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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次例 노벨賞에 빛나는 마리 퀴리의 중꺾마 人生|여성동아

CULTURE

두 次例 노벨賞에 빛나는 마리 퀴리의 중꺾마 人生

성지연 에세이스트, 國文學 博士

2024. 02. 19

2023年 經濟學, 平和, 生理醫學, 物理學 分野에서 4名의 女性이 노벨賞을 받았다. 純粹科學 分野에서 노벨賞을 받은 女性은 5%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첫 門을 연 마리 퀴리를 떠올렸다.

마리 퀴리(1867~1934).

마리 퀴리(1867~1934).

놀거리가 많지 않았던 어린 時節, 月賦 冊 장수를 통해 집에 들여온 冊들을 많이 읽었다. 그中에는 어린이用 偉人傳度 있었다. 人類의 긴 歷史에서 이렇게 많은 西洋 白人 男性이 爲人으로 뽑힌 것에 疑問을 품지는 못했다. 오히려 苦難을 겪으며 成功한 사람들의 人生을 보며 未來에 對해 많은 꿈을 꿨다.

나이가 들면서 그 冊이 내 人生에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보게 됐다. 天才性으로 包裝된 乖愎함으로 周邊 사람들이 참 苦生했겠다 싶은 人物들이 적지 않다. 한 人物의 成功에 좋은 時期와 뜻밖의 만남 같은 우연한 幸運이 없지 않으니 成功談을 덮어놓고 믿기도 어려웠다. 成功談으로 編輯해놓은 이야기와 實際 人生의 거리는 나이가 들수록 너무 멀어 보였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한 사람의 人生에 對한 이야기를 읽는 일을 如前히 좋아한다. 世上일은 내가 어쩔 수 없을 때가 많다. 내가 해야 할 건,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다. 그 過程에서 賢明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勇氣를 얻을 수 있다면 참 고마운 일이다. 폴란드 出身 女性 科學者 마리 퀴리의 人生 이야기를 읽는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이 찾아간 길을 따라가 보는 經驗이다.

꿈이 시들고 다시 피어나다

1904년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위). 1900년 마리 퀴리의 실험실.

1904年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危). 1900年 마리 퀴리의 實驗室.

1937年 冊 ‘마리 퀴리’를 낸 著者는 퀴리의 둘째 딸 에브 퀴리다. 딸이 쓴 어머니의 電氣가 갖는 長點은 많다. 어머니가 겪은 일들을 딸만큼 仔細히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에브 퀴리는 보고 들은 것만이 아니라, 親戚과 親舊에게 어머니에 對한 이야기를 물었다. 또 어머니가 그들과 주고받은 便紙를 冊에 실으며 穩全한 마리 퀴리를 復元하기 위해 努力했다.

퀴리는 1867年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敎育者였던 집안의 다섯째 中 막내였다. 當時 폴란드는 러시아의 支配 아래 있었다. 10歲의 퀴리가 겪은 다음의 逸話는 植民 支配를 當한 歷史가 있는 우리에게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퀴리는 學校에서 歷史 時間에 폴란드語로 폴란드 歷史를 배우고 있었다. 갑자기 벨이 울렸다. 奬學官이 온다는 祕密 信號였다. 몇몇 學生이 폴란드語 敎科書와 空冊을 모아 寄宿舍에 숨기고 돌아왔다. 들이닥친 奬學官은 敎室을 調査하고 先生에게 學生을 指目해달라고 했다. 똑똑한 學生이던 퀴리가 指目됐다. 奬學官은 祈禱文을 외워보라고 命令했다. 當時 러시아 皇帝는 每日 러시아語로 主祈禱文을 외우게 함으로써 폴란드人들을 侮辱했다. 퀴리는 正確히 暗誦했다. 그리고 러시아 皇帝의 이름과 稱號 같은 質問에 對答했다. 奬學官이 나가자 퀴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和睦하지만 가난한 집안이었다. 퀴리의 兄弟들은 家庭敎師로 일해야 했다. 퀴리 亦是 家庭敎師 일로 돈을 벌며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民族 復興의 꿈을 꿨다. 祕密裏에 이뤄지던 ‘移動 大學’에서 工夫하던 17歲의 퀴리는 庶民層 女性들을 敎育하기 始作했다. 퀴리는 當時 自身을 ‘理想的 實證主義者’로 생각했다. 에브 퀴리는 이 時期의 퀴리를 祖國愛와 人類愛, 學問에 對한 憧憬이 뜨거운 熱情으로 엉켜 있었다고 記錄했다.

