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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이기붕

大韓民國의 政治가 (1896?1960)

이기붕 (李起鵬, 1896年 12月 20日 ~ 1960年 4月 28日 )은 大韓民國 第3代 國防部 長官, 再選 國會議員 等을 지낸 大韓民國의 政治가 이다.

이기붕
李起鵬
出生 1896年 12月 20日 ( 1896-12-20 )
朝鮮 忠淸北道 槐山
死亡 1960年 4月 28日 ( 1960-04-28 ) (63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景武臺 에서 銃殺됨(아들 이강석 이 쏜 銃에 死亡.)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大韓民國
居住地 大韓帝國 忠淸北道 槐山
大韓帝國 全羅北道 全州
大韓帝國 漢城
大韓民國 서울
學歷 美國 아이오와 州立 데이버 大學校 哲學과 學事
職業 政治가
經歷 國會議長
國防部 長官
自由黨 中央委員
국민회 中央總本部 最高委員
引下工科大學校 財團 理事長
父母 이낙의 (簿), 송정현 (某)
配偶者 박마리아
子女 이강희 (딸)
이강석 (長男)
이강욱(次男)
宗敎 儒敎 ( 性理學 ) → 改新敎 ( 監理會 ) [1]
議員 選手 2
正當 自由黨
黨內 職責 代表最高委員 兼 代表前任拷問
이기붕
李起鵬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두 번째 줄 좌측에서 두 번째가 이기붕, 맨끝은 그의 사돈 인척인 엄항섭, 단상 첫째 줄은 좌로부터 김구, 김규식, 최동오, 유동열)
1945年 12月 19日 臨時政府要人 還國記念會에서
(壇上 두 番째 줄 左側에서 두 番째가 이기붕 , 맨끝은 그의 査頓 姻戚인 엄항섭, 斷想 첫째 줄은 左路부터 金九 , 김규식 , 최동오 , 유동열 )
大韓民國의 第3代 國防部 長官
任期 1951年 5月 7日 ~ 1952年 3月 29日
前任
前任 國防長官
後任
後任 國防長官
大統領 李承晩
副統領
歷代 副統領
總理
歷代 國務總理
次官
歷代 國防部 次官

身上情報
出生日 1896年 12月 20日 ( 1896-12-20 )
出生地 朝鮮 忠淸北道 槐山
居住地 大韓帝國 忠淸北道 槐山
大韓帝國 漢城
大韓民國 서울
死亡日 1960年 4月 28日 ( 1960-04-28 ) (63歲)
死亡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景武臺 에서 銃殺됨(아들 이강석 이 쏜 銃에 死亡)
國籍 大韓民國
學歷 美國 아이오와 州立 데이버 大學校 哲學과 學事
經歷 國會議長
국민회 中央總本部 最高委員
引下工科大學校 財團 理事長
自由黨 代表最高委員 兼 代表前任拷問
正當 自由黨
父母 이낙의(簿), 송정현(某)
配偶者 박마리아
子女 이강희(딸)
이강석 (長男)
이강욱(次男)
親姻戚 이기룡(六寸 兄) [2]
엄항섭 (査頓)
宗敎 儒敎 ( 性理學 ) → 改新敎 ( 監理會 )

履歷 編輯

忠淸北道 槐山郡 괴산읍 에서 出生하여 忠淸北道 槐山郡 曾坪面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後 漢城府 에서 成長한 그는 8·15 光復 以後 李承晩 의 祕書, 國防部 長官 , 서울特別市 市場, 國會議長 職을 歷任하였다. 그는 朝鮮 太宗 의 차자(次子)인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17代孫으로, 흥선大院君 의 側近이었다가 壬午軍亂 에 連累되어 處刑된 이회정 의 曾孫이었다. 本貫은 全州 (全州)이고 忠淸道 槐山郡 에서 出生. 한때 全羅北道 全州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後 漢城府 에서 成長하였다.

傷害를 거쳐 美國으로 건너가 접시닦이 等을 하면서 學校를 다녔다. [3] 아이오와 州立 데이버 大學校 를 나온 後 歸國하였다. 李承晩 의 指示로 自由黨 의 創黨을 主導하였고 1951年 金性洙 等 한민당을 野黨으로 李承晩 自由黨 組織을 結成할 때 그것을 도와서 新黨의 中央위 議長에 推戴되어 黨의 實權을 잡았다. 1954年 에는 國會議長이 됨과 同時에 本人의 아들 이강석을 李承晩의 後繼者로서 大統領 官邸인 景武臺로 보냄으로써 李承晩의 뒤를 이어 最高의 權力者로 君臨하고, 그의 居處는 西大門 景武臺라 불릴 程度로 權力을 쥐게 되었다.

1956年 第3代 鄭副統領 選擧에 出馬했으나 落選하였고 1960年 에 實施한 1960年 鄭副統領 選擧 로 當選되었으나 不正選擧임이 밝혀지면서 辭退하였다. 海外로 逃走하려던 그해 4月 28日 아들 이강석 에 依해 拳銃으로 殺害되었다.

