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淸北道
槐山郡 괴산읍
에서 出生하여 忠淸北道
槐山郡 曾坪面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後
漢城府
에서 成長한 그는
8·15 光復
以後
李承晩
의 祕書,
國防部 長官
,
서울特別市
市場,
國會議長
職을 歷任하였다. 그는
朝鮮 太宗
의 차자(次子)인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17代孫으로,
흥선大院君
의 側近이었다가
壬午軍亂
에 連累되어 處刑된
이회정
의 曾孫이었다. 本貫은
全州
(全州)이고
忠淸道
槐山郡
에서 出生. 한때
全羅北道
全州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後
漢城府
에서 成長하였다.
傷害를 거쳐 美國으로 건너가 접시닦이 等을 하면서 學校를 다녔다.
[3]
아이오와 州立 데이버 大學校
를 나온 後 歸國하였다.
李承晩
의 指示로
自由黨
의 創黨을 主導하였고
1951年
金性洙 等 한민당을 野黨으로
李承晩
이
自由黨
組織을 結成할 때 그것을 도와서 新黨의 中央위 議長에 推戴되어 黨의 實權을 잡았다.
1954年
에는 國會議長이 됨과 同時에 本人의 아들 이강석을 李承晩의 後繼者로서 大統領 官邸인 景武臺로 보냄으로써 李承晩의 뒤를 이어 最高의 權力者로 君臨하고, 그의 居處는 西大門 景武臺라 불릴 程度로 權力을 쥐게 되었다.
1956年
第3代 鄭副統領 選擧에 出馬했으나 落選하였고
1960年
에 實施한
1960年 鄭副統領 選擧
로 當選되었으나 不正選擧임이 밝혀지면서 辭退하였다. 海外로 逃走하려던 그해
4月 28日
아들
이강석
에 依해 拳銃으로 殺害되었다.
出生과 幼年期
編輯
晩松(晩松) 李起鵬은 忠北 槐山郡 청천면 후평리에서 沒落한 兩班家의 獨子로 태어났다. 朝鮮 太宗의 次男 孝寧大君의 17代孫이었으나,
王族
으로서의 大宇는 13對照에서 끝이 났고, 그 뒤 子孫들의 顯達로 增 議政府領議政에 追贈된 전성군 이대는 그의 12對照였다. 그의 曾祖父 이회정(李會正)은 朝鮮 後期의 文臣으로 興宣大院君의 手下에서 活躍하다가 壬午軍亂에 連累, 明成皇后의 閔氏 政權에 依해 流配되었다가 처형당했다 한다.
以後 그의 家計는 沒落하여 어렵게 지냈고, 그의 回顧에 依하면 '할아버지도 20歲에 死亡하고 아버지 마저 오래 산다는게 30歲를 넘기지 못하고 死亡했다.' 아버지를 여읠 때 그의 나이 10歲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寡婦인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成長했다. 가난한 環境에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였고 밥을 굶기를 例事로 하여 몸이 病弱하였다 한다. 그가 小學校에 다닐 때는 며칠 안있어 죽을 아이를 무엇하러 學校에 보내나 하고 손가락질 하는 洞里 어른들이 있었다고 한다. 小學校에 다닐 때는 노래를 잘 불러서 여기 저기 뽑혀다니기도 하였다.
學窓 時節
編輯
어려운 環境에서 苦學으로 지내던 그는 宣敎師의 도움으로 中學校에 入學하여 工夫하게 되었다. 當時 그는 한글學者인
주시경
을 만나 그의 影響을 받게 되었다.