學問에 對한 憧憬을 實現할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當時 폴란드 大學에는 女性이 入學할 수 없었다. 工夫를 繼續하려면 프랑스 파리로 가야 했다. 퀴리의 언니 亦是 파리로 가서 醫學 工夫를 하고 돌아와 폴란드에서 醫師로 일하고 싶어 했다. 퀴리는 파리 소르본대학에 留學해서 知識에 對한 渴望을 解消하고, 폴란드로 돌아와 同胞들에게 知識을 나눠주는 敎育者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姊妹는 모두 파리에 留學 갈 돈이 없었다. 퀴리는 自身이 入住 家庭敎師 일을 하며 언니의 學費를 대고 돈을 모은 다음, 언니가 工夫를 끝내고 自身을 도와줄 것을 提案했다. 1885年, 18歲의 퀴리는 職業紹介所에서 入住 家庭敎師 자리를 求했다. 처음 바르샤바에서 求한 富者집은 失望스러웠다. 게다가 都市에 살면서 貯蓄을 많이 할 수 없었다. 퀴리는 報酬를 더 받을 수 있는 자리를 求해 시골로 떠났다.

퀴리는 入住한 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便 洞네 아이들을 모아 폴란드語 敎育을 하기 始作했다. 工場 圖書室에서 빌려온 社會學科 物理學 冊을 밤늦게까지 읽었다. 時代에 뒤처진 敎科書의 槪略 程度를 읽는 것에 不過했다. 時間이 흘러 入住 家庭敎師를 하는 집의 長男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男子는 父母가 가난한 家庭敎師와의 結婚을 反對하자 結婚을 抛棄했다. 그런데도 퀴리는 繼續 그 집에 머물렀다. 퀴리에겐 돈이 必要했다.

冊에는 當時 퀴리의 心境을 보여주는 便紙들이 실려 있다. 어떤 便紙에서는 어떻게든 只今을 헤쳐나가다 안 되면 世上에 安寧을 告하겠노라고 落膽했다. 어떤 便紙에서는 自身은 꿈을 抛棄했으니 언니와 오빠만은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諦念했다. 國民과 國家를 위해 일하겠다는 큰 뜻을 품었음에도 마을에서 12名쯤 되는 아이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게 고작이라고 恨歎하는 內容의 便紙도 있었다.

1890年 퀴리가 家庭敎師를 한 지 5年쯤 됐을 때, 언니로부터 便紙를 받았다. 다음 해에 結婚하게 됐으니 1年 後에는 파리로 와 함께 살면서 工夫할 수 있다는 內容이었다. 뜻밖에 퀴리는 이 提案을 拒絶했다. 퀴리는 “이미 꿈은 날아가 버렸고, 只今 갑자기 그 可能性이 다시 열린다 해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答狀을 썼다. 어린 少女의 꿈이 어떻게든 世上을 헤쳐나가려다 그만 시들어버린 것이다. 回復은 천천히 이뤄졌다. 퀴리는 入住 家庭敎師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敎師인 아버지와 知性을 刺戟하는 흥미로운 對話를 나누며 元氣를 찾아갔다. 移動 大學에도 다시 參與했다.

이때 퀴리에게 큰 기쁨을 준 것은 ‘農工業博物館’이란 이름의 硏究所에 들어간 일이었다. 러시아 當局을 속이고 폴란드 靑年들에게 科學을 가르치는 硏究所였다. 퀴리는 後날 이곳에서 여러 가지 實驗을 해보며 實驗에 對한 關心이 漸漸 커졌다고 回顧했다. 마침내 1891年, 女學校를 卒業한 지 8年, 家庭敎師를 한 지 6年이 지난 어느 날 퀴리는 언니에게 파리로 가도 되냐는 便紙를 보냈다.

