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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의 陷落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陷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陷落 1453年 5月 29日 東로마 帝國 의 首都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오스만 帝國 에게 함락당해 東로마 帝國이 歷史 속으로 사라진 事件을 말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陷落
오스만-東로마 戰爭 의 一部

콘스탄티노폴리스 攻城戰
날짜 1453年 4月 2日 - 5月 29日
場所
結果 오스만 帝國 의 勝利
東로마 帝國 의 滅亡
交戰國
오스만 帝國

동로마 제국의 기 東로마 帝國
敎皇領
제노바 共和國
베네치아 共和國

시칠리아 王國
指揮官
메흐메트 2歲
찬다를르 할릴  ?
조그누시
쉴레이만 발土글루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11歲  
동로마 제국 루카스 老타라스  ?
오르한 첼레비  ?
줄리아니 주스티니아니
兵力
80,000 - 150,000 5,000名의 東로마 帝國 兵士
2,000名의 이탈리아 傭兵
被害 規模
알려지지 않음 大部分의 防禦軍과 傭兵
民間人 約 4,000名

이 事件으로 아우구스투스 以來로 千 年 넘게 存續했던 로마 帝國 은 最終的으로 滅亡했고 오스만 帝國의 東地中海 발칸半島 로의 進出과 支配權 確保에 重要한 役割을 하게 되었다. 또한 文化的으로 東로마 帝國의 그리스 古典學 硏究學者들이 大擧 西유럽 으로 亡命하고 結局 西유럽의 르네상스 를 일으키는 契機 中 하나가 되었다.

東로마 帝國 의 狀況 編輯

大略 1,100年 동안 存在해왔던 東로마 帝國 의 歷史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몇 次例 侵略을 當했지만 完全히 征服된 것은 單 한 番뿐이었는데 그것은 1204年 第4次 十字軍 遠征 때였다. 十字軍은 처음부터 東로마 帝國을 征服할 意圖를 가지고 侵攻한 것이 아니어서 不安定한 라틴 帝國 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짧은 期間 동안 세워졌었다.

第4次 十字軍 遠征으로 東로마 帝國은 니케아 帝國 , 에페이로스 公國 , 트라페주스 帝國 等 몇 個의 東로마帝國 系列國家로 쪼개어버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指導

東로마 帝國 系列 國家들은 서로 聯合軍을 이루어 라틴 帝國과 라틴 勢力에 對抗했으나 事實上 그들은 東로마 帝國의 繼承을 놓고 서로 競爭關係에 있었다.

1261年 마침내 分裂하기 前 東로마 帝國의 大部分을 領土로 삼은 니케아 帝國 이 라틴人들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를 再奪還했다. 그 以後 東로마 帝國은 라틴人 들과 세르비아人 들 그리고 불가리아 인들, 特히 가장 重要하게는 發興한 오스만 帝國 으로부터 끊임없는 威脅에 直面해야 했다. 1321年 以後부터 約 1世紀 동안 勢力이 大幅 弱化된 東로마 帝國은 여러 次例 內戰과 오스만의 發興으로 帝國의 領土가 繼續 縮小되어 結局 國名만 帝國人 都市國家로 變貌하게 되는 等 오랫동안 혼란스러운 時期였다.

1453年 當時 帝國의 領土라고는 고작 콘스탄티노폴리스 都市 그 自體와 미스트라스 要塞를 中心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一部, 第4次 十字軍遠征 以後 黑海沿岸에서 살아남은 完全獨立 繼承國인 트라페주스 帝國 뿐이었다.

