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涯 初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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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과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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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은 1926年 1月 7日에
忠淸南道
扶餘
에서 7男 中 5男으로 태어났다. 金海金氏 안경공派(金海金氏 安敬公派) 16世孫이다. 12代祖
김예직
(金禮直)은
광해군
의 外叔父로 三道水軍節度使를 지냈다.
7代祖 김기서가 鎭川縣監을 歷任했으며 그의 할아버지 김현택이 忠淸道 靑陽에서 忠淸道 扶餘에 理事와 千 席을 일궈내 쌀 2000섬 地氣의 甲富였고 哲宗 때 宣陵參奉을 지냈다. 3代 讀者였던 아버지 김상배는 土地測量士를 지냈다. 土地登錄 紛糾 等을 잘 解決해 信望을 얻은 後 규암면長과 扶餘面長으로 地域社會의 維持였으며, 어머니 이정훈은
全州 李氏
로 아버지보다 12살 年下였다.
아버지는 抗日 獨立運動家들을 집안에 숨겨주고 돌봐줬다.
義烈團
團員인
유석현
等은 1921年 日本 警察에 쫓기다가 김상배의 집에 避身하기도 했다.
[1]
그의 父母는 모두 아들만 7名을 두었다. 慰勞 4名의 兄과 아래로 2名의 동생이 있는데 큰兄 종호는 40代의 나이에 公務員 試驗을 거쳐
서울
종로구청
主事로 勤務했고, 1970年에서 1980年까지 中央穀物協會 會長職을 맡았다. 둘째 兄 種익은
民主공화당
6·7·8代
國會의
원을 지냈다. 막내동생 終熄은 中學生 무렵
韓國 戰爭
中에 失踪됐다. 그 뒤 김종필은 失踪된 막내동생을 오랫동안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그의 側近인 補佐官 김석야는 2000年
東亞日報
와의 인터뷰에서 "總理께서 數十年 동안 막내동생을 찾으려고 갖은 努力을 기울였지만 끝내 아무런 端緖를 찾지 못해 死亡한 것으로 推定한다."고 했다.
幼年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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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普通學校 6學年 때 기쿠치 間(菊池 寬)의 戀愛小說 <두 番째 키스>를 읽다가 하루終日 두들겨 맞았고,
公州中學校
에 進學했을 때는 同盟 休學을 主導했다가 公州警察署 사상계에까지 넘겨졌는데 面長이던 아버지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公州中學校 在學 當時 級長과 劍道部長이었다. 劍道는 4學年 때 入團을 했고, 乘馬와 그림도 즐기는 浪漫의 少年이었다.
日本 도쿄로 留學을 떠나,
주오大學校
豫科 毒法學科에 入學했지만, 日本人 先輩가 "조센징은 왜 (太平洋)戰爭에 參加하지 않나?"라는 말을 듣고 日本人 先輩에게 주먹을 휘두른 다음에 自退를 하고 歸國한 뒤
대전사범학교
에 1945年 3月에 卒業하였다. 敎生 實習을 하다가 日本人 校監과 말다툼을 벌인 끝에, 또다시 日本人 交感을 때려눕히고 맙니다. 이때문에 結局 김종필은 山間僻地 學校로 發令이 났고, 結局 2個月만에 辭退를 했고,
光復 以後 1946年
경성사범학교
社會敎育科에 入學하였다.
當時 左翼團體였던 忠南敎育聯盟 委員長이었던 둘째兄
김종익
을 잡으러
西北靑年團
이 그의 집을 襲擊했다. 그리고 西北靑年團은 김종필의 아버지를 마구 두들겨팼고, 結局 金鍾泌 아버지는 腦卒症으로 死亡하게 되었으며, 財産과 집 亦是 빼앗기게 된다.
軍人 生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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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 服務 初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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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年
서울大
師範大學 3學年이었던 김종필은 父親이 作故한 後 집안이 어려워지자 經濟的으로 困窮한 處地에 몰린 김종필은 내 힘으로 앞길을 열어야겠다는 決心을 하고, 집에서 獨立하고 서울에서 택시 技士를 했다. 하지만 갑자기 交通事故를 내버려 精神을 차려야겠다고 모病巢에 願書를 내고 軍에 入隊하여
忠淸南道
溫陽
에 駐屯하는 陸軍 第13聯隊에 配屬된다.
[2]
그러나 1週日 만에 毆打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脫營하였다. 以後 脫營兵의 身分으로 서울대 同期의 집에서 숨어 지내면서 轉轉하던 中 劇場에 映畫觀覽을 갔다가
陸士
敎導隊와 만나게 되어 期間兵으로 再入隊하였다가
陸士
第8期生으로 入學해 1949年 5月에 少尉로 任官했다. 所謂 任官과 同時에 陸軍 情報局에 配置되었다. 그 뒤 主로 參謀職을 歷任하고 1949年 12月 當時 陸軍本部 情報局에 中尉로 있었다.
