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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世紀 知識情報化 時代를 열어 갈 綜合미디어그룹 - 동아일보
 
創刊
日帝는 1919年 3·1獨立運動에 큰 衝擊을 받고 ‘文化政治’를 標榜해 이듬해
1月 동아일보 朝鮮日報 시사신문 等 3개지를 許可했다. 當時 사이토 朝鮮總督은 이에 對해 日本人들이 抗議하자 “동아일보는 朝鮮 民族의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가스를 排出시키는 굴뚝이야. 가스를 排出시키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 끝내는 暴發하게 되거든...”이라고 對答했다는 逸話가 있다.
인촌 金性洙 先生 等 創刊 主導 人士들은 當初 3·1運動 1周年인 1920年 3月 1日子로 創刊하려 했으나 資金不足으로 한달 後인 4月 1日 타블로이드판 夕刊 4面 體制로 創刊했다. 當時 發行部數는 1萬 部 程度, 購讀料는 한 部에
3錢(只今의 約 900원)이었다. 民族主義 民主主義 文化主義를 斜視(社是)로 내걸었다. 이 創刊精神은 只今도 本報 1面 左側 上段에 東亞日報 로고와 함께 固定 配置되고 있다.
最初의 社屋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大韓帝國 學部大臣 이용태의 기와집을 月貰 120원(1원은 只今의 約 3萬 원)에 賃貸해 첫 社屋으로 使用했다. 社長室과 서고만 別室로 마련하고 그 밖의 部署는 한 放에 합친 壅塞한 規模였다. 社長, 編輯監督, 週間 以外에 論說半 및 編輯局 22名, 營業局 17名, 工場 22名, 雜務 9名 等 總 74名에 支局網은 全國 5個 都市에 設置했다.
俸給은 週間 120원, 國葬 100원, 部長과 論說半 70~80원, 記者 60~80원 等이었고 記者에게는 月 125원의 取材費가 別途로 支給됐다. 當時 한 달 旅館費가 20~25원 程度였으니 꽤 높은 水準이었음을 알 수 있다.
光化門 時代 開幕
1926年 12月 서울 세종로 네거리에 地上 3層짜리 社屋을 完工해 創刊 6年 半 만에 光化門 時代를 열었다. 이 建物은 그 後 3個 層이 增築돼 忠正路 社屋 入住 以前까지 동아일보 社屋으로 쓰다가 現在는 일민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忠正路 社屋에는 1992年 移徙해 이듬해 朝刊化에 이어 全面 가로쓰기, 컴퓨터製作시스템(CTS) 構築 等 新聞社(新聞史)에 남을 큰 變化를 맞았다. 現在의 社屋 동아미디어센터에는 1999年 12月 31日 入住해 21世紀와 함께 第2의 光化門 時代를 열었다.
세종로 네거리는 創刊 當時부터 現在까지 변함없는 象徵性을 지니고 있다. 卽 朝鮮總督府와 軍政廳, 景武臺, 靑瓦臺에 이르는 最高의 權府(權府)를 肉眼으로 가까이 볼 수 있는 距離에 두고 있어 權力을 監視 批判 牽制하는 言論의 役割과 맞아떨어진다. 그런 理由로 仁村 先生이 굳이 이곳을 固執했다는 이야기가 傳해 내려온다.
다양한 文化 體育行事 主催
本報는 1931年 第1回 東亞마라톤大會 以來 74年間 이 大會를 開催해 오며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等으로 이어지는 ‘마라톤 韓國’의 土壤을 마련했다. 손 選手는 양정고보 時節 2回 大會 때 準優勝하고 3回 大會 때 優勝했다.
이 밖에도 1923年 7月 女子庭球大會, 1924年 10月 學生雄辯大會, 1925年 동아新春文藝, 1926年 8月 4俱樂部(배재, 中央, 휘문, 更新) 野球聯盟戰, 1929年 9月 水營競技大會 및 男女學生作品展覽會 等 各種 年例 스포츠와 敎育文化 行事를 主催했다.