開戰 前의 狀況 編輯

오스만 帝國 술탄 바豫지드 1歲 보스포루스 海峽 의 아시아쪽에 巨大한 要塞, 아나돌루 히사르를 세웠는데, 그의 曾孫子인 술탄 메메드 2歲 는 콘스탄티노폴리스 城壁 바깥, 卽 유럽 쪽 海峽에 壘멜리 히사르라는 두 番째 要塞를 세운다. [1] 이것은 海峽에 對한 오스만 帝國의 支配를 鞏固히 하려는 意圖에서였다. 特히 이 새로운 요새는 黑海 沿岸의 제노바 植民地에서 이 都市로 接近하려는 것을 遮斷할 能力을 갖추고 있었고 이렇듯 海峽의 兩쪽에 巨大한 要塞를 세운 술탄의 戰略的 意圖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征服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東方正敎會와 로마 가톨릭의 統合을 條件으로 西方에 도움을 要請했으나 意圖한 바대로 成果를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1054年 東方正敎會 와 로마 가톨릭 敎會의 大分裂 以後 로마 가톨릭은 끊임없이 東方과의 再統合을 追求해왔다. 實際로 1274年 리옹 에서 統合試圖가 있은 以後로 몇몇 비잔티움 帝國 의 皇帝는 로마 가톨릭 敎會를 받아들였다. 요한네스 8歲 팔라이올로고스 皇帝는 敎皇 에虞祭니오 4歲 와 統合 協商을 試圖하였고 1439年 統合宣言文 作成을 위한 委員會가 피렌체 에서 열렸다. 그러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大規模의 統合反對 輿論이 빗발치고 連日 示威가 벌어지면서 國論은 分裂되었다.

1204年 , 第4次 十字軍 遠征 當時 라틴人들에 依한 콘스탄티노폴리스 占領에서부터 觸發된 그리스인과 이탈리아人들間의 오래된 民族感情이 結局 重要한 役割을 하여 統合은 霧散되고 말았다. 이에 敎皇 니콜라오 5歲 와 로마 가톨릭은 대단히 失望했다.

그러나 實際로 敎皇 니콜라오 5歲가 비잔티움 帝國을 도와주려고 했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位置였다. 當時 西方의 王들과 諸侯들은 各自의 問題 때문에 東方까지 神經쓸 餘力이 없었기 때문이다. 英國 프랑스 百年戰爭 으로 弱해져있었고 이베리아半島 의 王國들은 레콩키스타 의 막바지에 있었다. 獨逸의 選帝侯 들은 서로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고 헝가리 폴란드 1444年 바르나 戰鬪 에서 敗北한 狀態였다. 비록 몇몇 북이탈리아 의 都市國家에서 軍隊를 보내긴 했지만, 西方의 援助는 오스만 帝國의 電力과 견주기엔 너무나 微微한 程度였다.

兩쪽의 狀況 編輯

 
콘스탄티노플 攻防戰 當時 콘스탄티노플의 狀況

東로마 帝國 의 軍士는 大略 7,000名으로 그 中 2,000名은 傭兵이었다. 오스만 帝國 의 包圍가 始作될 때 難民을 包含해 約 5萬名 程度의 사람들이 콘스탄티노플 에 있었다. 도르가노 가 이끄는 튀르키예人 部隊도 바다쪽 城壁을 지키고 있었다. 튀르키예人 部隊는 東로마 帝國에 忠誠을 다했고, 콘스탄티노플이 陷落되는 瞬間까지도 함께 싸웠다.

都市는 大略 20km의 城壁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陸地에 免해 잇는 5.5km의 테오도시우스 城壁 , 金閣灣 과 면해 있는 7km의 海岸 城壁, 마르마라海 와 免한 7.5km의 城壁으로 當時 歷史賞 最高로 굳건한 城壁이었다.

이에 맞서는 오스만쪽의 兵力은 多少 意見差異가 있는데 大略 예니체리 軍團 10,000~20,000名을 包含 全體 80,000~200,000名 程度로 보인다. (이렇게 差異가 많이 나는 理由는 當時 防禦쪽에 있었던 同時代의 目擊者들의 記錄은 大槪 誇張된 點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스만은 헝가리 出身(다른 記錄에는 獨逸人 또는 스웨덴人)의 우르半이라는 技術者를 雇用했는데 그는 大砲 製作 專門家였다. 當時로선 大砲는 比較的 신무기에 屬했다. 그는 巨大한 大砲를 製作했는데 砲길이가 8 m 가 넘고 直徑은 75?cm假量, 544?kg의 砲彈을 거의 1.6?km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공성용 "大砲"가 歷史上 처음 登場하는 場面이다. 비잔티움쪽도 大砲를 가지고 있었는데 規模가 훨씬 작고 反動으로 인해 오히려 城壁에 破損을 가져왔다고 한다.