주시경
外에
崔麟
等을 恩師로 만났고, 中學校 2學年 때는
李承晩
(李承晩)을 만나 알게 되었다. 學生으로는
許政
,
김도연
等을 만나 親分關係를 쌓기도 했다. 그러나
寶城中學校
在學 當時 그의 家庭 環境은 어려워져
京城府
를 떠나
京畿道
水原
매鄕校 다리 近處로 移徙하여 지내게 되었다. 집안에 食糧이 不足하고 糧食을 求할 수 없어 生殖을 1年間 하기도 했다. 몸이 病弱하여 通學이 어려웠던 그의 어려운 環境을 들은 寶城中學校 當時 校長
崔麟
(崔麟)의 周旋으로 同窓
金瓚
(金燦)李 自身의 집에서 下宿하도록 도와주어 學校를 다닐 수 있었고, 다시 親舊인 최승만의 집으로 옮겨가서 下宿하며 中學校를 마쳤다. 또한
崔麟
은 그에게 몸이 弱한 사람은 生食을 하면 危險하다며 生殖을 그만두게 하였다.
體力이 弱했던 그는 運動會에 賞을 타는 것을 부러워하여 每日 새벽에 南山을 뛰어갔다가 오는 練習을 4個月間 反復하여 하다가 運動會에 500m 慶州에서 2等으로 立像하기도 했다.
寶城中學校
在學 中 寫生大會에 그는
빅토르 위고
의
레미제라블
의 한글飜譯本 冊表紙의
장발장
그림을 模寫하여 出品하고 題目을 歸鄕老人이라는 이름으로 提出하였다. 當時
최남선
은 어느 雜誌에 寶城中學校의 李君의 歸鄕老人이라는 作品은 장발장을 聯想케 한다는 論評을 낸 것을 李起鵬은 後日 偶然히 發見하였다. 寶城中學校의 理事長이었던
손병희
는 直接 學生들에게 旅費를 주고 徒步旅行으로
慶尙北道
慶州市
까지 修學旅行을 갔다. 그러나 그의 體力이 病弱하여 學校 理事長인
손병희
는 그를
慶州
旅行에 데려가는 것을 躊躇하였으나 울면서 哀乞하여 慶州에 같이 가게 되었다. 大邱까지 汽車로 旅行한 뒤 大邱에서 내려 慶州까지 徒步로 걸어가게 되었는데 키가 크고 나이 많은 學生들은 발이 붓고 터지고 病이 나고 하였다. 안데리고 가겠다는 것을 떼를 써서 가게 된 그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참고 따라갔다고 한다. 以後
中學校
를 어렵게 卒業했고
1915年
京城
寶城高等普通學校
로 入學한다.
[4]
中學校 卒業 直後
中國人
敎會에 다녔고,
남궁억
과 함께 敎會 聖歌隊員으로도 活動했고, 樂器 演奏도 하였다. 中學校 卒業 直後 一時的으로 西洋人의 通譯으로 就職하기도 했다.
都彌 遊學
編輯
寶城高等普通學校 卒業以後 1918年
연희전문학교
에 進學했으나 中退하였다.
연희전문학교
中退 後 막일을 轉轉하던 中, J.R.무스
宣敎師
의 通譯으로 活動하였다. 그러나 通譯 當時 聖經 飜譯에 쓰던 訓民正音體를 使用하지 않고,
주시경
의 한글體(現代한글體)를 使用한 것이 問題되어 무스 宣敎師와 葛藤하였고, 結局 무스와 싸운 뒤 通譯을 그만두었다.
그 後
美國
留學을 決心, 掉尾하였다. 옷이 없던 그는 當時 中央學校에 勤務하던 恩師인 남상협(南相協)에게서 입던 헌 洋服을 빌려입고 出國했으며, 그 後
日本
을 거쳐
美國
으로 掉尾하였다. 길을 잘못찾아
상하이
로 건너갔던 그는
美國
으로 가는 길을 몰라 상하이로 온 백낙춘을 만났다.
백낙춘은 그에게 배삯을 주는 代身 美國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條件을 달았다. 그에게 美國으로 引導하는 條件으로 旅費를 負擔하였다. 배가
日本
요코하마
를 經由, 當時 韓國人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日本警察에 依해 本國으로 送還되었다. 그는
中國
人 乘客들이 노름하는 곳에 끼어 危機를 謀免하고 백낙준과
美國
에 到着했다.