特히 1923年에는 朝鮮物産奬勵運動(朝鮮사람 朝鮮 것 쓰기운동), 1931年 브나로드 運動(文盲退治運動) 等 大大的인 民族主義 啓蒙運動을 展開했다. 光復 以後에는 1947年 黃金獅子機 高校野球 爭霸戰, 1956年 바둑 國手戰, 1961年 동아音樂콩쿠르, 1962年 名唱名人大會, 1964年 東亞演劇大會, 1985年 東亞國樂콩쿠르 等을 마련해 多樣한 分野의 發展에 寄與했다.
日章旗 抹消事件
第11回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時間 29分 19秒 2로 當時 待望의 2時間 30分 壁을 깨고 優勝한 손기정 選手는 全世界에 韓國人의 氣像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本報에도 큰 波長을 불러왔다. 손 選手가 施賞臺에 서 있는 場面 寫眞을 1936年 8月 25日子에 揭載하면서 가슴 部分의 日章旗를 지워버려 總督府로부터 네 番째 武器停刊 措置를 當했다.
이는 當時 이길용 體育部 記者와 이상범 畫伯의 ‘以心傳心’이 이뤄낸 作品이었다. 이 事件으로 本報 記者 8名이 拘束되고 이中 5名은 끝내 新聞界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主筆 編輯局長 等도 辭任했다. 停刊은 1936年 8月 29日부터 1937年 5月 31日까지 9個月間 持續되고 그 사이 송진우 社長, 장덕수 副社長, 양원모 社長職務代理 等도 잇따라 물러나야 했다.
廢刊과 復刊
1939年 9月 第2次 世界大戰이 勃發하자 日帝는 朝鮮 民族의 ‘皇民化(皇民化)’를 旗幟로 내걸고 民族抹殺政策에 光分解 除去 對象 1號로 本報를 指目했다. 總督府는 自進廢刊 慫慂에도 不拘하고 新聞을 繼續 發行하자 口實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40年 6月 初 日本人 警察 幹部들이 料亭에서 會食 中 料理床을 덮은 흰色 종이가 本報에서 破紙를 購入한 것이란 말을 듣고는 ‘經理否定’ 事件을 造作해 낸다. 當時 新聞用紙는 展示(戰時) 統制物資로서 配給制를 實施하고 있었는데 이를 不法 處分했다는 口實로 本社 經理部長을 拘束했다. 또 보성전문학교에 2萬 원을 빌려준 事實도 問題삼아 常務와 營業局長 等에 이어 송진우 拷問과 백관수 社長까지 拘束하고 말았다.
結局 本報는 總督府의 强壓에 依해 그해 8月 10日子 社說을 통해 廢刊을 宣言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廢刊號 3面 上段에 탐스러운 葡萄송이 寫眞을 揭載해 全 社員이 다시 뭉칠 날이 있을 것임을 讀者들에게 期約한다. 그로부터 暗黑時代 5年 4個月이 지나고 光復 3個月 半 만인 1945年 12月 1日에야 復刊됐다.
6·25戰爭과 釜山 避亂
南侵이 始作된 1950年 6月 25日 아침 非常 召集된 本報 社員들은 時時刻刻 들려오는 戰況에 따라 號外를 發行하다 27日 午後 南侵 先鋒隊가 이미 議政府를 거쳐 미아리 附近까지 내려왔다는 消息에 製作 中斷 決斷을 내린다. 編輯局에 모인 記者와 印刷職員들은 ‘敵, 서울 近郊에 接近, 우리 國軍 苦戰 血鬪中’이라는 題目의 號外 300張을 마지막으로 發行하고 서울 市內 一圓에 直接 配布한 뒤 武橋洞 설렁湯집으로 모였다.