出生과 幼年期 編輯

晩松(晩松) 李起鵬은 忠北 槐山郡 청천면 후평리에서 沒落한 兩班家의 獨子로 태어났다. 朝鮮 太宗의 次男 孝寧大君의 17代孫이었으나, 王族 으로서의 大宇는 13對照에서 끝이 났고, 그 뒤 子孫들의 顯達로 增 議政府領議政에 追贈된 전성군 이대는 그의 12對照였다. 그의 曾祖父 이회정(李會正)은 朝鮮 後期의 文臣으로 興宣大院君의 手下에서 活躍하다가 壬午軍亂에 連累, 明成皇后의 閔氏 政權에 依해 流配되었다가 처형당했다 한다.

以後 그의 家計는 沒落하여 어렵게 지냈고, 그의 回顧에 依하면 '할아버지도 20歲에 死亡하고 아버지 마저 오래 산다는게 30歲를 넘기지 못하고 死亡했다.' 아버지를 여읠 때 그의 나이 10歲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寡婦인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成長했다. 가난한 環境에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였고 밥을 굶기를 例事로 하여 몸이 病弱하였다 한다. 그가 小學校에 다닐 때는 며칠 안있어 죽을 아이를 무엇하러 學校에 보내나 하고 손가락질 하는 洞里 어른들이 있었다고 한다. 小學校에 다닐 때는 노래를 잘 불러서 여기 저기 뽑혀다니기도 하였다.

學窓 時節 編輯

어려운 環境에서 苦學으로 지내던 그는 宣敎師의 도움으로 中學校에 入學하여 工夫하게 되었다. 當時 그는 한글學者인 주시경 을 만나 그의 影響을 받게 되었다. 주시경 外에 崔麟 等을 恩師로 만났고, 中學校 2學年 때는 李承晩 (李承晩)을 만나 알게 되었다. 學生으로는 許政 , 김도연 等을 만나 親分關係를 쌓기도 했다. 그러나 寶城中學校 在學 當時 그의 家庭 環境은 어려워져 京城府 를 떠나 京畿道 水原 매鄕校 다리 近處로 移徙하여 지내게 되었다. 집안에 食糧이 不足하고 糧食을 求할 수 없어 生殖을 1年間 하기도 했다. 몸이 病弱하여 通學이 어려웠던 그의 어려운 環境을 들은 寶城中學校 當時 校長 崔麟 (崔麟)의 周旋으로 同窓 金瓚 (金燦)李 自身의 집에서 下宿하도록 도와주어 學校를 다닐 수 있었고, 다시 親舊인 최승만의 집으로 옮겨가서 下宿하며 中學校를 마쳤다. 또한 崔麟 은 그에게 몸이 弱한 사람은 生食을 하면 危險하다며 生殖을 그만두게 하였다.

體力이 弱했던 그는 運動會에 賞을 타는 것을 부러워하여 每日 새벽에 南山을 뛰어갔다가 오는 練習을 4個月間 反復하여 하다가 運動會에 500m 慶州에서 2等으로 立像하기도 했다. 寶城中學校 在學 中 寫生大會에 그는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의 한글飜譯本 冊表紙의 장발장 그림을 模寫하여 出品하고 題目을 歸鄕老人이라는 이름으로 提出하였다. 當時 최남선 은 어느 雜誌에 寶城中學校의 李君의 歸鄕老人이라는 作品은 장발장을 聯想케 한다는 論評을 낸 것을 李起鵬은 後日 偶然히 發見하였다. 寶城中學校의 理事長이었던 손병희 는 直接 學生들에게 旅費를 주고 徒步旅行으로 慶尙北道 慶州市 까지 修學旅行을 갔다. 그러나 그의 體力이 病弱하여 學校 理事長인 손병희 는 그를 慶州 旅行에 데려가는 것을 躊躇하였으나 울면서 哀乞하여 慶州에 같이 가게 되었다. 大邱까지 汽車로 旅行한 뒤 大邱에서 내려 慶州까지 徒步로 걸어가게 되었는데 키가 크고 나이 많은 學生들은 발이 붓고 터지고 病이 나고 하였다. 안데리고 가겠다는 것을 떼를 써서 가게 된 그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참고 따라갔다고 한다. 以後 中學校 를 어렵게 卒業했고 1915年 京城 寶城高等普通學校 로 入學한다. [4] 中學校 卒業 直後 中國人 敎會에 다녔고, 남궁억 과 함께 敎會 聖歌隊員으로도 活動했고, 樂器 演奏도 하였다. 中學校 卒業 直後 一時的으로 西洋人의 通譯으로 就職하기도 했다.

都彌 遊學 編輯

寶城高等普通學校 卒業以後 1918年 연희전문학교 에 進學했으나 中退하였다.

연희전문학교 中退 後 막일을 轉轉하던 中, J.R.무스 宣敎師 의 通譯으로 活動하였다. 그러나 通譯 當時 聖經 飜譯에 쓰던 訓民正音體를 使用하지 않고, 주시경 의 한글體(現代한글體)를 使用한 것이 問題되어 무스 宣敎師와 葛藤하였고, 結局 무스와 싸운 뒤 通譯을 그만두었다.

그 後 美國 留學을 決心, 掉尾하였다. 옷이 없던 그는 當時 中央學校에 勤務하던 恩師인 남상협(南相協)에게서 입던 헌 洋服을 빌려입고 出國했으며, 그 後 日本 을 거쳐 美國 으로 掉尾하였다. 길을 잘못찾아 상하이 로 건너갔던 그는 美國 으로 가는 길을 몰라 상하이로 온 백낙춘을 만났다.