[3]
以後
韓國 戰爭
에 參戰했고, 陸軍 情報局 戰鬪情報과 北韓班長에 任命, 갑작스런 南侵으로 무너지는 戰線을 視察하고 傳貰를 正確히 報告했으며, 1階級 特別昇進海 陸軍 大尉가 됐다.
韓國 戰爭
後半에는 6師團 19聯隊로 配屬되어 搜索中隊長 等으로 北韓軍과 交戰하였다. 1951年 1月에
박상희
의 딸
박영옥
과 結婚하였고 그해
陸軍
大尉로 지내면서 제1차 都彌 遊學 將校團 150人 中 한 사람에 選拔돼 조지아 포트베닝의
美國 陸軍步兵學校
에 入敎하여 修了하였다.
1952年 다시 情報局 戰鬪情報과 北韓半 班長이 되었다. 김종필은 情報 系統에 勤務하면서 野戰部隊에서 勤務한 將校들과는 달리 時間과 活動에서 相對的으로 制約을 덜 받았기 때문에 同期生들과 언제든지 緊密하게 接觸할 수 있었다.
[4]
以後 陸本 情報局 情報課長으로 補職되었다.
抗命 波動과 强制 豫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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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軍에서 主로 情報關係 業務에 從事하다가 少領을 거쳐 1958年 陸軍本部 情報參謀部 企劃課長으로 赴任했다. 企劃課長 在職 中 中領으로 進級했는데, 다른 旗手보다 少領에서 中領으로 進級하는 것이 8年 程度 늦었던 그의 同期들은 軍 運營體系에 不滿을 품게 됐다. 어쨌건 그는 陸軍
中領
으로 進級한지 몇달 지나면서 陸軍本部 情報參謀部 企劃과 科場에서
陸軍本部 情報參謀部 情報處
處長이 되고, 以後 1960年 陸軍本部 情報局 行政處 處長에 任命되었다.
1960年 8月 24日 김종필과 석정선은 聖堂에 미사 中이던
場面
國務總理
를 찾아가 書面으로 鄭君을 要求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서면은 傳達되지 않았고, 이는 後에 그가 抗命波動에 連累되는 契機가 됐다.
場面
內閣은 肅軍을 斷行하려 했고, 이때 그가 석정선과 함께 모든 責任을 지고 豫編하는 것으로 波動을 마무리지었다. 豫編 以後 별다른 職業이 없던 그는 政界 入門을 決心한다.
1961年 4月 19日 4.19 義擧 1周年 記念 示威를 巨事日로 定하고
朴正熙
와 함께 軍事 政變을 祈禱했지만
場面
政權의
時局정화단
에서 學生 示威隊를 買收하여 4月 19日 當日은 조용했고 擧事는 失敗로 돌아갔다. 그해 5月 다시 巨事日을 定한다.
5·16 軍事 쿠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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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前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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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年에 일어난 抗命 波動으로 陸軍 中領에서 豫編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김종필은 한때 《
思想界
》를 찾아가 履歷書를 넣었으나 面接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豫備役 中領 身分으로 꾸준히
朴正熙
等과 交流했고, 1961年
5·16 軍士 政變
을 準備한다. 5·16 軍士 政變에 參與했고 5·16 軍士 政變이 成功하자 다시 現役으로 復歸, 陸軍 中領이 됐다. 이어 陸軍 大領으로 進級했고, 陸軍 准將으로 進級했다. 한便
朴正熙
가 5·16을 擧事했다는 非難을 받게 되자, 그는 "내가
朴正熙
將軍을 모시고 5·16을 企劃했다."라고 했다.
以後
軍事革命委員會
(國家再建最高會議)가 構成되면서
中央情報部
가 新設, 그는 제1대
中央情報部長
에 任命된다. 6月 5日 午後 그는 公式 記者會見을 통해 5.16 軍事 政變은 낡은 舊世代의 政治 進出을 遮斷하기 爲한 擧事
[5]
라고 發表한다.
“
|
아직도 一部 沒知覺한 反 革命勢力과 反省하지 못한 旣成 政客들 가운데 革命政府의 뒤에서 流言蜚語를 造作, 捏造하여 또 다시 政治參與의 꿈을 가지고 있다.…(이하 中略)…中央情報部長이라는 職責으로 젊은 將校들이 이番 5·16 軍事 革命을 일으킨 動機와 目的 等을 正確하게 밝힘으로써 이들 旣成政治人들의 空想을 깨워주고 雜多하게 떠도는 데마 等을 一掃하려 한다.
[5]
|
”
|
軍事 政變 直後 그는 丈人
박상희
의 經歷과 關聯하여 思想 攻勢에 시달렸고,
황태성
이 南下한 後에는
韓日會談
直前까지 野黨人士들로부터 隨時로 疑惑을 받게 된다.
中央情報部 創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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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軍事 政變
이 成功한 直後 그는 卽時 時局정화단 等을 改編하여 情報組織人 中央情報部를 創設한다. 初代 中情部長이었던 김종필은 중정廳舍 터를 朝鮮 20代 王 景宗과 繼妃 선의왕후 어씨의 陵을 모신 義陵 史跡地 周邊으로 定하였다.