新聞社 가운데 最後의 號外를 낸 記者精神을 自祝하는 술盞도 잠깐, 이들은 再會를 期約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後 本報는 國軍과 유엔軍의 進退에 따라 避亂地 釜山을 오르내리며 地域新聞에 ‘求乞 印刷’도 마다하지 않고 新聞 製作을 繼續했다. 國民防衛軍 事件과 居昌 良民虐殺 事件, 拔萃改憲案을 둘러싼 政治波動 때는 李承晩 政府의 極甚한 彈壓을 받으면서도 批判의 强度를 낮추지 않았다.
本報는 1953年 7月 27日 休戰協定 以後 8月 18日子를 끝으로 釜山 避亂時代의 幕을 내리고 光化門 社屋으로 돌아왔다.
‘고바우 令監’ 筆花와 ‘나대로 先生’ 難産
1955年 2月 1日子부터 連載된 김성환 畫伯의 ‘고바우 令監’은 1958年 1月 23日子 ‘景武臺에서 똥 치는 人夫’로 景武臺의 威勢를 諷刺해 長安의 話題를 모았다. 當時 權力者에게 無條件 阿附하는 風潮를 反映한 것으로, 이 漫畫의 背景은 이강석(李起鵬의 아들로 李承晩 大統領의 養子)을 詐稱해 地方 官吏들에게 極盡한 待接을 받은 ‘假짜 이강석’事件이었다. 金 畫伯은 警察에 連行돼 ‘他人의 四史(私事)에 關하여 虛僞事實을 揭載’했다는 理由로 ‘輕犯’으로 몰려 450圜의 科料를 낸 뒤 풀려났다.
1980年 11月 11日부터 金 畫伯의 뒤를 이어 ‘나대로 先生’을 그려온 이홍우 畫伯 亦是 첫 號부터 戒嚴令下의 軍 檢閱로 難産을 거듭했다. 그는 情報機關에 依한 數次例의 連行調査와 脅迫, 懷柔工作에도 屈하지 않고 4컷 漫畫로 權力世界를 銳利하게 諷刺해왔다.
4·19革命의 牽引車
1959年 4月 30日 경향신문이 廢刊되자 本報는 自由黨 政權의 不正選擧 劃策을 看破하고 줄기찬 反政府 鬪爭을 벌여 4·19革命의 牽引車 役割을 했다. 5月 2日子에 ‘왜 新聞을 폐간시켰는가’ 題下의 社說로 砲門을 열어 경향신문 廢刊의 不當性부터 條目條目 指摘했다. 엄청난 不正選擧 計劃이 露骨化되자 1960年 3·15選擧를 앞두고 全國에선 學生과 市民들이 連日 示威를 벌였다. 本報는 다시 3月 11日子 ‘天人이 共怒할 蠻行’ 題下의 社說에서 “可能한 限 모든 鬪爭을 全國民의 이름으로 展開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고 事實上 政權에 對한 全面戰을 宣言했다.
3·15選擧가 恐怖雰圍氣와 公開投票, 테러 等에 依해 大大的인 不正選擧로 얼룩지자 全國的인 抗議데모 속에 馬山에서는 群衆이 支署를 襲擊하는 事件이 發生했다. 이어 4月 11日 警察의 無慘한 虐殺로 밝혀진 金朱烈 君 死亡事件은 馬山을 폭발시키고 4月 19日 서울에서는 10萬 名의 大學生과 數萬 名의 中高校生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一部는 景武臺 앞까지 몰려가 警察과 對峙하며 大統領 面談을 要求했다.
非常戒嚴令이 宣布되고 同時에 警察은 示威隊에 發砲하는 事態로까지 번졌다. 結局 이 大統領은 4月 26日 下野하고 하와이로 亡命했으며 이기붕 一家는 集團自殺로 李承晩 政權의 終焉을 告했다.
