拷問致死와 事件 隱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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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鍾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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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件 當時 朴鍾哲 學生은
서울大學校
人文大學 言語學科 在學生이었다.
1986年
청계被服勞組 合法化 要求 示威를 한 理由로 拘束되어 懲役을 宣告받은 바 있고, 出所 以後에도
學生 運動
에 積極的으로 參與하였다. 以後
1987年
1月 13日
子正頃 下宿집에서
治安本部
對共分室
搜査官 6名에게 連行되었다.
[1]
當時 連行 名目은 大學文化硏究會 先輩이자 '民推委' 指導委員으로 手配받고 있었던
박종운
에 對한 情報를 把握하기 위한 것이었다.
取調室에 連行해간 公安 當局은 朴鍾哲에게
박종운
의 所在를 물었으나, 朴鍾哲은 順順히 對答하지 않았다. 이에 警察은 殘酷한 暴行과 電氣拷問, 물拷問 等을 加하였고, 朴鍾哲은 끝내
1987年
1月 14日
治安本部 對共搜査團 남영동 分室 509號 調査室에서 夭折했다. 11時 45分頃 중앙대 용산病院 醫師
오연상
이 現場에 到着해 檢診했을 當時 이미 숨져 있었다.
[2]
警察은 14日 밤에 事件을 隱蔽하기 위해 化粧할 計劃이었으나,
催喚
部長檢事는 死體保存命令을 내렸다. 事件 指揮는 그날 밤 當直이었던
安商守
檢事가 맡았다.
事件 다음 날
1月 15日
午後 6時가 넘어 한양대 病院에서 剖檢이 實施되었다. 剖檢 結果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指 間 出血 痕跡과 사타구니,肺 等이 毁損되어 있었으며 腹部가 부풀어 있고 肺에서
水泡音
이 들렸다. 剖檢은 國立科學搜査硏究所 剖檢醫
황적준
博士, 漢陽大
박동호
敎授가 맡았다. 軍部와 警察의 脅迫과 懷柔를 물리치고
1月 17日
황적준
博士는 報告書를 作成했으며, 1年 뒤 剖檢 過程에서 받았던 警察의 懷柔와 脅迫을 받은 內容을 적은 日記帳을 言論에 公開하기도 하였다.
[3]
[4]
한便 박종철이 犧牲하며 救해냈던 先輩 박종운은 2000年
한나라黨
(現 國民의힘)에 入黨 後
極右
-
뉴라이트
系列로 變節하여
李明博
과
朴槿惠
를 支持하는 等 政治 行步를 걷게 되었다.
言論報道와 剖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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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鍾哲 學生의 腰絶 以後
中央日報
의 신성호 記者는 한 檢察 幹部가 “警察, 큰일 났어”라고 無心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端緖를 잡고,
1月 15日
‘警察에서 調査받던 大學生 쇼크死’라는 2段 記事를 데스크로 내보냈고, 夕刊에 單身으로 실렸다.
[5]
이 消息은 다른 國內 言論과 外國 言論에서도 引用되었고, 그날
KBS
와
MBC
저녁뉴스에서도 單身으로 내보냈다.
[6]
報道 다음 날인
1月 16日
강민창
當時 內務部 治安本部長과 박처원 治安監이 記者會見을 열었다. 여기서 그는 “冷水를 몇 컵 마신 後 審問을 始作, 박종철 君의 親舊의 素材를 묻던 中 冊床을 '탁' 치니 갑자기 ‘億’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附屬 病院으로 옮겼으나, 12時頃 夭折하였다”고 發表하였다. 그러나
東亞日報
는 當時 剖檢醫 醫師로 對共分室 509號室에 出入했던
오연상
으로부터 "事件現場에 물이 흥건한 것을 目擊했다"는 陳述을 確保하며, 拷問에 依한 腰絶 可能性을 처음으로 提起했다.
結局 記者會見 4日 만인
1月 19日
, 江 治安本部長은 다시 特別 記者會見을 열어 旣存의 立場을 뒤집고 "박종운 君의 素材를 묻는 審問에 答하지 않자 머리를 한 次例 暫時 집어넣고 내놓았으며, 繼續 陳述을 拒否하자 다시 집어넣는 過程에서 急所인 목 部位가 浴槽 턱에 눌려 窒息死했다"고 "苛酷行爲"로 因한 夭折을 是認하였다.
[7]
以後 조한경과 강진규 等 拷問 警察官 2名을 事件 主導者로 指目해 拘束, 事件을 縮小하였다. 그리고 剖檢을 거친 박종철 君의 屍身은 家族 許諾도 없이 辟除 火葬터에서 屍身을 火葬하는 等 證據湮滅을 試圖했다.
事件 收拾을 위해 內務部長官에 任命된
정호용
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拷問이 있었다는 事實을 否認했는데, 그는
光州 民主化 運動
當時
特戰司令官
으로 民衆 虐殺의 責任者 中 하나로 指目되던 사람이었기에 이 말 亦是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天主敎 司祭團의 暴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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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件 主導者로 拘束된 警察 두 名은
서울남부구치소
에 收監됐다. 當時 安諭 拘置所 보안계장은 이들을 接하는 過程에서 그들 外에 追加로 警察官 3名이 顧問에 關與하였고, 警察은 이를 組織的으로 隱蔽하려 한다는 情況을 捕捉했다. 안 係長은 마침 收監 中이었던
李富榮
當時
전민련
常任議長에게 그 事實을 傳達하였고, 이 氏는 쪽紙에 追加 關與 隱蔽 事實을 적은 뒤 서로 親分이 있었던 한재동 矯導官을 통해 外部에 傳達토록 하였다.
[8]
該當 쪽紙는
天主敎 正義具現 全國司祭團
의
김승훈
神父와
함세웅
神父에게까지 傳達되었다.
[9]
1987年
5月 18日
,
光州民主化運動
7周忌 追悼미사 途中
김승훈
神父가 박종철 拷問致死事件의 眞相이 造作되었음을 暴露하였다. 對共警察의 代父라는 治安本部 5次長
박처원
의 主導 아래 모두 5名이 加擔한 拷問致死事件을 單 2名만이 拷問에 加擔한 것으로 꾸미고, 銃대를 멘 2名에게는 巨額의 돈을 주었다는 事實을 새롭게 밝혔다.
[10]
暴露 다음 날
統一民主黨
에서는 黨 次元에서 眞相調査를 벌이겠다고 밝혔고,
[11]
아버지 박정기 氏는 明確한 眞相糾明과 國家를 相對로 한 損害賠償 訴訟을 代行 해 달라는 陳情書를 大韓辯協 側에 傳達하였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