美國
샌프란시스코
에 到着한 그는 삯이 없어 韓國人 僑胞의 周旋으로 심부름꾼으로 일하기도 했다.
以後 南部
캘리포니아
와
로스앤젤레스
를 거쳐 LA近郊 헌팅턴의 호텔에 從業員으로 就職하였다.
아이오와
週
데이버
大學校
文學
科에 入學하였고, 스스로 高學科 勞動으로 學費를 調達했으며
1923年
美國
아이오와
週
데이버
大學校
를 卒業을 했다.
[4]
데이버 大學 卒業 直後
뉴욕
으로 건너가서 勞動을 하였다.
뉴욕에서 勞動을 하던 中 크리스마스에 韓國人 留學生들이 뉴욕에 모여 크리스마스 祝賀 行事를 할 때, 聖誕節 記念 演劇 '東方博士와 세사람'의 男子 主人公을 맡게 되었다. 같은 演劇의 女子 主人公을 맡게 된 留學生
박마리아
를 알게 되어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日帝 强占期 後半
編輯
結婚과 歸國
編輯
美國
에서
大韓國民會
會長으로 있던
李承晩
을 만났고,
李承晩
의
同志會
에 加擔,
장덕수
·
윤치영
·
許政
과 함께 '三逸新聞'을 發刊에 參與하였는데, 이 때부터
李承晩
의 側近이 되었다.
許政
이 歸國하면서 그는 三逸新譜를 引受, 運營하였으나 곧 經營難과 財政難으로 門닫게 되었다. 歸國後
許政
과 다시
鑛産業
을 同業하였다.
以後
주시경
에게서 배운 筆跡이 問題되어 한때 日警의 監視를 받기도 했다. 留學時節
新民會
集會에서
박마리아
를 만나
1931年
約婚했다가
박마리아
의 歸國으로 約婚이 取消되었다.
박마리아
는
이화여자대학교
[5]
에 敎授로 在職 中이었고
1934年
(週: 新韓民報 1934.08.23) 李起鵬이 歸國하면서 다시 再會하여 1934.12.15(土) 結婚하였다.(주: 朝鮮 中央日報 消化9年11.29).結婚 當時 별다른 職業이 없었던 일로 丈母의 反對가 甚하였으나 아내
박마리아
를 통해 어렵게 結婚 승락을 얻어냈다.
商店 經營과 事業 失敗
編輯
1934年 當時 이화여전에서 講師를 하고 있던 박마리아와 結婚하였다.
1934年
歸國 (週: 新韓民報 1934.08.23) 後 李起鵬은 北村 一帶에서 商店인 가회商會를 開業, 運營했지만 失敗했고,
1934年
結婚
以後에는
中樞院
參議 최남이 經營하던 鍾路 국일관 支配人을 지냈다. 이 무렵 夫人 박마리아와의 사이에 長男
이강석
(李康石), 長女 이강희, 次男
이강욱
(李康旭) 子女들이 있었는데, 長女 이강희는
서울
李花女子中學校
在學 中 病으로 死亡했기에 子女들은 두아들만 남았다. 다방 <鍾路>를 經營하기도 했고, 建築請負業 事務所 開設 等 雜多한 일을 거쳐
日帝强占期
末期엔
許政
(許政)과 함께 鑛山을 經營하기도 했지만, 事業手腕이 없어서인지 빛을 보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1940年
以後
朝鮮總督府
當局으로부터
創氏改名
齡이 떨어졌으나 그는 創氏改名을 拒絶하고 鑛産業과 商店 經營에 沒頭하였다.
1945年
初
一齊
가 反體制 人士들을 肅淸한다는 情報를 入手하고
京城府
道峰
으로 隱身, 숨어 지내다가
8月
光復을 맞았다.
解放을 맞이하기까지 約 10年間 뚜렷한 職場이 없이 妓生料理집인 국일관에서 허드레 일을 하는 雇用人으로 있었다고 한다.
[6]
解放 後 李承晩이 歸國하자 그의 居處인 돈암장에서 執事를 하게 되었다.