言論 목 조른 5·16軍事政變
5·16軍事政變 勢力은 5月 27日 非常戒嚴을 警備戒嚴으로 代替하면서 形式上 事前檢閱은 없앴지만 言論에 꼼짝달싹할 수 없는 재갈을 물렸다. 特需犯罪處罰에 關한 特別法을 만들어 ‘政府를 誹謗할 目的의 虛僞事實 捏造 流布行爲는 10年 以下의 懲役’에 處하도록 했고, 反共法에 ‘反國家團體와 그 構成員의 活動을 讚揚 鼓舞 同調하는 境遇 7年 以下의 懲役’에 處한다는 條項을 넣었다. 1960年代 大部分의 筆禍事件은 이들 條項에 抵觸되는 것이었다. 이는 記者들에게 事實上 記者室과 化粧室의 出入만을 許容하는 것이었다.
本報는 尹潽善 前 大統領이 ‘早速한 民政 移讓’을 要求한 記者會見 內容을 報道하면서 軍事政權과 첫 衝突을 했다. 이로 인해 當時 編輯局長, 政經部 次長과 이만섭(前 國會議長) 이진희(前 文公部 長官) 記者가 連行돼 두 記者는 한달 以上 陸軍刑務所에 收監됐다. 以後 記者들이 頻繁하게 連行되고 拘束됐다.
5·16軍事政權은 當時 朝夕刊制이던 新聞發行을 단간制로 바꿀 것도 强要했다. “政治 記事가 너무 많아 國民이 政治에 지나치게 敏感하며 이에 따라 新聞이 재미없어 讀者가 늘지 않는다”는 名分이었다. 本報는 이때 夕刊을 選擇했다.
東亞放送 個國과 弊國
4·19革命 이듬해인 1961年 1月 16日 민주당 政府에 依해 放送局(콜 死因 HLKJ) 設立 加허가를 받은 지 2年 3個月 만인 1963年 4月 25日 午前 5時 30分 3個月 만인(DBS)은 첫 뉴스 報道로 誕生을 알렸다.
官營放送人 KBS와 民營放送인 MBC, CBS에 이은 것이지만 3個月 萬人은 日刊新聞社가 運營하는 첫 放送으로서, 聽取率은 그해 7月 18.9%(公報部 調査), 그해 9月 20%(연세대 調査), 이듬해 2月 33.5%(公報部 調査)로 急成長했다. 더욱이 동아방송은 首都圈 一帶에서만 聽取가 可能했던 點을 勘案하면 全國 放送인 KBS의 39.8%를 壓倒하는 首都圈 聽取率 50%에 이르렀다.
동아방송은 特히 뉴스에 重點을 두어 동아일보가 ‘보는 新聞’이었다면 東亞放送은 ‘듣는 新聞’으로서 補完關係를 이루었다. 그러나 동아방송은 1980年 新軍部의 言論統廢合 措置로 11月 30日 마지막 放送을 함으로써 17年의 짧은 一生을 마감했다.
記者들에 잇단 政治테러
國交正常化를 위한 韓日協商과 協定批准에 對한 朴正熙 政權의 獨走를 앞장 서 批判하고 反對하던 本報의 변영권 編輯局長 代理의 自宅이 1965年 9月 7日 밤 爆破되고 東亞放送 조동화 製作課長이 집에서 怪漢에게 拉致돼 몰매를 맞았다. 이어 當局은 10月 1日子 本報 社會面 ‘서울에 北傀 新聞’ 題下의 記事를 問題 삼아 남중구 社會部 記者를 反共法 違反(讚揚 鼓舞) 嫌疑로 拘束했다.
이듬해인 1966年 3月 24日 ‘獨走(獨走)’시리즈 세 番째 記事인 ‘所信은 萬能인가’를 쓴 최영철 政治部 記者가 4月 25日 밤 自宅 附近 골목길에서 暴行을 當했고 이튿날 새벽에는 ‘救國特供團長’ 名醫의 脅迫狀과 함께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 2個가 집안으로 날아들었다. 7月 20日 밤에는 권오기 政治部 次長이 집 앞에서 2名의 怪漢에게 暴行당하고 12月 29日에는 傷痍軍警 50餘 名이 本社 編輯局에 亂入해 集團 亂動을 부렸다.
