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준 만큼 期待가 커진다. ‘내가 이만큼 사랑을 베풀었으니 最少 이 程度는 사랑받을 수 있을 거야’라는 期待를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相對는 番番이 期待에 못 미치는 사랑을 준다. 不公正한 去來다. 괘씸하고 不義한 일이다. 그래서 關係 破綻의 모든 責任을 相對에게 지운다.” ―김동규 ‘哲學者의 사랑法’ 中
微生物과 씨름한 지 어느덧 30年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實驗과 文獻을 통해 直接과 間接으로 別別 微生物을 다 만났다. 한 番은 먼 바다 깨끗한 물에 있는 한 微生物 無理가 사는 法을 報告 ‘작을 美(微)’에서 ‘아름다울 美(美)’를 느끼기도 했다. 물이 맑을수록 그만큼 有機物 含量이 적다. 微生物 立場에서는 먹이가 不足해 生活難을 겪기 十常이다. 그런데 그 海洋 微生物은 이런 環境 條件에서 잘도 살아간다. 甚至於 必須 아미노산 가운데 一部를 만들지 못하는 缺點을 지닌 채로 말이다. 이들은 各自 自身이 만들 수 있는 아미노산을 조금 넉넉히 만들어 몸(細胞) 밖으로 조금 分泌해서 서로의 不足함을 채워준다. 事實, 흔히들 하찮게 여기는 微生物 世上에서도 이 程度 품앗이는 茶飯事다.
품앗이와는 다르게 膳物은 되받을 것을 期待하지 않고 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現實에서는 이런 膳物이 갈수록 稀貴해지고 있는데, 哲學者 김동규는 이를 사랑이 蒸發하고 있는 徵標라고 診斷한다. 그리고 나는 씁쓸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랑은 正義가 아니기에 公平한 去來를 이룰 수 없다. 普通 누군가에 對한 사랑의 程度는 준 만큼 받으려는 期待値와 反比例한다. 사랑의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理由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말도 있듯이 父母의 사랑, 特히 母性愛는 가장 큰 기울기를 만든다. 激動의 한 世紀를 살뜰하게 살아낸 어느 할머니의 마지막 한마디가 떠오른다. “너희 德에 참 잘 살았다!” ‘그대 德에’라는 말이 가슴에서 절로 우러나올 때 穩全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