政治 活動
編輯
李承晩의 祕書
編輯
光復 以後,
1945年
9月
美軍
이 進走하자
美軍政
의 通譯官으로 採用되었다. 軍政廳 通譯官 當時 給料를 초콜렛과 캔디로 받았다.
10月 12日
李承晩
이 歸國하면서 그는
李承晩
의 첫 私邸인
돈암장
에서
李承晩
의
祕書
職으로 지내게 되는데, 이는 過去
李承晩
과 因緣을 가진 것 德分이었다.
李承晩
의 祕書로 있던 中, 그의 다른 祕書인
윤치영
과는 競爭關係에 놓이기도 했다.
李承晩과 돈암장의 祕書로 活動하던 그는 左右合作과 信託統治를 反對하는
李承晩
과
하지
와의 關係가 惡化되자 中間에 難處한 立場에 處하기도 했다. 별다른 支援 없이
李承晩
의 祕書로 活動하면서 그는 집이 있는 북아현동에서 李承晩의 私邸가 있는 돈암동과 마포장으로 걸어서 出退勤하였다.
解放 政局의 活動
編輯
프란체스카 도너와 親密해진 박마리아의 周旋으로 李承晩의 信任을 얻어 急速히 順調로운 出世街道를 달리기 始作했다.
[6]
以後
윤치영
의 否認
이은혜
를 부담스러워 하던
프란체스카 도너
가
이은혜
를 멀리하고 李承晩의 또다른 側近인
임영신
을
돈암장
에 出入禁止 시키면서 그의 아내
박마리아
가
프란체스카 도너
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以後
윤치영
,
임영신
等이 자연스럽게 李承晩의 곁에서 멀어지자 그가 李承晩의 祕書室長을 맡게 되었다.
그 一連의 垂直上昇 뒤에서 作用한 夫人 박마리아의 絶妙한 權謀術數는 韓國 社會에서 話題거리가 되었다.
[6]
1946年
大韓基督敎靑年會聯盟(YMCA) 理事·
조선赤十字社
理事를 지냈다.
李承晩의 祕書로 있을 때 訪問者가 주고 간 高級洋食器에 飮食을 담았다가
李承晩
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李承晩
은 祕書들에게 값싼 질그릇에 飮食을 담을 것을 指示하였으나 高級洋食器에 飮食을 담았다. 한 番은 李承晩에게 '高級樣式氣는 두었다 무엇 하려고 안쓰고 싼 그릇을 또 쓰시라고 하십니까?'라고 質問했다가 李承晩으로부터 叱責을 當하였다.
政府 樹立 初期
編輯
1948年
5月
病院 入院으로 인하여 一時的으로 李承晩의 祕書室長 職을 내놓았다.
[7]
以後
8月 22日
大韓民國
政府樹立 後
大統領祕書室
室長이 되었고,
윤보선
의 뒤를 이어
1949年
6月
부터 1949年
8月
까지
서울特別市 市場
을 지냈다.
1949年
8月
부터
1951年
5月 8日
까지 다시
서울市長
에 再選되었다.
健康이 좋지 않았던 그는 1950年
6月
韓國 戰爭
初期에 避身하지 못하고
朝鮮人民軍
이
서울
을 占領한 狀況에 隱身해 있다가 大田으로 내려왔다.
韓國戰
中이던
1951年
,
國民防衛軍 事件
으로 國防長官
신성모
를 몰아내면서
1951年
5月
부터
1952年
3月
까지 제3대 國防部 長官을 지내어
國民防衛軍 事件
을 處理하였고
1951年
12月
自由黨
創黨 組織에 參與하였다.
[4]
國民防衛軍 事件 關聯者를 嚴格히 處罰하려다가 다른 李承晩의 側近들로부터 '李承晩 反對勢力의 앞잡이로 金某 等을 죽이려 한다'는 謀陷을 當하기도 했으나
李承晩
이 듣지 않아 危機를 謀免하였다.