두 次例 노벨賞의 成就

마리 퀴리는 123년의 노벨상 역사에서 두 번의 수상을 한 다섯 명 중 한 명이다.

마리 퀴리는 123年의 노벨賞 歷史에서 두 番의 受賞을 한 다섯 名 中 한 名이다.

그렇게 퀴리는 파리에 있는 소르본대학에 入學했다. 工夫할 機會를 얻었지만 가난은 파리까지 따라왔다. 언니의 집에서 나와 自炊房에 사는 퀴리의 生活은 荒凉했다. 가난한 留學生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7層 다락房은 몹시 추웠다. 퀴리는 뒷날 가난 속에서 工夫에만 邁進했던 이 時節을 무척 幸福하게 回想했다. 그만큼 퀴리의 學問에 對한 熱情은 대단했다.

1895年 퀴리는 피에르 퀴리와 結婚했다. 피에르 퀴리는 이미 소르본대학에서 硏究로 많은 業績을 쌓은 物理學者였다. 幸福하기만 했으면 좋았겠지만, 結婚으로 퀴리에게 많은 일이 加重됐다. 하루 中 科學 硏究에 8時間, 집안 살림에 2∼3時間을 割愛했다. 料理와 淸掃는 穩全히 自身의 몫이었다. 퀴리는 곧 妊娠했고, 아이를 키워야 했다.

旺盛한 硏究는 繼續되고 있었다. 퀴리는 博士學位 論文을 準備하면서 放射線에 注目했다. 우라늄 化合物이 적은 量의 에너지를 繼續 發散하는 것을 發見했다. 放射線 硏究는 當時 未知의 領域이었다. 피에르 퀴리는 物理化學 學校에 거듭 付託해 퀴리가 實驗할 空間을 얻었다. 實驗을 거듭한 結果 퀴리는 새로운 元素 ‘라듐’을 發見한다. 피에르 퀴리度 硏究에 合流했다. 퀴리는 이어서 다른 새로운 元素를 發見하고 ‘폴로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母國인 폴란드를 記憶하게 하는 이름이었다.

“物理學者는 언제나 自身이 硏究한 것을 모두 發表해야 해요. 우리의 發見에 商業性이 있다 해도 그것은 偶然일 뿐이니 우리가 利用해선 안 돼요. 게다가 라듐은 병든 사람을 治療하는 데 效果가 있는걸요. … 거기에서 利益을 얻다니 科學者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라듐이 癌 治療 等에 效果를 보임에 따라 商業的 價値를 가지게 됐다. 라듐 關聯 産業이 생겨났지만 퀴리 夫婦는 如前히 가난했고 허술한 實驗室에서 硏究했다. 라듐 抽出 技術에 特許를 받아놓으면 莫大한 富를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퀴리는 라듐에서 物質的 利益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퀴리가 생각한 科學의 精神이었다.

1903年 스웨덴 王立科學아카데미는 노벨物理學賞을 앙리 베크렐과 퀴리 夫婦에게 共同으로 授與하기로 決定했다. 放射線 現象에 對한 硏究 業績에 따른 것이었다. 퀴리 夫婦의 硏究에 國際的인 關心이 쏟아졌다. 그때가 돼서야 퀴리는 피에르 퀴리의 實驗室에 正式으로 出入할 수 있는 實驗主任에 任命됐다. 以前엔 實驗室에 젊은 女子가 있다는 걸 그저 默認했을 뿐이고 퀴리에게는 아무런 資格도, 手當도 주어지지 않았었다.

