陪扈는 1942年 4月 24日,
中華民國
산둥 省
지난
(現在의
산둥省
과
지난
은 모두
中華人民共和國
領土)에서
光復軍
이었던 杯國民과 그의 夫人 김금순의 長男이자 첫째로 태어났다.
[2]
아버지 杯國民은
平安北道
鐵山
出身이며, 어머니 김금순은
新義州
出身이다. 出生 當時 이름은 배만금(裵晩今)이며, 中學校 1學年生 때 배신웅(裵信雄)으로 改名하였다.
1945年
解放 以後 父母를 따라
故國
에 歸國한 以後
京畿道 仁川
의 收容所에서 生活하다 1946年 4月부터 서울
昌信洞
의 敵産家屋에서 살았다.
서울창신國民學校
를 卒業하고,
慶尙南道 釜山 三星中學校
에 入學하였으나
1956年
2學年 1學期를 마치고 中退했다.
中學校 中退 以後로도 가난에 시달렸으며, 1957年에서 1964年까지
서울중앙방송
樂團場과 1964年에서 이듬해 1965年까지 TBC 동양방송 樂團場을 지낸 外叔父
金光守
그리고 MBC 文化放送 招待 樂團場을 지낸
김광빈
樂團, 童話, 天地, MBC樂團, 김인배 樂團 等에서
드럼
을 연주하며 音樂 活動을 始作했다. 12人組 '陪扈와 그 樂團' 밴드를 結成해 서울
낙원동
프린스
카바레
等에서 活動하며 이름을 알렸다.
1966年
腎臟炎에 걸렸으며
1967年
배상태
가 作曲한〈돌아가는 三角紙〉를 發表했다. 그 後 1971年 10月 MBC 라디오
이종환
의
별이 빛나는 밤에
프로그램
出演 後 집에 가는 길에 비를 맞고 가면서 感氣에 걸려
腎臟炎
이 再發했고, 病院에 入院했다가
1971年
11月 7日
結局 숨졌다. 當時 그의 나이는 滿 29歲로, 未婚이었다. 墓地는
京畿道
楊州市
新世界 公園墓地에 있다.
1981年
實施된 MBC 特輯 輿論 調査에서 '가장 좋아하는 歌手' 1位로 選定되었으며,
2005年 6月
'光復 60年 記念 KBS
가요무대
' 輿論調査에서 '國民에게 가장 사랑받은 國民歌手 10人'으로 選定되었다.
어머님 , (1938年生 <虎狼이띠>), )1942年生, 外三寸 - 김광빈 作曲家 先生님, 月刊 <아리랑>...!!! 고맙습니다...!!!
歌手 生活 5年 동안 10餘 個 音盤社에서 20餘 張의 音盤을 發賣했으며, 總 200餘 曲을 남겼다.
- 1963年(21歲): 藝名 ‘陪扈’로 데뷔, 데뷔曲 〈굿바이〉, 〈사랑의 화살〉 (오리엔트 레코드) 發表
- 1964年(22歲)~1965年(23歲): 데뷔曲 音盤 吹入 -〈두메山골〉等 6曲 (톱 힛트 레코드), 캄보 밴드 '陪扈와 그 樂團' 運營
- 1966年(24歲): 腎臟炎 發病, 〈黃金의 눈〉 (地球 레코드) 및 〈홍콩 66番地〉 (新世紀 레코드) 發表
- 1967年(25歲)
- 〈누가 울어〉, 〈안개속으로 가 버린 사람〉 (뉴스타 專屬) 等을 病床에서 發賣
- 〈돌아가는 三角紙〉 (亞細亞 專屬) 發表
[3]
- 1967年~1968年(26歲): 各 매스컴 主催 行事에서 歌手賞 受賞: MBC 10代 歌手賞(라디오)
[4]
·TBC 放送歌謠大賞 等, 各種 映畫 出演
- 1969年(27歲)~1970年(28歲): MBC 10代 歌手賞(TV) 等 (新世紀 專屬, 地球 專屬) 歌手活動 5年 동안 總 30餘個 部門에서 各種 歌手賞 受賞
- 1971年 7月(29歲): 〈마지막 잎새〉, 〈英詩의 離別〉等 마지막 音盤 發表,
11月 7日
永眠
- 陪扈가 노래한 돌아가는 三角紙에 建設됐던
용산의 立體 交叉路
는 노래가 히트한 해인
1967年
에 建設됐다가
1994年
에 撤去됐다. 現在는 〈돌아가는 三角紙〉 노래碑, 陪扈로, 陪扈 銅像 等이 남아있다.
- 1971年 11月 11日 禮銃 會館에서 치러진 葬禮式에는 素服을 입은 젊은 女人들이 數百 미터 늘어섰다고 한다.
- "西洋에는 베토벤, 東洋에는 陪扈" 라고 할 程度로 音樂性과 事後 人氣가 相當한 歌手이다.
- 全國에 모두 네 個 노래碑가 세워져 있다(
龍山區
: 〈돌아가는 三角紙〉,
墓地
: 〈두메山골〉,
慶州市
: 〈마지막 잎새〉,
江陵市
: 〈波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