[6]
以後
義陵
入口에 세워진 中央情報部 建物은 俗稱 安家 로 불렸다.
1961年 5月 20日부터 1963年 1月까지 招待
中央情報部
場이었고, 1961年 7月에는 雜誌 《
思想界
》의 同人이었던
함석헌
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題目의 글을 寄稿瑕疵 思想繫辭 社長인
장준하
를 불러 取調했다.
1961年 7月號의
함석헌
의 5·16 軍士政變 批判 칼럼을 問題삼아
장준하
를 召喚했다. 思想界 7月號가 나가고 4, 5日 뒤, 退勤時間이 되어갈 무렵 사상계社에 軍人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革命軍에서 나왔다면서 다음날 아침 7時까지 社長과 編輯 責任者를 모시러 오겠으니 그 時刻까지 나와 있어 달라는 用件을 傳했다.
[7]
다음날 張俊河는 編輯 責任者인 取材部長 고성훈과 함께 指定한 時刻인 아침 7時에 會社로 나갔다. 검정 지프車 하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고 다른 軍人 2名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車는 張俊河와 고성훈을 싣고 가 南山 밑 회현동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2層 집의 한 房에다 내려놓았다.
[7]
20分뒤 金鍾泌
[8]
이 나타났고 김종필은 사상계 7月號에 실린 咸錫憲의 5·16 軍事政變을 迂廻的으로 批判한 칼럼을 問題삼았다.
- 金鍾泌?: 精神分裂者 같은 令監쟁이의 이 따위 글을 都大體 무슨 底意로 여기에 실었소? 聖스러운 革命 課業 遂行에서 當身은 우리 軍事革命을 冒瀆하자는 거요? 이걸 싣게 된 經緯와 目的을 말하시오.
[9]
- 장준하?: 이 글은 내가 直接 함 先生께 付託해서 내손으로 받아다 내가 읽어 보고 실은 것이오.
[9]
張俊河는 말을 繼續했다.
- 장준하?: 여러분은 이 글을 좋지 않게 보는 模樣이오만 내 나름으로는 이 글이야말로 軍事革命을 일으킨 여러분을 위하고 革命 課業을 遂行하는 데
[9]
있어 가장 時宜에 맞는 忠言이라고 確信해 실은 것이외다. 좋은 藥은 입에 쓴 法으로, 當場은 多少 거슬리는 데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 確信이 틀리지 않는 限 여러분을 위하고 나라의 將來를 위하는 忠情이 들어 있는 글인 것만은 틀림없소. 只今 우리나라의 모든 言論 機關이 革命 課業을 遂行하는 過程에서 잘한다는 말 以外의 다른 말들은 一切 하고 있지 않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나라의 向方이 옳은 길로 걸어가는 것 같지가 않고, 또한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말로는 못하지만 생각은 나와 같기 때문에 忠告로 이 글을 실은 겁니다. 나와 함 先生 外에는 이런 時期에 이런 忠告를 할 사람이 없소.
[10]
張俊河의 말에 김종필은 앞으로 밀어놓았던 冊을 急히 집어다 빨간 줄 투성이가 된 問題의 글과 卷頭言을 펴 여기저기 한 줄씩 읽어주며 장준하에게 들이댔다.
[10]
그는 이것은 무슨 소리이며 이것도 忠告냐는 式으로 윽박질러 물었고, 이에 張俊河는 抗議했다.
[10]
- 장준하?: 왜 남의 글을 그런 대목만 部分的으로 떼어서 問題 삼으십니까? 全體를 가지고 말 하시오.
- 金鍾泌?: 어디 雜誌를 읽는 사람들이 앞뒤를 다 읽고 맞추어 解釋해요? 大部分이 이런 刺戟的인 部分의 文句들에 依해 眩惑되기 마련 아니오?
[10]
그러나 김종필은 그가
장도영
과 같은 故鄕이라는 點을 問題삼았다.
[11]
그러나 張俊河는
장도영
과의 關聯을 否認했다.
- 장준하?: 장도영과 나는 같은 平北 出身이긴 하지만 그 사람은 龍泉 出身이고 나는 朔州가 故鄕이외다. 日本軍에 잠깐 같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알고는 있지만 그 사람과 無關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지난 行跡을 그다지 좋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과 나를 聯關시키는 것은 나를 冒瀆하는 것입니다.
[11]
張俊河의 對答에 김종필은 興味를 느껴 繼續 꼬치꼬치 캐물었고, 張俊河는 숨길 것이 없고 해서 自身이 平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장도영에 對한 追憶을 陳述했다. 張俊河에 依하면 '張俊河와 장도영은 中國 序奏에서 같이 있었다. 그 곳에서 韓人 脫營 事件이 자주 일어나자 學徒兵들에 對한 監視와 逼迫이 甚했다. 그때 장도영은 日本刀를 빼들고 脫走하는 者는 自己가 먼저 處斷하겠다고 설치다가 張俊河와 衝突했다. 그리고 脫出이 어려운 쓰카다 部隊로 같이 옮겨가서 둘은 張俊河가 벌인 '殘飯 拒否 運動'으로 反目한다.