1952年
9月부터
1960年
4月까지 제17대
大韓體育會
會長을 歷任했고 大韓體育會 會長으로 在任中 第6代 大韓올림픽委員會(KOC) 委員長을 兼任하였다.
自由黨 活動과 國會副議長
編輯
1951年
李承晩
의 指示로
이범석
,
장택상
,
전진한
, 박용만 等과 政黨 創黨 作業에 着手,
이범석
等과 함께
自由黨
을 創黨하였다.
自由黨
創黨 初期, 副黨首에 被選된 院外自由黨의
이범석
과 競爭關係에 놓였다. 그러나 副黨首
이범석
의 勢力이 剛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李承晩
과,
李承晩
의 곁에서
이범석
,
윤치영
等 强勁派를 分離시키려는
美國
의 움직임 等에 依해
이범석
이 平黨員으로 格下당하면서 그는
自由黨
의 2人者로 浮上하였다.
1953年
12月 自由黨 中央委員會 議長이 되면서 李範奭의 族靑系(族靑系) 勢力을 逐出하였고,
1954年
6月
부터
1960年
4月
死亡할 때까지 세 次例에 걸쳐 民議員議長에 當選되었으며, 1955年부터는 國際올림픽委員會(IOC) 初代 議員에 被選되었다.
[4]
이러면서 그는 權力의 '第2人者'로 登極하였고,
1954年
에는
李承晩
의 大統領 長期執權을 위해
四捨五入 改憲
을 强行하여 可決시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指示한 것 보다 그의 下手人들에 依해 試圖되었다는 反論도 있다. 이 무렵 그의 집은 '西大門 景武臺'라고 불릴 程度로 權力이 集中되고 있었다.
1954年
11月
自由黨
이
李承晩
의 3線을 確定하기 위해 奔走히 움직일 때 李起鵬은
大統領
面談을 要請하는
金永三
, 김철안, 김상도 等 4名의
景武臺
를 訪問者를
李承晩
에게 引渡했다. 이때
金永三
은
李承晩
의 앞에서
3選改憲
은 안되며 이番으로 끝나야 한다는 意見을 卽席에서 建議하였으나 默殺되었다.
[8]
3選 改憲消息이 報道될 때 다시
景武臺
를 訪問한
金永三
은
李承晩
大統領에게 "
博士
님,
改憲
하시면 안 됩니다. 國富(國父)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9]
그때
李承晩
은 80代였는데 不快해한 나머지 손을 떨었다 한다. 그러더니 別말 없이 뒷門으로 나가버렸다.
[9]
뒤에 李起鵬은
金永三
을 찾아가 火를 내며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老人을 화나게 하느냐?"고 나무랐다고 한다.
[9]
第1共和國
後半期에서의 이기붕 權力은 莫强했었다. 그 代表的인 例를 들어서
革命
直前까지만해도 이기붕에 對한 讚揚하는 內容의 書籍이 자주 出刊되기도 하였는데 그 中 '民族의 해와 달'이란 冊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民族의 해'는 大統領
李承晩
을 指稱, '民族의 달'은 李起鵬을 指稱한다. 이 冊에 나오는 內容은 두 사람의 傳記와 思想을 讚揚하는 內容으로 채워져 있다. 그만큼 李起鵬은 第1共和國에서 影響力이나 權力이 얼마나 莫强했는지를 보여준다.
[10]
1955年
11月
중앙대학교
에서 名譽
法學
博士
學位를 授與받았다.
[11]
副統領 落選
編輯
그는 實際로 매우 病弱했는데, 權力慾이 强해
이정재
를 비롯한 政治깡牌들과 連繫, 주먹의 힘을 빌어 自身의 政治的 力量을 키웠다.
1956年
5月
,
副統領
選擧에
自由黨
公薦으로 出馬하였으나
民主黨
의
場面
(張勉)에게 敗하여 落選하였다. 李起鵬의 權力 掌握에 反撥한
장택상
,
윤치영
,
이윤영
等 親與 政治人들이 大統領 候補 없는 副統領 候補로 出馬했는데, 이들의 出馬 때문에 與黨 性向의 票가 分散된 結果였다.
