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김복진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김복진

日帝强占期의 彫刻家

김복진 (金復鎭, 1901年 11月 3日 ( 1901年 陰曆 9月 23日 ) [1] - 1940年 8月 18日 )은 日帝强占期 의 彫刻家이며, 社會主義 系派의 進步 性向 文藝運動을 이끈 指導者였다. 號는 定款(井觀), 本貫은 安東 (安東)이다.

김복진
金復鎭
1923년에 만든 자작 상
1923年에 만든 自作 上
身上情報
別稱 號(號)는 定款(井觀)
出生 1901年 11月 3日 ( 1901-11-03 )
大韓帝國 忠淸北道 淸原郡 남이면 팔봉리
死亡 1940年 8月 18日 ( 1940-08-18 ) (38歲)
日帝 强占期 京城府
職業 演劇俳優
彫刻家
美術 評論家
文藝 理論價
社會運動家
國籍 大韓帝國
日本 帝國
學歷 日本 도쿄 美術學校 卒業
宗敎 儒敎 ( 性理學 )
分野 조각
配偶者 虛하백
親戚 김팔봉 (아우)
김복희 (조카딸)
主要 作品
少年
影響

生涯

編輯

1901年 忠北 淸州 出身이고, 배재高等普通學校 를 거쳐, 1920年 日本 도쿄 美術學校 조각科에 入學했다.

1924年 데이코쿠美展(帝國美展)에 作品 〈裸像(裸像)〉을 出品, 入選하였다. 同年 卒業과 同時에 歸國하여 母校인 배재中學 敎員이 되었다. 한便 ‘兎月美術硏究會(土月美術硏究會)’, 靑年學館(靑年學館, Y.M.C.A.) 美術科, 京城(京城)女子商業學校의 美術講師 等으로 後進養成에 힘썼다. 1925年 第4回 宣傳 (鮮展)에 作品 〈3年 前〉을 出品, 3等賞을 受賞한 것을 筆頭로 제5회 및 第16回 선전에서는 特選, 第15回 宣傳에 入選되었다. 1930年 中央日報 學藝部長을 지내는 한便 ‘朝鮮美術원(朝鮮美術院)’을 創立했고 1936年 法住寺 大佛(大佛)을 着工하여 未完成인 채 서울 에서 死亡했다. [2]

其他 活動, 評價 및 作品

編輯

그는 獄苦(獄苦)를 치르는 等 不遇한 生活 가운데서도 韓國의 近代조각을 開拓하는 데에 크게 貢獻한 先覺者이며 演劇과 評論活動에도 從事한 多才多能한 彫刻家로 評價된다. [2]

本來 文學 靑年이던 金復鎭은 조각 工夫를 하면서 土月會 를 結成해 新劇 運動을 벌이는 等 文藝 여러 分野에서 活動을 始作했다. 이때 社會主義 思想에도 入門했다. 배재高等普通學校 敎師로 勤務하면서 윤효중 等 여러 弟子에게 影響을 주었다. 第 1次 카프 檢擧 事件으로 逮捕되기 前까지 考慮共産靑年會 의 學生委員會를 擔當하여 學生 運動 指導者로도 活動했다.

金復鎭은 '韓國 最初'라는 修飾語가 다양하게 붙는 先驅的인 藝術人이었다. 韓國 最初의 彫刻家, 韓國 美術批評의 첫 스승, 土月會로 新劇 運動을 開創한 演劇人, 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을 創立한 社會主義 思想家, 漫畫 와 廣告에 처음 눈을 뜬 言論人 等이다. 동생이자 카프 同僚였던 金基鎭은 "亡兄(亡兄) 김복진의 이름은 朝鮮文化史의 첫 페이지에 記錄돼도 좋으리라 생각된다"고 썼다.

그러나 社會主義 系列에서 活動하다 日帝 强占期에 일찍 死亡하여 오랫동안 評價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婦人인 虛하백 이 김복진 死亡 後 親日 演說과 寄稿에 積極的으로 나서 非難 받았고 美軍政 夏에서는 社會主義 運動을 하다가 失踪 또는 他殺된 것도 김복진의 이름이 금기시되는 契機가 되었다. 越北 藝術人 解禁 以後 記念事業會가 設立되어 墓所에 墓碑도 세워지고 《김복진 全集》, 《김복진의 藝術世界》 等이 出刊되면서 再評價되었다.

作品

編輯

金復鎭은 韓國에 西洋 彫刻을 처음 導入하고 寫實主義 彫刻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評價된다.

作品 傾向은 事實的인 表現으로 一貫하고 있다. 代表的인 作品으로는 〈法住寺 釋迦如來立像〉, 〈다산 先生像〉, 〈少年〉, 〈白化〉가 있으나, [2] 混亂期를 거치며 두 點만 남아 있다. 1922年 消失된 <금산사 中央 彌勒佛> 再建.

〈法住寺 釋迦如來立像〉

忠淸北道 報恩 法住寺에 所在한다. 높이 80餘 隻의 鐵筋 콘크리트로 된 大佛(大佛)이다. 彫刻家 김복진의 畢生의 代表作으로 心血을 기울여 1935年頃에 製作하기 始作했으나 頭部(頭部)와 全體의 比例만을 마치고 資金難으로 中止되어 그의 生存時에 完成을 못보고 以後 1949年 윤효중(尹孝重)李 이어받아 推進되었으나 亦是 途中에 中斷, 장기은(張基殷), 林泉(林泉) 等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63年 3月에 비로소 完成되었다. 30餘年의 製作 期間을 거치는 동안 김복진의 原形과는 距離가 먼 것으로 變貌되고 말았으나 近代조각으로서 特記할 만한 溫乾한 容貌와 豐滿한 立體感을 갖춘 紀念碑的 祖上(彫像)이다. [3]

〈少年〉

김복진의 代表的인 彫刻 作品이다. 日帝 强占期인 1940年 第19回 宣傳에 出品하여 特選을 받은 그의 最後作이다. [4]

家族 關係

編輯

學歷

編輯

各州

編輯
  1. 링크
  2. 韓國美術/韓國美術의 흐름/韓國 近代美術/韓國 近代조각/김복진, 《글로벌 世界 大百科》
  3. 韓國美術/韓國美術의 흐름/韓國 近代美術/韓國 近代조각/法住寺 釋迦如來立像, 《글로벌 世界 大百科》
  4. 韓國美術/韓國美術의 흐름/韓國 近代美術/韓國 近代조각/少年, 《글로벌 世界 大百科》

外部 링크

編輯
  •   위키미디어 公用에 김복진 關聯 미디어 分類가 있습니다.

같이 보기

編輯

參考資料

編輯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內容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