[11]
' 性이 같고 故鄕이 이웃해 있다고 해서 서로 呼吸이 맞는 것도 아니었다.
[11]
같은 西北人 出身이라 하지만 張俊河로서는 장도영의 이름을 들어 그 糖으로 牟尼 참을 수가 없었다.
[12]
김종필이 張俊河와 장도영의 사이를 疑心할 만한 理由는 또 하나 있었다. 이 무렵에 사상계사에서 死傷文庫 100卷 出刊 記念 리셉션을 昌慶宮(昌慶宮)의 수정궁(水晶宮)에서 열었던 것이었다.
[12]
當時 思想界의 國際的인 名聲 때문에 그날이 7月 4日 美國 獨立 記念日인데도 美國 大使가 直接 參席하고 內外 貴賓이 數도 없이 모였는데 쿠데타 軍部에서도 장도영 最高會議 議長 以下 그 一派가 모두 枉臨했다. 그때 朴正熙와 김종필 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12]
그리고 7月 5日 장도영 一派는 모두 逮捕됐다.
共和黨 事前組織 構成
編輯
1962年 1月 김종필은
民主공화당
의 事前 創黨組織 硏究팀과 事前 組織인 동양화학 株式會社의 創立을 主導하였다.
[13]
5.16이 일어난 지 3個月 만인 1961年 8月에 김종필은 民政引受 構想의 하나로 공화당을 事前組織하기 始作했던 것이다.
[13]
이러한 共和黨 事前組織은
朴正熙
의 裁可를 얻은 김종필의 새 政黨 創黨構想 硏究팀으로, 責任者는 豫備役
陸軍
中將
崔瑩두고, 尹天界(高麗大), 김성희(서울大), 강상운(중앙대) 敎授와 이종극, 김운태, 윤태림, 정범모,
박종화
, 유호선,
김정렴
, 김학열,
최규하
, 이필석, 홍승면 等으로 構成되었다.
[13]
이들은 1962年 1月 이 硏究室의 이름을 '동양화학 株式會社'로 僞裝하고 鍾路 2街 뒷골목 第一典當舖 2~3層에 事務室을 차렸다.
[13]
이어 김종필은
再建黨
을 組織하여, 민정에 軍出身 人士들이 參與하기 위한 正式 政黨 創黨作業을 持續的으로 準備해 나갔다.
豫編과 政界 入門
編輯
中央情報部長으로 在職 中 陸軍 准將으로 進級하였다. 1962年 10月부터 11月까지
美國
을 訪問하고 歸國했다.
美國
訪問 길에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美國
陸軍 元首를 訪問하기도 했다.
[14]
더글러스 맥아더
와의 面談에서 맥아더는 金鍾泌에게 "韓國이 하루빨리 統一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韓國이 統一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
[14]
"는 意思를 披瀝한다. 또 맥아더는 金鍾泌에게 "
韓國 戰爭
을 勝利로 이끌기 위하여 滿洲 爆擊을 主張"했으며 "
韓國 戰爭
의 休戰에 있어서
美國
은 잘못을 저질렀으며, 韓國에서의 北進 統一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네시아 事態
가 發展된 것"이라고 答하였다.
[14]
또한
맥아더
는 金鍾泌에게 "
李承晩
博士
에 對한 感情을 緩和하여 그를 故國 땅에 歸國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言及하였다.
[14]
1963年 1月에는 陸軍 准將에서 豫編했고
中央情報部長
에서 辭退했다. 이어
民主공화당
의 事前組織人
再建黨
을 創黨했고, 直接
윤일선
,
임영신
,
여운홍
,
임병직
,
윤치영
,
정구영
等을 찾아다니며 說得, 新黨 創黨에 積極 도움을 줄 것을 要請하였다.
平素
場面
內閣을 미워하던
윤치영
,
여운홍
等은 그의 도움 要請을 積極 受容하였다. 같은 해 2月에는
정구영
,
윤치영
等과 함께 民主공화당 創黨 組織에 參與했다.
政治 活動
編輯
1971年~1975年, 1998年~2000年에 걸쳐 두 次例 國務總理를 歷任했으며, 1963年
6代 國會
때부터 議政活動을 해 總 9番 任期를 채웠다. 이것은 김영삼,
朴浚圭
와 함께 最多選 國會議員 記錄이다.
3共 時節
編輯
第3共和國 初期
編輯
1961年 5·16 軍士 政變 當時 朴正熙의 核心 브레인으로 一名 革命公約을 기초했으며, 5月 20日에는 中央情報部를 組織하여 部長으로 就任하였다. 1962年 朴正熙가 大統領 權限代行으로 있을 때부터
韓日協定
의 實質的인 交涉을 擔當했다. 1963年 1月 民主공화당을 創黨하기 위해 陸軍准將으로 豫編(軍番 13517)했고, 再建黨이라는 假稱 組織을 創黨했다가, 2月부터
정구영
等과 함께 民主공화당 創黨準備委員會를 이끌었다. 以後 民主공화당을 創黨하자 野黨 人士들은 舊政治人 訂正法으로 묶어놓고 自身들만의 事前組織을 祕密裏에 結成했다며 非難했다.
