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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商會의 60周年]左翼 `贊託突變` 南北分斷 불러|동아일보

[모스크바 3商會의 60周年]左翼 '贊託突變' 南北分斷 불러

  • 入力 2005年 12月 29日 03時 01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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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年 前인 1945年 12月 28日은 온 겨레가 共分한 날이었다. 前날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國 英國 蘇聯 3個國 外務長官會議(三相會議)에서 4代 聯合國人 美國 英國 中國 蘇聯에 依한 韓半島 信託統治案을 採擇한 事實이 傳해졌기 때문이다. 光復의 歡喜는 悲歎으로 바뀌었다.

모스크바 3國 外務長官會議 決定이 國內에 알려지기 前날인 27日 ‘韓國의 獨立問題가 모스크바 3賞會議에서 論議될 수 있다’는 美國 워싱턴發 外信記事(25日 發信)가 合同通信을 통해 國內에 傳해졌다. 이 外信은 또 ‘蘇聯은 韓國에 對한 信託統治를 提議한 反面 美國은 卽時 獨立을 主張한다’는 內容을 담고 있었다. 비록 나중에 美國과 蘇聯의 方針이 事實과 다른 것으로 確認됐지만 獨立國家 樹立에 對한 熱望과 信託統治에 對한 反感이 高調되던 當時 이 外信記事는 國內 言論의 눈길을 끌기에 充分했다.

▽信託統治 國內 報道=本報는 1945年 12月 28日子에 ‘華盛頓(華盛頓·워싱턴의 音域)二十五日發合同至急報’라고 出處를 밝히고 이 記事를 報道했다. 本報는 이날 1面 社說을 통해 “全文이 簡單하야 그 主張의 根據에 對한 說明도 模糊한 感이 없지 않으나…”, “아직 眞相의 全貌가 들어나지 않앗슴으로 우리는 此後의 進行을 注視하는 同時에 이 以上의 批判을 保留하거니와…”라고 신중한 姿勢를 堅持했다.

조선일보도 같은 날 1面 머리에 ‘信託統治說을 排擊함’이라는 社說을 싣고 바로 옆에 合同通信 記事를 4段으로 轉載했다.

當時 左翼의 影響을 크게 받고 있었던 서울신문도 1面에 合同通信의 記事를 받아 2段으로 報道했다. 左右翼 系列을 莫論하고 大部分의 新聞에 이 記事가 실린 것이다.

그런데 當時 狀況이 잘못 알려지면서 뒤늦게 論難이 일기도 했다.

▽當時 報道에 對한 事實 歪曲=KBS ‘미디어포커스’는 2003年 12月 放送에서 本報가 國內 言論 中에서 唯一하게 이 外信記事를 大書特筆한 것처럼 描寫했다. 그리고 本報의 外信 引用 報道가 反託運動을 격화시켜 結局 南北 分斷의 빌미를 提供했다고 主張했다.

미디어포커스는 當時 本報의 外信 轉載記事를 歪曲報道로 端正하고, 本報의 記事가 “모스크바 3賞會議에서 信託安易 公式 採擇되자 美國에 쏠렸을지도 모를 憤怒를 蘇聯에 돌리는 役割을 했다”고 主張했다.

一部 學者도 이 記事를 本報가 單獨 報道했다고 主張하거나, 甚至於 造作해 報道하는 바람에 反託運動이 거세진 것이라고 主張한다. 그러나 이것은 事實과 다르다.

當時 美國 워싱턴에 特派員을 두고 있지 않던 國內 言論들은 外信記事를 全載하는 것이 慣行이었다. 이를 無視하고 意圖的인 歪曲報道로 몰아간 것이다.

問題가 된 記事를 最初로 報道한 것은 美國의 通信社인 AP와 UP로 알려졌으나 當時 記事 原文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동아일보 取材팀이 UP의 後身인 UPI 側에 問議한 結果 美國 現地 新聞도 當時 UP 記事를 轉載해 國內 言論과 같은 內容을 報道한 것으로 確認됐다.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는 1945年 12月 26日子 7面에 UP 記事를 前載한 ‘May Grant Korea Freedom’이라는 記事를 통해 “美國의 번스 國務長官이 蘇聯의 信託統治案을 反對하고 韓國의 卽時 獨立을 主張하라는 訓令을 받고 러시아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報道했다.

美軍 機關紙인 聲調 太平洋板(日本 도쿄에서 發行)도 1945年 12月 27日 AP, UP 記事를 綜合한 記事를 1面에 싣고 問題의 UP 記事와 該當 記者 이름을 報道했다.

▽反託運動 激化 誘導 主張은 飛躍=學界에 따르면 信託統治 反對 움직임은 1945年 10月부터 始作됐다. 12月 28日 모스크바 3國 外務長官會議 決定이 國內에 알려진 뒤 左翼團體들이 反託 聲明書를 낼 程度로 反託運動에는 左右翼을 가릴 것이 없었다.

그러나 1946年 1月 信託統治를 反對하던 左翼의 態度가 不過 一週日도 안 돼 饌卓으로 突變한 뒤 左右 對立이 激化되기 始作했다.

鄭鎭奭(言論社) 한국외국어대 名譽敎授는 “解放空間에서 言論界는 左翼이 機先을 掌握하고 있었다”고 說明한다. 이런 狀況에서 本報의 報道가 反託運動을 격화시켰고, 이 反託運動이 南北 分斷으로 이어졌다는 主張은 事實과 다를 뿐 아니라 非論理的 解釋이라는 것이다.

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大韓民國 正體性 바로잡아야”▼

‘解放 60周年 建國 57周年 反託勝利 記念大會’가 28日 서울 中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이 大會는 反託運動의 意義를 되살리자는 뜻에서 每年 12月 28日 열린다. 권주훈 記者

社團法人 韓國反託反共學生運動記念사업회(總裁 이철승·李哲承)는 28日 午後 3時 서울 中區 한국프레스센터 國際會議場에서 ‘解放 60周年 建國 57周年 反託勝利 記念大會’를 열었다.

李 總裁는 記念辭에서 “大韓民國의 正體性이 흔들리고 市場經濟는 萎縮될 대로 萎縮된 이때 大韓民國을 탄생시킨 初心으로 돌아가 韓半島 全體에 自由 民主 人權이 具現되도록 努力하자”고 말했다.

그는 또 “노무현(盧武鉉) 政權은 過去史 整理를 名分으로 正統 建國史를 뒤집고 訊問法 制定으로 自由言論을 彈壓하고 있으며 私學法 改正으로 民主敎育의 根幹을 破壞했다”며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세우고 지킨 大韓民國을 되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大會에는 노재봉(盧在鳳) 前 國務總理, 유치송(柳致松) 前 大韓民國 憲政會長, 노학우(盧學友) 大韓民國 建國會長, 손진(孫塡) 大韓民國 件國會 名譽會長, 신국주(申國柱) 前 동국대 總長, 정용석(鄭鎔碩) 단국대 名譽敎授와 自由民主民族會議, 6·25參戰태극단戰友會 等 165個 右翼團體 會員 400餘 名이 參席했다.

反託勝利 記念大會는 1945年 12月 28日 當時 蘇聯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英소 3國 外務長官會議에서 信託統治가 決議된 것을 記憶하고 反託運動의 意義를 되살리자는 뜻에서 每年 12月 28日 열리고 있다.

李在明 記者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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