백낙춘은 그에게 배삯을 주는 代身 美國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條件을 달았다. 그에게 美國으로 引導하는 條件으로 旅費를 負擔하였다. 배가 日本 요코하마 를 經由, 當時 韓國人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日本警察에 依해 本國으로 送還되었다. 그는 中國 人 乘客들이 노름하는 곳에 끼어 危機를 謀免하고 백낙준과 美國 에 到着했다. 美國 샌프란시스코 에 到着한 그는 삯이 없어 韓國人 僑胞의 周旋으로 심부름꾼으로 일하기도 했다.

以後 南部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를 거쳐 LA近郊 헌팅턴의 호텔에 從業員으로 就職하였다. 아이오와 데이버 大學校 文學 科에 入學하였고, 스스로 高學科 勞動으로 學費를 調達했으며 1923年 美國 아이오와 데이버 大學校 를 卒業을 했다. [4] 데이버 大學 卒業 直後 뉴욕 으로 건너가서 勞動을 하였다.

뉴욕에서 勞動을 하던 中 크리스마스에 韓國人 留學生들이 뉴욕에 모여 크리스마스 祝賀 行事를 할 때, 聖誕節 記念 演劇 '東方博士와 세사람'의 男子 主人公을 맡게 되었다. 같은 演劇의 女子 主人公을 맡게 된 留學生 박마리아 를 알게 되어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日帝 强占期 後半 編輯

結婚과 歸國 編輯

美國 에서 大韓國民會 會長으로 있던 李承晩 을 만났고, 李承晩 同志會 에 加擔, 장덕수 · 윤치영 · 許政 과 함께 '三逸新聞'을 發刊에 參與하였는데, 이 때부터 李承晩 의 側近이 되었다. 許政 이 歸國하면서 그는 三逸新譜를 引受, 運營하였으나 곧 經營難과 財政難으로 門닫게 되었다. 歸國後 許政 과 다시 鑛産業 을 同業하였다.

 
否認 박마리아
( 이화여전 時節)

以後 주시경 에게서 배운 筆跡이 問題되어 한때 日警의 監視를 받기도 했다. 留學時節 新民會 集會에서 박마리아 를 만나 1931年 約婚했다가 박마리아 의 歸國으로 約婚이 取消되었다. 박마리아 이화여자대학교 [5] 에 敎授로 在職 中이었고 1934年 (週: 新韓民報 1934.08.23) 李起鵬이 歸國하면서 다시 再會하여 1934.12.15(土) 結婚하였다.(주: 朝鮮 中央日報 消化9年11.29).結婚 當時 별다른 職業이 없었던 일로 丈母의 反對가 甚하였으나 아내 박마리아 를 통해 어렵게 結婚 승락을 얻어냈다.

商店 經營과 事業 失敗 編輯

1934年 當時 이화여전에서 講師를 하고 있던 박마리아와 結婚하였다.

1934年 歸國 (週: 新韓民報 1934.08.23) 後 李起鵬은 北村 一帶에서 商店인 가회商會를 開業, 運營했지만 失敗했고, 1934年 結婚 以後에는 中樞院 參議 최남이 經營하던 鍾路 국일관 支配人을 지냈다. 이 무렵 夫人 박마리아와의 사이에 長男 이강석 (李康石), 長女 이강희, 次男 이강욱 (李康旭) 子女들이 있었는데, 長女 이강희는 서울 李花女子中學校 在學 中 病으로 死亡했기에 子女들은 두아들만 남았다. 다방 <鍾路>를 經營하기도 했고, 建築請負業 事務所 開設 等 雜多한 일을 거쳐 日帝强占期 末期엔 許政 (許政)과 함께 鑛山을 經營하기도 했지만, 事業手腕이 없어서인지 빛을 보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1940年 以後 朝鮮總督府 當局으로부터 創氏改名 齡이 떨어졌으나 그는 創氏改名을 拒絶하고 鑛産業과 商店 經營에 沒頭하였다. 1945年 一齊 가 反體制 人士들을 肅淸한다는 情報를 入手하고 京城府 道峰 으로 隱身, 숨어 지내다가 8月 光復을 맞았다.

解放을 맞이하기까지 約 10年間 뚜렷한 職場이 없이 妓生料理집인 국일관에서 허드레 일을 하는 雇用人으로 있었다고 한다. [6] 解放 後 李承晩이 歸國하자 그의 居處인 돈암장에서 執事를 하게 되었다.

政治 活動 編輯

李承晩의 祕書 編輯

 
1946年 3月 26日 , 李承晩 生日을 맞아 돈암장 에서 側近들과 함께 記念 撮影한 李承晩 夫婦. 寫眞 왼쪽 넥타이를 매고 서있는 사람이 이기붕이다.

光復 以後, 1945年 9月 美軍 이 進走하자 美軍政 의 通譯官으로 採用되었다. 軍政廳 通譯官 當時 給料를 초콜렛과 캔디로 받았다. 10月 12日 李承晩 이 歸國하면서 그는 李承晩 의 첫 私邸인 돈암장 에서 李承晩 祕書 職으로 지내게 되는데, 이는 過去 李承晩 과 因緣을 가진 것 德分이었다. 李承晩 의 祕書로 있던 中, 그의 다른 祕書인 윤치영 과는 競爭關係에 놓이기도 했다.