3年 뒤 피에르 퀴리가 馬車에 치어 世上을 떠났다. 에브 퀴리는 “아버지의 죽음 以後 퀴리의 어깨에 孤獨과 祕密의 망토가 永遠히 걸쳐졌다”고 썼다. 퀴리에게 피에르 퀴리는 사랑하는 男便이자 學問的 同僚였다. 퀴리는 피에르 퀴리의 죽음으로 空席이 된 實驗所長 자리에 任命됐고, 피에르 퀴리의 後任으로 소르본大學 講師 資格을 얻었다. 프랑스 高等敎育 史上 女性에게 職級이 附與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퀴리는 女性 科學者로 數次例 最初의 記錄을 세웠다. 1922年 퀴리는 女性 最初로 파리醫學아카데미의 會員으로 選出됐다. 이 亦是 쉬운 일은 아니었다. 會員 35名이 請願했고, 65名이 宣言文에 署名했으며, 候補者들이 모두 立候補를 辭退해서 可能한 것이었다. 퀴리는 1911年 1月 科學아카데미에 立候補해 1票 差異로 落選한 적이 있다. 같은 해 12月 라듐과 폴로늄을 分離하고 化合物을 硏究한 業績으로 두 番째 노벨賞(化學賞)을 受賞했음에도 女性이라는 理由로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國民과 國家를 위해 일하겠다는 信念대로 퀴리는 2個의 祖國, 프랑스와 폴란드를 모두 잊지 않았다. 프랑스에 第1次世界大戰이 勃發하자 퀴리는 負傷者를 治療하기 위해 放射線 車를 만들어 戰爭터로 달려갔다. 戰爭이 끝나고 母國 폴란드가 123年 만에 主權을 찾았을 때 퀴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라듐 硏究所를 세울 決心을 했다. 1925年 여러 團體와 폴란드 國民들의 도움으로 硏究所 建立이 始作됐다.

1934年 7月 4日 퀴리는 世上을 떠났다. 病은 高熱을 同伴한 惡性貧血이었다. 第1次世界大戰 當時 엑스線에 過多하게 露出됐고, 라듐의 放射線에 오랫동안 被爆되었던 게 原因으로 指目됐다. 1995年 퀴리는 피에르 퀴리와 함께 女性 最初로 프랑스가 國家的 爲人들을 安置해 기리는 팡테옹으로 移葬됐다. 뒤늦은 感이 없지 않았다.

‘中꺽마’ 마리 퀴리의 膳物

꿈이 시들지 않도록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해 自身의 길을 걸어가는 件 個人의 일이다. 이 꿈이 꺾이지 않도록 돕고 個人의 力量이 充分히 發揮될 수 있도록 하는 건 社會의 일이다. 個人으로서의 女性이 公的인 삶을 意味 있게 살아가기 위해 社會의 役割이 重要한 건 두말할 必要가 없다.

훌륭한 科學者였던 퀴리에게 障礙物은 너무 많았다. 男性 中心的 敎育制度와 經濟的 가난을 모두 넘어서야 했다. 또 女子라는 理由로 硏究를 위한 職責이나 社會的 地位를 얻는 것 自體가 어려웠다. 實驗室에서 엄청난 硏究를 進行하는 同時에 料理하고 淸掃하고 아이를 키워야 했다. 퀴리는 當時 家族制度와 社會制度가 賦課한 어려움을 默默히 堪當해냈다.

퀴리는 決코 꺾이지 않고 自身의 길을 開拓해갔다. 科學과 家族을 위해 自身의 生을 갈아 넣었다. 유럽의 邊方인 폴란드에서 태어난 퀴리가 걸어간 길은 以後 많은 女性 科學者에게 勇氣와 힘을 안겨줬다. 自身의 꿈이 꺾이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인 퀴리의 努力은 다음 世代 女性과 人類를 위한 膳物로 남았다.

노벨賞 受賞이 最高의 科學者가 되는 條件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노벨賞은 分明 영예로운 賞이다. 只今까지 노벨賞을 두 番 받은 科學者는 5名뿐이다. 퀴리가 最初로 노벨賞을 두 番 受賞한 科學者였다. 2023年 經濟學, 平和, 生理醫學, 物理學 分野에서 4名의 女性이 노벨賞을 받았다. 퀴리가 女性 最初의 노벨賞을 받은 지 120年 만의 일이다. 더디지만 歷史는 이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女들
1970年 出生. 연세대 社會學科를 卒業하고 同大學院 國語國文學科 碩博士 學位를 받았다. 지은 冊으로 ‘어른의 人生 授業’이 있다.


#마리퀴리 #다시萬難그女들 #성지연 #여성동아

寫眞提供 동서文化史 wellcomefoundation 
寫眞出處 다음映畫 노벨賞홈페이지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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