攻城戰과 總攻擊 編輯

술탄 메메드 2世는 테오도시우스 城壁 을 통하여 攻城戰을 敢行하기로 決定하였다. 이 城壁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唯一하게 바다로부터 保護받지 못하는 城壁으로 複雜한 一連의 두터운 城壁과 垓子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스만 帝國軍은 1453年 4月 2日 月曜日, 復活節 다음 날 都市 外郭에 陣을 쳤다. 메메드 2世는 거의 240?km 나 떨어진 주조 工場에서 미리 만들어진 大砲들을 힘들여 끌고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 大砲들 中 가장 큰 것은 90마리의 소와 400名의 兵士가 끌어야만 했다고 한다. 이 大砲들을 만든 우르半은 애初에 콘스탄티노폴리스 防禦側에 먼저 이 技術을 提案했다고 하는데 防禦側이 형편없는 條件을 提示하자 攻擊側人 오스만 帝國으로 技術을 넘겼다고 傳해진다. 메메드의 全幅的인 支援으로 우르半의 大砲는 只今까지 가장 크고 堅固한 城壁이라고 알려진 이 都市의 城壁을 부술 수 있을 만큼 强力해졌다.

數 週에 걸친 엄청난 砲擊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城壁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는데, 그 理由는 조준이 不正確했고 한番 쏘고나면 再充電에 엄청난 時間이 所要되어 그 時間에 防禦側이 城壁을 補强할 만한 時間을 벌어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메메드의 艦船은 金閣灣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는데 東로마 帝國 側이 萬入口를 封鎖하였기 때문이었다. 메메드는 이를 迂廻하여 金閣灣 北쪽面으로 기름漆한 통나무를 늘어놓고 그의 艦隊를 굴려서 金閣灣으로 들여보냈다. 이로써 제노바 의 供給線들을 沮止할 수 있게 되자 東로마 防禦側의 士氣가 떨어졌고 안 그래도 劣勢인 兵力을 金閣灣과 城壁으로 나누어 防衛에 臨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帝國軍은 大大的인 正面 攻擊을 城壁 쪽으로 敢行했으나 엄청난 損失을 내고 격퇴당했다. 5月 中旬부터 25日에는 城壁 아래로 터널을 파서 城壁을 뚫으려고 試圖하였다. 터널을 뚫는 것은 大部分 세르비아 에서 온 徵用軍이었다. 反面 東로마 防禦側은 요하네스 그란트라는 技術者를 雇用하여 逆으로 터널을 파고 들어가 오스만 君을 擊退하는 戰術을 驅使했다. 첫 番째 터널을 發見한 것이 5月 16日이었고 以後 次例로 터널을 發見하여 그리스 火藥 으로 攻擊하여 막아내었고 5月 23日에는 두名의 오스만 將校를 拷問하여 모든 터널의 位置를 알아내고 이어 오스만 君을 擊退하였다.

메메드는 攻城軍에게 天文學的인 補償金을 걸어보기도 했으나 別 效果가 없었고 공성기로 攻擊했으니 東로마의 防禦兵士들이 공성기가 城壁에 붙기 前에 미리 태워버리는 바람에 霧散되었다.

5月 24日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달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象徵이기도 했는데 때마침 그 날 皆旣 月蝕 이 있었다. 이를 東로마에서는 都市가 敗亡할 凶兆라고 여겼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첫 皇帝의 이름과 같은 사람의 治世동안에 滅亡한다는 傳說도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當時의 皇帝는 콘스탄티누스 11歲 , 東로마 帝國의 初代皇帝로 여겨지는 콘스탄티누스 1歲 와 같은 이름이었으며, 그들의 어머니의 이름도 헬레나였다. 또한 며칠間 엄청난 雷雨가 퍼부었고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都市가 敗亡할 不吉한 徵兆로 여겨져서 防禦側의 士氣가 땅에 떨어졌다.

5月 29日 술탄의 總攻擊이 始作되었다. 第1攻擊은 5萬餘 名의 非正規軍 補助病 部隊였다. 이 非正規軍은 武裝도 戰鬪力도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數字로 밀고 들어와 東로마 防禦病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 非正規軍이 退却하고 곧바로 이어서 오스만 帝國의 正規軍인 아나톨리아 軍團의 波狀攻勢가 이어졌다. 都市 北西쪽의 弱한 城壁에 集中된 이 攻擊으로 漸次 都市의 防禦線이 무너져갔고 防禦側에게 쉴 틈도 주지 않은 채 제3차 波狀攻擊으로는 술탄의 精銳部隊이자 가장 强力한 部隊인 예니체리 軍團이 攻勢가 이어졌다. 이때 제노바의 傭兵隊長 줄리아니 주스티니아니 將軍이 深刻한 負傷을 當해 後方으로 실려갔다. 이에 제노바 傭兵들의 戰列이 무너져버렸고 이 틈을 놓支持 않은 예니체리들이 물밀듯이 外城壁을 치고들어와 結局 城壁塔에 오스만 帝國의 旗발을 꽂는 데 成功했다. 이를 契機로 防禦側의 前線은 急激히 무너져내려 都市로 앞을 다투어 退却하고 오스만 帝國軍은 城門을 열고 밀려들어왔다.