李承晩과 돈암장의 祕書로 活動하던 그는 左右合作과 信託統治를 反對하는 李承晩 하지 와의 關係가 惡化되자 中間에 難處한 立場에 處하기도 했다. 별다른 支援 없이 李承晩 의 祕書로 活動하면서 그는 집이 있는 북아현동에서 李承晩의 私邸가 있는 돈암동과 마포장으로 걸어서 出退勤하였다.

解放 政局의 活動 編輯

프란체스카 도너와 親密해진 박마리아의 周旋으로 李承晩의 信任을 얻어 急速히 順調로운 出世街道를 달리기 始作했다. [6] 以後 윤치영 의 否認 이은혜 를 부담스러워 하던 프란체스카 도너 이은혜 를 멀리하고 李承晩의 또다른 側近인 임영신 돈암장 에 出入禁止 시키면서 그의 아내 박마리아 프란체스카 도너 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以後 윤치영 , 임영신 等이 자연스럽게 李承晩의 곁에서 멀어지자 그가 李承晩의 祕書室長을 맡게 되었다.

그 一連의 垂直上昇 뒤에서 作用한 夫人 박마리아의 絶妙한 權謀術數는 韓國 社會에서 話題거리가 되었다. [6] 1946年 大韓基督敎靑年會聯盟(YMCA) 理事· 조선赤十字社 理事를 지냈다.

李承晩의 祕書로 있을 때 訪問者가 주고 간 高級洋食器에 飮食을 담았다가 李承晩 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李承晩 은 祕書들에게 값싼 질그릇에 飮食을 담을 것을 指示하였으나 高級洋食器에 飮食을 담았다. 한 番은 李承晩에게 '高級樣式氣는 두었다 무엇 하려고 안쓰고 싼 그릇을 또 쓰시라고 하십니까?'라고 質問했다가 李承晩으로부터 叱責을 當하였다.

政府 樹立 初期 編輯

1948年 5月 病院 入院으로 인하여 一時的으로 李承晩의 祕書室長 職을 내놓았다. [7] 以後 8月 22日 大韓民國 政府樹立 後 大統領祕書室 室長이 되었고, 윤보선 의 뒤를 이어 1949年 6月 부터 1949年 8月 까지 서울特別市 市場 을 지냈다. 1949年 8月 부터 1951年 5月 8日 까지 다시 서울市長 에 再選되었다.

健康이 좋지 않았던 그는 1950年 6月 韓國 戰爭 初期에 避身하지 못하고 朝鮮人民軍 서울 을 占領한 狀況에 隱身해 있다가 大田으로 내려왔다. 韓國戰 中이던 1951年 , 國民防衛軍 事件 으로 國防長官 신성모 를 몰아내면서 1951年 5月 부터 1952年 3月 까지 제3대 國防部 長官을 지내어 國民防衛軍 事件 을 處理하였고 1951年 12月 自由黨 創黨 組織에 參與하였다. [4]

國民防衛軍 事件 關聯者를 嚴格히 處罰하려다가 다른 李承晩의 側近들로부터 '李承晩 反對勢力의 앞잡이로 金某 等을 죽이려 한다'는 謀陷을 當하기도 했으나 李承晩 이 듣지 않아 危機를 謀免하였다. 1952年 9月부터 1960年 4月까지 제17대 大韓體育會 會長을 歷任했고 大韓體育會 會長으로 在任中 第6代 大韓올림픽委員會(KOC) 委員長을 兼任하였다.

自由黨 活動과 國會副議長 編輯

1951年 李承晩 의 指示로 이범석 , 장택상 , 전진한 , 박용만 等과 政黨 創黨 作業에 着手, 이범석 等과 함께 自由黨 을 創黨하였다. 自由黨 創黨 初期, 副黨首에 被選된 院外自由黨의 이범석 과 競爭關係에 놓였다. 그러나 副黨首 이범석 의 勢力이 剛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李承晩 과, 李承晩 의 곁에서 이범석 , 윤치영 等 强勁派를 分離시키려는 美國 의 움직임 等에 依해 이범석 이 平黨員으로 格下당하면서 그는 自由黨 의 2人者로 浮上하였다.

1953年 12月 自由黨 中央委員會 議長이 되면서 李範奭의 族靑系(族靑系) 勢力을 逐出하였고, 1954年 6月 부터 1960年 4月 死亡할 때까지 세 次例에 걸쳐 民議員議長에 當選되었으며, 1955年부터는 國際올림픽委員會(IOC) 初代 議員에 被選되었다. [4] 이러면서 그는 權力의 '第2人者'로 登極하였고, 1954年 에는 李承晩 의 大統領 長期執權을 위해 四捨五入 改憲 을 强行하여 可決시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指示한 것 보다 그의 下手人들에 依해 試圖되었다는 反論도 있다. 이 무렵 그의 집은 '西大門 景武臺'라고 불릴 程度로 權力이 集中되고 있었다.

