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存하는
百濟
의
武寧王陵
(武寧王陵)은
百濟
가 雄鎭에 都邑했을 當時,
中國
南朝(南朝)와의 交流를 통해서 甓돌무덤 樣式을 受容한 것으로 보여져 宋山里 古墳區에 남아 있는
武寧王陵
과 宋山里 6號무덤은 獨特한 樣式을 하고 있다.
또한
百濟時代
때부터
錦江
의 受信(水神)에게 祭祀를 올리던 祭場(祭場)으로 熊進團(熊津壇)은
忠淸南道
公州市
웅진동 고마나루 기슭 솔밭에 세워져 있다. 現在 이곳에는 ‘熊進受信地處(熊津水神之處)’라고 새긴 標石과 함께 작은 段이 造成되어 있는데
1998年
에
鷄龍山
山神祭 復元과 함께 이곳의 水神祭(水神祭)도 復元하였다.
고마나루의 水神祭 터는 ‘熊進團(熊津壇)’, ‘웅진사(熊津祠)’, ‘용당(龍堂)’ 等으로 불렸는데 『
新增東國輿地勝覽
』에는 고마나루 南쪽 언덕에 祠堂이 있었다고 傳하면서
新羅
때는 西獨(西瀆),
朝鮮
때는 南瀆(南瀆)으로 中士(中祀)에 包含되어 있어 봄과 가을에 祭祀에 쓰는 香과 祝文인 香祝(香祝)을 내려 祭祀를 지내게 했다는 記錄이 나온다.
『
三國史記
』 祭祀組에는 熊川第(熊川祭)는
新羅
의 4독 가운데 西獨으로서 中祀에 編成되어 있었고,
高麗
를 거쳐
朝鮮時代
에도 웅진사는 臺?
·
中?
·
小로 나눠던 中士 13곳 가운데 하나였다고 傳한다. 熊進團(寺)에서의 祭享은 韓末 以後 廢止됐으나 日帝强占期에 들어서까지 正月大보름날에 民間에서 堂굿 形態로 남았고,
光復
以後에도 祈雨祭를 지내는 場所로 利用됐다.
하지만 웅진사의 터는 明確하지 않고, 곰身上이 1970年代에 웅진동 곰내골에서 發見되어 웅診斷을 새로 짓고 身上이 發見된 이곳에 고마나루 前設備와 곰賞을 모시고 있다. 고마나루 一帶는
2006年
12月 4日
에 ‘名勝 第21號’로 指定되었다.
[1]
百濟
時代,
公州市
의 이름은 熊進(熊津)이고 한글로 쓰면
곰나루
或은 '고마나루'이다. 이름과 關聯된 이야기가 傳해온다. 아득한 옛날 한 나무꾼이 江을 건너 聯美産(燕尾山)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때, 큰 암곰 한 마리가 나타나서 나무꾼을 업고 自己가 사는 窟속으로 들어갔다.
곰
은 좋은 飮食을 나무꾼에게 많이 가져다주며 나무꾼을 보살폈다.
곰
은 사냥을 나갈 때는 꼭 窟 入口를 큰 바위로 막아놓아 나무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歲月이 지나 몇 해를 이렇게 살게 되자 곰과 나무꾼의 사이에는 子息 둘이 생겼다. 이제 됐다고 安心한 곰은 어느 하루 사냥을 나갈 때 窟 入口를 돌로 막지 않았다.
이를 본 나무꾼은 窟을 나와 江으로 뛰어들어 헤엄쳤다. 사냥을 나갔던
곰
이 돌아왔을 때 나무꾼은 벌써 건너便에 到着해 있었다. 多急한
곰
銀 두 子息을 나무꾼에게 보여주며 돌아올 것을 哀願했으나 나무꾼은 冷靜하게 뒤돌아섰다. 이에 傷心한
곰
銀 두 子息과 함께 江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그 以後로 배가 지날 때마다 風浪이 일고 變故가 생겨 곰祠堂을 짓고 곰의 靈魂을 慰勞했다고 한다.
[2]
公州市
에는 現在
公山城
이라는 酸性이 있는데 元來는
곰나루
地域에 祝聖된 酸性이라 '
곰
酸性'으로 불리다가 漢字로 옮겨 적으면서 소리 나는 대로 '
公山城
(公山城)'李 되었다는 얘기가 傳해오고
公州
亦是, '곰株'로 불리던 이름이 '
公州
(公州)'라는 漢字로 表記되었다는 얘기이다. 이처럼
公州市
는
곰
에 얽혀있는 傳說은
檀君神話
의 例처럼
大韓民國
에서
곰
과 聯關되는 代表的인 地域 中 하나로 꼽는다.
[3]
歷史書를 보면 고마나루를
新羅
신문왕
때는 熊川州(熊川州),
경덕왕
때는 熊州(熊州)라고 記錄했지만
中國
의 歷史서 中 《
州서
(周書)》 〈백제전(百濟傳)〉, 《
良書
(梁書)》 〈백제전〉에도 當時
百濟
의 首都가 고마(固麻, 熊進)라 불린 事實이 記錄되어 있다.
- 《
三國史記
(三國史記)》 〈백제본기〉 문주왕卽位年兆?: 겨울 10月, 熊進(熊津)으로 都邑을 옮겼다. (冬十月 移都於熊津)
- 《
三國遺事
(三國遺事)》 〈王力〉 문주왕兆?: 熊川(熊川)으로 都邑을 옮겼다. (移都熊川)
- 企業
- 熊進그룹
?:
윤석금
會長이 設立한 熊進(公州의 옛 이름)李 名稱由來人 韓國 企業.
- 指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