‘維新’ 抵抗과 廣告彈壓
永久執權의 바탕을 마련한 維新憲法에 對한 改憲運動이 1974年 1月 8日 大統領 緊急措置 1, 2號 宣布로 禁止됐다가 8月 23日 解除되면서 大學과 宗敎界 在野團體 野黨을 中心으로 維新憲法의 廢止, 民主回復 運動이 洑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 渦中에서 그해 10月 23日子 本報에 ‘서울 農大生 300名 데모’記事가 報道되자 中央情報部는 當時 編輯局長 송건호, 地方部長 한우석, 東亞放送 뉴스 쇼 擔當 部長 박중길을 連行했다.
記者들은 卽刻 編輯局에 모여 籠城에 突入해 이튿날 ‘外部 干涉 强力 排除’ ‘機關員 出入禁止’ ‘言論人의 不法連行 拒否’ 等 3個項의 決意內容을 담은 自由言論實踐 宣言文을 發表했다. 10月 25日子에는 ‘왜 自由言論을 부르짖는가’ 題下의 社說을 실었다. 以後 本報는 禁忌事項(緊急措置 違反)이던 維新反對 集會 示威 記事를 本格的으로 다루기 始作해 하루 平均 7~10個의 大學街 示威 記事를 실었다.
이와 關聯해 뉴욕에 本部를 둔 國際人權團體 프리덤하우스는 그해 11月 20日 言論統制에 맞서 鬪爭하는 本社에 表彰狀을 보내 讚揚했다. 及其也 그해 12月 16日頃부터 政權의 壓力을 받은 廣告主들이 뚜렷한 理由를 밝히지 않은 채 廣告를 解約하는 事態가 發生했다. 廣告彈壓 한 달 後 本報 廣告는 98%가 떨어져 나갔다.
白紙 廣告가 나오기 始作하자 1萬 件이 넘는 國內外 讀者들의 激勵廣告가 줄을 이었다. 돼지貯金筒을 털어온 어린이, 就勞長 하루 勞賃을 몽땅 내놓은 勞動者, 끼고 있던 金半指를 欣快히 빼준 讀者도 있었다. 廣告는 이듬해 7月 16日부터 再開됐다.
10·26事態 孕胎한 YH女工 籠城
1979年 5月 30日 신민당 全黨大會에서 ‘鮮明 野黨’을 내세운 김영삼 氏가 새 總裁로 選出되면서 維新 政局은 暗雲을 드리우기 始作했다. 8月 9日 YH貿易 女工 170餘 名이 서울 麻布의 신민당使 4層 講堂을 占據하고 勞使紛糾 問題로 籠城에 들어갔다. 警察은 解散 慫慂에도 不拘하고 말을 듣지 않자 이틀 뒤인 8月 11日 深夜에 奇襲 連行作戰을 敢行했으며 이 渦中에서 女工 1名이 投身 自殺하고 新民黨 議員들과 取材記者들도 함께 負傷 또는 연행당하는 事態가 벌어졌다.
本報는 維新 末期의 斷末摩的인 政府 壓力에도 不拘하고 暴力的인 警察의 解散 作戰을 大書 特筆해 政局은 一時에 激浪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理性을 잃은 朴正熙 政權은 新民黨 內部와 法院, 國會를 操縱해 8月 11日 金 總裁 職務執行停止 假處分, 10月 4日 議員職 除名을 强行했다. 드디어 10月 22日 釜山 馬山 一圓에서 暴發한 駙馬(釜馬)抗爭은 政權의 內紛과 10·26事態를 부르는 契機로 作用했다.
維新政權 崩壞 過程에서 本報는 고비고비마다 다른 言論社를 훨씬 凌駕하는 取材와 批判으로 政局 狀況을 主導해 나갔다.