[12]
같은 해 그는 民議員議長에 再選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4年뒤
1960年
選擧에서 副統領 候補로 다시 出馬한다.
1956年
10月 13日
배재學院 運動場에서 열린 第1次 여야 民議員 親善 野球大會에 參席하여 祝辭를 朗讀했다.
[13]
1957年
에는 自己 아들
이강석
을 李承晩의 養子로 入籍시켰다.
李承晩
은
讓寧大君
의 15代孫이고, 그의 아들인
이강석
은
효령대군
의 17代 손이므로 孫子 行列인즉 서로서로 모두 寸數가 맞지 않으나
李承晩
의 養子로 入籍된 것이다. 또한 같은 해인
1957年
장택상
의 招待를 받고,
장택상
의
京畿道
始興
別莊에서
조병옥
과 與野 領袖會談을 하였다.
1957年
가을
장택상
,
民主黨
의
場面
等과 選擧法 協商을 벌여 候補亂立을 막기 위해 出馬者의 寄託金制를 新設(40萬圜)하고 選擧費用 制限, 選擧關係者만 選擧運動을 할 수 있게 하는등 法을 大幅 손질하고 議席(選擧區)도 203個에서 233個로 늘렸다.
[14]
李起鵬은 落選의 危機가 오자 祕書를 보내 이정재의 選擧를 빼앗기로 마음먹고 說得을 했으나 이정재는 憤怒하였고 自身의 말을 듣지 않자 利川의 選擧를 빼앗기 위해 警察을 動員하여 罪目을 政治테러와 集會테러, 選擧테러, 國會테러 等 黃金馬車 襲擊事件과
忠正路 도끼事件
을 利用하여 東大門敗를 모두 拘束하고 이정재를 脅迫했다. 이정재는 結局 選擧를 빼앗기고 政治權力을 못잡게되었다.
西大門區
에서
京畿道
利川
으로 選擧區를 옮긴 李起鵬은
1958年
第4代 民議院議員에 當選되고 民議員議長에도 再選되었다. 自身의 政治的 텃밭을 이기붕에게 빼앗긴
이정재
는 이로 인하여 李起鵬의 곁에서 떠나 한동안 隱遁生活을 하였다. 민주당 候補 연윤희는 黨과 事前에 協議도 없이 느닷없이 立候補를 辭退한 後 潛跡했다가 5日 만에 國會記者室에 나타나 "李起鵬氏와의 對決에서 勝算이 없기 때문에 辭退했다."고 말했다.
[15]
1958年
11月
殉國先烈追念回 會長이 되었다.
[16]
生涯 後半
編輯
場面과의 葛藤
編輯
3代 副統領 選擧 以後에는
9·28 場面 暗殺 未遂 事件
을 契機로 李承晩의 側近이었다가 민주당으로 간 場面 亦是 敵으로 만들었다.
11月
李起鵬은 被擊 後 入院中인 張勉에게 病問安을 갔는데, 場面은
9·28 事件
의 背後를 이기붕이라고 確信하고 있었다.
應急 治療를 받고 卽時 집으로 돌아갔는데, 30分도 못 되어 이番에는 李起鵬 氏가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狙擊을 當한 나(
場面
)를 慰勞하러 온 것은 感謝했지만 어딘가 造作된 脚本 같아서 不快했다. 내가 천연스런 表情을 짓고 있는 晩松(晩松)에게 “여보시오, 政治라는 건 이렇게 해야 한단 말이오?” 하고 쏘아붙였더니, 그는 暫時 아무 말도 못했다. 平素
[17]
같으면 餘裕 있는 弄談으로 이 말을 받아넘겼을 것이다.
晩松은 한참만에 “張 博士,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이렇게 겨우 얼버무리는 그의 얼굴은 어쩐 셈인지 몹시도 蒼白했다. 한마디로 제대로 할말이 없었던 模樣이다. 워낙 多急했던지 辨明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狙擊을 받고 난 나의 心境은 淡淡한 것이었다. 已往 覺悟한 바를 當했으니 올 것이 왔나보다 하였을 뿐이다. 世上에서 떠든 臺로 事件은 매우 複雜한 것이었던 模樣이다.