한便 꾸준히 陸士 5期生, 6期生들의 牽制를 받던 그는 그해 2月 25日,
民主공화당
創黨 準備委員長을 辭退하고 巡廻大使의 資格으로 東南아시아와 歐羅巴(유럽) 여러 곳을 歷訪하고저 出國했다가 歸國하여 國會議員에 立候補하였다. 1963年 11月 第6代 國會議員에 當選됐고, 1963年 12月 民主공화당 黨議長에 選出됐다. 1964年 8月에는
하버드대학교
政治經濟學科를 修了하였다.
1965年 6月, 當時
日本
外務相人
오히라 마사요시
와의 祕密 接觸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合意해 協定 締結에 決定的인 貢獻을 했으나 이 過程에서 植民支配에 對한 謝過, 掠奪 文化財 返還, 在日同胞 地位, 東海漁業權, 强制 動員 被害者 補償, 原爆被害者 問題 等 主要 懸案은 모조리 無視한 채 經濟的 補償과 借款을 代價로 모든 問題의 終結을 宣言해버려 이 後 韓日 關係에 繼續되는 問題點과 野黨 人士들의 反撥을 招來했다.
金-오히라 메모
編輯
1961年 11月 22日 朴正熙는 日本을 訪問하여
이케다 하야토
總理를 만나 "맨주먹으로 荒廢한 曺國을 이끌어 보겠다는 意欲만은 旺盛하다"며 協助를 要請했다. 朴正熙의 協助 要請에 따라
日本
外務長官
오히라 마사요시
等이 韓國에 入國했다. 1962年
中央情報部長
김종필은
오히라 마사요시
를 만나 協商의 內容을 合意하였다. 이 協商 內容은 "金-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後日 김종필은 "내가 李完用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額數이더라도 빨리 工場을 세우고 技術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經濟成長이 빠르지 않았느냐. 後悔하지 않는다"고 回顧했다.
[15]
김종필의 메모
- 請求權은 3億 달러(無償 供與 包含)로 하되 6年 分割 支拂한다.
- 長期 低利 借款도 3億 달러로 한다.
- 韓國의 對日 貿易 淸算 計定 4千6百萬 달러는 請求權 3億 달러에 包含하지 않는다.
오히라의 메모
- 請求權은 3億 달러까지 讓步하되 支拂期限은 12年으로 한다.
- 貿易 計定 4千6百萬 달러는 請求權 3億 달러에 包含한다.
- 次官은 請求權과 別途로 推進한다.
合意 事項
- 無償供與로 3億 달러를 10年에 나누어 提供하되 그 期限을 短縮할 수 있다. 內容은 用役과 物品 韓日 淸算計定에서 對日 負債로 남은 4千5百73萬 달러는 3億 달러 中에서 相殺한다.
- 對外 協力 基金 次官으로 2億 달러를 10年에 나누어 提供하되, 그 期間은 短縮할 수 있다. 7年 据置 20年 分割 償還, 年利 3푼 5里(政府 次官)
- 輸出入銀行 條件 次官으로 1億 달러 以上을 提供한다. 條件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國交正常化 以前이라도 實施할 수 있다.(민간 次官)
김종필과 오히라의 會同 以後에도 1962年 케네디와 요시다의 會談, 1963年 11月 존슨과 朴正熙의 會談 等을 통하여 韓日間의 外交關係에 對한 內容이 整理되었다. 會談 妥結이 막바지에 이른 1964年 美國은 러스크 國務長官과 極東問題擔當次官 等이 韓國에 訪問하여 日本과 韓國의 早速한 修交를 支持한다는 聲明을 發表하였다.
[17]
1964年 1月부터 韓國에서는 韓日協商을 反對하는 主張이 나오기 始作하였다. 3月에는 5·16 以後 없었던 學生 示威가 始作되었다. 屈辱的인 韓日會談을 反對한다는 學生 示威는 6月 3日 絶頂을 이루어
6·3 韓日協定 反對運動
이 일어나게 되었다. 朴正熙 政權은 非常 戒嚴을 宣布하여 反對의 목소리를 彈壓하고 會談을 持續하여 1965年 2月에는 基本條約이, 4月에는 漁業協定이 假調印되었다. 1965年 6月 22日 韓日基本條約이 正式으로 調印되었으며, 8月 14日 大韓民國에서는
與黨
單獨으로 國會가 열려 韓日基本條約을 批准하였다.
[18]
1965年 12月 18日 上午10時半 韓國의 中央廳 第1會議室에서 두 나라의 國交正常化를 最終的으로 매듭짓는 基本條約 및 協定에 依한 批准書를 交換했다.
3選 改憲 前後
編輯
1967年 第7代 國會議員 選擧에서도 當選되었다.