光州民主化運動과 東亞日報
1980年 5月 18日 光州民主化運動이 始作된 後 19~23日 初期 5日 동안 本報는 無社說(無社說)로 抵抗할 수밖에 없었다. 當時 서울市廳에 設置된 郡(軍) 言論檢閱團은 첫날부터 社說을 ‘토막屍體’로 만들어 돌려보냈다. 토막난 채로는 論理가 構成되지 않아 社說로 揭載할 수 없었다. 다음 날에도 表現만을 조금씩 바꿔 비슷한 內容의 社說을 실으려 했지만 檢閱團은 餘地없이 빨간 줄을 그어댔다.
1面 萬坪人 ‘동아희평’(백인수 畫伯)과 社會面 時事漫畫人 ‘고바우令監’(김성환 畫伯)도 실리지 않은 날이 많았다. 5月 27日 鎭壓이 끝날 때까지 日曜日을 除外한 13日 동안 동아희평은 11日間, 고바우令監은 8日間 紙面에서 사라졌다. 또 ‘김대중 內亂陰謀 事件’ 大法院 判決을 앞둔 어느 날에는 ‘金氏는 死刑이 마땅하다’는 軍法務官 出身 辯護士의 글을 싣도록 壓力을 받은 일도 있었으나 本報는 “裁判 繫留 中이어서 困難하다”는 理由로 이를 拒否했다.
光州民主化運動 初期 光州 全南 地域에서는 本報 記者만이 示威隊에 接近해 取材가 可能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言論社 記者 中에 本報 記者를 詐稱하는 境遇가 많아 이 一帶에는 난데없이 ‘동아일보 記者’가 들끓는 웃지 못할 狀況이 演出되기도 했다.
박종철 拷問致死事件 連續 特種
1987年 1月 15日 이 事件 첫 報道는 中央日報에 빼앗겼지만 그 다음부터는 本報의 連續 特種報道로 6月民主抗爭을 觸發하는 原因이 됐다. 搖之不動이던 全斗煥 政權의 ‘護憲(護憲)’立場은 드디어 大統領 直選制 改憲 約束으로 바뀌어 6·29宣言이 誕生하게 됐다.
事件 初期 강민창 治安本部長을 비롯한 警察 幹部들은 서울대生 박종철 君이 쇼크로 숨졌다며 "調査 警察官이 冊床을 ‘탁’ 치니 朴 君이 ‘億’하고 쓰러졌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本報는 朴 君 三寸의 證言을 통해 數十 군데 멍자국이 있었음을 밝혀낸 데 이어 最初 剖檢醫師의 證言에 依해 물拷問 等 各種 拷問 疑惑을 提起했다.
顧問이 事實로 드러나면서 內務長官과 治安本部長이 解任되고 加擔 警察官 5名이 拘束됐으나 本報는 다시 對共搜査 幹部들의 犯人 縮小 및 事件隱蔽造作 謀議 事實을 暴露했다. 民心이 걷잡을 수 없이 惡化되자 政府는 노신영 總理와 安企部長, 內務 法務長官, 檢察總長, 安企部 1次長, 治安本部長 等 時局 關聯 內閣을 全面 交替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本報는 이에 그치지 않고 “事件 初期 治安本部長 等 警察 首腦部가 拷問 致死 事實을 알고도 이를 隱蔽 造作했다”는 剖檢醫師의 日記帳 內容을 暴露해 解任에 그쳤던 治安本部長까지 拘束되게 만들었다. 本報는 當時 서울市內 街販 販賣에서만 40萬 部를 넘기는 놀라운 新記錄을 세웠다.
創刊 78年 만에 全面 가로쓰기 斷行
本報는 創刊 73周年을 맞은 1993年 4月 1日 夕刊時代 30年을 마감하고 朝刊으로 새 出發을 했다. 朝刊化 斷行 6個月 만에 發行部數 200萬 部를 突破해 1984年 150萬 部를 記錄해 韓國 新聞史上 新紀元을 이룩한 以後 9年 6個月 만에 다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어 朝刊化 5年 만인 1998年 1月 1日 新年號부터 全面 가로쓰기를 斷行했다. 첫날 發行面數는 48面으로, 3個 섹션으로 나눈 새 얼굴을 선보였다.