1954年 11月 自由黨 李承晩 의 3線을 確定하기 위해 奔走히 움직일 때 李起鵬은 大統領 面談을 要請하는 金永三 , 김철안, 김상도 等 4名의 景武臺 를 訪問者를 李承晩 에게 引渡했다. 이때 金永三 李承晩 의 앞에서 3選改憲 은 안되며 이番으로 끝나야 한다는 意見을 卽席에서 建議하였으나 默殺되었다. [8] 3選 改憲消息이 報道될 때 다시 景武臺 를 訪問한 金永三 李承晩 大統領에게 " 博士 님, 改憲 하시면 안 됩니다. 國富(國父)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9] 그때 李承晩 은 80代였는데 不快해한 나머지 손을 떨었다 한다. 그러더니 別말 없이 뒷門으로 나가버렸다. [9] 뒤에 李起鵬은 金永三 을 찾아가 火를 내며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老人을 화나게 하느냐?"고 나무랐다고 한다. [9]

第1共和國 後半期에서의 이기붕 權力은 莫强했었다. 그 代表的인 例를 들어서 革命 直前까지만해도 이기붕에 對한 讚揚하는 內容의 書籍이 자주 出刊되기도 하였는데 그 中 '民族의 해와 달'이란 冊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民族의 해'는 大統領 李承晩 을 指稱, '民族의 달'은 李起鵬을 指稱한다. 이 冊에 나오는 內容은 두 사람의 傳記와 思想을 讚揚하는 內容으로 채워져 있다. 그만큼 李起鵬은 第1共和國에서 影響力이나 權力이 얼마나 莫强했는지를 보여준다. [10] 1955年 11月 중앙대학교 에서 名譽 法學 博士 學位를 授與받았다. [11]

副統領 落選 編輯

그는 實際로 매우 病弱했는데, 權力慾이 强해 이정재 를 비롯한 政治깡牌들과 連繫, 주먹의 힘을 빌어 自身의 政治的 力量을 키웠다.

1956年 5月 , 副統領 選擧에 自由黨 公薦으로 出馬하였으나 民主黨 場面 (張勉)에게 敗하여 落選하였다. 李起鵬의 權力 掌握에 反撥한 장택상 , 윤치영 , 이윤영 等 親與 政治人들이 大統領 候補 없는 副統領 候補로 出馬했는데, 이들의 出馬 때문에 與黨 性向의 票가 分散된 結果였다. [12] 같은 해 그는 民議員議長에 再選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4年뒤 1960年 選擧에서 副統領 候補로 다시 出馬한다.

1956年 10月 13日 배재學院 運動場에서 열린 第1次 여야 民議員 親善 野球大會에 參席하여 祝辭를 朗讀했다. [13]

1957年 에는 自己 아들 이강석 을 李承晩의 養子로 入籍시켰다. 李承晩 讓寧大君 의 15代孫이고, 그의 아들인 이강석 효령대군 의 17代 손이므로 孫子 行列인즉 서로서로 모두 寸數가 맞지 않으나 李承晩 의 養子로 入籍된 것이다. 또한 같은 해인 1957年 장택상 의 招待를 받고, 장택상 京畿道 始興 別莊에서 조병옥 과 與野 領袖會談을 하였다. 1957年 가을 장택상 , 民主黨 場面 等과 選擧法 協商을 벌여 候補亂立을 막기 위해 出馬者의 寄託金制를 新設(40萬圜)하고 選擧費用 制限, 選擧關係者만 選擧運動을 할 수 있게 하는등 法을 大幅 손질하고 議席(選擧區)도 203個에서 233個로 늘렸다. [14]

李起鵬은 落選의 危機가 오자 祕書를 보내 이정재의 選擧를 빼앗기로 마음먹고 說得을 했으나 이정재는 憤怒하였고 自身의 말을 듣지 않자 利川의 選擧를 빼앗기 위해 警察을 動員하여 罪目을 政治테러와 集會테러, 選擧테러, 國會테러 等 黃金馬車 襲擊事件과 忠正路 도끼事件 을 利用하여 東大門敗를 모두 拘束하고 이정재를 脅迫했다. 이정재는 結局 選擧를 빼앗기고 政治權力을 못잡게되었다. 西大門區 에서 京畿道 利川 으로 選擧區를 옮긴 李起鵬은 1958年 第4代 民議院議員에 當選되고 民議員議長에도 再選되었다. 自身의 政治的 텃밭을 이기붕에게 빼앗긴 이정재 는 이로 인하여 李起鵬의 곁에서 떠나 한동안 隱遁生活을 하였다. 민주당 候補 연윤희는 黨과 事前에 協議도 없이 느닷없이 立候補를 辭退한 後 潛跡했다가 5日 만에 國會記者室에 나타나 "李起鵬氏와의 對決에서 勝算이 없기 때문에 辭退했다."고 말했다. [15] 1958年 11月 殉國先烈追念回 會長이 되었다. [16]

生涯 後半 編輯

場面과의 葛藤 編輯

3代 副統領 選擧 以後에는 9·28 場面 暗殺 未遂 事件 을 契機로 李承晩의 側近이었다가 민주당으로 간 場面 亦是 敵으로 만들었다. 11月 李起鵬은 被擊 後 入院中인 張勉에게 病問安을 갔는데, 場面은 9·28 事件 의 背後를 이기붕이라고 確信하고 있었다.