民主공화당
內에는 그를 支持하는 派閥이 나타났고 이들은 1971年 次期 大選에서
朴正熙
가 물러나고 그가 後任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3選改憲을 考慮하던 朴正熙는 1968年 5月 '國民福祉回 事件'을 利用하여 金鍾泌 支持勢力을 공화당에서 除名하였다.
[19]
自身의 오른팔이었던 김용태 議員이 中情으로 끌려가 拷問을 當하는등에 受侮를 겪었다.
[20]
이일로 因해 김종필은 같은해 5月 30日에 政界에서 隱退하였다.
[21]
國民福祉會는 송상남이 主導하여 1968年 3月에 만든 團體였다. 이 團體 所屬 議員들과 黨員들이 除名處分을 받은 理由는 이들이 3選改憲을 反對하며 1971年 大選에 김종필을 공화당 候補로 推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상남, 金鎔泰等 會員들은 國民福祉膾가 '農村 近代化運動'을 위한 組織이었다고 抗辯했다. 勿論 이들의 主張은 全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2]
아울러 中央情報部의 調査過程에서 發見된 '時局判斷서'는 송상남이 個人的으로 作成한 것이라고 主張하였으나, 이 文件이 除名處理에 主要根據가 되고 말았다.
政界隱退後 夫人의 身病治療次 訪日하였다가 1970年 4月에 歸國하였는데, 이때부터
三選改憲
支持로 돌語서면서 政界에 復歸했다. 1970年 12月 민주공화당 總裁 首席常任顧問, 1971年 3月 民主공화당 副總裁를 지냈다.
維新 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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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務總理 在職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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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年 5月엔 PTP 名譽 總裁에 選出되기도 했다. 1973年 6月에는
西獨
을 巡訪하고 歸國했다.
1974年 日曜畫家會 名譽會長, 1974年 5月 5·16民族賞 理事長, 大韓올림픽委員會 名譽委員長 等을 지냈다. 維新政權의 國務總理를 지내는 等 實權을 維持했다. 1976年 한일의원연맹 韓國側 會長에 就任했고, 1977年 韓日親善協會 中央會長에 選出됐다.
[23]
1973年 1月
해리 트루먼
의 追悼式에 參席次 飛行機便으로
美國
워싱턴을 訪問하고 歸國하였다. 그해 5月 28日 다시 出國
스페인
의
마드리드
에 到着하여
심흥선
(沈興善) 駐스페인 大使를 만난 뒤
알프레도 산체스
公報, 관광부 長官,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스페인
副總統을 面談하고
[24]
6月 5日에는
프랑스
를 訪問
[25]
[26]
하고 歸國했다.
朴正熙와의 葛藤, 外交 特使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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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政權의 2人者로 끊임없이 朴正熙와 갈등했고, 1975年 12月 18日
國務總理
職에서 電擊 更迭된다.
朴正熙는 그 代身 그의 둘째 兄
種익
을 代身 忠南 扶餘 地域區 國會議員으로 내보냈다. 以後
김종익
은 7, 8, 9代 議員을 지내게 됐다. 김종필이
朴正熙
와의 葛藤 때문에 波瀾을 겪고 있을 當時 政權側에서 附與地域 民心을 달래기 위해 동생 代身 억지로 扶餘地域區에 出馬시킨 것이었다.
1977年 2月부터 3月까지
大統領
特使 資格으로 中南美를 巡訪한다. 그해 2月 10日부터 14日까지
中華民國
을 訪問하여
장징궈
,
옌자진
과 面談한 뒤
日本
을 訪問하여 후쿠다 受賞, 오히라 自民黨 幹事長 等을 面談한 뒤
모로코
等을 訪問했다. 그해 3月에는
브라질
等을 訪問한 뒤 4月 11日 歸國하였다.
1979年 3月 第10代
國會議員
에 再選하였다. 그해 6月에는 유럽 特使로 派遣되어
獨逸
과
프랑스
等을 巡訪하고 歸國했다.
維新 崩壞 直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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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年 10月 朴正熙가 死亡한 後 1979年 11月 12日 民主공화당 黨務會議에서 滿場一致로 總裁로 選出되고,
[27]
[28]
1979年 11月에는 5·16 民族賞 財團 總裁李 됐다.
朴正熙 事後 공화당系 政黨의 有力者로 浮上하면서 在野 運動家들은 그에게 民主的인 選擧 節次에 依한 政權 交替에 協助하라는 便紙를 보냈다.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總裁로서,
金永三
,
金大中
等과 함께 有力한 次期 大權 走者로 浮刻했다.
