1. 舊韓末에서 걸어나온 바둑.
2. 社東宮 起源.
3. 바둑을 좋아하던 의친왕.
4. 이학진 先生을 그리며.




2篇 사동궁起源


生前에 이학진(李鶴鎭1911-2009) 先生은 機會 있을 때마다 韓國 現代바둑의 中心인 한국기원의 母體가 있다면 그것은 '朝鮮起源'이다, 말했다. 그 中 가장 最近의 發言은 月刊바둑 2007年 創刊記念號의 구기호 編輯長과의 對談에서다. 韓國 現代바둑의 산證人 조남철 先生은 日本바둑 留學에서 돌아와 自身이 主導的으로 만든 한성기원이 韓國棋院의 母體라 말했지만 이학진先生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朝鮮起源 은 開院과 弊源을 여러番 했다. 채劇問 主導와 한상룡 主導의 朝鮮起源이 浮沈을 거듭하다가, 定款 事務 業場으로 區分되어 本格的인 事業體系를 갖춘 것은 社東宮(寺洞宮)에서 發足한 朝鮮起源이 처음이다. 社東宮 朝鮮起源은 總裁 윤호병 理事長, 金程度 理事, 최규송, 孫貞道, 이학진 等으로 構成되어 當時의 京城 老국수들이 거의 參與한 團體였다. 오늘날의 韓國棋院의 그것과 別般 다르지 않다.

總裁 윤호병은 한일은행長과 재무부長官을 지낸 人士였고 理事長 金程度는 當代의 財閥 화신百貨店의 家族으로 財力家였다. 意欲的으로 出發한 朝鮮起源은 有力 言論을 끌어들여 제1회 '前朝鮮危機選手權展'을 열기도 했다.


社東宮 은 의친왕(義親王) 李堈(李堈)公의 私邸로 관훈동 196番地 一帶 萬餘 坪의 垈地에 있던 宮으로 樣式建物 한 棟과 韓屋 數十 東으로 構成된 大邸宅이었다. 只今의 曹溪寺 골목에서 首都藥局 앞에 이르는 넓은 空間으로 얼마前까지 마지막으로 남았던 樣式建物이 撤去되고 駐車場으로 變한 後 痕跡 없이 사라진 곳이다.

朝鮮起源은 이 大邸宅의 15칸 韓屋 舍廊채를 據點으로 創立되었다.

舍廊채라 하여 내려잡아 보면 안된다. 韓屋 15칸은 地方 官衙의 정청인 客舍만한 規模로 室內에 屛風과 그림 그리고 冊欌과 陶瓷器 等으로 꾸며져 朝鮮王室의 文化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韻致가 있는 空間이었다.


사동궁에 있던 조선기원 터를 가리키고 있는 末年의 조남철 9段. 
사동궁은 只今의 曹溪寺 골목에서 首都藥局 앞에 이르는 넓은 空間에 자리했다.
(寫眞/조남철回顧錄)



30年代 京城은 浪漫의 時代였다.

日本의 掠奪的 政治의 桎梏 속에서도 社會 文化 各 方面에 모더니즘의 氣風이 스며들어 나름의 文化思潮를 謳歌하던 時代다. 歷史가 이 時代를 暗黑時代라 規定한 탓인지 相對的으로 가까운 時期인데도 깜깜하기는 古朝鮮 時代(?) 못지 않다. 그中 우리에게 낮이 익은 뒷골목 주먹패들의 모습을 보면 바둑界의 모습과 比較된다.

別乾坤(1934年 71號)은 이 時代 京城 뒷골목을 이렇게 整理한다.

鏡城의 가장 有望한 暴力團은 다방골패다. 그리고 銀송정태랑과 喜樂館 崔, 우미관獅子, 三角情 김재防牌라 記錄하며 仁川에는 日本 傷害 等의 暴力團 據點이 있고 京城 釜山 等에 支部가 있다고 한다. 희락관 崔는 釜山의 '소라니牌'를 上京시켜 은송情敗를 襲擊하기도 한다. 別乾坤은 이들 中  鏡城의 다방골敗가 規模와 秩序가 있는 組織으로 一見 神社 모던뽀이를 稱한다 적고 있다.

다방骨牌의 頭目은 平壤書房이라 부르던 人物로 銀송정태랑과 더불어 當時 鏡城의 보스였다. 다방골은 武橋洞 地域으로 判書 조동휘 집을 據點으로 鏡城의 老국수들이 結集하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日帝時代 주먹 金斗漢은 火同牌가 發展하여 우미관敗가 된 組織의 보스로서 이름을 날리기 始作한 것은 40年代에 들어와서부터다. 김두한 이화룡 이정재 앞 時代의 人物로는 고희경 엄동욱 김기환이 있었고 그 앞 時代에는 茶房골平壤西方, 은송정태랑, 우미관獅子라는 三人의 時代가 있었던 것이다.

40年代 접어들어 두각을 보이기 始作한 金斗漢을 바둑史에 擧論하는 것은 조남철 先生이 日本에서 돌아와 老국수들과의 價値觀(?)의 混亂을 겪으며 東奔西走 起源組織을 만들고 定着시키는 過程과 比較가 되어서다. 조남철 先生의 그림자 속에 近代에서 현대를 맞으려 孤軍奮鬪하던 老국수들의 勞苦가 너무 無視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말이다. 一齊참脫衣 空間 안에서 바둑의 德目을 보듬고 育成하고자 했던 盧국수들의 眞面貌가 가려진 것은 참 아쉬운 대목이다.
 
그 點을 平素 이학진 先生(寫眞)도 여러番 말씀하셨다. 사동궁에 朝鮮起源이 開院할 수 있었던 것은 이학진 先生이 自身의 丈人이자 高宗의 아들인 이강공의 後援을 이끌어낸 德分이다.

이학진 先生은 바둑의 마니아로 대쪽 같은 선비다.

先生은 1966年 일본기원에서 韓國棋院에 招請狀을 보내며 韓國의 프로 3名을 日本 아마10걸前에 보내달라는 要請을 한 바 있는데 이때 윤기현, 고재희, 정창현 3名의 先發까지 마쳤던 狀況을 自尊心의 問題라며 韓國棋院을 說得해 없었던 일로 만든 逸話도 있을 程度다.

이강공 또한 王子로 獨立運動에 나서기도 하는 等 講壇의 所有者로 바둑 骨牌 麻雀에 心醉해 있어 바둑界에 自身의 舍廊채를 선뜻 내주었다. 이런限 過程을 거쳐 朝鮮起源이 誕生했고 제1회 '前朝鮮危機選手權展'이 열리게 된다.
 
(다음篇, 바둑을 좋아한  의친왕으로 繼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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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靈山 |  2013-02-20 午前 6:38:24   [同感0]   이 意見에 한마디
조남철先生니이학진 書生님等 이제 모두 歷史속의 人物이시네요.
時間 참 虛妄하고 빨리갑니다.
사동궁이 仁寺洞 近方에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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