應急 治療를 받고 卽時 집으로 돌아갔는데, 30分도 못 되어 이番에는 李起鵬 氏가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狙擊을 當한 나( 場面 )를 慰勞하러 온 것은 感謝했지만 어딘가 造作된 脚本 같아서 不快했다. 내가 천연스런 表情을 짓고 있는 晩松(晩松)에게 “여보시오, 政治라는 건 이렇게 해야 한단 말이오?” 하고 쏘아붙였더니, 그는 暫時 아무 말도 못했다. 平素 [17] 같으면 餘裕 있는 弄談으로 이 말을 받아넘겼을 것이다.

晩松은 한참만에 “張 博士,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이렇게 겨우 얼버무리는 그의 얼굴은 어쩐 셈인지 몹시도 蒼白했다. 한마디로 제대로 할말이 없었던 模樣이다. 워낙 多急했던지 辨明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狙擊을 받고 난 나의 心境은 淡淡한 것이었다. 已往 覺悟한 바를 當했으니 올 것이 왔나보다 하였을 뿐이다. 世上에서 떠든 臺로 事件은 매우 複雜한 것이었던 模樣이다. [18]

 
1960年 3月 17日 東亞日報 . 3.15 不正選擧 開票結果 李承晩 大統領 4線 當選, 李起鵬 副統領 當選을 報道한 記事.

場面 1956年 9月 28日 에 일어난 自身의 暗殺 未遂 事件 의 背後로 李起鵬을 指目했고, 1960年 再搜査 結果 李起鵬의 側近들이 介入한 것으로 確認되었다.

沒落의 前兆 編輯

李起鵬은 李承晩의 側近 및 自由黨 內에서도 많은 敵을 量産하였다. 윤치영 을 敵으로 만들었고, 自由黨 競選 過程에서는 이범석 과 라이벌이 되었으며, 李承晩의 다른 側近이자 越南 靑年을 代表하던 이윤영 도 敵으로 돌렸다. 윤치영 等은 그의 落選을 위해 副統領 候補로 出馬하였고, 이윤영 은 露骨的으로 李起鵬을 落選時期키 위해 副統領에 出馬한다. [19] 에 言及하기도 했다.

윤치영 은 1956年 副統領 選擧에 出馬하면서 '나는 萬송이 副統領 으로 當選이 된다면 그를 에워싼 아첨배들의 極盛으로 나라의 將來를 그르칠 것이라고 念慮가 되었고, 그러한 그들의 派黨冊 作弊를 豫防하려는 뜻에서 내가 屬해 있는 大韓國民黨의 副統領 候補로 나서기로 決心하였다. 當選되리라는 豫想 보다는 내가 고약하게 보고 있는 무리들에 업힌 이기붕 候補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落選시켜야 한다는 하나의 使命感 때문이었다. [20] '고 하였다.

1959年 이윤영 殷 나라의 運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李承晩에게 進言을 하러 景武臺 로 찾아갔다. [19] 그러나 李起鵬이 못만나게 해 놓아서 結局 이윤영 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 大統領 面會를 拒絶當하자 이윤영 은 다시 副統領 候補에 立候補하였다. 周圍에서 副統領 立候補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말리기도 하였다. [19] 그러나 이윤영 은 李起鵬을 落選시키기 위해서 出馬한다고 하였다.

씨름판에 나가는 사람이 꼭 이기려고 나가느냐? 씨름에 져도 잠뱅이나 찢으려 나가는 거지! 李起鵬이를 떨구기 위해서다. [19]

李起鵬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 에게 돈 1億원을 보내드릴 터이니 辭退하고 自己를 밀어줄 것을 提案하였으나 이윤영은 크게 나무라고 해서 되돌려보냈다. [19] 李承晩의 側近들 中에서도 敵을 만들었던 李起鵬은 副統領 選擧에서 落選하고 말았다. 이기붕에게 好意的이었거나 同情心을 보인 人物은 장택상 民主黨 조병옥 許政 等이 있었다.

萬年 編輯

 
首都陸軍病院으로 옮겨진 李起鵬의 屍身

1960年 第5代 副統領 選擧에서 自由黨 副統領 候補者로 出馬하였다.

3·15 不正選擧 를 통해 副統領 에 當選되었으나 [21] , 4·19 革命 이 일어나자 政界 隱退를 宣言하였다.

4.19 革命의 導火線이 되었던 1960年의 3.15 不正選擧는 任期를 마칠 可望이 없는 高齡의 李承晩을 大統領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大統領 有故時 承繼權을 가진 副統領의 地位에 李起鵬을 앉히려는 것이었다. [6]

4月 28日 새벽, 李承晩 政權의 沒落으로 自身이 危險에 處해진 李起鵬은 美國으로 逃走하려고 했었으나, 景武臺 別館에서 當時 陸軍 少尉로 服務 中이던 아들 이강석 (李康石)李 拳銃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李康旭)을 次例로 쏘아 죽이고 自殺하여 그의 一家族은 滅門之禍를 當하였다.(이에는 이강석이 죽였는지 다른 누가 죽였는지 論難이 있다. 4.19革命 參考)

事後 編輯

이기붕과 一家의 屍身은 누군가에 依해 收拾되어 1960年 4月 30日 首都陸軍病院 敎會에서 葬禮式을 치렀다. 葬禮式에는 李承晩 , 프란체스카 도너 , 許政 等 內閣 人事, 與野 國會議員 一部가 參與하고, 葬地는 망우리 共同墓地, 먼저 죽은 딸 이강희의 墓 近處에 이기붕 內外의 墓, 아들 이강욱, 이강석의 墓가 그 아래, 먼저 죽은 이강희의 墓所 옆에 造成되었다.