1980年 5月 18日 새벽
5·17 非常戒嚴 擴大措置
와 함께
保安司
에 逮捕돼 감금당했다. 5月 18日 아침
최규하 政權
은 管制報道를 통해 김종필 等 10餘 名을 維新 時代의 不正蓄財者로 發表했다. 이런 措置와 監禁을 當하는 渦中에 首警司令官
盧泰愚
所長은 김종필이 監禁된 地下監獄을 訪問하고, 尊待말을 쓰며 깍듯이 禮遇했다. 김종필은 自身의 考査와 李承晩, 朴正熙 時節의 2人者들의 沒落과 悲慘한 最後를 說明하며 絶對 1人者 (當時 1人者란 전두환을 指稱)에게 밉보이지 말 것, 全斗煥이 서운하게 하더라도 絶對 서운한 表現을 해서는 안되며 서운함을 드러냈을 境遇 아랫사람과 周邊의 離間질하는 勢力이 나타나 關係를 악화시킨다는 것 等 2人者로서의 處世術을 노태우에게 일러주었다.
1980年 9月 그는 新軍部에 依해 財産을 獻納하도록 强要받고, 政界에서 隱退한다는 覺書를 썼다.
그가 政界에서 隱退하면서 舊
民主공화당
, 유정회界 人士들은
韓國國民黨
을 創黨해 活動했다. 그러나 政治禁止가 解除되면서 김종필이 政界에 復歸하자 舊 공화당, 유정회 人士들은 그를 總裁로 받들고
新民主공화당
을 創黨하였다.
新軍部
에 依해 政界를 强制 隱退당한 그는 以後 雲井財團을 運營하면서 社會事業에 從事하였다.
政治 禁止와 復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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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
5·17 事態
以後 政治活動이 停止당한 채 1987年까지 野人生活을 하며 지냈다.
[23]
1987年 政界에 復歸해 10月에는 신민주공화당을 創黨하고 總裁에 推戴됐으며
新民主공화당
의 出帆 直後 舊
民主공화당
과 유정회의 後身인
國民黨
을 吸收했다. 87年 8月 新民主공화당 大統領 候補로 13代 大統領 選擧에 出馬하였다.
이어 그는 1980年 무렵
全斗煥
政權에 依해 解職된 公務員과 公職者들의 復職을 公約의 하나로 내세우기도 했다.
[29]
12月의 大統領 選擧 結果 4位로 落選했다. 그러나
盧泰愚
政府의 5共 淸算과 權威主義 撤廢 等에 非好感을 느낀 軍事 政權 出身 人士들의 支持에 힘입어 이듬해인 1988年 4月에는 13代 國會議員으로 當選됐다.
共同 與黨 創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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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黨 合黨과 脫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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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正義黨
의 盧泰愚로부터
3黨合黨
의 提議가 오자 考慮 끝에
盧泰愚
의 提案을 受容했다. 1990年 初 3黨合黨을 통해 김영삼의
統一民主黨
, 노태우의 民主正義黨과 統合하고,
民主自由黨
出帆에 參與해 다시 執權與黨의 政治人이 되고, 1990年 2月 民主自由黨 最高委員에 選出됐다. 1992年 3月 民主自由黨 代表委員, 金永三 政府 初期에 다시 執權 民主自由黨의 代表가 됐으나, 內閣制를 推進하려는 그의 見解와 大統領中心制를 固守하려는 金永三 間의 政治的 見解 差異로 葛藤하게 됐다. 한便 次期 大選有力走者로 擧論됐으나 노태우는
박철언
을 選擇하려 했고, 以後 김영삼 系列이 集團 脫黨兆朕을 보이자 노태우는
金永三
을 後繼者로 決定했다. 이 過程에서 그는 大選 豫備走者로서의 機會를 얻지도 못했다.
1992年 8月에
民自黨
代表最高委員에 再選任되었다. 그는
內閣 責任制
改憲을 主張했는데 김영삼과 13代 大權을 놓고 競爭하게 됐다. 1993年 2月에 김영삼이 大統領에 當選,
文民政府
出帆 以後 不便한 關係를 維持하다가 新軍部, 하나회 等 전두환 系列의 軍部 肅淸 以後 黨內 軍部勢力을 除去하려던 김영삼과의 不和 끝에 민주系는 그의 退陣을 이끌어낸다. 1995年 2月 9日 그는
民自黨
總裁職 辭退와 同時에 脫黨하고
自由民主聯合
이라는 讀者政黨을 다시 創黨했다. 以後 一部 嶺南圈 人士들을 包攝하고
朴正熙
,
全斗煥
政權 出身 人士들과 支持層의 票心을 攻掠했으나 失敗했다.
DJP聯合과 國民의 政府 出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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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年 3月에
자민련
의 總裁에 推戴되었고 1996年 4月 第15代 國會議員에 當選됐다. 1997年 第15代 大統領 選擧에서 이념적 差異가 있는
金大中
과 손을 잡아
DJP聯合
으로
金大中
을 大統領으로 당선시키는데 큰 役割을 하고 1997年 11月에는
自由民主聯合
名譽總裁로 政界一線에서 물러났다.
그가
金大中
과 손을 잡자
保守主義
勢力에서는 그의
聯合
을 놓고 非難을 퍼부었다. 以後
國民의 政府
의 첫 國務總理 署理로 5個月間 지낸 後 總理로 任命되었다. 그는
DJP聯合
政權의 한 軸으로서 總理를 包含한 一部 閣僚의 人事權 等을 行使하였고 '國民年金' 等의 主要 政策에서도 그 權限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內閣制 改憲, 對北 關係 等을 놓고 김대중과 갈등했고, 2001年 結局
DJP聯合
은 崩壞된다. 그가 總理職에서 辭退한 뒤
박태준
이 後任者가 되었다.