皇帝 콘스탄티누스 11歲 는 皇帝의 象徵인 紫朱빛 망토를 벗어던지고 兵士들을 이끌고 오스만 帝國軍과의 混戰에 合流하여 싸웠으나 結局 그後에 그의 모습을 다시 본 사람은 없었다. 諸國과 運命을 함께한 이 東로마 帝國의 마지막 皇帝는 그대로 傳說이 되었다.

正服 編輯

 
메메드 2歲의 콘스탄티노폴리스 入城

메메드 2世는 말을 타고 그의 手下들과 함께 카리시오스 文(에디르네 文)을 통해 콘스탄티累폴리스로 勝利의 入城을 했다. 防禦線이 무너지자 투르크 軍隊는 부채꼴 模樣으로 急速히 都市로 퍼져 나갔다. 메메드 2歲 는 都市가 完全히 廢墟가 되는 것을 願하지 않았기 때문에 重要한 建物에는 미리 護衛兵을 보내어 破壞를 막았다. 그는 이 都市를 오스만 帝國의 새로운 首都로 定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투르크 兵士들은 하기아 소피아 大聖堂 앞쪽에 있는 皇帝의 廣場으로 몰려들었다. 大聖堂 청동문 뒷쪽에는 수많은 都市 住民이 몰려들어 나중에 守護聖人이 自身들을 救援해줄 것이라고 믿고 避身해 있었다. 攻擊軍에게는 傳統的으로 3日間의 掠奪이 許諾되었으나 워낙에 掠奪이 破壞的이어서 술탄은 하루 만에 掠奪을 거두었다. 투르크 兵士들은 反抗하는 사람은 죽이고 抵抗하지 않은 者들은 奴隸로 삼았다. 當時 都市의 人口는 約 4萬 名 程度로 보이는데 살해당한 사람은 約 4,000名假量이었다. 술탄은 이 都市를 오스만 帝國의 새로운 首都로 宣布하고 하기아 소피아는 이슬람 모스크 로 改造되었다.

미스트라스의 모레아 요새는 콘스탄티노스 11歲의 兄弟들인 토마스 팔라이올로고스 데메트리오스 팔라이올로고스 에 依해 統治되고 있었는데 서로 反目하고 있었다. 술탄의 侵攻에도 抵抗하다가 結局 1460年 陷落되는데 토마스는 로마로 亡命하여 거기서 敎皇과 諸侯들에게 東로마 帝國의 亡命 皇帝로서 待遇받다가 죽었고 데메트리우스는 술탄에 依해 投獄되고 結局 거기서 죽었다.

1479年 에는 獨立된 로마界 國家인 李피로스 前提君主國이 술탄 메메드2世에게 敗亡하면서 로마界 國家는 永遠히 사라지게 된다.

評價 編輯

二千年 넘게 그리스-로마 文化를 간직해온 로마 帝國 의 滅亡으로 많은 로마인들이 이 都市를 떠나 西유럽으로 亡命했고 그들이 가져온 知識과 文書들, 古代 그리스-로마의 傳統이 이탈리아를 中心으로 르네상스 를 꽃피우는 原動力이 되었다. 事實 이탈리아의 都市들이 로마 帝國 學者들을 받아들이기 始作한 것은 훨씬 以前의 일이지만 그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陷落이 이슬람에 依해 硏究된 그리스-로마의 古典들이 西유럽으로 大擧 流入되게 된 것은 分明하다.

歷史學者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陷落을 中世 를 마감하고 르네상스 時代를 여는 重要한 事件으로 보고 있으며, 아울러 이 時點을 近世의 始作으로 본다.

各州 編輯

  1. John Julius Norwich. 남경태, 編輯. 《Byzantium; v. 3: The Decline and Fall》 [비잔티움 年代記. 3: 衰退와 滅亡]. 736-738쪽. ISBN  978-89-5561-82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