그들 內外가 살던 집은 第2共和國 當時 國家에 還收되어 집터에 4·19革命記念圖書館 이 建立되었다.

學歷 編輯

名譽 博士 學位 編輯

評價 編輯

大韓民國 14代 大統領 을 지낸 金永三 은 '밑에 사람들이 補佐를 잘 못했고 李起鵬이 健康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大統領 欲心이 있었다.'고 評價하였다. [9]

家族 編輯

효령대군 의 後孫으로, 寶城郡 合- 律員群 種-女兩軍 自謙-전성군 臺 家門의 後孫이며, 明宗 代의 權臣 이량 의 13代孫이 된다.

否認 박마리아 에게서 2男 1女를 두었으나 딸 이강희 는 夭折하였고, 두 아들은 未婚으로 後孫은 없다.

1962年 3月 30日 一家인 前 제일은행 銀行長 이기호(李起虎)의 次男 이강복(李康福)을 死後養子로 入養, 종로구청 에 入養手續을 했다. [22]

  • 從曾祖?: 이회순(李會淳)
  • 曾祖父?: 이회정 (李會正)
  • 曾祖母?: 宜寧南氏, 남영교(南泳敎)의 딸
    • 從祖父?: 이덕우(李悳宇)
      • 堂叔?: 이정의(李定儀)
        • 再從兄?: 이기룡(李起龍), 大學 敎授
        • 再從兄嫂?: 풍천林氏, 임재호(任載鎬)의 딸
    • 祖父?: 이석우(李錫宇, 1853年 12月 21日 ~ 1881年 11月 23日)
    • 조某?: 백천조氏(1849年 8月 29日 ~??), 조용재(趙容在)의 딸
      • 生父?: 이낙의(李洛儀, 1876年 4月 25日 ~??)
      • 生母?: 송정현(1875年 8月 7日 ~??)
        • 否認?: 박마리아
          • 長男?: 이강석 (李康石,1937年 ~ 1960年)
          • 次男?: 이강욱(李康郁,1940年 ~ 1960年)
          • 長女?: 이강희(李康姬,1935年 ~ 1949年)腰絶
          • 兩者?: 이강복(李康福, 1937年 ~ ),
  • 外할아버지?: 송규원(宋圭元)

기타 編輯

이기붕 自身은 溫和한 人物로 그 程度까지 權力에 執着하는 性格은 아니었다고 한다. 4.19를 招來한 張本人으로서의 悲慘한 末路는 惡妻 박마리아 夫人의 道를 넘는 內助의 공이 招來한 不幸이었을지도 모른다 [6] 는 評이 있다. 李承晩 政權의 第2人者로서 無所不爲의 權力을 휘두르다가 4·19 革命 으로 沒落하여 悲劇的인 最後를 맞이하고 家門이 絶滅했다는 點에서 朝鮮 광해군 때 對北派 領袖이자 政權의 第2人者로서 莫强한 權勢를 휘두르다가 仁祖反正 으로 沒落하여 斬刑을 當하고 滅門之禍를 當한 管送 이이첨 과 比較된다.

또한 그들의 主人이었던 光海君과 李承晩은 政界에서 沒落한 以後 各各 濟州道 하와이 에서 살다가 病으로 死亡하였는데, 두 사람은 流配와 亡命이라는 差異點이 있으나, 끝내 本土로 돌아오지 못하고, 晩年을 島嶼地域에서 生活하다가 現地에서 病死했다는 共通點이 있다. 다만 이기붕과 李爾瞻의 差異點도 있는데 李爾瞻은 現在의 總理級인 政丞級 品階에 오르기는 했지만, 現在의 三府要人 또는 五部要因에 該當하는 三政丞 [23] 자리에는 끝내 오르지 못했고 [24] 李起鵬은 朝鮮時代 政丞級에 該當하는 總理級까지 올라서 國會議長까지 했다는 것이 差異點이다.

그리고 李承晩 은 하와이에서 逝去한 後 國內로 送還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安葬되었지만 이이첨 의 主人인 光海君은 죽은 後 나름대로 王子의 例로 갖춰서 南楊州에 鞍裝이 되기는 했지만 菱堤가 省略된 形式으로 安葬된 것도 差異點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光海君과 이이첨 이 屬했던 대북파는 仁祖反正 以後 모두 몰살당했으며 對北派 人士들도 大部分 몰살당했는데 李承晩 과 李起鵬이 이끌던 自由黨도 沒落하고 그 쪽에서 活動하던 自由黨 人士들과 李承晩 政府 人士들은 以後에 拘束이 되어 裁判을 받고 刑을 宣告받는다는 點도 똑같다는 點이다.