2000年에 實施된
大韓民國 第16代 總選
에서 그가 이끄는
자민련
은 17席을 얻는 데 그쳐 院內交涉團體 構成에 失敗했다. 2001年 9月 國會에서
임동원
統一部 長官 解任案을 可決한 것을 契機로
김대중 政府
와 訣別을 宣言했다. 以後 김종필은 少數野黨의 總裁로 남게 됐다. 1999年 2月 10日부터 11日까지
印度
를 訪問했다. 김종필은 韓國이 파트너 國家로 參加한 印度 엔지니어링 貿易 博覽會《IETF'99》의 開幕式에 參席하고 돌아왔다. 1999年 6月 12日 第1回 자랑스런 美術引上(美術人 支援에 功勞)을 받았고, 1998年 7月 한국미술협회 '大韓民國 50年을 만든 50代 人物'에 選定됐으며 1998年 5月의 홍콩 아시아위크誌 앙케이트 調査에 아시아 有力人士 50人 35位에 選定됐다. 1999年 美國 마르퀴즈 후즈 後嗣의 1999年版 후즈 後 認 더 월드에 登載됐다.
第16代 大統領 選擧
編輯
DJP聯合이 破棄되고 김대중 政府와 訣別을 宣言한 김종필은 2002年
大韓民國 第16代 大統領 選擧
를 앞두고 1月 15日,
內閣制
를 核心公約으로 내세운 뒤 出馬를 宣言했다.
[30]
그러나 忠淸圈 地域 以外에 支持勢를 많이 잃어버린 탓에 支持率이 오르지 않자 獨自出馬를 抛棄했다. 2002年 大選 期間동안 김종필은
한나라黨
의 大選候補
李會昌
과
새千年民主黨
大選候補
盧武鉉
中 어느 人物도 支持하지 않고 中立을 維持했으며, 特히 두 候補 모두 '三金政治' 淸算을 내세우며 大選판에 登場한 건 三金의 政治歲가 2000年代에 들어 惡化되었음을 보여주었다.
2005年 政界隱退 以後
東亞日報
와 인터뷰에서 2000年 李會昌에게 20席 以下의 자민련도 交涉團體 地位를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는 約束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는 거짓말을 했고, 이 때문에 그를 믿을 수 없다는 理由로 支持하지 않았다고 答했다.
[31]
노무현 政府 出帆 以後 자민련의 政治勢는 더욱 惡化되었으며 김종필은 少數 野黨 總裁로 남아 政治活動을 持續하였다.
盧武鉉 大統領 彈劾訴追와 政界隱退
編輯
2004年
새千年民主黨
,
한나라黨
李 大統領 노무현 彈劾訴追案을 發議하자 그는 처음에는 彈劾에 反對하였으나, 以後 議員들의 自由意思로 돌리며 事實上 中立을 宣言했다. 김종필은 彈劾案 票決에 不參하였다.
[32]
그러나 자민련은
彈劾 逆風
을 이겨내지 못했다. 第17代 國會議員 選擧에서 자민련은 地域區에서 4席을 獲得하는 데에 그치면서 交涉團體도 構成하지 못했고, 比例代表에서는 候補 15名(1番 金鍾泌, 2番
성완종
, 3番
조희욱
, 4番 김종택, 5番 유운영, 6番 이희자, 7番 신은숙, 8番 金容俊, 9番 이병우, 10番 김영일, 11番 문도연, 12番 박배철, 13番 오영자, 14番 김용희, 15番 권경애)
[33]
이 出馬했지만 地域區 5席, 比例代表 最終 得票率 2.8%를 記錄하면서 0.2% 差異로 김종필을 包含한 比例代表 國會議員 全員이 落選하였다. 10線에 失敗한 김종필은 總裁職을 辭退하고 政界 隱退 宣言을 하여, 43年만에 政治界에서 退場했다. 김종필이 隱退하면서, 三金은 모두 政界에서 隱退하게 되었으며 三金時代度 幕을 내렸다.
以後 忠淸圈 地域 政黨으로
國民中心當
,
自由先進黨
等이 만들어졌지만 自身은 이에 加擔하지 않았으며, 2007年 大選에서도
한나라黨
候補인
李明博
을 支持했다. 2008年 3月 26日, 김종필은 김영삼 前 大統領과 함께 서울 江南에서 會同을 갖고 한나라당 公薦 結果가 偏頗的으로 進行됐다는 데 意見을 같이하고 李明博을 强力히 聲討했다.
[34]
2000年代 以後 漢城디지털大學校의 名譽 夕座敎授에 委囑되기도 했다.
2008年 12月 15日 무렵 갑자기 腦卒中으로 쓰러져 入院,
[35]
以後 超人的인 再活運動을 통해 2010年 무렵 거의 正常을 回復했다.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