[18]
場面
은
1956年
9月 28日
에 일어난 自身의
暗殺 未遂 事件
의 背後로 李起鵬을 指目했고,
1960年
再搜査 結果 李起鵬의 側近들이 介入한 것으로 確認되었다.
沒落의 前兆
編輯
李起鵬은 李承晩의 側近 및
自由黨
內에서도 많은 敵을 量産하였다.
윤치영
을 敵으로 만들었고,
自由黨
競選 過程에서는
이범석
과 라이벌이 되었으며, 李承晩의 다른 側近이자 越南 靑年을 代表하던
이윤영
도 敵으로 돌렸다.
윤치영
等은 그의 落選을 위해 副統領 候補로 出馬하였고,
이윤영
은 露骨的으로 李起鵬을 落選時期키 위해 副統領에 出馬한다.
[19]
에 言及하기도 했다.
윤치영
은 1956年 副統領 選擧에 出馬하면서 '나는 萬송이
副統領
으로 當選이 된다면 그를 에워싼 아첨배들의 極盛으로 나라의 將來를 그르칠 것이라고 念慮가 되었고, 그러한 그들의 派黨冊 作弊를 豫防하려는 뜻에서 내가 屬해 있는 大韓國民黨의 副統領 候補로 나서기로 決心하였다. 當選되리라는 豫想 보다는 내가 고약하게 보고 있는 무리들에 업힌 이기붕 候補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落選시켜야 한다는 하나의 使命感 때문이었다.
[20]
'고 하였다.
1959年
이윤영
殷 나라의 運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李承晩에게 進言을 하러
景武臺
로 찾아갔다.
[19]
그러나 李起鵬이 못만나게 해 놓아서 結局
이윤영
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 大統領 面會를 拒絶當하자
이윤영
은 다시 副統領 候補에 立候補하였다. 周圍에서 副統領 立候補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말리기도 하였다.
[19]
그러나
이윤영
은 李起鵬을 落選시키기 위해서 出馬한다고 하였다.
씨름판에 나가는 사람이 꼭 이기려고 나가느냐? 씨름에 져도 잠뱅이나 찢으려 나가는 거지! 李起鵬이를 떨구기 위해서다.
[19]
李起鵬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
에게 돈 1億원을 보내드릴 터이니 辭退하고 自己를 밀어줄 것을 提案하였으나 이윤영은 크게 나무라고 해서 되돌려보냈다.
[19]
李承晩의 側近들 中에서도 敵을 만들었던 李起鵬은 副統領 選擧에서 落選하고 말았다. 이기붕에게 好意的이었거나 同情心을 보인 人物은
장택상
과
民主黨
의
조병옥
과
許政
等이 있었다.
1960年
第5代 副統領 選擧에서
自由黨
副統領 候補者로 出馬하였다.
3·15 不正選擧
를 통해
副統領
에 當選되었으나
[21]
,
4·19 革命
이 일어나자 政界 隱退를 宣言하였다.
4.19 革命의 導火線이 되었던 1960年의 3.15 不正選擧는 任期를 마칠 可望이 없는 高齡의 李承晩을 大統領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大統領 有故時 承繼權을 가진 副統領의 地位에 李起鵬을 앉히려는 것이었다.
[6]
4月 28日
새벽, 李承晩 政權의 沒落으로 自身이 危險에 處해진 李起鵬은 美國으로 逃走하려고 했었으나, 景武臺 別館에서 當時 陸軍 少尉로 服務 中이던 아들
이강석
(李康石)李 拳銃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李康旭)을 次例로 쏘아 죽이고 自殺하여 그의 一家族은 滅門之禍를 當하였다.(이에는 이강석이 죽였는지 다른 누가 죽였는지 論難이 있다.
4.19革命
參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