하지만 광해군 이이첨 의 對北派 人士들은 大部分 死刑당하거나 流配를 가지만 이와 달리 李承晩 과 李起鵬이 屬한 自由黨 人士들과 李承晩 政府의 人士들은 刑을 宣告받은 뒤에 5.16 軍事政變 으로 登場한 朴正熙 軍事政權에 依해 一部를 除外하면 거의 大部分 特別赦免으로 釋放되었고 以後에도 軍事政權에서 長官職에 進出하거나 政治를 繼續 하는 境遇도 있고, 企業人이나 言論人, 政治諮問 擔當人士, 保守性向 市民團體 人士로 變身하는 境遇도 있었는데 이 點에서도 差異點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李起鵬을 演技한 俳優들 編輯

텔레비전 드라마 編輯

라디오 드라마 編輯

映畫 編輯

關聯 書籍 編輯

  • 조병옥과 이기붕 (李兄 저, 삼일서적, 2002)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50年代 便2 (人物과사상사, 2006)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60年代 便1 (人物과사상사, 2006)
  • 紅友出版社, 政界野花 (前2卷) (紅友出版社, 1966)
  • 신태양사,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나의 政治白書) (신태양사, 1957)
  • 박용만, ≪景武臺 飛火≫, 韓國政經社, 1965.
  • ≪晩松 利己붕 先生≫, 國際 시보사, 1960.
  • ≪親日派 群像≫, 國際시보사, 1960.
  • 編輯部, 韓國史 市民講座:第43輯 (일조각, 2008)

歷代 選擧 結果 編輯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54年 總選 3代 國會議員 서울 西大門區 을 自由黨 12,923票
58.63%
1位   初選
1956年 大選 4大 副統領 大韓民國 自由黨 3,805,502票
44.0%
2位 落選
1958年 總選 4大 國會議員 京畿 伊川郡 自由黨 無投票
0%
  再選
1960年 大選 5大 副統領 大韓民國 自由黨 8,337,059票
79.2%
1位   無效

各州 編輯

  1. “悔改치 않은 敎會… 그래서 4·19는 未完의 革命”?:: 宗敎新聞 1位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2. 四寸 兄 이기룡은 신익희 의 漢城外國語學校 恩師이기도 하였다.
  3. 정경모, 《찢겨진 傘下:구름 위의 情談》(企劃出版, 1986) 171페이지
  4. iMBC.com, More Click Better Life!
  5. 當時 이화여전은 學生이 結婚할 수 없었고, 旣婚者는 받지 않는다는 規定이 있었다.
  6. 정경모, 《찢겨진 傘下:구름 위의 情談》 (企劃出版, 1986) 172페이지
  7. 以後 윤보선이 國會議長 李承晩의 祕書室長을 맡게 된다.
  8. 손세일, 김대중과 金永三(1985, 일월서각) 112페이지
  9. YS 單獨인터뷰-"DJ가 1年6個月 동안 내 뒷調査해, 그러나 容恕…" Archived 2012年 1月 27日 - 웨이백 머신 示唆온 2009年 10月 24日子 記事
  10. “民族의 해와 달” .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2月 8日에 確認함 .  
  11. "重大서 學位 授與 大統領夫人等 陸名", 京鄕新聞 1955年 11月 7日子 3面, 政治面
  12. 이윤영은 回顧錄에서 李起鵬을 落選시키기 위해 두 番이나 副統領 候補에 出馬했다고 陳述했다.
  13. 조성관, 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歷史 (熊進씽크빅, 2006) 122페이지
  14. 自由公論 2008年 5月號(韓國自由總聯盟, 2008) 33페이지
  15. 年市中 저「韓國政黨政治 實錄」本文 中 知와사랑 2001年 1月 1日 59페이지 ISBN  8989007283
  16. 東亞日報 1958年 11月 15日子
  17. 場面,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장면 回顧錄》 (가톨릭出版社 增補版, 1999) 54페이지
  18. 場面,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장면 回顧錄》 (가톨릭出版社 增補版, 1999) 55페이지
  19. 國務總理署理 백사 이윤영 回顧錄(莎草, 1984) 238페이지
  20. 윤치영, 《東山回顧錄:윤치영의 20世紀》 (삼성출판사, 1991) 309페이지
  21. 開票造作을 그가 直接 指示했는가 與否는 不分明하다.
  22. "李起鵬의 養子 決定 李起虎氏 次男", 東亞日報 1962.04.10. 3面, 社會面
  23. 右議政 , 左議政 , 領議政 을 말한다.
  24. 李爾瞻은 禮曹判書, 大提學, 判義禁府事를 했으며 最終 官職은 右贊成이었다.

參考 資料 編輯

外部 링크 編輯

前任
윤보선
第3·4代 서울特別市葬
1949年 6月 6日 ~ 1951年 5月 7日
後任
(權限代行) 전예용
김태선
前任
신성모
第3代 國防部 長官
1951年 5月 7日 ~ 1952年 3月 29日
後任
신태영
前任
조병옥
第17代 大韓體育會 會長
1952年 9月 27日 ~ 1960年 4月 28日
後任
이철승
前任
신익희
第3·4代 民議員議長
1954年 6月 9日 ~ 1960年 4月 28日
後任
곽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