記者 3名 殉職
本報는 創刊 以後 特別取材를 위해 海外에 派遣한 記者 3名을 잃었다.
1920年 10月 中旬 日本軍이 北間島 一帶의 朝鮮人 2200餘 名을 無差別 虐殺했다는 消息을 듣고 장덕준 記者가 自願해 룽징(龍井)으로 가 日本領事館과 討伐軍司令部를 相對로 取材를 벌이다가 投宿 中이던 旅館에서 11月 初 行方不明됐다. 當時 여러 情況과 現地人, 家族 等의 證言에 依하면 日本軍이 그를 誘引해 銃殺한 것으로 推定된다. 우리나라 新聞史上 最初의 殉職記者로 記錄됐다.
또 백광남 記者가 1966年 11月 베트남戰爭에 從軍記者로 派遣돼 取材 中 交通事故로 殉職했으며, 이중현 寫眞記者가 1983年 10月 전두환 大統領의 東南아시아 巡訪을 遂行 取材 中 버마(現 미얀마)의 아웅산墓所 爆發事件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 3名의 寫眞은 現在 本報 編輯局에 나란히 걸려 24時間 本報 記者들의 新聞製作 活動을 默默히 지켜보고 있다.
‘21世紀의 榮光’ 펼칠 동아미디어센터
言論의 使命을 象徵하는 서울 세종로 四거리에 21世紀를 맞으며 21層짜리 인텔리전트 빌딩이 새로 들어섰다. 21世紀 ‘東亞의 雄飛’를 豫見하듯 동아미디어센터와 旣存 社屋 屋上에 設置된 國內 最大의 電光板은 2002年 월드컵大會 期間 中 世界的 名物로 떠올랐다.
세종로 四거리 一帶엔 韓國팀의 競技가 있는 날마다 數百萬 名의 ‘붉은 惡魔’ 應援團이 몰려와 "臺~韓民國"을 외침으로써 월드컵 4强 達成에 決定的 寄與를 했다. 本社는 爆竹 터뜨리기 等 多樣한 이벤트로 群衆의 熱狂的인 應援을 支援해 讚辭를 받았다.
2000年 12月 15日에는 동아미디어센터에 韓國 最初의, 그리고 現在 唯一한 新聞博物館이 들어서 우리나라 近現代 言論社 및 憲政史를 보여 주는 산 敎育場으로 定着됐다.
청계천과 함께 ‘讀者에 더 가까이’
청계천이 復元되면서 동아미디어센터 앞에 造成된 噴水臺 廣場은 청계천 始發點임과 同時에 ‘동아廣場’으로서 本報가 讀者들에게 성큼 다가서게 하는 電氣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1931年 創設된 東亞마라톤 兼 서울國際마라톤의 코스도 청계천邊을 따라 뛰는 새로운 코스로 變更되고 동아일보의 歷史는 讀者와 함께 새롭게 만들어 가는 時代로 접어들었다.
淸溪川 時代에도 本報는 흔들림 없는 政論紙로서, 讀者의 생각과 목소리를 더욱 忠實하고 正確하게 代辯하는 믿음직한 親舊가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讀者들을 더욱 幸福하고 살맛나는 世上으로 招待하는 꿈을 펼쳐갈 것이다.
綜合編成채널 個國
1960年 設立된 동아방송을 繼承해 2011年 12月 1日 綜合編成채널 채널A를 開局했다. 채널A의 製作 및 經營 哲學은 ‘開放性과 創意性(Open & Creative)이며 슬로건은 ’꿈을 담는 캔버스, 채널A'다.
個國 初期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始作으로 最近에는 ‘하트시그널’ ‘都市漁夫’ 等 獨特하고 斬新한 콘텐츠로 視聽者들에게 재미와 感動을 膳賜하는 채널로 사랑받고 있다.
2014年에는 서울 上巖洞에 東亞디지털미디어센터를 竣工, 2015年에는 채널A 플러스를 開國하는 等 放送 領域도 擴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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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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